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대외채무 지불정지를 선언하면서 아시아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유럽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이제 대공황 입구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1930년대에도 한 나라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전세계로 급속히 전염되면서 세계대공황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경제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대공황의 세계 1929-1939'(부키 출판사,박명섭 번역)라는 저서에서 1929년 뉴욕증시 대폭락이 어떤경로를 통해 국제적으로 확산됐는지를 규명하고 있다.
`1929년 대붕락'을 쓴 갤브레이스 교수와 마찬가지로 킨들버거는 증시폭락자체보다 그 이후의 부적절한 대응이 위기를 심화시켰다고 지적한다.
대공황 때 나타난 ▲각국 수입의 급격한 위축에 따른 디플레이션 ▲금융시스템 불안 및 이로 인한 신용경색 ▲개도국으로부터의 자금이탈 ▲과도한 국제채무부담 등은 지금 아시아와 유럽 금융위기에서 벌어지고있는 현상과 비슷하다.
킨들버거는 국제경제시스템에 발생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도력이 필요한데 영국은 능력을 상실했고 미국은 지도력을 발휘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 대공황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수입축소와 디플레이션
뉴욕증시 대폭락 이후 소비심리가 위축되면서 자동차 생산대수는 1929년 8월 44만대에서 그해 12월 9만2500대로 떨어졌다. 킨들버거는 이러한 공업생산하락보다 수입축소가 갖는 국제적 의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국의 수입액은 증시폭락 후 불과 4개월만에 20% 이상 감소했다. 소비가 움츠려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고후버대통령이 국내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52%나 대폭 올렸기 때문이다.
독일도 경제난을 내세워 전쟁배상금을 탕감받을 목적으로 디플레 정책을 채택했다. 영국 프랑스도 금본위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긴축기조로 나갔다. 그 결과 교역상대국끼리 서로 수입을 줄여 세계무역량이 급격히 줄어드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1929년에 30억달러에 육박하던 세계 75개국의 수입액은 1931년초에 18억달러 수준으로 다시 1933년초에 9억9천만달러로 4년 사이에 3분의1 밑으로 떨어졌다.
현재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도 수입을 대폭 줄이고 있다.한국 태국 인도네시아 등은 수입을30-40%까지 줄였고 일본도 17%이상 줄였다.
이렇게 시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는 실물경제가 돌파구를 찾지 못해 악화일로를 걸을 수 밖에 없다.
금융시스템 불안과 개도국으로부터의 자금이탈
아시아 금융위기는 90년대 내내 아시아로 해외자금이 급격히 유입되다가 급격히 빠져나가면서 벌어졌다.
1930년대 대공황도 미국이 유럽과 라틴아메리카로 대출을 1920년대 후반 급격히 늘리다가 갑자기 중단되면서 진행됐다.뉴욕증시붕락 전에도 유럽과 라틴아메리카는 자금유출압력을 받았다. 미국증시가 너무 호황을 보이기 때문에 돈이 다시 미국주식시장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증시폭락 이후에는 잠재적 차입국들이 신용을 완전히 잃었다. 미국으로부터 돈이 전혀 흘러나가지않으면서 다른 나라들은 신용경색에 직면했다.
영국은 파운드화 블럭을,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금본위제 블럭을 별도로 만들면서 금융위기를 헤쳐나가려노력했다. 개도국들은 주요수출품인 1차상품 가격이 폭락하면서 아무런 대책없이 대공황의 찬바람을 가장 세게 맞았다.
지금도 세계의 돈이 미국으로 몰리고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고 있다. 러시아 사태로 유럽시장이 불안해지면서 국제금융시장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
지도력 부재
킨들버거는 "1929년에 영국은 (지도력을 발휘할) 능력이 없었고 미국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모든 나라가 자국의 개별적인 국익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전환했을 때 세계전체의 이익은 고갈되었고 그와 함께 각국의 개별적 이익도 사라져 버렸다"고 말한다.
킨들버거에 따르면 위기상황의 국제경제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지도국이 타국으로 하여금 규칙을 준수하게 하고 시스템을 위한 과도한 몫의 부담을 떠맡으며 특히 곤란한 사태를 맞아서는 잉여상품의 인수, 국제적 투자자본의 유지 및 어음할인 등으로 시스템을 뒷받침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 금의 3분의1을 갖고 있었는데도 달러가치 유지에만 급급했고 해외대출과 수입을 동시에 줄여나갔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들어와서도 균형예산 기조가 유지돼다가 재정확대에 의한 케인스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것은 1938년부터였다.
대공황 어떻게 막아야 하나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의 경험은 적극적으로 돈 풀고 공공사업을 일으키는 것 이외에는 경제위기가 공황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뚜렷한 대안이 없다고 말해준다.킨들버거는 주요국들이 "존재하지 않는 인플레이션과 싸웠다"며 사태악화원인을 꼬집고 "세계의 가격을 인상하는 것이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일"이었다고 지적한다.대공황기에 상대적으로 경제가 빨리 회복된 스웨덴 일본 영국 등의 경험은 킨들버거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스웨덴 일본 영국 등의 경험
스웨덴은 뉴욕증시폭락 직후 유일하게 공업생산이 증가한 나라이다.
스웨덴은 일찍부터 `비정통적인' 예산정책을 시행했다. 정부예산을 경상지출과 자본지출로 구분하는 방식을 사용해서 공공사업비를 많이 계상했다. 또 파운드에 대한 환율을 대폭적으로 절하해서 수출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킨들버거는 작은 나라의 장점이 `보복'을 받지 않고 통화를 절하시킬 수 있는데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다카하시 대장상이 6.57%에 달하던 일본은행 할인율을 2.29%까지 인하하고 재정지출을 매년 20%씩 늘렸다. 킨들버거는 "정치인 다카하시가 변동환율제에서 적자재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다"며 "케인스의 승수메커니즘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부양책은 경기를 회복시키기에는 충분했지만 `무제한의 군비지출'을 요구하는 군국주의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해 다카하시는 결국 암살당한다.)
