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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中 日 記
曺 圭 益
며칠전 집근처 파출소 앞을 지나는데 한 젊은 여인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내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해놓고 나보고 미쳤다고? 내가 왜 미쳤냐?”고 통곡하고 있었다. 어디 미친 사람이 자기자신이 미쳤다고 인정하는 사람을 보았는가. 그런데 요즈음 내가 미친 것이 아닌가? 추석연휴에 고향에 가지 않고 산에 가겠다하니 주의에선 미쳤다고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요즈음 무언가에 정말 미쳐 버렸으면 한다.
젊은 날 품었던 이상도 꿈도 깨먹은지 오래고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을 지루하게도 연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 같지만 이 순간 인생을 결산한다면 아무것도 내새울 게 없이 먹고 싸고 그냥그저 그렇게 살아온 것 밖에 없다. 이웃이나 친지에게 은공도 베풀지 못하고 남들처럼 여러 사람이 감상할 수 있는 글 한편 쓰지 못한 체 어느덧 50대 중반이 되어 처자식이나 노후를 걱정하는 졸부가 되어 버렸으니. 그동안 준비하고 배운게 없고 재능도 없어 미친듯 온 정열과 열정을 바쳐 도전할 對象도 없고 용기도 없다. 미쳐버리고 싶어도 미쳐버릴게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미치게 만들어 산으로 가게하는가?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떠들어 봐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허무와 고독, 번뇌, 현실과의 불화를 떨쳐버릴 수 없다.
현실속의 생활인으로서 求道者나 聖者처럼 孤高하게 살아갈 수는 없지만 허무, 고독, 번뇌, 성냄과 욕심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마음의 평온을 얻고 온몸을 엄습해 오는 나퇴와 무기력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자연에 푹 파묻히는 것이다. 자연속에 파묻히면 나는 어찌 그리 왜소한지 聖者같은 나무앞에 무릎 꿇고 싶어진다. 숲속에서 뿜어내는 신선한 산소와 피톤치드라는 향기에 심신이 맑아져 마음은 한없이 안정되며 힘든 산행을 참다 보면 번뇌와 잡념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울 수 있다.
9월 8일 (월요일)
6박7일간 먹을 음식물, 코펠과 버너, 태풍에 대비한 옷과 우의, 우산, 세면도구, 슬리퍼 등을 챙겨 배낭에 넣고 저울에 달아보니 20kg이 넘는다. 집사람이 지하철역까지 태워다 주며 잘 다녀오라 인사하니 마음이 착잡하다. 생의 동반자이며, 서로의 건강관리에 공동책임이 있는데 고3 막내딸의 수능시험이 코앞에 있어 같이 가지 못하고 짝 잃은 기러기처럼 혼자 떠나게 됬으니 마음이 서글퍼 진다.
서울역 지하철에서 내리니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추석연후에 태풍이 올거라고 하니, 약간 불안하기도 하나 고향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술이나 먹고 TV나 보는 것보다는 더 낫다는 위안이 든다. 비가 많이 와 산행을 못하고 산장에 무료하게 보내게 될 경우에 대비하여 책이나 읽자고 서울역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샀다. 입석표를 끊어 11시 15분발 부산행 무궁호화 올라 탔다. 하루 종일 걷기도 하는데 2시간 30분 동안 서 있는 것 쯤이야. 적당히 빈 좌석을 옮겨 다니다 보니 어느덧 영동역에 도착하였다. 오후 4시까지 무주리조트 곤도라 승강장에 도착해야 한다.
버스에 몸을 실고 무주터미날에 도착하니 2시 40분이다. 셔틀버스는 5시에 있다 하니 택시로 갈 수밖에 없다. 덕유산 산행중 가장 불편한 것은 교통문제이다. 8월 중순경 거창 영각사를 거쳐 산행할 때도 장수나 거창을 경유, 두세번의 버스를 바꿔 타야 했으니 치밀한 이동계획이 없으면 낭패보기 쉽상이다. 버스기사 말에 의하면 평일에는 손님이 1-4명 정도니 자주 운행할 수도 없다 한다.
채어맨 리무진을 타고 적성산성을 거쳐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는 무주리조트 길을 달리니 도시생활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된 기분이다. 그런데 곤도라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 기사말씀이 비가 와서 가동하지 않는 모양이라 하니 큰 일 났다. 매표소문은 닫혀 있어 곤도라 쪽으로 걸어가니 관리소 직원이 쫒아 와 오늘은 곤도라를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비는 오고 어두어 지는데 20kg 배낭을 메고 향적봉 정상(1,614m)까지 3시간을 올라갈 것을 생각하니 고생깨나 하게 생겼구나.
그런데 갑자기 곤도라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정사정 볼 것없이 승강장으로 뛰어 가서 탑승하자 했더니 지금은 물품을 운반중이며 바람도 불고 비도 와 위험해서 손님은 태울 수 없다 한다. 어제 전화로 문의할 때는 오후 4시까지 운행하니 그때까지 도착해야 한다 해서 서울에서 기차 타고 버스, 택시로 시간내 도착했는데 무슨 소리냐. 죽어도 내가 죽는다, 물건을 올릴 수 있으면 이 몸 하나 올리는데 무슨 큰 문제가 발생하겠냐며 사정하고 설득도 하니, 그래도 책임은 자기들이 져야 한다며 마지못해 탑승을 허락한다. 천리길을 찾아온 정성이 하늘까지 통하는 순간이다. 50대 중반의 오늘이 있기까지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나이였다. 내 능력과 자질, 인내심보다는 주의의 人德이 많았고, 보이지 않는 힘이 많이 도와 주었다. 특히 나이 많은 어르신이나 직장상사들이 예쁘게 봐 주었으며, 삶의 지혜도 많이 가르쳐 주셨다. 이젠 그동안 받았던 恩德을 다시 돌려 주어야 할 나이이다. 人間事 最大의 善은 베풀 善이다.
