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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하빈 전의이씨를 빛낸 전양군 이익필
프롤로그
하목정 뒤편 조금 높은 언덕에 사당 한 채가 있다. 전양군 이익필 불천위 사당이다. 현재 하목정과 사당은 한 담장 안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만 해도 이 담장 안에는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 하목정, 불천위 사당, 안채, 사랑채, 새사랑채, 행랑채, 곳간채, 연못 등. 이 모두가 하목당이라 불리는 전의이씨 예산공파 큰집 안에 있었던 것. 하지만 400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하목당 소유권에 여러 번 변동이 있었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소유권 변동과 함께 지금의 하목정과 사당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건물이 몽땅 사라지고 말았다. 그나마 위로가 되고 다행인 것은 아름다운 정자 하목정과 전양군 이익필 불천위 사당만이라도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전양군 이익필이란 인물과 그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하는 불천위 사당에 대한 이야기다.
귀신을 보고 싶어 하던 아이, 무과 급제 무인이 되다
이익필李益馝[1674-1751]은 낙포 이종문의 현손玄孫[4세손]으로 자字가 문원聞遠, 호는 하옹霞翁, 시호는 양무襄武다. 본래 다포 이지화의 장손인 이시격李時格[1638-1698]의 5남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수월당 이지영의 손자인 이진주李震柱[1662-1742]의 양자가 됐다. 7촌 아저씨 집에 양자로 들어간 것. 생부生父인 이시격은 숙종 때 무과에 급제하고 통정대부 벽동군수를 지낸 인물이다. 양부養父인 이진주는 증직으로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호조판서 전흥군全興君이며, 양모養母는 옥산장씨로 여헌 장현광의 증손자인 장영張鈴의 딸이다.
문중에서 전해져오는 구전에 의하면 이익필의 양모 옥산장씨는 대단한 여장부였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 이진주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두지 못하자 양자를 얻기 위해 강 건너 고령 상곡의 6촌 시아주버니 이시격을 찾아갔다. 당시 이시격은 슬하에 이익형·이익회·이익번·이익복·이익필 5형제를 두고 있었다.
옥산장씨는 곶감 한 접을 가슴에 품고 길을 떠났다. 하산과 상곡은 그리 멀지 않은 길이었으나 낙동강이 가로 막고 있어 배를 타야했다. 상곡 장육당을 찾아간 옥산장씨는 6촌 시아주버니 이시격에게 아들 하나를 양자로 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이시격은 막내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 중에서 양자를 보내려 했다. 하지만 옥산장씨는 반드시 막내인 다섯 째 이익필이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사실 옥산장씨는 사전에 다섯 형제에 대해 면밀히 알아보고 다섯 째 이익필을 이미 낙점해두었던 것. 이시격 역시 다섯 아들 중 제일 총명했던 막내만큼은 안 된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옥산장씨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챙겨간 곶감으로 끼니를 때우며 장육당에서 몇 날 며칠을 버텼던 것이다. 이리하여 얻은 양자가 바로 이익필이었다. 참고로 이시격의 5남 중 이익필의 형인 4남 이익복도 숙부인 이시두에게 양자를 갔다.
이렇게 7촌 아저씨인 이진주에게 양자를 온 이익필은 역시 인물이 남달랐다. 일례로 자신의 생가인 장육당 대청에서 발차기를 하면 발끝이 대들보에 닿았을 정도로 신체가 크고 강건했다고 한다. 또 어려서부터 간담이 얼마나 컸던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설처럼 문중 구전으로 전해진다.
이익필이 어렸을 때 일이었다. 한 번은 한 밤중이 다 되었는데도 이익필이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를 찾기 위해 마을 곳곳을 다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가족들이 그를 찾아냈다. 그를 찾아낸 곳은 놀랍게도 오래된 사당 안이었다. 가족들이 놀라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웃으며 “귀신이 진짜 있나 없나 확인하고 싶어 지켜보았는데 귀신은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또 한 번은 상곡 낙동강가 다산포茶山浦에서 밤마다 도깨비 소리가 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비 내리는 음침한 날 밤 다산포에 나가 살펴보고는 “도깨비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 망령되게 헛것을 보고 듣고서 하는 말입니다”고 했다.
