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추억>
겨울이 되어 찬바람이 매서워지고 온 들이 온통 얼어있는 동안에도 시골 아이들에게 닥친 놀이에 대한 걱정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아이들에게는 단지 겨울은 겨울 대로 마치 절기에 맞춰 농사일을 진행하듯 정해진 놀이에 잘도 찾아 나섰다.
늘 일정한 물이 고여 있는 밤나무 골에 가서 얼음을 지치기도 했고, 적당한 바람이 부는 날이면 뒤 쪽 언덕에 올라 연을 날리기도 했다. 가까이에 있는 문씨네 선산이 있는 평평하면서도 적당히 굽이져 있는 마을 둔덕의 묘지 또한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
거기엔 적당한 거리로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 또한 요긴한 놀이의 활용 물이 되곤 하였다. 양 편에 있는 그 비석을 중심으로 편을 갈라 이름도 모를 몸싸움의 경기도 겨누었고
비석에 중심을 잡고 ‘말좆박기’라고 무르던 말 타기 놀이도 즐겼다.
그 땐 유독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며 놀이의 종류 또한 달랐다. 누군가 만약 사내 아이가 여자 아이들의 놀이에 가세해 노는 것이라도 발각될라치면 다음 날로 떠도는 낙서의 풍문은 감히 견디기 힘든 뼈아픈 후회를 안기기에 충분했다
< 째깐이 – 순돌이 삑 했다>
< 점순이 춘식이 자지. 보지>
어디 반반한 흙 담벼락이라도 지나치려면 무슨 대자보처럼 삐틀거리며 써진 낙서는 당사자의 확인 여부와 관계없이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쉽게 동네에 퍼져서는, 심지어 어떤 경우는 그 당사자랑 어울리는 것 조차도 꺼려 질 정도의 위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여자 애들이 방안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 대로의 놀이가 충분 했다. 우선 제일 흔한 게 고무줄 놀이였다. 양쪽 고무줄을 잡은 두 사람은 발목에서부터 시작 해서 오금팽이 그리고 허리, 목까지 고무줄을 넘는 사람에 따라서 그 줄 높이가 올라가곤 했다. 더러는 쩍쩍 벌려 올라가는 다리가 어쩌면 신기에 가까운 묘기 같기도 해서 괜히 심술이 난 남자 아이들의 좋은 표적이 되곤 했다.
동무들아 나와라
달맞이 가자
발 동작에 맞춰서 낭낭한 고무줄 노래가 그 흥을 더해가고 있을 때 몇 몇의 사내 애들이 불현듯 달려들어 그 고무줄 가닥을 자르고 도망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의 전과자에겐 대개 불문율처럼 여겨져 내려 온 어떤 내부 규율 하나 있었다.
그것은 대개 그 임무를 수행하는 사내 아이들이 적어도 그 고무줄 놀이 하는 여자군들 보다는 어리거나 힘에서도 밀리는 그런 경우에 속했다는 것이다.
“야, 너 잡기만 해라! 죽인다!”
갑작스런 방해에 화가 난 여자 중의 누군가는 꼭 이렇게 그 범인을 추적하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물론 결과야 중요치는 않았다. 그 고무줄을 자르고 도망치는 녀석이 잡히건 아니 건 그것은 어쩌면 나중의 전리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셈이다.
왜냐면 그것은 어쩌면 그 남자 아이가 비로소 동네 사내 아이들의 소속으로 정식 편입되기 위한 하나의 통관 의례의 하나로 여겨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 애들은 좀 굵고 단단히 꼰 새끼를 돌려 여럿이 즐길 수 있는 집단 줄넘기 놀이도 즐겼다.
바둑아 바둑아 땅을 짚어라
바둑아 바둑아 어깨를 짚어라
바둑아 바둑아 뒤를 돌아라
그들은 적당하게 땅을 치며 돌고 있는 새끼 줄을 따라 양 술래가 불러 주는 노랫말에 맞춰 그 속에서 땅도 한 번 짚고 폴짝 뛰었다가, 어깨도 짚었다가, 뒤로 돌기도 하는 나름대로의 묘기 아닌 묘기를 선보이며 놀았다.