곤도라를 혼자 타고 설천봉을 향해 올라가니 마치 신선이 되어 하늘나라로 가는 기분이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거나 바람이 불어 곤도라가 흔들릴 때는 불안감도 느꼈지만, 한 마리 새가 되어 창공에서 내려다 보는 덕유산 골짜기, 바위, 숲속의 풍경은 여태까지 비밀속에 가려져 있던 사랑하는 여인의 속살을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흥분과 전율을 느끼게 하며 작년 가을 이탈리아 소렌토반도 앞바다에 있는 카프리섬에서 리프트를 타고 솔라로산을 오르내린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종점에 당도하여 곤도라에서 내리니 기다렸던 듯이 곤도라 기사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억지로 타고 왔으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설천봉 여기저기 앙상하게 서있는 구상나무 잔해들, 무주 동계올림픽 때 지은 전통한식의 3층 누각, 야외카페, 식당들이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나무계단과 등산로를 20여분 올라가니 약 3주만에 다시 찾은 德裕山 정상인 香積峰이 눈앞에 나타난다.
덕유산은 태백산맥에서 갈라진 소백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으면서 소백산, 속리산 등을 솟게 한 후 다시 지리산으로 가는 도중 그 중심부에 빚어놓은 또 하나의 명산이다.
덕유산은 주봉인 향적봉(1,614)을 중심으로 1,300m안팎의 장중한 능선이 남서쪽으로 장장 30여km를 달리고 있으며 그 가운데 덕유산 주봉을 비롯해서 동쪽에는 지봉, 북쪽에는 칠봉, 남쪽으로는 남덕유산이 자리하고 있는데 德裕山은 덕이 많아 너그럽고 넉넉한 母山이라 해서 덕유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덕유산에는 8개의 계곡이 있는데 그 중 북쪽으로 무주와 무풍사이를 흘러 금강의 지류인 남대천으로 빠져드는 설천까지의 70리 계곡이 바로 유명한 무주구천동 계곡으로 폭포와 담소, 기암절벽 여울들이 옥같이 맑은 계류와 함께 절경을 빚어 소위 무이구곡(武夷九曲)을 포함한 구천동33경을 이루고 칠연폭포와 용추폭포가 있는 안성계곡을 비롯해서 토옥동 계곡과 송계산계곡, 산수리 계곡 등이 저마다 절경을 뽐내고 있다.
봄철의 덕유산은 철쭉꽃밭에서 해가 떠서 철쭉꽃밭으로 해가 지고, 여름철에는 녹음과 원추리 꽃 시원한 구천동 골짜기는 삼복에도 더위를 잊게 해주며, 가을엔 붉은 단풍, 그리고 겨울철엔 주목과 구상나무 가지의 雪景이 고산 특유의 雪景을 자아내고 있다.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추석 명절에 덕유산을 다시 찾은 이유는 주 등산로가 돌이나 바위가 적은 흙길이어서 걷기가 편하고 풍요로운 한가위에 德裕의 人格을 닮고 싶기 때문이다. 설악산이나 지리산의 등산로는 바위와 돌로 된 너덜지대가 대부분이다. 향적봉 대피소에서 삿갈골 대피소까지의 10.5km는 거의 흙길이며 찾는 사람이 적고, 등산로 주변은 풀과 잡목이 무성하여 한여름의 왕성한 초목이 동화작용으로 내뿜는 신선한 산소를 마시며 걷다보면 콧구멍이 뻥 뚫리고 근육과 가슴이 헤라클라스의 그것처럼 부풀어 힘이 솟는다. 전국토가 근대화와 도시화로 인해 조용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을 찾기 쉽지 않다. 소음, 매연, 먼지, 쓰레기, 악취, 자동차와 사람의 홍수로 인해 걷다보면 짜증만 난다.
맑은 공기를 배불리 마시고 향적봉대피소로 방향을 돌리니 밥타는 누릉지 냄새가 난다. 많은 등산객들이 밥을 짓는구나 생각하며 발길을 재촉하여 대피소에 도착하였으나 인적이란 보이지 않는다. 내 후각에 이상이 생겼는지, 관념적으로 냄새를 연상했는지, 아니면 어제의 냄새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문을 두드리니 관리소 소장이 나타난다. 8월에 있던 사람이 아니다. 국립공원 관리소 직원들도 공무원 신분으로 자주 이동이 있다 한다. 어제 전화드린 사람이며 며칠 여기서 묵을 거라 했으나 무표정이다. 대피소는 작년에 개축하여 깨끗하며, 설천봉 곤도라시설에서 전기와 전화를 끌어와 쓰고 있다. 대부분의 대피소들은 자가발전기를 돌리며 밤 9시부터는 가동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이전에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젖은 옷을 갈아 입고, 저녁식사를 준비하며 맥주 한 캔을 사 먹으니 취기가 돈다. 총각김치, 볶은 고추장, 풋고추, 멸치조림, 마늘 짱아치, 밥도독 김, 검은 콩조림, 깻잎조림 등 진수성찬이지만 혼자 먹으니 밥맛이 없다. 자식들은 출가하고 마누라도 먼저 가고 없을 훗날의 내 자화상이 될 獨居老人의 모습이 연상되니 서글퍼 진다.
하루밤 사용료 5천원, 모포 두장 2천원에 대피소를 혼자서 사용하게 되었으니 오늘은 끝까지 운수 좋은 날이다. 전기가 들어와 마루바닥이 따듯하다. 물과 전기사정이 양호하고, 매점의 물품도 다양하여 이곳 대피소를 6박7일 산중생활의 베이스캠프로 정했다. 양말을 빨아 젖은 옷과 함께 담요밑에 놓았으니 내일 아침이면 다 마르겠지. 밖에는 보슬비가 계속 내리니 달과 별을 구경할 수 없구나. 하루 정도는 구경할 날이 있겠지. 오늘은 잠이 빨리 찾아오지 않으니 책이나 읽자.
9월 9일 (화요일)
등짝이 너무 따뜻하다. 1,600m나 되는 亞高山地帶에서 이런 호강을 나혼자 누리기는 너무 아깝다. 새벽4시에 일어나 바깥으로 나와 보니 비는 오지 않는다. 저 멀리 백련사의 은은한 종소리를 들으니 심장의 고동소리마저 멈춰 서는 것 같다. 불교도는 아니지만 내 영혼은 태생적으로 불심을 지향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뱀새 소등하지 않는다. 관리소장이 소등하는 것을 잊었는지 아니면 특별배려인지 알 수는 없지만 덕분에 바깥이 밝아 질 때까지 책을 읽은 후 밥을 지워 먹고 등산 필수품만 골라 작은 배낭에 넣고 어쩌면 오늘 밤은 다른 곳에서 잘 수도 있겠다고 관리소장에게 얘기하고 향적봉 정상으로 올라 갔다.
