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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성동(城洞),
수성구를 대표하는 야외박물관 및 옛 명승지
개관
수성구 고산동의 법정동인 성동(城洞)은 고산(95.3m)을 중심으로 하는 마을이다. 고산(孤山)은 들 가운데 ’홀로 외로이 있는 산‘이란 뜻이며, 산 정상부에 산성이 있어 성산(城山)이라고도 한다. 성동이란 지명은 성산 주변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됐다. 성동은 남쪽에 이웃한 사월동과 경계를 이루며 하사월(下沙月)이라 부르기도 했다. 성동 마을 주변은 모래, 개흙 등이 쌓인 비옥한 퇴적층 토지로 원예농업이 발달했다. 성동에는 인천 채씨, 청주 정씨가 오랫동안 세거해 왔다. 고산을 중심으로 동쪽에 성동의 중심 마을인 성동이 있으며, 서쪽에 모산골, 북동쪽에 서원(書院) 마을이 있다. 또한 1850년대에 진용백이란 사람이 행자정(탱자정)이란 이름으로 상점을 열어 행자정 마을이라 부르는 동네가 있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과거 고산에는 성동 산성 또는 고산 토성이라 부르는 산성이 있었다. 고산 토성에는 수성구 법이산 봉수와 경산시 하양읍 시산 봉수를 잇는 성산 봉수가 있었으며, 서낭당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고산 토성·성동 산성’, ‘성산·고산’ 등 여러 용어가 사용되고 있어 산성과 산 이름을 공식적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지명 유래
성동은 고산(성산)에 있는 옛 성 동쪽 기슭에 마을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경산현읍지(1785), 「호구총수」(1789) 등에는 성 동쪽 마을(城東里)로 기록되어 있으며, 19세기 초 영남읍지와 경산현지(1850)에는 성마을(城洞里)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지명개편 때 리(里)를 동(洞)으로 바꾸면서 성마을을 성동동(城洞洞)이 아닌 성동(城洞)으로 바꿨다.
감자보와 강당들
감자보는 성동 동쪽에 있었던 보다. 수원이 좋아 많은 들에 물을 댔다. 강당은 고산서당 인근에 있는 논으로 고산서당 강당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1954년 항공사진에 성동들 사이로 물길이 나 있는 감자보가 보인다.
갯벌
성동 북쪽 남천과 금호강 사이에 있는 들로 남천과 금호강 범람으로 형성된 저습지다. 금호강에 제방이 축조되고 난 뒤에는 농경지로 활용되고 있다. 갯벌은 개(모래·흙)와 벌(펄·들)이 합성된 말로 바다나 강 주변에 형성된 모래땅, 저습지, 진흙땅을 말한다. 갯벌은 ‘갯땅’, ‘개땅’이라 부르기도 하며, ‘깨들’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고산(孤山)·성산(城山)
고산(95.3m)은 성동과 매호동의 경계에 있는 독산(獨山)이다. 남쪽으로 멀리 자양산과 사직단을 바라보고, 동쪽과 북쪽으로는 남천과 금호강이 감싸 흐른다. 서쪽으로는 천을산과 거리를 두고 매호들이 펼쳐져 있으며, 매호들 사이로 매호천이 흐른다. 이처럼 고산은 평지 한 가운데 있어 주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산성지다. 산 정상부에 고산 토성과 성산 봉수가 있어 인접한 자양산성과 군사적으로 연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산 토성 내에는 식수로 사용한 샘이 있었으며, 기와나 그릇을 만들던 와요지(瓦窯址) 유적도 있다.
