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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째 날, 열한째 날(5월 22일, 23일)
(8)
대천해수욕장의 추억
보령시내버스, 장항선 열차와 1호선 광역전철을 이용했던 전번 귀로를 역(逆)으로 하여
대천항에 도착한 시각은 5월 22일 11시 반경.
인천부두에서 만리포,대천의 해수욕장 피서객들을 태운 여개선이 이용하던1960년대의
부두는 도저히 상상해 볼 수 없는 항구다.
참으로 아쉽게도 마치 천지 개벽이라도 있었던 듯 여객터미널과 수산시장, 도로와 건물,
어느 것 하나도 옛 것은 없다.
개장하기 한참 전이지만 대천해수욕장으로 갔다.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수도권에서 가장 인기있는 해수욕장이었다.
내게도 그랬는데 동해안 길이 편해지면서 멀리 하게 된지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2~30대 청년에서 80이 목전인 늙은이가 되어 걷고 있으니까.
길고 넓은(3.5km+100m) 동양 유일의 패각분(조개껍질) 백사장이라는 천연자원을 정화
하고 편의시설들을 새롭게 갖추는 등 면모 실신하여 당당히 보령1경으로 등극했다.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내 추억 속에 또렷이 살아있는 해수욕장이다.
1965년 초 월남전 파병의 효시인 비들기 부대의 선발대가 여의도 공항을 떠났다.
나는 공항에서 선발대에 포함된 K준위가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하기를 빌었다.
K준위는 내가 결핵 치료를 위해 지리산록에서 요양 중일 때 교분을 갖게 된 지인이다.
군 복무를 마쳤으나 녹록하지 않은 현실적응에 실패한 후 준사관 군복으로 갈아 입었고
비들기 부대에 자원한 것이다.
용병 시비는 논외로 하고 비들기 부대는 이름에 함축된 대로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들을
복구하고 평화 봉사적인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주월 한국군 비전투 부대다.
적극적인 전투에 투입되지 않을 뿐이지 전장에 있는 한 위험의 공유는 피할 수 없다.
한데, K준위는 임무 완수 후에도 잔류할 의사를 알려왔다.
그 까닭이 델리키트(delicate)하여 나는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지에서 받은 한 위문편지의 주인공과 나누던 서신의 색깔이 핑크빛으로 바뀌었으나
얼마간 달콤하게 진행되다가 단절되었단다.
까닭을 몰라 애타던 K는 전장의 포성으로 타들어가는 애를 몰아내려 한 것.
사연을 알아차린 나는 난감했으며 고심 끝에 편지의 주소지 J동으로 여인을 찾아갔다.
묘령의 실명여인이다.(위문편지는 이름, 성, 나이 등을 악의없이 바꾸는 경우가 흔했다)
피서철이라 대천의 친구집에서 지낸다는 가족의 말에 따라 찾아간 곳이 대천해수욕장
지근의 마을(지금 전혀 분간이 되지 않는다)이다.
자초지종을 듣고난 그녀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지참한 무거운 천막(군용)을 치고 하룻밤을 보내며 우리는 묘수 찾느라 애를 썼다.
그녀의 친구까지 가담한 악의 없는 모의였다.
그를 예정대로 귀국하게 하는 일이므로 그녀의 편지에 좌우되는 문제였다.
K는 당초의 스케줄 대로 귀국했고 그녀와의 상봉도 이뤄졌으며 마무리도 깔끔했다.
긴 백사장을 걷는 동안에 가장 크게 클로즈업(close-up)된 추억이다.
남포방조제 유감
그러나, 나의 관심사는 이같은 현대 감각의 해수욕장이 아니라 해안길의 연속 여부인데
1차 저지선인 공군 사격장에 막혀 남포(藍浦) 방조제 앞까지 우회했다.
1999년에 완공, 무창포 길 607번 지방도로가 되었고 거대한 남포간척지를 생산했으며
죽도(대섬)를 육지로 만들어 보령8경으로 자리매김 되게 한 3.7km 방조제다.