처음에 긴축기조로 나가던 영국은 금본위제를 포기한 뒤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을 사용해서 성공한 케이스다. 영란은행의 재할인율은 1932년 9월 6%에서 다음해 6월에는 2%까지 떨어졌다. 이러한 저금리정책은 주택건설을 자극해서 경기회복을 선도했다.1931년에서 1933년 사이에 민간건축이 70%나 증가했고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1929년 수준의 공업생산을 회복한 나라가 됐다.
디플레 정책을 취하던 독일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정책을 바꿔 군비증강 및 아우토방건설 등 공공사업을 벌이면서 빠른 속도로 경기회복의 길에 들어섰다.
미국의 지도력이 필요하다
현재 금융위기국들이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사용하는데는 많은 제약이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부양책을 잘못 사용할 경우 또다시 환공격을 받아 외환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점이다.킨들버거는 `경쟁적 평가절하'가 가져온 폐해를 지적하면서도 모든 나라들이 금에 대해 `일반적 평가절하'를 하는 것은 경기회복에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세계경제에 신용을 추가로 공급해주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1930년대 대공황기와 비교했을 때 현재 세계경제의 장점은 금본위제라는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미국이 국내 인플레를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고 달러공급을 확대하면 다른 나라들이 함께 통화를 확대할 여지가 생긴다.
MIT대학의 폴 크루그먼 교수는 일본에게 "미친 듯이 돈을 풀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금융환경에서는 초강대국 일본이라도 돈을 마구 풀 경우 엔화가 폭락할 수 있다. 오히려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이 주도해서 세계수요 확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선결과제다. 다른 나라들도 물가안정에 지나치게 집착하지말고 확대정책으로 발상전환을 해야 한다.
후버의 대공황대책 무엇이 문제였나
일본 소니사의 오가 노리오 회장은 지난주 "하시모토총리의 정책대응이 대공황직전 후버대통령과 똑같다"며 "정책당국자들이 빨리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면 일본열도가 침몰할 것"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일본기업인들이 정부를 이렇게 대놓고 비판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에 금융시장에 주는 충격도 컸다. 노리오회장의 발언은 지난 주말 동경증시폭락과 엔화급락의 기폭제였다.
그러면 하시모토의 정책과 후버의 정책은 무엇이 비슷한가. 후버는 왜 미국경제가 대공황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지 못했는가.
역사가 들려주는 경험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갤브레이스 교수의 고전적 저서 "1929년 대붕락(The Great Crash 1929)"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펀더멘틀 건전하다"와 늑장 대응
1928년 대통령에 취임한 허버트 후버는 뉴욕주식시장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1925년부터 지나친 투기를 우려한 보수적 정치인이다.그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도 투기조짐에 대한 조사를 여러차례 시켰다. 그러나 1929년 10월 뉴욕시장이 사상 최악의 폭락사태를 빚을 때까지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는 않았다.주식시장이곤두박질치자 후버대통령의 대응은 `펀더멘틀론(論)'이었다. 그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우리나라의 핵심경제활동(fundamental business of the country)은 건전하다."고 강조했다.
후버의 성명을 받아 과거 10년동안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던 록펠러가 방송을 자청해서 "미국경제가 건실하다고 믿기 때문에 나와 내 아들은 최근 며칠간 주식을 사모으고 있다."고 발표했다.
포드,듀퐁,슬로언 등 당시 내놓라 하는 기업인들도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펀더멘틀론을 펼쳤고 이 모임의 한 참석자는 "노동력부족이 다시 일어날까 우려될 정도였다"고 술회했다.
펀더멘틀론은 투자가들의 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한 측면이 물론 있다. 그러나 후버 스스로 시장 혼란이 일시적 현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규모 비상대책을 제때 내놓는데 실패했다.
건전재정 집착
당대의 도그마에 따라 후버대통령은 균형재정을 추구했다.
하시모토총리가 경기움직임을 간과하고 재정개혁을 앞세우면서 지난해 소비세율을 3%에서 5%로 인상시킨 것과 유사하다.후버는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경기가 떨어지는데도 재정을 활용하는 대책을 전혀 내놓지않았다. 당시 경제전문가들 중에서 재정을 통한 경기부양을 주장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그러나 경기가 워낙 나빠지자 후버대통령도 수요를 진작시키기 위해 감세(減稅)를 단행했다.
그렇지만 방향을 잘못 잡았다. 세율인하폭은 컸지만 대상이 저소득층에 집중됐다. 이들은 총수요확대에 별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도 고소득층의 세율을 낮추는 것이 경기회복에는 더 나았다.
지나친 인플레 우려
금본위주의에 입각한 통화운영방식도 사태를 악화시키는데 일조했다.
후버대통령 등 정책담당자들의 관심은 당시 디플레보다 인플레 가능성에 더 쏠려 있었다. 주가대폭락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5년에 걸쳐 금이 미국으로 대량 유입됐기 때문이다.주식시장이 폭락한 이후인 1931년이나 1932년까지도 후버정부에서 디플레를 우려한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인플레 우려 때문에 균형재정을 더 강조했다.이에 따라 금리를 낮추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고 환율도 조정하지 않았다.
대통령선거에서 루스벨트에게 패배한 후에도 후버는 당선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통화가치변동이 절대 없을 것이라고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경제를 안정시키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그러나 갤브레이스교수는 "불황기에 통화정책은 의지하기에 연약한 갈대이지만 당시 사고방식은 이렇게 약한 무기조차 사용하는 것을 금기시했다"며 "생각(thought)에 대한 도그마(dogma)의 완전한 승리"라고 표현했다.
대공황 예방 가능했나?
갤브레이스교수는 미국주식시장이 폭등할 때 이를 조절할 수단은 별로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후버가주식시장 진정책을 내놓았으면 주식시장붕락이 앞당겨졌을 뿐 경제의 연착륙(軟着陸)을 유도하지는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갤브레이스교수는 그러나 주식시장붕락이 일어난 뒤 대불황이 10년 가까이 지속되게끔 한데는 정책실패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균형재정과 인플레억제라는 도그마 때문에 상황이 악화됐다는 것이다.
