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 소시집 리뷰>
삶과 죽음의 기호를 푸는 두 가지 방식
김백겸·리호 시인의 신작시
김정수(시인)
순환과 기호의 비밀 – 김백겸의 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순환(cycle)은 한 지점에 머물지 않고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이나 인생의 허무, 깨달음을 의미한다. 동양에서의 순환은 불교에서의 윤회나 주역에서의 음양오행과 같이 종교적·철학적인 심오한 경지를 말한다. 반면 서양의 순환은 해석학의 이해구조를 바탕으로 한 심리학적 접근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부분에서 전체를, 전체에서 부분을 이해하는 것이 순환이다. 이 둘의 교집합에는 인체나 자연의 순환이 자리 잡고 있다. 김백겸 시인이 첫 시집 『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의 「자서」에서 “나뭇잎으로서의 내 꿈은 나무 전체의 꿈”이라고 정의한 것을 상기해보면 서양적 순환에서 동양적 순환으로 인식의 폭이 확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강변 자전거 도로를 질주하는 사이클(cycle) 인생이여
하늘 아래 바람이 불고, 길가에는 난해한 기호처럼 쑥부쟁이 꽃들이 피었는데 지하세상의 황천처럼 금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뭉게구름의 그림자가 바닥에 잠겨있는데 몽상의 코끼리가 밀림을 향해 걸어가다가 무너지는 환영을 보여주면서 금강은 흐르고 있습니다
세찬 바람은 호른 악기처럼 구부러진 한낮의 시간을 돌아서 몸도 없고 정신도 없는 허공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 「대전 금강은 청주 미호천과 만나 세종 합강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부분
순환은 에너지가 정적이지 않고 동적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 이 움직임은 자의냐 타의냐에 따라 많은 차이와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타의에 의한 움직임이 구속이나 학대라면, 자의에 의한 움직임은 자유와 해방을 상징한다. “금강변 자전거 도로를 질주”하고, 태평양 상공을 날고,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여행한다는 것은 영혼의 자유로움보다 A 지점에서 시작해 B 지점을 거쳐 다시 A 지점으로 돌아오는 순환과 다르지 않다.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이 사이클은 종교적·철학적이라기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우로보로스(Ouroboros)나 클라인(klein) 병, 뫼비우스 띠에 더 가깝다. 하지만 시인은 A 지점에서 B 지점의 순환에 “인생”이라는 교차점을 만들고 “사이클(cycle)”의 중의성을 활용하여 존재론의 영역으로 시를 확장시키고 있다. 자전거의 질주가 A 지점에서 B 지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순환이라면 대전의 금강(지류)과 청주의 미호천(지류)이 세종시에서 합강(줄기)으로 합쳐져 바다(뿌리)로 흘러가는 ‘y’자 양상을 띤다. 물론 자연의 순환이라는 넓은 의미에서는 이 둘은 다르지 않다.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면서 길가에 핀 “쑥부쟁이 꽃들”에서 “지하세상”의 “난해한 기호”을 읽고, 물에 잠긴 “뭉게구름의 그림자”에서 “밀림을 향해 걸어가다가 무너지는” 코끼리의 환영을 보고, “세찬 바람”에서 “몸도 없고 정신도 없는 허공으로 가는 길”을 발견한 시인의 혜안과 사유가 가을처럼 깊음을 인지할 수 있다.
