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가요산책 4
-조미미, 선생님
이승주 시인
1.
1990년 3월, 총각 선생님으로 밀양여고에 부임 했다. 밀양공고, 밀양고를 거쳐 다시 2005년 밀양여고에 부임하기 전 근무했던 밀양여고 그 5년 동안은 내 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가장 아름답게 보낸 내 인생의 축복이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겠지만 그때만 해도 여고에서 총각 선생님은 여학생들에게 곧잘 한때의 이성 감정의 대상이 되기도 하여, 나도 시를 쓰는 다감한 국어선생이란 것 말고도 단지 총각선생님이란 이유만으로도 적지 않은 학생들의 과분한 관심을 받았다.
수업시간이 되면 각 교실의 교탁 위엔 우유나 초콜릿, 비스킷, 음료수 같은 먹을 것들이 늘 빠지지 않고 놓였으며, 칠판 아랫부분의 분필과 지우개를 두는 받침 턱에는 색종이나 껌 포장지로 두르고 그 위에 하트 그림과 이름을 적은 분필들이 일렬로 죽 세워져 있곤 했다.
나를 위해 팬클럽이 조직되고, 오후 수업이 지치면 각 반의 회원들이 노래를 불러 주어 나의 원기를 다시 회복하게 해 주기도 하였다. 아침에 출근하면 며칠이 멀다할 만큼 핑크빛 쪽지를 받았으며, 퇴근할 때는 미처 짐작도 못한 조용한 학생이 “선생님을 사랑 합니다.”라고 쓴 꽃잎이나 잎새를 손에 건네주고는 달아나곤 했다. 나도 물론 그 여학생들을 다 사랑하였다.
삼학년 여름방학 보충수업 출석부 속에는 반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키도 서로 다른 이름들이 한데 모여 있습니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고 매미울음소리만 눈부신 물살로 흘러가는 5교시 국어시간, 나는 그 이름들을 하나씩 호명 합니다.
마침 종이 울 때까지 끈질기게 졸고 있는 이 순종. 전교에서 제일 많이 자는 백경순. 졸다가 지적받아 깜짝 놀라 책 읽을 적에 교실 가득한 졸음이 한 장씩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샘물 한 바가지 쏟아 붓는 현미경. “선생님 예, 있다 아입니꺼.” 그 목소리 사랑스러운 김재은. “선생님처럼 생긴 인형을 만들면 잘 팔리겠어예.” 재미스레 웃으며 달아나는 김득자. 그 저녁 밤 정문 오르는 서른여섯 계단 보안등 아래서 밀성박씨 재실 담벼락에 비치는 오월의 야경을 아직도 보느냐 KDJ. 모의고사 선적 상담할 때 새 휴지 반통을 눈물로 버리던 김민정. 물방울 머리띠 예쁜 전정은. 태극선을 졸며 흔들며 김윤련. 노란색 색감을 가진 박수희. 사과를 제일 맛있게 먹는 이은주. 가장 여운이 깊은 참한 조영옥. <우리 수퍼>집 정선희. 방학하던 날 푸른 댓잎을 따서 “선생님이 보고 싶을 질 거예요.” 건네주던 이인숙. 가방을 메고 일찍 돌아가는 이영임. 저만큼 혼자서 피어 있네 면장집 셋째딸 이영혜. 내 손 안에 조금 넘치는 OSJ. 목캔디 갑 속에 “내게 있어 사랑은 그대뿐이잖아요. 이 세상 어딘가에 그대가 또 있다면 슬퍼하지 않아요.” 노래 적어 주던 박영미. 언제나 여왕 심레지나. 그림동화 속의 백설공주 김은희. 가을물 위에 뜬 한 잎 고운 단풍 박혜정. 깨끗한 강 건너 서서 그 파란 바다 물결소리 선하도록 ‘가고파’를 잘 부르는 양지현.
이승주, [출석부]
2.
꿈 많은 내 가슴에 봄은 왔는데 봄은 왔는데
알고도 모르는 체 알면서도 돌아선 선생님, 선생님
아아, 사랑한다 고백하고 싶어도
여자로 태어나서 죄가 될까봐
안녕 안녕 선생님 이 발길을 돌립니다
부풀은 이 가슴에 꽃은 피는데 꽃은 피는데
보고도 모르는 체 모르는 체 돌아선 선생님, 선생님
아아 님이라고 불러보고 싶어도
여자의 마음으로 죄가 될까봐
안녕 안녕 선생님 멀리 떠나거렵니다
진짜 봄은 천지가 아니라 가슴에 와야 하는 것. 진짜 봄은 앞 뒷산이 아니라 가슴에 꽃이 피어야 하는 것. 春來不似春은 봄이 아니다. 노래의 화자인 “나”는 선생님도 나의 연정을 아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질문과 질문에 대한 대답의 성격이 아니다. 질문과 대답은 애초에 원초적 생리적 근원적 감정을 온전히 표현한다는 게 불가능하며 자칫 질문과 대답으로 인해 그 감정이 오해와 왜곡의 다른 방향으로 표출되고 전달될지도 모른다.
“나”는 열일곱 갈래머리 꿈 많은 여고생. “나”는 “꿈 많은 내 가슴에 봄은 왔는데 봄은 왔는데” “부풀은 이 가슴에 꽃은 피는데 꽃은 피는데” 선생님을 그렇게 연모하면서도 “여자의 마음으로” 선생님께 죄가 될까봐 연정을 고백하지 못하고 선생님을 떠나려 한다. 나의 연정을 알면서도 그 연정을 모르는 체하는 선생님을, 사모하는 선생님에게 차마 죄가 될 수는 없어 그 연정을 가슴 속에 묻어 두어야 하는 그런 연정보다 더 순결한 연정이 세상에 또 있을까. 연모하면서도 고백하지 못하고 끝내는 돌아서야만 하는 그런 연정만큼 더 애틋한 연정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체” 돌아서는 선생님의 마음보다 더 가슴을 휘감아오는 애틋함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애틋함의 깊이와 농도야 “내”가 더 할지 “선생님”이 더 할지 나로서도 짐작 못 할 일 아니지만, “나”는 여자로 태어난 죄라서 선생님을 님이라고 한번 불러보지 못하고, “선생님”은 선생님이기 때문에 “죄가 될까봐” 그 마음을 모르는 체하고 돌아서는 그 심정.
아, 사랑아, 네가 무엇이더냐. 사랑, 사랑, 사랑, 이성간의 사랑 중에 가장 순결하고 애틋한 이 사랑.
첫댓글 봄은 왔는데 내 가슴 속엔 겨울이다든 괴테의 첫 사랑에 대한 이별의 아픔도 좋지만, 홍우당 이승주 시인의 '여고 선생님' 적 그 분홍의 서정과 조미미의 두근거리는 총각 선생님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노래가락은, 그 어찌 좋지 않던냐 ! 얼마나 좋으셨을까 ? 하냥, 부러운 외형 홍우당. 흰 서리가 머리 위에 내려도 그대는 나, 시천 보다 더 천복을 누렸으니, 아아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