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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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연혁의 시원은 문헌상 삼한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삼한시대 마한,진한,변한 등의 15개 소국 가운데 일부였으며 이 중 마한은 약 54개의 부족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지금의 오산시와 수원시, 화성군이 속해 있었던 수국은 모수국,원양국,상외국으로 이 중에서 오산은 모수국(현재의 오산,태안,정남,동탄,양감,향남,봉담,매송면 일대)에 위치하였다고 추정한다. 이어 모수국은 삼국시대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의하여 고구려에 편입되면서 상외국과 함께 매홀군(買忽郡)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현재의 부산동과 세마동에 위치한 독산성(禿山城)의 역사성이다. 삼국사기 권 제24 백제본기 제2 고이왕 5년(AD 238년) 2월조에 의하면 ‘왕은 부산에서 사냥을 하고 50일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부산을 진위(振威)부산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진위현 전의 부산현은 오늘날의 오산시 부산동 부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독산성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사기 권 제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溫祖王) 11년 (기원전8년) 7월조에 ‘독산책,구천책의 양책을 설치하고 낙랑의 침략을 막았다’ 는 기록과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내물이사금 18년(373년)에 ‘백제의 독산성주가 남녀3백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여 왔으므로 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문헌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오산의 역사는 약 2천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삼한시대로 볼 수 있다. 이토록 오산지역은 삼국시대에는 격전지로 되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획일적,능률적인 행정체제를 갖추기 위하여 실시된 경덕왕(景德王) 16년(757년)에 백제, 고구려의 고토(故土)를 포함한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로 통합하면서 매홀군은 한주에 속하게 되었고 수성군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이때에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현재 오산시에 속해있는 진위 일부(갈곶동,청호동,고현동)는 부산현에서 진위현으로 함께 개칭된 것으로 미루어 분명히 오산 연혁의 시원은 삼한시대부터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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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에 들어와서는 고려의 태조가 후백제를 치기 위해 수성으로 남진할 때 수성인 김칠, 최승규 등 2백여 명이 귀순하여 고려 건국에 공로가 있었다 하여 태조17년(934년)에 수주(水州)로 승격되었고 그 뒤 성종14년(995년)에 지방관제를 개편할 때 수주의 별호를 한남(漢南) 또는 수성(隋城)이라 하고 도단련사를 두었다가 목종 8년(1005년)에 혁파되었다. 그리고는 지방행정의 통제,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지방제도를 정비한 현종9년(1018년)에는 다시 수주로 승격되어 지수주사(知水州事)를 두었고 그 후 원종 12년(1071년) 수주를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수원으로 개칭되었다가 그 뒤 다시 수주목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충선왕 2년(1310년)에 수주목은 수원부(水原府)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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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3년(1394년)에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양광도(楊廣道)에 속해있던 수원부를 경기도로 편입하였고 그 뒤 태종 13년(1413년)에 전국을 8도로 나누고 지방 제도를 개혁할 때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중종 21년(1526년)에 수원군으로 강등되었다가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5년(1602년)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게 하여 국방상 요충지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실록에 의하면 태종 3년(1403년) 계미에 왕이 『수원부(水原府) 오산(烏山)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종 6년(1425년) 을사에는 『대가가 수원부 오산원 들에 이르니 부사 조극관이 와서 뵈었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 초기부터는 오산 지역이 어느 정도 행정구역의 면모를 갖추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문헌상의 기록으로 보아 오산은 예부터 한반도의 중심지역으로, 군사적 요충지로서 전장으로 많은 애환이 서린 곳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의 기록은 이외에도 신경(申炅?1613~1653)이 지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도 ‘수만의 군사를 세진으로 나누어 오산역 등지에 진을 치고 왕래하며 도전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안정적이고 확고한 행정구역으로 정착한 것은 조선중기 영?정조 시대에 와서였다. 영조시대에는 사도세자가 온양으로 가던 중 독산성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으며 정조 13년(1789년)에 정조가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왕 사도세자의 묘를 현재의 화성군 태안읍 송산리의 화산(花山)으로 이장하면서 당시까지 화산일대에 있던 수원부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 기슭으로 옮겼는데 이때에는 오늘날의 오산 행정구역이며 옛 오산이라 할 수 있는 5개 면이 있었다. 1793년(정조 17년)에 발행된 수원부읍지에 의하면 청호,초평,삼미,산성과 어탄(魚呑:지금의 동탄면) 일부가 오늘날의 오산지역에 속했다. 