그것만은 아니었다. 오자미는 또 다른 여자 아이들의 놀이 소품이 되었다. 대개는 자투리 헝겁 속에 모래를 넣어 만들었는데 조금 더 신경을 쓸 줄 아는 여자 애들은 그 속에 통 메밀을 넣기도 했다. 모래를 넣는 것 보다는 알맞은 무게 감과 적당한 부피에서 오는 감각으로 오자미 놀이를 하기도 했는데 세 개의 오자미가 두 손에서 오가며 노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나 또한 누나들한테 몇 번의 강습을 받은 적이 있지만 결국 성공 해내지 못하고 포기한 기억이 있다. 오자미 는 또한 다른 변형의 놀이로도 유용하게 쓰였다. 굳이 운동회 날 주머니 던지기에 이용하는 것 이외에도 일종의 오자미 피구가 그것이었다.
두 편으로 편을 가른 여자 애들은 직사각형을 반으로 자른 듯한 금을 긋고, 그 속에서 오자미를 교환하며 상대방을 맞춰 탈락 시키는 놀이인데 이 또한 흥미 거리의 시합이 되어 재미를 더해주곤 했다.
겨울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또 다르게 행해지는 놀이가 하나 있었다. 대개의 경우란 어린아이들이 불을 만지는 것에 대해 금기 시 했지만 이 시기만 되면 용납 되어지는 경우였으니 그 것이 바로 ‘쥐불 놀이’였다.
처음 시작은 대개 가까운 집 앞 논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른 들로부터 인정 받은 공식 불놀이의 시작은 대개 그랬다. 사각의 ‘남성 성냥’ 한 개비에서 시작된 불씨는 달려든 동네 아이들에게로 쉽게 번져 나가 집 앞 논두렁마다 멋진 불꽃을 피우며 퍼져 나갔다.
어느 새인가 그런 논둑이며 방천을 태운 불길들은 새까만 들을 만들기도 했지만 거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란 그리 오래 걸리질 않았다. 거기서부터는 좀 더 불에 대한 큰 모험이 시작되어지는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동네 아이들은 어떻게들 구했는지 평소 그렇게 구하기 힘들었던 빈 깡통들을 구해서는 깡통 돌리며 노는 불놀이의 시작이 된 것이었다.
황도며 백도 통조림 깡통이 주종이었는데 그 깡통 밑 부분이며 아래 옆 부분에 듬성듬성 못으로 구멍을 내고 양 가장자리에 철사로 된 끈을 매달아 그 속에 불씨를 넣고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불씨에 이용되는 재료에도 우열이 있었다.
불통의 불쏘시개 중의 최고는 단연 철도 레일을 받치는 침목이었다.
그 침목은 단단하기도 했지만 거기에 스며들어 있는 적당한 유지가 불 길을 일으키는 데 더 없이 좋은 재료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좋은 재료가 된 만큼 구하는 데 또한 쉽질 않았다. 우리는 훌륭한 불놀이의 밤을 위해 이 최고 재료인 침목의 잔 조각을 구하기 위해 종일 짚 앞의 철길을 헤집고 다니곤 했다. 그렇게 헤집다 보면 드물게 보이는 침목 쪼가리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철 길을 받치고 있는 침목 중에 금이 가고 쪼개지기 쉽게 된 침목의 손상을 부추기는 일까지 도맡아 했던 셈이다.
아무튼 어렵게 이뤄 낸 침목 쏘시개는 겨울 밤 깡통 돌리기의 진수를 맛 보게 했다.
깜깜한 겨울 저녁은 이런 불놀이로 장관을 이룬다. 먼저 쏘시기를 다 닳은 친구들은 마지막 재를 깡통과 같이 날려 하늘로 쏘아 올리곤 했는데 이때마다 잔잔하게 퍼지며 밤 하늘에 곡선을 긋고 떨어지는 불꽃은 천상 밤하늘의 별들 만치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곤 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이런 불놀이는 들에 남은 해충을 박멸 한다는 정의 효과를 가지고 공인 된 놀이로 인정되어 졌지만 가끔은 빗나간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마을 회관 앞에 서 있는 종 나무(길죽한 쇠종이 결려있는 큰 팽나무를 우리는 이렇게 불렀다) 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연신 쏟아져 나왔다. 이미 마을 사람들은 이 종소리의 다급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종소리의 급박함에 대한 자세한 내막까지는 짐작 할 수 없었기에 듣는 대로 누구든 그 종 나무를 향해 기웃거리면서도 어던 불길한 징조를 떨쳐 버릴 수는 없는 표정들로 쳐다 보고 있었다.
어쩌면 종소리와 동시에 연거푸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불이야! 불! 때동구리에 불이요! “
“마을 사람들은 언능 바케스 들고 언능언능!”
