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독(毒), ‘독서 중독(中毒)’
발행인 엄 원 지
겨울바람이 차갑다.
붉게 물들어 아름답게 자수를 놓던 가을도 어느새 간다 온다 인사도 없이 가버리고, 아침 창가엔 하얀 서리가 암묵의 계절이 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 이 시대는 스승다운 스승을 만나기가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고전에 박힌 이야기들이지만 충(忠), 효(孝), 예(禮)와 지(智), 용(勇), 덕(德)을 몸소 실천하면서 후학들에게 삶의 진실을 가르치는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바닷가 모래 속에서 잃어버린 진주를 찾는 일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지금 막 세상에 태어난 아이에게는 부모가 스승이 되어야 하고,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 이르는 시절부터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만사가 스승의 역할이 되어 아이의 오감(五感)이 올바른 가치관으로 형성돼 가야 하는데, 어떠한가? 우리 주위에 먼지처럼 수없이 떠도는 부정과 부패, 절망과 거짓의 모습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오로 가득해서 아이들의 가치관과 관념이 옛 성현들이 살던 시절만큼이나 희망적이지 못한 것이 어쩔 수 없는 이 시대의 기본이 되어 버렸다.
요즘은 주위를 보면 세 살 먹은 아이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놀이기구가 화면 속 게임에 관심갖는 세상인 것을 종종 볼 수가 있다.
옛날 ‘하늘 천 땅 지’하며 어린아이가 듣던 집안 어른들의 일상은 아예 전설 속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아니 그 전설조차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어 버렸다.
태어나면서부터 눈으로 보는 것은 돈으로 치러지는 기계와 과학과 풍요의 세상이 사람 형성의 기초인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곧 이들이 스승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충’ ‘효’ ‘예’ 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 형성의 기초가 이미 ‘돈’에 좌우되어 ‘돈’이 스승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정신과 이상의 가치가 인간 세상의 진리임에도 이를 배우고 습득할 가르침을 만나기 힘든 세대이고, 또 올바른 스승을 만날 기회가 적으며,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할 계기가 많지 않으니 우리의 미래 세상이 대충 밑그림이 나오질 않는가?
과학자들과 의학자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인류의 미래가 더욱 진보되어 살기 편해지고 수명도 장수할 거라고 낙관론적인 가설을 펼치기도 하지만 착하고 올바른 가치관이 사라져가는 인간을 중시하는 정신과 정서는 서서히 퇴보하는 시대이기에 실은 우리 미래가 그리 밝지않다고 본다.
그러나 아직은 많은 희망이 도처에 살아 숨쉬고 있다.
우리는 이 해답을 결국은 ‘책’이라는 매체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단언한다.
아직도 살아있는 많은 현자(賢者)들의 속삭임과 외침이 오늘도 수없이 많은 서점가에서 우리를 향해 창조되고 있다.
이 세상 어느 곳에 가든지 흔하게 널린 ‘책’은 우리의 오감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충효예지용덕을 다 갖추어 우리가 스승으로 받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항상 손만 뻗으면 곁에 있으면서도 그러나 만나기 힘든 이 ‘책’은 이제는 암울한 우리 시대를 구원할 유일한 에너지이자 힘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을 눈과 손(점자)으로 읽는다는 것,
책 속의 지식을 머리에 담고,
책이 주는 지혜를 가슴과 뇌에 지닌다는 것---.
그것은 곧 풍요로운 삶을 준비하고 결실하는 장차 스승이 될 사람의 몫일 수 밖에 없다.
매일 쏟아지는 각종 정보의 홍수 속에서 밀려가지 않고 떠내려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수많은 전문인들의 지식과 지혜가 담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책 외에 무엇이 또 있겠는가?
옛날 우리 조상들은 독서를 즐기면 사(士)이고,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라고 하였다. 선비는 독서를 주업(主業)으로 삼으며 독서를 통해 언행과 학식을 습득했고, 사대부는 독서로서 과거시험을 목표로 관직을 향했다.
이들은 입신(立身)하여서도 백성을 다스리고, 군왕의 통치를 보필하기 위하여 꾸준히 독서(讀書)를 하지않으면 안되었다.
한글을 창제하고 온갖 과학의 기초. 예악의 대성을 이룬 조선시대 세종대왕 시절에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두어 젊고 똑똑한 문신들을 선발해 나라 비용으로 독서에 전념케 하는 제도를 두었는데, 이것은 성종 때에 이르러 폐사(閉寺) 하나를 ‘독서당(讀書堂)으로 만들어 국가발전에 필요하도록 책을 읽고, 책을 짓도록 하여 국가와 국민의 번영을 위해 인재를 양성하고 지식 정보를 축적하는 일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한글을 창제한 조선의 군주 ’세종대왕‘은 잠자는 시간 외에는 책을 멀리하지않았다고 하는데 그러기에 그가 위대한 많은 업적을 남긴 정치가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한국 역사는 물론 세계 역사를 보더라도 위대한 인물의 탄생은 거의 다 ‘독서’를 통해 만들어진 필연적인 결과라고 해도 빈말이 아니다.
