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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문화도시센터 2024달성로드탐방프로그램
‘해설사와 함께 달성찍GO’
글·사진 전문해설사 송은석
010-9417-8280, 3169179@hanmail.net
이 책자는 달성문화도시센터에서 주최하는 ‘2024 달성로드탐방’ 프로그램 참가자에게 제공되는 자료집이다. 본 자료집은 학술자료가 아닌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자료다. 따라서 전문용어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가급적 쉽게 풀어 쓸려고 노력했다. 프로그램은 모두 두 개 코스가 있다. 코스 1 ‘금호강·낙동강권’은 강변 문화로 대표되는 화원·다사·하빈 지역 문화유산 중심이며, 코스 2 ‘비슬산·대니산권’은 비슬산 불교문화, 대니산 유교문화가 중심이다. 코스 1 · 2 일정은 다음과 같다.
[코스 1] ‘금호강·낙동강권’
남평문씨인흥세거지(화원)→사문진 유람선(화원·다사)→하목정(하빈)→묘골 육신사(하빈)→삼가헌(하빈)
[코스 2] ‘비슬산·대니산권’
현풍 휴게소 500년 느티나무(현풍)→비슬산 대견사(유가)→현풍 석빙고, 현풍향교(현풍)→현풍곽씨12정려각, 한훤당종택(현풍)→도동서원(구지)
비슬산·대니산권
현풍 휴게소(하) 500년 할아버지 느티나무
프롤로그
1977년 개통된 구마고속도로. 대구와 마산을 잇는 고속도로다. 지금은 이름이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바뀌었지만 대구시민 중 상당수는 예전처럼 구마고속도로라 부른다. 구마고속도로 하행선 첫 번째 휴게소는 현풍 휴게소다. 이곳에 잘 알려지지 않은 특별한 볼거리가 있다. 이른바 ‘소원 들어주는 500년 할아버지 느티나무’다. 대구시민 중 상당수는 현풍 휴게소(하)를 이용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현풍 휴게소에 이런 이름이 붙은 거대한 느티나무가 있다는 것은 잘 모른다. ‘귀신(?) 붙은 나무’로도 알려진 현풍 휴게소(하) 500년 느티나무. 신통방통한 느티나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48년 전 구마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달성군 현풍읍 성하리 272]
구마고속도로 현풍 휴게소(하)
1970년대 중반까지 대구와 마산을 오가는 시외버스는 비포장 자갈길을 달렸다. 승객들은 탑승 내내 심한 충격에 노출됐고 골관절에 무리가 가는 ‘바운드 병’을 얻게 됐다. 주민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40여 년간 대구-마산 도로 개선 민원을 제기했다. 이에 대한 결실이 구마고속도로 개통이었다. 총길이 86.3km인 구마고속도로는 1976년 6월 24일 착공해 1977년 12월 17일 개통됐다. 착공에서 준공까지 걸린 기간은 놀랍게도 17개월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에서 7번째로 개통된 구마고속도로는 공사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전체 공사 면적의 78%가 저습지역이자 연약지반이었다는 점이다. 불량토를 걷어내고 양토를 채워 넣은 성토작업이 필요했다. 성토작업에 공급된 흙 양이 1,200만㎥였다. 이는 8톤 트럭 27만 대분으로 트럭을 한 줄로 세우면 길이가 27,000km, 서울-부산 간을 30번 넘게 왕복하는 길이였다. 그 험난한 공사 중, 지금의 현풍 휴게소(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요즘이라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소개될 법한 상황이었다.
마을 수호신이 깃든 나무, 아무도 손 못 대
1976년 구마고속도로 현풍 휴게소(하) 공사 현장. 당시 이곳은 현풍면 성하2리 웃물문 마을 북쪽 지역이었다. 휴게소 건립을 위해 마을 일부가 철거됐고, 마을 당산나무였던 500년 느티나무 두 그루도 제거될 계획이었다. 당산나무 제거는 고속도로 건설이라는 대공사 과정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500살 당산나무 중 한 그루는 잘려 나가지 않고 지금껏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기에는 기이한 사연이 있다.
느티나무를 베기 위해 불도저를 동원했다. 할배 나무, 할매 나무 두 그루 중 할매 나무가 먼저 타깃이 됐다. 500년 할매 나무는 무지막지한 불도저 힘에 저항 한번 못하고 꺾였다. 다음은 할배 나무 차례였다. 이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방향을 틀어 할배 나무쪽으로 전진하던 불도저가 할배 나무를 몇 미터 앞두고 시동이 꺼진 것이다. 이런 현상이 여러 번 반복되자 결국 공사업체 측에서 나무 제거를 포기했다. 이 사연이 알려지자 현풍 휴게소 조성 공사는 할배 나무를 그대로 살려둔 채 휴게소를 조성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결국 웃물문 마을 500년 할배 느티나무와 당산은 살아남았고, 지금은 현풍 휴게소 일부가 됐다.
마을에는 또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 어느 해 정월, 마을 동제를 지내기 위해 느티나무 아래에 제상을 차려 놓았는데, 느닷없이 멧돼지 한 마리가 나타났다. 멧돼지는 제상을 뒤엎고 제단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아무런 이유 없이 멧돼지가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즉사한 것이다. 이를 지켜본 마을주민들은 마을 수호신이 노해 멧돼지를 벌한 것이라 생각했다.
현재 현풍 휴게소 500년 할배 느티나무 주변에는 작은 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휴게소 건립 과정에서 발생한 기이한 현상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 준다’는 현풍 휴게소 500년 할배 느티나무 테마공원은 2014년 국토교통부 선정 대한민국경관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내력이 있다. 현재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높이 13m, 직경 1.6m 정도 되며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현풍읍 성하리 물문[수문진] 마을
‘현풍읍 성하리 272’. 현풍 휴게소(하) 주소다. 성하리(城下里)는 산성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성하리 산성은 이름이 여럿이다. 현풍 읍내 서쪽에 있는 산성 ‘서산성(西山城)’, 수문진(水門津)에 있는 산성 ‘수문진 산성’, 수문진 산성의 순우리말인 ‘물문 산성’, 반달을 닮았다고 ‘반월성’ 등. 나루이자 자연부락명이기도 한 성하리 물문 나루[수문진]는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인 통일신라 말기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물문 나루는 과거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던 시절, 현풍의 관문이자 강 건너 고령군 개진면 부리로 연결되는 현풍 대표 나루였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낙동강변을 따라 웃물문[성하2리], 아랫물문[성하1리], 수문진 산성이 있다. 이중 현풍 휴게소가 자리한 웃물문 마을은 영월 엄씨 집성촌이다. 지금도 문중 재실인 공신정(拱辰亭)과 입향조 엄계(嚴誡·1456-1506)가 임금을 향해 북향사배를 행한 단(壇) 등이 남아 있다. 현풍 휴게소 할배 나무 뒤편, 마을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가면 공신정과 단을 만날 수 있다.
에필로그
과거 우리네 전통 마을에는 ‘성황당·당산’ 등으로 불리며 마을제사를 모시는 신성한 공간이 있었다. 마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상당·중당·하당’, 두세 곳 정도 있었다. 마을제사는 보통 정월 보름날 자정을 전후해 행해졌다. 제사가 끝나면 마을 풍물패가 중심이 되어 마을 곳곳을 돌며 지신밟기를 하고, 마을주민과 한데 어울려 판굿[놀이마당]을 벌리곤 했다. 달성군에는 아직도 마을제사가 행해지는 곳이 몇 곳 있다. 이 중 한 곳이 현풍 휴게소 500년 느티나무에서 행해지는 웃물문 마을 당제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간소해졌지만 그래도 무속식·유교식 제사절차가 혼재된 우리나라 전통 마을제사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비슬산 대견봉 대견사(大見寺)
프롤로그
지난 2014년 3월 1일. 달성군 비슬산 대견봉 인근 해발 1,000m 고지에서 ‘대견사 중창 개산식[준공식]’이 열렸다. 그동안 대견사지(大見寺址)로 알려진 빈 절터에 절이 세워진 것이다. 대견사지는 등산을 좋아하는 대구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공간이다. 팔공산 하면 동봉, 비슬산 하면 으레 대견사지가 언급될 만큼 대견사지는 비슬산의 랜드마크였다. 이날 대견사 개산식은 베일 속에 가려있던 1,200년 내력 대견사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일대 사건이었다. [달성군 유가읍 용리 산 1-2]
당나라 문종 세숫물에 비쳤다는 대견사
대부분 절집이 그러하듯 대견사 역시 창건 스토리가 흥미롭다.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 중국 당나라. 문종(재위 827-840)이 하루는 세숫물에 비친 아름다운 풍광과 절집에 매료됐다. 문종은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자신의 세숫물에 비쳤던 풍광과 똑같은 장소를 찾아내 절을 세우고자 했다. 결국 중국이 아닌 신라 땅 비슬산 정상에서 똑같은 풍경을 찾아냈고, 그 자리에다 절을 세웠다. 절 이름은 큰 나라인 중국에서 보았다는 뜻에서 대견사(大見寺)라고 했다. 흥미롭기는 한데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그야말로 전설이다.
신라 왕실 후원 사찰로 추정
대견사 창건설 중에는 대견사가 1,200년 전 신라 말 헌덕왕[재위 809-825] 때 창건된 왕실 후원 사찰이라는 설도 있다.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시대, 비슬산에는 99개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많은 비슬산 절집 중 대견사는 입지부터가 남다르다. 비슬산 정상부 해발 1,000m 고지에 세워진 유일한 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탑돌[토르]’이라고 하는 기이한 형태의 거대한 암벽군을 마치 병풍처럼 등지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천 길 낭떠러지에 접해 있는 대견사 앞뜰이 인공적으로 쌓은 축대 위에 조성됐다는 점이다. 축대 규모는 길이 38m, 높이 7m 규모로 지금까지 잘 남아 있다.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 해발 1,000m 험준한 산 정상부에 어떻게 이처럼 거대한 토목공사를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왕실 후원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대견사를 왕실 후원 사찰로 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일본에 의해 두 번이나 폐사되다
국교가 불교였던 신라와 고려시대, 대견사는 번창했다. 몽고 침입 등으로 한때 사세가 기울었지만 고려 말 대견사는 중창됐다. 조선시대 대견사 위상은 전과 같지 않았다. 숭유억불정책과 왜적 침략 때문이었다. 조선 태종 때 중창을 거친 대견사는 임진왜란 때 왜적에 의해 소실되고, 이후 중창과 쇠락을 반복했다. 대한제국 시절 다시 중창되었으나, 얼마 후 일제에 의해 또 폐사[1917년] 되고 만다. 일본에 의한 두 번의 폐사는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전자는 대견사가 일본의 기운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후자는 대견사가 대한제국의 번영을 기원했기 때문이었다. 후자에 대한 보충 설명을 덧붙이면 이렇다. 1900년에 이재인(李在寅)이라는 인물이 대견사에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위패를 봉안하고, 대한제국의 번영을 기원한 사실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일본은 대견사를 강제 폐사 시켰다. 대견사 중창 개산제 날짜를 2014년 3월 1일, 삼일절로 잡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대견사 비밀을 풀다, 「보당암중창법화삼매참소」
오랜 세월 대견사 정체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 ‘대견사지’라는 말 외에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의미 있는 기록이 하나 발견됐다. 동문선에도 등재된 「보당암중창법화삼매참소」라는 글이다. 이 글은 조선 초 문신인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이 1402년(태종 2)에 지은 것이다. 보당암을 중창한 뒤 법화경에 의한 불교의식을 거행하면서 부처님께 올린 축원문이다. 그런데 축원문 내용 중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큰 산인 비슬산 정상에 암자가 하나 있으니, 그 이름이 보당입니다’
말인즉슨 비슬산 정상에 보당암이란 암자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비슬산 정상부 해발 1,000m 고지에는 대견사를 제외하고는 알려진 절집이 없다. 이런 사실 때문에 대견사 전신이 보당암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됐다. 다시 말해 신라시대 때 보당암으로 처음 창건되었다가 조선 초 어느 때인가 대견사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 만약 이 주장처럼 대견사 전신이 보당암이 맞다면 대견사는 정말 대단한 절집이 된다. 바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절집이 되기 때문이다.