덕유산 정상에서 보면 동서남북에 끝없이 펼쳐지는 산들이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가까이는 무룡산, 남덕유산, 적성산, 멀리는 계룡산, 덕유산, 운장산, 지리산 천왕봉, 황악산, 가야산 등이 보이며 그 산들의 꼴짜기에 사람들은 집을 짓고 농사를 지며 살고 있다. 골짜기마다 바람에 운무가 춤을 추니 곳곳에 신천지가 창조되고 있구나. 구름이 끼워 광활한 대지위의 해돋이는 구경할 수는 없지만 동녘하늘이 점점 밝아 지는 것을 보고 정처없는 나그네의 길을 재촉하였다.
어제 내린 비로 길은 미끄럽고 쑥, 토끼풀, 억새, 싸리나무, 붉나무, 산대나무, 분비나부, 신갈나무, 사스레나무와 철쭉나무의 숲속 등산로를 헤쳐나가니 풀잎의 물방울은 옷을 젖히고 흘러 내려 등산화로 들어가니 물에 빠진 듯 질퍽거린다. 투구꽃, 바위채송화, 구절초 등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저기 형형색색 자태를 자랑하며 그 사이를 벌들이 분주히 왔다갔다 하며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길옆의 꽃을 스쳐 지나가다 벌에 쏘이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있지만 내가 먼저 적대행위를 하지 않으면 쏘지 않겠지.
중봉(1594.3)을 거쳐 덕유평전에 다다르니 넓고 넉넉한 초원이 펼쳐져 있어 장중할 뿐만 아니라 광대하기도 하다. 여기서 牛馬를 사육하며 소등을 타고 한가로이 피리나 불거나, 때론 말을 타고 평전을 번개처럼 달리면 속세의 잡념은 모두 잊을 수 있으렸만. 계속되는 등산로는 흙길이어서 시골 논두렁을 걷는 기분이다. 시간과 공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산따라 길따라 걷고 걸으니 어느새 동업령(1320)이 지나갔고 무룡산(1491,9)이 보인다.
출퇴근이나 약속시간에 쫒기며, 찜통속 무더위의 아스팔트와 매연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메뚜기같은 인생. 동물우리처럼 울타리나 콘크리트벽에 갇혀 텔레비나 보며 좋아하거나 슬퍼하기도 하며 가끔 분노하고 울분을 토하는 판에 박힌 하루하루. 오늘은 잔소리하는 사람이나 용돈 달라는 자식도 없고 오가는 사람도 없다. 이마와 등에 땀방울이 흐르니 상의를 벗고, 목마르면 물마시고, 쉬고 싶으면 쉬며 맑은 공기를 흠뻑 마시며 걸으니 속세의 잡념과 번뇌를 잊어버릴 수 있고 새로운 힘이 솟으니 생명의 밭이 바로 이곳이구나.
인적이 드문 깊은 산중에 돌탑을 예쁘게 만들어 놓았으니 무엇을 기도하고 염원하며 돌탑을 쌓았을까? 몇 개의 돌을 가져다 돌탑위에 얹어 놓고 햇볕이 들지 않는 울창한 숲속을 콧노래를 부르며 걸으니 여기저기서 산새들도 화답하듯 노래 부른다.
그사이 멈처 섰던 배꼽시계가 작동하기 시작할 무렵 삿갓골 대피소(1280)에 도착하니 관리소장은 사람이 그립다는 듯 반가와 한다. 몇주 전 이곳에 왔을 때 친절하게 대해주고 연장자라 하며 좋은 잠자리를 골라주던 젊은 직원을 찾았으나 추석명절 새로 가고 없다 한다. 점심을 간단하게 준비해 들고 벤치에 누어 피부 곰팡이 소독 겸 낮잠을 자고 나니 몸이 한결 가뿐하다. 오늘 밤 여기서 잘거라고 소장에 말하고 배낭을 메고 남덕유산으로 방향을 돌렸다.
통나무 계단을 거쳐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니 삿갓봉(1410)이 나타났고, 지금까지 걷던 길과는 달리 돌과 바위가 많은 너덜지대를 통과하여 몇 개의 봉우리를 넘고 넘으니 월성계곡으로 연결되는 월성재(1240)가 나온다. 월성계곡은 삿갓골샘에서 시작되는 길이가 5.5km 되는 계곡이며 폭포와 소와 담이 어울러진 비경지대이며 청정계곡으로 다음번 산행시에는 황점매표소에서 시작하여 이 계곡을 꼭 한번 둘러 보고 싶다.
바람은 점점 강해지며 빗방울도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남덕유산의 기암절벽이 점점 가까와 진다. 덕유산은 설악산과 지리산을 혼합하여 다시 빚은 산 같다. 남덕유산의 아찔한 기암절벽은 설악산에서 가져왔고 지리산의 임걸령 평전과 세석평전을 가져와 광활한 덕유평전을 만든 것 같으니 지리산과 설악산의 산행을 먼저하고 덕유산을 찾으면 덕유산의 묘미를 더욱 즐길 수 있다.
남덕유산은 덕유산 연봉들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덕유(德裕)산에 남녁 남(南)자를 앞머리에 붙여 지은 이름이다.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 일대를 북덕유산, 장수군에 있는 서봉을 장수덕유라 일컫는다. 덕유산하면 북쪽의 북덕유산과 주봉인 향적봉, 그리고 무주구천동의 33경만 생각하기 쉬우나 장수덕유와 이곳 남덕유산까지 덕유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남한에서는 지리산국립공원 다음으로 웅장하고 넉넉한 산이다. 임진왜란때 일본인들이 이 산하에 와서 산을 보고는 크고 덕이 있는 산에서 싸울 수 없다하여 퇴군했다고 전해 진다.
남덕유산은 동봉과 서봉이 있는데 서봉의 높이가 1,510m로 기록된 곳도 있어서 서봉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덕유라면 동봉을 가리킨다. 동봉에서 영각사 방향으로는 아찔한 암벽이 몇군데 있는데 이곳에는 3군데의 7-80각도로 세워진 철제사다리가 놓여져 있어서 안전한 산행을 보장해주지만 산의 전체적인 인상을 훼손하는 것같다. 이곳부터 삿갓봉까지는 한여름에도 몸이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강하게 분다. 덕분에 이곳에 있노라면 크기도 하지만 비염이 있는 내 콧구멍은 뻥 뚫려 며칠간은 숨쉬기가 아주 편해진다.
