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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5층석탑
시내 중심길인 중앙로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멀리에서도 담장 너머로 우뚝 솟은 석탑 한 채가 보이는데 그곳이 정림사터다. 백제 때의 유구가 거의 남지 않은 부여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이 정림사터 탑밖에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이 탑은 백제 시대의 부여를 대표한다. 중국 역사서인 『북사』의 ‘백제전’에는 ‘寺塔甚多’라고 하여 백제에는 탑이 많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수도인 부여 땅에 남은 것은 오직 이 정림사터 탑뿐이다.
사적 제301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림사터는 1942년에 절터를 발굴했을 때에 ‘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비로소 이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그런데 대평 8년은 고려 현종 19년인 1028년으로 그때에는 이 절의 이름이 ‘정림사’였으며 그때까지는 이 절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백제 때의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백제 때에 세워진 오층석탑과 고려 때의 석불좌상이 있으며 발굴에서 찾아 낸 백제와 고려 때의 기와 조각들과 벼루, 소조불상 조각 등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절터 한가운데에 의젓하게 자리한 이 오층석탑은 백제가 멸망해 간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채 1,400년을 버텨 왔다. 어느 나라보다도 불교가 융성했을 백제의 불교 문화 가운데 자리로만 남아 있는 목탑은 다 스러지고 없지만, 지금 남아 있는 탑은 익산 미륵사터 탑과 이 정림사터 오층석탑 2기뿐이다. 특히 이 정림사터 탑은 백제 석탑의 완성된 형태로 손꼽는 것이다. 미륵사터 탑이 작은 부재들을 엮은 흔적이 보이는 점에서 목탑을 석탑으로 번안한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것에 비해, 이 정림사터 탑은 부재들이 한결 단순해지고 정돈되어 비로소 석탑으로서의 완성미를 보여준다. 국보 제9호로서 손색없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백제탑으로서 정림사터 탑의 특징은 기단이 단층으로 1층 지붕돌의 비례에 견주어 훨씬 좁고, 면석의 모서리 기둥은 위로 갈수록 좁아져 목조 기둥의 배흘림수법이 남아 있으며, 지붕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이 지붕돌과는 다른 돌로서 두공처럼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마무리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지붕돌이 경사지지 않은 얇은 판석이면서 처마는 살짝 반전시켜 경쾌한 상승감을 주는 점들을 꼽는다. 또 전체적으로 키가 늘씬해 상승감을 보이는데 그것은 1층 몸돌이 훌쩍 솟고 2층부터의 몸돌은 높이가 1층의 반으로 줄어들면서 지붕돌으리 너비는 차차 줄어져 가파른 기울기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정림사터 탑이 백제 사람들이 목탑을 석탑으로 번안해 낸 것임을 알게 된 것은 우리 나라 미술사학의 태두인 우현 고유섭 선생(又玄 高裕燮, 1905~1944)의 연구에 의해서이다. 그는 우리 나라에만 독특한 축조물인 석탑들을 그 생김새의 변천에 따라 연대적으로 추적하여 우리 나라 석탑이 백제에서는 목탑에서 석탑을, 신라에서는 전탑에서 석탑을 만들어내고 마침내 그 두 계보가 통일신라에 이르러서 감은사터 탑과 같은 완결물로 정립되었음을 밝혀 냈다.
정림사터 탑은 8.33m나 되어 결코 작지 않은 탑인데도 멀리에서 보면 그리 육중한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에 크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다가갈수록 장중하고 위엄 있는 깊이가 느껴진다. 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사방을 빙 둘러보면 보는 자리에 따라서 장중함과 경쾌함이 교차되어 느낌이 새롭다. 아마 단번에 정면승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곱씹는 맛을 느끼게 하는 백제의 맛이 이런 데서도 나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통일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에 옛 백제 지역인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방에 세워진 탑 가운데 많은 탑이 정림사터 탑의 문법을 지니고 있어, 이 탑을 본떠 백제 지역 나름의 정서를 발현하고 있을 볼 수 있다. 백마강 건너의 장하리 삼층석탑이 그렇고, 멀리는 서천의 비인 오층석탑과 정읍의 은선리 삼층탑이 그러하다. 부여군 외산면의 무량사탑도 이 탑을 닮으려 애쓴 흔적이 보이며 서산 보원사터의 오층석탑은 늘씬한 조카 같은 모습이다. 또 익산 왕궁리의 오층석탑은 정림사터 탑과 너무도 닮은 점이 많아 한때는 백제 때의 탑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만큼 이 정림사터 탑은 이 지역의 조형적인 지주였다는 뜻이겠다.
