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얘기는 시대순으로 임진강 목욕사건 전인 1979년 9월 하순 어느날,
GOP에서 막 철수하여 장현리에서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고 있을때다.
부대가 이동되어 막사 정리 정돈, 교육, 종합훈련 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때 주로 중대세면장에서 식기딲는 일과, 사역병집합에 대응하는
날들이였는데, 우리 3소대는 10중대 막사를 바라봤을때 맨왼쪽에 위치해
9중대와 가장 인접한 내무반이 였다.
그 날도 중대막사앞 연병장에서 태권도였던가 무슨 교육을 했던가
정신없이 헤메고 있는데 뒤에서 "ㅇㅈ아!"라며 내 이름을 부르는
낮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집 떠나온지 벌써 5개월째 접어들고 있었고 혼자 외롭게 아는 사람없는
낮선곳에서의 적응을 하고 있을 때로 누가 나의 이름 따위를 부르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순간 돌아보니 고교동기 "배재열"이 아닌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둘이서
얼싸안고 그렇게 한참을 포옹했다.
그 친구는 9중대 고참하사로 77년초에 입대하여 그때는 이미 군생활을
30개월이상 한 왕고참이 였다.
그 당시의 내 모습을 스케치해보면,
식기딲느라 항상 물에 젖어 있었던 군화 그리고 꼭 조여맨 탓에
왼쪽발 중간에 지금도 흉터로 남아있는 상처자국,
진한 푸른색의 다리미 구경한번 못해본 기름끼가 번질번질한 전투복을 입고,
전투모는 101보충대에서 지급받은 당시 미군 전투모와 비슷한 전투모를 눌러쓴
꼬질꼬질하고 어리버리한 이등병이 였다.
[자료사진] 제주 선녀와 나무꾼 테마공원의 추억의 내무반
친구는 우리선임하사와 그친구의 쫄다구였던 우리소대 선임분대장(옥천 미원産)에게
부탁해서 위병하사에게 얘기하고 위병소를 거쳐 목포상회로 나를 데리고 갔다.
돼지찌게 한냄비에다 하얀 사제 쌀밥으로 둘은 그동안 3년간의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오랜만에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그땐 워낙 쫄병이라 고참하사로써 괜히 소주 한잔했다간 내가 힘들까봐
술은 전역후에 대구에서 한잔 사겠노라고 나를 다독였다.
2년이상 먼저 군에 온 친구가 한없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창창하게 남은 군생활을 생각하니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지금 이천에서 사업하고 있는 그 친구와 얼마전에 통화하면서 그때 나를
그렇게 배려해 주어 고맙다고 했더니 너무 짧게(2~3개월) 함께했던 군생활이라
별로 도움주지 못해서 항상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아마 그건 나에게 도움을 못준것 보다는 새까만 쫄다구로 꼬질꼬질한
내 모습을 보면서 그친구와의 그런 만남후 친구는 2~3개월후에 전역하면서
나를 남겨두고 떠나는 아쉬움이 컷던 것이 였으리라.
그 친구 또한, 반가운 친구를 만나 그 동안의 군생활을 회고하면서,
어쩌면 오늘 나를 이렇게 만나지 못할 뻔했다는 얘기를 들러주었다.
[자료사진] 철책
때는 1978년 9월, GOP에 투입되고 얼마후,
근무투입시에 절책점검을 하고 있는데 초소에 있던
병사가 실수로 크레모아를 누르는 바람에
크레모아 후폭풍을 맞아 간신히 목숨만 건지고
GOP생활 내내 야전병원의 병상에서 군생활을 했다고 했다.
그렇게 전투복속의 다리의 속살을 드러내어 보여주었다.
크레모아 후폭풍 파편을 맞은 자리는 콩보다 큰 검붉은 반점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그친구 하는 말이 "사고 당시에 미제 야전잠바를 입지않았다면 아마
이세상 사람이 아니였을 거야!"라며 사고 당시의 상황을 전해 주었다.
