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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화제
노 의 웅
珠玉같은 高價의 그림, 抽籤金 단돈 ‘100원’으로
社會에 還元하는 快擧, 美術界에 新鮮한 衝擊 …
내 고향 '서방 마을'의 놀이터에 멀리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겨울의 한가운데에 의연한 자태로 버티고 서서 인고(忍苦)의 아픔을 이겨내던 나목(裸木0들이 푸르름에 대한 기대감으로 꽉차있다.
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안타까워 견딜 수 없을때 붓을 들고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향수와 서로 교환한다.
내 고향의 향수를 나만의 감성적 색채로 표현할 수 있음에 늘 감사하고, 거기서 누릴 수 있음에 또한 감사한다.
나는 오늘도 이 땅에 태어난 기쁨으로 화폭에 내 고향의 환상을 담느다.
속담에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 있다. 그 값이 고가이어서 만지지도, 먹어보지도 못하고 그림으로 만족한다는 뜻이다. 그림을 취미로 콜렉팅을 하는 외국의 일부 수집가들은 세계에서 한국의 그림이 제일 비싸다는 불평을 늘어놓는 경우가 왕왕 있다. 까닭을 알아본 즉 그림값에 비해 작품의 수준이 훨씬 미치지 못하다는 뜻이다. 하기야 명품들은 세계의 미술시장에서 한화로 5백억이나 1천억원에 호가하고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는가. 그림이 싸고 비싼 것은 창작품이라는 노하우 때문에 딱히 상품처럼 값을 매길 수는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림이 일반 상품과 다른 까닭은 후자는 수량, 중량, 크기, 내용물에 따라 값이 결정되는 것이지만, 전자는 오직 작품성(예술성)만을 놓고 평가하기 때문에 그렇다.
서양화가 노의웅(59, 호남대 교수)이 지난 8월 12일부터 8월 16일까지 광주 신세계화랑에서 작품 1점당 ‘100원전’을 가졌다.
호당 30만원을 호가하는 수준의 작가이고 보면 단돈 100원에 적게는 1백 50만원부터 많게는 1천만원짜리 그림을 거저 가져간다는 뜻이다. 그림의 크기도 5호, 8호, 10호, 15호, 20호, 30호 등 60점이 출품되었는데, 추첨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복불복이요, 운명같은 것이기도 하다. 샐러리 맨이나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요, 평생 가야 만져보기 힘든 그림을 제비 뽑아 60명의 당첨자가 소장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가슴 벅차고 흐믓하겠는가. 작가는 그동안 많은 갈등과 고민을 해 왔다. 돈 가진 사람만이 그림을 소장할 수 있고, 정말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없어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 비길 데 없다는 것이다. 특히 추첨에 응한 애호가가 약 2만으로 추산하면 60명만이 행운을 안았고 나머지는 탈락을 하였으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초 작가의 의도는 60년의 회갑을 앞두고, 지역민들에게 평생 진 빚을 갚기 위해서도 그렇고 미술의 저변확대와 애호가들에게 미술품을 선사하고 싶은 충동 등 복합적인 생각이 얽혀 추진했던 것이 이래도 저래도 어려워 끝내는 추첨이라는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생각 같아서는 더 많은 애호가들에게 그림을 나눠주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일각에서는 낭비다, 과시다 하고 비아냥 대는 미술인이 있지만 60점을 값으로 환산하면 억대가 훨씬 넘는 것이라면 이는 미술품의 사회환원이라고 하는 용단이나 신념이 아니고 단순한 제스춰로 매도하기에는 이 행사의 규모가 너무나 큰 것이다. 다만 전업작가나 어려운 화가들 때문에 이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선후배의 많은 찬반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추첨의 방법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자가 주최측이 마련한 소정의 양식에 따라 성명, 주소, 전화번호 등을 명기하여 접수하고 나면 전시 마지막 날 3시 신세계미술관 관계자들이 입회한 가운데 공정한 추첨이 이루어져 당첨자가 결정된 것이다. 어쨌든 노의웅 교수의 대담한 스케일과 호방한 용단에 새삼 마음이 숙연해지고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지만 흐믓한 인정은 아직도 상존한다 생각을 할 때 마음이 찡하기까지 한다. 예술작품이 콜렉터나 애호가들에게 소장되는 경위도 다양한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
고가의 값을 받고 꼼꼼히 정성들여 그리는 그림, 무상으로 기증했다 해서 대충 대충 날림으로 그리는 그림, 홍보용이나 과시용으로 온 정성을 다 바친 그림 등 가지가지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리석은 예술가의 속물적인 잘 못 된 생각일 수도 있다. 돈을 받고 그린 그림이 꼭 잘 된 것이라고 속단할 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환금성의 작품이 개운치 않아 더 못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작가 노의웅은 보상받지 않는 그림이라는 이유로 자칫 오해가 싫어 심혈을 기울여 이 60점을 완성했다고 한다.