한동안 이 탑은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세운 것이라고 잘못 알려져 왔었다. 그것은 1층 탑신부 한 면에 새겨진 ‘大唐平濟國碑銘’ 이라는 글자 때문이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그 글자는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 그것을 기념하려고 이미 세워져 있는 탑에 새긴 것이다.
궁남지
궁남지는 현존하는 우리 나라 연못 가운데 최초의 인공 조원(造苑)이다.
『삼국사기』 무왕35년(634)조에 “3월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나 먼 곳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못 언덕에는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杖仙山)을 모방하였다”는 기사는 바로 이 궁남지를 두고 말함이다.
전체적으로 둥근 연못 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고 못가에는 버드나무가 한가롭게 가지를 휘늘이고 있다. 연못 동쪽에서 주춧돌이 발견되고 기와 조각이 흩어져 나와 이 궁남지가 궁성의 이궁에 따르는 원지(苑池)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주춧돌이 별궁 건물의 흔적이 아닌가 하고 여겨진다. 근처에는 3단으로 짜 올린 팔각형 우물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또 무왕 39년(638)조에 “3월에 왕은 비빈과 더불어 큰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궁남지에서 뱃놀이도 즐겼던 듯하다. 계획적인 인공 연못인 이 궁남지는 물을 능산리 동쪽의 산골짜기에서부터 끌어온다.
궁남지 바로 동쪽에 있는 화지산의 망해정이 푸른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워 신선경을 방불케 했다는 기록도 『삼국사기』에 전한다.
신라 조원의 미묘한 맛을 보여 주는 안압지보다 40년 앞서 만들어져서 안압지의 모형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직선과 곡선을 조화시켜 한껏 묘미를 살린 안압지가 그저 둥글게 조성한 궁남지를 본떴으리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또 원래 훨씬 넓었던 것이 많이 메워진 상태라고 하니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둥근 연못 주위의 면적은 1만 3,772평에 이른다. 1965년에 정비작업을 했고 다리와 누각은 1971년에 세운 것이다. 사적 제135이다.
궁남지 초입에는 마동설화를 새겨 놓은 비가 있다. 『삼국유사』에 실린, 무왕의 어머니가 이 궁남지에 살던 용과 교통하여 마동을 낳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무왕이 천도를 하려고 했고 미륵사를 지어 지금도 그 석탑 하나가 남아 있는 전라북도 익산의 마룡지에도 마찬가지의 전설이 전한다. 또 기록에 따르면 무왕 자신이 이 궁남지를 팠으니 연대기로도 맞지는 않는다. 무왕과 관련된 이곳과 무왕의 신이성이 강조되어 전설화된 것이겠다. 어쨌든 이 전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제시대 이궁터로 알려진 궁남지 일대에는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했던 무왕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사비시대에 왕궁 남쪽 못 가에는 궁궐에서 나와 혼자 사는 여인이 궁남지의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왕이거나 태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궁궐 밖의 생활이 궁핍하였으므로 생계유지를 위해 그는 마를 캐다 팔았다. 그래서 그의 아명이 서동이 되었던 것이다. 서동의 어머니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성으로 키웠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한 장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궁중에서 한 노신이 찾아와 왕의 밀명을 전하였는데 신라의 서라벌에 잠입하여 국정을 탐지하라는 것이었다. 서동은 기꺼이 받아들여 마를 파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신라에 잠입, 탐지활동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사랑이 싹텄다.
그러나 서로는 국적과 신분이 달라 맺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알았다. 그러나 헤어질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지혜를 짜내 서동요를 만들어 퍼뜨리기로 했다. 서동은 서라벌의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마를 나누어주며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 도련님을 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온 나라에 퍼져 나갔다. 결국 대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오해를 받게된 선화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서동이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랑이야기이다.
부소산성
백제시대의 산성이다. 부소산의 정상과 능선을 따라 쌓는 테뫼식산성과 골짜기를 포함해서 넓게 감싸는 포곡식 산성이 복합된 산성이다. 동서남북 방향의 문터와 장대, 군창터 등이 남아 있다. 군창터에서는 불에 탄 쌀, 보리, 콩 등의 곡물류와 기와, 토기, 도자기 등이 발견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사비성,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 부여를 방어한 산성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곳이다.
“망국의 한이 서린 부소산성”
642년 의자왕은 군대를 이끌고 신라 남부의 요충지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으며 신라를 위협했으나 결국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나라를 바치는 비운의 왕이 되고 말았다. 부소산성에는 마지막 항전을 하기 위해 백제군이 쌓아놓은 군량미가 며칠 동안이나 불탔다고 한다. 군창터에서는 이 때의 타다 남은 쌀이 지금도 출토된다.