소형 무인정찰기(?)가 만조의 바다위를 빙빙 돌고 멀리 확성기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는
까닭을 몰라 긴 방조제에 유일한 중년남 조사에게로 내려갔다.
넘실대는 초록 해면에 낚싯대를 던져놓고 고기를 잡는 건지 시간을 죽이고 있는지 천하
태평인 그의 설명은 공군이 곧 무인섬을 향해 포사격을 개시한다는 알림이라는 것.
대천해수욕장 안에서 프랜차이스(pranchise) 교촌치킨점을 운영중이라는 그는 평일인
데도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는 것이 마치 자영업자의 특권인 듯 말했다.
해변 자영업자의 행복지수는 평일의 낚시때에 최고로 오른다는 뜻인가.
그의 설명대로 기관포사격이 시작되었다.
인근에 얼씬하지 말라는 경고방송에 이은 콩볶듯 요란한 포성에 아랑곳 없이 움직이는
선박이 감히 있겠는가.
어로생활은 물론 평상시에도 불편이 많겠는데 이미 면역이 된 것일까.
화성시 매향리의 미공군 쿠니사격장은 결국 폐쇄되었는데 여기는 섬 하나가 완벽하게
소멸된 후에야 자유로워질 것인가.
관광특구 죽도 앞을 지나가는 늙은나그네로 하여금 잠시 감동과 탄식을 함께 하게 했다.
<고려정승 풍천인 임향의 귀양살이 터(高麗政丞 豊川任公 珦之謫所址)> 비석이.
고려는 어처구니 없는 쿠데타로 망했지만 삼은(隱)과 두문동70인을 비롯해 불사이군(不
事二君)의 충신을 많이 배출한 왕조다.
그중 한 분인 듯 한 임공의 지조에 감동하고 추악한 치정(痴情)관계에 다름 아닌 오늘의
정치판에 장탄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의상대사, 원효대사를 비롯한 고승들 보다 더 많은 곳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는 아마
외로운 구름 최치원(孤雲崔致遠)일 것이다.
여기 남포면에도 충남문화재자료제145호로 지정된 그의 유적(遺蹟)이 있다는 안내판이
방조제 도로변에 서있으나 도보자가 방문하기에는 먼 거리에 있어서 포기했다.
방조제가 끝나는 해안에도 보령요트경기장이 조성되어 있다.
탄도 전곡요트장에 비해 소규모지만 공금을 투자한 것만은 분명한데 관리가 허술하다.
이후에 어떤 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관리 부실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의 이 만연된 행태가 바로잡힐 날은 언제쯤 올까.
이어지는 용두해수욕장은 1km쯤 되는 백사장보다 우거진 송림이 일품이지만 기형이다.
과감한 간벌을 하지 않아 몸체를 키우지 못하고 웃자랐기 때문에 쓸모가 반감되었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는 금언을 인용하면 "간벌을 두려워 하면 나무를 버린다".
이베리아 반도 75일의 소득중 하나다.
한데, 용두해수욕장 백사장에 어린 돌고래(?)를 닮은 시체들이 왜 널려있을까.
밀물 때 떠밀려온 듯 한데 사인이 무엇일까.
해수욕 시즌이 아니라 관리를 하지 않기 때문일까.
부패일로에 있는데도 치우는 사람이 없으니.
어촌의 주업은 어업인가 관광업인가
해안로는 여러 공사로 인해 불편하기는 해도 남포면에서 웅천읍으로 이어진다.
해변 별장(?), 바다를 막아 조성한 '해삼축제식 시험 양식장',무창포어촌계 공동작업장
아치교 무지개다리를 지나면 무창포 어촌관광단지다.
독살어업 체험장, 해상낚시터, 수산물센터, 항.포구 일주도로, 무창포항 공원과 무지개
다리 등의 공사에 68억원을 투입했다는데 꼭 필요했는지 정답은 세월이 말해줄 것이다.
어촌에 필요한 것은 어업의 성장과 발전일텐데 어업 외적인 일에 투자하고 있다면 본말
전도가 아닌가.
어획량의 감소에 따른 어촌경제의 침체를 관광수입으로 보충하겠다는 발상인가.
