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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국농아방송 시사뉴스 이은영입니다.
지난달 24일, 일제 강점기 강제 노역에 동원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했습니다.
광주고등법원은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이 근로정신대 양금덕 할머니 등 원고 5명에게 위자료 1억 원에서 1억2천만 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침략물자 생산을 위해 할머니들을 강제 동원하고 노동을 시킨 것은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앞서 2013년 1심 재판부도 할머니 4명에게 1억5천만원, 유족 1명에게 8천만 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습니다.
광주지법에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된 지 2년 8개월만에, 항소심이 접수된 지 1년 반만에 승소판결이 난것입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승소 뒤에는 일본의 양심세력이 있었습니다.
◇ "전쟁 비극 반복 안돼"…근로정신대를 세상에 알리다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문제를 가장 먼저 파헤치고, 가장 앞서 싸워온 단체는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입니다.
이 모임의 공동대표인 올해 73세의 일본인 다카하시 마코토씨가 근로정신대 문제에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발벗고 나선 때는 지난1986년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나고야시의 한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치던 그는 근로정신대의 존재를 알고 난후 충격에 빠졌습니다.
다카하시 대표는 자신의 제자보다 어린 13~14세 소녀들이 강제연행돼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제작소에서
한국인 소녀 300여명이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남과 충남 지역에서 끌려간 이들 가운데 6명은 지난 1944년 12월 7일 도난카이 지진 때 숨진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쓰비시 측이 지진 희생자 위령제를 지내면서도 한국 소녀들의 명부를 숨긴 사실에 그는 교사의 양심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규명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한국은 관공서 협조가 어려웠고, 일본인이 한국을 직접 방문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주소 하나만 들고 제주도 등 방방곡곡을 헤매 희생자 5명의 유족을 만났습니다.
이후 다카하시 대표 등은 곧장 추도 기념비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일본 시민의 반응은 예상보다 좋았습니다.
희생자의 유족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모금액은 애초 목표의 두 배에 이르는 200만엔이나 됐습니다.
뜻있는 일본인들과 유족들의 마음이 모인 모금액은 추도 기념비 건립에 쓰여졌고, 기념비에는
"다시는 이 슬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진실을 여기에 새긴다"는 비문 아래 소녀 5명의 이름이 아로새겨졌습니다.
'아이코'라는 이름의 희생자는 1988년 제막식 때까지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일본 이름 옆 한국 이름을 적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카하시 대표 등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추적해 드디거 2001년에 아이코의 한국 이름인 '오길애'를 새겨 넣을 수 있었습니다.
◇ '법의 벽' 앞에 놓인 몇 겹의 장벽에 맞서다…힘겨운 손해배상 소송
일제 강점기 때 강제노역을 당했던 할머니들이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하기 까지는 난관이 많았습니다.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이 할머니들의 한을 풀기 위한 소송을 추진했지만,
뜻밖의 벽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군 위안부'와 '근로 정신대'에 대한 구별이 뚜렷하지 않은 시대의 오인이었습니다.
어렵사리 1997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을 통해 소송이 추진됐습니다.
1998년 8월 44명의 변호단이 결성됐고, 그해 11월에는 '나고야 소송 지원회'가 결성됐습니다.
1999년 3·1절에 맞춰 원고 5명의 이름으로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제기했고, 2000년 원고 3명이 추가 소송을 했습니다.
다카하시 대표는 한국에서 온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굳게 손을 잡고 법원 앞을 행진했던 순간을 아직 잊지 못합니다.
할머니들의 재판을 돕는 일은 오롯이 나고야 지원회의 몫이었습니다.
재판이 진행된 10년간 29회에 걸친 변론 동안 나고야 지원회는 일본을 방문하는 원고들의 항공비와 교통비, 숙박비를 부담했습니다.
무료변론을 자처한 일본 변호인단과 함께 나고야 소송지원회가 증언 청취, 자료 조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것만 30여회. 다카하시 대표는 80여차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나고야 지원회가 그동안 쓴 돈만 약 5천600만엔, 한화로 5억원에 달합니다.
변호인단의 126차례에 걸친 회의로 축적된 변론 자료만 수천 페이지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노력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2005년 나고야지방재판소, 2007년 나고야 고등재판소, 2008년 일본 최고재판소 모두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 끝이 없는 소송…여전히 일본에서 '근로정신대'를 외치는 사람들
그러나 한국 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할머니들은 광주지법·광주고법의 1, 2심에서 잇따라 승소했습니다.
광주지법의 승소는 일본에서 첫 소송을 제기한 지 14년 만이었습니다.
10년간 일본 소송 과정에서 쌓은 자료는 승소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그러나 소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쓰비시 측은 할머니들의 무덤까지 소송을 끌고 가려는 듯 대법원 상고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시간입니다.
대법원에서 승소한다 해도, 피해 할머니들 대다수는 현재 80대 이상의 고령이기 때문입니다
미쓰비시는 다카하시 대표의 말 처럼, 상고를 포기하고, 하루 빨리 할머니들의 배상에 나서기를 바랍니다.
시사뉴스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할머니들 맙소사ㅜㅜ항상 힘내세요
올려주심에 소중히 담아 갈께요 평화를 빕니다.
ㅠㅠ힘내세요~ 할머니...항상 응원해드립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담아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