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고는 조선조 고종 32년(1895)에 창설되어 미국인 퇴역장군 다이가 훈련시킨 시위대侍衛隊의 참위(지금의 소위)로 있었다. 그가 속한 시위대의 임무는 왕궁을 지키는 일이었다. 병력의 규모는 1개 중대, 대단치 않은 수였다. 적어도 3개 중대 규모는 되어야, 1개 중대가 당일에 숙위하고, 다른 1개 중대가 휴무하고, 나머지 1개 중대가 교육하며 대기 근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라의 재정형편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의 부친 장 반초는,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난 철종 임금의 뒤를 이어, 갑자기 조선의 26대 임금이 된 고종의 연날리기 친구였다. 고종의 나이가 12살의 나이로 즉위한 해가 1863년, 장 보고가 태어난 것이 그로부터 10년 후였다.
장 보고가 어떻게 하여 시위대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아버지와 고종과의 관계에서 유추가 가능하다. 혹시 고종이 무조건 그를 불러 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될 따름이다.
그가 훈련을 마치고 처음 숙위를 시작했을 때, 보게된 경복궁景福宮의 내부는 놀랍기만 하였다. 아름답고 위엄 있는 전각들과 그윽한 숲, 그리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궁중의 사람들, 그들이 말하는 특이한 궁중 언어가, 그가 살던 바깥 세상과는 전혀 달랐다. 멀리서 바라본 상감은 언제나 자상한 인품에서 풍겨나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고, 보잘 것 없는 낮은 벼슬의 시위대 대원을 대할 때 푸근한 미소를 보냈고, 중전 또한 아름다움과 기품을 보였다. 장 보고는 고종과 한마디 대화를 나눈바 없고, 먼발치로 바라보기만 했지만,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시위대가 하는 일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무조건의 복종과 충성이었다. 상감에 대하여 품게 되는 외경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장 보고가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乾淸宮에서 숙위를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상감은 주위를 물리치고 혼자 경내를 걸었다.
『그대가 앞장을 서라. 행보를 하겠다.』
장 보고는 뜻밖에 상감의 옥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귀를 의심했다. 고종이 내관을 멀리하고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황공하고 고금에 없을 듯한 일이었다. 그날 상감은 신무문까지 갔다가 오셨다.
건청궁에서 녹원으로 가는 길에 앵두나무가 가득했고, 외진 곳은 숲이 우거져 있었다. 상감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자기 앞에서 장 보고가 선도를 하고 있음을 잊고 있었다. 고종은 연못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장 보고를 가까이 오게 하여 물었다.
『벼슬 이름이 무엇이냐?』
『참위라고 합니다.』
『참위가 사는 곳이 어디냐?』
『경운동이 옵니다.』
『경운동이라… 가까운 곳이로구나.』
『그렇사옵니다.』
고종은 문득 그가 대궐로 들어오기 전에 살았던 어린 시절의 경운 동을 생각하는 듯 싶었다.
『참위는 누구의 자손이냐?』
『소인의 부친은 함자가 장자 반자 초자이옵니다. 소인은 보고라고 하옵니다.』
상감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임금은 그의 옛 친구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가을이 저물어, 누렇게 뜬 잎이나 붉게 물들은 잎들이 거의 다 떨어졌다.
상감이 장 보고를 앞세우고 첫 행보를 하신 후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고종은 숙위하는 장 보고를 앞세우고 산책길에 나섰다. 사정전思政殿을 지날 때, 백악을 휘몰아쳐오는 거센 북풍에 곤룡포 자락이 펄럭였다. 장 보고는 귀 끝이 아릿했다.
『전하 날씨가 차옵니다.』
『괜찮다.』
고종은 경복궁 서측에 솟은 인왕산의 강인한 석봉石峰에 시선을 주었다. 경복궁을 인왕산 밑에 앉혀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주장하다가, 유가들의 주장에 뜻을 꺾을 수 밖에 없었던, 무학대사를 머리에 떠올렸다. 당시에 정도전을 필두로 하여 유가들은 백악 아래에 경복궁을 앉혀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서사택西四宅 방위에 대궐을 앉혀야 한다는 것이 무학대사의 주장이었고, 동사택東四宅 방위에 대궐을 앉혀야 한다는 것이 유가들의 주장이었다.
무학대사의 주장은, 국토의 방위가 동북방에 가로놓여 서사택 방위를 취하고 있으므로, 대궐을 마땅히 국토의 방위에 맞추어 서사택 방위를 취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가들의 주장은, 중화족中華族의 자금성紫禁城이 동사택 방위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태조는 유가들의 생각을 따랐다. 그리하여 동사택 방위에 궁궐을 앉혔다. 대궐의 방위가 국토의 방위를 극하고 있기 때문에, 무학대사는 이곳의 지기가 다하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중화를 맹종하는 유가들이 무학대사의 자주적인 기상을 꺾었다. 태조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울 때, 종묘를 지으면서, 한 전각 문의 이름을 창엽문이라고 하였다. 창엽문에는 조선이 고종의 대에 와서 망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가 숨어 있었다. 풍수를 하는 사람들이 태조의 의도를 간파하였다. 고종은 나라의 안팎이 시끄러워지면서, 요즈음 대궐 터의 기가 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에게는 근자에 일본도를 어깨에 울러 메고 구리개 일대를 배회하는 낭인 패거리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게다가 총을 가진 자들이 세검정 밖에서 사냥을 한다는 소문도 들려오고 있었다. 나라의 위엄이 말이 아니었다.