또다시 1831년(순조 31년)에 발간된 화성지(華城誌)에서는 4개면으로 문시면은 시봉면과 삼미면이 합쳐져 되었으며 범 8동, 산성면에는 범 5동, 청호면은 범7동, 초평면은 범 10동등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고종 32년 (1895년)에 지방 제도를 23부로 개정할 때 수원과 남양부는 인천부에 속하게 되고 광무 3년에는 4개면으로 청호면,문시면,산성면,초평면 등이 있다. 이에 앞서 건양(建陽) 원년 고종 33년(1896년) 8월 4일에 23부제를 13도제로 바꿀 때 수원군은 2등, 남양군은 4등이 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1일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남양군은 아주 없어지고 수원군에 예속되었다. 같은 해 4월 1일 경기도 소재 면 명칭과 일부 구역이 바뀔 때 오산은 산성,문시,청호,초평 등의 4개면과 어탄면 일부를 통합하여 성호면으로 수원군에 속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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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이 행정구역상의 정식명칭이 아니라 속칭 오산의 의미밖에 없었으며 행정구역상의 오산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15년 조선총독부의 관보 제 757호의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4호 수원군 면내 동리의 명칭 변경 구역통보에서였다. 여기에서 비로소 리(里)의 명칭이기는 해도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오산리가 처음 등장한다. 1941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관보 제4427호 지방청 공문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26호에 의하여 성호면이 오산면으로 개정되었다. 참으로 길고도 기구한 변천의 역사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오산면의 명칭이 1949년 8월 15일 수원시의 승격과 함께 오산면이 탄생된 것으로 잘못 기록하여 각종 자료에 그대로 인용돼 있는데 이제부터 1941년 10월 1일부로 오산면이 된 것으로 바로잡혀져야 하겠다. 이어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조국이 광복되고 1949년 8월 14일 대통령령 제161호에 의하여 수원읍이 시(市)로 승격되면서 오산은 수원군 오산면에서 화성군 오산면으로 되었으며, 1960년 1월 1일 법률 제1175호에 의하여 오산면이 오산읍으로 승격되었고, 1987년 1월 1일부로 화성군 동탄면 금곡(金谷)3리가 오산읍으로 편입되어 은계리가 되었다. 이어 1989년 1월 1일부로 오산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9년 오산시로 승격할 당시에는 중앙동,역촌동,신장동,세마동,초평동,남촌동 등의 6개 행정동이었다. 그러나 역촌동의 동명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주민의 의사에 따라 1991년 8월 13일 시조례 제253호에 의하여 대원동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4월 20일 대통령령 제14629호에 의한 시,군 자치구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에 의하여 당시 평택군 진위면의 고현리?청호리?갈곶리가 오산시 대원동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오산시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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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연대 |
주요사항 |
고대 |
선사시대 |
구석기시대의 타제석기와 청동기시대 고인돌 발견 |
삼한시대 |
마한 보수국이었음 |
백제 |
B.C 6C |
온조왕 13년 백제 영역 |
고구려 |
475 |
개로왕 21년 고구려 지배 |
신라 |
757 |
경덕왕 16년 한산주로 후에 수성군으로 개칭 |
고려 |
898 |
고려 태조 왕건이 수주로 승격 |
1260 |
고려 원종 원년 오산이라는 지명이 보임 |
1310 |
충선왕 2년 수원부로 고침 |
조선 |
1481 |
성종시 동국여지승람에 수원부 오산원천이라는 설명이 보임 |
1611 |
광해군 3년 발간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도 오산원천이란 내용이 있음 |
1753 |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오산이란 지명이 보이고 3일과 8일 오산장이 선다는 기록이 있음 |
1863 |
철종 14년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 오산천이라는 기록이 보임 |
1896 |
수원군 청호면 |
근대 |
1914 |
수원군 성호면 |
현대 |
1941 |
수원군 오산면 |
1949 |
화성군 오산면 |
1960 |
화성군 오산읍으로 승격 |
1989 |
오산시로 승격(6개동) | |
오산 지명의 유래
기록상 처음으로 발견된 오산(烏山)의 지명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이미 "오산의 들판에 적진이 나열되었다"란 기록이 등장한다. 따라서 오산의 지명은 적어도 400년의 역사성을 가지며 이후 1530년(중종 25년)에 발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오산의 지명이 발견된다.(용인현 산천편 ; 구흥천(駒興川) : ......보축산남류입수원오산원천(寶畜山南流入水原烏山院川)
1861년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여지도에 오산의 지명이 보이나 장호천(현 진위천) 옆의 진위현이나 처인(현 용인)에 비하면 행정구역을 포함하고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오산 인근의 독성(현 독산성 세마대), 중미(현 죽미령), 내천(현 양감면 내천리)의 지명은 표시되어 있다.
오산의 지명이 확실하게 표현된 것은 1899년에 간행된 <수원군읍지>이다. 장시편에 오산장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행정구역상의 오산의 기록은 배제되고 있으나 그 기능이 시장으로서의 위치가 강조되고 있어 근대화에 따른 발전의 가능성이 크게 엿보이기 시작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1904년 경부선의 철도 부설에 따라 '오산역'이 설치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기약하기에 이르렀다.
경부선의 부설과 오산역의 신설은 우리 오산의 지금까지의 시장의 기능을 확대시켜 중심지적 기능을 급속히 강화함으로써 이 지역의 행정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갖추게 된다. 이에 따라 1912년에 드디어 청호면(晴湖面)에 부산, 가량곡, 원동, 역촌, 대청호, 갈곳과 함께 하오산, 상오산의 행정 지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오산(烏山) 지명의 성립
서울특별시와 대전광역시의 교통 연결선상에 위치한 오산의 지명에 대해 화성문화원에서 편찬한 화성문화 3호(1987년) <향토의 지명고 소고>라는 제목으로 당시 오산여자중학교(현 매홀중학교) 양재룡 선생님께서 발표하였다. 이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내 고장에 대해 바른 이해를 돕고자 한다.