1930대 대공황의 상황과 현재 일본의 상황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일본정부는 대규모 내수진작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노리오 회장은 공공사업을 일으키는 것보다 세율을 낮추는 것이 내수진작에 더 바람직하다고 강조한다.긴축 기조 속에 각종 세율을 대폭 올리는 한국의 정책도 후버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역적 케인지언 解法 필요하다 : 동아시아 금융-무역협력으로 시장확대해야"
신장섭(申璋燮),김균 외 (1998)
위기, 그리고 대전환: 새로운 한국경제의 패러다임을 찾아, 당대출판사
1. 머리말
한국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에 들어간 이후 실물경제가 최악의 침체를 겪고 있는 가운데 '구조조정'과 '개혁'의 소동돌이 속에 놓여 있다.
IMF체제 반년이 경과하면서 한국정부는 긴축정책에서 일부 양보를 얻어냈지만 IMF와 국제금융가에서 처음부터 요구해오던 '긴축 속의 개혁과 개방'이라는 정책기조에는 큰 변화가 없다. 금융경색은 지속되는 가운데 기업과 금융기관의 퇴출 및 합병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외국자본 유치도 적극 추진되고 있다.이러한 노력의 성과는 일부 나타나고 있다.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의 외자유치협상도 일부 결실을 맺고 있고 의외로 빨리 원화환율도 떨어지고 있다. 지난 4월초 아시아-유럽회의(ASEM)나 6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방미(訪美)에서 나타나듯 국제사회는 한국의 개혁의지와 노력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구조조정의 큰 그림이 잘못 그려져 있기 때문에 한국경제가 파국으로 치닫거나장기불황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그림의 첫번째는 규범적 개혁이다. '세계적 기준(Global Standard)'에 빨리 맞춘다는 명분하에 한국경제의 발전단계와 특성을 무시한 급진적 조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면서 오히려 기업과 금융부문의 부실을 더 크게 늘리고 있다.
둘째, 외국자본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걸면서 위기극복의 주체세력이 잘못 설정됐다. 외채부담을 덜기 위해, 또 기업과 금융부문에 새로운 자금을 수혈하기 위해 외자를 유치해야할 필요성은 물론 있다. 그러나 외국자본은 위기극복의 보조세력일 뿐이다. 금융위기로 인한 불확실성을 빨리 해소하기 위한 국내세력간 합의와 협조의 틀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한 상태에서 외국자본에 필요 이상의 기대를 걸면서 위기극복이 지체되고 있다.
세째, 과도한 긴축프로그램의 폐해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애초부터 긴축은 민간부문 재무구조악화에 의한 자금이탈이라는 현경제위기의 원인에 맞는 처방이 절대 못 됐다. IMF가 뒤늦게 긴축을완화해주는 방향으로 선회하고는 있지만 이미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재무구조는 더 악화됐고 동아시아 역내시장이 급격히 축소돼 동아시아경제는 '공황'의 길목에 들어서게 했다.
따라서 필자는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 경제가 공황의 늪으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기존 프로그램을 보완하거나 수정하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위기극복 대체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역적 케인지언 해법(Regional Keynesian Solution)'이라고 이름 붙인 필자의 제안은 동아시아 주변국들간 협력에 의해 환율을 안정시키는 체제를 구축하고 그 바탕 위에서 개혁의 완급을 조절하며 동아시아 역내무역을 확대시켜 총수요(시장)를 늘리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2. 고전적 금융위기 처방과 편향된 환율안정논리
현재 정부가 시행하고 있고 국제금융가에서 요구하고 있는 금융위기 극복대책은 "과감한 개혁과 긴축 → 외국인 신뢰회복 → 외국자본유입 → 환율안정 및 금리하락 → 성장회복"의 논리적 순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고전적 외환위기 극복시나리오의 핵심에는 '환율안정' 논리가 있다. 외환위기국의 환율이 불안해진 것은 시장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므로 시장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개혁조치들을 취하고 긴축을 통해 거품을 빼야 외국자본이 들어오면서 환율이 다시 안정된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자면 외환시장은 '국가경제에 대한 가장 공정한 심판관'이 된다. 개별국가들은 외환시장의 결정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고 좋은 처분이 내려지도록 '시장'이 원하는 모든 일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고전적 논리는 외환시장의 과잉반응(overshooting)과 그로 인한 실물경제 충격이라는 현실에 대해눈감고 있다. 97년 중반 달러당 800원대에 있던 원화환율이 고평가되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을 때만 해도연구기관들에서 적정환율이라고 계산한 것이 기껏해야 달러당 1,000원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원화환율은지난해 12월말 한때 2,000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올 상반기 내내 달러당 1,300-1,400원선에서 머물러 있었다.
말레이시아, 태국 등도 한 때 통화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진 뒤 지금은 외환위기 전에 비해 50%가량 절하된수준에 머물러 있다. 인도네시아는 루피아화가 환란 전 5분의 1수준까지 폭락해 있다. 이렇게 통화가치가 폭락한데는 이들 금융위기국이 경제정책이나 기업경영 등에서 잘못한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한국의 경우94, 95년의 호황기를 거치면서도 기업들의 재무구조는 계속 악화됐다. 금융기관 감독기능도 상당히 구멍나 있었다. 한보사태 이후의 금융경색과 부도사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태국의 경우는 경상적자 규모가 컸고 금융기관의 부동산 과다대출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인도네시아도 기업부문에서 과다한 해외차입이라는 잠재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아시아지역에서 위기가 진행된 과정을 보면 외환시장이 과잉반응을 보이면서 각국 경제가 추가적으로 악화됐고 외환위기가 경제위기로 비화된 측면도 있다. 개별국가의 '잘못'에 비해 외환시장이 주는 '징벌'이 지나친 느낌이다.