장보고는 이 나라의 군인으로서 일본의 준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저들이 언제 무슨 흉측한 일을 저지르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순찰을 강화해야 하였다. 그는 임금을 호위하는 군대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일인들이 세검정 밖으로 사냥을 간다고 하지 않더냐?』
고종이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물었다.
『소인도 듣고 있습니다. 하나부사(花房義質:일본공사)의 무리인 듯하옵니다. 풍문에 듣기로는 호랑이를 잡으려 한다고 하옵니다.』
호랑이라면 서사택 방위를 지키는 영물이다. 그래서 서방백호四方白虎라고 말한다. 일본공사무리가 호랑이를 잡겠다는 것은 이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방위인 서사택 방위를 훼손하겠다는 의도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하더냐?』
『새를 잡는다고 합니다.』
고종은 언젠가 총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인마의 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왕궁에서 듣기에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녹원의 숲이 흔들려 고종은 옥보를 멈추었다. 커다란 새 한 마리가 그들을 향하여 날아오고 있었다. 닭이나 꿩을 닮은 새가 아니었다. 맹금류는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스러운 새였다.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순백의 색깔, 화경 같은 눈, 완강하고 날카로운 부리… 기품이 있고 위풍당당한 새였다. 새가 머리를 돌려 임금을 한번 내려다보고 궁장 밖으로 날아갔다.
고종은 놀란 듯 선채로 한동안 새가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새가 태종 이래로 이 왕궁을 지켜온 터 지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밖에 이러한 새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왕궁에만은 이러한 새가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살고 있다. 이러한 터 지킴이들이 정체를 드러냈을 때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저 새를 본 적이 있느냐?』
『처음 보옵니다.』
참위는 수개월을 숙위를 했는데도 저 이름모를 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대원들을 풀어서 여러 번 경내를 수색한 적이 있었으나, 저 새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가 녹원에서 날아올라 임금에게 인사하듯 한번 머리를 돌려 바라보고 궁장을 넘어갔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참위는 몹시 마음이 흔들렸다. 마음이 흔들린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상감도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기이한 일이로다.』
고종이 신음하듯 말했다.
참위는 숙위를 마치고 퇴궐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집은 경운 동에 있었다. 집에는 연로한 그의 조부가 살아계셨다. 아무래도 어제 아침에 본 하얀 새가 무슨 징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물어보기로 하였다.
조부는 장보고가 하는 말을 다 듣고 나서 책을 쌓아 둔 선반에서 고서를 한 권 꺼내어 맨 앞부분을 펼쳐 보여주었다. 「장자莊子」라는 책에 나오는 소요유逍遙遊편이었다.
北方有魚 其名爲鯤 鯤之大不知幾千里也 化而爲鳥 其
북방유어 기명위곤 곤지대부지기천리야 화이위조 기
名爲 鵬 鵬之背不知幾千里也 怒而飛其翼若垂天之雲 是
명위 붕 붕지배부지기천리야 노이비기익약수천지운 시
鳥也 海雲則將徒於南冥 南冥者天池也
조야 해운즉장도어남명 남명자천지야
(북명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이 곤이다. 곤의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붕이라고 하였다. 붕의 등이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화를 내어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하늘의 구름을 덮는다. 붕을 새라고 한다. 붕은 바다를 따라 장차 남명으로 가는데, 남명은 천지이다.)
장 보고는 이 글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고, 이해가 가지도 않았다. 너무나 허황한 이야기였다.
『옛날에 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이 조선이었다. 그는 전욱고양이라고 하는 분의 아들이었다. 전욱고양의 나라가 곧 북명이다. 북명은 곤이 살던 나라이다. 북명의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하는 말은 그의 나라의 크기가 얼마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곤이 북명을 떠나니, 단군왕검이 그의 이름 조선을 나라 이름으로 하였다. 조선은 붕을 숭상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장자가 “곤이 변하여 붕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 말은 곤의 이름인 조선으로 나라의 이름을 지었다는 말을 은유한 것이다. 붕은 곧 조선이다. 조선이 화를 내면 하늘의 구름을 덮을 만큼 위세가 대단하였다. 조선의 위세가 그만큼 엄청났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망할 때가 되니 붕은 바다를 떠나 천지가 있는 남명으로 가고 싶어 하였다. 남명은 조선을 이어받을 나라이다. 남명에 천지가 있다. 이 나라가 부여일 것이다. 이렇게 붕새는 북명에 있다가 북명이 망하면 남명으로 간다. 후대에 와서 멸망한 조선이 부활하면서 붕새가 다시 조선에 돌아와 백악 아래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기를 5백 년이다. 그러나 이제 또다시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구나.』
조부가 해석을 해 주었다.
