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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천년초] 성공다이어트 천생천년초 생식건강 비만탈출 !!
국내 중국 요리는 인천의 차이나타운, ‘철가방’ 배달 음식, 호텔의 고급 중식, 청담동 차이니스 레스토랑으로 변화했다. 통계에 따르면 한
국의 중식당 수는 무려 2만4000개에 이른다. 100년 동안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은 중식의 매력은 무엇일까?
인천에 상륙한 자장면
1883년 인천 개항으로 국내에 들어온 산둥 지방 출신 근로자들이 만들
어먹던 고향 요리가 한국식 중국 요리의 근간이 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중국 요리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무역업자, 공장 경
영자 등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을 위한 고급 중식당이 등장하면
서부터. 최초로 자장면을 만든 곳으로 알려진 인천의 ‘공화춘’이나 ‘중
화루’, 서울 명동 일대의 ‘아서원’, ‘취천루’, ‘금곡원’, ‘대관원’, ‘사해루’
등이 이 시기 대표적인 중국 요릿집이다.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전국 주요 도시에 살던 화교 2000여 가구 중 30%가 음식
점이나 만둣집을 경영했다고 한다. 전성기를 누리던 1940년대 전후에
는 10~12원을 주면 한 상에 8~10가지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고.
인천 차이나타운의 ‘공화춘’, ‘중화루’, ‘동흥루’는 당대 미식가들이 즐
겨 찾는 3대 청 요릿집으로 손꼽혔다. 특히 음식점과 호텔의 혼합형인
‘산둥회관’은 1912년 ‘공화춘’으로 이름을 바꾼 뒤 돼지고기, 양파, 생
강 등을 춘장에 함께 볶아 국수에 얹은 중국식 자장면을 선보이다가
한국전쟁 전후 양파와 고기를 넣고 춘장을 좀 더 묽게 해 한국식 자장
면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부터
인천 차이나타운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예전의 명성을 찾기 어
렵다. 2005년 자장면 탄생 100주년 행사, 2009년 인천 방문의 해 행사
등을 통해 다시금 차이나타운의 중식을 중흥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2010년 하반기에 옛 ‘공화춘’ 건물에 자장면 박물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인천에 ‘공화춘’이 있었다면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중국 음식점은 을지로의 ‘아서원’이었다. 1907년 설립된 것으로 알려진 이곳은 1970년
문을 닫을 때까지 약 60년간 서울에서 화교가 경영하는 대표적인 음식점이었다.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화교 출신 요리사들이 서울의 호텔
중식당에 자리 잡으면서 국내 중국 요리의 근간을 이뤘다. 이외에도 수제 만두 전문점으로 유명한 ‘취천루’, ‘안동장’ 등 많은 중식당들이
명동에 생겨난 것은 중국대사관(당시 타이완대사관)과 화교 학교가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작은 차이나타운처럼 몰려 있었던 중국
음식점들은 당시 사교와 유흥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집회장, 예식장, 연회장으로 활용되었으며, 대부분 밀실을 따로 둬 ‘밀실 정치’의 무대
가 되기도 했다.
리틀 차이나타운, 연희동과 연남동
인천과 명동이 1세대 중식당의 근간이라면 1970년대 이후부터는 연희동과 연남동 일대의 중식당이 그 명맥을 이었다. 화교 3000여 명이
모여 살아 ‘리틀 차이나타운’으로 불리는 연희동과 연남동은 1969년 한성 화교 학교가 명동에서 옮겨오며 본격적으로 차이나타운을 조성
하기 시작했다.
2010년 현재 이 골목에 있는 중식당은 대략 10여 곳. 어느 지역의 음식이라는 표기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쓰촨(사천), 하얼빈, 타이완,베
이징 등 지역별로 다른 맛의 차이를 한번에 느낄 수 있다. 또한 겉모습이나 인테리어는 허름하다고 할 정도로 소박한 편이다.
중식 셰프나 칼럼니스트 등 전문가들은 연희동과 연남동의 중식당은 대부분 맛과 질에 큰 차이가 없다고 평한다. 집집마다 주특기로 내세
우는 요리는 있으나, 기본 음식의 수준이 대동소이하다는 것. 다만 한 곳에 중식당이 집중되어 있다 보니 맛의 질은 평균적으로 높은 편이
다. ‘진보’, ‘이화원’, ‘걸리부’ 등 화교들이 운영하는 고급 음식점들은 다양한 코스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 또 연남동에는 ‘향미’, ‘흥복’ 등
만두를 파는 가게가 많다. 터줏대감 ‘향미’는 명동에서 이곳으로 이전한 지 6~7년 되는 곳으로 대를 이어 만드는 왕만두로 명성이 높다. ‘홍복’의 왕만두는 일반 왕만두와 마찬가지로 갖은 채소와 돼지고기로 소를 만들지만 만두피가 아주 얇아 만두 소 맛을 바로 느낄 수 있는
게 강점이다. 이외에도 중국식 볶음밥으로 이름을 얻은 ‘구가원’, 짬뽕으로 잘 알려진 ‘매화’, 중식 가정 요리로 유명한 이향방 선생이 운영
하는 ‘향원’ 등이 있다.
