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두어들이지 않은 것'
로버트 프로스트.
담장 너머로 뭔가 익은 냄새 물씬 풍겨 와
늘 다니던 길 버리고
발길 더디게 하는 게 무언지 찾아 갔더니
사과나무 한 그루 거기 서 있었다.
잎새 몇 개만 걸 친 채 사과나무는
여름의 무거운 짐 다 벗어버리고
여인의 부채처럼 가볍게 숨 쉬고 있었다.
더할 수 없는 사과 풍년이 들어
땅은 온통 떨어진 사과들로
빨간 원을 이루고 있었다.
뭔가 모두 거두어들이지 않고 남겨두는 것도 좋겠다.
정해진 계획 밖에도 많은 것이 남아 있다면,
사과든 뭐든 잊혀져 남겨진 게 있다면,
그래서 그 향기 마시는 게 죄 되지 않는다면.
다울 찬울 산울아!
2009년 기축년 한해가 저물었다. 너희 모두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차게 달려온 한해였지?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릴 수는 없지만 엄마가 뒤돌아보았을 때 2009년은 영광의 한해, 뜻밖의 수확을 거둬들인 한해가 아닌가 싶다.
먼저 우리 큰 아들 다울 올 한해 이 엄마에게는 너무도 많은 기쁨과 웃음을 안겨 준 한해였지? 고맙고 고마워라.
우리 다울이가 초등학교 일학년 때 엄마 손 잡고 함께 국악 학원에 갔을 때만 해도 엄마는 우리 다울이가 전문 국악인이 되리라고 생각도 못했었다. 그저 인생을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늘 음악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좋은 취미 생활로 우리 음악을 접하게 한 거였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학원 선생님들이 너무 어려서 거문고 하기 힘들다고 했을 때도 그저 손으로 만지고 가까이 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거문고를 좋아 하리라 믿었기에 가르쳐 달라 졸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국악중학교에 가겠다고 했을 때 아빠랑 엄마랑은 대략 난감이었다. 우리 음악이 좋아 이것저것 시키기는 했지만 전공하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거든. 중학교에 합격하고도 엄마 아빠가 “학교가 너무 멀어서 다니기 힘들다”며 너를 만류하던 생각이 난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하는 날 늬 몸보다 큰 교복을 입혀 학교에 가느라 버스를 기다리는 데 눈발은 희끗 희끗 날리고 학교까지 왕복 서너 시간을 헤메일 생각하니 마음이 심난해서 눈발이 더욱 난분분...
그래도 고등학교 일학년 때까지 너는 엄마 아빠에게 한 약속을 잘 지켰다. 고양시에서 서울 학교까지 “힘들다” 소리 안하고 학교 다니겠다던 약속.
2009년. 다울이 넌 늘 열심히는 아니었겠지만 늘 꾸준히 했던 거에 대한 보답을 받았지? 국립고등학교 2학년. 공식적으로 대회 나갈 수 있는 학년이 되어 그저 경험을 쌓기 위해 나간 대회마다 너무도 큰 상을 받았다. 난계대회 1등. 동아대회 1등. 세종콩쿠르 현악부문 대상.
2009년 5월 난계대회. 예선 무대서 엄마는 깜짝 놀랐다. 초등학교 때 산 거문고가 너무 오래되어서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더구나. 그런 악기로 예선 통과한 게 대단하다 싶었다. 그런데도 너는 악기 사달라 한마디 소리 없이 본선 준비를 했다. 부랴부랴 빌린 악기로 본선 준비를 할 때도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까지 안족이 흔들려 음이 안 맞아 애를 먹고, 악기 조율하느라 연습도 제대로 못하고 무대에 올랐는데 너는 쓰다 달다 한마디 없더구나. “엄마 악기 하나 사주세요” 투덜댈만 하건만.
난계대회는 정말 악기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아서 1등 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짐 싸서 쉬다 갈 요량으로 한복도 던져놓고 있는데, 1등이란 소식이 날아들어서 우린 모두 펄쩍 뛰었지. 엄마가 그날 눈물을 흘린 것은 다울이 네가 1등을 해서가 아니라 어떤 악조건에서도 한마디 불평 없이 불만 없이 묵묵히 대회 준비하는 너의 모습이 대견해서였다. 내 아들이 참 잘 컸구나. 어떤 순간에도 의연한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2009년 6월 동아대회. 예선만 통과해도 잘한다 소리를 듣는다는 국악최고의 대회. 아마 공정성 때문에 동아대회는 명성을 잃지 않는 것 같다. 그런 대회였기에 엄마도 욕심은 났다. 그래도 엄마는 네가 한 3등 정도했으면 했다. 아니 고 3 수험생들이 있었기에 그 정도만 해도 잘하는 거려니 했다.
그런데 덜컥 1등.
엄마는 네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늘 묵묵히 봉사 활동을 하고 연습하라 소리 한번 안했어도 알아서 잘해준 덕분에 행운이 따른거라고.
'거문고의 신'. 아이들이 다울이 너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이런 별명으로 부르더구나. 거문고의 신이라니. 너무 과하지? 그래도 엄마는 네가 거문고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 거문고란 악기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9월에 있었던 세종 콩쿠르도 거문고 부문에서 1등 했으면 했는데, 현악부문에서 대상을 받아 우리 음악이 좋아 한길을 걸어온 엄마에게 너는 세월에 대한 보상을 해줬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잘하고 있다는 엄마의 믿음을 한 번도 저버린 적없는 다울이. 너무 어린 나이에 큰 상을 휩쓸어 교만해지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하지만 품성이 워낙 착하고 순수해 “먼저 배웠기 때문에 큰 상 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그 또한 고맙다.