이익필은 15-16세 쯤 학문이 무르익자 본격적으로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그런데 30세 되던 해인 1702년(숙종 28)[신도비명에는 1703년, 족보와 초상에는 1702년으로 되어 있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문과가 아닌 무과시험에 응시해 급제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무과에 급제한 이들이 관직에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울 권세가들을 찾아가 인사청탁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익필은 힘 있는 자들에게 청탁까지 하면서 벼슬 구하는 것을 구차하게 여겨, 고향으로 내려와 밤낮 책을 벗 삼고 시골 선비로서 지냈다. 이로부터 8년이란 세월이 흐른 37세 때, 드디어 그는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무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내직으로는 비국랑, 주부, 도사, 첨정 등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평해군수, 죽산부사, 전주영장, 선천부사 등을 지냈다. 그는 선천부사로 있을 때 칼을 든 대장부로서의 호연지기를 읊은 ‘의검정倚劍亭’이라는 짧은 시를 한 수 지은 적이 있다.
何時鏖大漠 어느 때 변방 사막에서 싸워 이겨
歌舞入長安 노래하고 춤추며 장안으로 들어올까
그런데 이 ‘의검정시’ 한 수가 이익필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됐다. 당시 접반사 오명항이 선천부를 지나다가 이 시를 보게 됐고, 이익필의 무관으로서의 자질을 알아보게 된 것. 이를 계기로 이후 무신란[이인좌의 난] 때 이익필은 도순무사 오명항의 우별장이 되어 무공을 세우고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고 수충갈성양무공신에 오르다
이익필은 52세 때인 1725년(영조 1) 내금위장으로 강계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다시 대흥중군에 제수됐다. 54세 때인 1727년(영조 3) 봄, 호남좌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됐다. 당시 남쪽 지방은 불온한 글이 나도는 등 민심이 흉흉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남쪽 지방 관리를 뽑을 때 특별히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했는데, 여기에 이익필이 발탁된 것이다. 그런데 미처 부임도 하기 전인 1727년 음력 3월 15일, 이인좌의 난[무신란]이 일어났다. 이인좌 등이 반란을 일으켜 청주성을 함락하고 절도사와 영장 등을 죽였던 것. 이에 영조는 난을 진압하기 위해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을 최고책임자로 하는 관군을 출병시켰다. 이때 영조는 도순무사를 보좌하면서 관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좌우 별장 선발권을 오명항에게 주었다. 오명항은 과거 선천부에서 본 ‘의검정시’의 주인공 이익필을 금위우별장, 이수량을 금위좌별장으로 추천해 재가를 받았다. 관군 종사관으로는 박문수와 조현명이 임명됐다.
그런데 당시 국내 상황이 전쟁 없이 평화로운 시기가 오래 이어진 탓에 군대는 기강이 무너지고 군기가 해이했다. 병졸들은 진격을 알리는 북소리와 후퇴를 알리는 징소리를 구분하지 못했고, 전장에서는 창칼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이익필이 직접 나섰다. 그는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을 풀어 고향에 계신 모친에게 보내며 말했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모자의 은정은 가벼우니 만일 제가 돌아가지 못하면 이것으로써 자식의 얼굴을 대신 하소서” 이 모습에 감동한 병사들은 이때부터 그를 전적으로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행군한지 며칠 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영조가 좌별장 이수량을 환송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이익필은 도순무사에게 “수량은 충의롭고 용감한 선비입니다. 전장에 임한 장수를 도중에 바꾸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금기로 여기는 법입니다”라고 건의해 이수량을 그대로 좌별장에 머물게 했다.
진위현振威縣[경기도 평택]에 주둔할 때였다. 한 밤중에 갑자기 함성과 함께 자객이 진중에 침입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이익필은 도순무사에게 병졸들로 하여금 즉시 원앙 대열을 갖춰 도열하도록 명을 내리라고 조언했다. 관군은 훈련을 받았기에 원앙 대열을 갖출 수 있었지만 침입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대열에서 이탈한 침입자 10여명을 잡아 죽였다. 이를 곁에서 지켜본 종사관 박문수와 조현명은 이익필 같은 장수가 있는 한 이 군대는 걱정이 없다며 그를 높이 칭송했다.
안성에 이르러 청룡곡靑龍谷에 주둔한 적을 섬멸하고, 다음날은 죽산의 적을 추격해 장항령獐項嶺에서 섬멸, 드디어 반란군 수괴인 이인좌를 사로잡아 서울로 압송했다. 이로써 반란은 대부분 평정됐다. 도순무사 오명항은 과거 자신이 선천부를 지나면서 보았던 이익필의 ‘의검정시’를 읊으며 “나는 진실로 장군이 이길 것을 알았다. 오늘의 결과가 그 징험이 아니겠는가”라며 그의 공을 칭송했다.