KAL기가 이륙을 하자 인천공항의 건물과 길들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보잉 747기는 검은 황새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서울의 건물과 길들은 문명의 기판 위에 세워진 거대한 회로였는데 학교와 공장과 아파트가 회로 안의 콘덴서와 칩들처럼 대지에 박혀 있었다
비행기 고도가 올라가자 메가시티 서울은 추상으로 사라져 점이나 선분으로 나타나는 중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라는 명제는 관계의 거리에 관한 해석이었고 ‘인간의 문명은 기호의 집합이다’라는 생각이 뜬금없이 올라오는 중
인간의 도시는 퍼지 네트워크의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태양의 도시’라는 몽상
메가시티 여행자가 몽상을 불태우니 인간의 문명은 기호와 에너지의 회로에 갇혀 돌아갔다
지상의 도시에는 길이 거미줄처럼 뻗었고 상하수도의 배관과 전기통신망을 흐르는 물과 불의 에너지가 순환을 계속했다
공장과 회사는 상품과 용역을 생산하고 폐기된 가전제품은 종말처리장으로 실려갔다
아이들은 산부인과 병실에서 태어나고 수명이 다한 노인은 영구차에 실려 화장터와 공원묘지로 갔다
메가시티 여행자가 생각해 보니 세상은 불도(佛道)인지 노도(老道)인지가 돌아가는 퍼지 회로의 다차원 네트워크라는 뜬금없는 몽상
- 「메가시티 여행자는 태평양 상공을 날아가고 있네」 부분
위에 언급한 시가 금강변을 달리며 본 수평적 세상이라면 이 시는 서울 상공에서 내려다본 수직적 세상이다. 수평이 현실이라면 수직은 비현실이다. 수평은 같은 눈높이에서 안정적인 심리상태를 보여준다면 수직은 상승과 하강, 불안한 심리상태를 반영한다. 바퀴로 지상에 연결된 속도와 허공에 뜬 속도는 “지도”와 “영토”, “인간의 도시”와 “태양의 도시”만큼이나 이질적이다. 지상에서 바라보는 도시는 현실이지만 공중에서 여행자가 바라보는 도시는 “몽상”이다. 인천공항을 이륙해 서울 상공을 지나는 시인의 조감도는 거대한 전자회로기판으로 움직이는 “메가시티”다. 수평과 수직의 교차점에는 “기호”가 존재한다. 그 기호를 해득하는 일은 시인이 경작한 시를 섭취하는 것과 같다. 시인의 관심은 평야나 플라타너스, 별, 물고기와 같은 자연에서 “퍼지 네트워크의 프로그램”이나 상하수도의 배관, 전기통신망 등으로 옮겨간다. 자전거, KTX, 비행기와 같은 교통수단은 이 둘을 조망할 수 있는 매개역할을 한다. 조감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학교와 공장과 아파트”가 집적 회로·저항기·콘덴서 따위의 전자 부품, 그 부품들 사이를 “건물과 길들”이 배선으로 접속시키는 듯하다. “비행기 고도가 올라가자 메가시티 서울은 추상으로 사라져 점이나 선분으로 나타”난다. 거대도시가 점이나 선분으로 나타났다 사라짐은 “뜬금없는 몽상”처럼 비현실적이라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내가 IMF 때 컴퓨터 학원 파산 후 수학 과외선생으로 근근이 풀칠하던 시절
학인이 집 팔아 메인 빚을 정리하고 잔여 빚을 청산하는 인생을 불평하던 시절
친구 아버님이 결혼 전 사주를 봐주시면서 “시인 성공보다는 재물에 인연이 있어, 나중에 돈 벌겠네”- 놀라운 예언이 틀린 것을 불평하던 시절
친구 아버님이 원자력연구소 삼십년 회계부서 자금관리를 학인의 수입으로 잘못 판독한 해석을 불평하던 시절
갑자기 서울 원자력병원 파견에서 대전 연구소로 복귀하게 된 학인은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하이텔 역학동호회에서 알게 된 자미두수 전문가를 사무실로 초대했지
- 「화참(畵讖)은 매화역수(梅花易數) 꽃잎처럼 금강변 산책길에 떨어져 있네」 부분
꿈을 깨어라, 늙은 소년아
네 인생의 블랙박스는 검은 자물쇠의 암호로 잠겨있다
너는 스마트폰의 일정을 체크하며 자본시장의 궤도와 회로를 쳇바퀴처럼 돌아간다
기차의 전복만이 네 인생을 녹물이 두꺼워지는 삶의 감옥으로부터 구할지 모르지
KTX의 쇠바퀴가 부르는 노래가 카산드라의 절규 같기도 하고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Moerae)가 물레를 돌려 뽑아내는 행복과 저주의 노래 같기도 하구나
종착역이 어디인지 모르는 스페이스 여행자가 창밖을 보니 KTX는 푸른 산의 초록 울타리를 지나 캄캄한 터널 구간으로 진입하네
- 「소년이 커서 늙은 소년이 되었지」 부분
