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심으론 종교 갈등이 지속되었지만 맡겨진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김제에 위치한 금산사로 정밀실측조사를 떠나게 되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주어진 일이 불교와 관련된 것이라 서먹하였지만은 정서적인 면에선 나와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다. 타고나길 산골에서 자라며 산과 들을 내 집 마당처럼 밟고 자란 터라서 심산유곡에 위치한 문화재 현장을 찾아다니는 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깊은 산중일지라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짐을 푼 첫날밤 우리 일행은 공양간에서 스님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리고 절에서 내 준 요사채에서 잠을 잤다. 그렇게 시작된 김제 금산사 정밀실측 조사는 약 10개월 간 지속되었다. 삼시 세끼 절에서 해결하고 저녁이면 잠자는 방에서 실측야장을 도면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앞서 완주 화암사에서 정밀실측조사를 했던 경험으로 적응력이 빨랐다.
정밀실측조사 중 처음 며칠 동안이 가장 힘든 시기다. 실측조사를 위해 건물 내외부에 낙엽송 비계목을 설치해야 하고 무거운 아나방(구형 발판)을 들고 높은 곳까지 낑낑대며 들고 나르고 해야 했다. 금산사의 정밀실측대상은 금산사 내 모든 목조건물과 석조물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미륵불을 봉안하고 있는 미륵전이다. 금산사 미륵전은 국내에서도 몇 안 되는 삼층 목구조로 그 위용이 대단하다.
이곳에서 내가 하는 일은 선배들의 잔심부름에서부터 실축조사 시 보조요원으로 쉴 틈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도면작도에서 건물을 그리는 일에선 제외되었다. 아직 도면 그릴 군번이 아니라는 점이 여기서도 작동되었다. 오히려 여유롭게 지낼 시간이 많아 좋았다. 점심을 먹고 선배들은 낮잠을 잤다. 그러나 난 한 번도 낮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때는 이때다 싶어 사찰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공부하는 승방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무단으로 들어가 스님들의 생활을 몰래 엿보았다.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너무 궁금해서다. 요즘 같으면 주거침입 죄로 고발 대상이었겠지만 스님들과 제법 친하게 지내면서 혹 스님이 나를 발견한다 해도 뭐 대수롭지 않게 여길 터였다. 그중 ‘지광’이란 법명을 가진 스님과 곧잘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나이로 보자면 큰 형님 벌 되는 셈인 데 나를 특별히 다정하게 대해 주셨다.
몸은 절집에 와 있었지만 새벽마다 5km를 걸어서 면소재지에 있는 어느 자그마한 교회로 새벽예배를 다녀오곤 하였다. 교회의 새벽예배 시간은 보통 오전 5시다. 걸어서 교회에 도착하려면 절에서 4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그때 신에 대한 나의 열정은 순수했고 뜨거웠다. 어느 날 컴컴한 새벽에 절 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저만치 앞에서 스님 한 분이 걸어오고 계셨다. 난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려는데 스님께서 날 먼저 알아보시곤 “아니 이 새벽에 어딜 가는 거야, 어 성경책은 왜 끼고 가” 지광스님이셨다. 난 피식 웃으며 “교회 갑니다.” 했더니 “아 언제 예수쟁이가 됐어” 난 또 웃으며 “스님 저 원래 기독교인입니다” 스님은 덩달아 웃으며 그럼 조심히 다녀오라 하시고 절로 올라가셨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지광스님과 난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저녁 공양을 마치면 아무도 없는 넓은 미륵전 앞마당에 앉아 종교 베틀을 벌였다. 스님이 이런 논리를 내세우면 나는 저런 논리로 응수하고 내가 이런 논리를 내세우면 스님은 저런 논리로 받아쳤다. 우리의 대화는 끝도 없는 평행선을 그렸다. 내 나이 스물두 살이다. 신학교 문턱도 밞아보지 않은 놈이 십수 년 절밥 먹고 불도에 전념한 스님과 무슨 종교 베틀이 되겠나. 지금 생각하면 스님이 나와 그저 이야길 하고 싶어서 못 이기는 척 응해준 것이라 생각된다. 어느 날 내가 먼저 “스님 이런 얘긴 이제 그만두지요 그냥 사는 얘기나 하고 지내시지요.”라고 했더니 스님도 그러자 하였다. 