일연 스님과 대견사
일연 스님은 비슬산에서 35년간 주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은 군위 인각사에 있는 「보각국사비명」에 잘 나타나 있다. 비명에는 일연 스님이 22세에서 44세까지 22년간 비슬산 보당암·무주암·묘문암 등에서, 59세에서 72세까지 13년간을 비슬산 인흥사와 불일사에 주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승과에 장원급제한 일연 스님 초임지가 바로 보당암이었다는 사실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연 스님은 비슬산 시절에 삼국유사의 기초자료조사 및 전체적인 얼개를 잡고, 운문사를 거쳐 인각사 시절에 집필을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어쩌면 대견사가 삼국유사 탄생의 첫 단초를 제공한 곳인지도 모른다.
대견사 석축, 샘, 석탑, 마애불
대견사 석축은 길이가 38m, 높이가 7m로 대견사 남쪽 천 길 낭떠러지 벼랑을 떠받치고 있다. 1,200년 세월 동안 흐트러짐 없이 대견사를 떠받치고 있는 석축의 견고함이 정말 대단하다. 대견사에는 용천수라 불리는 샘이 있다. 현재는 본래 샘 외에도 땅속으로 관을 묻어 대견사 입구에서도 물맛을 볼 수 있다. 돌려놓은 샘물에는 ‘천천수(千泉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다. ‘천년 내력의 샘’ 또는 ‘천 미터 고지에서 솟는 샘’이라는 의미다.
대견사 법당 앞 천 길 낭떠러지 바위 벼랑 끝에 석탑이 하나 서 있다. 대구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견사 3층 석탑이다. 도굴로 벼랑 아래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88년도에 수습해 복원한 것이다. 현풍군읍지(1899) 등에는 이 탑을 9층탑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실제 탑 비율을 고려하면 9층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하늘과 맞닿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땅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한 것이 참으로 묘한 물건이다.
대견사 법당 서편 바위굴 입구에 마애불(磨崖佛)이 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우리가 알고 있는 마애불 모습이 아니다. 대견사 마애불은 일종의 추상화다. 부처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유가심인(瑜伽心印)’이라고도 불리는 이 불상은 깨달음의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밀교 성격의 마애불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와 유사한 마애불은 남원 승련사와 오대산 상원사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에필로그
세상 모든 일에는 찬성이 있으면 반대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대견사 중창에도 찬성과 반대가 있었다. 어쩌면 대견사 ‘복원’이 아닌 대견사 ‘중창’이라는 말 속에 찬성과 반대 간의 갈등과 명분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고학에서는 이런 불문율이 있다. ‘잘 모르겠으면 다음 사람을 위해 그냥 덮어 두라.’
현풍향교 세 가지 특별함
프롤로그
조선시대 대표 관학(官學)이자 중등 교육기관이었던 향교. 현재 우리나라에는 234개 향교가 있다. 향교는 국가와 지방관청에서 운영했다. 따라서 전국 모든 향교는 건축양식이나 문화 등이 서로 비슷하다. 이런 가운데 자신만의 아주 독특한 색깔을 지닌 향교가 있다. 대표적인 향교가 달성군에 있는 현풍향교다. 현풍향교에는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세 가지 특별함이 있다. [달성군 현풍면 현풍동로20길 27-8(상리)]
‘교동·교촌·교리’에는 향교가 있다
조선시대 서원이 지금의 사립중고등학교라면 향교는 국공립중고등학교쯤 된다. 우리나라에 향교가 처음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여말선초 시기로 본다. 특히 유교 국가였던 조선은 ‘1읍1교’ 원칙에 따라 지금의 시·군·구 정도 되는 고을마다 향교가 있었다. 그래서 명칭도 ‘고을[鄕]에 있는 학교[校]’라는 의미에서 향교라 했다. 현재 대구광역시에는 모두 다섯 개 향교가 있다. 대구·칠곡·현풍·군위·의흥 향교다. 우리나라에는 동네 이름에 ‘학교 교(校)’자가 들어가는 곳이 여럿 있다. 예를 들면 ‘교촌·교동·교리·향교동·교운리’ 등이다. 이처럼 동명에 ‘교’ 자가 있으면 그 마을에 과거에 향교가 있었거나, 아니면 현재 향교가 있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칠곡향교·현풍향교가 있는 동네를 예전에 교동이라 불렀고, 대구향교가 조선시대 때 지금의 대구 중구 교동에 있었던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현풍향교 세 가지 특별함
불교 사찰 석재로 지은 향교
현풍향교에는 세 가지 특별함이 있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여간해서는 알 수 없는 매우 독특한 특별함이다. 현풍향교 세 가지 특별함 중 단연 으뜸은 건축에 사용된 석재 대부분이 사찰 석재를 가져다 썼다는 점이다. 특히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을 모신 현풍향교 대성전 기단이 대표적이다. 기단은 건물을 세우기 전 땅에 기초를 하고 그 위에 쌓아 올린 돌 구조물이다. 현풍향교 대성전 기단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두 개의 배례석(拜禮石)과 두 개의 안상석(眼象石)이다. 현풍향교 배례석은 중앙에 있는 배례석이 가로*세로 길이가 131cm*63cm, 동쪽 배례석이 153cm*79cm이며, 배례석 중앙에 새겨진 연꽃 문양 지름도 각각 37cm, 44cm에 이른다. 이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배례석 가운데 가장 큰 배례석 중 하나일 정도로 대형 배례석이다. 안상석은 일반적으로 석탑 기단부에 사용되는 석재다. 현풍향교 안상석은 앞서 소개한 배례석보다 더 크다. 이 정도 규모 안상석을 기단부에 앉힌 석탑이라면 대형 석탑임이 분명하다. 더 놀라운 것은 배례석, 안상석 외 기단부에 사용된 석재 대부분이 석탑 부재라는 점이다. 불교석조연구가들은 현풍향교 내에서 발견되는 석탑 부재를 모두 사용한다면 대형 석탑 한두 개 정도 복원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성전 기둥을 받치고 있는 초석 역시 연꽃이 조각된 사찰 법당 초석이다. 과거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받치던 기단석과 초석, 사리를 봉안했던 석탑 부재 등이 지금은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을 모신 대성전을 받치고 있는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외에도 현풍향교 곳곳에서 사찰 석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외삼문 안쪽 돌다리도 석탑 부재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 사찰 석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현풍현읍지(1871), 현풍군읍지(1899)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읍지는 과거 현풍 ‘금화사(金化寺)’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화사는 현 동쪽 5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다만 옛터가 있지만 어느 시대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주춧돌, 섬돌, 탑돌이 기교한데 버려져 있다. 뒤에 향교·서원·관사 계단과 주춧돌이 모두 이 절터의 돌이라고 한다.
옛 금화사 위치도 어느 정도 확인됐다. 지금의 달성군 현풍읍 대구경북과학기술원(DIGST) 축구장과 쌍계1리 치마거랑 마을 일대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치마거랑 주민들은 디지스트 축구장이 들어선 지역을 예로부터 ‘탑골’이라 불렀다. 실제로 1982년 봄, 농토 개간 때 이 일대에서 법당·돌탑·요사채 터 등 대규모 절터가 발견됐다.
금화사 옛터는 유가면 쌍계리 83번지, 돌탑 자리는 쌍계리 69, 63번지, 요사채와 선방은 1982년 장형식 씨가 논갈이를 하다가 원형 주춧돌을 발견했다는 쌍계리 56-1, 60번지로 추정된다. [달구벌 문화 그 원류를 찾아서2, 118쪽, 차성호, 1997년]
조선시대 전통을 지키고 있는 현풍향교 위패 봉안 방식
향교 공간은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과 제사 지내는 공간인 ‘문묘(文廟)’로 나뉜다. 이중 문묘는 향교 내에서도 별도 담장에 둘러싸인 독립된 공간이다. 문묘에 들어서면 뜰을 가운데 두고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문묘의 정전인 ‘대성전(大成殿)’이다. 대성전 앞 좌·우에 있는 건물은 대성전 부속 건물인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다. 대성전과 동·서무를 한데 묶어 문묘라 한다. 현재 우리나라 대다수 향교는 1949년 전국유림대회 이후부터 모든 성현[성인과 현인]의 위패를 대성전에 모시고 동·서무는 비워두었다. 그 이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 성현 위패는 대성전에 모시고, 우리나라 18인[동방18현] 위패는 대성전보다 격이 낮은 동·서무에 모셨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풍향교 문묘는 지금도 조선시대 문묘 위패 봉안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대성전에 공자를 비롯한 중국 성현 9위, 동무와 서무에 동방18현을 모시고 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이다.
대성전 | 공자, 4성[안자·증자·자사·맹자], 송조4현[주돈이·정호·정이·주희],[9위] |
동무 | 설총·안향·김굉필·조광조·이황·이이·김장생·김집·송준길 [9위] |
서무 | 최치원·정몽주·정여창·이언적·김인후·성혼·조헌·송시열·박세채 [9위] |
퇴계 이황, 석봉 한호 명륜당 현판 글씨
현풍향교 세 번째 특별함은 명륜당(明倫堂) 현판이다. 명륜당은 우리나라 모든 향교의 강당 이름이다. 우리나라 향교 명륜당 현판은 어디를 가나 글씨체가 같다. 모든 향교가 남송시대 성리학자 주자[주희]의 글씨를 모각해 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현풍향교 명륜당 현판은 주자 글씨가 아닌 퇴계 이황, 석봉 한호 글씨다. 다른 향교들처럼 현판 한쪽에 ‘신안주희서(新安朱熹書·신안 주희가 썼다)’를 새긴 주자 글씨 현판은 아예 없다. 참 독특하다.
