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한국을 떠났다. 그녀의 상식으로 수용할 수 없는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일들, 이기적이고 비이성적인 타인의 행동으로 인해 상처받은 수많은 기억들이 그녀로 하여금 이 땅에선 더 이상 희망도 행복도 발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신이 이야기하는 부조리한 사건들, 그로 인해 받게 되는 상처들은 형태만 달리 할 뿐, 당신이 가고자 하는 그 나라에서도 수없이 겪게 되는 일입니다. 당신이 찾으려 하는 희망, 행복은 거기에 있는 게 아니고 오직 당신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상실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샹그릴라...
제임스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하는 이 곳은 꿈속의 이상향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소설로 인하여 이 지역이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자 중국에서는 재빨리 중뎬을 샹그릴라로 개명하고 세계의 관광객을 유혹했다. 혹자는 더친이 소설 속의 바로 그 곳이라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중뎬이 바로 그곳이다 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샹그릴라가 인간이 꿈꾸는 도원경이라면 그것은 이미 지구상에 존재하는 곳은 아니다.
어쨌든 샹그릴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마침 징홍에서 차(茶) 공부를 하고 있는 T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울에 돌아가기 전에 운남을 여행하려는데 한 번 오지.’
겨울방학을 하자 나는 T에게로 날아갔다.
쿤밍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1시이다. 서둘러 짐을 찾아 대합실을 나서니 안 보는 동안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란 T가 나를 발견하고 카메라를 들이댄다. 여행사에서 나온 직원들이 양쪽으로 도열해서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올라 그가 묶고 있는 민박집으로 향했다. 온화한 봄밤의 미풍에 가슴이 설렌다. 가로등이 가물거리는 거리는 한산하다.
‘일정이 어떻게 되죠?’
‘일단 오늘은 쿤밍 시내에 있는 민족촌을 둘러보고 내일은 토림을 들어가자구.’
‘석림은?’
‘석림보단 토림이 훨씬 멋있고 사람 손이 덜 탄 곳이지.’
‘그럽시다. 자세한 일정은 다시 짜자구요.’
혼자 여행을 하는 재미도 별미이지만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 하는 여행은 각별한 즐거움을 준다. 시작부터 죽이 맞는 것을 보니 이번 여행은 꽤 재밌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쿤밍 외곽에서 민박집을 하고 있는 김씨는 조선족이다. 덕택에 순한국식으로 차려진 아침을 맛있게 먹고 우리는 집을 나섰다. 중국말은 한 마디도 못하는 T가 버스가 오자 익숙한 자세로 차비를 내더니 한참 후 쿤밍역에 다왔다며 내리잔다. 이제 그의 바디 랭귀지는 완벽한 언어로서 구실을 한다.
중국엔 어딜 가도 사람이 강물처럼 흐른다. 쿤밍역 앞엔 황금 소 동상이 아침빛을 받아 번쩍이고 그 아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어디선가 지독하게 썩은 냄새가 난다. 나는 코를 막았다.
‘이거 무슨 냄새야? 숨을 쉴 수가 없네.’
‘썩은 두부 냄새야. 두부를 썩혀서 불에 구우면 발 꼬랑내는 사라지고 아주 맛있는 요리가 되지. 먹어볼래?’
‘아니, 노!’
그의 말에 냄새가 나는 곳을 돌아보니 석쇠 위에서 두부가 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다. 나는 민족촌행 버스가 도착하자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중국엔 56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운남 민족촌에 여러 개의 소수민족마을을 만들어놓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묘족, 푸랑족, 와족, 라우족, 나시족, 장족, 백족, 모수족... 등등이 각기 저들만의 고유한 의상을 입고 공연을 한다.
묘족의 아가씨는 고양이처럼 아주 육감적이다. 그야말로 쎆씨하단 표현이 딱 맞는다. T가 묘족 아가씨 옆에 서더니 사진을 찍어달란다. 좌우지간 남자는 이쁜 여자만 보면...
어디선가 흔쾌한 노래 소리가 들려 찾아가 보니 와족 마을이다. 빨간 옷을 입고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남녀가 껑충껑충 뛰며 춤을 춘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남자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아주 매력적이다. 내가 사진을 찍자 멋진 폼을 잡아준다.
와족이 파는 곡주는 우리네 막걸리와 같지만 맛은 막걸리에 미치지 못한다. 들큰한 게 영 술맛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미주(米酒) 한 사발을 맛나게 마시고 와족마을을 떠났다.
모수족 아가씨들은 더 적극적으로 자세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렌즈를 통해서 보는 그녀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나도 녹아든다. 마치 내가 사진 예술가가 된 느낌이다.
‘사진 좀 보내주세요.’
열심히 사진을 찍는 내게 모수족 아가씨가 주소를 적은 종이를 내민다. 나는 그러마고 약속을 하고 주소를 받았다.
모수족은 아직도 모계사회를 이루고 있는 민족으로 루구호에 살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꼭 루구호를 가고 싶었다. 리장에서 오가는 데만도 이틀이 걸리긴 하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이 너무 보고 싶었다.
