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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재물은 취금헌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가 발행하고,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이 지은 [충정공 박팽년 선생과 묘골 육신사 이야기]라는 책의 원고이다. 책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시간 나는대로 게재토록 하겠다. 강호제현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다린다.
1. 신의 한 수, 묘골의 풍수(風水) 이야기
우리나라 사람은 집터나 묏자리를 논할 때 으레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들먹이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풍수지리는 동양에 있어 중요한 개념인 천(天)·지(地)·인(人) ‘삼재(三才)’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동양학자 조용헌 선생은 삼재사상과 동양학과의 연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가 있다. 천(天)과 관련된 학문은 ‘사주명리학’이요, 지(地)와 관련된 학문은 ‘풍수지리학’이요, 인(人)과 관련된 학문은 ‘한의학’이라고. 필자 역시 상당 부분 이 주장에 공감한다. 그런 만큼 이번에는 동양학에 있어 중요한 한 축을 맡고 있는 풍수지리학의 측면에서 묘골을 한 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솔직히 우리 전통마을의 인문지리적 모습을 살펴보는 데는 이 풍수지리학만한 것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1. 풍수지리
우리나라 사람에게 있어 풍수지리는 정말 ‘필요악’인 것 같다. 솔직히 풍수지리에다 과학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뭔가 어설픈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시하자니 뒤가 켕기는 것이 영 찝찝하다. 그래서 말인데 혹세무민하면 빠지지 않는 ‘풍수도참설’도 결국은 풍수지리의 이러한 애매모호한 정체성 탓인지도 모른다.
풍수(風水)라는 말은 ‘장풍득수(藏風得水)’에서 나온 말이다. 장풍득수는 글자 그대로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풍수지리학은 장풍득수를 원리로 하여 땅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풍수는 관찰 대상에 따라 크게 ‘양택풍수(陽宅風水)’·‘음택풍수(陰宅風水)’로 분류되며, 접근방법론에 따라서는 ‘형기풍수(形氣風水)’·‘이기풍수(理氣風水)’로 나뉜다. 이 중 양택풍수는 살아있는 사람이 거주하는 터를, 음택풍수는 죽은 자의 터, 즉 묏자리 풍수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형기풍수는 터의 외적인 모양을, 이기풍수는 터의 모양에다 방위와 시간의 개념까지를 결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대중적인 맥락에서 풍수 이야기를 하려면 아무래도 ‘형기풍수적’ 접근을 할 수 밖에 없다. ‘이기풍수적’ 접근은 터의 모양 외에도 시간과 방위라는 복잡한 변수가 함께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에 대중적인 설명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형기풍수가 ‘더하기 빼기’라면 이기풍수는 ‘곱하기 나누기’쯤 되는 셈이다. 그래서 오늘 살펴볼 묘골의 풍수 이야기 역시 이기론보다는 이해하기 쉬운 형기론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다.
2.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회룡고미혈(回龍顧尾穴) 명당
일반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묘골의 풍수설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 혹은 ‘회룡고미혈(回龍顧尾穴)’이라 불리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파자설(巴字說)’이다. 먼저 회룡고미혈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회룡고조 혹은 회룡고미라 불리는 설은 기본적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을 용(龍)에다 비유한 것이다. 회룡고조는 용이 자신의 조산(祖山)[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되는 산, 산맥의 근원을 지칭]을 바라보기 위해 용머리를 돌려 뒤돌아보는 형국을 말한다. 회룡고미 역시 이와 비슷하다. 용머리를 뒤로 돌리되, 조산이 아닌 자신의 꼬리를 바라보는 형국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면 회룡고조와 회룡고미는 비슷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풍수에서는 이러한 형국의 명당을 특히 음택 명당으로 선호한다. 왜냐하면 용이 고개를 돌려 자신이 출발한 산을 되돌아보는 것을 마치 손자가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격이라고 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룡고조 명당은 산세의 높고 낮음, 험함과 순함 등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아무리 못난 손자라 하여도 다 품기 때문이란다. 이렇듯 할아버지 용(龍)의 사랑을 듬뿍 받는 회룡고조혈·회룡고미혈은 그만큼 발복(發福)이 크고 오래가는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묘골 풍수를 회룡고조혈·회룡고미혈로 설명할 때 딱 들어맞는 예가 하나 있다. 바로 묘골 박씨 문중의 선영이 그것이다. 묘골 박씨 선영은 마을의 좌청룡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데 사육신기념관 바로 뒤편 산등성이다. 이 지점은 회룡고조혈·회룡고미혈로 보면 정확하게 용머리에 해당한다. 이는 묘골의 랜드마크인 태고정에 올라 남쪽으로 마을을 조망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정면인 남쪽 방향에서 들어온 용이 마을을 가운데 두고 시계방향으로 정확하게 360도 회전을 한 뒤, 자신이 들어온 남쪽 방향을 향해 용머리를 땅 속으로 묻기 때문이다. 이때 땅속으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의 ‘용머리’ 부분 혹은 ‘여의주’에 해당하는 자리에 묘골 박씨 문중의 선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선영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한 묘가 박팽년 선생의 증손자인 박연손의 초배(初配)인 성주 여씨의 묘이고, 그 아래의 묘가 박연손과 그의 계배(繼配)인 현풍 곽씨의 합분(合墳)이다. 또 그 아래에 있는 쌍분(雙墳)은 박팽년 선생의 현손자인 박계창(朴繼昌)과 그의 부인인 인천 이씨의 묘이다. 그리고 묘역의 아래 영역에는 근래에 조성된 평장묘와 함께 다른 곳에서 옮겨온 묘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참고로 이곳 선영에 묻힌 인물들은 묘골 박씨 중에서도 직계로 내려오는 맏이 계열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회룡고미혈 명당 묘골. 용이 머리를 되돌려 자신의 꼬리를 돌아보고 있는 형국이다. 용머리 혹은 용의 입에 물려 있는 여의주에 해당하는 지점에 묘골 선영이 조성되어 있다.