에필로그
현풍향교는 우리 시대 몇 안 남은 ‘보물급 오리지널 향교’다. 신라·고려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한반도에서 화려하게 꽃피운 불교문화. 불교문화 바탕 위에 조선시대 유교문화가 꽃을 피웠다.[경상도에 향교, 서원이 많은 것도 화려했던 신라 불교가 바탕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문화는 ‘평지돌출’이 없다. 반드시 앞 문화를 바탕으로 뒤에 오는 문화가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문화를 밑거름으로 유교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처럼, 향교·서원·서당 같은 전통 교육기관이 있었기에 근대 신식 교육기관도 큰 무리 없이 뿌리 내릴 수 있었다. 근대기에 전국의 향교 재산 상당 부분이 지역 학교 설립 자금으로 사용됐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600년 전통을 잘 이어온 현풍향교. 어찌 보면 현풍향교는 우리 달성의 미래를 위해 선조들이 남겨 놓은 또 하나의 묘수일지도 모른다. 오리지널 조선시대 향교를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대구 달성 현풍향교로 오라!
신기한 얼음창고, 현풍 석빙고
프롤로그
현풍 읍내 현풍천변에 현풍 석빙고가 있다. 국가 보물로 지정된 문화유산이자 한반도에 단 7개밖에 남지 않은 석빙고 중 하나다. 그럼에도 현풍 석빙고는 대구시민은 물론 심지어 달성군민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음력 12월에 채빙한 얼음이 다음 해 가을까지 녹지 않고 유지됐다는 천연 냉장고 석빙고. 우리 달성군에 남아 있는 신기한 얼음창고 석빙고에 대해 알아보자. [달성군 현풍읍 현풍동로 92(상리)]
석빙고 유래
빙고(氷庫)는 얼음창고를 말한다. 돌로 만든 것은 석빙고, 나무로 만든 것은 목빙고라 한다. 우리나라 빙고 유래는 1,5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 신라 지증왕 6년(505) ‘빙고를 관리하는 빙고전(氷庫典)이라는 담당 부서를 두었다’는 기록과 신당서에 ‘신라인들은 화식(火食)을 했으며 겨울에는 부뚜막을 만들고 여름에는 음식을 얼음 위에 올려 놓았다’는 기록이 근거다. 조선시대에도 5품관인 제조를 책임자로 하는 ‘빙고’라는 직제를 두고 조선말 고종 때까지 장빙제도가 지속됐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현풍·영산·창녕·안동·경주·청도·해주(북한) 석빙고는 모두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이며, 신라·고려시대 빙고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석빙고에 숨어 있는 과학원리
현재 한반도에 남아 있는 7개 석빙고 외형을 보면 하나 같이 고분 형상을 하고 있다. 반지하구조인 장방형 빙실 규모도 대략 길이 10m, 폭 5m, 높이 3m 정도로 비슷하다. 그런데 돌로 빙실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고 잔디를 입힌 이 단순한 토석구조물이 어떻게 냉장고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과학원리가 숨어 있다. 첫째는 석빙고 전체를 덮고 있는 두께 약 2-3m에 이르는 흙과 잔디다. 흙과 회를 섞어 강회 처리한 흙벽은 강력한 단열재·방수재 기능을, 외부를 뒤덮은 잔디는 뜨거운 햇볕을 산란시키는 기능을 했다. 둘째는 무지개 아치형으로 축조된 빙실 내부구조와 빙실 천장에 설치된 2-3개의 환기구다. 아치형 구조와 환기구는 공기순환을 원활하게 해 위로 올라간 더운 공기는 밖으로 빼내고 찬 공기는 빙실 내에 머물게 했다. 셋째는 얼음 위에다 볏짚·왕겨·톱밥 같은 것을 덮어 2중으로 단열처리를 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름철 빙실 내부 온도가 15도까지 올라가도 얼음표면은 0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빙실 바닥을 한쪽으로 기울게 해 용해수가 잘 배수되도록 한 점, 입구에 돌출형 날개벽을 설치해 벽에 부딪힌 찬바람이 소용돌이치며 빙실 내부로 빠르게 빨려 들어가게 한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날개벽은 얼음 저장에 앞서 빙실 내부를 냉각시키는 과정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겨울철 일반 지하실 온도가 15도 안팎인데 반해 석빙고가 0.5-2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날개벽 때문이다.
현풍 석빙고
현풍 석빙고는 현풍읍 상리 읍동산 남쪽 현풍천변에 있다. 입구를 겨울철 찬 바람이 불어오는 북서쪽으로 낸 것, 위치가 채빙에 편리한 하천변에 있는 것 등은 다른 석빙고와 비슷하다. 외관은 고분 형태를 갖췄으며 빙실을 덮은 흙 두께는 약 2m다. 상부에 2개 환기구를 설치하고 환기구 위에 빗물과 햇빛이 들지 않게 덮개를 설치했다. 내부 빙실은 길이 11.4m, 폭 4.32m, 높이 2.6m 규모다. 벽과 천장을 구성하는 석재는 모두 화강암이며, 바닥은 흙과 잡석으로 마무리했다. 입구 크기는 너비 0.8m, 높이 1.3m다. 지난 1982년 석빙고 주변 보수작업 때 ‘현풍석빙고건성비’가 발견돼 현풍 석빙고가 1730년(영조 6)에 축조됐음이 확인됐다. 건성비에는 당시 현감인 이우인, 도감 곽재완, 감관 곽천승, 색리 이동영, 승려 호왕, 사령 김만천, 호장 김성달, 나규무 등 석빙고 축조 관련 인물 명단이 새겨져 있다.
에필로그
서울 지명 중에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이 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동빙고와 서빙고에서 유래된 동명이다. 석빙고가 아닌 나무로 만든 목빙고였던 두 빙고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서울에 있었던 빙고는 물어보나 마나 왕실과 고관대작을 위한 빙고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풍·영산·창녕·안동·경주·청도·해주 석빙고는 누구를 위한 빙고였을까? 수년 전부터 안동 석빙고에 얼음을 채워 넣는 장빙제 행사를 개최하고 있는 안동시는 장빙제 행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방 석빙고도 결국은 임금을 위한 냉장고였나 보다.
안동 석빙고 장빙제는 조선시대 임금님 진상품인 안동 은어를 저장했던 안동 석빙고에 어떻게 낙동강 얼음이 채취되어 운반되고 저장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중략) 옛 방식 그대로 재연하는 행사다
현풍 곽씨 솔례마을, 현풍곽씨12정려각
프롤로그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 ‘솔례마을’과 ‘현풍곽씨12정려각’이 있다. 솔례(率禮) 마을은 현풍이란 지명을 자신들의 성씨 본관으로 사용하는 현풍 곽씨 청백리공파 세거지다. ‘현풍곽씨12정려각’은 솔례마을 입구에 있는 정려각으로 국내 최대 규모 정려각이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 있다. 이 마을을 연고로 하는 성씨를 가리켜 ‘현풍 곽씨’라고도 하고, ‘솔례 곽씨’라고도 하며, ‘포산(苞山) 곽씨’라고도 한다. 솔례 또한 ‘소래[소례]’라고도 하고 ‘소리’라고도 한다. 무슨 까닭일까? 정려각은 무엇이고 12정려각은 또 무엇일까? 우리나라 현풍 곽씨 최대 세거지 솔례마을, 우리나라 최대 규모 정려각 현풍곽씨12정려각에 대해 알아보자. [달성군 현풍읍 지동길 3(지리)]
현풍 곽씨 청백리공파, 솔례[소례] 곽씨
현풍 곽씨 시조는 고려시대 때 중국에서 고려로 온 곽경(郭鏡·1117-1179)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송나라 문연각 한림학사였는데 학사 7명과 함께 1133년(인종 11) 고려에 왔다. 이후 그는 고려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공을 세워 관직이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고, 고려 조정으로부터 포산군(苞山君)에 봉군됐다. 이를 연유로 그의 후손들은 포산[현풍]을 본관으로 삼았다. 포산은 현풍의 옛 이름이다. 곽경을 시조로 하는 현풍 곽씨는 5세 곽기정과 곽한정 대에 와서 각각 기호파와 영남파로 나뉜다. 영남파는 다시 10세 곽윤명·곽윤광·곽윤현에 이르러 3개 파로 나뉜다. 첫째 집이 현풍 원당을 세거지로 하는 ‘목사공파’, 둘째 집이 영천 마단 ‘경재공파’, 셋째 집이 현풍 솔례 ‘청백리공파’다. 청백리공파라는 이름은 청백리공파 파조이자 현풍 곽씨 솔례 문중 중시조인 창곡(滄谷) 곽안방(郭安邦) 선생이 조선 세조 때 청백리에 오른 것에 연유한 것이다.
솔례마을, 솔례 종택
현풍 곽씨가 솔례에 살기 시작한 것은 약 600년 전인 14세기 초부터라고 한다. 솔례(率禮)라는 마을 이름은 예를 잘 따른다는 의미다. 솔례는 대니산(戴尼山)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대니산은 공자를 머리에 이고 있는 산이란 의미다.[공자의 자(字)가 중니(仲尼)] 마을에는 현풍 곽씨 솔례 종택을 비롯해 현풍곽씨12정려각, 성인재[존재 곽준 불천위 사당], 유연재[곽수], 경모당[연일당 곽지운] 등 재실이 있으며, 마을 서쪽 끝자락에 곽안방, 곽지운, 곽규, 곽황을 제향하는 이양서원이 있다. 또한 마을 남쪽 용두산 정산에는 대양정이 있다. 예로부터 지역 사람들은 솔례를 발음하기 편하게 ‘소례·소리’라고 불렀고, 자신들을 ‘소례 곽씨’라 칭했다. 현풍 곽씨는 현풍 곽씨인데 그 뿌리를 현풍 솔례에 두고 있다는 자긍심을 담은 표현이다.
솔례마을 역사는 무려 600년이 넘지만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처럼 400-500년 된 고가가 없다. 이는 6·25 한국전쟁의 참화가 소례마을을 휩쓸고 간 탓이다. 솔례 곽씨 종택 역시 전쟁의 참화를 입었고, 일부 중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주민들 증언에 의하면 6·25 전쟁 이전만 해도 인근 못골과 소례에는 각각 백여 채에 가까운 전통가옥이 있었다고 한다.