출정한지 한 달여가 지난 음력 4월 19일, 관군이 서울로 돌아왔다. 이때 영조는 숭례문까지 나와 관군을 맞이하고 적의 머리를 받는 의식을 행했다. 또 출정했던 여러 장수를 선정전에 불러 위로했다. 이 자리에서 영조는 오명항을 불러 큰 잔에다 술을 부어주며 이익필, 이수량과 함께 나눠 마시라고 명했다. 또 그 자리에서 영조는 이익필의 공훈을 인정해 수충갈성양무공신輸忠竭誠揚武功臣[본래 ‘분무奮武’ 공신이었는데 1764년 ‘분무’가 명나라 의종의 휘호와 겹친다는 이유로 ‘양무’ 공신으로 바뀜]에 명하고, 가선대부 전라병마절도사를 제수하고 전양군全陽君에 봉했다. 또 단서철권丹書鐵券[공신에게 내리는 문서로서 세습적으로 죄를 면하게 하는 특권을 부여하는 일종의 증명서]과 군신 간에 서로 경계하는 글과 공신 초상, 토전土田, 노비 등을 하사했다.
이후 관서병마절도사, 훈련도정, 부총관, 회령부사, 금위중군, 춘천부사 등을 지낸 후 고향 하목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여생을 하목정에서 글을 읽고 꽃과 대나무를 가꾸며 시를 읊는 시골 선비의 삶을 사니, 사람들은 그가 한때 ‘현갑장군玄甲將軍’으로 불렸던 용맹한 장수였음을 알지 못했다.
1751년(영조 27) 음력 8월 17일. 이익필은 향년 78세로 하목정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가 세상을 뜨기 하루 전날 밤, 밤하늘에 큰 별이 떨어지고 땅이 울리는 소리가 십리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영조는 그에게 자헌대부 병조판서 지의금부훈련원사에 추증하고 장사를 지낼 때는 특별히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영조(1754)와 고종(1891) 때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 제사를 치룬 사제문賜祭文이 있다] 특히 그는 영조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려 있다.
부인은 정부인 해주정씨로 통덕랑 정억의 딸이다. 슬하에 3녀만 두고 아들이 없어 4촌 동생인 이익집의 아들 이직양李直襄[초명은 이배후李配厚]을 양자로 삼았다. 번암 채제공이 지은 전양군 이익필 신도비명 말미에 이런 기록이 있다.
··· 공은 집에서 지낼 때 종족에게 어질었으니, 향리에서 공의 도움을 받아 끼니를 이었던 이가 항상 대 여섯 집이었고, 가난하여 혼인할 수 없는 이에게는 반드시 재물을 도와서 시기를 잃지 않게 했는데, 이것은 공으로서는 소략한 일이었다. 어버이를 섬김에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여 뜻을 받들고 몸을 받들기를 극진히 갖추었다. 장부인張夫人은 법도가 근엄하여 공이 이미 귀하게 현달하고 또 연로했으나 때로 꾸짖음이 어린 아이 때와 다름이 없었는데, 공은 곧 머리를 숙이고 공손히 꾸지람을 받들었다. 혹 기쁘게 웃으면서 그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기에 힘을 썼더니, 모친이 돌아가시고 외로이 홀로 남기에 이르러 사람들의 말이 어버이에 미침이 있으면 울음을 터트려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였다. 고인이 이른바 “충신을 구함에는 반드시 효자의 문에서 한다”는 말이 참으로 믿을 만하다 ···
천년만년 제사를 받들다, 전양군 이익필 불천위사당
불천위不遷位·부조위不祧位
‘불천위’ 혹은 ‘부조위’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지? 유가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용어지만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용어다. 그래서 종종 실수가 있다. 불천위 관련하여 상대에게 이런 저런 말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상대가 불천위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경우가 그렇다. 예전에는 필자도 이런 실수를 종종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화나 해설에 있어 눈높이 맞추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하목정 바로 뒤편에 있는 전양군 불천위 사당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4대봉제사四代奉祭祀’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4대에 걸친 선조 제사를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4대라 함은 나로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4대를 말한다. 1대조인 부모, 2대조인 조부모, 3대조인 증조부모, 4대조인 고조부모가 그것이다. 그런데 왜 3대, 5대가 아닌 4대봉제사일까? 옛날에는 ‘2대봉제사’도 있었고, 3대, 4대는 물론 정확한 예는 아니지만 5대, 7대봉제사도 있었다. 이러한 봉제사 대상범위 변천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고대 중국 예법을 참고해야 한다.