국제금융기구(IIF)에 따르면 현재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의 동아시아 5개국에 96년 한 해 동안 유입된 민간자본은 순증(純增)기준으로 930억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97년에는 121억달러가 유출됐다. 1년 사이에 1,051억달러의 순자금변동이 생긴 것이다.(표 참조) 한국의 경우는 97년 한해동안 외국금융기관들이 단기대출금 376억달러를 회수했다. 해외로부터 자금이 너무 많이 몰려 들어서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자금기근(饑饉)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렇게 자금이 대량으로 급격히 움직이는 것은 국가간 금리차나 수익률차를 노리고 세계시장을 부유하는 재정거래(裁定去來, arbitrage)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여러 국가에 자금을 이동시키는 포트폴리오 투자결정이 각 나라의 실물경제상태를 정확히 반영해서 이루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금융시장에서의 군집심리(群集心理 Herd Mentality)도 크게 작용한다. 특히 환율에 대한 예상이 수익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한 번 환율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태를 추가로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해외투자가 입장에서 볼 때 처음에는 해당국가 경제가 나빠 보였기 때문에 일부 자금회수에 나섰더라도, 일단 자금이 이탈하면 환율이 올라가고 이에 따라 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의 지급능력이 앞으로 더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되기 때문에 가능한 돈을 빨리 회수하려고 한다. 많은 투자가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자금회수→환율급등→지급능력 추가약화'의 악순환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 헤지펀드 등 환투기세력이 들어오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
한국의 경우 외환위기 이전에도 물론 금융기관의 부실이 문제됐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부실채권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주목해야 한다. 금융계에서는 부실채권이 올해 중 최소한 2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살로먼 브러더스 등 외국계 금융기관에서는 총대출의 20%가량이 부실채권이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동남아국가중 말레이시아는 환율 때문에 부실이 늘어난 대표적 케이스다. 태국과 달리 말레이시아는 금융부문이 상당히 건전한 편이었다. 80년대 중반 한 차례 은행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는 금융기관 구조조정을 이미 해놓은 상태였다.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금융자율화 과정에서도 한국이나 태국이 종금사 등에 새로운 인허가를 남발하면서 금융산업이 팽창한 것과 달리 기존 금융기관들이 영업을 확장토록 하면서 중앙은행인 방크네가라가 감독기능을 강화했다. 그러나 작년초 4%에 불과하던 부실채권비율이 작년 중반부터 링깃화가 폭락하면서 연말 10%에 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올해말에는 이 비율이 20%까지 올라갈 것이라 예상되고 있다.
고전적 시나리오에서는 환율이 실물부문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단선적 인과관계만이 고려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외환시장의 과잉반응으로 인해 실물부문이 충격을 받는 일이 많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개를 흔든다"는 말이 나온다.
3. 규범적 개혁의 폐해
한편 외환시장의 과잉반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상태에서 '시장'이 요구하는대로 개혁을 해나가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외환위기로 큰 비용을 지불했는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엄청난 비용을 추가로 지불하는 일이 된다. IMF프로그램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처방은 긴축기조하의 급진적 개혁을 통한 경제회생을 내걸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과도한 긴축과 규범적 개혁으로 인해 실물경제가 붕괴위기로 몰리고 있다.
먼저 개혁프로그램을 살펴보자. 현재 금융개혁의 규범적 기준은 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이하 BIS비율)이고 기업개혁의 기준은 재벌구조해체 및 부채비율축소로 집약되어 있다. 그 내용은 영미(英美)식 경제틀에 입각한 '세계적 기준(Global Standard)'에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을 빨리 맞추겠다는 것이다.
BIS비율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금융기관의 건전성 기준이므로 대외신뢰도가 떨어져 있는 국내금융기관들이 이 비율을 높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왜 그것이 8%이상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뚜렷하지 않다. 예를 들어 정부가 신용을 보증하는 경우에는 그 비율이 5% 밑으로 떨어지더라도 예금지급이나 채권회수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금융위기국의 금융기관들이 'BIS비율 8%'를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지켜야 하는 것으로 요구받고 이 비율 맞추기에만 급급하면서 무시할 수 없는 부작용들이 나타나고 있다. BIS기준에서는 기업대출에 위험가중치가 붙기 때문에 기업대출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그래서 경제전체로 봐서는 기업대출을 늘리는 것이 필수적인데 금융기관들이 기업대출을 하지 않으려 하고 기존 대출금까지 회수하는 모순이나타난다. 당장은 수익성도 영업기준이 되지 못한다. 수출금융이 대표적인 경우다. 원리금 회수전망이 아무리 뚜렷해도 수출금융은 100% 위험자산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은행이 지원하지 않으려 한다. 그대신 현찰을 쥐고 콜시장에서 초단기로 굴리거나 한국은행 환매채(R/P)나 매입한다.
그래서 장기신용은행 등 초우량으로 분류되는 은행들조차 현찰을 1조원 이상 보유하고 있는 '손실'을 감수하고 있다. 재무구조가 튼튼하고 수출이 잘 되고 있어 현금흐름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중견 H기업조차 올들어 200억원의 돈을 금융권으로부터 회수당했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지난 4월부터 "은행들이 BIS비율 맞추기, 대손충당금 쌓기 등에 쫓기면서 본격적인 여신기피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5월 들어서는 은행예금이 사상최대로 늘어났지만 은행대출이 1,700억원 줄어드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정부에서 IMF 긴축을 완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IMF가 합의해준 본원통화마저도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매달 4-5조원씩 한국은행에서 낮잠자고 있다.
금융기관퇴출 및 합병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금융경색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금융기관들이 합병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BIS비율 8%를 맞췄어도 이를 더 높이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합병을 통해 대형금융기관이 탄생하면 다른 건실한 금융기관도 위협을 느끼게 돼 쉽게 기업대출을 늘릴 수 없다. 금융권과 5대그룹에는 자금이 넘쳐 콜금리, 회사채수익률 등 시장지표 금리들이 하락하고 있지만 일반 기업들이 느끼는 금융경색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정부에서는 9월말까지 금융권 구조조정을 일단락짓겠다며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이렇게 실물경제의 요구와 금융권 행태간에 괴리가 나타나는 기간이 쉽게 단축되지는 않을 것 같다. 예를 들어 한일은행과상업은행이 8월초 합병을 발표했지만 합병이 완료될 때까지는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정부가 자금을 투입해서 지원해준다 하더라도 이 자금은 BIS비율 높이는데 투입될 뿐 기업대출을 늘리는데 쓰이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금융권 합병은 금융기관들의 생존이라는 목표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고 생사의 판단에서가장 중요시되는 것이 BIS비율인 이상 BIS비율 맞추기에 전력할 수밖에 없다. 정부 또한 BIS비율이라는 규범적 기준에 따라 금융개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도중에 기준을 유연하게 완화하는 것이 상당히어려워져 있는 상황이다.