비즈니스의 장, 호텔 중식당
인천 차이나타운과 연희동, 연남동이 화교들이 만드는 대중적인 중식
당의 일면을 보여준다면 고급 요리는 호텔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최초
의 호텔 중식당이 문을 연 곳은 명동의 세종 호텔이었다. 그 후 옛 반
도 호텔(현 롯데 호텔의 전신)의 중식당 ‘용궁’이 타이완의 셰프를 영
입하면서 국내 호텔 중식당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후 서울 프라
자 호텔의 ‘도원’, 서울 신라 호텔의 ‘팔선’, 서울 웨스틴 조선 호텔의
‘호경전(현 ‘홍연’의 전신)’이 그 계보를 이어나갔다.
특히 프라자 호텔의 ‘도원’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을 비롯해 정・재계
명사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큰 인기를 모았다. 별실이 많아 정・재계 주
요 인사들이 회동을 갖기에 좋았을 뿐 아니라 담백한 광둥식 요리로
명사들을 사로잡은 것. 1976년 오픈한 도원의 맛은 1980년대 초반 합
류한 유방녕 주방장의 손끝에서 완성되었는데, 그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중국 요리를 개발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1980년대 청와대 출
장에서 닉슨 대통령의 극찬을 받은 것으로 유명할 만큼 해외 명사들의
만찬에도 도원의 요리가 자주 등장했다.
1970~1980년대에 도원이 주목받았다면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서울
신라 호텔의 ‘팔선’이 고급 중식당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다. 1979년
오픈한 팔선은 초창기 도원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으나 신선한 식재료
와 정중한 서비스가 조화를 이루며 급부상한 후 지금까지 국내 최고의
중식당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팔선의 총주방장 후덕죽 상무가 국내
최초로 선보인 불도장은 1980년대 중반 최고의 화제였다. 전복, 바닷
가재, 돼지 발발굽의 힘줄 등 20가지 재료를 넣고 3~4시간 동안 찐 것으로, 아직까지 인기와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요리뿐 아니라 기품 있는 인테리어와 서비스 역시 호텔 중식당의 고급스러움을 더해준다. 팔선의 경우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의 인테리어
디자인에 참여한 인테리어디자이너 칸지 우에키가 디자인을 맡았으며 박영숙 작가의 도자기에 요리를 담아내 단아한 멋을 살렸다. 서울
웨스틴 조선 호텔 중식당 ‘홍연’은 2008년 레노베이션을 통해 술과 차 섹션을 강화하고 붉은 톤의 화려하면서도 모던한 인테리어로 단장했
다. 서울 웨스틴 조선 호텔 홍보 팀 안주연 계장은 “코스마다 요리에 어울리는 차와 술을 곁들일 수도 있고 진귀한 식재료를 대화 소재로
택할 수 있어 비즈니스 모임에 더욱 인기가 높다”고 중식당의 매력을 말한다.
중식당 아닌 차이니스 레스토랑
2000년대 초반 청담동이 레스토랑의 트렌드를 주도하면서 중국 음식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연경’, ‘이닝’, ‘온더록’, ‘빠진’, ‘리샨’ 같
은 고급 중식당을 비롯해 ‘홀리차우’, ‘칸지고고’ 등의 아메리칸 차이니스와 ‘난시앙’ 등의 중국 본토 브랜드까지 등장하면서 다채로운 중식
의 세계가 열렸다. 대중적인 고급 중식을 내놓은 옛 안세병원 뒤 ‘동천홍’이나 24시간 배달하며 쟁반 자장과 볶음 짬뽕 등 히트 메뉴까지
양산한 ‘현경’ 역시 강남을 기점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월간 <수퍼 레시피> 박성주 편집장은 “중식이 지금처럼 다양하고 다채로워진 데는 강남의 차이니스 레스토랑 역할이 컸다”면서, “동네
중국집과 호텔 중식당이 전부라는 중식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말한다. 다소 주춤했던 청담동 차이니스 레스토랑들은 지난해부터 ‘시
안’, ‘몽중헌’ 등을 중심으로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다양한 주류 리스트와 특색 있는 요리를 선보이고 늦은 밤에는 바를 여는 등 다
각화를 시도하고 있다.
국내 중식당의 역사와 발전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있다. 고급 호텔 중식의 계보를 잇는 것을 넘어 중국에서 명장과 명인으로
인정받은 대표 셰프들과 한류로 거듭난 가정 요리의 대가가 그 주인공. 국내 외식업계의 1세대인 이들로 인해 중식은 더욱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1 인천 차이나타운과 명동
1883년 인천 개항은 한국에 중국 음식이 뿌리내린 계기가 된다. 돼지고기와 채소, 춘장이 어우러진 한국식 자장면은 차이나타운의 명물.
