소설 '아리랑'(조정래 작)에서 본 김제
-소설 '아리랑' 발자취를 찾아서-
김제역(金堤驛)
일제가 일본으로 쌀 유출을 위해 호남평야목포항을 연결하는 호남선은 1910년에 착공하여 1914년에 개통한 철도로
호남선은 대전에서 논산익산김제를 거쳐 목포에 이르는 총연장 260.6km로 지난 1911년 대전연산간 39.9km가
개통된 이래 공사가 계속되어 1914년 1월22일 개통식이 거행됐다
이 철도는 경부선의 대전역에서 출발하여 비옥한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를 가로질러 목포항에 이르는 것으로
군사·정치적 목적이 강했던 경부·경의선에 비해 순전히 경제적 목적을 위해 건설되어 호남평야의 쌀을
목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기반시설이라는 것이다.
당시 김제시관내에는 김제역, 부용역의 2개소가 있었으며 김제역은 1912년 10월1일,
부용역은 1914년은 역사가 개원되었다
소설 속에서는, 전주-군산간 신작로공사가 마무리되는 시기인 5월에 호남선이 착공된다.
신작로공사 노무자들은 한시름 놀 시간도 없이 지체없이 철도공사장으로 투입된다.
호남선 철도공사는 오륙년 전에 조치원에서 군산구간을 통과 목포까지 측량을 마친 상태였으나,
일제가 군산 세력과 전주를 중심으로 한 미씨비시와의 세력간의 철도노선을 자기지역으로 이끌기 위한
이권싸움으로 지체된 것이다.
그러나 철길을 깔아 호남평야를 장악한다는 데는 그 목적이 일치하고 있으나
전주지역은 전주유생(양반)들이 전주통과를 반대하여 통감부 철도관할 부서는 원만하게 조정이 될 수 있도록
전주-군산 중간지점인 솜리에 철도역을 신설하고 군산은 호남선의 지선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한다.
이시기에 김제구간 철도가 완성되지만 철도공사장의 노동은 쌓아올려야 하는
둑의 높이부터가 달라 도로공사장의 노동보다 몇 갑절 힘들었다.
대전에서 목포까지 이어지는 호남선은 평야지대를 관통하면서 농산물을 손아귀에 넣고,
경원선은 산림과 지하자원을 장악한다. 한양을 중심으로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경원선은 입을 벌린
가위모양으로 반도 땅을 서로 엇갈리며 관통하도록 되어 있고 그 종착역은 모두 항구였다
금광(사금채취)
김제지역의 금광 및 사금채취지역은 모악산을 중심으로 한 산악 권과 모악산에서부터 펼쳐지는
평야부가 주로 채굴되는 곳으로 금산면, 황산면, 금구면, 봉남면 일원은 한국판 골든러쉬 지역으로
금(金)과 관련한 지명을 볼 때도 과거 금의 고장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금광과 사금채취는 경제적 여건과 채산성이 낮아 10여 년 전부터 채굴을 하지 않고
옛 이야기로만 전해지고 있는 실정이며 과거 노무자로 종사한 세인들도 지폐병이나 건강악화로
생존자를 찾아보기가 쉽지만은 않으나 70대 이상 노인들은 금과 얽힌 사연들이
오늘 일처럼 막걸리 판에서 화제가 되기도 한다
일제 때 일본은 한국경제수탈을 위해 전국의 지질조사와 광산조사를 폭넓게 실시하여 광산을 개발했으며,
특히 30년대 이후로는 금광과 광산을 제국주의 침략세력화 확산을 위해 집중적으로 개발하였다
당시 금구광산에서 노무자로 종사했던 금구면 양석마을 이판돌씨(76세)의 말에 의하면 그당시
김제지역 광산은 9군데가 있었고 징병을 피하기 위해 한국인(광산당 300-400명)이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었고 광산의 깊이는 지하 120m, 길이 700-1,000m 였다한다.
광산에서는 금맥을 찾은 광석을 채취하여 트럭으로 전주로 옮겨 철도를 이용 장항제련소로 이동시켜 금을 정제하였다.
사금채취는 함금사니(含金砂泥)를 넣은 다음 물속에서 전후좌우로 흔들면 가벼운 토사는 제거되고
무거운 금만 남게 되고, 대규모로 채취할 때는 채금선을 사용했으며,
사금은 기계를 동원하여 채취하여 광산처럼 많은 노무자가 필요치 않았다.
전해지는 일화는 사금을 입에 삼킨 후 대변을 본 후 물에 세척하거나 도시락을 먹지 않고
밥알 속에 숨겨 금을 모은 사람도 있고, 적발 시에는 일본인에게 갖은 고초를 당하고 즉시 해고되기도 했다 한다.