예술양식이 하나의 패턴이나 매너리즘에 빠져버리면 작가에게서 그 이상의 신장을 기대할 수는 없다. 작가자신의 의식적인 개혁의지가 작품 속에 투영되어야 한다. 그의 최근작들을 보면 한국성을 지향하는 장생(長生)과 설화적인 민담(民譚)이나 해학적(諧謔的)이고 희화적(戱畵的)인 요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서양화가 논리적이면서도 공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예술양식인 데 비해 노의웅의 예술은 이러한 형식과 규제에서 탈출하여 비록 매재(媒材)는 서양 것이지만 유화와는 맛이 전혀 다른 파격적인 회화양식을 구축하고 있다. 한마디로 동양적 사유에 바탕한 한국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불필요한 언어와 군더더기를 말끔히 씻어낸 정선(精選)되고 절제(節制)된 감필(減筆)과 축쇄(縮刷)의 조형언어를 통한 자기완성에 접근해 가고 있는 것이 매우 고무적이고 바람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구상적인 요소를 지녔으면서도 표현주의적인 추상성이 내포되고 있는 것도 작가의 번득이는 화의(畵意)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자연이 주는 심의적(心意的)인 감동을 창작행위를 통하여 기운생동(氣韻生動)한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데서 우리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미술양식이나 흐름은 어차피 우리의 것을 찾을 수밖에 없고, 국적이 불분명한 예술양식은 생존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 선진국의 전문가들이 우리 미술을 보는 시각이요,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른바 독보적인 경지가 아니면 국제경쟁력에 대처할 수도 없고 또한 공존이 불가능한 그러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서양화가이면서도 소박하고 서민적인 성정(性情)을 남도의 민화(民畵)에서 배웠고 소나무와 학과 사슴과 구름과 하늘, 해와 달 등 민화적(民畵的)인 장생(長生)의 소재들을 어릴 적부터 보고 느낀 것이 작가의 정신주의로 승화되어 오늘날 작가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만 든 것이 아닌가 싶다.
지난 70년대는 자연의 실상을 정직하게 묘사했던 사실주의 경향의 화풍들이 바로 초기 작가의 작품 성향이었고, 그 후 빛과 색채가 어우러진 인상파화풍을 철저히 수학했던 것도 바로 스승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 무렵이 다양한 회화양식을 폭넓게 깊이 두루 섭렵을 했던 시기였다. 다시 말해 풍경, 정물, 인물, 꽃그림 등 주어진 소재는 무엇이나 소화해 냈던 의욕적인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재와 양식상의 표현의 한계 때문에 작가의 내면세계에서의 고민과 갈등은 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화가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세계에 태어나 좋든 나쁘든 자신의 길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나에게 창작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어쩌면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작가는 당시의 심경을 작업노트에 적고 있다.그 후 86년부터 90년 초까지 그는 새롭게 변신을 하는 변화주기를 맞는다. 이때의 작품의 경향들은 주제와 형식, 그리고 기법과 방법론 등 종전의 섬세하고 아름답게 수놓아진 공필적인 선묘 등 텍스춰적인 표현주의 욕구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장황한 설명을 생략해 버린 깊고 두터운 덩어리진 형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2년 2인전에서 보여준 작품 <連抱之木> <蓮> <瀑布> <장터의 여인> <아침의 경> <年初風景> <心琴> <心肝> <心佛> 등은 외형보다는 심리주의적인 변화를 읽을 수 있고 한국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형상의 이미지들이 화폭을 수놓고 있다. 그 후 95년부터 2002년까지의 근작들은 추사의 ‘유천희해(游天戱海)’사상처럼 기존 질서를 벗어 던진, 형식과 규제의 틀을 깨어버린 자유의 미학을 누리고 있다. 도식적인 화면구성이나 산등성이에 길게 가로 누은 은백의 구름이나 실타래를 늘어뜨린 듯한 세류폭포(細流瀑布), 연못에서 물을 마시는 토종 말, 그 위에 기러기가 나는 형상 등은 초현실주의의 극치를 보는 느낌을 갖게 한다. 한때 여인과 누드를 즐겨 그렸던 작가는 관능적이고 매끈한 몸매의 여인상(女人像)이 아닌 인종으로 길들여진 소박하고 우직한 한국여인의 환타지를 메타포로 연출하고 있었다. 그의 여체는 풍만하고 믿음직하면서도 에로틱한 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인의 인자하고 정이 넘치는 어머니상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그의 예술의 한 양식이었다. 얼마전 작가는 <金剛山의 饗宴>이라고 하는 3000호 크기의 일만이천봉 대작을 완성했다. 1년 6개월 동안 페인트와 캔버스를 상대로 지루한 씨름을 한 결과 완성된 금강산, 특히 만물상이나 봉우리를 보고 수많은 군중이 일만이천
서로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금강산 전체의 이미지를 남북의 민족이 만나는 형상으로 승화시켰다. 이 작품은 작가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 기증되었다. 선홍의 가을빛으로 물든 이 작품 속에는 민족의 얼과 기상이 살아 숨쉬고 있다.