수산자원의 고갈로 전망이 어두운 어업에서 관광업으로의 점차적 대체가 속셈인가.
어촌의 주업은 어업인가 관광업인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건가.
멧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잃는 격이 되지 않을까.
단지, 경쟁적 전시일변도의 행정을 펴는 농어촌 지자체의 한 사례인가.
엄청난 빚은 언제 갚으려고.
다음은 신비의 바닷길이 열린다는 무창포해수욕장이다.
보령2경이 된 1.5km 석대도(石臺島) 바닷길이 아무때나 열리는가.
밝은 낮시간기준 일정표에는 5월은 초에 이미 끝났고 6, 7월도 5, 6일 양일씩 밖에 없다.
한데, 이런 현상의 빈번한 발생을 고급 관광자원이라고 좋아만 할 일이 아니다.
바다에 가하는 인간의 횡포에 대한 반동이며 해양생태계의 교란으로 이어질 것이니까.
무창포해수욕장도 많은 시설을 확충했는데 수익자부담 원칙에 따른다면 해수욕객들의
지갑이 더 가벼워질 것이다.
그러면 방문을 기피하게 되고, 결국 시설 투자자들의 손실로 이어질 것 아닌가.
고객을 유인하기 위해 한 투자가 고객의 방문을 막는 아이러니를 생각해 보며 걸었다.
무창포 해안에 자리잡은 13층에 235개의 방을 가지고 있다는 리조트 비체 팔레스는 이
해안의 관광가치를 입증하는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리조트의 고수들이 아무데나 투자하는가.
비체팰리스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무인섬 닭벼슬을 다녀왔다.
닭의 벼슬처럼 생겼다는 섬인데 썰물때는 일주도 가능한 미니 섬이다.
대천에서 여기까지 전혀 쉬지 않고 온 탓인지 좀 지쳐가는 듯 했으나 배낭 안에 천막이
있으므로 걱정되지 않는 진행이다.
독산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은 잠시 우회했다.
썰물때도 불편하겠는데 밀물때라 대책이 서지 않아서.
독산(獨山)은 바닷가에 홀로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홀뫼라고도 부르며 독산해수욕장은
서해안에서 아마추어가 조개를 가장 풍성하게 잡을 수 있는 곳이란다.
해수욕과 조개잡이의 본말이 바뀌도록 조개잡이에 몰두하게 되는 해수욕장이라나.
군시설이 있는 독섬과 뭍을 기준으로 우사장 좌갯벌인데 갯벌 끝에서 해안길이 막힌다.
우회하여 다시 들어선 해안의 길고 긴 백사장은 휴업상태다.
공군 제20전투비행단의 경고판에 그 이유가 내포되어 있다.
<항공기 사격시간중 해안가 출입을 금함> <비인가자의 접근 및 사진촬영을 금함>
그 옆에는 사격시간이 적혀있는데 해수욕장의 기능을 완전히 박탈하는 시간표다.
공군 제20전투비행단 웅천사격장의 위치와 범위를 모르지만 나는 사진도 찍고 해안을
걸어서 장안해수욕장으로 직행했다.
100% 위반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강심장을 갖지 못한 늙은이다.
사격시간대는 아니라 해도 불발탄,유탄에 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에 잔뜩 긴장하고 걸을
수 밖에 없었으며 가도가도 끝이 없는 백사장이라는 느낌이었다.
장안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었다.
소황리 사구는 생태학습장이라지만 문주 앞에서 돌아서야 했다.
해안사구(海岸砂丘/coastal sand dune)는 갯벌, 사빈(砂濱/모래해안),습지 등과 함께
대표적인 해안 퇴적지형의 하나다.
조류와 파랑에 의해서 갯벌이나 바닷가로 운반된 모래가 강한 바람과 햇볕에 건조된 후
육지 쪽으로 이동하면서 낮은 구릉 형으로 쌓여서 형성된 모래언덕이라니까.
송순의 집보다 훌륭한 내 집
어둑발이 내리려 할 때 부사방조제(扶士防潮堤)에 올라섰다.
