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청
신 영 이
우리 아파트 같은 동에 남편과 대학교 때의 절친한 친구가 살고 있다. 오래 만나다 보니 집사람들끼리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한번씩 들러 차도 마시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며 정을 쌓았다. 각자 직장에 다니느라 오랜만에 들른 친구의 집에서 생강차를 대접받았다.
손발도 따뜻해지고 감기에도 좋으며 면역력 높이는데 생강만 한 게 없다며 매일 생강차로 겨울나기를 톡톡히 하고 있다 한다.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지만 만들면 장기 보관도 되고 따뜻한 물에 태워 먹기만 하면 되니 생강청만 한 게 없다며 자랑한다. 도무지 저걸 어찌 만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올 때마다 마실게.’라고 짧게 한마디 하고 따뜻한 찻잔에 입을 댄다.
맵싸한 생강향이 입안에 퍼지면서 첫째 아이 가졌을 때의 기억이 소환되었다. 난생처음 하는 입덧이 너무나 심해 누워 지낸 달만 3개월, 몸무게는 십여 킬로그램이나 빠져 한약과 생강 달인 물로 속을 달래며 지내온 시간들이 생강향에 젖어 떠올랐다. 먹고 나면 또다시 구역질이 나는 건 아니겠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며 한 모금 홀짝 넘겼다. 다행히 속도 편하고 따뜻하게 퍼지는 기운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남에게 주지 못할 정도로 아깝다던 생강청을 가져가라며 조그마한 용기에 담아준다. 갈 때마다 생강차를 대접받고 내 마음에 콕 박혀 버린 생강, 나랑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갓 수확한 싱싱한 생강이 내 품에 왔다. 시댁에서 농사지은 생강을 나눠 줄 테니 실패해도 한번 만들어 보라며 언니에게서 전화가 와서 가지러 갔다. 모래흙이 붙어있는 노란 생강은 어느 것 하나 못난 게 없이 실하고 속이 꽉 차 황금빛 보물을 보는 듯했다. 한 박스에 가득 담긴 생강을 덜어주는데 해보지 않은 요리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더 가져가라는 걸 마다하고 반 박스 정도 담아왔다.
키운 정성과 준 성의를 생각해 요리조리 블로그를 찾아 정독한 후 친구에게까지 전화해서 만드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 듣고 메모했다. 펼쳐진 신문지에 생강을 부었다. 막상 꽤 많은 양을 보고 ‘앗! 나의 실수’라며 살짝 후회도 했지만, 추위를 많이 타는 나랑 잘 맞고 겨울 차로 이것만 한 게 없다는 걸 알기에 묵묵히 생강을 까고 씻고 채반에 널었다.
저녁 먹고 난 뒤 시작한 일을 새벽 가까이 되어서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나하나 껍질 까는 일은 고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편 썰기를 해 휴롬(착즙용기계명)에 갈아 즙을 냈다. 섬유질이 많아 사과처럼 큼직하게 썰면 오히려 기계 작동시간이 두 배가 된다 하여 공들여 편을 썬 것이다. 그다음은 즙을 낸 생강을 실온에 3~4시간 두어 녹말 분리 작업을 해야 했다. 그래야 생강 특유의 아리고 쓴맛을 낮춰 준다고 적힌 글을 본 것 같다.
분리된 노란 즙은 노랑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천에다 염색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나머지 작업을 이어갔다. 딸기잼처럼 갈색 설탕을 넣어 조리기만 하면 된다. 어느새 막바지로 치닫는 손길이 부산하다. 급한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2~3시간 약한 불에 졸인 뒤 완성된 청을 시골집에 한 통, 엄마에게 한 통, 우리 집에 한 통 이렇게 나눠 담았다. 3년 전에 고추장을 배워 만들고 난 뒤 맛본 때와 같은 성취감을 느꼈다. 한 해 먹을 김장 만들어 놓은 듯 뿌듯함이 드는 건 덤으로 얻은 소득이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물에 생강청을 넣어 본다. 그 많던 생강이 찻잔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노곤했던 몸이 차 한 잔으로 녹아 내린다.
주방을 정리하고 유리통에 넣어진 갈색빛 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불과 몇 시간 전에 번거롭고 고된 일이라 생각했던 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껏 표현해 보지 못한 마음을 가까운 지인들에게 생강청으로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김에 생강을 더 주문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생강청을 새롭게 만들어 선물로 주었다.
받는 이들도 뜻밖의 선물에 감동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받기만 하면서 살아온 내가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무언가를 줄 수 있음에 감사했던 시간들이었다.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겨울 나시라는 맘까지 살짝 얹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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