남덕유산 정상에서 바위길을 따라 20여분 내려오면 참샘이 있는데, 겨울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온수이고, 여름에는 손을 담글 수 없을 정도로 찬물이 솟아난다. 지금까지 산행중 가장 맛있는 물맛은 지리산의 임걸령샘물과 이곳 참샘물이었으며 공통점은 山上이지만 단순히 흐르는 물이 아니고 땅속에서 솟는 샘물이라는 것이다. 참샘옆에는 남강의 발원지라는 안내문이 있고 저만큼에는 통신중계탑이 서 있다. 8월 중순 영각사에서 출발하여 올라오던 중 이곳 참샘을 보기 위해 산대나무 숲을 지나다 발을 헛디뎌 앞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나뭇가지에 이마가 찢기고 피가 나 지금도 이마 한가운데 붉게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뒤로부터 내 등산장비에 새로 추가된 품목이 직경 5cm 정도의 조그마한 손거울이다. 동행한 사람들의 괜찮다는 말만 듣고 치료를 하지 않았는데 꽤 상처가 깊었던 것 같다. 배낭에는 소독약, 연고와 반찬고가 있었는데 바로 치료했어야 했다.
계속해서 영각사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길이 돌과 바위가 많은 깔닥고개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영각사까지 3.6km, 소요시간 1시간 20분이라고 등산지도에는 나와 있지만 1시간 20분은 하산시나 가능하겠지만, 올라오는 시간은 2시간 반 이상이 소요되었으며 더욱 야간산행은 너무 위험한 곳이다. 평지에서는 시간당 5-6km를 걷을 수 있지만 험악한 산길은 1km도 걷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15km이상을 걸었다는 것은 향적봉에서 삿갓골 대피소에 이르는 10.5km가 대부분 평탄한 흙길이었기에 가능했다.
발길을 돌려 다시 남덕유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깍아지른 듯한 바위를 비에 젖은 철제계단을 이용해 거센 바람을 등지고 오르니 미끄럽고 두 다리가 후들거려 겁이 난다. 설악산도 이보다 더한 전율과 공포를 자아내게 하는 험한 등산로는 없었다. 오르다 떨어지면 저 아래 숲속으로 곤두박질쳐 죽어 까마귀나 짐승의 밥이 될거고 白骨은 塵土되고 그 위에 자란 약초를 캐는 사람이 다행히 주민등록증을 주어 경찰에 신고하면 소식을 전해 들은 자식과 마누라는 슬퍼하겠지.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거야. 콘크리트벽의 우리같은 병실에서 병마에 시달리며 고통속에서 죽는 것보다 좋아 하는 광활한 대자연의 품에서 비명객사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겠지.
남덕유산-육십령은 백두대간 능선으로 동봉정상에서 바로 보니 서봉이 눈앞에 있고, 중봉, 향적봉, 저멀리 지리산 반야봉, 천왕봉까지 수 많은 산들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그 사이사이에 그물을 쳐 놓은 듯한 논밭과 고기배같은 민가들이 두둥실 떠있다. 10여분 쉬면서 맑은 공기를 흠뻑 마시고 오늘의 잠자리인 삿갓골대피소로 발길을 돌렸다. 산이 높으면 꼴짜기가 깊듯 험준한 남덕유산을 뒤로 하고 비교적 순탄한 길을 따라 월성재로 내려오니 콧노래가 절로 난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따라 가는 객이 그 누구냐
열두 대문 두드르며.......
월성재부터는 다시 오름길이 시작되고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한다. 석양에 겹치는 능선봉과 멀리 주봉의 파노라마를 보고 있으면 마치 꿈속을 노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새소리에 놀라 창공을 쳐다보니 커다란 까마귀 때들이 보금자리를 찾느라 분주히 날아 다닌다. 알 수 없는 몇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니 어느덧 주의는 어둠속에 묻혀 앞뒤를 분간할 수 없어 배낭에서 헤드램프를 끄집어 머리에 착용했다. 모래가 추석이니 달빛도 비치려만 하늘은 구름에 가려 있고 울창한 숲속을 걸으니 어둠속에 갑자기 나타나는 쓰러진 고목의 앙상한 시체,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바위,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 풀벌레 소리, 거센 바람소리, 떨어지는 나무열매 소리, 인기척에 놀라 도망가는 산 짐승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지고 이마에 식은 땀이 맺힌다. 기계(발전기)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니 삿갓골대피소가 가까워 지는 모양이다.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 불빛속에 빨려 대피소 안으로 들어 가니 관리소장이 이제 오느냐고 반가와 한다. 오늘도 나 혼자 자야 하는 모양이다.
9월 10일 (수요일)
새벽녘에 비가 왔는 모양이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눈보라가 불어와도 또 떠나야 하고 걸어야 한다. 높은 산악지대는 좋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리고, 비 안개 몰아치던 하늘이 어느새 햇볕이 땡땡 비치기도 하니 가다보면 조은 일도 있겠지. 대피소 앞 나무판자에 “삿갓골대피소 2.1km → 무룡산 4.2km → 동업령 2.2km → 송계삼거리 1.0km → 중봉 1km → 향적봉(대피소)”라는 등산안내문이 적혀 있다.
대피소를 뒤로 하고 완만한 비탈길을 올라오니 헬기장이 있는 공터가 보인다. 여기저기 이름 모를 야생화가 피어 있고 다람쥐는 먹이를 찾아 분주히 움직인다. 무룡산 정상에서 바라보니 바람에 흩날리는 안개와 운무사이로 남덕유산, 삿갓봉, 서봉의 아름다운 자태가 힐긋힐긋 보이고 향적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소 잔등처럼 여유롭게 뻗어 있다. 계속되는 논두렁 같은 길을 따라 한가로이 걸으니 안개 구름은 어느듯 사라지고 따가운 햇살에 눈이 부시다. 동업령 정상에 이르러 양말과 등산화를 벗어 햇볕에 말리고 배낭을 벼개 삼고 하늘을 쳐다보며 상념에 젖어 든다.
청산은 나를 보고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상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고려말 공민왕의 王師이며 무학대사의 스승인 懶翁禪師의 말씀이다. 懶翁禪師가 돌아가신지 6백여 년이 지났다. 온 곳이 있기에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 우리는 그 곳을 자연이라 한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산은 비, 폭풍, 번개와 천둥, 눈보라에도 아무 말없이 인내하며 성냄도 없고 차별도 거만도 교만도 없다. 조화와 순응, 겸손과 安分知足의 미덕을 가르치고 번뇌와 탐욕도 잊게 해주며 어머니 품처럼 언제나 따뜻하게 받아 준다. 산은 이 생명 다 할 때까지 함께 가야할 영원한 내인생의 同伴者.