김남수 / 미술평론가
향수(鄕愁)는 내 그림의 본향(本鄕)이다. 코흘리개 어린시절 개천을 따라서 고무신으로 물을 퍼올려 미꾸라지랑 피라미를 잡던 모습이 눈에 선연한데, 50여년을 줄곧 살아온 이곳이 내 고향인데, 고향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이다.
후한 인심(人心)을 가진 동네사람들은 모두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나 혼자서만 못나게(?)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지키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동네의 이름도, 풍경도, 그 맑고 상쾌하던 공기마저도 모두 변해 버렸다.
그러나 다시금 나의 뇌리에서 고향이 살아 숨쉬고, 고향의 자취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지금은 고층 건물의 숲이 되어버린 지 오래지만 어릴적의 향수는 끊임없이 고향의 자연과 삶의 이상향을 그림 속에서 만나게 한다.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자연, 어김없이 자연의 섭리를 무언(無言)의 교훈으로 가르쳐 주는 신실(信實)한 자연, 그것은 무한한 생명의 원천이다.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삼라만상이 저마다의 때깔과 향기로 어우러져 으시대던 고향의 자연 앞에서 나는 세상의 허물과 아집의 찌꺼기를 훌훌 벗어 던지고 진정한 자아 발견의 찬연한 꿈에 잠기곤 한다.
내 고향은 광주의 ‘서방’이다. 또는 ‘말바우’라고도 한다. 좀 생소하게 들릴 지 모르나 지금의 ‘우산동’ ‘풍향동’ 일대의 상가를 중심으로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할까? 하기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1년이면 아니 한 달이면 변하고 마는 게 요즘 세태(世態)가 아닌가. 변하여도 이렇게나 변할 수 있을까? 자꾸만 자연속에 뒹굴고 자연의 품에 안겨 살던 때가 해가 갈수록 그리움을 더해간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없지 않다. 잘 손질된 아스팔트 길도, 옹립(擁立)하는 빌딩도, 아파트 숲도,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물질문명의 대명사인 상가도, 혼탁함으로 가득찬 도시의 소음도,끝이 없이 긴 차량행렬도 없어 좋았다.
땅거미가 질 무렵 지금의 대인시장에서 서방까지 밤길을 혼자 걷노라면 할머니가 들려 주시던 호랑이 이야기이며 귀신은 또 왜그리 많았던가. 종류도 다양한 귀신들이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호젓하고 쓸쓸한, 거기에 괴기스러움마저 감돌던 그때의 밤 풍경은 내 젊은 날의 감성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었다.
내 고향은 무장한 경호원을 방불케 하는 소나무가 뒷산의 포근함을 더해 주고, 실개천은 마을을 휘감아 경향호(지금의 시청부근)로 흐르는 전원적 풍경이었다. 봄이면 개천을 따라 마을 아이들과 피라미를 잡고, 물장구도 치며 뛰놀고, 가을이 오면 맑은 하늘이 나의 무대, 내 공상, 환상의 무한한 공간이며, 여기에 내 감성의 응어리들을 모아 구름에 실어 흘러 보냈다.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결실의 들을 바라보며 추석이면 동산에 떠오르는 중추 명월에 슬며시 자리를 내주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것을 지켜 보았다.
그것은 차라리 고요하고 아담한 산수화 한 폭이다. 특히 지금은 전설처럼 남아있는 태봉산(지금의 광주역)을 옆으로 끼고 증기 기관차가 극락강 숲 속으로 미끄러질 때면 차라리 서글퍼진다.
‘극(極)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에 차라리 울고 싶어졌던 것이리라.
‘서방’마을이 없어지고 복잡한 상가로 변모했다. 정말이지 그 안타까운 심경은 형용할 수가 없었다. ‘고향의 상실(喪失)에 대한 비애(悲哀)’는 나에게 조숙한(?) 답답증을 선사했고, 끝이 없는 고향에의 그리움은 그때부터 시작 되었다.
작가의 작품세계는 성장과정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 수십년을 ‘서양화’라는 재료를 가지고 그려왔지만 고향의 향수를 재산목록 1호쯤이나 소중하게 포장하여 가슴에 묻어둔 채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한다는 것이 결국은 개천을 따라 피라미 잡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 오히려 감사하기만 하다.
