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시대는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64년의 기간을 의미한다.
19세기의 2/3에 해당하는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기간 동안 영국은 전무후무한 역사상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다.
영국 고유의 전통은 이 시기에 비로소 정돈이 되었고, 유럽 어느 나라보다 먼저 해외에 눈에 돌렸기 때문에
이즈음에 와서는 세계 곳곳에 영국 식민지를 두어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확보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을 일으킨 국가답게 선구적으로 산업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를 쓸어 담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던 의회 민주주의도 두 개의 당으로 정리되어 정착됐다.
그 이면에 무수한 사회적·정치적 문제들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영국은
누구도 따라 잡을 수 없는 세계 최고의, 최대의 그리고 최선의 국가였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시기, 영국의 군주는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그 상징성만으로 19세기 영국의 행보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고독한 성장기를 거쳐 왕위에 오르다
빅토리아 여왕은 조지 3세의 4번째 아들 켄트공의 딸이다.
조지 3세는 많은 아들을 두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 켄트공이 장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빅토리아 여왕에게 왕위는 그다지 가까운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삼촌들이 하나같이 제대로 된 결혼에서 적장자를 낳지 못하고 설사 낳더라고 모두 요절하는 바람에,
빅토리아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영국 왕실의 정당한 왕위계승자로 남게 되었다.
조지 4세가 정당한 계승자 없이 사망한 이후 왕위는 조지 3세의 3째 아들 윌리엄 4세가 이어받았다.
윌리엄 4세는 혼외에서 낳은 사생아들은 많았지만 정작 정당한 결혼에서 낳은 아이들은 모두 죽어
결국 읠리엄 4세 사후 영국 왕위는 빅토리아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 켄트공은 독일 작센 코버그 잘펠트의 공주와 결혼해 빅토리아 여왕을 낳았다.
켄트공은 빅토리아 여왕이 두 살이 되던 해에 사망하고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경직되고 엄한 성격의 사람이었는데 딸 빅토리아 여왕에 대해서도 상당히 엄격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는 시댁인 영국 왕실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녀는 딸이 장차 여왕이 되면 자신이 섭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생각에 빅토리아 여왕을 독점하고,
제왕학을 가르치기보다는 자신의 말에 순종적인 딸로 교육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와 어머니의 정부인 존 콘로이에 의해 고립적이고 고독한 성장기를 보냈다.
이때의 기억이 빅토리아 여왕에게는 큰 상처가 되어 훗날 그녀가 여왕이 되었을 때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를 멀리하였고
존 콘로이를 해고하였다.
그녀가 어린 시절 유일하게 마음으로 신뢰한 사람은 외삼촌인 레오폴드였다.
훗날 벨기에의 국왕이 되는 레오폴드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는 사람이었고,
결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생의 반려자를 찾아주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