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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 및 지형
우리나라 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목포(신안군청)와의 거리는 47㎞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동경125°,북위34°에 자리잡고 있다.
전체의 면적은 52.67㎢이며 이중 본도는 41.37 ㎢이고 나머지는 우이도,경치도등 작은섬의 면적이다.
특히 도초도의 해안 서면에는 조류에 의한 운반물질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간석지가 넓게분포하여 양식장이나 염전으로 이용할 수 있는 면적이 대단히 많다.
또한 도초면의 시목리와 우이도에는 사장(沙場)이 넓고 길게 펼쳐져있어 양호한 해수욕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형은 대체로 원형으로서 동,서,남 3방향은 높이 10∼30m의 낮은 산악으로 둘러 싸여 있고 북쪽은 해면과의 차이가 1m 인 저지의 소분지로 산악이 적고 평야가 많은 편이다.
■ 도초의 연혁
도초면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였으며 고려,조선시대에는 나주목에 속하여 도치도라 하였으며 당시 마을명은 읍동(현고란), 썹다리(신교), 물목골(수항), 오류골(오류), 엄목동(엄목), 죽뻘(죽연), 밤석골(만년), 되내기(도락), 건들(수다), 배날리(나포), 활목(궁항), 발매 달게(월포), 지남 밧지남(외남), 대섬목(죽도) 등으로 최초에 대섬목으로 입도 거주하였다 한다.
1888년 해남군에 1894년 나주군에 환원됐다가 1896년 다시 해남군에 속하게 되었고 1897년에는 지도군에 1903년에 진도군에 편입되어 도초면이라 하여 월포, 발매, 죽도, 남리, 외남, 지남, 수항, 궁항, 오류, 죽련, 신교, 수다, 한발, 만년, 용동, 도락, 이곡, 고란의 18동리를 관할 하였다.
그후 1914년 4월 1일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무안군에 편입되어 발매, 지남, 외남, 오류, 죽련, 수항, 수다, 만년, 이곡, 고란의 10개리로 개편 관할 하다가 지금의 우이도는 도초면에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도 도초면에 속하지 않고 무안군 흑산면에 속했는데 1962년 11월 21일 법령 제1176호에 따라 흑산면의 우이도리를 도초면에 편입하여 11개 리가 되고 같은 해 6월 1일 군 조례 제35호에 의하여 우이도 출장소를 두었다.
그후, 무안군은 전국에서 가장 큰 군이었으나 1968도에 분군 하면서 내륙지역은 무안군, 도서지역은 신안군으로 분군하여 현재의 신안군청(목포시 소재)이 옛날 무안군청 자리이며 무안군청은 무안읍에 새로운 청사를 마련하여 현재에 이르고 따라서 1969년 1월 1일 법령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도초면)으로 분군되었다.
여기서 우이도가 도초면과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도 도초면에 속하지 않고 몇십배 먼거리인 흑산면에 속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우이도가 도초면과 가까운 곳이라고 하지만 바다에서 생산되는 어패류, 해조류 등과 바다의 생태계가 흑산도와 비슷하기 때문에 도초면 보다는 흑산면에 속하게 하였다고 할수 있으며 옛날에는 조그마한 섬하나를 행정구역으로 편입 하더라도 지리적 여건을 감안하여 편입 하였다고 할수 있다.
오늘날의 현대문명이 발달하면서 지리적 여건보다는 주민편의 위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게 됨을 알수 있다.
■ 도초면과 마을유래
□ 면의 유래
도초는 신라시대에 당나라와 교역시 기항지 였는데 당나라 사람들이 지형을 볼 때 자기나라 수도와 똑같은 형태이며 지역마다 초목이 무성하여 목마지로도 활용 하였기에 "도초(都草)"라 칭하였으며,고려,조선시대에 나주목으로 속했을 당시에는 지형이 고슴도치 처럼 생겼다하여 도치도(都雉島)라 하였고 또한 도초 주변에 수치(水雉), 사치(砂雉), 팔금, 비금등 조류 형국의 섬중 큰섬이라 해서 都雉島라고 하였다 한다.
