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信仰이란 무엇인가
課目: [世界基督敎대사상]
한영신학대학교 대학원 제3기 목회연구원 - 김 덕 룡
[一 ]信仰이란 궁극적 關心을 갖는 狀態다.
信仰이란 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이다. 信仰의 動態는 인간의 궁극적 關心의 動態다. 즉 인간은 自身의 궁극적인 關心에 의해 이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一切行爲를 그 궁극적인 無制約的 性格과 要求에 전적으로 服從시킨다. 이것은 信仰의 行爲에서 받아들여지는 궁극적인 成就의 약속이기도 하다.
舊約聖書에 나타난 信仰 역시 要求와 威脅과 약속에서 궁극적 關心의 性格을 가졌다. 당시 關心의 內容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個人과 모든 國家에 대해서 정의를 代表하기 때문에 정의의 하나님이시며, 또 普遍적인 하나님, 宇宙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當時 경건한 유대인의 궁극적 關心이 對象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으로 큰 계명을 주어졌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신9:5] 이것이 궁극적 關心의 참 의미이며, 이 말에서 ‘궁극적 관심’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순수한 信仰의 性格과 궁극적 關心의 主題에 대한 全體적인 服從의 要求를 표시하고 있다.
舊約時代 이러한 服從의 本質을 具體化 시키는 命令과 그것과 關係되는 약속과 威脅들이 가득 차있다. 이러한 威脅이 國家적 滅亡과 個人적 破滅을 통해서 成就를達成하지 못하는 것이긴 하지만 舊約聖書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信仰은 야훼에 대하여, 그리고 그가 要求와 威脅과 약속에서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그리고 無制約的으로 關心을 갖게 되어 있는 것이다.
信仰이란 궁극적으로 關心되어져 있는 狀態를 말한다. 舊約聖書의 사람들의 야훼信仰은 自身의 生存과 國家적 滅亡과 個人적 破滅의 關心事가 야훼의 要求와 약속그리고 그가 느끼고 있는 威脅의 전적인 服從의 關心事 이였고, 現時代 서양인의 成功이나 社會的 地位나 經濟力에 대한 궁극적 關心事 모두 要求와 威脅과 약속의 전적인 服從의 關心이라는 것이다. 成功이나 社會적 地位나 經濟力에 대한 關心은 자신의 目的을 到達하기 위하여 創造적 에로스를 犧牲시키는 한이 있어도 그 자체의 法則에 無制約的으로 服從할 것을 要求한다. 그 威脅은 社會적 및 經濟的 패배요 그 약속은 자기 存在의 成就이다.
[二] 信仰은 인간 정신의 求心力인 行爲이다.
信仰은 궁극적인 關心에서의 전 人格의 行爲이다. 궁극적인 關心으로서의 信仰은 전 人格의 行爲이라 하는 理由는 信仰이 人格적 生活의 中心에서 일어나며 그 모든 要素들을 包含하기 때문이다. 信仰은 인간의 全體적 存在의 한 特殊한 部分이지만 그 한 特殊한 技能의 運動은 아니다. 그 모두가 信仰의 行爲 안에 聯合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信仰은 그 影向의 總體가 아니며, 每個의 特殊한 影向과 함께 그 모두의 全體도 超越하고, 그 自身은 그 每個에 決定的인 影向을 준다. 또한 信仰은 全體로서의 人格적 行爲이므로 그것은 人格적 生活의 역학에 속하고, 信仰은 人格 構造에의 無意識적 要素의 참여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들은 항상 存在하며 주로 信仰의 內容을 決定한다. 그러나 반면 信仰은 意識的인 行爲이며, 無意識적 要素들은 그것들 每個를 超越하는 人格적 中心으로 섭취됨에만 信仰의 創造에 참여한다.
[三] 信仰은 人格的 自我의 全體的이고 中心 있는 行爲이고,
無制約的이고 無限 하고 궁극적인 關心의 行爲이다.