묘골 순천 박씨 충정공파 선영
3. 파자형(巴字形) 명당
다음은 ‘파자설’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보자. 이 풍수설은 나지막한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접해 있는 묘골과 파회의 형국을 한자 ‘파(巴)’자에 대입하여 설명하는 설이다. 한자 파(巴)자는 머리 부분에 두 개의 네모가 있다. 파자형 명당이란 바로 이 두 개의 네모 안에 해당하는 터가 명당이라는 것이다. 이 설을 묘골에 직접 대입해보면 한쪽 네모 안에 파회가, 다른 쪽 네모 안에 묘골이 들어 있는 것으로 풀이를 한다. 그렇다면 왜 파 자의 네모에 해당하는 터를 명당으로 보는 것일까? 이는 ‘수구(水口)’와 관련이 있다.
동구(洞口)라는 말이 있다.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라는 노래가사에 나오는 바로 그 동구이다. 동구는 동네 어귀 또는 동네 입구를 이르는 말로 풍수에서는 다른 말로 ‘수구(水口)’라고 한다. 수구는 마을의 모든 물들이 한곳으로 모여 빠져나가는 지점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같은 골짜기 안을 우리는 ‘동(洞)’이라고 한다. 이 글자를 파자해보면 ‘水[물]’와 ‘同[같음]’이 되는데, 이는 물줄기가 같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동네라는 말은 같은 물줄기를 사용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어쨌든 동네의 크고 작은 여러 물줄기들은 결국 하나의 물줄기로 합쳐져 동네를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이때 하나로 합쳐진 물줄기가 동네의 경계 밖으로 빠져나가는 지점이 곧 수구인 것이다.
풍수에서 수구를 중요하게 취급하는 이유는 수구를 통해 물 뿐만이 아니라 명당의 좋은 기운도 함께 빠져나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을이 명당이 되려면 수구가 가급적 작거나 또는 마을에서 수구가 보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수구가 크면 클수록 그에 비례해 명당의 좋은 기운도 많이 빠져나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마을에서 수구가 빤히 보인다는 것은 수구 앞을 막아주는 보호 장치가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역시 명당의 기운이 아무런 장애물을 만나지 않고 쉽게 빠져나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이제 ‘파자설’에다 한 번 적용시켜보자. 파자형 명당은 글자[巴]에서 보다시피 수구가 한 방향으로만 열려있다. 그래서 파자형 명당을 수구가 잘 잠겨있는 좋은 명당이라 하는 것이다.
파자형 명당 묘골. 파(巴) 자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두 개의 네모 안이 명당인데 각각 묘골과 파회가 자리하고 있다. [사진출처: daum지도]
4. 신의 한 수, 묘골 귀인봉(貴人峰)
앞서 설명한 회룡고조·회룡고미·파자설 같은 이야기는 실제로 묘골의 지형을 잘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인공위성 사진자료를 참고하든지, 아니면 여러 차례 묘골을 방문하여 공간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면, 위 설명에 대해 아주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 질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위 두 가지 묘골 풍수설 외에 또 하나의 설을 더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이 설은 필자가 묘골 육신사에서 해설사로 근무하면서 나름 정립한 설이기도 하다. 참고로 필자는 2007년도에 모 기관에서 발급한 풍수지리사 1급 자격을 취득한 풍수학인이다.