소례마을 제일 위쪽에 자리한 소례 종택은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종택 경내에 생활공간 외에도 불천위 사당과 두 채의 제청 그리고 별채 등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종택·종손이란 말은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유가에서는 종택·종손의 정의가 매우 엄격하다. 불천위(不遷位) 선조를 모시고 있는 집을 종택이라 하고, 그 집 주인을 종손이라 한다. 오랜 세월 맏이로 이어온 집이라도 불천위 선조가 없다면 주손댁(胄孫宅), 그 집 주인은 주손(胄孫)이라 칭해야 옳다.
※ Tip : 불천위(不遷位)는 4대 봉제사가 끝났음에도 후손들이 제사를 계속 받드는 선조를 말한다. 불천위는 한 종족의 시조나 중시조 또는 국가에 매우 큰 공훈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일문삼강(一門三綱), 국내 최대 규모 12칸 정려각
정려(旌閭)는 충신·효자·열녀에 대한 정표(旌表)로 정표자 집 대문 앞[정문(旌門)], 또는 마을 앞[정려(旌閭)]에 세운 홍살문을 말한다. 정문과 정려를 함께 이르는 표현이 정려다. 다른 말로 ‘도설(棹楔)·작설(綽楔)·오두적각(烏頭赤脚)·홍문(紅門)·홍살문’이라고도 한다. 홍살문은 나중에 정려 사실을 기록한 ‘정려 편액’으로 대체되고, 정려 편액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집이 정려각이다. 정려각은 대개 마을 입구나 마을 중심 등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에 세웠다. 정려각 특성상 많은 이들에게 노출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정려각이 ‘현풍곽씨12정려각’이다. ‘12정려각’이라 부르는 것은 정려를 받은 인물 수가 아니라, 정려각 내부가 12칸으로 나눠졌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 정려각에 모셔진 인물은 모두 15명이다. 한 문중에 1명 나오기도 힘들다는 정려를 이 문중에서는 무려 15명이나 배출했다. 그것도 충신·효자·열녀 ‘삼강(三綱)’을 모두 배출했다. 1838년에 작성된 「중수사실」에 의하면 12정려각에 오르지 않은 정표자가 더 있다고 한다.
충신 | 곽준 (1명) |
효자 | 곽이상·곽이후·곽결·곽청·곽형·곽호·곽의창·곽유창 (8명) |
열녀 | 포산곽씨·거창신씨·광주이씨·밀양박씨·안동권씨·전의이씨 (6명) |
12정려각에 오른 15인을 충신·효자·열녀 순으로 알아보자. 먼저 충신으로 정려에 오른 인물은 존재(存齋) 곽준(郭䞭)이다. 그는 정유재란 때 안음 현감으로 황석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인물이다. 특별히 곽준의 집안은 ‘일문삼강(一門三綱)’으로 유명하다. 곽준을 포함한 두 아들과 큰 며느리, 출가한 딸이 모두 삼강의 덕목에 따라 제각기 죽음을 택함으로써 한 집안에서 충신·효자·열녀가 모두 나왔기 때문이다.
다음은 효자로 정려에 오른 8명이다. 곽이상·곽이후 형제는 앞에서 소개한 곽준의 아들이다. 형제는 정유재란 때 아버지인 곽준과 함께 황석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들 형제는 임금을 위해 순절한 곽준과는 달리 아버지를 지키다 죽었기 때문에 효자로 정려된 것이다. ‘효자4공’으로 불리는 곽결·곽청·곽형·곽호 4형제도 있다. 4형제는 임진왜란 때 끝까지 아버지를 지키다 왜적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양별검공’이라 불리는 곽의창·곽유창 형제도 있다. 이들은 소계 곽주의 아들로 유년 시절부터 각별한 효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난 효자였다.
열녀로 정려에 오른 인물은 모두 6명이다. 일문삼강에 빛나는 곽준의 딸 포산[현풍] 곽씨와 큰며느리 거창 신씨는 둘 다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남편을 따라 자결한 열부다. 곽재기의 처 광주 이씨, 곽홍원의 처 밀양 박씨, 곽수형의 처 안동 권씨, 곽내용의 처 전의 이씨는 모두 절개를 지키기 위해, 혹은 남편을 뒤따르기 위해 자결을 택해 절부·열부·효열부에 오른 여인들이다.
에필로그
포산문헌세고에는 충훈공 68인, 효자 109인, 효열부 71인, 유학자 142인, 소과 급제자 194인, 대과 급제자 73인, 무과 급제자 92인으로 나타난다. 이만하면 정말 명문이라 할 만하다. 조선시대 현풍 현감을 지낸 남상교과 홍응린이 남긴 시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우리나라의 예악은 삼천리요, 현풍 곽씨의 정려는 12정려이다’(남상교)
‘청백리의 가정에서 절의가 났도다’(홍응린)
옛말에 충신을 찾으려면 효자 중에서 찾으라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
소학세향·소학세가 한훤당 종택
프롤로그
대니산 남쪽에 현풍권을 대표하는 두 성씨 문중 세거지가 있다. 작은 산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는 ‘솔례’과 ‘못골’이다. ‘현풍8문’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서흥 김씨와 현풍 곽씨 세거지다. 두 마을에는 마을 명성에 걸맞게 두 성씨 문중을 대표하는 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이번에는 앞서 살펴본 솔례와 솔례 종택에 이어 못골과 못골 종택에 대해 알아보자. 못골 종택은 도동서원에 모셔진 한훤당 김굉필 선생 종택이다. [달성군 현풍읍 지동1길 43(지리)]
서흥 김씨 대구 입향 내력
서흥 김씨(瑞興金氏) 시조는 고려 고종 조에서 중낭장을 지낸 김보(金寶)라는 인물이다. 그의 손자 김천록은 고려 원종 때 삼별초 토벌과 고려·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 때 공을 세워 서흥군에 봉군됐다. 이를 연유로 그의 후손들은 서흥을 본관으로 삼았다. 김천록의 현손[玄孫·4세손] 대에 이르러 서흥 김씨는 3개 파로 분파된다. 김중건은 경기파, 김중곤은 영남파·호남파·해남파, 김중인은 초계파 파조가 되는데 이들은 형제간이다. 서흥 김씨 대구 입향조는 세종 조에서 통정대부 예조 참의를 지낸 영남파 장파(長派) 파조 김중곤(金中坤·1373-?)이다. 그가 현풍 곽씨 문중에 장가들면서 서울 정릉을 떠나 처향인 솔례로 내려온 것이 시작이다. 이후 서흥 김씨들은 도동서원이 있는 도동리를 거쳐 지금의 못골에 정착해 세거지를 형성했다.
못이 있어 못골[지동]이라
솔례와 못골 갈림길에 현풍곽씨12정려각과 용흥지라는 못이 있다. 현풍곽씨12정려각을 마주 보고 왼쪽으로 가면 솔례요, 오른쪽으로 가면 못골이다. 못골은 한자로 지동(池洞)인데 글자 그대로 못이 있는 동네란 뜻이다. 전통 마을 중에는 마을 입구에 마을 연못이나 마을 숲이 있는 예가 많다. 이는 풍수지리 또는 민간신앙 때문이다. 못골 역시 마을 초입에 마을 연못과 마을 숲이 있다. 못골은 마을 형국이 나비를 닮았다. 그래서 나비가 좋아하는 물을 늘 가까이에 두기 위해 연못을 팠다. 못골 연못가 마을 숲은 좋은 기운을 갈무리하고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마을 당산 숲이기도 하다. 못골 연못은 우리네 전통 연못 조성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흔히 방지원도(方池圓島)라고 하는 것으로 사각형 연못 한 가운데 원형 섬이 있다. 이는 동양 전통사상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연못에 투영한 것이다. 한훤당 종택 안에도 작은 연못이 있는데 이 역시 방지원도로 조성되어 있다.
못골 한훤당 종택 내력
한훤당 종택 솟을대문 앞에 ‘한훤고택(寒暄古宅)’이라 새긴 표지석이 있다. 그런데 정작 한훤당 선생은 이 집에 거주한 사실이 없다. 이유는 지금의 한훤고택은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275년 뒤인 1779년(정조 3)에 건립된 집이기 때문이다. 현 종택은 선생의 11세손인 김정제(金鼎濟)가 도동서원이 있는 도동리에서 못골로 이거하면서 건립한 것이다. 본래 못골에는 수원 백씨들이 살았는데 한훤당 종택이 옮겨온 이후부터 서흥 김씨 세거지가 됐다. 현재 한훤당 종택은 생활공간인 안채와 사랑채, 제향공간인 ‘광제헌[光霽軒·제청]’과 ‘불천위 사당’, 기타 광채와 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 대니산 남쪽 마을이 다 그랬던 것처럼 한훤당 종택도 6.25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었다. 불천위 사당, 대문채, 광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됐다. 지금의 안채, 사랑채, 광제헌 등은 소실 후 복원한 건물이다. 한편 한훤당 종택 불천위 사당은 여느 사당과는 달리 특별한 사연이 있다. 사가(私家) 사당이지만 나라의 명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1615년(광해군 7) 당시 현풍 현감 허길(許佶)의 감독 아래 도동리에 처음 세워졌다가, 1779년(정조 3) 지금의 못골로 옮겨왔다. 솟을대문과 안채 사이에 있었던 중사랑채는 아직 복원을 하지 못한 상태다.
에필로그
현풍권 답사에 있어 ‘현풍곽씨12정려각’은 필수코스다. 그런데 답사객 대부분이 정려각만 보고 이곳을 떠난다. 걸어 5-10분 거리에 현풍 곽씨 솔례 종택과 한훤당 고택이 있는데도 말이다. 최근 한훤고택에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퓨전카페가 생겼다. 평소 출입이 부담스러웠던 종택 뜰에 앉아 한 잔 차를 마시며 종택을 둘러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역시 전통과 현대는 서로 만나야 멋스러워지는가 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도동서원
프롤로그
현재 대구광역시에는 33개 서원이 있다. 모두 다 소중한 문화유산이지만 그래도 으뜸 서원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도동서원이다. 4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도동서원은 국가 보물, 사적에 이어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이로써 도동서원은 세계인이 함께 지키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대니산 북서쪽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도동서원. 400년 은행나무로도 잘 알려진 도동서원. 과연 어떤 곳일까?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로 1(도동리)]
조선을 대표하는 큰선비, 한훤당 김굉필
‘신미존치 47서원 중 하나’, ‘우리나라 5대 또는 9대 서원의 하나’, ‘조선시대 서원건축 양식의 정수’, ‘400년 은행나무’ 등. 도동서원을 수식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어떤 수식어를 끌어와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도동서원이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기리는 서원’이란 사실이다.