보령시 웅천읍 독산리와 서천군 서면 도둔리를 연결하는 3.474m 방조제다.
1997년에 완공된 이 방조제는 웅천읍 일대의 농지를 조수의 피해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었는데 의외의 수익을 갖게 되었단다.
무창포해수욕장과 춘장대해수욕장을 연결하는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는 것.
사방이 분간될 때는 반 타원형으로 된 둑을 부지런히 걸었으나 서천 땅 춘장대해수욕장
일대에 점등이 된 후로는 만만디가 되었다.
어차피 보이지 않는 길이며 통행금지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땀흘릴 까닭이 있는가.
오늘밤, 나는 춘장대해수욕장 어디에 집을 지을 것이다.
굼벵이가 된다 한들 집터까지 못가겠는가.
그러나, 여유작작하던 다리가 부사교 갑문과 춘장대해수욕장 홍보아치를 지나 칠흑 길
에 들어설 때 벼란간 휘청거리고 맥이 빠지는 듯 했다.
아뿔싸, 새벽에 서울 지하철역에서 산 떡 한덩어리로 여기까지 왔으니 다리가 사보타주
(sabotage)를 할 만도 하지 않은가.
길가에 털석 주저 앉아 한참 달래다가 퍼뜩 떠오른 것은 시골 식당의 문닫는 시간.
라면 끓일 기운이 모자랄 듯 하여 식당을 찾아가려니까 서둘러야 했다.
해수욕장 입구 고개마루의 '38한우타운'이 아직은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있으나 문닫을
채비를 하고 있을 때 들어섰다.
시원한 맥주를 곁들인 갈비탕 포식으로 원기를 주입한 후 해수욕장으로 갔다.
초입의 솔밭은 유료 야영터로 활용하는 구역인지 허가받으라는 표지판들이 붙어있다.
유무료를 떠나 차선은 될 망정 최선의 내 집터는 아니다.
내 집의 명당은 오로지 정자(亭子) 뿐이다.
항상, 먼동 틀 무렵에 출발하는데 지붕 없는 곳에 집을 지으면 천막에 내린 이슬 때문에
새벽같이 출발할 수 없다.
날씨 변덕이 심한 바닷가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전전긍긍하게 된다.
이 두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곳 만이 최고의 명당이다.
명당은 개축(방위를 바꿈)하는데 전혀 힘들지 않는다는 이점도 있다.
백사장 옆 명당을 찾아낸 후 물을 얻으러 갔다.
아직 밤9시 이전이며 영업중인데도 식사손님인 줄 알고 영업종료했단다.
신규 손님은 사절이라는 뜻이니 하마터면 식사도 못할 뻔 한 것.
새벽에 집을 나선 후 11시 반 넘어 대천항을 출발해 2시군 3읍면에 걸쳐 있는 2곳 방조
제와 해수욕장 5곳을 지나왔는데 원기가 남아있다면 거짓말이다.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영목항 비닐하우스에서 하룻밤 보내던 저번에 김영식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디오게네스 아닌 늙은이가 맨날 통비닐 속에서 자는 것을 안타까워 한 그가 애써 만들어
준 패션 천막을 약간 무겁다는 이유로(시중 어느 것보다 경량인데) 두고 다닌 것이.
이렇게도 안온한 방인데 홀대하다니.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 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오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던 송순(宋純/1493~1583)의 집보다 훌륭한 내 집이다.
밀물때가 되어 사장에 몰려오는 파도소리 들으며 잠을 청할 때 최고로 행복했다.<계 속>
첫댓글 개발이란 미명(?) 아래 반듯하게 정리된 바닷가 시멘트길, 방조제, 방파제 등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해안모래둑을 무너뜨리고 백사장이 줄어드는 등 오히려 자연경관을 해치고 있다합니다. 바닷가 출신인 저로서는 안타까운 면이 많습니다.
잠제(潛堤수중방파제)와 모래포집기 설치 등 노력은 하지만 자연과 인공의 차를 무슨 힘으로 극복하겠습니까.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 없이는 다 허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