‘안대(案帶)·일자문성(一字文星)·귀인봉(貴人峯)·수구막이 숲’
어째 말이 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아니다. 먼저 ‘안대(案帶)’에 대해 알아보자. 안대는 명당에서 앞쪽을 바라보았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산 등의 지형지물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안산(案山)’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안대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일반적으로 풍수에서는 발복(發福)의 크기는 용맥(龍脈)[산맥]에 달렸고, 발복의 내용은 안대에 달렸다고 본다. 다시 말해 안대를 살펴봄으로써 해당 명당에서 어떤 유형의 발복이 일어날 것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일자문성(一字文星)’이다. 이는 산 정상부의 모양이 ‘한일자[一]’형으로 평평한 것을 말한다. 일자문성은 귀(貴)와 문(文)을 모두 상징하는 것으로 풍수에서는 특히 안산에 일자문성이 있는 것을 ‘필봉’과 함께 아주 귀하게 쳤다.
다음으로 ‘귀인봉(貴人峯)’이 있다. 이것은 말 그대로 귀인을 상징하는 산봉우리를 말한다. 산의 모양이 마치 연꽃봉우리를 닮아 귀한 느낌을 주는 산을 말하는 것이다.
끝으로 ‘수구(水口)막이 숲’은 앞서 파자설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수구와 관련이 있다. 명당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구가 작거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만약 수구가 휑하니 열려 있다거나 또는 명당에서 바라보았을 때 수구가 빤히 보인다면 풍수적으로 좋지 않다. 따라서 수구막이 숲은 수구를 통해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숲을 말한다.
한편 풍수에서는 ‘간산점(看山點)’이라는 것이 있다. 주변의 풍수지리를 둘러보기에 가장 적절한 지점을 말한다. 요즘말로 뷰 포인트 혹은 포토 포인트쯤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앞서 설명한 묘골의 회룡고미·파자설을 확인하기에 적절한 간산점은 어디일까? 그렇다. 두말하면 잔소리, 바로 태고정 대청이다.[태고정 정반대편의 고갯마루도 아주 좋다.] 필자가 태고정을 왜 묘골의 랜드마크라고 하는지도 태고정 대청에 직접 올라보면 대번에 확인할 수 있다. 태고정은 누워있는 용, 즉 와룡(臥龍)의 몸통 중 가운데인 가슴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태고정 대청에서 남쪽을 향해 서면 좌우로 뻗어 있는 용의 머리와 꼬리를 한 눈에 다 볼 수 있다. 그런데 묘골을 찾는 많은 풍수인들이 놓치는 것이 하나 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태고정 마루에서 좌측[동쪽] 담장 너머를 바라보면 넓은 빈 공터가 보인다. 지금은 빈 터만 남았지만, 본래 이 터에는 묘골 최고의 부자로 알려진 ‘참봉댁’의 대저택이 있었다. 지금도 빈 터에 남아 있는 고목이나 연당(蓮塘)[연못]을 보면 당시 참봉댁의 규모를 어렴풋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다.[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예전에 대구에서 성주를 가기 위해서는 이 참봉댁 땅을 밟지 않고서는 갈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네 전통마을들을 보면 제일 큰집[주손가(胄孫家) 혹은 종가(宗家)]이 마을의 가장 ‘안쪽·뒤쪽·높은 곳’에 입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점은 묘골도 마찬가지다. 묘골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건물은 태고정이다. 그런데 예전에 이 태고정과 거의 동일선상에 놓인 집이 있었다. 바로 참봉댁이었다. 이러한 사실만 봐도 묘골에서 차지하는 참봉댁의 위상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여하튼 묘골 풍수의 마지막 진면목을 확인하려면 이번에는 태고정이 아닌 이 참봉댁 집터로 가야한다. 흙돌담으로 빙 둘러진 빈 집터의 가장 뒤쪽,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한 번 조망해보라. 태고정과는 직선거리로 불과 20-30m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태고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야말로 진경(珍景)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안정감을 주는 일자형 안산도 안산이지만, 가운데 두 산이 겹쳐지는 ‘V’자 지점 바로 뒤쪽으로 머리만 살짝 보이는 ‘귀인봉’이 정말 볼만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묘골을 귀인봉 명당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런데 묘하다고 해서 묘골인 만큼 묘골의 풍수 이야기 역시 이 정도에서 끝날 리가 없다. 더욱 흥미로운 것이 있으니, ‘일자문성+귀인봉’ 바로 아래에 조성되어 있는 ‘대나무 숲’이 바로 그것이다.
연꽃 봉우리형 귀인봉과 그 앞쪽에 조성된 비보 숲. 사진 속 묘골의 귀인봉을 가리켜 규봉(窺峯)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이는 그렇지가 않다. 낯선 이가 명당 안을 엿보는 것이 아니라 귀인이 반갑게 맞아주는 형국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면에서 머리를 곧추세우고 담장 안을 엿보는 정탐병은 있을 수 없다.