방향을 좌측으로 돌려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니 물소리가 들리고 낙엽송이 하늘 높은지 모르게 솟아 있으니 이곳이 칠연계곡의 상류가 시작되는 곳인가 보다. 아래로 내려갈 수록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소리와 계속되는 폭포소리가 여태까지의 적막했던 산행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버린다. 배낭을 내려 놓고 짙은 녹음 사이의 움푹 패인 소에 발을 담그니 누적된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 풋고추와 볶은 고추장에 준비했던 주먹밥을 먹으니 허기가 사라지며 시원한 동동주가 절로 생각난다.
연달아 일곱 개의 폭포와 소가 있다하여 七淵瀑布라 부르며 아래쪽 건너편에는 七淵義塚이 있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어 우리나라 군대가 해산되자 시위대 출신 申明善이 덕유산을 거점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무주, 장수, 순창, 용담, 거창 등지에서 활약하였는데 1908년 4월 칠연계곡 송정골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으로 150여 명의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1969년 계곡근처에 묻혀 있던 유해를 주민들이 수습하여 묘역을 만들고 칠연의총이라 이름하였으며, 1976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 27호로 지정되었다 한다. 나라 잃는 서러움과 분노를 삮이며 이름없이 사라져 간 의병들에게 애도를 표시하고 발길을 오던 길로 다시 돌렸다.
동업령에 올라서니 삿갓봉, 남덕유산은 안개에 파묻혀 보일락 말락하고, 바람이 거세지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반바지로 갈아 입고 우의를 뒤집어 썼다. 눈 앞에는 광대한 덕유평전이 시작된다. 원추리 군락지는 철이 지나 꽃들은 모두 지고 없다. 꽃잎은 떨어져도 때가 되면 다시 피어나니 서러워 하지 마라. 우리네 인생은 片道티켓을 들고 떠나는 여행으로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영국의 어느 방랑시인은 “人生은 漁夫, 時間은 江물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그곳에서 낚는 것은 오직 한 줌의 꿈뿐이다.”라고 노래하였다.
無 爲
만물은 일정찮아 조석으로 변해도 (萬物變遷 無定態)
이 한 몸 한가위 때를 따르리. (一身閑適 自隨時)
이제껏 세상 일에 쫓기다 보니 (年來漸省 經營力)
청산 옆에 두고 시 한번 못 읊었소. (長對靑山 不賦時)
-李彦迪(1491~1553)-
간간히 내리는 비 사이로 서쪽하늘은 점점 붉어지기 시작한다. 덕유평전을 거쳐 중봉으로 올라오는 길에는 쭉, 질경이, 오이나무 풀, 구절초 등 고산지대 식물이 토박한 토양위에서 비바람을 견디며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비바람을 피해 바위틈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족 및 고향생각이 난다. 시골에 계신 백발의 어머니께서는 고생하니 내려오지 말라고 말씀은 하셨지만 차가 지나갈 때마다 동구밖을 바라보고 있지나 않으신지? 정수, 석주, 영철이도 처자식 데리고 와서 동네 어르신께 인사드리고 가족식구들과 모여앉아 오손도손 송편을 빚으며 우슴꽃을 피고 있겠지. 맏딸인 내 아내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계신 친정아버지 병간호와 추석음식 준비에, 고삐리 작은 딸은 수능시험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겠구나. 50이 넘도록 아직도 안주하지 못하고 이렇게 방황하는 이놈의 신세가 처량하구나.
천지사방이 어둠속에 묻혀버리기 시작할 무렵 향적봉대피소에 도착하니 이틀 동안 구경할 수도 없었던 등산객 몇 명이 먼저 도착하여 밥을 짓고 있다가 반기와 하며 자리를 양보해 준다. 한쌍의 부부 사진작가는 부산, 두 남자 사진작가는 대전, 도자기예술가는 봉화에서 왔으며 한결같이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다. 담배 골초들이다. 요번 산행부터 담배를 끊으려고 3일 동안 금연했는데, 아니 담배가 없어서 피울 수 없었는데 술 한잔 나누고 담배를 권해 한 대 빨았더니 어지러워 쓸어질 것 같다. 피곤도 하니 침상에나 쓸어지자.
9월 11일 (목요일)
일찍 잠이 깨 밖으로 나가보니 아직은 어둡고 비가 와 다시 대피소 안으로 들어와 따뜻한 침상 위에 등을 대고 누어 있으나 잠은 오지 않는다. 전등이 켜져 있으면 책이나 읽으련만. 창밖이 점점 밝아오니 주섬주섬 등산복으로 갈아 입은 후 간단히 양치질하고 향적봉에 올라 왔다. 비는 잦아졌지만 오늘도 일출구경은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어머니와 큰 형님께서 추석차례를 준비하고 있을 고향을 향해 再拜하고 天地神明과 祖上님께 기원하오니,
이 땅에서 전쟁과 살육을 없애고
가난과 질병에서 인류를 구제하며,
진실과 정의의 인내를 시험하지 마시고
사악한 무리들이 참회하게 하옵소서!!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고통과 곤경을 극복하며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저와 가족 및 후손에게 주옵소서!!
어렵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돕고
깨끗하고 겸손하며 명예와 가문을 지키며
소박하게 산다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항상 명심하고 실천하게 하여 주소서!!
다시 숙소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준비하여 옆 사람들과 반찬을 나눠 먹으니 혼자 먹을 때보다 훨씬 맛이 있다. 오늘은 삼공매표소로 내려가 상가에서 음식과 과일, 동동주를 사 먹어야 겠다. 부산에서 온 사진작가 부부는 남덕유산으로 내려간다며 떠났고 엊저녁부터 추석차례도 못지내고 산에서 보내는 자신을 원망하던 도자기예술가도 집으로 간다고 작별했고, 대전서 올라온 털보 아저씨들은 카메라를 메고 산으로 가며 오늘 저녁 다시 보자고 한다. 큰 배낭에서 오늘 사용할 물건만 골라 작은 배낭에 넣고 향적봉을 거쳐 白蓮寺로 향했다. 새로 만든 나무계단을 밟으며, 돌과 바위길을 내려오니 부드러운 흙길이 시작된다.
