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의 역사를 담기 위해서는 독자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정중히 요청하는 바이다.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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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축구칼럼니스트 김무현 |
西洋사람들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고 ‘時代와 歷史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東洋에서는 달� 뜨고 기우는 것을 바라보고 ‚歲月을 감지하며 살아왔다’고 하지를 않는가, 이러하듯 가치관이나 생활습관이 완연히 다른 이국 땅에서 살아 간다는 것이 여간 힘겨운 일인지 모른다. 당시 가난한 조국을 떠나 올 때 이러한 사실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집을 나서야 만 했는지 모른다.
1963년~ 77년 까지 무려 7,936명이나 되는 많은 젊은 이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 일꾼(Gastarbeiter)으로 지칭되는 외국인 노동자로서 극히 제한된 취업조건 아래 남다른 고난과 시련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노동보다 더 힘든 문화와의 차이는 또 다른 갈등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당시 취업 계약조건 3년이 만료 되면 대다수가 귀국길에 올라야만 했고, 형편이 좋지 않는 사람들은 또 다른 신 개척지를 향해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제3국으로 이민을 떠나갔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이곳에서 국제결혼을 한 사람, 한국 간호사와 결혼한 사람, 또는 70년대 외국인 노동자 권익운동 덕분에 아예 귀국길이 막혔던 이들 가운데 한국에다 두 고온 부인과 자식들을 불러들인 사람들이 오늘날 재독교민 1세대들이며 교민분포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벌써 32년 혹은46년의 세월을 타향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초창기 한인사회가 형성될 때에는 여러 부분에서 각각 서로 다르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두더러 지게 나타난 것은 아마도 축구를 통한 만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은 재독한인들의 축구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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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chen EBV 국적별 축구대회를 마치고 |
이미 유럽인구 4억5천만 명 중 거의 6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 이유는 많은 세월을 통해 축구가 발전하고 흥미 진지한 스포츠로서 이사회에서 각광을 받아오고 있기 때문이 였다. 한인들도 고달픈 이국생활에서 축구를 통해 만나고 즐거움을 찾았기 때문일까? 이러한 만남을 통해 각 지역에서 리드자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 지금이나 그때나 재독교민 행사 중에 가장 큰 광복절기념 체육행사 때에는 언제나 축구경기가 하이라이트 였다. 이 밖에도 지역마다 친선축구시합이 빈번이 이루어지는 보도가 신문에 나가자 “교포사회가 체육행사가 아니면 다른 행사가 무산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교민사회가 유독 체육행사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라는 비난의 글을 Dr. Becker-xxx 씨가1999.6.11자 교포신문 칼럼에 기고 할 정도였다.
그 밖에도 재독한인연합회에서도 연합회의 기능이 축소 된다는 이유로 1976년도 재독한인연합회 정기 총회에서 모든 체육부서를 연합회 안으로 통합시키기로 결정하게 된다. 소위 재독대한체육회를 재독한인연합회안에 귀속시키게 된 결과였다. 그렇지만 재독한인축구협회만큼은 당시의 조직력을 앞세워 별도로 1979년도에 3.1절 기념축구대회를 Aachen지방한인회에서 발의하고, 개최하게 된다. 재독한인축구협회가 지금까지 독특하게 전통으로 맥을 유지하며 개최하는 행사는 3.1절 기념축구대회이다. 아직도 각종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가하는 1세대들은 오픈게임이라도 마련하지 않으면 섭섭해 하기도 한다. 주말이면 건강을 위해 모이는 단체가 바로 쾰른일요축구회, 쾰른토요축구회, 프랑크후르트 조기축구동호회, 아헨축구동우회, 캄프린트축구동우회가 남아있다.