그런 엄청난 시련을 겪었던 그 친구에게
"정말 다행이다. 고생많았다!"를 연발하면서 위로를 해 주었다.
[자료사진] 크레모아
그날 그렇게 짧은 저녁을 먹었고,
그 다음에는 그 친구가 각 중대 고참하사들이 돌아가면서 서는 위병조장을 설때면
우리 소대 선임분대장에게 전갈이 와서 나에게 목포상회로 초대해 주었다.
두 세달의 짧게 같은 울타리에서 생활했던 지라
그후에도 서너차레 친구의 배려로 쫄다구의 설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본적이 영천인지라 고향병력들과 입대해서 학교 동기들이 많지 않았다.
훈련끝나고 자대올때, 대대에서 대기하던 나를 10중대로 인수하러 왔던
10중대본부 조ㅁ구란 녀석이 6개월고참으로 중학은 동기지만
고등학교는 내가 1년선배였던 터라 왠지 서먹서먹하게 대하기만 했다.
그 친구는 나와의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전적으로 나를 크게 실망시켰던 친구다.
이 얘기도 "머무르고 싶지않은 순간들" 4편에 "잘못된 우정"편에서
아직도 나를 슬프게 하는 사연의 기억들을 더듬어 볼려고 한다.
그렇게 9중대 배제열하사는 79년 늦가을 어느날,
개구리복으로 갈아 입고 나에게 군생활 잘하라는 격려를 해주면서
내 발치에서 멀어져 갔다.
정문을 나서는 그 친구를 먼 발치에서 한없이 바라보면서
앞으로 2년이상 남아 있는 군생활을 생각하니 떨어지는 낙엽만큼이나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재열이와의 짧은 군생활과 푸른언덕에서
뛰어 놀았던 10대때의 상념들이 밀려오면서 내 마음의 푸른 잎사귀들이
속절없이 뚝~뚝~떨어지고 있었다.
친구가 떠난 텅빈 장현리 연병장에서의 그 황량함은 지금도
내 마음의 아련함으로 남아 있다.
입대 몇년전에 봤던 "바보들의 행진"이 떠오르며
지금도 같이 했던 그 곳에 있을 친구들의 얼굴과 재열이가 오버랩되면서
슬픈 가을않이를 하고 있었다.
[자료사진] 영화 바보들의 행진중에서
가을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듸위에 또 다시 황금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 얼굴들~♪
루 루 루 루~ 꽃이지네~♪
루 루 루 루~ 가을이 가네~♬
하늘엔 조각그름 무정한 세월이여~♪
꽃잎이 떨어짐이 젊음도 곧가겠지~♪
머물 수 없는 시절 시절 시절 시절들~♪
우 우 우 우~ 세월이 가네~♪
우 우 우 우~ 젊음도 가네~♪
우 우 우~ 우 우 우~♬
송창식(김정호)의 "날이 갈수록"에서
아직 군생활에 익숙하지 못했던 나는
그렇게 속절없이 내 젊음이 가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었다.
다음편은 "고참과 심야의 혈투"편으로
구타당하여 부상당한 몸으로 대대CP에 잔류하면서 정도를 넘은
고참의 나태함에 참고있던 인내가 폭발한, 차마 하고 싶지 않았던
중대본부 고참 폭행사건을 회상해 봅니다.
첫댓글 간만에 짠 수건 또 짜(?) 주셔서 감사합니다.ㅋ
전혀 연고도 없는 먼 전방, 그리고 같은 연대도 같은 대대도 아닌 같은 중대에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게 참 기이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후배님과 같은 직접적인 인연을 보지 못했지만, 후배님이 잘 알다시피 우리소대에 있던 신**가 내 동생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였지요.
에이~선뱃님! 마른 수건 짠건 아닌뎅!
선뱃님과 비운이님 경우를 보면 난 초,중,고,대학동기와 선배를 다양하게 만났으니 전생에 25사와의 인연이 깊었던가 봅니다.