고산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생전에 자신의 묏자리를 잡았다는 전설이 전할 만큼 명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고산서당이 설립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기도 했다. 고산 동쪽 끝자락 성동 마을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달서재(達西齋) 채선수(蔡先修·1568-1634) 선생을 기리는 성산재(城山齋)가 지금도 있다. 옛날에는 고산이 마치 누에가 누워있는 모습을 닮아 ‘잠베산’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매호동 쪽에서는 우산(牛山·소산) 앞에 있다고 ‘소 여물통’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산은 들판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외로운 산’에다 높지도 크지도 않은 작은 산이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 대구와 경산 사이 넓은 지역을 일컫는 ‘고산’이란 지명의 유래가 된 산이다. 이는 고산이 퇴계 이황이란 인물을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황은 고산서당이란 서당 이름을 지어주었고, ‘구도(求道)’란 문 이름을 친필로 써서 내려주었으며, 이후 고산서당에서 강학을 한 사실이 있다. 고산서당 관련된 여러 기록에는 하나 같이 이러한 내용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141)
지명조사철(1959)에는 고산에 대해 “이 퇴계, 정 우복 양선생의 유촉지지(遺躅之地)이며, 다른 산으로부터 이어진 맥이 없고 고립 돌출하여 옛날에는 수목이 무성하고 사방 경치가 좋아 관람객이 연속되어 고산면의 명승지임. 고산면의 면 이름도 본 명승지에 연유해서 고산면으로 지정되었음. 이상 연유로 고산이라 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41) 관련 기록물은 다음과 같다. ‘구도문기, 묘우중건기, 고산서원 동·서재 중수기, 고산서원 훼철시장, 퇴도이선생우복정선생강학유허비, 고산유허서당기, 고산서당 상량문, 고산서당 창건기사’.
고산서당(孤山書堂)
고산서당(성동 172)은 고산 북동쪽 끝 서원골에 있다. 최초 건립 연대는 1560년(명종 15)으로 추정하고 있다.142) 퇴계 이황과 우복 정경세 선생이 강학했다고 전해오는 유서 깊은 유적으로 현재 대구시문화유산자료다. 고산서당 내력은 다음과 같다. 조선 명종 때 지방 유생들과 경산 현령 윤희렴(尹希廉)이 재실을 짓고 이황에게 재호(齋號)를 청했다. 이황은 재실 이름을 ‘고산(孤山)’, 문 이름을 ‘구도(求道)’로 하고 특별히 친필로 ‘구도’ 두 글자를 써주었다. 퇴계 친필 ‘求道’라는 편액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으나, 1789년(정조 13) 서원 입구에 문루를 세우고 정도권이라는 지역 선비가 모사해 다시 걸었다고 한다. 1690년(숙종 16) 진사 한홍익, 한두일 등이 중심이 되어 필요한 재원을 확보해 1697년(숙종 23) 이황과 정경세를 다시 제향하고 고산서원으로 개칭했다. 1734년(영조 10) 강당 및 동·서재를 짓고, 1746년(영조 22) 서원을 다시 지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 때 훼철됐다. 1879년(고종 16) 4월 16일 경산 유림을 중심으로 강학계(講學契)를 만들어 옛 고산서원 터에 강당만 다시 지어 ‘고산서당’이란 편액을 걸었고 1964년 중수했다.
현재 서당 뒤편 옛 사당터에는 이황과 정경세의 강학 유허비와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143) 또한 두 선생이 이곳에서 강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서당 경내에 있는 두 그루 느티나무에 각각 이황 나무, 정경세 나무라 이름을 붙였다. 고산서당 강당은 정면 4칸, 옆면 2칸 규모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북향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은 온돌방이며, 건물의 앞면, 대청 뒷면, 우측 온돌방 측면에 좁은 쪽마루가 있다. 구조는 3량가(三樑架)이며, 정면 가운데 기둥 하나만 둥근 기둥으로 하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운 간결한 형식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21년 12월 20일 새벽 발생한 화재로 강당 건물은 완전히 소실됐고, 현재 빈터만 남아 있다.
142) ‘고산서원·서당 유림회’ 간행 자료에 근거한 창건 연도. 창건자 윤희렴 묘갈명을 기준으로 하면 1570년(선조 3), 김재구의 ‘구도문기’를 기준으로 하면 1573년(선조 6)이 된다.
143) 2020년 복원. 이때 동고 서사선이 추가 제향됐다.