부소산성 안의 낙화암은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궁녀들이 치마를 뒤집어 쓰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하여 타사암(墮死岩)이라 부르던 것을 훗날 강물에 떨어지는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백화정
부여 부소산성 북쪽 금강 변의 낙화암 정상부에 있는 육각의 정자건물이다. 1929년 당시 군수 홍한표의 발의로 부풍시사라는 시우회에서 세웠다.
백화정의 명칭은 중국 소동파가 항주에 귀양가 있을 때 성 밖의 서호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백화주(江錦水樹百花州)라는 시에서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부여 외곽을 감싸고 도는 백마강과 주변의 낮은 산들이 어울려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아주 일품이어서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대하는 듯하여 부여를 찾는 관광객이면 반드시 들리는 명소이기도 하다.
백화정과 낙화암 전망대와 백마강
백제문화단지
삼국문화의 한 축으로서 우리 민족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을뿐 아니라 고대 동방문화의 중심으로써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백제역사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1994년부터 2010년까지 총 17년간 충청남도 부여군 합정리 일원에 6,904억원(국비 1,709억, 지방비 2,078억, 민간자본 3,117억원)을 투자하여 백제 왕궁인 사비궁, 백제의 대표적 사찰인 능사, 계층별 주거문화를 보여주는 생활문화마을, 백제 개국초기의 궁성인 위례성, 백제의 대표적 고분을 보여주는 고분공원, 충청도민의 기증으로 조성된 백제 숲, 백제역사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국내 최초의 백제사 전문박물관인 백제역사문화관이 조성되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정부가 지정한 백제문화권이 대통령령에 의해 국책사업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1993년부터 2010년까지 백제의 옛 수도 지역인 충청남도 부여군에 조성된 백제 관련 테마파크를 말한다. 롯데그룹의 민자투자를 받아 롯데부여리조트가 안에 위치해 있으며 한국전통문화학교 역시 이 단지내에 위치해 있다. 관람료는 어린이 6,000원, 청소년 - 군경 7,000원, 어른 9,000원.
총 100여만평 규모로 1994년부터 충청남도와 문화관광부가 부소산과 낙화암 맞은편 백마강변에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재현하기 위해 지었으며 1998년에 첫 삽을 떳을 때는 김종필 국무총리까지 다녀갔다. 이 사업에 투입된 공공예산만 무려 3,787억원이나 된다. 2010년 세계대백제전 개막에 맞춰서 2010년 9월 17일에 공개되었다. 롯데 그룹이 투자한 민자투자만 3117억원으로, 이 때문에 단순 '역사재현'만 목표로 하는 문화재단지가 아니라 '테마파크' 형식으로 개장되었다. 또한 순전히 공공예산만으로 조성하였다면 연간 예상적자가 100억원대였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한창 이후 시대인 고려 시대 건축물도 제대로 남지 않은 상황에서 고증이 쉬울리 없었다. 그나마 고려는 고려 불화 같은 회화 등에서 건축물 양식을 살펴볼 수 있기라도 하지만 백제는 남아 있는 기록이나 유물과 유적이 별로 없어 고증이 쉽지 않았다.
결국 일본에 남아있는 백제 관련 유적이나 한국의 백제 관련 유적 등을 참조하여 고증했는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럴 듯하게 '재현'하는데 성공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문화재 단지에는 사비에 세워졌던 궁궐, 성왕의 능에 세워졌던 능사, 고분공원, 생활문화마을, 하남 위례성 등이 재현되어 있으며 그 이에도 백제역사문화관, 한국전통문화학교, 롯데부여리조트가 들어서 있다.
드라마 근초고왕과 계백 그리도 고려말이 배경인 대풍수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주요 건물
천정문(天政門) : 사비궁의 정문
천정전(天政殿) : 사비궁의 정전으로 국가의 큰 정사를 하늘에 고하여 결정했다는 천정대에서 이름을 따왔다. 왕의 즉위 의례, 신년 행사 등 각종 국가 의식이 거행되고,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사비궁 내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문사전(文思殿) : 동궁(東宮)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로 왕이 평소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주로 문관에 관한 집무공간으로서 문사전의 문(文)은 동쪽을 의미한다.
연영전(延英殿) : 신하들의 집무 공간이며 천하의 인재를 맞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덕전(武德殿) : 서궁(西宮)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로 왕이 평소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주로 무관에 관한 집무공간으로서 무덕전의 무(武)는 서쪽을 의미한다.
좌측 사진은 복원된 백제문화단지의 능사 5층목탑이다. 우선 목탑의 구조에 있어서 지붕이나 공포 등이 백제의 유물이나 일본 나라의 호류지(법륭사) 등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건축물과 꽤 다르다.