길옆의 분비나무, 신갈나무, 사스레나무, 철쭉, 노란재나무, 피나무, 피벚나무, 굴참나무, 음나무, 개옻나무, 산뽕나무.......사람이름만큼이나 다양한 나무팻말을 보며 내려오니 계곡물소리도 들리고 백련사의 향불냄새도 느낄 수 있다. 철도목으로 만든 통나무계단은 인체공학을 무시한 체 만들어져 오히려 불편하다. 겨울등산객의 아이젠에 짓눌려 곰보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이곳은 등산객의 왕래가 빈번한 것 같은데 아직도 올라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백련사를 500m쯤 남겨 놓고 높이 2m, 둘레 4m 돌탑으로 된 白蓮寺戒壇이 있는데 이 탑의 주변을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일곱 번 이상 돌면 누구나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전하여 많은 사람이 찾는다. 백련사 경내에는 추석차례를 지낸 후 찾아온 여러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떡과 과일을 먹고 있으며, 가련한 줄기의 코스모스와 분홍꽃이 가을 햇볕에 반짝거린다. 白蓮寺는 신라 문무왕 때 백련선사가 은거하던 곳에 백련이 피어나자 짓게 된 것이라고 하며 전란 등으로 여러번 소실되었다. 12동의 비교적 큰 사찰이며 예불을 막 끝내고 나오는 스님의 얼굴이 너무나 맑다. 고려 때 제작된 삼존석불이 있고, 종루에는 지름 175cm정도의 엄청나게 큰 북이 있다.
부처님께 합장하고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석조계단으로 만들어진 백련사 계단을 내려오니 일주문이 있고 그 앞에는 梅月堂 부도(浮屠)와 정관당 부도, 세계적인 신문 재벌 로드미어의 부도가 있어 명산임을 자랑하고 있다. 처음에는 梅月堂 浮屠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金時習의 것으로 알려 졌으나 정조시대의 梅月堂 雪欣 스님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다. 號는 집에서 부르는 堂號와 시, 서예, 그림 등에서 사용하는 雅號로 옛날에는 구분하여 사용했는데 우연히 두 사람의 堂號가 일치하여 혼란을 가져왔던 모양이다.
백련사 옆부터 시작되는 70여리에 걸쳐 흐르는 계곡이 구천동계곡이며, 설악산의 백담계곡, 수렴동계곡, 지리산의 뱀사골, 백무동계곡, 칠선계곡보다 기암괴석, 크고 작은 폭포와 소, 맑은 물 등은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구천동33경은 香積峰, 32경 白蓮寺, 백련사 지척에 있는 離俗臺가 31경이다. 울창한 수림과 기암의 좁은 흠을 타고 미끄러지듯 쏟아지는 한줄기의 폭포수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무아지경에 빠진다. 사바세계를 떠나는 중생들이 속세와의 연을 끊는 곳이라 하여 離俗臺라 한다. 간간히 내리던 빗줄기는 어느덧 사라지고 나무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눈이 부시다. 발길을 재촉하여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내려오니 28경의 九千瀑布가 있다. 바위를 타고 쏟아지는 2단 폭포는 신이 창조한 예술작품으로 옛날 천상의 선녀들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있다. 암반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심산유곡의 바람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면 마치 탄금소리와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22경의 금포탄(琴逋灘),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마치 비파모양을 하고 옛날 선녀들이 내려와 비파를 타며 놀았다는 19경의 비파담(琵琶潭), 18경의 淸流洞은 200m구간의 계곡바닥이 온통 암반으로 깔려 그 위를 미끄러지듯 흐르는 맑은 물이 주변의 수림과 어우러져 선경을 연출하고, 사자목에 살던 사자가 내려와 목욕을 즐겼다는 사자형상의 獅子潭(17경)을 지나니 15경의 月下灘이 보인다.
건강체구의 70대 노인이 백련사까지 얼마 남았느냐고 묻길레 “어르신은 30년 정도 남은 것같다”하니,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시다 곧 拈華微笑로 “젊은이, 고맙소”한다. 여태 걸어 왔으니 팔다리가 뻐근하시겠지. 추석차례를 지내고 올라오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한다. 젊은 총각, 아주머니들, 가족단위 또는 처녀끼리 올라온다. 지나가는 여자들한테서 화장품냄새가 짙게 나고, 젊은 여자의 흰가슴이 보일락 말락하니 피가 갑자기 거꾸로 도는 것 같다. 나같은 속인도 맑은 산속에서 며칠 살다보니 지나가는 사람의 냄새가 역겨우니, 깊은 산속의 수도승은 오직 할까. 절에서 향을 피우는 이유를 대충 알 것 같기도 하다.
삼공매표소앞 식당에서 산채비빔밥과 동동주로 요기를 채우고 나니 피로가 엄습해온다. 상점들을 돌면서 남은 3일 동안의 먹걸이와 필요도구들을 찾았지만 워낙 깊은 계곡이라 다 구하지 못하고 다시 올라오는 길에 봉화에서 왔다는 도자기 예술가를 만났다. 막걸리 한잔 하자고 해 파전과 동동주를 시켜 먹는데, 이 친구는 전작이 있어 횡설수설한다. 산에 왔어도 현실속의 갈등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계속 나약한 모습을 보이니 작별인사를 하고 먼저 일어 섰다.
비가 한두 방울 내렸다 말다 한다. 불경소리가 들려 좌우를 살펴보니 印月潭(제 16경)이라는 안내문이 있다. 무지개 같은 철제다리 밑으로 쏟아지는 폭포는 소를 만들고 비단폭을 이루며 미끄러 진다. 신라 때 인월화상이 인월보사를 창건하고 수도한 곳으로, 숲속엔 인월정이란 정자가 숨은 듯 앉아 있으며 덕유산 봉우리를 배경으로 탁 트인 하늘, 반석, 폭포가 어우러져 절묘한 승경을 이루고 있다. 백련사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점점 많아 진다. 오전에 내려오던 길에 보았던 사람도 많다.
한결같이 우리속의 동물 구경하듯 뻔히 쳐다보고 간다. 민족 대명절인 추석날에 젖은 옷과 등산화, 텁수록한 수염, 기름기에 찌든 머리카락, 당나귀의 귀, 주먹만한 코...... 늦은 시각에 다시 올라가는 모습이 처량했는지, 아니면 예쁘게 보아 奇人으로 생각했는지. 그러나 이 순간은 세상의 번뇌와 잡념을 모두 떨쳐 버렸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어 부러워할 것도 바랄 것도 없는 가장 행복한 촌놈이랍니다.