또한 도초도(都草島)는 풀을 상징하는 이름이 많아 도초의 실제 산세와 지형적 특수성은 무엇일까...도초의 지명상 특징은 섬의 명칭처럼 풀(草)을 상징하는 마을들이 많다는 점이다.
오늘날 수다(水多)리로 부르고 있는 마을은 옛날에 나무가 우거진 곳이라 하여 수다(樹多)리로 명명됐으나 물이 부족해서 지명을 바꾸어놓았다.
고란(古蘭)리는 옛날부터 난초가 많이 자생했기 때문에...
발매(發梅)리는 매화나무가 많아서...
오류(五柳)리는 버드나무가...
죽연(竹漣)리는 대숲이 우거진 곳이라는 뜻으로 명명됐다고 전해진다.
섬 자체가 풀을 상징하는 초(草)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을들이 풀과 나무를 가리키는 지명을 쓰고 있다.
도초도 본섬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려 형성돼 있는 우이도(牛耳島)는 도초가 풀의 섬이기 때문에 소가 뜯어먹을 양식이 많아 풍요를 누리는 땅이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섬이다.
도초면(都草面)은 신안군 1읍 13면중 면의 하나이며 동쪽은 바다 건너 하의면, 서쪽은 바다, 남쪽은 바다 건너 흑산면, 북쪽은 바다 건너 비금면에 닿아있다.
■ 마을의 유래
발매리(發梅里) : 발매리는 발매,춘경,월포,화도를 합하여 발매리라고 한다.
○ 발매 : 지형이 바리때처럼 생겼으므로 바리매 또는 발매라 하였으며 또한 마을의 생
긴 모양이 마치 매화꽃 같아서 발매리라고 부르고 있음.
마을의 입향 유래는 1698년경에 밀양박씨 박시수가 장성군에서 거주하다 가
세 빈곤으로 3형제가 남쪽을 향해 이주하던 도중 장형은 함평군에 종형은 목포
에 안착하고 박시수씨가 발매리에 도착 낭주최씨의 딸과 혼인하여 정착했다.
그때부터 마을에는 매화나무가 자생하여 왔다고 한다.
○ 춘경 : 옛날에는 이 마을에 초장(草場)이여서 전답을 만들기 위해 소쟁기로 갈고,
봄이면 씨앗을 뿌려 농사를 짓는다하여 춘경이라 하였는데 지금도 춘경리라 부
르고 있음.
입향유래는 1710년경에 함양 박씨 성명 미상인이 흑산도에서 살다가 부친이
5형제를 동반하여 그중 3형제는 육지고 가고, 2형제가 춘경리에 거주하면서
안착한 것이 최초의 입향자로 전하고 있음.
○ 월포 : 옛날에는 마을 앞으로 큰 개울이 있어 부락 형태가 반달 같다하여 달월자를
썼고 개포자를 따서 월포리(月浦里)라 하여 현재에 이름.
입향유래 1644년경에 한양조씨 조치수가 인근면 비금에서 살다가 도초에 입
향하여 월포마을에 첫 번째로 정착 현재의 마을을 조성하게 되었다고 전함.
○ 화도 : 옛날에는 한 개의 섬으로 독립하였으나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인근 열목이라
는 곳과 연도하였다. 이곳은 불꽃같이 큰 부자가 생겼다가 사그라져 망하였다
하여 불섬이라고 부르다가 일제 때화도라고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입향유래 경주 최씨 최장환이 본면 수항리에서 거주하다 이곳 화도로 이주 최
초의 입향자로 전해오고 있음.
지남리(指南里) : 지남리는 지남,지북,지동,죽도를 합하여 지남리라고 한다.
○ 지남 : 지앙산 남쪽이 되므로 지남이라 하였으며 옛날에는 외남리가 밖지남이였고
현재 지남리가 안지남이였다고 했으나 마을 모양이 남쪽을 향하였다하여 지남
리라 칭하였다고 한다.
입향유래는 밀양 박씨 박선창이 경북 군위군에서 해남 등을 거쳐 도초면 수향
리에 정착, 그 후손들이 지남리에 입향하여 살았다.