김굉필(金宏弼·1454-1504)은 자는 대유(大猷), 초명(初名)은 효동(孝童), 호는 한훤당(寒暄堂),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1454년(단종 2) 서울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절충장군 김뉴(金紐), 어머니는 청주 한씨다. 어릴 때는 공부에 관심이 없는 듯했으나 나이가 들수록 학문을 가까이 했다. 21세 때인 1474년(성종 5) 봄,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 들었다. 27세 때인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3등으로 합격해 성균관에서 수학했으나, 대과는 응시하지 않았다. 김굉필을 일명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한다. 그가 소학을 중시한 스승 김종직의 가르침대로 21세부터 30세까지 10년 동안 오로지 소학만을 공부했기 때문에 붙은 별칭이다. 가끔 사람들이 찾아와 시국에 대해 물어도 그는 한결같이 “소학동자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소”라고 답을 했다.
41세 때인 1494년(성종 25)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에 나아갔다. 이후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을 지냈다. 45세 때인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장 80대에 원방부처(遠方付處) 유배형을 받아 평안도 희천으로 보내졌다. 47세 때인 1500년(연산군 6), 희천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가 변경됐다. 51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또다시 연루되어 유배지 순천에서 죽임을 당했다. 기록은 그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어명을 받자 선생은 목욕재계한 후 의관을 갖추고 형장으로 나아갔다. 이때 우연히 신고 있던 짚신이 벗겨지자 가만히 다시 신었는데, 안색에는 조금의 변함도 없었다. 형 집행에 앞서 선생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불가병차수상(不可幷此受傷)이니라’하고 손으로 수염을 골라 입에 물고는 형을 맞았다.
이후 1517년(중종 12) 우의정에 증직, 1575년(선조 8) 문경(文敬)으로 시호를 받았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향됐다. 문묘에 종향된 우리나라 18현 중 설총·최치원은 신라시대 인물, 안향·정몽주는 고려시대 인물, 나머지 14현은 모두 조선시대 인물이다. 조선조 14현 중 수현(首賢)이 바로 한훤당 김굉필이다. 현풍 도동서원, 순천 옥천서원, 나주 경현서원, 화순 해망서원, 상주 도남서원, 가조 도산서원, 성주 천곡서원, 합천 이연서원, 아산 인산서원, 황해도 황주 백록동서원 등에 제향됐다.
조선시대 서원 건축의 백미, 도동서원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 서원은 모두 9개다. 소수서원(영주)·도산서원(안동)·병산서원(안동)·도동서원(대구)·남계서원(함양)·옥산서원(경주)·필암서원(장성)·무성서원(정읍)·돈암서원(논산). 이 중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백미를 꼽으라면 단연 도동서원을 꼽는다.
조선시대 서원 건축의 대표적 특징은 ‘위계성’과 ‘대칭성’이다. 위계성은 서원 건축물의 위계가 앞쪽에서 뒤쪽으로 가면서 높아지는 것을 말한다. 도동서원도 김굉필, 정구 두 선생 위패를 모신 사당이 서원 내에서 가장 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칭성은 서원 공간의 앞뒤를 잇는 중심축을 기준으로 좌우 공간이 닮은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일부 좌우 ‘틀린 그림’이 있긴 하다. 동·서재 쪽마루 유무와 동·서재 대청의 벽·창문·기둥 등이 그렇다. 이러한 차이는 상급생 기숙사 동재와 하급생 기숙사 서재에 대해 건축적 위계를 적용한 탓이다.
도동서원 건축의 파격미
도동서원 건축의 또 다른 특징은 ‘파격(破格)’이다. 도동서원 교문인 환주문(喚主門)은 높이가 170cm가 안 되고, 폭도 1m 남짓이며, 바닥 중앙에 연꽃봉우리를 조각한 커다란 돌이 하나 박혀 있다. 그래서 환주문을 출입하려면 옷자락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여 바닥을 살펴야 통과가 가능하다. 이는 서원에 들어올 때 공경을 표하라는 의미이다. 도동서원 강당 기단을 보면 사용된 돌의 재질·색깔·모양이 각양각색이다. 4각·6각·8각·10각 심지어 12각형 돌도 3개나 있다. 또 기단부에 꽂혀 있는 네 개의 용머리와 두 개의 세호[細虎·작은 호랑이], 기단부 아래 뜰 경계석 중앙에 박혀 있는 자라 머리 등도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것들이다. 강당 뒤편도 마찬가지다. 땅바닥에 붙여 낮게 설치한 두 개의 굴뚝과 내삼문의 문은 세 개인데 문으로 연결된 계단은 두 개뿐이다. 또 계단 기둥 돌에 조각된 연꽃봉우리, 태극 문양과 만(卍)자 문양, 그 아래에 숨겨둔 작은 샘, 내삼문 앞 중앙 계단에 박혀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동물 머리와 그 뒤편 바닥 돌에 새겨진 미스터리한 꽃잎 문양. 이뿐만이 아니다. 땅바닥이 아닌 사당 담벼락에 구멍을 내 설치한 감[坎·축문 등을 태우는 곳]도 특별하다. 앞서 언급한 용머리 등은 한 때 도난을 당했다가 되찾은 것들이다. 하지만 내삼문 계단 좌우 난간석에 있었던 한 쌍의 상서로운 동물 조각은 아직도 되찾지 못했다.
쌍귀부와 벽화
비석 받침으로 사용하는 돌거북을 귀부라고 한다.[사실은 거북이 아니라 용이다. ‘용생구자설’ 참고] 귀부 중에는 ‘쌍귀부(雙龜趺)’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거북이 2마리라는 뜻이다. 현재 국내에는 경주 3개, 포항 1개, 도동서원 1개, 모두 5개 쌍귀부가 있다. 경주·포항 쌍귀부는 신라시대 것인데 비 몸돌과 머릿돌은 사라지고 받침돌인 쌍귀부만 남아 있다. 하지만 도동서원 한훤당 선생 신도비를 받치고 있는 쌍귀부는 다르다. 머릿돌, 몸돌, 받침돌이 모두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유일한 조선시대 쌍귀부다. 한편 도동서원 사당 내부에는 사당 창건 당시 작품으로 알려진 두 점의 벽화가 있다. ‘설로장송(雪路長松)’,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 제목까지 달고 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실내 벽화이자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린 것이라 400년 세월에도 보존 상태가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쌍귀부, 사당 벽화는 아직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지도 않다.
에필로그
도동서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대표 서원이자, 서원 건축의 백미다. 해마다 수많은 방문객과 전통 건축 전공자가 도동서원을 다녀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혹시라도 도동서원 건축의 파격미를 확인해 보고 싶은가. 망설이지 말고 도동서원을 찾아오라. 그리고 400년 전 도동서원을 기획하고 설계했을 그 분의 입장이 한 번 되어보라. 이제껏 보지 못했던 또 다른 도동서원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나저나 도동서원의 파격, 누구의 아이디어일까? 한훤당 선생과 함께 도동서원 사당에 모셔진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아이디어다.
금호강·낙동강권
남평 문씨 인흥 세거지
프롤로그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남평 문씨 인흥 세거지’가 있다. 마을 규모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마을처럼 마을 역사가 600년 가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1년 365일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이 작은 마을에 도대체 무슨 볼거리가 있고, 무슨 매력이 있길래 이렇듯 많은 방문객이 찾아오는 걸까? 당연히 이유가 있다. 이번에는 인흥마을에 대해 알아보자. [달성군 화원읍 인흥3길 16(본리리)]
남평 문씨들만 사는 마을
인흥마을 정식 문화유산 명칭은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다. 남평 문씨는 문씨는 문씨인데 본관을 남평으로 하는 문씨란 뜻이다. 본리는 마을 이름이고, 세거지(世居地)는 특정 종족이 오랜 세월 대대로 살아온 지역을 말한다. 이 마을에는 ‘9가(家) 2당(堂) 1문고(文庫)’라고 해서 아홉 집 민가, 두 개 재실, 한 개 문고가 있다. 이 중 9가는 마을주민이 사는 민가인데 아홉 집 모두 남평 문씨가 살고 있다. 남평 문씨는 고려시대에 남평백에 오른 ‘문다성(文多省)’이라는 인물을 시조로 한다. 남평 문씨 중 역사적으로 이름난 인물로는 목화씨로 유명한 문익점(文益漸·1329-1398)이 있다. 문익점의 손자 문래, 문영 역시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이다. 문래가 목면에서 실을 뽑는 틀을 처음 만들었는데 틀 이름이 ‘물레’, 동생 문영은 물레에서 뽑아낸 실로 베를 처음 짰는데 베를 ‘무명’이라 했다는 이야기다.
남평 문씨 인흥마을 특징
180년 내력 양반마을
인흥마을은 역사가 채 200년이 안 된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마을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민다. 그런데도 대구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전통 마을 하면 남평 문씨 인흥 세거지가 꼭 언급된다. 이유가 뭘까? 남평 문씨 인흥마을 형성은 조선 후기인 1840년경부터 이후 약 100년에 이르는 시기다. 이 시기는 조선 후기, 대한제국, 개항기, 일제강점기라는 우리 역사에 있어 짧지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바로 이 격동기에 형성된 양반마을이면서, 이후 유·무형의 전통문화가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인흥마을 매력이다. 얼마 전 tvn에서 방영된 이병헌 주연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과 인흥마을 형성 시기가 얼추 비슷하다.
우물 정(井)자, 바둑판 형태 마을
우리나라 전통 마을은 모습이 비슷하다. 마을 뒷산으로부터 이어지는 골짜기와 물길을 따라 길이 있고, 길을 따라 집이 있다. 사방 반듯한 골목을 끼고 집이 들어선 요즘 도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인흥마을은 전통 마을인데도 지형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집이 들어선 것이 아니라, 도시계획에 따라 집이 들어섰다. 살림집 9채, 재실 2채, 문중 문고 1채 등 모두 12채의 집이 상하좌우 오와 열을 맞춰 들어서 있다. 마치 바둑판 무늬나 우물 정(井) 자처럼 말이다. 이는 마을을 처음 연 입향조의 의지가 반영된 까닭이다. 입향조 인산재 문경호는 하늘에서 내려다본 마을 모습이 ‘井’ 자가 될 수 있도록 마을계획을 했고, 후손들 또한 입향조의 마을계획을 잘 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흥사(仁興寺) 절터 위에 세워진 인흥마을
인흥마을은 1,000여 년 전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인흥사 절터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인흥사는 신라 말 혹은 고려 초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인흥사는 삼국유사 저자 일연스님이 11년간 주석한 사찰이다] 인흥마을은 임란 이후 250여 년간 빈터로 있던 인흥사지에 세워진 마을이다. 인흥마을에는 이 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여럿 남아 있다. 먼저 마을 입구 목화밭에 서 있는 인흥사지 3층 석탑을 들 수 있다. 과거 마을 서쪽 논에도 훼손된 석탑 1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에 복원되어 있다. 다음으로 죽헌종택에 있는 인흥사 시절 우물 고려정(高麗井)을 들 수 있다. 또 문중 재실 광거당 건축에 사용된 석재 중 일부가 인흥사 석재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외 지표조사나 건축 시에 출토됐던 주춧돌이나 기와 파편 등도 들 수 있다. 마을 앞 목화밭을 조성할 때도 거대한 회랑 흔적이 발견됐다. 하지만 후일을 기약하며 그대로 덮어두고 그 위에 목화밭을 조성했다. 예전에 한 주민이 이 일대에서 밭을 갈다 땅속에서 금동불상을 발견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한다.