금융개혁과 함께 진행되는 기업개혁 또한 경제의 불확실성을 오히려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정부의 기본시각은 차입위주경영이 경제위기를 불러왔고 그 기반에는 재벌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기업살생부(殺生簿)논의에서 나타나듯 정부는 계열사 보조에 의해 연명하는 기업은 퇴출대상에 포함시키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명하고 있다. 그래서 '부당내부거래'에 대한 조사도 한층 강화했고 5대 재벌에 대해 700억원 이상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재벌계열사라도 경쟁력 있는 것만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벌이 현금융위기에 주된 원인제공자였는지, 또 재벌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금융위기를 돌파하는데 바람직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재벌들이 금융권에서 자금을 끌어들이는데 상대적으로 유리한것은 사실이다. 또 내부거래를 통해 '부당하게' 경쟁력을 키웠을 수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과다한 투자를 한 측면도 있다. 그렇지만 재벌구조가 한국기업들이 대외적으로 경쟁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 왔다는긍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다국적기업들은 '규모와 범위(Scale and Scope)'를 활용하기 위한 세계적인 경쟁구도 속에 놓여 있다. 재벌의 공과는 현재 한국경제가 처한 여건 및 발전단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또 '부실'이 명백하게 눈에 보이지만 재벌계열사이기 때문에 생존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개혁논리에 휩싸여 무조건 '잘라내기'식으로 접근하면 구조조정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을 더 키울 가능성이 있다. 이들 계열사들이 지급보증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작년 기아사태도 기아자동차는 건실한 편이었지만 기아특수강, 기산 등에 서준 지급보증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질질 끌려오고 있다. 기아특수강과 기산을 그냥 파산처리하면 기아자동차도 청산절차를 밟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해결이 지체되고 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재벌들도 현재 부실해져 있는 기업들을 즉각 파산처리하면 우량기업들이 따라 넘어질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는 우량기업의 자금이 부실기업에 지원돼서 동반부실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리할 기업을 빨리 정리해야 한다는 '규범'을 내세운다. 그러나 기업의 현실은 이렇게 두부 자르듯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정부도 은행권 구조조정에 '자산부채양도(P&A, Purchase & Assumption)방식'을 택했다. 은행을 파산시키면 예금원리금보장 등 국고에서 지불해야 할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늘고 예금인출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재벌기업들도 그동안 그룹단위로 행동해왔기 때문에 계열기업을 파산시킬 때 부담해야할 비용이 훨씬 커진다. 따라서 은행의 P&A방식과 유사하게 자체적으로 인수합병(M&A), 자산매각 등을통해 구조조정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금융권이 나서서 지급보증을 해소시켜줄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룹단위로 행동해오던 현실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부채비율 200%까지 낮추기'는 현정부가 추진하는 가장 경직적이며 비현실적인 개혁정책이다.
고금리가 지속되고 성장이 둔화되는 상황에서 부채비율이 높은 것은 치명적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채비율을 낮출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가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높은 부채비율을 죄악시하고 경직적인 부채비율감축목표를 제시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바람직하지 못하다. 일단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은 내재가치나 성장잠재력 등을 떠나 도매금으로 부실기업이라 낙인찍힌다.
더 큰 문제는 국가신뢰도의 손상이다. 부채비율은 한국경제의 발전단계 및 발전특성과 상당부분 연결되어있는데 이를 사상(捨象)하고 선진국과 일 대 일로 비교하는 것은 한국경제의 강점조차 깡그리 부정하는 일이 된다.
미국의 부채비율은 96년말 약 120%이지만 독일은 330%내외이다. 일본은 70년대 중반 부채비율이 500%가까이 가다가 지속적으로 떨어져 부채비율 200%를 달성하는데 20여년 걸렸다. 대만은 부채비율이 낮지만 한국과 달리 경공업위주로 성장했고 국민당이 본토에서 넘어올 때 가져온 금(金)을 기반으로 자본축적이 이루어졌다는 차이가 있다.
국내 30대재벌의 부채비율이 96년말 387%에서 97년말 519%로 갑자기 상승한데는 계속되는 채산성악화 이외에 외환위기로 인한 환율급등과 고금리라는 요인이 있었다. 96년의 부채비율만 놓고 봤을 때는 독일과 비교해서 측별히 높다고 할 수 없다. 지금과 같이 국가신뢰도가 문제되는 상황에서는 정부가 오히려 국내기업들의 부채비율이 높아지게 된 사정을 적극 옹호해주면서 낮춰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지 이를죄악시하는 것은 기업들의 대외신인도를 더 떨어뜨리는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금융감독위원회 측은 애초 부채비율 200%안을 만들 때 경제구조가 한국과 가장 비슷한 일본을 벤치마킹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년말까지 부채비율을 200%로 낮추라는 것은 1년 반 동안에 일본만큼 선진국이 되라는 주문과 다를 바 없다.
4. 외국자본의 역할과 한계
정부가 이렇게 다소 무리한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외국인들의 신뢰를 회복해서 외국자본을 유치하겠다는 목적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6월 미국방문에 앞서 5대재벌 소속 기업도 퇴출명단에 포함시키라고 지시한 것도 기업개혁이 지지부진하다는 외국투자가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외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국제금융가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금줄이 요구하는 수준의 기업투명성을 갖추고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필수적이다. 외자유입이 경제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외국자본에 지나치게 많은 기대를 거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외국자본은 순수하게 상업적 판단에 의해 유입여부를 결정할 뿐 위기극복의 주체세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국내경제에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외국자본은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의 위험부담을 할 것인지 아니면 구조조정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불확실성이 상당부분 제거된 뒤 들어올 것인지를 판단하게 된다. 현재까지 외자유치 협상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 대다수 외국자본은 후자의 선택을 하는 경향이다. 또 불확실성을 떠안는 경우에는 위험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격을 대폭 낮추거나 다른 위험회피 수단을 마련한다.