○ 지북 : 지남리의 뒤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편의상 지북이라고 했다.
입향유래 1710년에 한양 조씨 조지수가 인근면 비금에서 살다가 이곳 지북리
를 찾은 것이 마을을 형성하게 된 동기며 그때 3형제가 살았다고 함.
○ 지동 : 지남의 동편에 위치하였다하여 편의상 지동이라 칭하였다.
입향유래는 경주 김씨 김서양이 1686년경 해남에서 우이도를 경유 이곳 지동
에 정착, 삶을 시작한 것이 최초의 입향자임.
○ 죽도 :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죽도"라고 하였으며 일명 대섬목 이라고도 한다.
입향유래는 달성 배씨 배진석이 전남 광주에서 살다가 조선시대 때 이곳 도초
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입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옛날 도서를 개척하면서
뭍에서 이곳을 비롯 우이도, 흑산도를 거쳐 중국까지 왕래를 했다는 설도 있으
나 도초의 입도조(入島祖)는 달성 배씨로 논의하는게 통례이다.
외남리(外南里) : 외남리는 외남하리,상리,정두,신촌을 합하여 외남리라고 한다.
또한 외남리는 지남리 바깥쪽이 되므로 밭지남, 또는 외지남, 외남이라 하였다.
○ 외남하리 : 이웃 지남 마을의 밖에 있다하여 와남이라 칭하였으나, 편의상 외하리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입향유래는 1592년경에 김해 김씨, 김치우, 수로왕의 56대 손으로 전북 남원
에서 살다가 맏형 김정삼씨가 청화 애국지충의 벼슬을 버리자 형의 권유로 도
초에 입향, 부인 전주 이씨와 혼인하였다.
○ 외남상리 : 이웃 지남 마을의 밖에 있다하여 밖지남 등으로 불리워지다가 후일 외남
상리(外南上里)로함.
입향유래는 장흥 고씨 고시락이 본면 죽년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최초
의 입향자라고 전해지고 있다.
○ 정두 : 뒷산 생긴 모양이 곤배 모양을 하고 있어 정두(丁頭)라 했다.(외남 하리 마을
에 속해 있음.)
입향유래는 1880년에 김해 김씨 김순종씨가 본면 지남터에서 살다가 이 마을
로 입향.
○ 신촌 : 1953년경 문도윤 면장당시 피난민들의 새로운 정착지로 결정, 지금의 신촌
리(新村里)로 칭하게 되었다. 지금은 정착민 뿐만 아니라 본도의 여러 마을 사
람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입향유래는 1910년에 장흥 고씨 고정언은 본면 외상마을에서 본가로부터 분
가하여 지금의 신촌마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오류리(五柳里) : 오류리는 오류,엄목,시목리를 합하여 오류리라한다.
○ 오류 : 오리나무가 많았으므로 오릿굴, 오리동 또는 오류라 하였는데, 이 마을은 버
드나무가 자연적으로 많이 자생하였고 비옥한 땅이 있는 곳으로 오류리(五柳
里)라고 했다.
입향유래는 1740년경 입향조 김윤금이 영암군에서 거주했으나 형제간이 많
았기 때문에 생활의 터를 찾아 배회하던 중 정착한 곳이 현재 마을로 그 당시
버드나무가 많이 있고 토질이 비옥하여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의 형제들은 본면 죽도, 용동 마을등에 살고 있다.
○ 엄목 : 옛날 이 마을에 엄나무가 많았다하여 엄나무 엄자를 붙여 엄목리(奄木里)라
했다.
입향유래는 완산 이씨 이유현씨가 1786년경 전남 영광에서 이곳으로 최초 입
도했다.
○ 시목 : 옛날에 감나무가 많아 자생하였다하여 시목(枾木)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지
금은 천연적인 자원의 혜택으로 "시목리 해수욕장"이 국립해상공원으로 개발
되고 있는 곳이다.
입향유래는 경주 최씨 최운기가 1725년경 해남군 화산면에서 거주하다 형제
가 남쪽으로 생활근거지를 찾아 여행하던중 맏형은 도초에 동생은 비금면에 각
각 생활을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죽련리(竹連理) : 죽련리는 죽련,신교를 합하여 죽련리라한다.