내 그림 속의 주요 소재인 산의 모습, 구름, 초가, 자연의 모두가 그때의 풍경들이다.
그 풍경들과 정감을 그림 속에서나마 만날 수 있는 나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때를 생각하며 나는 자연 속에 관념의 소재로 머물지 않는 진실한 삶의 여망을 담은 상징물로서 한 칸 초옥을 짓고 싶다. 거기 아득한 마음을 앉히고 자연의 호흡 속에서 한 장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살고 싶다.
나의 작품세계에 대한 다른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노의웅의 작품에서는 동시대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는 이상향과 서정성이 나타나고 있다.
곧 산과 강, 그리고 학이 나타나는 산마을과 강마을의 서정성, 우리가 아무런 걱정없이 조용하게 살아가고 싶은 이상향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 속에서는 우리 삶의 안식처가 있고 따뜻한 이야기가 있으며, 편안하게 보여지는 시각의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 또한 내가 성장하고 살아온 고향의 이야기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되어 진다.
내 고향 ‘서방’마을의 놀이터에 멀리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겨울의 한가운데에 의연한 자태로 버티고 서서 인고(忍苦)의 아픔을 이겨내던 나목(裸木)들이 푸르름에 대한 기대감으로 꽉차있다. 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안타까워 견딜 수 없을 때 붓을 들고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향수와 서로 교감한다.
내 고향의 향수를 나만의 감성적 색채로 표현할 수 있음에 늘 감사하고, 거기서 누릴 수 있음에 또한 감사한다. 나는 오늘도 이 땅에 태어난 기쁨으로 화폭에 내 고향의 환상을 담는다.
아트페어
2006 한국구상대제전
노의웅 Ro, Eui-Woong
2006. 5. 8 - 5. 14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
나는 꿈을 안고 환상을 담는다.
무궁한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자연, 그 앞에 서면 생명을 부여받은 것들이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로 어우러져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됨을 알게 된다.
자연은 나의 스승이다. 나는 자연으로부터 어울림의 미학을 배우며 공존의 도(道)를 터득한다. 그리하여 나는 두터운 마음의 벽을 허물고 배타(排他)의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겸손의 미덕을 배운다. 나는 자연을 옮겨 화폭에 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자연은 그 천연의 물빛에 젖어 동화된 나를 용렬함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천혜의 자연 속에서 남다른 감각을 가지고 남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또한 내 느낌을 지유롭게 색채로 표현할 수 있으며 거기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음에 더 없이 감사한다. 하나하나를 보면 대립된
원색일지라도 함께 나타나면 서로 도와주고 활력소가 되는 무극대도(無極大道)의 원리, 저마다의 존재가 분명하면서도 전체로 혼연일체가 되어 교향악을 이루는 원리, 나는 자연 속에 관념의 소재로 머물지 않는 진실한 삶의 여망을 담은 상징물로서 거기에 아늑한 마음을 앉히고 자연의 호흡 속에서 한 장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살고 싶은 꿈을 안고, 오늘도 화폭에 내 찬연한 환상을 담는다.
- 작가노트 중에서 -
주요약력 |
■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 개인전 14회 ■ 전라남도 미술대전 특선 및 수석상, 최고상 수상 ■ 목우회 공모전 특선 ■ 국전 및 대전 특선, 입선 10회 ■ 미술21선정 올해의 작가상 수상 ■ 아트그라푸스 수상(일본 Art Graph) ■ 일본 예술공론상 수상 ■ ’98 국제미술교류대전 우수작품상 수상(한국, 일본, 중국, 대만) ■ 일본 아사브 미술장관상 수상 ■ 국제미술교류 제주도 도지사상 수상 ■ 국제미술제 북경전 주임상 수상 ■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 초대전 초대작가 ■ 광주시립미술관 초대작가 ■ 전라남도 미술대전 초대작가 및 운영위원 ■ 국민예술협회 초대작가 및 운영위원 ■ 광주광역시 미술대전 초대작가 및 운영위원 ■ 무등미술대전 초대작가 및 운영위원 ■ 한국예술문화협회 초대작가 ■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초대작가 ■ 세계평화미술대전 초대작가 ■ 광주시립미술관 운영위원 ■ 사단법인 국미회 운영위원 ■ 전라남도 미술대전 운영위원 ■ 한국목우회 공모전 심사위원 ■ 광주광역시 미술대전 심사위원 ■ 춘향미술대전 심사위원 ■ 전국무등미술대전 심사위원 ■ 한유회 미술대전 심사위원 ■ 국민미술대전 심사위원 ■ 경남미술대전 심사위원 ■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 현재 ■ 호남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운영위원 ■ 호남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 ■ 한국미협, 청동회, 목우회, 파리로아아드작 박물관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