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을 하는 것과 신성하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음도 불사하면서 자신의 정의와 신념을 저버리지 않은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후대에 남길 정도로 철저히 진리와 양심을 삶 속에서 실천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인간 소크라테스의 올곧은 사상과 고귀한 인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시 소크라테스가 살던 그리스는 신탁정치가 행해졌던 때이다. 델포이신전에는 예언자가 상주하며 신의 음성을 대신 들려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참다운 지혜란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그는 자신이 지혜로운 건 모르는 것을 스스로 겸손히 인정하다는 그 사실에 있음을 깨닫고 정치가, 시인, 공예가등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의 잘못을 일깨워준다.
소크라테스가 지혜를 바라보는 인식은 공자의 그것과 흡사하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곧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한걸음 더 나아가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지혜가 실제로는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서 인간의 지혜가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결코 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고소당했지만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신의 섭리를 알고자 노력했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가면 신이 말씀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신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당시 그리스시대에는 제우스신이 최고의 신으로(국가의 신으로)자리 잡고 있었다. 신탁정치가 이때 행해졌고 민주주의의 외피 속에서도 종교가 국가전반을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신은 다른 듯 하다. 그는 멜레토스와 논쟁을 벌이면서 제우스에게 맹세를 걸지만 그에게 신이란 바로 자신의 양심, 곧 정의 그 자체다. 그는 두 번의 죽을 위협 속에서도 결코 정의를 저버리지 않는다. 사사로운 목숨보다는 선으로 상징되는 정의의 수호가 올바르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는 ‘공인으로서 정의를 위해 진실하게 싸우려는 사람이라면 결코 생명을 보존하려 들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에게 정의는 곧 생명이고 신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두려워 한 두 가지 것 중에 첫 번째는 옳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이다. ‘옳지 못한 일‘이란 선과 악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악에 해당된다. 반면 ’옳은 일‘은 선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옳지 못한 일과 옳은 일의 구분은 도덕률이 이 세상 저변에 깔려있고 사람은 마땅히 그 도덕률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도입된다. 기독교에선 하나님을 선과 악을 넘어선 자로 본다. 하지만 악이 하나님의 성품인 것은 아니다. 악은 선이 부패하여 나온 일종의 잘못된 선으로 보고 있다. 즉 ’이 세상은 원래 좋았는데 나빠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야 할 원래 모습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소크라테스가 두려워 한 두 번째 것은 신성하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신성하다‘는 신다운 성품을 말할 것이다. 그럼 신다운 성품이란 무엇인가? 신은 완전한 존재로서 인간보다 분명 상위에 있지만 우리는 신다운 성품을 논한다. 이것은 신에게 인격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 가능한 말이다. 만일 신이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것이라면 ’신성’이란 말은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우리가 신성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성품과 공통된 요소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적인 요소-즉 인격의신 하나님-와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위 발언은 기독교가 왜 참인지를 설명하는 기독교 변증의 한 도구가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