사람은 自身의 直接的인 人格적 中心 있는 行爲에서 궁극적인 것, 無制約的인 것, 絶對的인 것, 無限한 것의 의미를 理解하는 能力이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信仰을 인간적인 可能力 으로 되게 한다. 이러한 可能力은 現實을 향해 몰아치는 힘이 된다. 사람은 그가 속해 있는, 그러나 결코 自身 것이 아닌 無限을 의식함으로서 信仰에게로 달려간다. 여기서 信仰 이라 하는 無制約的인 關心은 無制約者에 대한 關心이다. 즉 無制約的인 熱情은 無制約者에 대한 熱情이고, 궁극적인 關心은 궁극적인 것으로 經驗 되어진 것에 대한 關心이다.
인간의 求心적인 行爲로서의 信仰의 主觀과 客觀적인 의미로부터 그 客觀的인 의미, 즉 信仰의 行爲에서 意味되어지는 것을 硏究하고 分析 하였다. 허나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所謂의 궁극적인 궁극성의 要素와 우리가 보는 無制約的인 것과 無制約者의 要素의 모든 것은 단지 우리의 判斷에 의한 暫定적이고, 一時적이고, 有限한 것에 대해서 인간의 宗敎 意識 속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궁극적 關心이라는 말은 信仰이라는 한 行爲의 主觀的면과 客觀적인 면을 聯合하고 있다. 첫째는 人格의 求心적인 行爲 곧 궁극적 關心에 대한 古典的用語이고, 둘째는 이 行爲가 향해지는 곳, 신성의 상징들로 표현되는 궁극자 自身에 대한 古典적 用語이다. 이 둘의 關係와 區分은 대단히 重要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그러한 것은 아니다. 한 면은 다른 한 면이 없는 存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關係는 서로 獨立하면서, 또 서로 依存하는 關係이다. 그러므로 信仰이란 그것이 향해지는 內容 없이는 있을 수가 없다. 역시 信仰의 行爲에서 의미되어지는 어떤 것은 항상 있다는 것이다.
信仰의 行爲 이외에는 信仰의 內容을 가질 理由가 없다. 궁극적인 관심의 상태에서 신성한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닌 모든 說往說來는 무의미하다. 信仰의 行爲에서 의미되어지는 것은 信仰의 行爲를 통하지 않고는 달리 接近할 方法이 없기 때문이다.
信仰은 궁극적이다. 무제약적이다. 무한하다. 절대적이다. 하는 말들의 主觀과
客觀의 차이가 극복된다. 신앙의 행위라는 궁극자와 신앙의 行爲에서 의미되어지는 궁극자는 똑같다. 바울이 ‘하나님에게 알려진 바대로 알려고 하노라’[고전2:13]
고 말할 때 그에 의해서 표현된 것 이다.
하나님은 同時에 主體가 되시지 않고서는 客體가 되 실수 없다. 바울에 의하면 成功적인 기도도 우리 안에서 기도 하시는 聖靈으로서의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하다. 추상적인 言語로서 표현된 經驗은 궁극자와 無制約者의 經驗에서 日常적인 主客 圖式이 사라진다는 事實이다. 信仰의 行爲에서 이 行爲의 根源이 되는 것은 主觀과 客觀의 분열을 超越하여 나타난다. 그것이 主客觀 으로서, 그러면서 그것들을 超越해서 現存한다.
信仰의 이러한 性格은 참다운 궁극성과 거짓 궁극성을 區別하는데 필요한 부가적 基準을 준다. 無限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無限을 주장하는 有限자(국가, 성공)는 主客 圖式을 超越하지 못한다. 이것은 신자가 主體로서 바라보는 客體인 것이다. 信仰은 信仰의 主體과 客體에서 관계에서 우리는 主體에서 바라보는 客體(주체) 즉 主體와 客體의 同時性, 統一性, 無限性, 可變性, 有限性 상태에 의해 信仰의 궁극적인 관심의 상태가 무한성과 유한성으로 나타나고, 主體와 客體의 分裂이 일어나는 것이다. 궁극적인 無限的인 관심, 즉 無限자에 대한 관심과 궁극적인 有限적인 有限자에 대한 관심, 前者는 참 信仰이고, 후자는 잠정적이고, 실존적인 실망이고 우상적인 信仰의 동태이다.