중국 옛 예법에 의하면 천자는 ‘칠묘七廟’라고 해서 시조 이하 6·5·4·3·2·1대조를 모시는 사당 일곱 개를 지어 제사를 지내고, 제후는 ‘오묘五廟’라고 해서 시조 이하 4·3·2·1대조를 모시는 사당 다섯 개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기타 대부는 시조 없이 3대조, 선비는 2대조, 평민은 1대조에 한해 사당 없이 정침[안채]에서 제사를 모셨다. 우리나라는 어떠했을까? 우리나라는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는 신분에 따라 봉제사 대수를 달리했다. 하지만 조선 중·후기 주자가례가 정착되면서부터 신분에 따른 차이 없이 4대봉제사가 유행해 현재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4대를 넘긴 제사와 4대를 넘긴 조상 신주는 어떻게 했을까? 바로 여기에서 ‘불천위’와 ‘매주·조매·조천·체천’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4대봉제사를 행하는 사당에는 1대조[부모]부터 4대조[고조부모]까지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그런데 새 신주가 사당에 들어가야 할 상황이 벌어진다면, 기존 사당의 신주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답부터 말하면 기존 신주들은 각각 한 대씩 승격한다. 새 신주가 기존의 1대조 자리에, 1대조는 2대조 자리에, 2대조는 3대조 자리에, 3대조는 4대조 자리로. 그럼 기존 4대조 신주는 어떻게 될까?
4대조 신주는 대체로 세 가지 방법에 의해 처리된다. 산소 곁에 신주를 묻는 ‘매주·조매’, 4대손 안에서 가장 항렬이 높고 나이가 많은 이[최장방最長房]의 집으로 신주를 옮기는 ‘체천·조천’, 신주를 사당 안에 그대로 두고 대대손손 제사를 모시는 ‘불천위·부조위’가 그것이다. 이중 불천위가 되는 일은 매우 힘들다. 대개는 한 종족의 시조나 중시조 또는 국가에 크나큰 공훈을 세운 경우에만 불천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종가宗家·종손宗孫이라 칭하는 것이 바로 불천위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집과 그 집의 장손을 이르는 말이다.
조상제사를 지극정성 받든 까닭
우리는 오래전부터 선조를 추모하는 제사를 모셔왔다. 불교국가였던 고려를 지나 유교국가 조선이 들어서면서 모든 제사 법식은 유교식으로 개편됐다. 사람 신에 대한 제사뿐만이 아니라 천신, 지신을 비롯한 자연신과 삼라만상에 대한 모든 제사가 유교식으로 정리된 것. 이처럼 모든 유형의 제사를 유교식으로 개편한 것은 유교적 예법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나라를 통치한다는 유교 예치禮治에 따른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세월은 물론이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제사에 목숨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리 몸이 피곤하고 바빠도 조상제사에는 꼭 참석 했다. 지금도 제사가 많은 집은 명절제사를 제외하고도 일 년에 기제사만 열 번이 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일까? 왜 우리는 조상제사에 이렇게 열심인 것일까?
우리가 조상제사에 열심인 것은 이유가 있다. 바로 유교의 독특한 ‘내생관’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불교 같은 종교에서는 죽음 이후 세계, 즉 내생에 대한 구체적인 교리가 있다. 이른바 지옥이니 천당이니 하는 저승세계다. 그런데 유교에는 이런 저승관념이 없다. 그렇다면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간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유교에서는 죽은 조상이 천당·지옥 같은 저승세계로 간다고 보지 않았다. 죽은 조상은 상례를 마치고 나면 다시 자신이 살던 집에 있는 사당 혹은 감실로 되돌아온다고 봤다. 다시 말해 죽은 조상은 멀리 저승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이승에서 후손들과 함께 한 울타리 안에서 같이 살아간다고 본 것이다. 주자가례를 지은 주자는 사당은 반드시 사람이 주거하는 곳에 세우고, 정침正寢[안채]의 동쪽에 세운다고 했다. 이는 자식이 그 어버이를 죽었다고 여기지 않는 까닭이고, 또 귀신은 사람을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즘 생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불과 한 두 세대 앞만 해도 조상제사를 못 받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아들, 아들 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아들을 두지 못해 제사가 끊어지면 비로소 그 집 조상은 이 세상과 영원히 작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양군 하옹 이익필 불천위 사당
조선시대 전통가옥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건물은 조상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다. 사당은 다른 말로 묘廟·가묘家廟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사당제도가 도입된 것은 주자가례에 의해서다. 1390년(공양왕 2)에 주자가례에 따라 가묘를 제정하라는 영이 내렸고, 정몽주·조준 등이 이를 시행할 것을 역설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불교가 성행한 탓에 사당제도는 정착하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사당제도가 자리 잡은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다.