고산 토성(孤山土城)·성동 산성(城洞山城)
고산은 남쪽으로 자양산(안산·욱수골 뒷산)과 사직단, 동쪽과 북쪽은 남천과 금호강, 서쪽은 천을산과 고산들이 펼쳐져 있으며, 동시에 매호천이 흐르는 등, 주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산성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고산에는 삼국시대에 이미 산성이 축조됐다. 경산현과 관련된 각종 지리지 고적조에는 경산현에 있었던 ‘고포성(古浦城), 금성(金城), 우곡성(亏谷城)’ 등 3개 성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고포성(古浦城)과 우곡성(亏谷城)은 위치를 정확하게 비정하기 어려워 아직 논란이 있다. 대동지지(1861-1864)에는 북쪽 9리에 고포성이 있으며, 서쪽 6리에 우곡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된 성 이름으로 해석하면 고포성은 ‘예로부터 포구에 있는 성’이며, 우곡성은 ‘윗쪽 골짜기에 있는 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산 토성은 옛 기록의 고포성이라 할 수 있다.
고산 토성은 오랫동안 경산의 치소성(治所城)144) 역할을 했다고 추정된다. 고산 토성이 위치한 곳은 금호강, 남천, 욱수천, 매호천 등이 서로 합류하는 곳으로 이들 강이 성을 둘러싸고 해자(垓子)145)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성의 동, 남, 북쪽이 모두 절벽으로 되어 있으며, 시계(視界)가 사방으로 열려 있어 적 동태를 살피거나, 방어와 공격이 용이한 곳이다. 동시에 동쪽에는 대평들, 남쪽과 서쪽에는 고산들 등 넓은 들판을 끼고 있으며, 육로와 금호강 수로까지 갖춘 천혜의 요지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살려 신라 이래 오랫동안 경산의 치소성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려 말경 현재 경산 읍성이 있는 곳으로 치소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고산 토성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는 성산 봉수를 두어 대구의 법이산 봉수와 하양 시산 봉수와 응하도록 했다. 경산읍지에는 고산 토성에 성황당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54년 항공사진에서도 고산 토성이 확인되는데, 외성과 내성 성벽은 물론 남쪽 정상부에 성산 봉수터도 확인된다.
144) 한 지역을 관할하는 관아가 있는 성.
145) 방어 목적으로 성 밖으로 둘러 판 못.
모산골·못안골
고산 남서쪽 중앙부에 있는 모산지에서 북쪽 낮은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 고산 능선을 개간해 다양한 과수를 재배하며, 금호강과 남천 주변의 갯벌을 중심으로 원예농업이 활발하다. 최근에는 미나리도 많이 재배하고 있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모산지 인근에 5호, 북쪽으로 고개 너머에 10호 규모 모산골이 보인다. 대구의 뿌리 수성(2008)에는 모산골 전설이 실려 있다.
모산골은 모산지 뒤편(북쪽) 마을인데 못 안쪽에 있어 못안골로 부르던 것이 나중에 모산골이 됐다. 이곳에는 벽진 이씨 부잣집 전설이 전한다. 이 집에 손님이 너무 많이 찾아오자 이 집 며느리가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손님을 오지 않게 하는 방도를 물었다. 스님은 물길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돌리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 며느리가 스님이 알려준 대로 물길을 돌렸더니 손님도 끊기고 결국 집안도 망했다.
서원(書院) 마을
고산 북동쪽에 있는 고산서당 인근 마을이다. 1956년 기준 30호 164명의 주민이 거주했다.146) 1954년 항공사진에는 고산서당 서쪽에 민가 5호 정도가 보인다.
146) 지리연구소, 지명조사철, 1959.
성동 가양주(家釀酒·집에서 빚는 술)147)
성동 가양주는 수성구 성동에 세거해 온 청주 정씨 집안에서 전승되어 온 술이다. 청주 정씨 집으로 시집온 이분생(88세) 여사가 시어머니로부터 전수받아 전승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이 즐겨 마시는 술로 인근에도 잘 알려져 있다. 성동 마을 청주 정씨들은 전통사회가 그랬듯이 봉제사와 접빈객을 중요한 미덕으로 여겨 이때 사용할 술을 직접 빚었다. 이분생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제사 때는 반드시 가양주를 빚어 사용했다. 죽은 조상의 제사를 잘 모시는 것이 가양주를 정성껏 빚는 일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제례뿐만 아니라 관례, 혼례, 상례 등의 대소사나 내방객을 위한 접빈, 마을공동체 행사 때도 가양주를 빚어 함께 마시며 즐겼다. 성동 가양주는 우리나라 전통주로 널리 알려진 탁주의 일종이다. 즉 쌀과 누룩을 주재료로 빚은 일명 막걸리 혹은 곡주로 불리는 술이다.