소설 속에서는, 일제는 쌀, 금, 목재, 목화를 수탈하기 위해 조선을 침범하여 많은 쌀과 금을 김제에서 수탈하게 된다.
김제는 금산을 중심으로 금성리, 금구리, 금평리등 금(金)자 섞인 지역이 많은 것을 볼 때 금맥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한다.
수천 년 동안 빗물에 씻겨 흙과 돌들이 아래로 흘러 내려와 쌓이고 쌓여 땅속에 묻혀 있기에 금이 쏟아졌다 하면
박은 돈에 몇 십 배 몇 백 배로 벌어들일 수 있으므로 바다는 메워도 사람 욕심은 못 메운다는 속담처럼
사금채취가 톡특 한 재미를 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금바람이 일어 일제나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금광업이 떼돈을 번다는 소문으로 사금에 칠천 석 잽이 가 된 이동만은 일본인 우노사와와 동업을
하면서 작업장을 짓고 기계를 사들이고 수십명 인부들의 일당을 지불하는데 모든 재산을 쏟아 부어
사금채취를 하나 우노사와는 군산의 일본 주먹패, 경찰들의 사기행각에 놀아 만석꾼의 재산이라고
소문난 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사금을 캐기 위해 파 내놓은 흙더미 위에 쓰러져 숨이 끊어져 버린다.
사금판은 거칠기가 부두는 저리가라 한다. 광주(鑛主)끼리 이권을 다투다가 그에 연관된 주먹패들이
금산사 주지를 죽이는 사태가 벌어지는 판에 이동만이가 그런 살벌한 판에서 견딜 리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남겨 놓은 재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이승을 떠나면서 욕이란 욕은 다 먹은 이동만의 불행은 예정된 인생이었으며,
이동만의 아들 이경욱은 아버지의 떳떳치 못한 치부로 오랜 세월동안 쌓여 왔던 열등감과 수치스러움이
씻겨져 나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신작로(전군도로번영로)
1911년 일제는 한국지배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741km에 달하는 신작로를 전국에 만드는데
당시 우마차를 사용하는 우리 민족의 생활과는 무관하게 총독부의 치적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전시효과와 경제.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며 이 도로들은 주로 곡창지대를 항구도시와 연결시켜
한국의 곡물을 일본으로 쉽게 실어 나르기 위한 경제침략의 수단으로 이용된다.
넓은 신작로가 만들어지면서 우리민족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피해와 고초를 겪게 되고
헌병들 책상 위의 지도상에서 연필로 찍찍 그어져 속칭 "연필도로"라고 하는데
이 계획선에 걸리면 논·밭이건 집이건 그대로 헐려 아무보상 없이 빼앗기고 있어 곳곳에서 원성이 자자했다.
또한 도로건설은 거의 전부 인근 주민들의 강제노역으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 동원된
사람들은 점심제공도 받지 못하고 하루 종일 일하고 밤이면 길바닥에 쓰러져 자야 하는 형편이다.
전주와 군산을 잇는 26번국도 4차선 포장도로로 직선으로 40km나 뻗어 있다.
근대적 도로로 닦인 것은 1908년 10월로 우리나라 최초로 시멘포장도로이다.
소설속에서는, 전주와 군산을 잇는 도로공사가 한창이었다.
들판을 일직선으로 꿰뚫으며 뻗어 나가고 잇는 신작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이루며 일에 매달린다.
그들 사이에서 머리를 박박 깍인 사람들은, 가장 고된 일을 맡는다.
신작로는 전보다 네 곱절은 더 넓고 양쪽의 논들보다 한자 이상의 높이로
다져 올려져 흙에서 윤기가 나도록 단단하게 다져야 한다.
그위에다 손가락 굵기의 철근을 잘라 여러 모양으로 구부리고 얽어 철근판을 짜나간후
자갈을 뒤섞은 시멘트반죽을 퍼부어 넣는다.
그 시멘트 콘크리트길은 김제·만경평야의 한복판을 관통하면서 군산에서 김제로 뻗어 간다.
또한 신작로가 뚫리면서 전주와 군산의 내왕은 빈번해지고,
오가는 것은 모두다 발통 달린 것들이다. 달구지, 인력거, 승합마차 등 ...
그중에서도 소와 말이 끄는 달구지이다. 그 달구지들은 볏섬을 가득가득 싣고 군산으로 줄을
이어 추수가 끝나고 서너 달 동안은 달구지 행렬이 이삼십 리씩 이어지기가 예사이다.
이 볏섬들은 모두 군산에서 정미되어 일본으로 실려 가는 것이며,
볏섬을 부린 우마차들은 다시 일본 물건들을 실어 내다 장사꾼들에게 배달도 한다.
-김제 시민의 신문에서 가져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