첫 시집 「자서」로 돌아가 보자. 시인은 “이 꿈이 내 주위의 다른 나뭇잎을 흔들고 온 숲을 흔들어서 언젠가는 거대한 폭풍으로 온 세상을 흔들 것을 약속”했다. 도지사가 타는 “검은 지프”를 타고 입신양명하여 금의환향하는 꿈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인으로 “죽은 후 호랑이 가죽 같은 이름”을 남기고 싶지만, 인생은 “잠깐 빛난 얼굴이었다가 세찬 시간의 바람과 함께” 저물었다. 물론 아쉬움이다. 시인은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다. 긴 제목 「화참(畵讖)은 매화역수(梅花易數) 꽃잎처럼 금강변 산책길에 떨어져 있네」가 상징하는 것은 꿈도 펼치기 전에 꽃잎이 졌다는 것이다. 화참의 참(讖)은 머지않아 닥칠 일의 조짐을 말하고, 화참이라 한 것은 북송의 소식(蘇軾)에 의하면 “시와 그림은 원래 하나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관매수(觀梅數)라고도 하는 매화역수(梅花易數)는 삼라만상의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장차 발생할 수 있는 일의 추세와 결과를 해석한다. 즉 “시인 성공보다는 재물에 인연이 있어, 나중에 돈 벌겠네”라는 예언이 “틀린 것을 불평하던 시절”에는 시인으로도 성공하지 못하고, 재물도 모으지 못했음을 뜻한다.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해하던 학인, 즉 시인은 “자미두수 전문가를 사무실로 초대”해 사주 해석을 부탁한 결과 올해의 운수는 대운이나 “현실이 화려해질 가망은 별로 없으니 시라도 화려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화려한 시를 위해서는 먼저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운명론이나 현재의 삶을 제약하고 있는 문명의 이기, “자본주의 궤도와 회로”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영혼이 자유롭지 못하면 삶은 운명이라는 순환고리에 매이고, 시는 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삶의 비밀이 담긴 “검은 자물쇠”로 잠겨 있는 “인생의 블랙박스”의 암호를 풀 수 있는 것도, “늙은 소년의 운명을 밟고 있는” 무서운 무당의 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시인 자신이다.
2. 백지의 슬픔 - 리호의 시
색(色)은 정직하다. 하나의 색은 변형되지 않고 그 색깔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두 개 이상의 색이 섞일 때, 자신의 색깔은 점차 옅어져 종국에는 다른 색깔이 되고 만다. 크레파스에 들어 있는 색을 다 섞으면 무슨 색이 나올까. 당연히 검정이다. 검정은 명도(明度)는 있지만, 색상(色相)과 채도(彩度)가 없는 무채색이다. 까맣게 덧칠해진 색을 분해해 제자리로 돌려놓으면 다시 백지만 남는다. 시의 언어도 색칠하기와 다르지 않다. 다 하지 못한 말이나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언어의 덧칠을 한다. 마음까지 색칠하면 파악하기가 더 어렵다. 파랑과 노랑이 만나면 초록이 되는 단순한 배색이 아닌 색의 조합에 이물질을 가미해 존재성을 미로 속에 감춘다. 시인 리호가 설계한 미로를 탈출하려면 시를 ‘인수분해’하든가 덧칠한 색깔을 하나하나 걷어내야만 가능하다. 불가능할 것만 같은 분해작업이 끝나고, 백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 입을 틀어막고 오열하는 한 사람이 보인다. 모든 슬픔에는 이유가 있다. 가령 황지우 시인의 「묵념, 5분 27초」(『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라는 시는 내용은 없고 제목만 있다. 제목 아래 텅 빈 공간은 5분 27초 동안 묵념하는 경건한 시간이다. 왜 묵념을 해야 할까. 답은 5분 27초에 들어 있다. 5분은 5월, 27초는 27일을 의미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을까. 더 정확히 1980년 5월 27일 남도땅 광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날 전남도청에 남은 시민에 대한 강제진압이 있었고,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시인이 왜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는지,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공간에 얼마나 많은 말이 존재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지는 실상 백지가 아닌 검은 리본을 달고 있는 것과 같다. “컬러를 도난 당”(이하 ‘시작노트’)해 “무채색이 된” 리호의 시 속으로 들어가 보자.