맑았다 흐렸다하는 계곡길을 따라 올라오니 25경의 安心臺가 보인다, 관원들에 쫒기던 生六臣 金時習이 이 개울물을 건너고 나서 비로소 안심하였다 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梅月堂 金時習(1435~1493)은 우리나라 최고의 천재적 자질을 타고나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는 중용과 대학에 능했다 한다. 이 소문이 널리 퍼져 세종대왕은 승지를 시켜 그의 재주를 시험해 보도록 한 다음 상을 내리고 장차 크게 쓰겠노라고 하였으며 세상에서 그를 “오세”라고 일컫게 되었다.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金時習의 시 한수 생각난다.
맑았다 흐렸다(作晴作雨)
맑은 듯 흐리고 흐릴 듯 다시 개네 (作晴作雨 雨還晴)
자연도 이렇거든 세상 인심이야 (天道猶然 ?世情)
어저께 날(我) 좋다던 이 오늘 아침 헐뜻고 (譽我便應 足毁我)
공명 싫다던 이 공명찾아 바둥대네 (逃道却自 爲求名)
꽃은 피건지건 봄이야 관계하랴 (花開花謝 春何管)
구름이 오고가건 산이야 알 바 없어 (雲去雲來 山不爭)
여보소 사람들여! 새겨두고 잊지마소 (寄語世上 須記憶)
평생을 구하여도 부귀공명 덧없으니 (取歡無處 得平生)
권력을 쫒는 자들은 봉권시대나 오늘의 민주사회에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사이 인간의 人智, 文化, 文明은 눈부시게 발전하였지만 권력을 쫒는 자들의 속성은 전혀 변함이 없다. 요즈음 참으로 해괴하고 망측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배신과 배반, 중상비방이 난무하고 탈당과 이합집산으로 선거공약은 나무아미타불이 되어 對국민 사기극이 연출되고 있다. 사리사욕과 당리당욕을 숨긴 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표를 달라고 외치는 여의도 씹새, 철새 및 잡새, 권력의 눈치만 살피고 龍飛御天歌만 불러대는 관새들은 배신, 부정 및 사기능력 이외는 수백년 동안 전혀 진화발전하지 못한 지구상에서 가장 비열한, 그러나 결코 멸종되지 않는 생명력이 질긴 動物임이 분명하다.
가치관의 세분화와 국제화로 다양해진 국민의 욕구와 변화를 不協和音, 煽動과 괴변의 코드로 통치하려 하니 국민은 배신감, 불신, 혼란 및 실업에 시달리고 있다. 울긋불긋 화려한 옷색깔(코드)은 같더라도 내면적으로 섬기는 신이 다 다른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니 어제는 G短調요, 오늘은 D短調니 전국이 시끄럽고 국민들의 共鳴도 없고 메아리도 없다. 共鳴도 없고 메아리도 없으니 어찌 참여정부라 할 수 있을까? 오케스트라 연주가 아니라 하나의 코드만 강요하는 solo연주이다. 지구상의 어떤 악기가 하나의 코드만 갖고 있던가? 현대의 정보기술은 code나 통신protocol이 다르더라도 변환(conversion)하여 사용하며 또한 이들을 조합하여 수백만 가지의 color나 sound도 만들고 理想的인 싸이버 정치가도 창조해 낸다.
종지그릇만한 심보로 감정적 대응이나 하고 코드가 다르다고 배척하면서 개혁, 변화 및 국민통합을 어떻게 이루어 낼 수 있을까? 코드가 다르면 설득하여 변환시키고 21세기 디지털 정보시대에 부합되는 정책과 자질을 개발하여 모든 국민으로부터 共鳴과 메아리를 얻어야 한다. 山의 철학을 배워 변화무쌍한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지도력과 모든 국민을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과 역사앞에 정직해야 한다. “어느 한 時代는 全民衆을 속일 수 있고 全時代를 통해 一部民衆을 속일 수 있어도 全時代를 통해 全民衆을 속일 수 없다.”는 링컨 대통령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31경 離俗臺의 맑은 물로 눈, 귀를 씻고, 콧구멍도 딱아 내고 손도 씻었으니 이젠 하얀 연꽃을 타고 꿀과 향기 가득한 덕유산 정상으로 가자. 108계단의 白蓮寺 계단을 거쳐 대웅전에 이르러 합장한 후 뒤돌아 오는데 젊은 여인이 맥주캔 하나를 주며 아직 시원하니 드시라 한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빗줄기는 점점 강해진다. 열심히 걸어도 어둠이 지기전에 香積峰대피소까지 가기는 어렵겠다. 골짜기마다 용트림 치는 안개와 어둠속으로 빨려드는 덕유산은 살아 움직이는 동양화이며, 별천지가 따로 없다. 빗방울을 피해 나무밑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나니 취기가 돈다. 소리내어 야호를 몇 번 외치고 계속해서 올라가니 젊은 두 사람이 부지런히 내려오며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다. 다소 걱정스런 모양이다. 우의, 헤드랜턴과 손전등을 끄집어 썼다. 쏟아지는 폭우로 인해 울창한 숲속의 등산로는 水路로 변했고 전등을 비쳐도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어둠어둠 길을 헤쳐 가니 드디어 대피소 불빛이 보인다.
왠걸! 취사장에 사람이 가득하다. 대전서 온 부부, 인천의 일가족, 광주에서 온 젊은 처녀들, 어제 온 사진작가, 새로 온 사진작가, 서울에서 온 건강한 체구의 내 또래(대머리). 각자 식사를 준비하여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술도 권하며 우슴꽃을 피운다. 내일의 산행계획을 말하기도 하고 궁금한 점은 안내를 받기도 하고......그러나 사라호보다 더 강한 태풍이 지나간다고 걱정들이다. 오늘밤은 8월 한가위이지만 보름달이나 별구경을 할 수 없어 아쉽다. 요번 산행에 덕유산의 일출, 일몰, 월출과 밤하늘의 별구경을 잔뜩 기대했으나 계속되는 흐린 날씨탓에 볼 수가 없다. 내년엔 집사람과 다시 와야 겠지. 사진작가들은 한 컷을 찍기 위해 산속에서 한 달 동안을 기다리기도 한다니 내 인내심도 길러 봐야지. 관리소장은 강한 태풍이 접근하니 내일 모두 철수해야 할 것 같다 한다. 산속에서 태풍을 감상하는 것도 또 다른 풍취가 되겠구나 생각하며 모든 것은 내일로 미루고 따뜻한 침상위에서 몸을 딩굴었다.
