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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학신(梁學臣)의 외조부 이경익(李景翼)은 이종생(李從生)의 후손이며 고조부는 이홍원(李弘元)이고 5대조는 청양에 입향한 이관(李瓘)인데 이관(李瓘)의 아들인 이효원(李效元)이 대북파를 숙청한 소북파의 중심인물이었다. 양윤하(梁㣧夏)의 현손 양종복(梁鍾福)이 작성한 양찬(梁瓚)의 자손 세계도에 의하면 양윤하(梁㣧夏)의 넷째 아들은 양계(梁棨)인데 배위(配位)는 함평이씨(咸平李氏)이며 진사(進士)를 지낸 이경익(李景翼)의 따님으로 등재하였다. 함평이씨 족보에는 이경익(李景翼)이 현감(縣監)을 지냈다고 등재하였지만 동일인이 분명하고 사마시에 합격하고 현감을 지냈을 것이다. 즉, 양윤하(梁㣧夏)의 넷째 아들이며 양학신(梁學臣)의 아버지인 양업(梁業)의 초휘(初諱)는 양계(梁棨)이었다. |
양찬(梁瓚)의 자손 세계도에서 빠진 인물이 있는데 양명하(梁命夏)이다. 양명하(梁命夏)의 배위가 광주이씨(光州李氏)인데 광주이씨 갑진보(1724년)를 통해서 그 계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실제의 계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양찬(梁瓚)의 장손(長孫)은 양윤평(梁允平)이지만 적자(嫡子)를 두지 못해 4촌 양윤의(梁允義)의 아들을 양자로 세운다. 그 이후로 양윤평(梁允平)과 양윤의(梁允義)의 자손들은 계보를 수호하기 위해 양자를 빈번하게 오고갔다. 양윤하(梁㣧夏)와 양명하(梁命夏)의 혈손적 관계는 6촌이었고 양윤하(梁㣧夏)는 양찬(梁瓚)의 주손(胄孫)이었고 양명하(梁命夏)는 3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낸 양윤의(梁允義)의 주손(胄孫)이었다. 양명하(梁命夏)가 적자(嫡子)를 두지 못해 양윤하(梁㣧夏)의 넷째 아들 양계(梁棨)를 계후(繼後)로 세워서 3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낸 양윤의(梁允義)의 주손(胄孫) 계보를 잇게 하였다. 양명하(梁命夏)와 양윤하(梁㣧夏)의 증조부 양립(梁岦)의 배위(配位)는 전주유씨(全州柳氏)이며 양립(梁岦)의 처조부는 유영경(柳永慶)이다. 유영경(柳永慶)은 영의정을 지냈고 소북파를 만들었으며 함평이씨 이효원(李效元)이 대사간(大司諫)을 지내면서 소북파에 가담하여 유영경(柳永慶)과 함께 대북파를 탄핵하였고 광해군을 축출하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하였다. 즉 양찬(梁瓚)의 자손이 소북파의 중심가문과 혼맥이 연결되어 있었다. |
광주이씨 갑진보(1724년)에 의하면 양명하(梁命夏)의 배위(配位)는 광주이씨(光州李氏) 이이만(李頤晩)이 따님이다. 이이만(李頤晩)의 아버지 이후징(李厚徵)은 과거에서 세 번이나 장원하였고 이후징(李厚徵)의 아들 이시만(李蓍晩), 이이만(李頤晩), 이의만(李宜晩)의 3형제도 과거에 급제하였다. 광주이씨 갑진보에 의하면 양명하(梁命夏)의 아버지는 양만(梁曼)이고 아들을 두지 못해 양윤하(梁胤夏)의 아들 양계(梁棨)를 계자(繼子)로 세웠다. 양찬(梁瓚)의 주손(胄孫) 계보와 완전히 일치한다. 양명하(梁命夏)의 처백부(妻伯父) 이시만(李蓍晩)은 서인의 거두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 사사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일으켰다. 혼맥이 모두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이제 양명하의 삶을 추적해 본다. [조선왕조실록 1717년 5월 20일]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양명하(梁命夏)는 고조·증조·할아비·아비 때부터 첫번째 이이와 적이 되어 정여립을 빚어내고, 두번째는 성혼과 적이 되어 정인홍을 빚어내고, 세번째는 송시열·송준길과 적이 되고 윤휴·허적(許積)을 빚어냈습니다. 동인과 서인이 분열할 때 정여립은 동인이었으니 양명하의 가문은 동인이었고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이 분열할 때 정인홍은 북인이었으니 양명하의 가문은 북인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북인이 몰락하자 북인의 후예들은 남인에 위탁하였는데 허적이 남인이었다. 윤휴는 서인이었고 서인은 남인을 제거하려는 노론과 남인과 협력하려는 소론으로 분열하였는데 노론의 거두는 송시열이었고 소론의 거두는 윤휴의 아들 윤증이었으니 양명하의 가문은 북인의 후예로 남인과 협력한 가문이었다.