장보고는 나라가 망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붕새가 날아가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일어나면 쓰러질 때가 있고, 흥하면 망할 때가 있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느냐.』
고종은 궁내부에 봉직하는 여관에게 명하여 책을 한 권 가져오게 하였다. 여관이 규장각에 전하여 상감 앞에 가져온 책은 삼국사기三國史記 한 권이었다.
임금은 건청궁의 침전에 들어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그는 침전 앞에서 숙위하는 장보고를 불러들었다.
『황촉을 가지고 이리 가까이 오라.』
장보고가 황촉을 책상 가까이에 옮겨 놓았다. 임금은 한 구절을 손으로 짚었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10년(서기전 28)에 있었던 일이다.
十年秋九月 鸞集於王臺
10년 가을 9월에 난조鸞鳥가 왕대王臺로 모여들었다.
간단한 기록이었다.
『장 참위, 참위가 본 새가 난조이니라. 난조는 달리 붕이라고도 한다. 붕은 나라를 상징하는 새이니라. 붕이 날아가는 것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짐과 참위가 보았으니, 그대가 찾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아마 당장 찾기는 힘이 들 것이다. 그러나 힘써 노력하도록 하라.』
고종은 근심스러워 하는 얼굴로 말했다.
어디에 가서 날아간 붕을 찾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 작이 없는 일이었다.
『전하, 지금 떠나오리까?』
『아니다. 그대가 떠나야 하겠다는 결심이 섰을 때 떠나도록 하라. 다 때가 있느니라.』
참으로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장보고는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사냥복장을 입은 일인 수명이 말을 타고 서대문 밖에 있는 일인공사관을 떠났다. 그들은 영국풍의 종아리가 꼭 끼고 허벅지가 부풀은 사냥바지를 입고 사냥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들이 입은 바지를 당꼬스봉이라고 하였고, 이들이 쓴 모자를 도리우찌라고 하였다. 그들은 사직단 앞을 지났고, 곧바로 숲이 무성한 세검정의 협로로 들어섰다. 말을 달릴 수 없는 지형이어서 그들은 느긋하게 천천히 걸었다. 그들이 이 곳에 와서 인왕산 호랑이를 사냥한 바가 있었다. 이번엔 또 무엇을 사냥하게 될지 자못 호기심에 충만해 있었다.
날씨가 찼지만 상쾌한 아침이었다. 인왕산은 언제 보아도 높지 않으나 웅장한 돌산이다. 산이 작으나 북쪽으로 북악산과 삼각산과 도봉산과 연결되어 있어 호랑이 발톱과 같은 느낌을 준다. 왕궁을 서쪽에서 발아래 두고 있다. 위엄 있게 솟은 주봉에 영기가 서려 있다.
일인들은 자하문紫霞門을 옆에 끼고 돌아, 인왕산 북쪽에서 말을 내렸다. 하졸에게 말을 지키게 하고 산으로 올랐다. 그들의 등에 어느새 땀이 배었다. 경복궁의 아름다운 전각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마주 바라보이는 낙산駱山 위로 솟은 태양이 강렬한 빛을 황홀하게 내뿜고 있었다. 자하문 주변을 두르고 있는 하얀 안개가 햇볕에 걷혀 쫓겨 가는 중이었다. 한성은 너무나 조용했다. 일인들은 왕궁에서 쇠락해 가는 왕조의 기운을 읽고 있었다. 억제하기 힘든 감격이 일인들을 휘감았다.
-임진란 때 우리의 선조도 우리와 같은 감격을 맛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임진란 때, 한성에 선발대로 입성한 고니시는 텅 빈 왕궁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였다.
햇빛을 받으며 산비둘기가 소나무가지에서 푸드득 소리를 내며 날았다. 우미하라 소좌가 순간적인 동작으로 총구를 겨냥했다. 일발 발사에 산비둘기가 맞아 몸체는 혼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날개와 다리만이 남아 그들 앞에 떨어졌다.
『그만하면 명사수다.』
하나부사가 중얼거렸다.
이어서 오기하라 경부가 꿩을 쏘았다.
참위 장보고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새로 편성된 순찰대를 인솔하고 대궐 주변을 순찰하는 것이었다. 시위대에 몇 마리의 순찰용 군마가 지급되었다.
장보고는 시위대원 두 사람을 데리고 경복궁을 출발해서 세검정 고개로 들어섰다. 그들은 말을 잘 손질해서 검은 밤색 털이 윤이 났고, 단단한 근육이 보기 좋게 불거져 힘찬 인상을 주었다. 만주지방에서 용명을 날리는 몽고마의 후예였다. 이 말 위에 의젓하게 올라 앉은 시위대원들은 단추가 많이 달린 서양식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그들이 쓰고 있는 군모도 원통형의 빳빳한 모자였다. 그들이 순찰을 나서면, 길가의 민가에서는 멋진 구경거리였고, 한창 자라나는 애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장 보고는 부하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붕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므로 숲 속을 주의 깊게 관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미 남명으로 날아갔을 붕을 찾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자주 산에 나타났고, 그들이 산에 나타나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일인과 마주쳤을 때는 거의 한 달이나 지나서였다. 인조반정을 결의한 세검정 바위 위에서 일인들과 마주쳤다. 일인들은 일찍 산에 갔었던 모양으로 참위가 대궐을 출발하여 거기에 닿았을 때, 그들이 사냥한 새들을 말안장에 달고 하산하는 중이었다. 시위대원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 시위대원들이 그들을 노려보자 상대방이 먼저 말을 멈추었다.
