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근대 문화유산을 찾아서] 혁필장인(革筆匠人) 노상윤(盧相潤)
저잣거리에서 한복을 입고 노인들이 그려주는 요란한 색채의 그림. 바로 혁필이다. 싸구려 그림이라는 게 대중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사실 혁필화는 유교의 기본강령인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의 8가지 미덕을 상상력과 예술적 욕구를 더해 표현한 즉석 그림, 민중의 그림이다. 일명 그림글씨, 꽃 글씨로도 불리는 혁필은 우리 글자예술문화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 ▲ 8일 오전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 혁필 장인 노상윤씨가 백지 위에 울긋불긋 그림을 그리자 외국인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다.
노상윤(盧相潤)씨는 26살에 혁필에 입문해 50여년 이 길을 걸어온 사람. 노상윤은 1933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1954년 창녕 농고를 중퇴한 그가 '혁필'의 매력에 빠진 것도 바로 장터였다.
고모를 따라 창원군 상남 장터에 갔다가 그는 좌판에 백지를 펼쳐놓고 울긋불긋한 그림을 그려대는 한 노인의 모습에 매료됐다. "그림 솜씨가 있는데 나도 한번 해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읍니더." 당시 장터하숙집에서 하루를 묵으려면 쌀 한됫박 값을 치러야 하는데 그림 열장 그려주고 쌀 두되 값을 버는 것도 그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무작정 그림을 가르쳐 달라 했더니, 그가 물었다. "니 쌀 한 가마 준비해 올 수 있느냐!" 그는 3일 후 돈을 마련해 마산의 그 노인 집으로 찾아갔다. 그 노인은 바로 태암(泰巖) 김중곤(金中坤) 선생. 김씨 집에서 숙식하고 그림을 배우며 장터에 따라다녔다.
김씨는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부(富), 귀(貴), 다(多), 남(男) 등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며 아들 많이 낳으라는 의미의 글자를 주로 썼다. 장수와 관련된 내용에는 해당 글자와 해, 산, 물, 소나무, 대나무, 두루미, 거북, 부귀를 바랄 때는 나비, 모란, 칠성당, 다산엔 새, 나비, 물고기, 복과 덕은 해, 소원성취는 물고기, 용신은 방귀새(風鳥·풍조), 손아귀새 등을 그려 넣었다.
붓은 주로 대나무, 버드나무, 양가죽, 소가죽, 사슴가죽 등을 구해 나름대로 다듬어서 사용하지만 김중곤이 사용하는 붓은 낙타가죽이었다. 주로 서울 청계천6가 모자상가 뒷골목에서 중고모자(일명 나카오리 모자)를 구입해 적당한 부위를 잘라내 손을 봐서 사용했다. 물감은 천연염료를 구입해 가마솥에 물을 끓여 김을 쏘여가면서 약간의 식초를 넣거나 소금을 넣어 맑은 색을 냈다. 단청 안료의 역할은 혁필의 인기도를 측정하는 데 가장 중요. 현란하면서도 화려한 원색이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기 때문이다.
노씨가 처음 대중 앞에서 그린 것은 수업을 시작한 지 7·8개월 만이다. "어느 여름, 그날도 창녕 남지장터엘 갔는데 한여름이라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더. 갑자기 선생님께서 '상윤아, 오늘은 네가 한번 써보래이'하시더니 나를 앞으로 밀어놓지 뭡니꺼. 까짓거, 하면서 앞에 섰는데, 어느 남자가 '金大鳳'이라 적힌 이름을 내밉디더. 근데 눈앞이 노래지는 겁니다.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고 있으니 숨이 막히고, 손이 움직여지지 않는거라요." 붓을 잡은 지 1분도 채 안 됐지만, 1시간이 넘게 흘러간 것 같았다. 슬그머니 붓을 놓고 줄행랑을 쳐버렸다. '대중 앞에서는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실력도 없이 섣부른 재주가지고 공연히 깝죽댔다간 단번에 가는 길이다'. 그해 여름 그는 대중 앞에 선다는 것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울산에서 상경한 노상윤씨와 함께 인사동 통인가게 앞에 갔다. 인사동 터줏대감 김효성(신단수 대표)사장이 혁필을 쓸 수 있도록 긴 책상과 의자를 준비해놨다. 우선 동행한 사진작가 '金基春'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金자엔 태양이 강렬하게 감싸며 떠올랐고 基자엔 대나무가, 春자엔 물고기가 장식되어 그려졌다.
- ▲ 수산복해. 목숨은 산 같고 복은 바다와 같다. 장수와 행복을 염원하는 글귀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인사동에서 좌판을 걷고 가회동 민화박물관으로 향하는 차 속에서 "노 선생님 오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하고 말했더니, 그가 말했다. "오늘 일이 무슨 고생입니꺼. 진짜 고생은 사람 멸시받는 겁니다"라고 했다.
혁필을 배운 지 몇 해 후, 그는 스승과 함께 목포, 여수 등 항구도시에 놀러 갔다. 제법 사람도 많아 좌판을 펼쳤을 때, 갑자기 우락부락한 청년들이 들이닥쳐 좌판을 부수기 시작했다. "누가 가게로 혁필을 쓰러 오겠습니꺼?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사람 많은 곳을 찾게 되고 그곳이 곧 행사장이나 장터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고가는 곳입니더. 그런데 혁필을 모르니 우리를 노점상 수준으로 보는기라."
그래도 안동·전주·경주·단양 등 유교사상이 깊고 전통이 살아있는 고장에서는 환대를 받는 편이다. 대전엑스포 과학 공원이나 무주반딧불축제장 같은 곳에선 장소까지 마련해주고 수고비까지 줬는데, 그는 "어찌나 고마웠는지 눈물이 다 나더라"고 했다.
- ▲ 용호학구. 용은 복을 싣고 들어오고, 호랑이는 집안의 재앙을 물리치며, 학은 장수를, 거북이는 건강을 의미한다.
노상윤은 88년부터 3년 간 일본의 지바·오이타·가고시마 백화점을 비롯하여 요코하마 국제박람회장에서 6개월간 숙식을 제공받으며 혁필가로 활동했다. 일본 언론에 소개되며 오키나와 미군부대에서 3개월, 오란다무라·나가사키·하우스텐보스·가나자와 등 일본 전국을 순회 활동하며 돈도 벌었다. 집을 산 것도 그 덕이다. 그런가 하면 2005년 (사)한국공예예술가협회의 주선으로 프랑스 낭시 국제박람회장에 초청받아 갔을 때는 브라질 미녀들이 찾아왔다. 그는 혁필을 그리고, 여자들은 춤을 췄다.
그에게 소원이 있다면, 국가에서나 지자체에서 혁필문화를 '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로 지정해 주었으면 하는 것. 혁필도 울산 태화강 암각화나 옹기 못지않은 자랑스러운 문화라는 자부심이 그에게는 있다. 늦은 밤, 비바람이 몰아치는 서울역 광장에 노씨를 내려놓고 돌아서는 내 마음엔 먹구름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