양명하(梁命夏)의 자(字)는 여수(汝受)이고 병진년(丙辰年1676년)에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양만(梁曼)의 아들로 태어났고 거주지는 광주(廣州)이며 어머니는 돌아가셨다(엄시하:嚴侍下). 영조가 장희빈의 아들인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고 판단한 조선의 민중 20만명이 1728년 무신년에 거병하였다. 양명하(梁命夏)는 집안 사람을 이끌고 무신의 난에 가담하였고 소북파의 대표적 명사이었기 때문에 무신의 난에 가담한 경기 일원 사대부 집안의 명부를 들고 있었는데 이 화를 제거하기 위해 자살을 하며 생을 마감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인물이다. 무신의 난이 진압된 이후 양명하(梁命夏)의 자취는 사라졌지만 무신의 난이 일어나기 4년 전에 광주이씨 갑진보(1724)가 편찬되었고 광주이씨의 사위이었던 양명하(梁命夏)는 광주이씨 갑진보를 통해서 삶의 자취를 남겼다. 이후의 광주이씨 족보에서는 누락된다. [조선왕조실록 1728년 4월4일] "망명(亡命)한 도적 양명하(粱命夏)가 칼을 뽑아 스스로 목찔러서 춘천(春川) 땅에서 죽었습니다. 양명하의 종 문생(文生) 등이 공초(供招)하기를, ‘양명하가 정월(正月) 초승에 안주 병영(安州兵營)으로 가서 닷새를 묵고 경성(京城)을 향하여 돌아오다가 길에서 금부도사(禁府都事)를 만나자 행장(行裝)을 버리고 달아나 춘천의 사탄면(史呑面)에 숨어 말하기를, 「내가 남의 말을 듣고 그릇 행동한 일이 있으니, 만약 붙잡혀서 승복(承服)한다면 다만 자손이 해(害)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을 많이 다치게 될 것이니, 차라리 자결(自決)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합니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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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와 의금부 국안(연좌안)에 기록된 양명하(梁命夏) 가족의 피해상황은 일치한다. 가족들은 과천에서 잡혔다. 오늘날의 군포가 조선시대에는 과천 이었고 3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낸 양윤의(梁允義)의 자손들 세거지가 군포이기 때문에 양명하(梁命夏)는 젊어서는 처향(妻鄕)인 광주에서 살았고 나중에는 선산 아래 군포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여 진다. 처(妻) 여애(女愛)와 첩(妾) 차애(次愛)는 함경도 홍원현의 노비로 삼고 서모(庶母) 말례(末禮)와 서제(庶弟) 보하(輔夏)는 길주목의 노비가 되었다. 남자는 서제(庶弟) 보하(輔夏)가 유일하다. 양명하(梁命夏)의 아들인 양계(梁棨)는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고 연좌안에 의거하여 손자인 양학신(梁學臣)이 태어났다면 노비가 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양계(梁棨)는 생부인 양윤하(梁㣧夏)의 아들로 다시 입적하고 양업(梁業)으로 개명하였다. 그러고 그 다음 태어난 손자들의 항렬은 신하 신(臣)자를 사용하며 낮은 자세를 취하였다. 그렇다고 모를 수가 있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무신의 난에 연루된 가문을 반드시 잡아들이겠다고 하였지만 사대부가의 혼맥이 얽혀 있었기 때문에 모두 잡아서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면 그 또한 정당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덮을 수 있을 만큼은 덮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문양공파 최고보인 정사보(1797년)와 병부공파 기미보(1799년)는 양명하(梁命夏)의 적손(嫡孫) 양학신(梁學臣)이 편찬하였다. 양학신(梁學臣)은 더 철저하게 무신의 난에 연루된 집안 사람들을 들어내 버렸을 것이므로 현존하는 계보만으로는 무신의 난에 연루된 집안을 추적할 수는 없을 것이나 양명하(梁命夏)와 같은 시대에 살았고, 당파가 같았고, 살았던 지역이 같았던 선조들의 후예는 여전히 같은 지역에 세거하고 있었고 또한 양자를 오고 가며 계보도 서로 지켜가고 있었다. 첫번째 집안 : 같은 지역(광주)에서 같은 지역(군포 당동)으로 이거한 남원양씨 두번째 집안 : 문경 산북으로 이거한 남원양씨 세번째 집안 : 천안 광덕으로 이거한 남원양씨 |
첫번째 집안 : 광주에서 군포 당동으로 이거한 남원양씨
양연(梁淵)의 손자 양사성(梁思聖)의 자손 [무진보:1808년]에 등재된 내용 휘(諱) 사성(思聖)의 자(字)는 양정(養正)이고 만력(萬曆) 무자(戊子1588년)에 과거에 급제(登第) 하였으나 과거를 취소시켰다(罷榜). 큰 아들 휘(諱) 일룡(一龍)의 자(字)는 우경(虞卿)이고 호(號)는 학포(鶴浦)이며 부사과(副司果)를 지내셨다. 과거에 장원하였으나(當登第居魁) 시험관(考官)이 미워하여 합격에서 빼버리니(惡而拔去)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遂不復應擧) 둘째 아들 휘(諱) 계룡(季龍)은 문장이 능숙하였고(能文章) 석주 권필과 함께 세상에 명성이 높았다(與石洲 權韠拜名世) 셋째 아들 휘(諱) 진룡(震龍)의 자(字)는 숙견(淑見)이고 호(號)는 학포(石湖)이며 신사년(辛巳生1581년)에 태어나셔서 진용교위(進勇校尉)를 지내셨다. 누차 향시에서 장원하였지만(累登拔解) 혼조 시대에(當昏朝) 과거를 그만두고(遂廢擧業)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종유하였다((從遊沙溪門) 여지도서의 경기도 읍지에 양진룡(梁震龍)은 다음과 같이 등재되었다.