스님도 나름 바쁜 나날을 보내셨다. 절에서 맡긴 사무도 봐야 하고 개인적인 공부도 해야 하고 때에 맞춰 염불도 해야 하고 신도들과 접견도 해야 하고 그래서 내가 일부러 만남을 멀리하였다. 그러자 점차 스님과 마주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하루 종일 우리 일행은 미륵전 건물에 원숭이처럼 매달려 실측조사에 매진하였다. 저녁 공양 시간이나 돼야 스님 얼굴을 잠깐씩 보는 정도였다. 어느 날인가 스님이 넌지시 내게 말하였다. 밤중에 심심하면 자기 방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선배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나는 방을 나섰다. 스님이 계신 선방은 대적광전 뒤를 돌아 좁은 도랑을 건너 산기슭에 이었다.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헛기침을 하자 스님께서 반갑게 나를 맞아 주셨다. 스님이지만 그도 남자인지라 방안에선 사내 냄새가 났다. 그러나 피워 둔 향초가 그 냄새를 희석시키고 있었다. 그와 난 작은 차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때 처음으로 스님이 따라 준 차를 마셔보았다. 생전 처음 마셔 본 차의 맛은 참으로 오묘했다. 약간 떫은 것 같기도 하고 쌉쌀한 것도 같고 구수한 맛도 났다. 내가 신기 해 하자 스님이 차에 대한 이야길 늘어놓으며 아이처럼 얼굴이 해맑아지셨다. 염불 할 때의 근엄한 표정은 온데간데없다. 우린 그렇게 마주 앉아 무슨 얘긴지를 한참을 나누었다. 단출한 스님의 방안은 승복 몇 벌이 대나무 옷걸이에 얌전히 걸려있고 한쪽 구석에 한문으로 도배된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저걸 다 읽었느냐 물었더니 읽었단다. 속으로 무척 놀랐다. 스님 되는 길이 어지간히 힘들겠다 싶었다.
어지간히 실측조사가 진행되자 내게 새로운 일이 맡겨졌다. 완주 화암사에서 했던 것처럼 온갖 석조물들을 전담해 실측조사 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오로지 나 혼자서 알아서 하라는 거였다. 건축도면을 배우고 싶어 안달 난 내 심정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자기들 그리기 곤란한 석조물을 내게 맡기는 것이 분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순종하였다. 첫 실측대상은 미륵전 좌측에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는 금강계단이었다. 사각의 단 위에 종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돌 위에 아홉 마리의 용머리가 장식된 석조물이다. 금강계단과 관련된 전문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개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은 경내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높은 대지 위에 형성된 2중 방형기단 위의 중앙부에 석종형 사리탑이 세워져 있는 모습이다. 계단은 기단 위에 종 모양의 사리탑을 세우고 수계자에게 계율을 전수하던 곳이다. 금산사의 계단을 특별히 방등계단이라 하는 것은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의 근본이 계에 있고 계를 지키는 것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되므로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적 변천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이 언제, 어떤 사상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기록이 전하지 않아 개축된 시기나 내용도 알 수 없으나, 762년 금산사를 중창한 진표율사의 사상이 참회에서 미륵의 수계로 이어진 것을 보면 진표율사에 의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혜덕왕사(慧德王師) 소현(韶顯, 1038∼1095)에 의해 금산사가 크게 중창될 당시 재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면석마다 고려시대 양식을 보이는 조각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원명대사(圓明大師) 해원(海圓, 1262∼1330)에 의해 금산사가 다시 중창되면서 금강계단 역시 개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기단 면석 조각 중에는 조선시대 양식을 보이는 것도 있어 조선시대 들어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재 조성된 듯하다.