『그대들은 누구인데 불경하게 대궐과 지척의 거리에서 사냥을 하는가?』
그들이 일인임을 모를 리가 없지만 참위는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들 무리에 조선말을 하는 자가 있어서 조선 말로 대답했다.
『우리는 대궐 근처에서 사냥을 하지 않는다. 먼 곳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이분은 일본제국 공사 하나부사 장군각하이시다.』
다분히 교만하고 위협적인 언사였다.
참위는 피가 끓어올랐지만 참았다. 상대가 일본을 대표하는 외교관의 우두머리였던 때문이다. 저들이 만일 낭인 패거리들이었다면 채찍을 휘둘러 쫓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참위는 공사를 예우하여 길을 비켜주었다. 장보고는 골짜기를 내려가며 숲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황량한 기분이 들었다.
장보고는 저들이 나타나면 저들을 추적하여 겁을 줄 생각이었다. 말다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묵묵히 말을 몰아대면 되었다. 그로서는 상대와 싸워야 할 처지가 아니었다. 저들은 일본을 대표하여 외교관으로 이 땅에 와 있는 자들이었다.
일본공사의 눈에 기마 순찰을 하고 있는 시위대의 장교가 확인된 뒤로 세섬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사냥을 왔든, 놀러 왔든, 거드름을 피우며 거들먹거리던 일인들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대궐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서 말의 울음소리와 말발굽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제 상감께서 일인이 사냥을 하러 오느냐고 물으신다면 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보고할 수 있으리라. 이제나 저제나 상감의 하문을 기다려도 상감은 묻고 확인해야 할 일을 잊으신 듯했다.
봄이 되어 앵두꽃이 만발한 화창한 날에, 건청궁에서 숙위를 하고 있는 참위를 고종이 불렀다.
『앞장 서거라.』
참위가 읍하자 고종이 어명을 내렸다.
장보고가 거리를 두고 앞장섰다. 오래간만에 옮기는 상감의 행보였다. 후궁을 덮고 있는 나무들은 푸르게 물이 올랐고, 새들이 숲에서 우짖었다. 봄바람이 소매로 스며들었다. 상감은 궁장 넘어 날아나간 눈부신 하얀 새를 보면서 이 새가 울어대는 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그러나 새는 날아오지 않았다. 사실 상감은 실현하기 불가능한 희망을 갖고 계신 것이었다. 그러나 희망을 갖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러한 희망을 가져야 할 사람이 상감이기 때문이다.
상감은 한동안 소나무 아래에 서 있다가 옥보를 건청궁으로 옮겼다. 실망한 상감이 녹원으로 납시는 바람에 참위는 걱정이 되었다. 상감은 멀리 하늘에 시선을 보냈고, 돌아올 때에 힘없이 천천히 걸었다. 장보고는 너무나 송구스러워 상감의 용안을 우러러 볼 수조차 없었다. 나흘째 되는 날, 장보고는 상감이 찾을 것 같아서 기다렸지만 그날부터 상감은 녹원으로 납시지 않았다.
『오늘 새가 날아왔느냐?』
하고 물었을 뿐이다.
장보고는 황공해서 몸들 바를 몰라 하며 새를 보지 못했노라고 대답했다.
일단의 말을 탄 무리가 자하문 밖의 성벽을 끼고 돌았다. 검은 이끼가 말라붙은 성벽의 돌이 여기저기 물러나 있고, 성벽이 허물어진 데도 있었다. 새로 부임한 미우라(三浦梧樓)공사가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왕성이 이토록 허술해서야 쓰겠느냐?』
미우라의 말에 일행이 일제히 허물어진 성벽을 바라보았다. 미우라가 이리의 이빨을 내어 보이며 웃었다. 말발굽소리가 산바람에 날려 성벽을 넘어갔다.
『가슴이 설레는 것을 보니, 오늘 무슨 길조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미우라의 하관이 말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기다려 보지.』
그들은 모두가 이토오(伊藤博文)의 분신들이었다. 이토오의 속셈은 조선을 합방하여 일본의 속국으로 만드는 것인데, 그들은 그러한 흉계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음흉을 떨었다. 그들은 조선의 어리석은 대신들 앞에서 회유하고 협박하면서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고, 부드럽게 웃으면서 교활하게도 가슴에 비수를 품고 있었다.
『저 하늘을 보십시오.』
하관이 미우라에게 말했다.
티 없이 맑은 하늘에 흰빛을 뿜으며 한 마리의 새가 그들의 시선에 잡혔다.
『아아, 아름답고 기품 있는 새로구나.』
미우라가 탄식했다.
옆에서 한 사관이 총을 들어 새를 향하여 조준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미우라가 손을 들어 총을 내리라고 신호를 보냈다.
