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5.06 10:16 | 수정 : 2015.05.06 10:16
1979년 1월 31일,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불을 밝힌 포항시 효자동 포스코 영빈관 ‘백록대’는 훤하게 밝았다. 대통령의 고향에서 실어온 막걸리가 동이 나야만 두 사람은 자리를 작파하려는가.
박정희와 박태준은 잠시 대미(對美)관계를 화제로 삼았다. 박정희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의 불편한 속사정도 솔직히 토로했다. 묵묵히 듣고 있는 박태준은 그 대목에서 1974년 6월 가족과 함께 백록대의 첫 귀빈으로 찾아온 박정희가 건물의 흰색을 가리키며 “백악관이야 뭐야” 하고 짜증 부리던 장면(연재 65회)을 얼핏 떠올려야 했다. 이윽고 국내정치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박정희도 박태준도 피하고 싶은 화제였는지 몰라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흘러갔다. 박태준은 대미관계처럼 이번에도 주로 경청하는 입장이었다. 그러고 있는 어느 순간이었다. 한참을 듣고만 있던 박태준이 마치 아슬아슬한 어떤 실마리를 조심스레 잡는 경우처럼 속에 가둬뒀던 생각 하나를 꺼냈다.
박정희와 박태준은 잠시 대미(對美)관계를 화제로 삼았다. 박정희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의 불편한 속사정도 솔직히 토로했다. 묵묵히 듣고 있는 박태준은 그 대목에서 1974년 6월 가족과 함께 백록대의 첫 귀빈으로 찾아온 박정희가 건물의 흰색을 가리키며 “백악관이야 뭐야” 하고 짜증 부리던 장면(연재 65회)을 얼핏 떠올려야 했다. 이윽고 국내정치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박정희도 박태준도 피하고 싶은 화제였는지 몰라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흘러갔다. 박태준은 대미관계처럼 이번에도 주로 경청하는 입장이었다. 그러고 있는 어느 순간이었다. 한참을 듣고만 있던 박태준이 마치 아슬아슬한 어떤 실마리를 조심스레 잡는 경우처럼 속에 가둬뒀던 생각 하나를 꺼냈다.
-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사장.
박태준이 말을 멈췄다. 박정희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태준이마저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보나?”
박태준은 움찔했다. 그 사건이 대통령의 획책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때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의 엄청난 과오를 비판할 참이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말씨는 오히려 차분했다. 회한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알아, 태준이 마음은…. 그때 이후락이가 헐레벌떡 청와대로 올라와서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고한 것이 바로 그 사건이었는데, 나는 처음 듣는 거였어. 미국 쪽에서 당장 중단하라는 전화가 왔다나. 너무 화가 치밀어서 재떨인지 뭔지 탁자 위에 있던 걸 면상 쪽으로 확 집어 던지고는, 그따위 짓거리는 당장 집어치우라고 고함을 질렀어.”
박정희가 잔을 비우고 말했다.
“김형욱이, 이후락이, 너무 오래 썼어.”
박태준은 얼른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아 혼자서 잔을 들었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으며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리려 했다.
“그때 그 사건 때문에 갑자기 저는 진짜 사업가로 변신하게 되었습니다.”
“허어, 그래?”
이번에는 박태준의 이야기가 제법 길어졌다.
1973년 8월 도쿄에 체류하는 김대중이 통일당 당수를 만나러 그랜드팔레스호텔에 들렀다 잠복 중이던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납치된 뒤 선박으로 옮겨져 일본과 한국 사이의 공해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사건이 발발했다. 한국과 일본이 발칵 뒤집히고, 그해 4월에 터진 미국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터 사건처럼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한 가운데 1차 석유파동이 한국경제의 목을 옥죄면서 세계경제를 급격히 위축시키고 있었다. 그해 12월 연산 157만 톤 규모의 포철 2기를 착공하여 260만 톤 체제를 갖추려는 포스코에게는 석유파동만으로도 엄청난 악조건이었는데, 그보다 더 다급한 악조건이 덮쳐왔다. 일본정부가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항의와 보복으로 대한(對韓)경제협력의 전면적인 중단을 선언한 것이었다. (하편에서 계속)
-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박태준 자민련 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