그래도 후배님이 글을 오려 주시니 폭팔적인 반응이 옵니다. 자주 부탁 해용.ㅎㅎㅎ
장현리 !! 목포상회 !! 참 잊을수 없는 곳입니다 잘 읽었읍니다
나는 경기도 수원인데 참 지금도 알수 없는 게 그때는 경상도 전라도 병력만 일부러 25사로 보낸 건지 ... 소대에 경기출신은 나하고 딱한명 지금도 이해가 안갑니다 동창을 만나는 거 참좋지요 너무 반가운일이지요 저도 그런경우 딱한번 있었읍니다 다음에 올리도록 하겠읍니다
지금 카메룬에 계신거 아닙니까?
비운이님 저와 비슷한(저보다 고참이시지만..) 시기에 군대생활 하신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비운이님 소대에만 공교롭게도 아래동네 사람들이 많았나 보네요. ㅎ 사실 인구로 볼 때 중부지방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 군대에도 별로 없지요.
카메룬에서 쓰는 겁니다 사실 여기가 인터넷사정이 안좋아서 글 좀올리가 수월치 않읍니다 ...
수원이라하시길래 귀국하셨나해서요.ㅎ
요 몇일 다음에서 업그레이드 작업중이라 시스템이 좀 버벅댑니다. 몇일있으면 좀나아질겁니다.
스아트폰 앱은 기능이 많이 향상되었습니다.
저도 논산 훈련받고 101 보에서 25사 팔려갈때..101보에서 근무하는 고등학교 놈을 만났어요..
상병 달고있었고..어찌나....부럽고...행동이 틀리ㅣ던지...그때부터 군대 ㅈ ㅗ ㅊ 같다는것을 터득...
그래서, 꼬우면 할매ㅂㅈ로 나오라는 얘기 있잖습니까?
마져요..오랫만에 잊혀진 문장...나타나. 반갑네요...
집합때..사용하던 ...
잘 읽고 공감합니다요, 단결!!!
70연대 아닌가 생각됩니다,,79년9월72연대1중대로 들어갔는데 얼마안있다 박통가고 겨울이 지나기무섭게 오월의 행진곡이 들리데요,,사미천겨울은 왜그리 춥던지,, 80년봄 화공작전으로 철책선안에 불지르던 일이 떠오릅니다,,
70연댑니다, 72연대면 우리와 바로 교대했지요.
사미천은 개활지라 똥바랍샘니다. 저는 79년7월에 들어가서 9월철수하고 다시 81년 9월에 들어가서 82년 1월에 전역해서 화공작전은 직접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삼사월 화공작전,, 철조망안쪽에 양쪽이 맟불지르면 한일주일은 연기기 날겁니다,,노루,퇴끼,멧되지,,등등 캑캑거리며 이리저리뛰는모습 그립군요,,눈~~녹은,,삼팔선에,, 꽃은피누나,,라는 노랫말과,, 영관고지서 내려다보는 사미천개활지 건너편 북한군초소,,모두 다,,
불바다얘기, 고참들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그 사미천 갈대에다 불놓으면 장관일겁니다.
어른 키를 훨씬넘는 갈대숲, 9월 달빛아래 근무서면 가을바람과 함께 넘실데던 갈대들, 캥~캥~거리던 고라니들, ... 그리고 사미천 개활지는 6.25전에는 마을로 들어차 있던 곳이 였다고 하지요.
꼭 한번 더 가고싶은 곳입니다.
말이났으니 말인데 ㅋㅋ,, 사미천개활지 옜마을엔 10월경 갈대베러 나두한두번 들어갔었는데 장독깨진거 기왓장깨진거 나뒹굴데요,,ㅠㅠ 마당가 과일나무엔 감,대추도 주렁주렁,,그것밖엔 기억이..아마도 연대급으로 발가공업자에게 납품^^ 쩐좀 한다는 "썰"도 있었죠,,^^사미천 알면 영관고지도 잘알겠군요,,
79년9월 철수할때, 장현대대 울타리할려고 갈대 베어다가 장현리로 후송시켰지요.