눌재(訥齋)의 오세손(五世孫)이고 호(號)는 석호(石湖)이며 광해군이 모후를 폐할 때를 당하여(當昏朝廢母后時) 문을 닫고 3일 동안 통곡하고(閉門痛哭三日) 수십 편의 시를 지어 그 뜻이 새어나오게 하여 당시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겼다(作詩數十篇以洩其志時人危之) 사계(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고(受業於沙溪之門因) 본읍의 성산 남쪽으로 은거하고(屛跡於本邑象山之南) 성리학에 종사하여 안은봉 권석주 심석재의 제현과(從事性理之學與安隱峯權石洲沈愓齋諸賢) 경전을 토론하고 온 고을을 두루 교화하니(討論經傳化洽一境) 사림이 모두 향선생이라 칭송하였다.(士林咸稱鄕先生) 파주의 향현단에서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린다.(而坡州有鄕賢壇春秋享祀焉) 2017년 파주 유림에서 양진룡을 배향한 동현단에서 추향제를 올렸다. 수백년을 이어왔다. 권필과 안방준은 양일룡, 양계룡, 양진룡 형제와 교우한 인물이다. 안방준(安邦俊)은 고종4촌이다. 임란의병이었으나 광해군의 기용을 사양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서인 편향의 조정에 출사를 거부했다. 병자호란 때도 의병을 이끌었고 천거되어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권필(權鞸)은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광해군의 척신세력을 비난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고 유배길에서 죽었다. 양일룡, 양계룡, 양진룡 형제는 광해군을 지지 하지 않았고 인조반정 후 출사하지 않았던 점은 소북파의 정치적 행보와 일치한다. 양일룡 형제는 아버지의 제사를 받들 수 없을 만큼 가난하였고 안방준(安邦俊)이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은봉전서[안방준 문집] 선생의 내제(內弟) 양일룡(梁一龍)이 김포(金浦) 땅에 살았는데 가난하여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되자 선생은 호서(湖西)지방의 노비를 문서로 만들어서 영원히 주고 심부름을 시키게 하였으니 인척을 화목하게 대하는 의리가 이와 같았다. 증조부 양연(梁淵)은 도승지, 대제학, 대사헌, 병조판서 등의 청요직을 거쳤고 할아버지 양윤순은 일곱 고을의 지방관을 지냈으나 아버지 양사성이 과거에 합격하고도 누락된 이후 그 아들들의 일생도 똑 같았다. 입신을 위해 굽히지 않았고 아버지의 제사를 받들지 못할 정도로 궁핍하였다. 양계룡(梁季龍)은 1子 응기(應沂)를 낳고 응기(應沂)는 1子 우(佑)를 낳았다. 양응기(梁應沂)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데 군포 당동에 세거한 양중(梁仲)의 자손들은 양중(梁仲)의 초휘(初諱)가 양우(梁佑)이며 양계룡(梁季龍)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군포 당동은 무신혁명을 주동한 양명하의 혈족들의 세거지이다. 양명하는 처향인 경기도 광주에서 살았고 적자를 두지 못하자 본향인 군포 당동으로 이거하였다. 그런데 군포 당동에 세거한 양중(梁仲)의 자손들은 경기도 광주에 묘소가 있는 양응기(梁應沂)가 양중(梁仲)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양명하는 처향인 경기도 광주에서 본향인 군포 당동으로 이거한 소북파의 명사이다.
양계룡(梁季龍)의 형제들은 소북파와 정치적 행보가 일치하는데 군포 당동에 세거한 양중(梁仲)의 자손들의 주장처럼 양중(梁仲)이 양계룡(梁季龍)의 손자이라면 양명하와 함께 무신혁명에 가담하였던 것은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 무진보(1808년)와 백씨통보에 의하면 양중(초휘 양우)의 손자인 양수(梁樹)가 충민공의 자손으로 계후(繼後)가 되셨다. 봉사공의 혈손이었던 양익선이 양계룡의 동생이신 양진룡의 주손으로 계후가 되셨고 양익선의 아들인 양백과 증손인 양봉현이 충민공의 자손으로 계후가 된 인연도 예사롭지 않다. 또한 충민공의 선영이 있는 파주 부작골 아래 있는 양가터는 양진룡이 후학을 양성하던 곳인데 양진룡의 종조카 양응호가 양진룡에게 수학하고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양응호의 아들 양희가 봉사공의 자손으로 계후가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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