높은 대문에 큰 글씨로 메모를 붙여놓았다
오늘은 연극이나 뮤지컬로 먹자
몽상가에 대하여 이모티콘을 만드는 중이다
만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익스큐즈미 사진틀로 나오는 오마이갓
조금만 졸고 있을 게 죽을 시간에 깨워줘
침대가 대문이 되는 순간에 파란색으로 줄무늬를 그리고
꿈을 하나씩 파는 거지
제일 비싼 꿈을 사는 사람을 경매사로 스카우트하면 연봉이 비싸겠지
원격 조정하는 자가 침팬지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라지는 사람들이 사카린 가루로 변하기도 하지
시계를 읽으면 숫자가 허물어지며 니체를 부르기도 하고
배지 하나를 사면 도장 하나를 버리고
하늘로 붕 뜨면 노란 고양이 한 마리 어부바를 한 여자
구름으로 변하는 사람들 모두 머리 나발 하나씩 이고 바다로 가나
손목시계 바늘이 녹아들어 가고 있다 이모티콘을 눌러버렸지
컷, 다음 행성은 시장을 지나 꽈배기 호떡집을 어슬렁 주차장은 없고 버스 두 대가 올 거야 불두화가 활짝 핀 산 몇 번 몇 번
- 「기다리는 산이라 불리는 몽상가의 이모티콘」 전문
시인은 이 시가 애니메이션 영화 <웨이킹 라이프>에서 착안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이 영화는 정통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를 바탕으로 만화화한 로토스코프 기법을 채택하고 있다. 이 기법은 꿈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에 배경이나 인물, 줄거리가 선명하지 않고 몽환적이다. 영화를 보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줄거리만이라도 살펴보자.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자신이 있는 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한 청년이 있다. 그는 꿈이란 현실로부터의 탈주인가 아니면 현실 자체인가, 자신이 지금 몽유병 상태에 있는 걸까 아니면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걸까 혼돈스럽다. 이에 숱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삶과 죽음과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은 삶과 자아의 의미, 영혼과 전생의 존재 여부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털어놓는다. 그중에는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스스로 몸에 불을 질로 분신하는 사람도 있고, 괴한을 만난 이후 총을 소지하게 된 한 남자가 오발로 살인을 하기도 한다. 청년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기도 하고, 우연히 스치며 알게 된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못하기도 한다. 스위치를 내려도 꺼지지 않는 조명, 시간을 읽을 수 없는 시계 등 청년이 목격하는 상황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런 가운데서 그는 깨어있는 삶과 꿈 사이의 절대적인 차이를 발견하고자 사람들과 대화를 계속해나간다.”(-네이버 영화 줄거리)
영화 주인공인 청년은 삶과 죽음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어쩌면 영화 <신과 함께>처럼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산’을 북망산이라 가정하면, 이모티콘은 저승으로 통하는 비밀의 기호로 작용한다. 몽환의 세계에 청년 혼자 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 몽상가의 이모티콘을 만들게 한다. 현실의 실사인 “연극이나 뮤지컬”에서 애니메이션인 “만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 몽환의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익스큐즈미”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고, “오마이갓”은 혼절할 만큼 충격적인 일을 겪었음을 암시한다. “제일 비싼 꿈을” 산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이다. “가루로 변하”고, “허물어지”고, “니체를 부르”고 “녹아들어 가는” 절망적 상황은 이모티콘을 누르게 한다. “컷”은 몽환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의 소환이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주위는 꽈배기처럼 꼬이고 호떡집처럼 시끄럽다. “불두화가 활짝” 피어 있다.
무당벌레=무당×벌레=나를 그리 부르는 사람이 웃더니×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돈을 원함
장수하늘소=장수×하늘×소=심 목수의 딸들이 흩어져 장사꾼이 된 후 가장 잘 된 케이스는 돌 장수였다×하늘에 계실까 우리 아버지는 아버지의 뜻과 내 뜻이 땅에서는 같을까 뼈까지 우려먹을 지구에서는 홈이란 단어가 없음
돼지감자=돼지×감자=돼지×감×자=내가 바닥을 택한 이유는 하늘을 보고 싶어서지×싹이 나고 잎이 나면 주먹이 더 세짐=내가 바닥을 택한 이유는 하늘을 보고 싶어서지×말려서 줄줄 막대에 줄줄 하나씩 없앨 때마다 분내 나는 봄
개구리=개구×리=매일 아침 뉴스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이 키우는 동물 중에 가장 값비싼 것은×그가 살던 곳에 한참 달려 있다가 떨어진 폐차장의 종소리와 종소리
몇 명의 아이가 머리를 맞대고 분풀이 대상을 찾는다
벌건 대낮 살인 도구를 찾는 까뮈처럼
「인수분해」 전문
분(分)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아가 포함된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것을 둘 이상으로 나눠 독립시키는 것이다. 가(家)에서 계(系)로의 전환 과정은 순조롭지만은 않다. 성장 과정의 경제적 어려움이나 가(家)에서 다른 씨의 분(分)은 여러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가(家)를 이루고 계(系)를 형성하는 남성은 사회 통념상 대(代)를 잇는다는 이유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딸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차별대상이다. 나를 “무당벌레”라 “부르는 사람”의 목적은 결국 “돈”이다. 분가(分家)에서 아들을 위해 준비된 ‘인수의 곱’이고, 딸은 ‘기초적이고 간단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심 목수의 딸들이 흩어져 장사꾼이 된” 다항식에서 아버지는 하늘과 땅이라는 공통인수에서 하늘, 즉 죽음으로 전개된다. “홈”은 땅에서 이뤄야 할 인수분해의 정답이지만 “단어”조차 찾을 수 없다. 굳이 가난이라 하지 않아도 궁핍이 엿보인다. “바닥”이라는 말에선 치열한 삶의 흔적이 느껴진다.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아버지의 정답을 찾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응축돼 있다. 내 몸에서 인수분해된 “싹”과 “잎”, 즉 남매로 인해 기가 산다. 하지만 싹이 나고 잎이 나는 봄은 “분내”가 난다. “내가 바닥을 택한 이유는 하늘을 보고 싶어서”라는 문장의 반복은 하늘과 땅의 공통인수에서 하늘로의 또 다른 전개를 암시한다. “아침뉴스에 등장하는” 일이 (청)개구리의 거짓말이었으면 하는 애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 인수분해를 해도 슬픔을 분산시킬 수는 없다. 인수분해조차 되지 않는 신(神)은 곁에 없다. “벌건 대낮”에 “살인 도구를 찾는”, “바닥을 택한” 나는 이 땅에서 영원한 이방인이다.