○ 죽련 : 자연적으로 대나무가 많았다하여 마을 이름을 죽년이라고 했다.
입향유래는 1650년 김해 김씨 김래학이 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본을 알수
없는 엄씨가 살았다고 하나 차츰 없어졌으며, 김해 김씨인 김래학이 임진왜란
말 해남에서 살다가 이 마을에 이주해 온 것이 입향자로 전해오고 있다.
○ 신교 : 삐비가 많이 있는 들이라고 하여 삐비신자와 들교자를 써서 신교리(莘郊里)
라고 했다.
입향유래 1720년경 노차강씨가 전남 광산군에서 출생하여 인근 비금면을 거
쳐 이곳 신교마을에 안착했다.
수항리(水項里) : 수항리는 수항,궁항,라박포를 합하여 수항리라한다.
수항리는 물목이 되므로 물목 또는 수항이라고 하였는데 도초면 소재지로서,
경찰 지서, 학교, 농협이 들어 있음.
○ 수항 : 부락 앞까지 바다물이 래왕할 때 수항리 마을을 구비구비 돌아나가는 "물
목"이라하여 수항리(水項里)라 하였다.
입향유래는 1721년에 청주 한씨 한충언이 영광에서 통훈대부사 감찰부 감찰
시로 있다가 조정으로부터 조휼(朝譎)죄로 유배되어 본면 수항리(대롱 끝)에
정착 현재 11代에 이르고 있다.
○ 궁항 : 마을 뒷산이 활같이 생겨 활의 목에 마을이 자리 잡았기에 "활목"이라 부르다
가 후에 활궁자와 목항자를 따서 궁항이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입향유래는 1726년경에 경주 최씨 최우명이 전남 장산에서 약 260년 전에
본면에 입도하여 산이 아늑하고 생활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이 마을을 안
식처로 했다.
○ 라박포 : 불섬 앞 바다에서 이곳까지 큰 개울이 있어 나박포(羅泊浦)라고 했다.
입향유래는 1836년에 김해 김씨 김영국이 흑산에서 150년전에 본도에 입주
하 여 조그마한 동구리섬인 현재 면사무소 옆에 안주했다.
당시는 바다 가운데 섬이었지만 얼마 안가서 본면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다리(水多里) : 수다리는 수다,용동,나포,명당을 합하여 수다리라고 한다.
건답이 많은 들이므로 건들 또는 건야라 하다가 수답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수다리로 고쳤다.
○ 수다리 : 이 마을은 물이 귀한 마을이어서 건들이라 하였다가 마을명을 수다리로 개
명하면 물이 많아진다 하여 수다리(水多里)로 부르고 있음.
입향유래 1720년에 맨처음 입향자는 허씨 다음 배씨 순으로 살았는데 지금
은 그들 자손은 없고, 그후 함양 박씨 박세문이 입향하여 그 당시 마을 어귀에
팽나무 4그루를 심었는데 1977년도 홍수에 넘어졌고 지금은 2그루가 살아있
어 마을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음.
○ 용동 : 뒷산 모양이 용 형상을 연상케하여 용동리라 불리우고 있음.
입향유래는 1750년에 김해 김씨 김윤모가 신안군 하의면 상태에서 살다가 도
초면 수다리에 안착하게 되었는데 그의 자손인 김건택이 용동리에 입향 터전을
닦아 최초의 입향자이다.
○ 라포 : 옛날, 배널리라 함은 아침해가 뜨면 무명베를 많이 널었다 하여 배널리라 하
였는데 한자로 따서 라포(羅浦)라 하였다고 전함.
입향유래 1700년경에 정확한 입향로는 알 수 없고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약
300년 전으로 마을에 가장 고가인 윤동식씨 일가 일것이라는 구전이 있을 뿐
이다.
해남윤씨 윤광천 5대조가 해남에서 이곳으로 입향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 명당 : 옛날 시문을 즐기는 문자(文子)가 유람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죽자 아들은
안절부절하며 어쩔줄 몰라하던 중에 묘를 놓을 자리만큼이나 눈이 녹아 있어
그곳에 부친을 매장하였다. 묘는 명당자리였고 일인들도 탐냈던 곳으로 그 후
명당리(明當里)라고 했다.