9가(家) 2당(堂) 1문고(文庫)
9가(家), 아홉 살림집
‘9가’는 아홉 살림집을 말한다. 인흥마을에는 죽헌종택을 중심으로 수봉고택, 보당고택 세 집이 마을 위쪽 중심에 ‘품(品)’ 자형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주변으로 ‘약산가·유당가·탄당가·춘강가·현채가·혁채가’ 여섯 집이 있다. 인흥마을 아홉 집 이름을 보면 종법(宗法)을 수호하는 인흥마을의 유교전통을 엿볼 수 있다. 제일 큰집은 특별히 ‘종택’[죽헌종택]이라 이름하고, 그다음 큰집은 ‘고택’[수봉고택·보당고택], 나머지 집은 ‘가’[약산가·유당가·탄당가·춘강가·현채가·혁채가]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당(堂), 광거당과 수백당
‘2당’은 인흥마을에 있는 두 개의 재실을 말한다. 광거당과 수백당[수봉정사]이다. 두 재실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건립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책님(?)을 모셔두기 위해 건립했다는 점이다. 광거당(廣居堂)은 수봉 문영박이 아버지인 후은 문봉성의 명을 받들어 1910년 건립했다. 광거당 내력을 기록한 「광거당기」에는 문영박이 만권 서책을 모셔두기 위해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광거당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있다. 정면 5칸·측면 5칸 규모의 ‘T’ 자형 건물 광거당은 9칸 대문채, 헛담, 소나무 도래솔, 회화나무 고목, 우물 수천(壽泉), 편액과 주련 등 광거당이란 이름에 걸맞게 위풍당당한 자태가 정말 매력적인 고가다.
수백당(守白堂)은 1936년 건립된 재실로 수봉 문영박의 다섯 아들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수백당 역시 광거당과 마찬가지로 만권 서책이 모셔져 있던 곳이다. 정면 7칸·측면 2칸 규모의 수백당은 솟을대문, 뜰 가운데 두 그루 소나무 고목과 석가산(石假山) 등 근대기 우리네 양반가 한옥건축의 품격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문영박의 당호이기도 한 수백당은 청렴결백을 지키는 집이란 의미다.
1문고(文庫), 인수문고
인흥마을 문씨들은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1910년. 두 가지 눈에 띄는 행보를 한다. 하나는 광거당을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격적으로 책을 사들인 것이다. 당시 사들인 책 중에는 청나라 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인수문고 장서량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약 2만 권쯤 된다. 이는 우리나라 서원 중 최고 장서량을 자랑하는 도산서원 장서량을 훌쩍 넘는 양이다. 이 엄청난 양의 장서는 광거당과 수백당에 각각 나눠 모셔져(?) 있다가 1982년 지금의 인수문고로 옮겨졌다. 지면상 다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청나라 책을 사들인 것에는 중요한 비밀이 있었다. 뒤늦게 밝혀진 사실이지만 청나라 책 구입은 문영박이 상해임시정부로 보내는 독립군자금 비밀루트였다.
에필로그
인흥마을을 가리켜 외지인들은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 지역민들은 남평 문씨 ‘인흥’ 세거지라 한다. 이 같은 혼란이 생긴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개화기,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였다. 당시 중앙정부는 지방행정 효율성을 위해 전국 주요 마을 이름을 일괄적으로 본리(本里)·본동(本洞)으로 개칭했다. 현재 전국적으로 수없이 많은 본리·본동이란 지명은 이때 생겨난 것이다. 인흥마을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본리’가 아닌 ‘인흥’으로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100여 년 전부터 불리기 시작한 본리에 비해, 인흥은 무려 1,000여 년 전부터 사용했던 동명이기 때문이다. 인흥이란 지명은 고려시대 이 마을에 있었던 인흥사에서 유래됐다.
낙동강 중류 대표 나루, 사문진
프롤로그
경북 예천 하면 떠오르는 유명 관광지가 한 곳 있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삼강주막이다. 삼강주막은 낙동강, 내성천, 금천 세 물줄기가 만나는 삼강 나루에 복원된 주막이다. 지금의 삼강주막은 2대 주모였던 고 유옥연 할머니가 세상을 뜬 2005년 이후 버려져 있던 것을 2007년 복원해 관광 자원화에 성공한 것이다. 달성군에는 삼강 나루를 능가하는 나루가 있다. 예천에 삼강 나루가 있다면 대구 달성에는 사문진 나루가 있다.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로1길 40-12(성산리)]
낙동강 중류 대표 나루, 사문진
예나 지금이나 수로는 물류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원거리 대량 수송에 있어서는 하늘길이나 육로에 비해 수로가 단연 유리하다. 해양수로나 내륙수로에는 배를 정박하고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고 하역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를 항구·포구·나루라 한다. 대구를 경유하는 낙동강은 남한에서 제일 긴 강인만큼 예로부터 나루가 많았다. 낙동강 나루 중 대표 나루로는 20곳 정도가 알려져 있다. ‘구포·신포·불암·물금·녹산·가야진·본포·악양·도흥·웃개·율지·대암·사문진·개포·낙동·토진·하풍·삼강·하회·의촌’. 이중 대암과 사문진은 우리 고장 달성군에 있는 나루다.
사문진은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와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를 연결하는 나루이자, 동시에 낙동강 수로 상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던 나루다. 1446년(세종 28) 무역창고인 화원창이 세워지고, 1472년(성종 3) 대일무역을 위한 왜물고(倭物庫)가 설치되는 등 조선시대 사문진은 경상도와 대구를 들고나는 모든 물자의 집산지였다. 이후 사문진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8·15 광복 직후까지도 낙동강 수로의 주요 나루였다. 사문진이라는 이름은 크게 두 가지 유래설이 있다. 하나는 강가에 모래가 많아 ‘사문진(沙門津)’, 다른 하나는 인근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에 있었던 대사찰 인흥사에서 유래됐다는 설이다. ‘모래 沙’ 자를 쓰는 ‘沙門’이라는 표현은 본래 불교 승려를 일컫는 용어다. 달성군 가창면 남지장사 일주문에 걸려 있는 ‘최정산남지장사사문(最頂山南地藏寺沙門)’ 편액을 보면 알 수 있다. 근데 흥미로운 것은 유교에서도 유학자를 가리켜 ‘사문(斯文)’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예천에는 삼강 나루, 대구 달성에는 사문진 나루
2012년부터 사문진에서는 매년 ‘100대 피아노 콘서트’가 열린다. 말 그대로 한 무대에 100대 피아노를 동시에 올린 전국 최초 피아노 콘서트다. 이 콘서트는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인 1900년 3월 26일, 미국인 선교사 사이드 보텀 부부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 피아노가 사문진을 통해 들어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현재 사문진에는 피아노 관련 조형물이 많이 설치되어 있는데 다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삼강 나루와 사문진 나루는 비슷한 점이 많다. 삼강 나루는 낙동강·내성천·금천, 사문진은 낙동강·금호강·진천천, 이처럼 세 물줄기 합류 지점에 위치한다. 낙동강은 남한에서 제일 긴 강이요, 내성천과 금호강은 낙동강 최대 지류에 속하는 강이다. 또 이들 나루는 낙동강 수로 대표 나루였던 만큼 창고와 주막 등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두 나루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주막을 부활시켜 관광 자원화에도 성공했다. 또한 삼강주막이 600년 회화나무 아래에 있는 것처럼 사문진 주막 역시 500년 팽나무 아래에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예천 삼강 나루가 달성 사문진 나루를 넘어설 수 없는 결정적 이유가 있다. 삼강 나루에는 배가 운항하지 않지만 사문진 나루에는 지금도 배[유람선]가 운항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루에 배가 다니지 않으면 ‘팥소 없는 진빵’ 아닌가!
에필로그
달성군 화원읍에는 유명한 전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 신라 경덕왕이 사문진과 화원동산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이곳에다 행궁을 짓고 아홉 번이나 다녀갔다는 전설이다. 이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이 ‘화원(花園)’과 ‘구라리(九羅里)’다. 우스개 소리로 이 지역을 뭐라고 칭하는지를 보면 신세대 대구시민인지 구세대 대구시민인지 구별할 수 있다고 하다. ‘화원동산’이라고 하면 구세대, ‘사문진 나루[주막촌]’라고 하면 신세대라 한단다.
인조 임금이 다녀간 아름다운 정자, 하목정
프롤로그
2019년 12월,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낙동강변에 있는 정자 하나가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아름다운 정자로 대구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익히 알려진 하목정이다. 조선 16대 임금 인조가 다녀간 정자, 사가(私家)임에도 임금의 명으로 부연(附椽) 달았던 특별한 정자, 초당 4걸 중 한 명인 왕발의 「등왕각서」에서 이름이 유래된 정자, 전양군 이익필 불천위 사당이 있는 정자, 대구에서 배롱나무꽃이 가장 아름다운 정자, 전의 이씨 문중 랜드마크 등, 수많은 수식어를 달고 있는 달성 하목정. 하목정은 어떤 곳일까? [달성군 하빈면 하목정길 56-10(하산리)]
하목정에 부연을 달도록 하라
하목정(霞鶩亭)은 임란 직후인 1604년(선조 37)경,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1566-1638)이 창건한 정자다. 이종문은 하빈 지역 벌족인 전의 이씨(全義李氏) 문중 현조[顯祖·이름난 조상]로, 임란 때 대구 서쪽 하빈현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난이 끝난 뒤 원종공신에 올랐고, 사헌부 감찰에 이어 여러 고을 수령을 지냈다. 이후 고향 하빈으로 물러나 하목정[하목당]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하목정은 조선 16대 임금 인조와 인연이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정확한 자료는 이종문의 문집인 낙포집에 있는 「하목정창수전말」이란 기록이다. 하목정 창건과 중수 내력을 밝힌 「하목정창수전말」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살펴 보건데 하목정은 낙포공이 창건했다. 인조 대왕이 잠저[潛邸·왕위에 오르기 전] 시에 일찍이 미행(微行)하여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 후 낙포공의 장자 이지영이 산관(散官)으로 입시(入侍) 했는데, 상이 그를 알아보고 앞으로 나아오기를 명했다. 상이 이르기를 “너의 집 하목정은 강산이 수려한 곳에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그런데 정자에 부연을 달지 않았던데 어찌된 것이냐?”고 말했다. 이지영이 답하기를 “사서인이 거처하는 집에는 감히 부연을 달 수 없습니다”고 했다. 이에 상은 “정자와 관(觀)은 일반 사가와는 다른 법이니, 모름지기 수리해서 부연을 다는 것이 옳다”며 내탕금[內帑金·임금 개인금고]으로 은 200냥을 내려 부연을 설치하라고 명했다. 이지영은 상의 명에 “전하의 명이 이러하시니 부연을 설치한 뒤로는 삼가 출입을 금하고 감히 사사로이 거처하지 않겠습니다”고 답했다. 상은 “거처하기를 폐할 것까지는 없고 내가 다녀간 흔적만 표시하면 될 것이다”며 ‘하목당’ 큰 글자 석 자를 써서 내려주어 하목정 처마에 걸게 했다.