[四] 신앙과 거룩, 회의, 공동체
거룩이란 신적인 것이며, 우리의 궁극적 관심의 內容의 現存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信仰이 있는 곳에는 거룩한 의식이 있다. 이는 자기의 궁극적 관심의 대표자들과 만나는 方式이다. 모든 거룩의 經驗과 궁극적 관심의 經驗을 살펴본다면 거룩이 두 가지 技能의 理由가 있다.
1. 인간의 마음은 무한을 추구한다. 그곳에서 유한자가 쉬기 원하는 곳이기 때문
이다. 무한에서 그는 자신의 성취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궁극성이 나타나는
모든 것의 황홀적인 끌어당김과 매혹의 이유인 것이다.
2. 반면 궁극성이 나타나서 우리를 끌어당긴다면 우리는 동시에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에 존재하는 자로 무한자에 무한 한 거리를 깨닫게 되고 또한 무한에 도
달하려는 유한의 노력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도 이해할 것이다. 신의 현존 안 에서 소멸되는 것 같은 느낌은 인간과 거룩하신 자에 대한 관계의 가장 깊은 표현이다. 그것이 모든 순수한 信仰行爲에 궁극적 모든 상태에 들어있다.
모든 종교의 제사, 예배 등 이러한 형식의 모두 거룩한 자와 만난다는 의미로 이러한 방식으로 무한 한 멀리 계신 분이 우리와 가까이 하시며 現存하신다. 거룩하신자는 이 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다. 이것이 신비요 그 가까이 할 수없는 성질이다. 무조건적인 것에 도달하는 조건적인 길은 없다. 그러므로 거룩의 신비적 성격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에 모호성이 있는 것이다. 거룩한 자는 창조적이기도 하고 또한 파괴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렵고 소멸시키는 要素도 파괴적이고 創造적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신앙과 우상적인 신앙을 구별하여보면 악마적인 또는 궁극적으로 파괴적인 거룩은 우상적인 신앙의 내용과 동일하다. 우상적인 신앙이라하더라도 여전히 신앙은 신앙이고, 악마적인 거룩이라 하더라도 거룩은 거룩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종교의 모호성이 가장 잘 나타나고 신앙의 위험이 가장 분명한 곳이다. 신앙의 위험은 우상적이고, 거룩의 모호성은 그 악마적인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거룩은 분리된 것, 초월적인 것, 매혹적인 것, 全的他者, 의 의미 속에 창조적이고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우리를 치유하기도 하지만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無限者에 의해 사로잡히고 無限자 에게 향해진 유한한 존재의 행위이다. 그것은 유한한 행위의 모든 제한을 수반하는 유한한 행위에, 또한 그것은 무한자가 유한한 행위의 제한을 넘어서 참여하는 행위이다. 신앙은 그것의 경험인 한에서 확실하다. 신앙은 확실성도 주고 불확실성도 준다. 신앙은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요소도 주는 직접적인 각성의 요소들을 내포한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기이다. 과감성과 용기가 있는 곳에는 실패의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모든 신앙의 행위 에는 이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본성과 함께 자아에서 주어진 실재이다. 모든 신앙의 행위는 언어의 표달이 필요하다. 언어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있을 수가 없다. 또한 언어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종교적 경험도 있을 수가 없다. 사람들의 모든 정신적인 생활의 기능 안에 있는 특수 언어 관계는 특히 종교적 언어는 신자들의 공통체에서 창조되며 이 공통체 밖에서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다. 그러나 그 안에서 종교적 언어는 신앙의 행위로 하여금 구체적인 내용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모든 인격의 행위가 그러한 것 처럼 신앙은 그 언어를 필요로 하며 언어 없이는 시낭은 맹목적이고 내용에도 향해지지않고 그 자체를 의식하지도 못한다. 오직 이러한 공동체에서 공동체의 일우너으로 자기의 궁극적인 관심의 내용을 가질 수 있다. 오직 언어의 공동체 안에서 인간은 그의 신앙을 실현할 수 있다.
첫댓글 간단히 설명하면 신앙이란 궁정적인 사고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맏기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