주자가례에는 사당의 위치를 정침 동쪽에 3칸으로 세우고, 앞에 문을 내고 문 밖에는 섬돌 둘을 만들어 동쪽 계단을 조계阼階, 서쪽 계단을 서계西階라 했다. 사당을 서쪽이 아닌 동쪽에 두는 것에 대해서는 자식이 그 어버이를 죽었다고 여기지 않는 뜻이라고 했다.[예법에서는 산사람은 동쪽을 높이고, 죽은 이는 서쪽을 높인다] 또 주자는 귀신은 사람을 의지하는 법이니 사당은 반드시 사람이 주거하는 곳에 세워야 한다고 했다.
전양군 이익필 불천위 사당은 하목정 뒤편 하목당 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이 사당이 처음 세워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인데, 창건 당시 모습이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져오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측면 1칸 반 규모의 겹처마[뒤편은 홑처마로 되어 있다]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전퇴[건물 앞쪽에 기둥을 세워 건물과 기둥 사이에 빈 공간을 둠]를 두고 있다. 기둥은 원기둥 없이 모두 네모기둥을 사용했다. 신을 위한 공간인 만큼 음陰을 상징하는 네모기둥을 쓴 것이다. 사당 앞 계단은 주자가례 사당 제도와는 달리 모두 세 개다. 가운데 계단은 층수가 2층이고, 좌우 양쪽 계단은 3층이다. 가운데 계단은 신의 통로이니 음수인 2, 좌우는 사람의 통로이니 양수인 3을 취한 것 같다. 건물전체에는 미색 가칠단청[선이나 무늬 등을 그리지 않고 바탕색만 칠하는 단청]을 칠했다.
사당 안에는 전양군 위패와 함께 전양군 초상화 한 점이 봉안되어있다. 그런데 이 초상화와 똑같은 초상화가 우리나라에 한 점 더 있다. 바로 온양민속박물관에 있는 초상화다. 오래 전 고령 상곡 출신 한 문중원이 전양군 관련 유물을 이 박물관에 기증할 때 함께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12) 두 초상화에 대한 온양민속박물관과 전의이씨 예산공파 종중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렇다.
12) 당시 기증한 유물은 초상화 1점, 전양군이 사용했던 큰 갓과 갓집 각 1점, 소가죽으로 만든 발막신 한 족, 기타 교지 27점 등이다.
본래 공신 초상은 두 점을 제작해 한 점은 조정에서 보관하고, 다른 한 점은 공신에게 하사하는 게 관례였다. 전양군 초상도 두 점이 제작되어 조정과 문중에서 각각 초상 한 점씩을 소장해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조정에서 관리해오던 공신 초상 중 일부를 공신 후손들에게 되돌려 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돌려받은 초상화가 현재 전양군 사당에 있는 초상화이고, 온양민속박물관에 기증된 초상화는 처음부터 전양군 후손들이 소장해오던 초상화라는 설명이다.13)
13) 전의이씨 예산공파 종중에서 발간한 달성 하목정 48쪽에는 초상화에 대해 좀 다른 내용이 실려 있다. “전양군 사당에는 그의 영정 2점과 갓, 큰 칼, 갑옷 등이 보존되어 있었으며, 특히 큰 영정에는 영의정 귀록 조현명이 그림을 찬사한 글이 적혀 있어 귀중한 자료로 취급받았으나 지금은 도난당하거나 행방이 묘연하다. 지금의 사당 안에는 영인한 영정影幀 1점만 안치되어 있다”
두 초상화는 그림 부분만 보면 마치 사진을 복사한 듯 똑 같다. 하지만 초상만 있는 온양민속박물관 소장본과는 달리 전양군 사당에 있는 초상화는 그림 옆에 반듯한 해서체로 아래와 같이 전양군 이력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전양군 이익필, 자는 ○○ 전의인이며 갑인생(1674)이다. 숙종 임오년(1702)에 무과에 급제하고 무신란 때 마병별장으로 도순무사를 따라 출정했다. 난을 평정한 공로로 3등 공신에 오르고 전양군에 봉군됐다. 병인년(1746)에 가의대부에 오르고 신미년(1751)에 졸했다. 전라 좌수사·병사, 평안병사, 훈련도정, 부총관을 지냈고,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향년은 78세.