입향유래는 1710년에 함양 박씨 박명언이 최초로 입향하였다한다.
만년리(萬年里) : 만년리는 만련,도락 한발을 합하여 만년리라고 한다.
만년리는 밤나무 숲이 있으므로 밤숫굴, 밤석골, 밤석동 또는 만년사가 있었으
므로 만년이라 하였다
○ 만년 : 옛부터 이 마을에는 밤나무와 돌이 많아서 "밤석골"이라 하였는데 일제 때 만
년리라 부르면 영구불멸 한다하여 마을 이름을 개칭했다.
입향유래 1660년에 김해 김씨 김갑추씨가 해남 황산에 살다가 형제들이 각각
흩어져서 현재 만년리에 이르러보니 산수가 좋고 지형이 아늑할 뿐아니라 자연
적으로 자생한 밤나무가 많아 생활의 근거지로 정착한 것이 최초의 입향자로
전해오고 있다.
○ 도락 : 옛날 쌀의 유출이 다른 마을 보다 심하여 "되내기"라 했지만 지금은 "도락리
(道樂里)"라고 한다.
입향유래는 1700년대말 평산신씨 신덕모씨가 신안군 하의면에서 살다가 생
활의 터전을 마련키 위해 배회했던 때 정착한 곳이 이곳 도락리 마을로 최초의
입향자로 전해지고 있다.
○ 한발 : 마을의 형상이 매화꽃 같이 생겨서 매화꽃은 한가할 때 핀다하여 한발리(閑
發里)라 명칭하여현재에 이르고 있다.
입향유래는 1680년에 옛날에 제주도에서 고량부씨가 살았는데 그중 고씨들
이 조각배를 타고 육지에 상륙 장흥에서 살던중 자손이 고상열이 그의 처와 두
아들을 데리고 입도하여 그들 가운데서 고상열과 한 아들은 가거도로 향하고
모자는 한발에 안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함.
이곡리(二谷里) : 이곡리는 이곡상리,하리,소신,조진를 합하여 이곡리라고 한다.
이곡리는 배나무가 있었으므로 배낭골 또는 이곡이라 하였다.
○ 이곡상리.하리 : 이 마을은 고란쪽과 만년리쪽에서 내리는 산계곡이 두 개가 있다
하여 이곡리(二谷里)라 불리고 있음.
입향유래는 남평 문씨 문희순이 1720년 전남 남평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따
라와 생활하게 된 것이 입향 유래이며 그후에 점차 많은 호수가 늘어 지금의
이곡리(二谷里)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전함.
○ 소신 : 이곳에 사는 사람은 3∼4년간은 가세가 흥해지나 그후부터는 자연히 폐가 되
었기에 믿을 수 없는 곳이라 하여 "소신(小信)" 이라고 불러졌다.
입향유래는 1826년에 안동 권씨 권지순이 비금에서 살다가 도초에 건너와 돌
아다니다 "이곡(二谷)"에서 생활하면서 이 지역에 움막을 치고 살게된 것이 최
초의 입향자로 전해지며 지금의 소신(小信)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 조진 : 마을에 새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라 하여 조진리라 하였고 대벌(大伐)리라 함
은 옛날 큰 화전 염전터가 있어 큰 벗 대벌리라 하였는데 지금은 조진리(鳥津
里)로 부르고 있음.
입향유래 1836년에 장흥 고씨 고사길이 해남에서 살다가 이곳 조진으로 건너
와 살면서 이곳을 안주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고란리(古蘭里) : 고란리는 고란,난말을 합하여 고란리라고 한다.
고란리는 골짜기 안이 되므로 고란이라 하였다.
○ 고란 : 란초 꽃이 많이 자생하여 고란리(古蘭里)로 불렀다.
한 때는 도초의 중심지로 면사무소가 있었다.
입향유래는 장흥 고씨가 1593년 임진왜란시 백형대촌공의 소막지명을 읊받
고 일심 전가족을 해중 도서로 피난케하고 출정했다. 입도조(入都祖)는 이때
정착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죽촌공의 록항에 피어해중(避於海中)하라는 기록
이 있음.