그해 7월에 사미천가서 9월에 철수했으니, 완전 쫄다구때 2달 좀 넘는 생활이였는데 돌산 미군분대로 기억되는데 헬기로 부식추진하던 모습들...아직도 태양이 이글거리는 철책위로 헬기가 고성을 내며 접근하던 소리가 생생하게 들립니다. 사미천에서 북을 바라 봤을때 우측의 고지가 영광OP인가 봅니다.
그땐 상쫄다구라 영광OP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우리가 근무서는 우측에 높은 봉우리가 있었던 기억은 있지요.
그 갈대는 일본에 수출한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 돌이켜보면 병력동원해서 베어다가 ...(계속)..
...(계속2)...일부는 장현대대 울타리 보수하고 나머지는 팔아서 꿀꺽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래도 명분은 장현대대 울타리 보수용이였을 겁니다.ㅋㅋ
사미천우축 높은봉우리가 영관OP(전쟁때 영관급장교들이 어찌어찌 되었다하는곳,,)야요,,1중대의 메카였고,,
마지리서 상병달고 들어갔다가 나와서 임진강변 똥파리서 한달만에 제대해서리,,이얘긴 만나서해야 얘기 끝납니다,,ㅎㅎ
아~~! 우리와 맞교대한 흑룡 1중대출신이군요. 영관OP는 높은곳이라 왼쪽에 있던 사미천개활지, 돌산지상레이더, 10중대OP, 3대대OP... 훤하게 보이는 곳에서 근무하셨네요.
흑룡으로 가서, 79년인지 80년인지 사고로 먼저 하늘나라로 가 함께 전역하지 못한 동기놈이 생각납니다.
이 또한 당시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 여기까지 만 합니다.
80년봄 가까운후임놈이 세상을 굳바이 해서리 제대 못한일도 있었자요,,갑자기 죠지나감빵~~!!이라는 단어가 생각남다,,ㅋㅋ
그 후임이 혹 김ㅌ백이 아닌가요?
"좆이나감빵"ㅎㅎ 참 오랫만에 들어보는 순화(?)된 군대전문용어내요.ㅎㅎ
뚜루기 후배님~ 한장군님을 모욕하는 발언 삼가해 주십쇼!!!!ㅋㅋ 갈대 베다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거
순전히 울타리만 했습니다.ㅎ
아이~캄작이야!
그때 얘기가 수출한다는 얘기가 있었기에 했을 뿐이고, 또 한가지는 작전과 무관한 일들은 지휘관과 무관하기에. 얼마전에 경험했던 모사관학교 풀잭할때, 어느날 투스타보고한다고 말똥들 30여명 모였는데 군무원사무관께서 다과준비하라고 해서 준비했다.
보고회가 끝나고 학교장왈 "다과 누가준비했어!"
"업체에서..."
"어이 사무관! 당장 이분들께 돈주세요. 우리 사업비용있잖아요. 앞으로 그 비용으로 쓰세요."했다.
이 건 이외에도 2년이상 사업하면서 이상한 요구들이 있었다.
30여년전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휘관이 모르는 일들은 얘나 지금이나 비일비재 할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돌아오지ㄴ안는강을건넌 그넘은 가평병력 최가야요,,바둑아마4단인가 한다는데 장교들 바둑상대로 잘나갔는데,,ㅉㅉ 아습게도,ㅠㅠ
그 당시는 보안이 였어 알지 못했던 일상을 벗어난 사건들. 그친구도 동기가 아니였다면 아마 몰랐을 겁니다.
5978님 우리는 79년4월 영천병력으로 군번은 23001???로 25사단에 150여명와서 70연대에 10여명 71연대에 30여명 나머지 110여명은 몽땅 72연대로 갔었지요. 전역때 사단휴양소에서 만나서 그 사실을 비로소 들었던 겁니다. 많이들 가슴아파 했었지요.
나와 14개월차이군요,,78년2월28일,,속말로 지구 수십바퀴나,,ㅋㅋ논산동기는1284****,아마 갸소식은 아는사람이나 알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