그래서 제너럴 모터스(GM) 등 외국회사들은 합작조건으로 부채탕감을 요구한다. 한라그룹 구조조정을 주도하고 있는 로스차일드는 부채의 60%이상을 탕감해줘야 돈을 들여와서 지급보증도 없고 빚도 없는 '깨끗한' 회사를 만들겠다며 채권단과 협상했다. 하나은행의 경우는 자본참여하려는 국제금융공사(IFC)가 국내대기업대출에 대해 20%의 대손충당금을 추가로 쌓으라고 요구했다. 위험을 짊어지고 투자하기보다는 위험에 대비해놓고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동산매입협상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10-20% 가격을 제시하며 헐값으로 물건을 사려 한다.
외자유치협상이 이렇게 진행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외국자본은 급할 일이 없는 반면 국내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은 돈이 없어 애가 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시아 각국들이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너도나도 매물을 내놓아 외국자본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도 크게 넓어져 있다. 구태여 위험부담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국 기업도산위험, 부실채권누적 등으로 야기되는 국내경제의 불확실성을 낮추기 위해 위험부담을 할 주체는 국내경제상황에 이해관계가 절대적으로 걸려 있는 정책당국과 국내기업, 금융기관들이다. 외국자본은 이러한 구조조정과정에서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다. 외국자본은 한국경제의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제거되고 회복궤도에 들어서는 것이 보일 때에나 대거 들어오지 반대로 외국자본이 대거 들어왔기 때문에 한국경제의 불확실성이 해소되면서 경제상황이 좋아질 가능성은 많지 않다.
따라서 외국자본유치보다 선결돼야할 일은 국내 경제주체들끼리 합심해서 경제전체의 불확실성을 낮추는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 중 중요한 것은 기업들이 생존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줘 부실채권이 추가로 누적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개혁'이 아무리 많이 이루어졌다 해도 경제상황이 계속 악화되면 외국자본이 국내에 들어오기를 멈추게 된다. 조셉 스티글리츠 세계은행 수석연구원이 "아시아국가들이 경제개혁을 해나가는 가운데 거시지표를 유념해서 살펴봐야 한다"고 충고한 것도 경제여건이 계속 나빠지면 개혁자체가 의미없어지기 때문이다.
5. 동아시아의 총수요 위축: 아시아 공황의 그림자
경직적인 개혁프로그램과 결합된 IMF의 긴축프로그램은 실물경제 붕괴를 촉진하고 있다. 긴축은 애초부터 아시아 금융위기의 원인에 맞는 처방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에서 외국자본이 급격히 빠져나간 이유는 해당국의 위험도를 갑자기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지 금리수준이 낮기 때문이 아니다. 민간부문 부채가 문제됐을 뿐 동아시아국가들의 재정은 선진국보다 훨씬 건전한 상태였다.
이렇게 빠져 나간 자금은 갑자기 금리를 높이고 재정을 졸라맨다고 되돌아오지 않는다. 경제의 불확실성을 줄여 나가고 투자위험도를 낮추는 것이 정공법이다. 긴축은 기업부도위험을 높이고 금융기관들이 기업대출에 더 몸을 사리게 만들어 연쇄부도와 부실채권누적의 악순환을 가져오면서 경제내에 불확실성을 높일 뿐이다.
물론 인플레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긴축이 필요하다. 그러나 과거 중남미의 경우와 달리 물가상승이 방만한 통화운용이 아니라 환율급등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긴축의 필요성이 그다지 크지는 않다.
긴축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가장 큰 결함은 현재의 금융위기가 한 나라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범아시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동남아와 한국이 고꾸라졌고 일본도 흔들거리고 있다. 중국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경기침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홍콩 또한 올 상반기에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아시아지역 경제가 전체적으로 나빠지면 결과는 총수요, 즉 시장의 급격한 위축으로 나타난다.
통계를 들여다보면 총수요위축은 이미 상당히 심각한 수준까지 진행되어 있다. 한국은 5월부터 3개월째 수출이 줄어들고 있다. 연초에 금모아서 수출했던 것을 빼면 상반기 7개월동안 수출증가율이 마이너스 1.4%이다. 60년대초 경제개발을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다른 나라들도 정도 차이만 있지 비슷하다. 중국(8.5%,1-5월)만이 플러스일 뿐 일본(-6.8%,1-6월) 대만(-7.1%,1-6월) 홍콩(-2.0%,1-5월) 싱가폴(-10.7%,1-5월) 태국(-5.7%,1-4월) 말레이시아(-8.8%,1-4월) 등 모두 수출이 마이너스이다.
이렇게 수출이 줄어든 것은 금융시스템이 마비돼 수출금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아시아국가들끼리 수입을 줄였기 때문이다. 일본(-17.7%) 한국(-36.1%) 중국(-11.6%) 홍콩(-5.0%) 태국(-41.3%) 말레이시아(-20.4%) 인도네시아(-32.4%) 등 모든 동아시아국가들이 상반기에 수입을 대폭 줄였다.
모두들 미국이나 유럽에 적극 수출했지만 서로 수입을 줄여 전체 수출이 줄어든 것이다. 한국도 환율상승의 영향으로 미국이나 유럽지역으로의 수출은 큰폭으로 늘렸지만 동아시아지역으로의 수출이 대폭 감소하면서 전체수출증가율을 깍아내렸다.
IMF프로그램에 대응해서 김우중(金宇中) 차기 전경련 회장을 비롯한 재계에서 내놓고 있는 대안은 수출을 통한 금융위기 단기돌파책이라 할 수 있다. 정부의 적극적인 수출금융지원을 통해 올해중 수출을 15%가량 늘리고 수입은 23%가량 감소시켜 기존설비의 가동률을 높이면 올해중 500억달러의 경상수지흑자를 볼 수 있고 99년까지 이런 체제를 유지하면 500억달러의 흑자를 더해 외환보유고를 1,000억달러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으므로 IMF관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7월말까지의 잠정통계를 보면 수출이 1%(금수출 포함)밖에 늘지 않았고 수입은 예상보다 큰 37.2% 감소를 보여 231억달러의 무역흑자를 봤다. 하반기에 수출금융이 제대로 지원되기 시작하고 금융시스템이 일부 회복된다 하더라도 현재의 추세가 반전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미국이나 유럽도 성장률이 떨어져 갈수록 이 지역으로의 수출증가율도 감소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의 수출증가율은 1.4분기에 14.7%였으나 2.4분기에 3.5%로 떨어졌다. 유럽(EU)으로의 수출증가율도 1.4분기 22.0%에서 2.4분기에 7.0%로 감소했다. 무역흑자가 정부 예상치보다 훨씬 큰 400억달러에 이를 수도 있겠지만 이같은 경상수지개선이 전적으로 수입감소에 의존해서는 경제가 극도의 축소균형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총수요가 급격히 위축되는 상황에서는 개별국가에서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 오히려 경제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1930년대 대공황 때 '경쟁적 평가절하(Competitive Devaluation)'를 통한 '근린궁핍화(近隣窮乏化, Beggar-Thy- Neighbor)'가 진행됐던 것처럼 지역국가들끼리 서로 수입시장을 줄여 공장가동률을 크게 떨어뜨리고 기업들이 도산위험에 더 강하게 노출되면서 부실채권을 늘려 다시 총수요위축을 불러오는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멕시코 사태는 국지화된 금융위기였다. 따라서 긴축을 했더라도 이웃나라 미국에 수출을 하면서 경제를 돌아가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금융위기가 범아시아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수출만으로돌파구를 찾기 어렵게 되어 있다.