<국적별 蹴球대회에 출전한 한국 선수들>
독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축구시합에는 당연히 기력과 재능이 있는 선수들로 구성하게 마련인데, 그것은 태극기를 게양한 체 경기를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관계로 자연스럽게 국적별 축구시합은 우리들의 자존심이 걸린 경기였다. 심지어는 축구연수 차 독일에 온 한국의 유명한 감독과 코치들 까지도 합세하여 출전을 하였다. 그러나 한번도 우승한적이 없는 대회가 바로 ‘EBV국적별축구대회’(Aachen EBV Fussballturnier)이다. 처음에는 광산 노동자들간에 친선을 도모하는 정기전이 였으나, 해가 거듭될 수록 아마구단에서 등록된 선수들까지도 출전을 하게 되어서 매우 수준 높은 경기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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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아헨EBV국적별축구대회 한국팀으로 김호, 박수일, 김인곤, 이영환 감독, 코치가 합류했다 |
이 대회의 출전 팀을 열거해보면, 터키, 유고슬라비아, 모로코, EBV노조, 독일, 이태리, 체코, 한국팀들이 각각 두 조로 나누어 예선리그전을 거친 다음, 준결승부터는 단판승부로 우승을 가렸다. 또 다른 대회는 Frankfurt시 인근에 위치한 Rüsselsheim에서 Opel 회사가 주최하는 “다 국적별 친선축구대회”로써 독일, 스페인, 모로코, 유고슬라비아, 터키, 한국, 이태리, 남미 팀까지 출전하여 국제적이고 규모가 큰 경기였기에 이곳에서도 한국팀은 최고의 팀을 구성하여 출전을 했었다.
<재독동포 축구팀 全國體育大會에 출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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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회 전국체육대회(대구) 재독동포 선수입장식 |
1975년도 한국에서 열리는 제56회 전국체육대회(대구)에 최초로 26명의 재독동포선수가 출전하게 되었다. 재독한인연합회 조희영 회장(전 동국대 교수)을 단장으로 부단장에 이창무, 윤남수, 섭외 홍종철, 재무 이완희, 보도 남정호씨를 내정하고, 축구감독 문홍근, 코치 김영수, 주장 한일동, 선수 강동준, 이종관, 손종원, 노광범, 박정하, 유춘길, 김영식, 김무현, 김청옥, 김주찬, 김기성, 박광희, 이원근, 김양호, 김갑동, 유영갑 등이 참가했다.
재독동포선수단은 당시에는 대한체육회로부터 해외지부로 등록되지 않았던 관계로 옵서버 자격으로 만 출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북 5도청” 팀과 번 외 경기를 하게 되었다. (2: 3으로 패함) 서울에서는“주한독일외교관“팀과 단국대학에서 친선경기를 하여 2: 3으로 패했다. 재독동포 자매결연 학교인 파주중학교와 그곳 새마을 시범 마을도 방문하여 금일봉을 전달하고 돌아왔다.
<底韓人蹴球協會가 탄생하게 된 동기>
전국체전에서 돌아온 축구선수들은 1976년 여우종씨가 제14대 재독연합회 회장직을 맡게 되자, 대거 연합회의 임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어느 날 한국에서 귀한 손님 한 분이 연합회 사무실로 찾아 왔다. 전 보사부장관을 지낸 “홍성철”씨가 공직에서 퇴임하고 나서, 외유 차 Bonn에 들렀다가 연합회 사무실로 찾아온 것이다. 그는 그 유명하다는 분데스리그를 한번 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여우종 회장께서 축구 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모이게 하셨다. 재독축구인 윤성규씨 (체육교사로 재임 중)주선으로 당시 2부 리그였던 Leverkusen과 Mannheim의 경기를 재독 축구인과 함께 관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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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B 앞에서 앞줄 왼쪽부터 유기흥 전 국가대표선수, 여우종 연합회장, 유현철 한전감독, 최은택 한양대 교수, 윗줄 왼쪽 필자, 김영수 전 축구협회 회장, 김정호 전 축구협회 회장 |
경기에 앞서 아나운서가 이 자리에는 멀리 한국에서 온 전 보사부장관이 참석하고 있다고 소개하자, 홍 보사부 전 장관이 손을 흔들며 답례를 보내기도 했다. 홍 전장관은 경기가 끝난 뒤에도 레버쿠젠의 스포트들이 뒷 풀이에 매료되어 좀처럼 자리를 떠날 줄 몰라 했다. 이날 재독축구 인들과 함께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도 주로 축구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유럽의 축구가 스포츠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여러 계층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경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사회체육에 대한 정부와 지방행정부가 지속적으로 지원육성하고 있는 사례를 소개하자, 관심을 표명한 홍 전 장관께서 여러 가지로 유익한 시간이었다며, 앞으로도 재독 축구 인들이 한국축구의 발전을 위해 앞장서 줄 것을 부탁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