全陽君 李益馝, 字○○ 全義人甲寅生, 肅廟壬午武科戊申以馬兵別將隨都巡撫出征勘亂策三等勳封全陽君丙寅陞嘉義辛未卒歷全羅左水使兵使平安兵使訓鍊都正副摠管 贈資憲大夫兵曺判書享年七十八
한편 전양군 초상화와 관련해 귀록 조현명의 ‘화상찬畵像讚’이 전해진다. 화상찬은 초상으로 그려진 인물에 대한 찬사를 기록한 글이다. 조현명은 1690년(숙종 16) 생으로 1674년(현종 15) 생인 이익필보다 16세 아래다. 후일 영의정에까지 오른 조현명은 무신란 때 38세의 나이로 54세 이익필과 함께 난을 평정한 인연이 있었다. 앞서 하목정에 걸린 조현명 시판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현명은 무신란 진압 때 ‘현갑장군玄甲將軍’으로 맹활략한 이익필에 대해 남다른 경모의 정이 있었던 것 같다. 아래는 조현명이 지은 ‘이익필 화상찬’이다.
십년 만에 대하는 얼굴이여 / 두어 폭의 초상이로다 / 검던 머리 백발이 되었으며 / 윤기 흐르던 모습 주름살이 늘었구려 / 형체와 모습은 수시로 바뀔 수 있거니와 바뀌지 않는 것이 가슴 속에서 서려 있으니 / 한 가지 웅대한 마음 변함없는 검은 갑옷 입은 장군이로다.
十年之面數幅之圖鬒如者皤如乎渥如者皺如乎形貌有時而改其有不改者存乎胸中一段雄心依舊玄甲將軍
또한 사당 안에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양군의 갑옷·투구·검 등이 있었다고 한다. 문중에서는 이 유물과 관련해 재밌는 이야기가 전한다. 예전에는 사당에 있는 전양군 갑옷과 투구를 문중원들이 한 번씩 착용해보기도 했단다. 그런데 갑옷과 투구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상머슴도 갑옷을 입고 마당 한 바퀴를 돌면 땀을 뻘뻘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유물들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분실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지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사당 앞뜰에는 수령 200-30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배롱나무가 여러 그루 심겨져 있다. 배롱나무는 나무줄기 표면이 사람의 백골처럼 매끈해 ‘백골나무’로도 불린다. 그래서 묘소·사당·재실 등에 많이 심는다. 또 배롱나무 줄기는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겉이나 안이 똑같다. 그래서 선비를 상징하는 나무라고 해서 서원·서당·누정에도 많이 심는다. 매번 그렇지만 전양군 사당 뜰에 서면 이상하게도 눈이 자꾸만 배롱나무쪽으로 간다. 수 백 년 세월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현갑장군玄甲將軍 사당을 지키고 있는 배롱나무 고목에서 풍기는 묘한 기운 탓인 것 같다.
에필로그
문중 구전에 의하면 이익필이 모든 벼슬을 내려놓고 하목정에서 여생을 보낼 때, 경상도관찰사를 비롯한 고을수령들이 부임하면 반드시 하목정에 인사를 왔다고 한다. 생전에는 종2품 가의대부요, 사후에는 정2품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된 인물이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다시 한 번 더 언급하지만 하빈 전의이씨는 전양군 이익필이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면서부터 그 명성이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졌다.
옛날 순무사 좇아 남쪽 토벌할 때 / 검은 갑옷 입은 장수 우레와 같았네 / 군공으로 기린각에 초상화 그려지고 / 각건 쓰고 하목당으로 돌아왔네 / 그윽한 약속 버드나무 물가 매화 언덕이요 / 기뻐하며 누대에서 노래하고 춤췄네 / 영욕은 뜬 구름이니 족히 말할게 있겠는가 / 원컨대 그대와 더불어 거니세
[하목정에 걸려 있는 귀록 조현명 시 ‘제하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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