『쏘지 말라.』
미우라가 몸에 전율을 느껴 제지한 것이다. 그 새를 쏘아서는 아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관이 총을 내리며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미우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잡기 힘든 귀한 새가 아닙니까?』
『그러나, 지금은 때가 이르다…』
그들이 잠깐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새는 일직선으로 소나무가 우거진 백악白岳의 숲을 향하여 날아갔다. 새의 하얀 몸체가 작아지면서 점으로 변하여 시야에서 소멸되었다.
뜻밖에도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노쇠한 청국을 굴복시켰다. 승전의 대가로, 을미년(1895) 4월에 시모노세키에서, 청나라로 하여금 조선의 종주권을 포기하게 하였다. 아울러 전쟁배상조로 용동반도와 대만과 팽호도를 할양받고, 배상금으로 고평은庫平銀 2억양을 배상하도록 하였다.
조선에서는 청나라에 의지하던 청국파들이 몰락하고, 일본과 손을 잡은 친일파들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강대국 러시아가 코앞에서 벌어지는 꼴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 일본에 압력을 넣어 청나라의 땅을 되돌려주게 하였다. 조선의 조정은 크게 흔들렸다. 이번엔 러시아와 손을 잡은 친러파들이 득세하였다. 친러파들은 친일파를 몰아내기 위하여 중대한 결정을 하였다.
구식군대인 훈련대를 1895년 8월 20일 해산시키고, 친일파 인물인 이경직을 해임하고, 친러파 인물인 민영준을 궁내부대신에 임명하여 대궐을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을 통보하기 위하여 군부대신 안경수가 일본공사관으로 간 날이 그해 8월 19일이었다.
『안대감, 누지에 어쩐 일이십니까?』
미우라가 안경수를 맞아들이고 나서 물었다.
『조선정부의 결정사항을 통보해 드리러 왔습니다.』
안경수가 천천히 말했다.
『이번 내각에서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해임하고 민영준을 임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훈련대를 8월 20일자로 해산합니다.』
안경수의 말에 미우라는 놀라는 듯했으나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훈련대는 일본군이 일본식으로 편성하여 일본식으로 훈련시킨 군대였다. 일본식 군대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이 땅에서 일본 냄새를 몰아내자는 의도였다. 게다가 민영준의 등장은 내각을 완전히 친로파일색으로 통일하는 것이었다. 미우라는 조선조정이 친일파를 싹쓸이한데 대하여 아무런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니 관여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이제 목의 가시를 빼어냈구나.』
안경수는 대궐로 돌아오면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날씨가 무더운 8월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날이 저물면 이경직을 위하여 궁중연회를 열기로 되어 있었다. 친러파의 결속을 다지는 연회였다.
안경수가 돌아간 후에 미우라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시근거리며 집무실 안을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맴돌았다.
『이 미우라를 무엇으로 생각하는가!』
그는 상대가 앞에 있기나 한 것처럼 소리 질렀다. 방문 밖에서 하관이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사 각하, 무슨 일입니까?』
용케 참고 있던 미우라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하관은 생각했을 것이다.
미우라는 그의 참모인 구스노께 중좌, 오기와라 경부, 아다찌(安達謙藏) 한성신보사장을 공사관에 불러들였다. 그들은 숙의를 하고 나서, 각자 자기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 다음에 미우라는 훈련대 제2대대장 우 범선을 은밀히 불렀다. 우 범선은 훈련대 영내에 있다가 전갈을 받고 달려갔다. 미우라는 침통한 표정으로 우 범선을 맞았다.
『놀라지 마시오. 우 대대장.』
기분 나쁘게 들리는 미우라의 음성이었다.
우 범선은 무엇인가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요즈음 훈련대 군졸들은 시위대만을 짝사랑하며 훈련대를 귀찮아 하는 정부의 푸대접에 대하여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평소에 대원들은 순검들과 싸우려 들고, 시위대원들에게도 시비를 걸어 말썽을 부렸다.
『지금 막 안경수대감이 다녀가셨소. 내각이 훈련대를 해산한다고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우 범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해산 날짜가 언제라고 합니까?』
『내일이오.』
미우라가 우 범선의 반응을 살폈으나, 우 범선은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군대가 해산되면 어떻게 하시겠소?』
『무얼 말입니까?』
『내 말은 그냥 물러갈 생각이냔 말이오.』
미우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러나 날카롭게 우 범선을 쏘아 보았다.
우 범선은 가슴에 소용돌이 쳐오는 감정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군대해산을 결정한 대신들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제국의 유신維新은 나라의 앞날을 내다보는 소수의 새로운 사상을 가진 젊은이들이 수구세력을 몰아냄으로써 가능했던 것이오. 그 후로 이제 일본제국은 동양에서 유일하게 열강에 들어 있소.』
미우라는 우 범선을 부추겼다.
그러나 우 범선은 유신 따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 자기가 나서서 무얼 해보겠다고 도모한 적도 없었다. 미우라의 충동질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우 범선이 그냥 방을 물러나오려 하자, 미우라가 벼락같은 소리로 외쳤다.