6. 지역적 케인지언 해법의 모색
총수요위축을 막기 위해서는 각국이 내수를 확대하면서 수입과 수출을 함께 늘리는 수 밖에 없다. 경제학자 케인즈는 1930년대 대공황 때 "소비가 미덕(美德)"이라고 강조했다. 1990년대말 아시아 대불황기에는 "수입이 미덕(美德)"이다. 나 혼자만 수출해서 위기를 이겨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지역국가들끼리 서로 수입을 늘려주면서 수출시장을 함께 늘려나가야 한다.
현재 서방 선진국과 국제금융가는 위기국들에게는 긴축을 강요하고 일본에게 내수진작을 통한 수요확대를 요구하는 이중적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90년대 들어 60조엔 이상을 쏟아부으며 내수진작에 노력했지만 장기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내수확대만으로 지역전체의 수요축소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일본에만 총수요확대부담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지역 전체적으로 수요를 늘리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현재 금융위기국들이 내수를 확대하려고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환율불안 우려이다. 개별국가 차원에서 돈을 풀거나 재정적자를 크게 늘리면 다시 환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국제협력을 통해 환율안정의 방파제를 쌓아놓고 그 바탕 위에서 총수요를 늘리는 대안을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주변을 둘러보면 환율안정을 선행시켜야 한다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스터 엔'으로 불리는 일본의 사카키바라 국제담당차관은 "브레튼우즈 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금융합의를 검토하기 시작해야 한다"며 '신(新)브레튼우즈체제'의 운(韻)을 떼고 있다. 사카키바라가 '엔블럭'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우려섞인 분석도 있다. 그러나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에서 국제금융정책의 최고책임자가 '조정가능한 고정환율제'를 기반으로 하는 브레튼우즈체제를 언급하기 시작한 것 자체가 큰 변화이다.
중국은 달러에 고정시켜 놓은 위엔(元)화 환율을 유지하는데 사활을 걸고 있다. 국제금융중심지로서 홍콩의 지위를 지키는 것 뿐만 아니라 원활한 외자유입을 위해서 현재의 환율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생각하고 있다. 자칫 환율을 잘못 풀어놓았다가 동남아처럼 일순간 외환위기에 빠질 가능성도 걱정하고 있다. 따라서 주롱지 신임총리를 비롯한 중국당국자들은 틈날 때마다 위엔화절하불가 방침을 거듭 천명하고있다. 최근에는 500억달러 이상의 美재무부채권(TB)을 매입하기도 했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중국어신문밍파오(明報)는 "통화위기가 발생하면 언제든지 팔아치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보도해 TB대량매입이 환율방어용임을 시사했다.
대만은 환공격을 강하게 받기 시작하자 지난해 10월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NT달러시세결정을 시장에 맡겼다. 겉으로는 변동환율제로 이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장에 완전히 맡긴 것은 아니다. 대만중앙은행은 8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를 무기로 급격한 환율변동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개입할 것이라고 틈틈이 강조하고 있다.
아세안국가들은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역내무역에 대해 자국통화결제시스템을 도입하고 복수통화바스킷방식으로 환율결정방법을 바꾸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아세안+3'의 제안을 내놓고 아세안과 한·중·일 3개국간 보다 긴밀한 경제협조체제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아세안은 또 일본과 함께 아시아통화기금(AMF)설립을 적극 주장하고 있다.
동아시아국가들간 발전단계나 경제구조의 다양성에 비추어볼 때 유럽환율제도(ERM)와 같이 변동폭이 좁고 많은 나라가 참여하는 환율안정합의를 도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신 비슷한 경제수준의 나라들끼리환율안정체제를 먼저 구축하고 전체적으로 협조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상해볼 수 있다.
필자는 일차적으로 국제시장에서 경합품목이 많은 한국·일본·대만간에 환율안정대(target zone)를 설치하는 것이 3국간 이해관계에 들어맞을 것으로 본다. 환율안정대란 80년대 중반 엔·달러환율이 요동칠 때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선진7개국(G7)이 한시적으로 운영하던 환율안정합의이다. 환율수준을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예컨대 달러당 100-120엔 범위를 넘을 때 G7이 공동개입한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계속 흘려 환율이 과도하게 움직이지 않도록 경고도 하고 시장환율이 안정대를 넘어설 때 실제로 협조개입하기도 했다.
한일관계를 보면 과거 엔고가 진행되는 동안은 한국기업들이 특별히 경쟁력을 높인 것도 없이 환율차이만으로 일본업체들의 시장을 빼앗아가는 일이 진행됐었다. 반대로 엔화가 절하되기 시작하면 한국기업들은 갑자기 경쟁력이 약화되고 경제위기를 느껴왔다. 이렇게 환율변동에 따라 실물부문이 영향받은 것을 장기적으로 보면 잘해봐야 제로섬(zero-sum)게임이고 환율변동에 적응하기 위한 비용까지 감안하면 네거티브섬(negative-sum)게임이라 할 수 있다.