언제나 자기 몫을 잘한다는 일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큰 대회에서도 쉽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산만하지 않고 분주하지 않고, 담담하게 있다 무대에 올라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듯, 회오리바람이 불 듯 가슴을 뒤흔드는 연주를 하고 대회를 끝나고서도 똑같은 모습으로 기다릴 줄 아는 모습. 다울이가 이제는 엄마 손을 훌쩍 떠났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서 훌쩍 훌쩍 커라. 엄마가 고개를 들고 쳐다 볼 수 있는 큰 나무. 뿌리 깊은 나무. 그런 울창한 나무가 될 때까지 성장을 멈추지 마라. 엄마에게 올 한해 너무도 큰 영광과 기쁨을 안겨준 다울에게 다시 한번 큰 박수. 짝짝짝!!!
찬울. 기특한 내 아들. 언제나 무엇인가를 물어도 “몰라요”를 연발하던 찬울. 올해는 유난히 찬울이가 많이 성장한 한해였지?
마음의 키가 얼마나 커졌는지, 정말 감격스러울 정도다. 엄마는 항상 중학교에 들어갈 때 주문을 하나씩 한다. 다울이 때는 밝고 명랑해지기. 찬울이에게는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되기. 우리 찬울이는 정말 자기 표현을 잘하는 소년이 되었다. 어쩔 땐 너무나 솔직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지만.
중학교 일학년 반항의 시기를 거쳐 중학교 2학년. 15세 소년이 된 우리 찬울이 거침없이 자기표현을 해대서 깜짝 놀랄 정도다. 감정의 기복도 많이 순화되고 언어 표현력도 부드럽고 더 많이 따뜻해져서 착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해가 아니었나 싶다. 엄마에게 이것저것 질문도 많았지. 덕분에 우리는 밥상머리에서 사전을 찾아들고 낱말 공부도 많이 했다.
우리 찬울이는 그거 하나만으로도 엄마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자기 안에 감추어진 본성, 천성을 잘 이끌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알기 때문이다. 자기의 마음을 감추지 않고 잘 드러내서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무도 잘 알기에. 똑 부러지게 좋다 싫다 말할 수 있는 찬울이의 모습이 엄마에겐 기쁨이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큼 건강한 삶이 어디에 있겠니?
솔직히 우리 찬울이 마음이 여리고 너무도 착해서 항상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지? 그런데 엄마가 내준 숙제를 어찌나 잘해냈던지. 2009년 엄마는 찬울이에게 “자기표현은 하되, 조금 더 감정을 부드럽게 표현할 수 없냐”고 했었지. 한마디로 언어순화. “어른도 아이들의 말에 상처 받을 수 있다”고. 찬울이의 좋은 점은 누군가 무슨 말을 하면 반드시 귀담아 듣고 나중에 보면 그 말이 옳으면 받아들이려고 한다는 점이다. 우리 찬울이 나름대로 많은 변화와 성장이 있었겠지만 이 하나만으로 엄마는 엄청난 박수 갈채를 보낸다. 짝짝짝!!!
산울. 우리 막둥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보기만 해도 엄마 입가에 미소를 안겨주는 산울.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 뒤집어지는 얘기를 제일 많이 해서 엄마 얼굴을 도화지로 만드는 산울 (산울이 주로 쓰는 색깔은 빨간색 파란색. 울그락 불그락. 푸르댕댕)
우리 산울이는 올 한해 정말 쑥쑥 컸다. 국립국악중학교 도전이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을 계기로 우리 아들이 얼마나 많은 성장을 했는지. 인생에는 전환점이 있다고 한다. 잘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한해. 2009년은 바로 우리 산울이에게 그런 한해가 아니었을지.
엄마는 한 번도 입시생 아들을 데리고 해보지 않은 일을 했다. 국어 사회 과학 책을 전부 읽고 전과를 가지고 처음부터 끝가지 공부하기. 시창 청음 공부하고 밤 9시 공부 시작해 서너 시간을 꼼짝 않고 두 달 가까이 공부하는 너를 보며 엄마는 가능성을 보았다. 늘 “안해” “못해” 소리를 연발하던 우리 산울이가 한번 해보겠다고 덤비니 끝장을 보려고 하는구나. 무언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큰일을 해내겠구나.
가능성이 있으면 얼마든지 희망도 있다. 비록 수학 2점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고 왔다손 쳐도. 엄마는 우리 산울이가 얼마든지 잘해나갈 수 있다고 믿기에 한 번도 걱정해 본적이 없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이 성장의 폭도 눈에 띄게 큰 법이다. 이제 시작이다. 달려라 산울! 그런 의미에서 격려의 박수 짝짝짝!!!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2009년은 그런 한해다.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흐를지 나쁜 방향으로 흐를지 알 수 없지만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세월의 물줄기에는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올 한해 엄마는 해내지 못한 일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거두어들이지 않았다고 발을 동동 구르지는 않겠다. 정해진 계획대로 다 이루지 못했다고 해도 엄마에게는 내일이 있기에 희망을 가져본다. "내일은 또다시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테니까"
또한 생각만 거두어들이지 않는다면 마음밭에 살포시 내려앉은 계획들은 그 언젠가 싹을 틔우고 또 그 언젠가는 예기치 않게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울 수도 있으니까. 그런 날을 꿈꾸며. 숨가쁘게 달려온 2009년 한해의 빗장을 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