이 대나무 숲은 숲 바로 뒤쪽으로 나 있는 구멍을 가리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구멍이란 일자문성 가운데로 나 있는 묘골과 파회를 잇는 고갯길을 말하는 것이다. 일자문성 안산을 자세히 보면 귀인봉 앞쪽으로 ‘V’형으로 산이 움푹 꺼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묘골과 파회를 잇는 고갯길 때문에 만들어진 지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은 틈을 통해 명당 묘골의 생기(生氣)가 누설이 된다는 점이다. 마치 보(洑) 위쪽의 무넘기 요철을 통해 물이 빠져나가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 약점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조성된 숲이 바로 이 대나무 숲이라는 것이다.
첨언을 하나 하자면 이 고갯길은 파자설(巴字說)로 보면 명당에 해당하는 두 네모 공간사이를 연결하는 고리이며, 용설(龍說)로 보면 용의 몸통에 난 상처에 해당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대나무 비보(裨補)[모자란 곳을 채움] 숲이 ‘연결’과 ‘상처’의 자리에 너무나도 정확하게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야말로 정확한 진단에 절묘한 처방이다. 어쩌면 풍수인의 작품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작품, ‘신의 한 수’ 일지도 모르겠다.
5. 에필로그
풍수(風水)와 사주(四柱)를 소재로 하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가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만큼 조심해야 한다. 지나치면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허무맹랑(虛無孟浪)한 3류 소설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수와 사주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편 요즘 사람은 정황상 확실해도 눈앞에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안 해도 될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고 이번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다. ‘인걸은 지령’이라는 말도 있듯이 묘골이 진정 명당이라면 명당의 정기를 받아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인물이 많이 났어야 한다. 그런데 걱정하지 마시라. 실제 이곳 묘골에서는 인물들이 많이 났다. 수백 년 전 조선시대의 선비·관료들은 물론이요, 근현대의 인물들도 많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이곳 묘골로 장가를 들었는데, 부인인 박두을 여사가 이 마을 출신이다. 또한 민선 국회의원 9선 의원이자 제13·14·15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박준규씨와 15·16·17·18대 4선 국회의원인 박종근씨 역시 이 마을 출신이다.
육신사 경내에 세워져 있는 박준규 전 국회의장 생가터 표지석.
그 외 정계·제계·학계·문화계 등에서 이름을 드러낸 인사들의 숫자는 그야말로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이처럼 ‘인걸은 지령’이라는 말이 딱 맞아 떨어지는 곳이 묘골이다.
복원된 박두을 여사 생가. 생가 안내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삼성그룹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의 부인 박두을[1907-2000] 여사는 사육신의 한 분인 취금헌 박팽년의 후손으로 태어나 21세에 고 이병철 회장과 혼인하였다. 유교 집안에서 전통적 부덕을 익히며 성장하였고 일생 동안 바깥 활동을 삼가고 집안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특히 예의범절에 밝고 근검절약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왔다. 구전에 의하면 유년시절 여사의 관상을 본 한 승려가 왕비가 아니면 거부의 아내가 될 것이다 라고 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렇지만 현재 묘골은 개발과 보존이라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그동안은 묘골 박씨 문중을 중심으로 묘골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가 잘 계승·발전되어왔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 묘골의 자연경관이 너무 많이 훼손되고 있어 큰 걱정이다. 최근 ‘대나무 비보 숲’ 서편의 산언저리가 다 잘려 나갔다. 외지인이 이곳에 집을 짓기 위해 터 닦기를 하는 중인데, 산을 너무 많이 훼손한 것이다.
필자는 일주일에 1-2회 해설사 업무를 보기 위해 묘골로 출근한다. 그때마다 마을 초입에서부터 빤히 바라보이는 저 잘려나간 산자락을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하지만 일 년 365일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마음은 어떨까? 눈만 뜨면 보기 싫어도 봐야하는 마을 앞산.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졌던 그곳이 지금은 저처럼 누렇게 와룡(臥龍)이 제 속살을 다 드러내놓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나무 비보 숲만이라도 살려두었다는 사실이다. 여하튼 그것만큼은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잊지 말고 꼭 명심하자. 지금 묘골의 와룡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첫댓글 구구절절 깊은 의미를 알아 가는 재미가 참 좋습니다. 유익한 내용을 체계화 하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늘 행복하십시오.
사무사님^^
오랜만이십니다...
저의 글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또한 격려의 말씀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십시오^^
감사히 보고 갑니다...
잘배우고 인사드립니다...
평안 하세요...
네... 구름따라 흘르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