○ 난말 : 고란리 끝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란초란과 끝말자를 따서 란말(蘭末)이라 칭
하였다.
입향유래는 1710년에 창원 황씨 황희서가 중국중원에 (황읍) 살다 동양을 답
사코져 아들 3형제를 거느리고 경남 창원에 도착 기거하면서 중국으로 돌아가
지 못하고 각처를 배회하다 마침내 도초에 와 머물렀다.
우이도리(牛耳島里) : 우리도리는 진리,성촌,저항,동서,예리,선창구미,대초,죽도를 합하여 우이도리라고 한다.
모양이 소귀처럼 생겼으므로 소구섬, 소구 또는 우개도, 우이도라 하였다.
○ 우이도 : 우이도의 체도에는 1구, 2구가 있는데 섬 전체가 소의 귀를 닮았다 하여
우이도라고 전하는데 그 후 진리 마을이라고 칭하는 것이 조선시대 때 부터이
다.
입향유래는 1725년에 우이도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은합도 유래가 있으나,
방씨, 정씨, 윤씨 등의 순으로 입도하였다.
그러나 ,방, 정씨 등은 복철 또는 멸족하고 파평윤씨가 현재 잔재하고 있으며,
대초리 초대 입도자 윤씨가 진지로 설정하였다.
이조시대에는 진리로 천읍하였다.
몇몇 선생들이 쉬어가거나 잠시 정착한 것을 제외하면 450년전 경에 파평 윤
씨가 처음으로 입도한 것으로 정리된다.
○ 동,서우이도 : 이 마을은 체도에서 떨어진섬으로써 동쪽과 서쪽에 섬이 마주보고
있다하여 동서우이도라 명명하였다.
입향유래는 동복 오씨 오경칠씨가 1710년경 남단섬을 찾아 내려온 것이 지금
의 동 우이도라고 전함.
○ 저항 : 마을 형상이 마치 돼지 머리모양을 하였다고 저항(猪項)이라고 명명하였다고
전함.
입향유래는 통천 최씨 최강국이 1690년경 전남 해남에서 거주하다가 우이도
에서 최초로 최씨가 입향하였다고 전함.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450년전 우이도의 최초 입도조(入島祖)는 파평 윤씨
로 체도 입도를 약 50년 앞선 곳으로 역사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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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비록 작은 섬이지만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는 엄청나게 큰 섬도 초우리들이 언제나 가고싶픈 고향 도초가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의 고향 도초를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살아왔지 않습니까 지금부터라도 좀 알고 지냅시다... 고향의 역사를 ,,,,,
도초라는 아름다운 섬~~이 이처럼 깊은 뜻을 담고있는줄은 미처몰랐넴~~~!!!!! 그리고 내가 응애~~~하고 태어난곳 발매가 이렇게 예쁜 뜻을 갖고 있는 마을인줄 몰랐넴~~~!!!!! 고향이 그립당 ^^
정여사박여사 도초 찾아 갈줄이나 알으 나는 배타는걸 너무좋아해서 잘타는데 느그들은 멀미하냐 멀미할때 귀밑에 붙이고 배타면 멀미안해난 배타는것 타고났나벼 멀미는 절대안하드라,,,순이하고 명란이하고 언제 서해안으로 작은배 빌려 낙시한번가자,,,
도초에서 13년 이후 경기 안양으로 이주해서 제2의 고향이지만 ....시댁이 한발이라 가끔 간다네...언제나 가고싶고 그립긴 하는데 배 타는건 무서워.....멀기도하구......
박여사 한가지 궁굼한게 있는데여자들은 말이야 남자없이 살수있다는데 그게사실인가
야마!!! 느그들 뻥치지말어 여자들은 시집가버리면 말로만 그러지 절대로 도초안오드라,,시목리 해수욕장에 수영이나오묜 모를까. 여자들은 뻥쟁이얌~~~~~~~~~~~~~조진리 ~~ 새들이 모여사는 곳이라해서 조진리라,,,기가막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