현재의 烏山 지명이 정착되기까지에는 기록상 15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대략 400년이 걸렸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지명이 행정 지명화한 것은 1912년 청호면에 하오산리(下烏山里)와 상오산리(上烏山里)가 편입된 것이 오산의 공식 지명으로 인정된 최초의 행정 지명이었다.
문헌상의 고증은 어려우나 오산의 지명은 '오미장터'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미'의 말이 처음 전해지는 것은 '내삼미(內三美)의 전설'이다. 정조임금이 현륭원 행차시 이곳의 지명을 묻자 "문시백(文市百), 송산림(松山林)"이라 답하여 임금께서 文에는 필(筆)이 따르는 법이라 '필봉(筆峰)'으로 고치게 하고 이어 "문시백 필봉동을 송산골의 대송(大松), 점이골(현 죽미령)의 대나무골, 오미(梧美)의 오동나무가 아름답다"하여 이곳을 삼미(三美)로 부르게 했다고 전하여 '오미'가 등장되고 있다. 또 궐리사 성적도 편에는 "현륭원에서 멀리보니 오미 부근에 무수한 군조(群鳥)가 ...."의 내용이 전하고 있어 이곳에서 구전되는 오미의 지명 유래는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또 1899년 수원군읍지의 산천편에서 현 오산천의 이름이 오매천(烏梅川)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러한 '오미'를 어원으로 볼 때 그 변천의 결과 '오산'의 발음으로 바뀌어 부르게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오미-->오매-->오뫼-->오산의 음운으로 변천되어 왔으리라는 것은 그 변화의 일관성으로 보아 추측이 가능하다.
오산지명의 유래(오산의 발전)
1913년에는 성호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는 등 지역내 문화적 중심지로 급속한 발전을 꾀하기 시작하였으며 1914년 3월 1일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종래 청호면의 대청호, 갈곶을 진위면에 귀속시키고 대신 산성면의 세교리, 지곶리, 양산리와 문시면의 내삼미리, 외삼미리, 하세교, 중세교 및 초평면의전 구역을 합병하여 성호면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오산리는 성호면의 중심지로 성장을 계속하여 수원군내 제2의 도시로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이시기 상권의 지위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수원성내(북수)의 장날은 9일이었으며 연거래액은 179,229원(圓)이었으며, 오산리의 장날은 3,8일이었으며 연거래액은 174,307원이었다. 발안장은 5,10일이며 연거래액은 37,264원, 남양장은 3, 8일이었으며 연거래액은 9151원, 수원성내(산처)는 4일이 장날이며, 연거래액은 165, 830원으로 오산장이 제2의 경제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급격히 성장한 오산은 해방 당시 성호면이 오산면으로 개칭되었고, 1960년에는 오산읍 오산리로 성장하였으며, 1970년에는 화성군의 군청 소재지로 발돋움하였다. 1989년 오산시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산의 어원
오산(烏山)
목차
▣ 오산의 어원
오산의 지명 유래
1. 가수동(佳水洞) , 가숫골 2. 가장동(佳長洞) , 가장골 3. 금암동(錦岩洞) , 금바위 , 검바위 4. 궐동(闕洞), 구정말, 구정촌 5. 내삼미동(內三美洞), 안삼미실, 안삼미 6. 누읍동(樓邑洞) , 눕세 , 눕소 7. 두곡동(斗谷洞) , 말여울 8. 벌음동(伐音洞), 버르미 9. 부산동(釜山洞), 가마뫼 . . . 20. 탑동(塔洞), 탑마루
본문요약
▣ 오산의 어원
첫째. 한자로 오(烏)가 들어간 땅은 오산(烏山)뿐 아니라 '오소(烏沼)', '오정(烏井)'같은 것이 있고 그 이름은 '가막소' '까막샘'같이 부르고 있다. 따라서 '오산(烏山)'역시 '가막산' '가막뫼'같이 불린다. 그래서 '모양이 까마귀처럼 생겨서' '까마귀떼가 많이 날아와서'와 같은 유래가 생겼으며, '까막샘의 경우에는 '나뭇꾼들이 샘 가에서 점심을 먹고 흘린 것을 주워먹기 위해 까마귀떼들이 모여들므로' 그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으뜸', '높다', '신성하다'는 뜻인 옛말에서 나온 우리의 땅 이름 줄기이다. '가막' '까막'을 소리로 옮겨 적은 땅 이름이 한자로 된 '가막(加漠)'이고 뜻으로 옮겨 적은 것이 '오(烏)'이다. 그러므로 까마귀로 유래를 찾는 것은 한자 '오(烏)'를 의식한 것 일뿐 참다운 유래라 할수 없다.
예로 충남 홍성군 광천읍 신진리의 오루산(忠南 洪城郡 廣川邑 新津里의 烏樓山)을 일명 오성산이라고도 부르며, 이것은 까마귀가 사는 산이라는 뜻이 아니라, 신성하고 신령한 산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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