해바라기씨 주세요 우리 집은 햄스터가 새끼 한번 못 치고 죽어요 구피도 낳자마자 제 새끼를 다 잡아먹었어요 그때부터였나 봐요 네발 달린 것과 꼬리 달린 것들에 정이 안 가요 친구 녀석은 구피 여섯 마리 사서 두 달 만에 150마리 되었다고 분양 좀 해가라네요
볕이 너무 내리쬐기에 얼굴 한번 찡그려봤어요
아침마다 베란다를 기웃거렸어요 지난겨울 죽은 안투리움과 덴트롱 가지가 꿈쩍도 안 해요 화분 아래 씨껍질이 떨어져 있어요
죽은 게 아니고 죽인 게 맞아요
몸에 열이 나길래 물을 줬어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가 얼었어요
가슴이 차길래 거실문을 잠갔어요 타이가로 변하는 걸 눈치 못 챘어요
바싹 마른 가지 두 개를 번갈아 손으로 만지며 말했어요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생각날 때마다 수시로 기웃거렸어요
옆에 나란히 붙은 안투리움 화분에서 연초록 싹이 돋아나요 덴트롱 모종을 하나 사서 죽은 가지 옆에 심었어요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또 며칠을 기웃거렸어요
오랜만에 늦잠 잔 어느 날 볕을 따라 베란다로 나갔어요 가지 밑에서 한 뼘이나, 이파리 다섯 개나 달고 녀석이 건들거리고 있어요
해바라기씨 한 컵 가득 주세요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것 중 하나라네요
-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세계 음식 재료 1001호」 전문
자책은 무채색이다. 마음 상태가 흰색에서 회색으로, 다시 회색에서 검은색으로 이행된다. 파랑이나 노랑과 같은 유채색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끼어드는 순간 방어기제가 작동되어 순간적으로 무채색으로 변화시켜 버린다. 색(色)이 각자 고유의 상(相)을 보여주듯, 마음이나 행동의 선택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새끼 한번 못 치고 죽”은 햄스터나 “낳자마자 제 새끼를 잡아먹”은 것은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햇빛이 너무 강렬하다는 이유로 살인하는 상황을 연상시킨다. 이는 죽인 것이 아닌 죽은 것이다. 하지만 베란다의 “안투리움과 덴트롱 가지”는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인” 것이다. 죽은 것은 나와 무관하지만 죽인 것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는 자책과 죄책감을 동반한다. “손으로 만지”고, “생각날 때마다 수시로 기웃거”리는 행위는 치유의 방식이긴 하지만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다. “안투리움 화분에서 연초록 싹이 돋아”난 것은 죽지 않았기 때문이고, “덴트롱 모종을 하나 사서 죽은 가지 옆에 심”은 것은 죽은 덴트롱이 살아난 게 아니라 이를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죽은 건 되살리지는 못하지만 죽기 전에 남긴 씨는 죽음을 대신할 수 있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씨를 통한 대(代) 이음은 다시 가(家)를 이룰 수 있고, 계(系)의 단절을 막을 수 있으므로 작은 위안을 준다.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것”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채색의 세계에서 필요한 ‘음식 재료’다. 선택지의 중심을 비움이나 치유에 둘 때, 중첩된 무채(無彩)를 벗고 내 고유의 색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누가 되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김정수
소시집 리뷰를 쓴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 등이 있으며 경희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