‘附椽’도 맞고 ‘婦椽’도 맞다
부연은 전통건축 용어다. 전통 한옥 지붕은 서까래로 기초를 하고 그 위에 이엉, 기와 같은 지붕을 얹는다. 서까래는 지붕을 건물 바깥쪽으로 빼내 햇볕이나 비바람을 막는 처마에 쓰인 건축 부재다. 한옥 처마 서까래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단면이 둥근 서까래 위에 바로 지붕이 얹힌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서까래 위에 단면이 사각형인 서까래가 덧붙어 있는 형태다. 전자는 처마가 하나라서 ‘홑처마’, 후자는 처마가 2층이라 ‘겹처마’라 한다. 겹처마는 홑처마에 비해 처마가 더 깊고 더 길다. 그래서 지붕은 더 커지고 건물 외형은 더 웅장해진다. 이것이 겹처마를 설치하는 이유다.
겹처마에서 위쪽 서까래를 ‘부연’이라 한다. 아래쪽 서까래 위에 덧붙였다고 ‘붙일 부(附)’, ‘서까래 연(椽)’을 써서 ‘附椽’이라 한다. 그런데 국어사전에서 부연을 찾아보면 같은 항목에 ‘附椽’ 외에 ‘婦椽’이라는 또 다른 한자 이름이 있다. ‘婦椽’은 ‘며느리 부’, ‘서까래 연’이다. 여기에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옛적에 손재주가 좋은 목수가 있었다. 한 번은 나랏님의 부탁으로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짓게 됐다. 목수는 평소처럼 서까래로 쓸 나무들을 미리 다듬어 놓았다. 그런데 지붕을 올리기로 한 날. 그만 사달이 나고 말았다. 참을 챙겨 작업장으로 들어서던 목수의 며느리가 땅에 주저앉아 실성한 듯 울고 있는 시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며늘아가! 이제 나는 죽었구나. 미리 다듬어 두었던 서까래가 하나같이 다 짧구나. 도저히 서까래로 쓸 수가 없어. 이제 어찌하면 좋겠느냐!” 이에 며느리는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아버님 손재주는 나라 안이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서까래가 짧으면 다른 서까래를 하나 덧대 길게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옳거니!”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며느리 서까래’, 곧 ‘婦椽’이다. 조선시대엔 일반 사가에서는 부연을 달지 못했다. 신분에 따라 건축물 규모와 양식에 제한을 둔 ‘가사제한령’이란 국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목정은 ‘부연 금지법(?)’이 엄정하게 살아 있던 조선 중기 건물임에도 보다시피 당당하게 부연이 달려있다.
천년만년 제사를 받들다, 이익필 불천위 사당
하목정 뒤편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공간이 하나 있다. 흙돌담에 둘러싸인 별도 공간, 전양군(全陽君) 이익필(李益馝·1674-1751) 불천위 사당이다. 이익필은 본관이 전의, 자는 문원, 호는 하옹(霞翁), 시호는 양무(襄武)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해 대장부의 기질이 있었고 종종 귀신을 보기 위해 밤새 사당을 지키기도 했다. 1703년(숙종 29) 무과에 급제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도순무사 오명항과 함께 금위우별장으로 큰 공을 세웠다. 난을 평정하고 개선할 때 영조 임금이 직접 남대문까지 나와 손수 술잔을 건넸다고 한다. 이때 공으로 ‘수충갈성양무공신3등’에 오르고, ‘전양군’에 봉군됐다. 이후 전라 병사, 평안 병사 등을 역임하고 고향 하목정으로 돌아와 만년을 보냈다. 향년 78세로 졸했는데 사후 병조 판서에 추증되고, ‘양무’라는 시호가 내렸다. 특히 그는 영조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대한 기사가 많이 등재되어 있다.
불천위 사당이 처음 세워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이다. 최근 2023-24년 사당을 해체 보수했는데, 모습은 창건 당시 그대로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당 앞뜰에는 수령 200-30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배롱나무 고목이 여러 그루 있다. 사당을 찾은 방문객들은 사당 뜰에 서면 자연스레 배롱나무 쪽으로 눈이 간다. 수백 년 세월 사당을 지키고 서 있는 배롱나무에서 풍기는 묘한 기운 때문인 것 같다.
에필로그
‘하목’이란 정자 이름은 저 유명한 당나라 왕발의 「등왕각서(騰王閣序)」라는 글에서 가져온 말이다.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함께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과 긴 하늘은 한 빛을 이루네’(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이 문장에서 ‘노을 霞’와 ‘따오기 鶩’ 두 글자를 취한 것이다. 이는 저녁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하목정 모습을 중국 강남 3대 누각 중 하나인 등왕각에 비댄 것이다. 지면상 싣지 못했지만 왕발이 「등왕각서」를 쓰게 된 스토리는 꼭 한 번 알아보기를 권한다. 하목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왕발의 「등왕각서」 스토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다.
하빈면 묘골 육신사, ‘묘골’의 비밀을 풀다
프롤로그
달성군 하빈면 묘리. 흔히 묘골이라 불리는 마을이다. 묘골은 사육신 취금헌 박팽년 선생 후손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순천 박씨(順天朴氏) 충정공파(忠正公派)로 불리는 문중이다. 문중원들은 자신들을 ‘묘골 박씨’로 칭한다. 사육신 박팽년의 직계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묘골 박씨’ 네 글자에 담은 것이다. 필자는 묘골 육신사에서 해설사로 활동하며 2017년 ‘묘골 육신사 이야기’라는 책을 발간한 적이 있다. 이 책을 통해 묘골의 여러 스토리를 소개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묘(妙)골·묘(廟)골·묘(竗)골’ 스토리텔링이다. 이는 오랜 세월 묘골에서 구전 되어온 문중 전설을 필자가 직접 검증하고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 만든 스토리텔링이다. ‘카더라’가 아닌 구전의 정확한 근거를 찾아내 확인함으로써, 전설로만 치부되던 구전에 자신감과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기존 ‘묘골 전설’에서 생명력을 얻어 세상 밖으로 나온 ‘묘골·묘골·묘골’ 스토리를 알아보자.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4(묘리)]
560년 내력 박팽년 선생 직계 후손 세거지
본격 이야기에 앞서 먼저 묘골 내력부터 알아보자. 지금으로부터 569년 전,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은 작은 아버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이때 비운의 왕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 바친 여섯 충신이 있었다. 역사는 이들을 ‘사육신(死六臣)’이라 기록했다.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 운동에 실패한 사육신은 세조에 의해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아버지·형제·아들에 이르기까지 3대가 멸족되는 반역죄로 다스려진 것이다. 하지만 충신의 핏줄을 한 명이라도 살리고자 했던 신의 뜻이었을까? 사육신 중 유일하게 직계혈육을 남긴 인물이 있었다. 바로 묘골의 상징 인물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1417-1456) 선생이다.
묘골에는 여러 전설이 전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박일산[박비] 전설’이다. 박일산은 박팽년의 손자로 사육신들의 직계혈육 남자로서는 유일한 생존자다. ‘박일산 전설’의 대략을 소개하면 이렇다.
사육신 사건 당시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는 임신 중이었다. 국법에 의해 대구 관아 노비가 된 성주 이씨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들이면 죽이라는 세조의 엄명이 있었지만, 아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같은 시기에 출생한 성주 이씨 친정집 여종의 딸과 몰래 바꿔졌기 때문이다.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남몰래 키워진 아이는 17년 후 성종 때 자수를 했고, 성종은 아이에게 ‘하나 남은 소중한 보물’이란 뜻으로 ‘일산(壹珊)’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이후 박일산은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묘골에 터를 잡았으니 560년 내력의 묘골이 그로부터 시작됐다.
‘박일산 전설’은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오랜 세월 호사가의 입과 붓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전설이다. 정조 임금·이긍익·이덕무·권이진 등 조선시대 이름난 문장가들의 개인 문집 등에도 여러 차례 소개됐다. 반면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오랜 세월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560년 내력 명문가 역사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필자의 확인 결과 ‘박일산 전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재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묘(妙)골, 묘(廟)골, 묘(竗)골 스토리
마을 유래가 참 묘하도다, ‘묘(妙)골’
妙는 ‘묘할 묘’다. 무엇이 그렇게 묘해서 마을 이름에다 묘 자를 썼을까? 답은 앞에서 언급한 ‘박일산 스토리’에 있다. 묘골을 찾는 방문객들은 ‘박일산 전설’과 ‘박계창 꿈 전설’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방문객 중 일부는 ‘박일산 전설’에 대해 매우 부정적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문중을 높이기 위해 꾸며낸 허무맹랑한 거짓 이야기’라는 것. 근거로는 성종으로부터 ‘박일산’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다면 조선왕조실록에 뭐라도 한 줄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필자가 이 숙제를 풀었다. 숙제를 풀 수 있었던 열쇠는 박일산의 초명(初名) ‘박비(朴婢)’였다. 난데없는 ‘朴斐(박비)’라는 검색어에 ‘박일산 스토리’가 걸려든 것이다. ‘朴斐’로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을 하면 다음과 같은 단 1건의 검색 결과가 나온다.
선조실록 161권, 선조 36년[1603, 만력 31] 4월 21일 정미(丁未)
사헌부에서 산음 현감 김응성과 태안 군수 박충후를 탄핵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태안 군수 박충후는 난리 뒤에 출신한 사람으로 무재(武才)가 없고 또한 글을 알지 못합니다.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다스리기에는 실로 소임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박충후는 문종조(文宗朝)의 충신 박팽년의 후손이다. 세조가 육신(六臣)을 모두 주살한 뒤에, 박팽년의 손자 박비(朴斐)는 유복자이었기에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이다. 갓 낳았을 적에 당시의 현명한 사람을 힘입어 딸을 낳았다고 속여서 말을 하고 이름을 비(斐)라고 했으며, 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슬쩍 계집종으로 대신하곤 함으로써 홀로 화를 모면하여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박충후는 곧 그의 증손으로서 육신(六臣) 중에 유독 박팽년만 후손이 있게 된 것이다.】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고 의성군(義城君)을 추고하라.”하였다.