이후 명동으로 진출한 중국 요리는 1960년대까지 한국의 대표 외식으로 자리 잡았다.
2 연희동과 연남동
한성 화교 학교가 명동에서 서대문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연희동과 연남동에 작은 차이나티운이 조성됐다. 이곳의 중국 요리는 소박한 인
테리어만큼 정감 어린 메뉴들로 인기를 모았다. 평균 이상의 맛을 보장하는 것이 이 골목의 특징.
3 호텔에서 꽃피운 고급 중식
한국의 고급 중국 요리는 호텔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세종 호텔을 시작으로 을지로 반도 호텔, 프라자 호텔, 신라 호텔, 웨스틴 조선 호텔
등에 중식당이 들어섰고 정・재계 주요 인사들이 회동 장소로 이용하며 유명세를 치렀다.
4 청담동의 차이니스 레스토랑
2000년대 초반 트렌드의 중심이 된 청담동을 기점으로 고급 중식당들이 문을 열어 호텔 못지않은 맛과 인테리어, 서비스를 선보였다. 아
메리칸 차이니스, 중국 본토의 전문 브랜드까지 진출해 다양한 맛의 향연을 펼쳤다.
요리의 중원을 평정하다, 후덕죽 상무
서울 신라 호텔 중식당 ‘팔선’의 총책임자이자 1994년 호텔 업계 최초
로 주방장 출신으로 임원이 된 후덕죽 상무. 얼마 전 국내에서 발간된
레스토랑 가이드 북 <자갓 서울>에서도 최고의 중식당으로 손꼽을 만
큼 팔선을 세계적인 레스토랑 반열에 올려놓은 그는 장쩌민 중국 국가
주석, 마이클 잭슨 등 외국 명사들 사이에도 잘 알려진 중국 요리의 명
장이다. “부모님이 서소문에서 작은 중식당을 운영한 덕분에 어릴 때
부터 자연스럽게 맛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남들에게 요리해주는 것
이 즐거웠어요. 주방장 몰래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다가 혼이 나기도
했고 형과 누나의 도시락을 제가 싸주기도 했지요.”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던 그는 1968년 서울 회현동 UN센터 호텔 양식당 조리부에 취
직해 허드렛일부터 요리까지 단계별로 익혔다. 중식을 본격적으로 시
작한 것은 반도 호텔 중식당 ‘용궁’에 들어가면서부터. “반도 호텔 용
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타이완 주방장을 영입한 곳이라 당시 장
안의 화제였습니다. 쓰촨 요리가 전문인 그곳에 기술을 배우고 싶다며
무작정 찾아갔어요. 처음에는 받아주지 않았지만 네 번째 찾아간 후
비로소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 가 광둥 요리 전문점에서 중식을 심도 깊게 배웠
다. 그의 요리를 눈여겨본 일본인 사장이 지점을 내주겠다고까지 했으
나 아내와 함께 살아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귀국을 택한 로맨티시스트
이기도 하다. 팔선 오픈부터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는 그에게는 변함
없이 지키는 철칙이 있다. ‘중식당 운영 시간에는 아무리 높은 사람이
불러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는 것. 요리사에게는 그 요리를 맛보는 손님만큼 중요한 존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동안 한국인의 입맛도, 레스토랑의 수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올림픽을 거치면서 음식을 대하는 수준도 높아졌지요. 예전에는 베
이징, 산둥 요리 일색이었지만 그 뒤로 담백하고 신선한 광둥 요리가 주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부터 콜레스테롤과 칼로리를 낮춘 요리
나 채소 요리에 관심이 높아졌다고. “중식에 튀기고 볶는 것만 있다고 생각해 건강에 좋지 않은 게 아닌가 염려하는 분들이 있지요. 하지
만 최근 중식은 재료의 맛을 살린 찜 형식이 주종을 이룹니다. 산지에 가서 재료 공부를 하고 신선한 재료를 확보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
지 않고요.” 현재 팔선의 모든 메뉴에는 화학조미료가 일절 들어가지 않는다.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고 맛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무려 3
년이라는 시간을 들였다고 한다. 맛의 비법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일단 음식을 먹어보면 그 차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라고 후 상
무는 자신한다.
그의 이름에는 지금도 ‘불도장’이 따라다닌다. 불도장을 처음 국내에 선보여 널리 알렸기 때문이다. 불도장을 도입할 때 스님이 담을 넘을
만큼 맛있다는 광고 때문에 불교계의 항의를 받는 등 곤혹도 치렀지만 메뉴를 확실하게 각인시킨 계기도 됐다. 20년 넘은 스테디셀러가
있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운 메뉴 개발에 몰두한다. “유기농 채소 요리, 중국 황실 만찬을 재현한 메뉴 등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중국 각지의 요리를 우리 스타일로 해석하는 것이 제 임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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