-내용 및 특징
금산사 경내 대적광전 오른쪽, 미륵전의 왼쪽으로 높은 대상(臺上)에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이 고려 전기에 조성된 오층석탑과 나란히 있다. 구조는 상하 2단의 정방형 기단 위에 석종 형 사리탑을 놓은 모습이다. 하층기단은 한 변의 길이가 1,250㎝, 높이가 80㎝이며 상층기단은 길이가 850㎝, 높이가 60㎝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다. 기단의 외곽에 길쭉한 석재를 이어 붙여 사리탑의 경계를 두르고 그 안쪽에 사리탑을 축조하였다. 기단 면석마다 고려시대의 기법이 잘 표현된 불상과 신장 상을 돋을새김 하였는데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하층기단의 3면에는 난간을 둘렀던 것으로 보이는 석주가 남아 있는데, 인왕 상으로 보인다. 난간의 사방 모서리 위치에는 사천왕상을 세워, 기단 영역의 내부가 성스러운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계단의 중앙부에는 한 장의 판돌을 깔아 사리탑의 탑신받침으로 삼았다. 탑신받침의 네 모서리에는 사자머리를 새겨 놓았으며 돌판 한가운데에는 연꽃잎을 둥그렇게 새겨 두르고 그 안쪽 테두리에 맞추어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날씬한 종모양이며 아래쪽에는 꽃무늬를 장식한 띠를 새겼고 꼭대기에는 아홉 개의 용머리가 밖을 향하도록 조각하였다. 이는 통도사 금강계단에는 없는 것이다. 구룡의 머리 위로는 연꽃무늬를 장식한 앙화를 얹고 그 위로는 위아래가 납작한 공 모양의 복발을 놓고 맨 위에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얹어 놓았다.
-의의와 평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계단형식의 사리탑 중 완전한 모양을 이루고 있는 예는 매우 드문 상황이므로,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현존하고 있는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은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아울러 돋을새김 조각으로 석단의 벽면 전체를 장식하고 탑신에 용머리를 장식한 점과 여러 군데에서 보이는 새김 장식에 나타난 조형 등은 김제 금산사 석종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국가유산청 공개사진 발췌
그늘이라곤 한 점 없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서서 실측조사를 진행하였다. 어쩌다 관광객들이 몰려오기라도 하면 난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사람들의 시선에 둘러싸여 어쩔 줄 몰랐다. 머리엔 커다란 밀짚모자를 꾹 눌러쓰고 얼굴은 마치 아프리카인처럼 새까맣게 그을렸고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이 창피하기도 했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다. 누가 처다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게 되었다. 석조물은 건물처럼 선으로 표현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엄밀한 의미에서 선이 없다. 눈으로 보기엔 사각형인 것 같지만 돌을 다듬어 사각으로 구십도의 모서리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처럼 기계절삭을 하지 않고 오직 날망치나 정으로 쪼아 모양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걸 구십도 모서리처럼 선으로 표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방법이다. 원래는 점을 찍어 음영으로 표현돼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석조물마다 점으로 표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석조물을 실측하는 동안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관찰하기도 하고 조금 떨어져서 전체적인 윤곽을 살피기도 하는 행동을 반복해야 한다. 너무 가까운 시점에서 실측하면 전체적인 윤곽을 잃어버리고 또 멀리 떨어져서 그리면 디테일한 부분을 놓치기 쉽다. 때론 손끝으로 손바닥으로 돌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돌의 표면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돌이 지니고 있는 형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금산사 말고도 수없이 많은 석조물들을 실측한 경험 때문에 어지간한 석조물은 손으로 만져보기만 하여도 그것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체득이지만 말이다. 암튼 그렇게 시작된 금산사의 석조물 실측 조사는 계속되었다. 연화대, 다층석탑, 혜덕왕사비, 노주, 부도전 일괄 석조물, 각 건물의 기단과 계단 및 초석까지 내 몫이었다. 그리고 미륵전에 봉안된 미륵불과 불단과 그 안에 숨겨진 무쇠솥까지 나의 고단한 실측조사는 금산사를 떠나는 날까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