『이 멍청이! 얼간이! 기회가 왔는데도 나라를 망쳐버릴 셈인가?』
우 범선은 발길을 멈추고 획 돌아섰다. 그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그가 미우라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미우라 공사, 그래 나를 어떻게 할 셈인가? 나로 하여금 상감을 배반하라는 말인가?』
『우리에겐 대원위대감이 계시다.』
우 범선은 깜짝 놀랐다. 미우라의 말은 그가 대원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대원위대감이?』
『그렇다.』
우 범선은 미우라의 멱살을 놓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친일파라면 이를 갈던 대원군이었다. 그가 일본과 손을 잡았다면, 이건 그냥 보아 넘길 일이 아니었다.
『대원위대감이 일본과 손을 잡았는가를 확인해야 하겠소.』
『대원위대감은 지금 공덕리孔德里에 있는 아소정에 유폐되어 있는 상태요. 이 밤에 그곳에 가서 만나 뵙는다는 것은 거리상으로 보나 시간상으로 보나 너무 촉박하오. 그리고 이제 날이 밝으면 훈련대는 해산되는 것이오. 불행하게도 우대대장에게는 대원위대감의 의도를 확인할 시간이 없소. 선참후계先斬後戒(먼저 베이고 후에 경계하라)라는 말이 있소. 훈련대를 해산당하지 않고 유지하려면 선참후계 해야 할 것이오.』
『나는 권력에 아첨하는 늙은이들과 러시아세력을 몰아내겠소.』
우 범선이 결심을 보이자 미우라는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잘 결심했소. 역사가 당신을 기억할 것이오.』
우 범선은 공사관을 나와 자기가 타고 온 말을 타고 훈련대를 향하여 달려갔다.
『불쌍한 것, 네가 뜻을 펴기에는 네 병력이 너무나 형편없구나.』
미우라가 우 범선이 사라진 방향을 향하여 중얼거렸다. 그날 그는 자작으로 축배를 들었다.
훈련대로 돌아온 우 범선은 연대장 홍 계훈에게 야간훈련을 나가겠다고 속이고 총과 실탄을 무기고에서 출고했다. 홍 계훈은 내일 군대가 해산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훈련을 허락한 것이었다. 우 범선은 1대대와 2대대 전원을 무장시키고 연병장에 집합시킨 다음 그들 앞에 나섰다. 그의 속마음을 모르고 대원들은 우 범선이 일상적인 지시를 하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 범선이 감정이 무딘 무인이라고 하나 한 가닥 서글픈 감회가 없을 수 없었다. 그는 눈이 벌겋게 충혈 되었고,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오늘 훈련대 장병 여러분은 지금부터 제 2대대장 우 범선이 하는 말을 엄숙히 들어야 한다.』
이렇게 서두를 떼자, 대원들은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직감하고 우 범선의 얼굴을 주시하였다. 그들이 우 범선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대장의 눈물이 충성스런 대원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우 범선은 그들의 눈빛을 보고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충성스런 훈련대원 여러분! 내일 우리 훈련대는 정부의 결정으로 해산하게 되었다. 여러분이 총을 만져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이 자리에선 우 범선은 지금까지 여러분이 나라에 바쳐온 충성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것을 심히 슬프게 생각한다. 여러분의 충성을 헛되게 하지 않고 우리 훈련대가 해산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다…』
우 범선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대원들은 숨을 죽였다.
『여러분! 총을 들자! 총을 들어 친러파내각을 몰아내자! 우리의 뒤에는 대원위대감이 계시다. 여러분은 임오군란 때 대원위대감이 우리의 뒤에 계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 훈련대가 살아 남는 길은 대원위대감에게 충성을 하는 것 뿐이다. 일본공사도 우리를 도와주기로 하였다.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서 결심을 해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옆줄로 나서라. 나를 따르고 싶은 사람은 그 자리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깊이 생각하라. 훈련대는 내일 해산 된다…』
우 범선은 이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물을 흘리는 쪽은 대원이었다.
『우리는 대장을 따르겠소!』
『따르겠소!』
『따르겠소!』
여기저기서 열렬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외쳐대는 고함은 하늘을 뒤덮는 함성이 되었다.
『대원 여러분이 뜻을 함께 해 주어서 고맙다. 군대가 해산된다는 것은 나라가 망했을 때 뿐이다.』
우 범선은 미우라와 행동을 함께 하기로 한 연유와 공격지침을 설명하고 나서 훈련대를 출발시켰다.