책을 읽고 책 속의 지식을 익힌다는 것은 곧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기초인 것이다.
지식과 지혜가 생기면 저절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갈 능력과 실력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여러 가지 복합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구성 요인을 결정하는 핵심체는 지식과 지혜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모두 책 속에 들어있다.
이 난세(亂世)에 올바른 사람의 스승을 만나기는 어렵지만 올바른 지식과 지혜를 얻을 ‘책’이라는 스승은 만날 수가 있다.
우리는 지금 한창 자라나는 미래의 새싹에게 이 독서의 중요성을 늘 가르치고, 정신에 배도록 선도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먼저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고, 책 속에서 자신의 직업과 연관된 지식과 정보 습득에 시간을 할애하여야 한다.
조선시대에 유학의 대가인 학자 이황(李滉)선생은 “책을 통해 성현의 언행과 뜻을 마음에 담아 본받음이 마땅한데 하지만 책을 바쁘게 읽으며 외우는데 급급하다면 그것은 허송세월 허사” 라고 말하였고, 이이(李珥)선생은 “도(道)의 경지에 들어가기 전 먼저 성현의 뜻이 담겨 있고, 선악의 분별이 들어있는 독서 경지에 들어가 도의 지식을 이론적으로 먼저 터득함이 현명하다”라고 설파했다.
역사를 이끌어온 우리 조상들 중 뛰어난 분들이 독서를 통해 성장하고 훌륭한 인재로 빛이 났음을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마디로 책은 우리가 찾는 스승과의 정신적 만남이다.
지금은 문자시대에서 영상시대 더 나아가 AI인공지능 시대로 변화하는 시대적 양상이 종이 활자체의 책이 전자책 등에 밀려나는 경향이 갈수록 짙어지는데, 어떠한 형태로든 수많은 전문가들이 자신의 연구와 세계를 책을 통해 말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편하게 그 전문 지식과 정보를 책을 통해 접하는 것이 삶에 유익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진리이다.
성경, 불경, 마호메트 경전 등이 진리라 일컫지만 그런 위대한 말씀들도 세상 현자들의 세계가 담겨진 ‘책’을 두루 읽으면서 지식과 지혜를 배우며 함께 듣는다면 진정한 진리의 말씀을 더욱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이제 겨울이 한창이다.
문풍지 떠는 밤, 책 읽기에 아주 좋은 시기이다.
간혹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세찬 바람을 느끼며 고요한 시간에 아무 책이라도 가까이 하는 즐거움을 살아 있을 때에 맛보는 재미란 더 비유할 거리가 없다.
이 겨울에 읽는 한편의 시와 수필, 동화, 소설 또는 전문 글이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바랜 색으로 변해 땅 속으로 허공으로 겸허히 사라지는 자연의 모습에서 문득 인생사의 희노애락이 무상하게 느껴지는 겨울 문턱이다.
새해도 가까이 와 있어서 세인(世人)의 발걸음이 모두들 바쁘게 보인다.
문득 중국의 시성(詩聖) 이백(李白)의 오언시 한 수가 떠오른다.
시(詩)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이러한 옛 고전 시학의 정수(精髓)가 모두 책 속에 들어있다.
정야사(靜夜思)
작시/이백(李白)
상전명월광 (床前明月光) 침상 앞에 밝은 달은 떴는데
의시지상상 (疑是地上霜) 땅 위는 어지러워 서리낀 듯 희뿌옇다
거두망명월 (擧頭望明月) 머리들어 밝은 달을 보며 소망하고
저두사고향 (低頭思故鄕) 머리숙여 멀리 아득한 고향을 생각한다.
고전시라도 한 편 읽어볼 마음의 여유가 아쉬운 계절이다.
책 속에 인간 역사의 온갖 이야기가 다 들어 있다.
그 시대의 정서가 들어있고 세월이 흘러도 그 정서는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삶의 본질과 진실을 되찾을 수 있고,
절망과 좌절을 벗어날 희망의 빛을 만날 수가 있다.
그러나 책이 아무리 많아도 읽지 않는다면 차라리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文盲)인생이 훨씬 다행스럽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만날 수 있고, 고귀한 스승을 힘들게 찾아 나서지 않아도 가르침 받을 수 있는 책은 우리 인생의 보물창고이다.
다독(多讀)보다는 정독(精讀)으로 한햇동안 찌들었던 영혼의 갈증을 아낌없이 채워서 아름다운 겨울을 보내시길 독자 제현께 기원드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독(毒),
‘독서 중독(中毒)’을 마실 것을 권유한다.
-「2024년 한국신춘문예 겨울호」에 필(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