대만업체들도 한국과의 경쟁에 민감하다. 지난해 한국이 외환위기를 당하면서 원화환율이 급등하자 타이페이증시에서 주가가 급락했었다. 주요품목에서 한국업체들에게 경쟁력이 상실될 것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한국·일본·대만간에 동의할 수 있는 범위에서 환율안정대를 설치하고 3국간 환율을 안정시키면 공정경쟁 여건이 마련되고 기업이나 정부는 생산력향상에 노력을 집중시킬 수 있다.
중국과 홍콩도 환율안정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지만 현재 고정환율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변동환율제를 택하고 있는 한-일-대만 등과 함께 환율안정대 합의를 당장 내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나 아세안 등 주변국들의 환율이 급격한 절하로 인해 자국 무역이 영향받고 위엔화와 홍콩달러 절하압력을 받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환율안정대설치에 대해 지지를 보낼 가능성은크다.
일본은 특히 동아시아국가들과의 분업구도에 경제활동이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환율안정대 설치에 적극적으로 나설 유인이 있다. 무역대국으로 성장해온 일본경제의 특성상 경제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아시아국들로의 수출이 지속적으로 유지돼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이 지금과 같이 투자를 전혀 하지 않고 수입을 줄이면 일본의 부품,기계산업이 큰 타격을 입는다. 주변국들의 환율안정은 일본 제품의 수출을 늘리는데 결정적으로 필요하다.
아세안국가들은 그동안의 긴밀한 협력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환율안정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들과의 협조체제도 중층적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 그동안 일본, 아세안국가들이 추진해왔던 아시아통화기금(AMF)과 같은 기구가 이같은 네트워크의 매개역할을 할 수도 있다.
현재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러한 금융협력을 이룰 수 있는 재원은 충분히 갖고 있다. 외환보유고만 따져도 일본 2,220억달러 중국 1,437억달러, 대만 840억달러, 홍콩 800억달러, 싱가포르 744억달러, 한국 400억달러 등 동아시아국가들만 어림 잡아도 7,000억달러가 훨씬 넘는다. 위기시에 이를 집중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면 외환시장의 과잉반응으로 인한 충격을 예방할 수 있다.
이같이 지역적으로 환율안정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면 그동안 환율안정이라는 목표를 위해 취했던 과도한 긴축정책을 완화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된다. 재정적자에 융통성을 두면 지금과 같이 과다하게 세율을 올려 내수를 위축시키는 일은 줄일 수 있게 된다. 금융부문 구조조정을 원활히 하기 위해 재정자금을 보다 많이 투입할 수도 있다. 국민경제에 파급효과가 큰 공공사업들을 선택해서 조기시행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또 환율안정을 국제금융가에서 만들어놓은 '시장신뢰'라는 잣대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각 나라의 형편에 따라 개혁의 수위와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손쉬워진다. 금융과 기업구조조정을 신속히 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BIS비율적용이나 대손충당금적립 등은 각국의 특성에 맞춰 융통성을 둬야 한다. 회계제도 및 공시제도강화 등을 통해 기업 재무구조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은 필요하지만 부채비율을 갑자기 단시일내에 선진국수준으로 낮추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람직하지도 못하다.
물론 이같은 지역협력을 일궈내는 데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다. 지역국가들간의 뿌리깊은 불신과 지나친 경쟁도 걸림돌이다. 예를 들어 97년초 '아시아 6개국 금융회의'가 출범할 때는 일본측이 한국을 일부러 제외시켰다. 이 금융회의는 당초 95년부터 엔고(円高)가 진행될 때 일본측이 지나친 엔강세는 지역국가들에게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는 취지에서 제안했던 것인데 한국측에서 엔고로 인해 국내기업들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지는 측면만 고려해서 소극적으로 임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국가들간에 경제발전단계가 많은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서로 안정적이라고 인정해줄 만한 환율범위에 대해 합의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협조개입의 방법론도 풀어야할 숙제가 많다. 지난해말 AMF창설논의 때처럼 미국이 개입해서 지역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을 반대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동아시아지역의 총수요위축이 공황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공동으로 수요를 늘리는 대책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는 대명제에는 변함이 없다. 축소균형지향적인 고전적 금융위기극복시나리오가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고 수출을 통한 돌파구 마련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지역협력을 통한 수요창출책이 찾아져야 한다.
7. 맺는 말
현재 한국의 경제구조조정은 IMF, IBRD에서 표준화해놓은 프로그램에 국내 정책당국자들의 경직적인 '개혁 맹목주의'가 결합돼서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흡수하기 어려운 강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내기업들은 세계시장에서의 공급과잉조정 부담을 일방적으로 떠안고 있다. 아시아 금융위기 직전에 벌어진 아시아 투자붐과 공급과잉에는 전세계 다국적기업들이 '공범(共犯)'이다.
이번 아시아 금융위기도 크게 보면 자본주의 경기순환에서 항상적으로 있어 왔던 공급과잉의 조정과정이다. 그러나 과거 조정기와 달리 이번 조정기에는 실물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승패가 갈라지기도 전에 국제금융가에서 공급과잉 우려가 제기되고 자금회수와 환공격이 일어나 금융위기국 기업들이 일률적으로 공급과잉조정 압력을 받고 그에 따르는 부실채권부담은 해당국 금융기관들이, 결국 해당국 납세자들이 대부분 짊어지게 되는 '불공정성'이 있다.
한국이 지금 IMF관리를 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고전적 프로그램을 그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다며 새로운 대안찾기를 포기하는 것은 패배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파국이 눈 앞에 보이는데 그냥 뛰어들고 보자는 얘기일 수도 있고 스스로 당하고 있는 불공정함에 대해 눈감고 지나가자는 것일 수 있다. 파국을 피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대안은 적극적으로 모색돼야 한다.
물론 전세계적 차원에서 환율안정에 관한 합의를 끌어내고 총수요를 확대시키는 '글로벌 케인지언 해법'이 나올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대안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국제금융자본의 헤게모니가 강한상황에서는 세계적 차원에서의 합의를 끌어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차선책으로 환율급변동의 폐해를 현재 가장 심하게 느끼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국가들끼리 공동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역학관계를 만들어내면서 경제회복을 꾀하는 '지역적 케인지언 해법(Regional Keynsian Solution)'을 모색해볼 필요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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