훈련대가 일본수비대 1개 대대와 합류하기로 정한 서대문 밖에 도착했을 때, 대궐에서는 신임 궁내부대신 민영준을 위한 연회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훈련대가 아무리 기다리고 있어도 일본군 수비대는 도착하지 않았다.(그들이 도착한 시간은 대궐에서 연회가 파한 새벽 3시 이후였다) 낭인 패거리들이 공덕리에 있는 아소정에 가서 대원군을 모셔와 합류했다. 이들 혼성부대의 총지휘자는 일본공사관무관 구스노께 중좌였다. 그들은 합류하자 대열을 지어 광화문을 향하여 진격했다. 그들이 광화문에 도착했을 때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선발대가 경복궁 담에 사다리를 걸치고 안으로 넘어 들어갔다. 문을 지키는 시위대들이 총을 쏘아서 비상이 결렸고, 연대장 홍 계훈과 군부대신 안경수에게 급보가 들어갔다. 선발대가 광화문 수비병을 완전히 진압하고 문을 활짝 열어 재꼈을 때, 근정전이 새벽빛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홍 계훈이 급히 달려와 보았으나, 그의 눈앞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역시 군부대신 안경수도 달려 나왔으나 아연실색할 뿐이었다. 조선과 일본의 군대가 근정전 앞 전정殿庭을 모두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거친 함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고, 그들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총탄이 전각 뒤에 숨어서 사격을 하고 있는 시위대원들을 향하여 어지럽게 날고 있었다. 홍 계훈이 미친 듯이 나서서 시위대원들을 독전했지만 광란하듯 파도쳐오는 저들의 기세에 눌려 고함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곳곳에서 일본군 사관들이 칼을 빼어들고 소리치며 지휘하고 있었다. 우 범선이 홍 계훈을 향하여 다가오고 있었다. 홍 계훈은 피가 거꾸로 서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내 이놈!』
그러나 그의 외침은 외마디 비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누군가 그를 향하여 쏜 탄환이 그의 머리에 박히고 만 것이다.
이 광경을 목도한 안 경수는 혼비백산하여 어디론가 몸을 피했다. 시위대 제 1선이 교전을 하며 버틴 시간은 단 10분, 홍 계훈이 전사하자 지휘관을 잃은 대원들은 괴멸해버리고 말았다. 건청궁으로 가는 통로 여기저기에 시위대 병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광화문과 근정전의 회랑을 돌파한 훈련대는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다음 목표는 건청궁인데, 훈련대가 상감이 계신 건청궁을 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군 수비대는 건청궁을 포위하고 육박해 들어갔다. 서측 문에서 교전하던 대원 1명이 쓰러졌고, 연못가에 궁녀를 포함해서 수명이 쓰러졌다.
이때 건청궁을 지키며 시위대를 지휘한 사람은 미국의 퇴역장군 다이였다. 그는 은빛 수염을 휘날리며 무엇인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대원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공격군들은 다이와 그 밖의 시위대원을 무시하고 꾸역꾸역 건청궁 안으로 몰려들었다. 아무도 이 벽안의 늙은이를 쳐다보지 않았다. 다이는 재빠르게 전각과 숲 사이로 빠져나가 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민비를 찾아라! 민비를 찾아라!』
피를 부르는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와 새벽공기를 뒤흔들었다. 일본군과 낭인패거리의 광기어린 눈빛이 번득였다.
고종은 건청궁의 침전에 있었다. 총소리가 어지러이 나기 시작하자, 참위는 주변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곧바로 상감을 뵈옵고 평상복으로 입고 위엄을 갖추고 계실 것을 주청 드렸다. 놀란 황세자가 옆방에서 부황을 찾아왔다. 참위는 환관을 불러 지키게 하고, 방 밖으로 나가서 시위대로 하여금 굳건히 침전을 지키도록 지시했다.
『나는 상감마마를 모시고 있겠다. 그대들은 자리를 비우지 말라. 』
그는 상감의 침전 앞에 서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사람들이 어지럽게 뛰는 발소리가 숨 가쁘게 들렸다. 방 밖이 뿌옇게 밝아왔다. 무질서한 발소리가 침전 앞에서 멎더니 수명의 일군과 낭인 패거리가 나타났다. 사관의 손에 들린 일본도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대들은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무엄하게 침입하는가?』
그는 소리쳐 책망하고 칼을 뽑아 들었다. 환관이 몹시 떨며 임금이 게시다고 손짓했다. 일인들은 손짓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경의를 표하고 물러갔다. 그들이 이해하기 힘든 행위를 보인 것이다. 임금은 지극히 짧은 순간에 있었던 이 일을 조용하게 바라보았다.
궁중이 소란스럽고 어수선해지면서 침소에 들었던 황후는 여관들과 함께 잠에서 깨어 있었다. 임오군란 때도 군인들이 황후를 해하려고 찾았던 악몽을 여관들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후에게 자기네들처럼 잠옷 바람으로 있기를 바랐고, 황후는 여관들의 말을 따랐다.
『황후마마 일인들이 몰려옵니다. 옥체를 피하십시오.』
궁내부대신 이경직의 다급한 목소리가 옥호루 밖에서 들렸다. 그러나 일인들이 너무나 가까이 와 있었다. 몸을 피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일인 사관이 이경직을 향하여 칼을 내리쳤다. 이경직은 칼을 맞고 피를 흘리며 피하다가 누군가 쏜 총알을 맞고 침전 밖에 있는 난간 넘어 떨어져 절명했다. 일인들은 곧바로 침실로 들이닥쳐 칼을 휘둘렀다. 흰 빛의 적삼과 치마를 입은 기품 있는 여관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일인들은 누가 황후인지 알지 못했다. 한 궁녀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고 물으니 이미 황후마마가 운명하셨다고 말할 뿐이었다.
황후는 잠자듯 침상 곁에 누워 있었다. 연수 40이 넘었으나 10년이나 젊어 보이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황후는 이마에 엇갈리는 칼자국이 두 개나 나있었다. 칼 자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하얀 적삼을 붉게 물들였다. 한 궁녀가 시진을 황후라고 지적해 주었다.