나시족은 예술적 기질이 뛰어난 민족으로 수공제품을 만드는 기술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뚱빠문자’로 자신들의 삶을 기록해왔다. ‘뚱빠문자’는 현재 한자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일종의 제의문자였다. 글자 모양이 이쁘기도 하고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숨겨진 뜻이 드러나 즐겁기까지 하다.
나이가 어려보이는 나시족 소녀는 내가 사진을 찍으려 하니 수줍게 웃는다.
따뜻한 봄바람에 매화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리고 향기를 날린다. 그 향기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뺨을 간질이는 봄바람에 홀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종일 민족촌을 돌아다녔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 모든 삶 하나하나가 모두 존귀하다. 한 뼘 굴에 거적으로 문을 치고 비루한 차림으로 살다 어찌 얻은 한 잔 술에 혀를 다시는 사람이나 상아궁에서 금 그릇에 금 고기를 먹으며 호화로운 옷을 입고 사는 사람이나 그들이 느끼는 행복의 순도는 동일하다. 인생이란 만인에게 공평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것 하나를 버리면 그 빈 자리를 새로운 것이 채우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버리고 난 후 비어 있는 한 손을 보고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맑은 눈으로 비어 있는 손을 보면 그가 가졌던 것 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행복이 살포시 내려앉아 있는 것이다.
그 새로운 것은 그가 버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귀한 것으로 버리면 버릴수록, 비우면 비울수록 생수처럼 고여 든다.
어차피 우리네 인생은 이 땅에서 얻었던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버리는 것에, 자신을 비우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날 신이 우리를 부르실 때 가장 가벼운 몸과 영혼으로 빨리 날아가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민족촌이라는 아주 작은 땅, 그 울타리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저들을 보며 인간이 추구하는 참된 행복에 대해 생각을 한다. 나의 이러한 말을 듣더니 T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인다.
“오오~! 자네 득도했네 그려~”
(동은)
첫댓글 샹그릴라..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본전뽑을 만한 세계..동은님의 글은 언제나 봄날의 새싹 트듯 삶의 의욕을 트게하고 까딱하다가 도까지 틸것 같은 희망을 줍니다. 함께 거워함을 감사하오며...
반달님이랑 같이 여행을 하면 참 재밌을 거 같으요. 담에 함께 날라봅시다.^^
편하게 앉아서 느껴봅니다.......언제나 내발로 가볼 수 있을런지..........ㅎㅎ
ㅎㅎㅎㅎ 당근 나그네님 두 발루 가지 뭐. 내 발 신구 갈라우?
글을 읽다 보니 마치 동행한듯한 기분입니다. 다음편 기대중!!
지난 태풍님 번개 때 뵐 수 없어서 무진장 섭섭했어요. 그 날 강서구연합친목파리 같았다구요. 담에 꼭 뵈여~
맛깔스런 글...동은셈과 친구T님과의에 겨운 여행기를 계속 기대해도 되는거지요 지난번 좌충우돌 중국여행기였다면..이번은 눈을 감고 기억의 지도를 꺼내 '우리와 다른곳에 사는 다른사람들의 이야기' 그를 보며 느낀 동은님의 인생관도 살짜콩 엿 볼 수 있을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일케 가 보지 못한곳에 대한 상세한 여행기를 보는 참 거움도 함께 하구요
에궁. 바욜렛님을 본받아 일일이 댓글을 다는데 요거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네여. 그동안 바욜렛님이 월매나 수고를 했는지 몸으로 체험하고 있음당~ ㅎㅎㅎ
샹그릴라~ 라는데가 있군요.. 동은님덕에 처음 알았습니다. 저도 여행은 무척 좋아합니다만 글재주가 없어서 여행문을 잘 쓰지 못하는데..부럽네요. 저도 계속되는 여행기 기대할께요~
'샹그릴라' 단어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서양 같지요? 중국 운남 땅 저 구석진 곳에 이름만 이렇게 멋진 곳이 있습디다. ㅎㅎㅎㅎ
항상 느끼지만 눈으로 마음으로 그려지는 여행기.... 다음 편 기다려집니다.
넵! 체로키님의 뛰어난 상상력으로 인하여 덕택에 제 글이 재밌게 느껴지시는 겁니다. 다음 편 곧 나갑니다.^^
동은님의 글 속에서 여행의 설레임과 호기심 또 낭만이 그대로 묻어납니다.여행기 중간중간 동은님의 느낌과 생각을 적은 글도 참 좋고요.그나저나 중국말은 한마디도 모르면서 동은님의 여행길에 동행하신 T님의 무모한() 용기가 부럽고 또 그 T라는 분에 대해서도 묘한 호기심이 발동한다는
그림이 쫙 그려지는 멋진 기행문입니다. 샹그릴라... 발음도 이름도 입술과 마음에 착 안겨드는... T님은 아는 분 같기도 하다는...^^*
마음에 그려지는 기행기...글 솜씨가 예사롭지 않으십니다...혹시? ㅎㅎㅎㅎ
덕분에 간접경험 잘 하고 있습니다..^^후다닥 2편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