9월 12일 (금요일)
눈을 떠보니 비바람이 거세게 분다. 초등학교 시절의 추석날, 사라호 태풍 때 "우리집 날아가겠다"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가, “너, 날아갈지 모르니 어서 방으로 들어가라”는 큰형님의 겁주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방으로 다시 들어온 기억이 난다. 철수명령지시가 접수됬으니 모두 철수하란다. 각자 내려가지 말고 모두 모여서 한꺼번에 내려가란다.
취사장에 모여 앉아 아침을 먹으며 하산계획을 토의했다. 인천에서 온 어린 초등학생이 걱정된다. 덕유산 일출이 너무 아름다워 다시 보고 싶어 추석차례를 지내고 곧장 차를 몰고 온 가족이 달려 왔단다. 광주에서 온 세 처녀는 남덕유산으로 내려갔으면 하는데 남덕유산은 평일에도 바람이 강하고 오늘은 접근조차 불가하다고 설명해 주었다. 백련사로 내려가는 길은 오늘같은 날은 등산로가 아니고 수로이며 바위가 미끄러워 위험하다고 하니 모두 동의하는 눈치다. 설천봉부터 곤도라 승강장까지 트럭이 다닐 수 있는 산길이 있고 그 길이 제일 안전하니 그곳으로 하산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관리소장도 그렇게 하라고 한다. 모두들 짐을 챙기고 우의를 뒤집어 썼다. 배낭속의 물건은 각각 비닐봉지에 넣고 밀봉을 해야 빗물이 스며들지 않는다고 일러 주었다.
관리소장은 내가 (최연장자로 보이니까)걱정되는 모양인가 내 주의를 떠나지 않고 이것 저것 챙겨주고 있다. 관리소장께 작별인사를 하고 향적봉에 오르니 비바람에 날아갈 것 같다. 향적봉을 뒤로하고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와 설천봉의 곤도라건물 뒤에 비를 피해 잠깐 인원점검을 한 후 대전의 부부, 서울에서 온 내 또래 아저씨와 함께 앞장 서 길을 개척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천천히 내려오라고 했다. 골짜기마다 온통 폭포로 변했으며 막힌 배수로에서는 물이 치솟아 오른다. 장관이기도 하지만 산이 무섭다는 공포감도 느낀다.
중간쯤 내려오니 비바람이 잦아진다. 대전서 온 아주머니는 뒤를 자꾸 돌아보며 따라오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니 그 사람들은 다시 산으로 올라간 모양같다며 우리도 다시 올라 가잔다. 정상은 비바람이 거세게 불거라고 해도 몹시 아쉬어 한다. 엊저녁에 올라온 대전, 인천, 광주, 서울에서 온 사람들은 밥만 먹고 내려오는 꼴이 됬으니 그럴만도 하겠지. 별로 말이 없던 남편은 집사람은 산에 자주 다녀야 한다고 한다. 부인은 신체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이나 얼굴은 병색이 완연하니 아저씨가 아주머니의 속께나 썪였을 것 같다고 했더니 아주머니는 반색을 하며 벌써 알아 챘다고 남편을 원망한다. 남편이 가정일에 소홀하고 부인의 속을 썩혀 우울중 비슷한 것을 앓고 있는 것 같고 치료차 산에 올라온 모양이다.
“여보소 사람들아! 새겨두고 잊지마소. 평생을 구하여도 歡樂은 덧없으며, 조강지처만한 여자가 또 어디 있겠느냐.” 백년해로를 맹세했으니 부부 모두가 건강하게 살다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아끼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부부간 갈등이나 불협화음의 치료는 산행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손을 맞잡고 얘기를 나누며 자연에 취해 힘든 산길을 오르내리며 고락을 같이하다 보면 갈등은 눈 녹듯 사리지고 부부애는 더욱 굳어진다.
어느새 무주리조트 버스 승강장에 도착하였다. 1시간 정도 기다리니 모든 일행이 무사히 도착하였다. 무주로 가는 버스는 3시에 온다하니 마냥 기다릴 수 없어 대전의 부부, 서울 아저씨와 함께 일반버스가 다니는 큰 도로까지 걷기로 하였다. 빈 승용차는 수없이 지나가지만 손을 들어 좀 태워달라고 해도 못본 척 지나가기만 한다. 트럭운전수만이 우리 일행을 리조트 정문까지 실어다 준다. 걷는 사람이 없으니 큰 길까지 얼마나 걸리지 물어볼 수도 없고 빗줄기는 다시 강해져 바람결에 우의가 날아갈 것 같다.
한참을 걸으니 드디어 일반버스가 지나가는 큰 길이 나왔다. 대전의 부부와 작별인사를 했다. 통성명은 하지 않았어도 짧은 시간이지만 생사고락을 함께 한 탓인지 특히 아주머니는 몹시 아쉬어 하며 커피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다 한다. 1시간 가량 버스를 타고 무주터미날에 도착하니 또 서울아저씨와 이별이다. 처갓집이 전주라 그 곳에다 차를 놓고 왔단다. 간단히 막걸리 한잔으로 석별의 정을 나누고 영동행 완행버스에 올라 탔다.
추석명절 보따리를 들고 갑남을녀들이 오르고 또 내리다 보니 어느덧 영동역에 도착하였다. 내 입석예매표는 14일(일요일) 오후 2시50분 것인데 서울 가는 표가 있을지 걱정된다. 다행히 1시50분 무궁화열차의 입석표가 있어 교환하고 잠시 기다렸다. 태풍으로 부산서 올라오는 모든 열차는 지연되고 있다. 배꼽시계가 식사시간이 지났다고 자꾸 신호를 보내 식당칸에 갔더니 노소남녀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어 발디딜 틈도 없고 식당 종업원이 식사를 다 하신 분은 자리를 비워달라고 해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 열차칸을 연결하는 공간에 신문지 깔고 앉으니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2003년 9월 일
첫댓글 코보상 방가 방가 2일 노고단1박2일 다녀왔는데 산길은 차길내는중 이러다 백두대간도 차로 다닐수있게?... 나무는 잠자는중 매우 썰렁했는데 산행기 이제 지리산은 안가도 될듯 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