『시신을 수습하라.』
오기하라 경부가 낭인패거리들에게 명했다. 이 자리에는 낭인패거리의 지휘자인 한성신보사장 아다찌와 부책임자인 낭인 다나카(田中賢道)도 함께 있었다.
낭인들은 금침으로 시신을 둘둘 말아 들고 급히 오기와라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일국의 국모를 불량배 다루듯 제멋대로 운구하여 녹원의 숲 속에다 장작을 쌓고 그 위에 올려놓은 다음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시신을 태우는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하늘에 황조가 한 마리 날아 오르고 있었다.
상감은 황후를 잃고, 열강을 등에 없고 싸움을 벌이는 친일파와 친로파 사이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황제의 위엄을 세우기에는 힘이 너무나 미약했다. 임금에게 이들은 낯선 외국 사람들처럼 보였다. 상감은 자주 침전에서 나오지 않고 홀로 있었다. 그는 가끔 옛 추억에 사로잡혔다. 연을 날리며 철부지로 살던 옛날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이었다.
1892년에 상감은 끔직스런 을미사변을 당한 경복궁을 버리고 경운궁(慶運宮:德壽宮)으로 떠났다. 상감이 떠난 경복궁은 텅 비어 있었고, 여관과 환관 그리고 벼슬이 낮은 문관과 무관이 한가롭게 궁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상감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참위 장보고도 경복궁에 남았다. 상감이 궁을 버리고 떠났지만, 그는 상감을 수행하여 후궁에 행보했을 때처럼 숲 속을 거닐었고, 상감이 옥보를 멈추었던 소나무 앞에서 하얀 새가 날아와서 나뭇가지에 앉아 자기를 바라보리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궁에 남은 사람들은 왜 그가 낭인패들이 황후를 화장한 녹원으로 자주 가는지, 숲에서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녹원의 숲에서 비명횡사한 황후가 생전의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런 소문을 처음 퍼드린 사람은 신무문을 지키던 시위대 병사였다. 그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정해진 시간에 번을 서기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녹원 앞을 지나가야 하였다. 한 병사가 황후의 모습을 본 시각은 달빛조차 숨은 칠흑의 밤이었다. 그는 숲에서 모닥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불 앞에서 몇 사람의 시위대 병사들이 불을 쪼이며 서있었다. 그들은 모두 을미사변 때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었다. 황후는 여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참위는 이러한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하여, 아무도 황후의 환영이 나타나는 곳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교대병이 녹원 앞을 피하여 멀리 서측으로 우회하여 가도록 했고, (병사들은 황후의 환영을 보고 난 다음부터 녹원 앞으로 지나가기를 몹시 두려워 하였다) 그 자신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녹원 앞에서 황후가 환영으로 나타나시기를 기다렸다. 새벽이 오려면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한기가 몸을 엄습했다. 그가 보니 과연 녹원에서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몇 사람이 눈앞에 어른거려 눈을 크게 떴다. 기분이 이상해지고, 머리털이 쭈뼛 일어섰다. 몸이 긴장했고, 두려움이 엄습했다. 건청궁의 서측 문을 지키다가 죽은 병사를 비롯하여 그날의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있었다. 역시 소문 그대로 황후마마가 죽은 여관들에게 둘러싸여 그림자처럼 조용하게 불길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황후를 화장하는 불길이었다.
참위는 발이 묶인 듯 가위에 눌려 꼼짝할 수 없었다. 발을 옮겨 좀더 황후 가까이 다가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가 겨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을 때, 거기에는 모닥불도 시위대원도 황후마마도 여관들도 사라지고 없었다.
참위는 내관으로부터 경운궁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상감이 그를 찾고 있었다. 참위는 경운궁으로 가서 상감 앞에 부복했다. 상감이 많이 늙어 보였다. 상감이 한동안 참위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도 후궁에 자주 가느냐?』
『예, 자주 가옵니다.』
『무슨 변화가 없더냐?』
상감은 하얀 새에 대하여 하문하는 것이었다.
『없습니다.』
이런 대답을 하자니 가슴이 아팠다. 그는 녹원에 황후가 나타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참위는 대한제국이 1917년 8월 17일 일본에게 주권을 상실한 뒤로 대궐에서 행방을 감추었다. 그가 고종황제를 마지막 본 것은 고종을 인산人山 하는 날이었다. 나라 안에 고종황제가 독살 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가 의병이 되어 일본군과 싸우가다 전사했다는 소문이 전하는가 하면, 만주로 건너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문도 전한다.
이 이야기는 해방 전에 하세하신 내 외조모가 내가 어일 때 들려주신 이야기로,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거기에다가 역사적인 사실을 보태어 재구성한 것이다. 내 외조모는 평생을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만주로 떠나가신 외조부를 기다리며 사셨다. 이 이야기는 내게는 5대 외조부의 이야기이다.
이 글에 나오는 하얀 빛의 황조나 황후의 환영 같은 이야기는 허황한 이야기가 틀림이 없으나 내게는 꿈을 키워 준 생생한 이야기였다. 그 환영 속에 내 외조부가 살아 있다고 믿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