내용을 보면 지금 세상에 알려진 ‘박일산 전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다만 여종의 딸과 바꿔 키웠다거나, 성종 임금으로부터 일산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는 등의 이야기는 없다. 하긴 지금으로부터 무려 560년 전, 그것도 당시로서는 역모에 연루된 인물의 후손이었던 만큼 제대로 된 기록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이 점을 감안하면 위 기록 행간에 ‘±α’가 더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노파심에서 사족을 하나 달아본다. 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박충후라는 인물을 무능한 고을 수령으로 묘사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다 좋은데 한 가지 맹점이 있다. 바로 승자 입장에서 쓴 기록이라는 점이다. 박충후는 박팽년 선생의 5대 종손(宗孫)으로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다. 임진왜란 때는 대구 유진장 및 의병장으로 활약해 선무원종공신에 올랐으며,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냈다. 이처럼 박충후는 조선 중기 대구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사육신을 모신 사당이 있소, ‘묘(廟)골’
두 번째 묘골 스토리, ‘사당 묘’, ‘묘(廟)골’에 대해 알아보자. 이는 마을에 사육신을 모신 사당이 있어 묘(廟)골이란 설인데, 이 역시 필자가 만든 스토리다. 서울 종로구 묘동(廟洞)이 종묘가 있어 묘동이듯, 묘골 역시 사당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한 스토리였다. 560년 내력을 지닌 묘골은 역시 대단했다. 이 또한 전설이 아닌 팩트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숙제의 문을 연 열쇠는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인 1713년(숙종 39),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 선생이 지은 시에서 찾았다. 권이진은 우암 송시열의 외손자이자 명재 윤증의 문인으로 동래 부사, 호조 판서, 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낸 조선 후기 문신이다. 그는 1713년(숙종 39) 3월 6일, 경주 옥산서원을 출발해 육신사·회연서원·동계묘를 지나면서 시를 남겼다. 유회당집 「권1」에 실려 있는 시 중에서 유독 필자의 눈을 사로잡는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當年朴婢事如何(당년박비사여하) 옛날 박비의 일은 어찌된 것인가
祠屋嵬然起洛阿(사옥괴연기낙아) 사당이 낙동강가에 높이 솟았도다
自是聖朝崇節義(자시성조숭절의) 이는 선대 조정에서 절의를 숭상한 까닭이니
莫言天道佑忠多(막언천도우충다) 하늘이 충신을 도왔다고 말하지 말라
右庿洞六臣祠在大丘(우묘동육신사재대구)
위 시 끝에 ‘右庿洞六臣祠在大丘’라는 주가 달려있다. ‘오른쪽 시 묘동(庿洞) 육신사는 대구에 있다’는 뜻이다. 참고로 ‘庿’는 ‘사당 묘(廟)’의 고자(古字)로 ‘廟’와 통용하는 글자다. 따라서 ‘庿洞’은 사당이 있는 동네란 말이다. 이로써 필자가 그동안 써먹었던 ‘묘(廟)골’ 스토리텔링 역시 ‘픽션’이 아닌 팩트로 확인됐다.
참 묘하게도 생겼구나, ‘묘(竗)골’
마지막으로 묘(竗)골 스토리다. ‘竗’라는 글자를 큰 자전에서 찾아보면 ‘땅이름 묘’라고 나온다. 땅 모양이 묘하게 생겼을 때 사용하는 글자다. 그래서일까. 묘골은 땅 모양이 정말 묘하게 생겼다. 풍수지리에서는 이곳 묘골 풍수를 ‘용(龍)’이나 한자 ‘파(巴)’자로 풀이한다. 용과 관련해서는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회룡고미혈(回龍顧尾穴)·와룡혈(臥龍穴) 등으로 풀어낸다. 산이 마을을 360도 감싸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풍수설이다. ‘파(巴)자설’은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접해 있는 묘골과 파회의 형국을 한자 ‘파(巴)’ 자에 대입한 설이다. 한자 파(巴) 자는 머리 부분에 두 개의 네모가 있는데, 네모 안에 해당하는 땅을 파자형 명당으로 보는 설이다. 이 설을 묘골에 대입하면 정확하게 좌측 네모 안에 파회, 우측 네모 안에 묘골이 있다. 그 외 묘골을 여성의 자궁에다 대입하는 풍수설도 있다. 묘골은 정남향에다 야트막한 산으로 빙 둘러싸여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기까지 하니 묘골 풍수는 정말 묘하다.
에필로그
560년 내력만큼이나 묘골에는 흥미로운 스토리가 지금도 많이 전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일 없다고. 한두 개도 아니고 수십 개가 넘는 ‘묘골 전설’이 아무런 근거 없이 생겨났을까? 근거 없이 생겨난 전설이라면 과연 수백 년 세월 동안 이렇듯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문중 전설은 대부분 탄생 근거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전설이 다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팩트 체크를 거친 전설은 그렇지 않은 전설에 비해 스토리가 주는 교훈과 감동이 배가된다.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말이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신화·전설을 역사로 끄집어내는 일. 이 또한 향토사학도들이 해야 할 일이다.
※Tip : 2017년 이후 묘골 육신사에 근무하는 해설사들은 ‘묘골·묘골·묘골’ 스토리텔링을 주요 해설 레퍼터리로 사용하고 있다.
중용은 정말 힘들구나, 삼가헌(三可軒)
프롤로그
앞서 살펴본 묘골 남쪽에 파회(巴回·坡回)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다. 나지막한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인접해 있는 묘골과 파회. 파회 역시 묘골과 마찬가지로 묘골 박씨 집성촌이다. 현재 묘골과 파회에는 각각 두 개의 국가지정 문화유산이 있다. 하나는 보물인 묘골 태고정, 다른 하나는 국가민속문화유산인 파회 삼가헌이다. [달성군 하빈면 묘동4길 15(묘리)]
삼가헌 창건주, 박성수
박성수(朴聖洙·1735-1810)는 자가 사원(士源), 호는 삼가헌 혹은 세한재(歲寒齋)이며, 취금헌 박팽년의 11세손이다. 관직은 첨중추겸오위장으로 풍모가 수려하고 학문을 겸비해 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일찍이 경세제민의 뜻을 품었지만 때를 얻지 못하고 고향에서 처사로 평생을 보냈다. 1798년(정조 22) 한강 정구와 낙재 서사원을 기리는 이락서당(伊洛書堂)을 창건할 때 대표였으며, ‘9문(門) 11향(鄕) 30인(人)’으로 결성된 이락서당 ‘이락계(伊洛契)’ 입계조(入契祖)다. 호 삼가헌은 그의 나이 35세(1769년·영조 45) 때 건립한 초가 삼가헌에서 유래한 것이다.[「파산서당기」에는 창건 연도가 1783년(정조 7)으로 되어 있다] 삼가헌은 이후 그의 둘째 아들인 노포 박광석에 의해 기와로 중건, 이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인은 증 정부인 부림 홍씨이며 슬하에 아들 박광보, 박광석, 박광조와 딸 셋을 두었다. 묘는 칠곡군 가산면 거문강촌에 있다. 저서로는 고금인감 10권, 광부언 2권, 치세지남 등이 전한다.
파회에 초가 짓고 ‘삼가헌(三可軒)’이라 편액
박성수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인 1769년(영조 45), 묘골 남쪽 파회에 초가 한 채를 짓고 ‘삼가헌’이라 편액했다. 파회는 동·서·북쪽이 구봉산(九峯山)에 둘러싸여 있다. 서쪽 구봉산 너머로 낙동강이 흐르는데 낙동강과는 직선거리로 불과 250m 거리다. 그래서 예로부터 파회는 강호(江湖)의 운치가 있는 마을로 알려졌다. 또 파회는 육신사 전신인 낙빈서원(洛濱書院)이 있어 ‘원저촌(院底村)’ 또는 ‘소묘동(小竗洞)’으로도 불렸다. 파회란 마을 명에 대해서는 「파산서당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 정조 계묘(1783)에 증왕고[박성수]께서 조부님[박광석]을 분가시킬 때 집을 매입해 새로 수리해 초가를 짓고 삼가헌이라 이름했다. 기문(記文)과 신거팔영(新居八詠)이 있다. 마을을 파회동(巴回洞)이라 이름하니 산 모양이 파(巴) 자처럼 돌아감을 말한 것이다. 혹은 자음(字音)을 취해 파(坡) 자로 쓰기도 한다 ···
이후 삼가헌은 창건주 박성수의 둘째 아들 노포(老圃) 박광석(朴光錫)이 삼가헌으로 살림을 나면서 삼가헌 2대 주인이 됐다. 박광석은 1809년(순조 9) 초가 삼가헌을 헐어 기와집으로 중수하고, 1826년(순조 26) 사랑채도 건립했다. 박광석 사후 삼가헌은 박광석의 맏손자 하정(荷亭) 박규현(朴奎鉉)이 이어받아 삼가헌 3대 주인이 됐다.[박광석의 장남 박기재는 박광석보다 일찍 사망했다. 그래서 박광석의 장손 박규현이 삼가헌 3대 주인이 됐다] 삼가헌 건물은 안채, 사랑채, 별당채, 곳간채, 대문채, 중문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가헌이란 이름은 중용(中庸) 「제9장」에서 가져온 것인데, 핵심은 맨 마지막 구절에 있다.
‘자왈(子曰) 천하국가(天下國家)도 가균야(可均也)며, 작록(爵祿)도 가사야(可辭也)며, 백인(白刃)도 가도야(可蹈也)로되, 중용(中庸)은 불가능야(不可能也)니라’
(천하와 국가를 고르게 잘 다스릴 수 있고, 작위와 관록을 사양할 수도 있으며, 서슬 퍼런 칼날도 밟을 수 있지만, 중용은 잘할 수가 없다)
삼가헌에는 보물이 하나 있다. 사랑채 서쪽 담장 안에 있는 ‘하엽정(荷葉亭)’과 ‘연당(蓮塘)’이다. 이곳은 삼가헌에 딸린 별당채인데 예전에는 ‘파산서당(巴山書堂)’이라 불렸다. 박성수의 증손자이자 삼가헌 3대 주인인 박규현이 1874년(고종 11) 건립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엽정 연당은 직사각형 연못 가운데 원형 섬을 조성한 ‘방지원도(方池圓島)’ 형 연못이다. 이 연못은 하엽정을 지을 때 필요한 흙을 파내고 난 자리에 생긴 구덩이를 연당으로 조성한 것이다.
에필로그
삼가헌은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 어느 한 시점에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완성된 집이 아니다. 삼가헌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는 데는 ‘박성수·박광석·박기재·박규현’ 등으로 이어지는 무려 4대에 걸친 10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후 100년 세월은 파회에서 ‘흙 묻어 버려진 옥’인 듯 때를 기다렸다. 삼가헌이 지금처럼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는 데는 무려 200년이란 인고의 세월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