호류지의 목탑이 백제의 일반적인 구조인 하앙을 써서 처마를 길게 뺀 점을 생각하면, 하앙을 써도 저렇게 처마를 짧게 내민 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부분적인 형태를 보면 국내 유일의 하앙식 고건축물인 전북 화암사의 하앙과 비례가 유사해 보이는데, 시기상 백제보다 훨씬 뒤에 건립되었고 하앙이 퇴화되는 시기의 건축물과 유사해 보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한 서까래 위의 부연을 덧붙여서 지붕이 두꺼워졌는데, 이는 처마가 짧은 것과 맞물려 날렵함은 사라지고 둔탁해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 현대 한국의 목수들은 조선시대의 건축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에 지어진 삼충사 등 몇몇 건물을 제외하면 하앙을 사용한 경험이 없다.
단청과 장식도 문제인데 우선 단청 색상이 너무 선명한 화학안료 같고, 고구려 벽화 등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은 초록 계열의 색을 너무 많이 사용하고 벽을 분홍빛으로 칠한 것이 조선시대의 느낌이란 평이 많다. 다만 상록하단(上綠下丹)의 경향이 삼국시대에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장식면에서는 서까래 끝을 막은 기와나 금동 장식 등이 출토된 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궁과 절 건축이라면서도 쓰지 않았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 중기에 일반화 된 풍판을 지붕 옆에 썼다. 건물의 전체적인 비례가 투박하다는 문제도 있다. 그래도 기와만큼은 좀 깔끔하게 잘 재현한 모습을 보인다.
국립부여박물관
1929년 2월 27일에 설립된 부여고적보존회를 모체로 하여 처음 발족되었다. 당시에는 조선시대 부여현 관아건물이었던 부여객사에 유물을 진열하여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1939년에는 조선총독부 부여분관으로 개편되었고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이 되면서 홍사준(洪思俊)이 초대분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박물관으로서 본격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6·25사변 중에도 박물관의 시설 및 유물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1965년 정부의 문화기관 확충계획에 따라 현대식 진열실과 관리시설을 갖춘 신관 신축공사를 기공, 1971년 9월 1일 개관하였다. 이어 1975년 8월 1일에는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전시유물이 늘어나고 사회교육시설 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박물관이 제구실을 하기에 어려웠기 때문에 1993년 8월 6일 금성산 기슭의 현 박물관 자리로 옮겨 현대식 전시 시설과 사회교육시설을 고루 갖춘 모습으로 새롭게 개관하였다.
대지면적 6만 1,429㎡, 건축면적 6,000.92㎡, 연면적 9,735.07㎡의 국립부여박물관은 박물관은 전시동, 교육동, 관리동, 보존과학관으로 크게 4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약 7천여점의 소장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그 중 토도제품(土陶製品)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유물로는 1937년규암면 외리의 한 백제 절터에서 출토된 문양전(文樣塼)을 비롯하여, 1950년에 발견된 사택지적비(沙宅智積碑), 부여지방의 여러 건물지 등에서 출토된 연화문와당(蓮花文瓦當),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에서 출토된 금동미륵보살입상(金銅彌勒菩薩立像, 보물 제330호), 신리(新里) 청룡사지(靑龍寺址)에서 출토된 금동미륵상 등이 전시되고 있다. 그밖에 건물터 및 고분에서 수습된 각종 토기들도 전시되고 있다.
전시동의 3개의 전시실과 박만식교수기증실에는 100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제1전시실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비백제 이전까지의 유물을 볼 수 있다. 전시실 입구에는 청동기시대의 마을과 집의 모형을 전시하고 있으며 청동기시대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반달돌칼·간돌검 등의 석기, 송국리형토기·붉은간토기 등의 토기, 한국식동검·동경·동과 등의 각종 청동기를 전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초기철기시대, 원삼국시대 그리고 부여 논치 제사유적 출토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제2전시실에는 사비시대 백제문화를 엿볼 수 있는 주거, 음식, 잡용과 토기, 복식과 장신구등이 진열되어 있다. 또한 위덕왕대의 정치와 문화를 짐작케하는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와 국보 제288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무왕대의 익산 왕궁리 기와와 공방유물, 의장왕대의 사택지적비 등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제3전시실에서는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백제의 불상들을 만나볼 수 있다. 건축과 기와 전시에서는 이웃나라에 절과 탑을 세워줄 정도로 뛰어났던 백제의 건축기술과 기와 한 장에도 소홀함 없이 정성을 다했던 백제 장인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다. 이밖에도 야외전시장에는 보물 제194호인 석조(石槽), 보물 제21호인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등을 볼 수 있다.
첫댓글 잘 보고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