종 소리에 묻힌 그 외침이 그래도 종소리와 종소리 사이사이로 비집고 새들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그 뜻을 바로 전달 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가끔씩 있었던 동네 화재에 도원 되었던 사람들은 쉽게 알아 차리고 바쁜 걸음들을 재촉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벌써 때동구리라고 불리는 곳은 우리 마을에 편입은 돼 있었지만 동네에서는 1킬로쯤 산으로 오르는 바로 뒷산 길목에 자리한 독립된 가옥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혹은 무엇이 화재의 발발 원인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벌써 연기는 뒷산 높이만치 피어 오르고 있었다.
아낙들은 연신 ‘아이고, 그 여편네 또 얼맨치로 걱정일까.’ 하면서 자기 일이나 되기라도 하는 듯 잔뜩 걱정들을 품으며 숨을 겨워하며 오르고 있었다. 나도 몇몇의 마을 또래들과 함께 그 불길을 향해 헐레벌떡 뛰었다. 아마 얼른 가서 불을 꺼야 한다는 사명감 보다는 얼 가서 그 불길의 상황을 살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길게 늘어선 때동구리로 향하는 화재 진압 지원군들은 긴 줄로 늘어져 있었다.
외줄로 선 산으로 향하는 길을 향해 우리들은 잰 걸음의 아낙들을 젖히고 앞으로 앞으로 달리다가 이웃 마을의 장정들이 가로 막은 외길에서야 우리는 그 뒤를 밟아 산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아이고, 힘든거!”
누군가 무릎에 손을 받히며 오르면서 개념 없이 하는 소리처럼 한 마디 하기도 했다.
“허허, 저 오가 놈도 다 되어 부렀는 갑다.”
개념 없는 소리에 농하는 소리로 누군가 맞받아 쳤다.
“야, 네놈도 성님 나이 되어 봐라! 이놈아” 하고는 뒤 따르며 농을 하는 장정을 향해 한 대 내지를 흉내를 내면서 되 받았다.
“허허, 요놈 보게. 지 힘 붙이단 소리는 안허고, 맥없는 지 놈 물팍 타령일세”
“그래 이까짓 깔꾸막 하나 오른 것이 어디 니 마누라 오르는 것만큼 힘드냐?”
“에끼 이놈이. 성님헌테 못헐 소리가 없네.”
그 긴박한 산행이면서도 손에 쇠스랑이며 양푼 등을 이리저리 옮겨 잡으면서 맘으로는 여유를 부리며 그렇게 오르고 있었다.
때동구리 집에 다 다가갔을 때는 이미 불길은 사그라지고 있었다. 다행하게도 불길은 본가와 사랑 채를 피해 은행나무가 바로 옆에 있는 돼지 막을 태웠을 뿐인데 아마 그 외양간의 화재는 뒤편으로 붙어 있는 방죽 길을 따라 타고 온 불길 때문 임에 틀림 없어 보였다.
이만하면 참으로 다행인 것이다. 부산하게 올랐던 동네 사람들은 마치 그 산골 계곡의 시원한 약수나 먹으러 올라왔던 사람들마냥 뉘어진 대나무 줄기를 타고 흐르는 산골 물에 바가지를 대고는 줄지어 마시고 있었다. 나도 가쁜 숨을 잠잠하게 가누며 시원한 그 물로 목을 적셨다. 그리고는 그 때서야 그 외양간 바로 옆으로 아직 잔 불씨에서 피어나는 연기가 가까이 선 은행나무 위에 있는 까치 집을 향해 피어 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행 이라 여겼다. 빈 까치 집일지 모르지만 이 정도의 불을 피해 무사한 그 까치집의 행운에 괜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들의 그 해의 불놀이는 이런 사건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마을 어른들은 때동구리의 화재가 필시 우리들의 불장난이 도화선이라고 믿었다. 우리 또한 그런 정황에 부인만은 할 수 없었다. 아직 어린 영혼들이지만 누가 그 불씨의 단초인지도 어쩌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도 그 일에 대한 발설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의 실수였다고 인정 했기에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비로소 우리들은 그 해의 불놀이를 더는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런 결과에 어느 누구도 토를 다는 아이들은 없었다.
첫댓글 글 쓰니라고 애쓴다.....현호야! 손가락 안부러지게 살살혀? 잘보고 있응깨...
ㅎㅎ. 이거 몇 되지 않은 독자 덕에 쓰긴 쓴다만, 서툰 타자에 손가락 아픈 것 보다는 소재가 고갈 되어...점점 소설을 쓴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