147) 수성구청,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무형문화유산, 2021, 199-201쪽.
성산 봉수(城山烽燧)
고산(95.3m) 남쪽 정상부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대로 내지봉수(內地烽燧)148)에 해당한다. 『증보문헌비고』 병고조에 의하면 제2거 직봉(直烽)149)에 포함된 간봉(間烽)150) 가운데 하나다. 성산 봉수는 1425년(세종 7)에 간행된 『경상도지리지』에 처음 나타나며, 1895년(고종 32) 봉수제도가 철폐되기까지 500여 년간 수성구 법이산 봉수와 경산시 하양읍 시산 봉수를 잇는 역할을 했다. 성산 봉수는 2020년 금오문화재연구원에서 정밀 시굴 조사를 진행해 봉수대의 타원형 방호벽과 소화시설, 석렬, 수혈 등을 확인했다. 시굴 조사 결과 성산 봉수는 방호벽을 갖춘 초대형 내지봉수로 방호벽 둘레는 기저부 기준으로 103.3m, 상부 기준으로는 98.2m다.151) 경산현읍지(1749년경) 봉수조(烽燧條)에 “성산 봉수는 현 북쪽 8리에 있다. 북쪽으로 하양 시산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 대구부 법이산 봉수에 응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한편 “성산 봉수대 인근 공터에서 성동 주민들이 달집태우기를 하며 놀았다.”는 기록도 보인다.152)(‘성동산성’ 사진 참조)
148) 서울에 있는 봉수와 변경 지방에 있는 봉수를 연결하기 위해 그 사이 지역에 설치한 봉수.
149) 조선시대에 전국의 봉수망을 연결하는 중요한 근본 노선 상에 위치하고 있던 봉수대.
150) 직봉에 대응하는 노선상의 봉수 사이에 연락 두절을 우려해 보조로 설치한 봉수.
151) 향토문화전자대전.
152) 수성구청,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무형문화유산, 2021, 294쪽.
성산재(城山齋)와 달서재(達西齋) 채선수(蔡先修)
성산재(성동 203)는 조선 중기 대구 출신 선비이자 임란 의병장으로 활약한 달서재 채선수(1568-1634)를 기리는 인천 채씨 문중 재실이다. 위치는 고산 동쪽 성동 마을에 있다. 아버지는 채응원(蔡應黿)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다. 4살 때 백부(伯父)인 추월(秋月) 채응룡(蔡應龍)의 양자로 입양됐다. 6세 때 장현광에게 수학했다. 채선수는 어려서부터 위기지학에 뜻을 두고 공부했다. 이후 종숙부 채응린에게 대학을 배웠고, 이듬해인 1578년 재종제 채선길·채선견과 함께 압로정(狎鷺亭)에서 중용을 읽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켜 대구 ‘팔공산의진’에 나아가 이준·권응수 등과 함께 팔공산 남쪽을 지켰다. 1596년 여러 의병장과 함께 팔공산에서 회맹을 하고, 4월에 이눌·최동보와 함께 정예병 800명을 이끌고 팔공산의 왜적을 토벌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곽재우 휘하에 들어가 화왕산성을 지키며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경전과 역사서를 읽고 공부했으며, 손처눌 등과 교유했다. 사후 대구 북구 검단동 왕옥산의 서산(西山) 서원153)에 제향 됐으며, 재실로는 대구 달서구에 용산재(龍山齋), 수성구에 성산재(城山齋)가 있다. 문집으로 달서재집(達西齋集)이 있다.
153) 북구 검단동 산 1-1.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어 현재는 유허제단만 남아 있으며, 앞쪽에 압로정이 있다.
탱자정·행자정·지정주막(枳亭酒幕)
탱자정은 옛날 과거 길에 선비들이 쉬어 가던 정자가 있었던 곳으로 탱자정 주막(枳亭酒幕)이 있었다고 한다. 탱자정이 있었던 곳에 표지석이 있었다고 전하며, 지금도 탱자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대구의 뿌리 수성(2008)에는 “성동에는 1850년대에 진용백이란 사람이 행자정이란 이름으로 상점을 열어 행자정 마을이라 부르는 동네가 있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하지만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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