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농암파(籠巖) 이야기>
대종회보가 통권 122호를 발간하고 보니
그간 훌륭하신 종인들께서 많은 문헌들을 고증하시고 또 선대로부터 구전되어 오기도 한
善金 각 종파의 훌륭하신 선조님들의 이야기를 담아 다양한 글로 발표해 오셨습니다.
이제 18개 종파의 한 순환이 마무리되어 다시 한 번 농암파(籠巖派)의 이야기를 풀어보라는 대종회
편집실의 요청을 받고 짧은 지식에 그간의 자료를 토대로 농암파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A.D.65년 태보공(김알지)탄신 이후 善山(一善)金氏 직계 최초왕으로
등극하신 내물왕(신라17대) 이후 ->지증왕->원성왕->신무왕->문성왕(신라46대) 5왕을 배출시킨
신라 왕손의 맥을 이어
순충공(順忠公)시조께서 A.D. 904년에 탄생하시게 되었습니다.
시조공께서는 장성하시어 고려 태조 왕 건을 도와 선산 고아 들녘 어검평야에서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군을 맞아 대승하시어 고려통일의 큰 공을 세우셔서 삼한통합익찬공신에 책봉되시니 고려개국 벽상공신으로 추앙받게 되시었고(946년 42세로 서거, 시호-順忠) 이것이 순충공을 우리 善金의 시조님으로 모시게 된 연유이지요. 또한 이로서 우리들의 관향이 善山으로 된 자랑스러운 가문의 시작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善金 문중 18개파 중에서도 농암파는
농암 선조님(시조14세, 휘-주(澍), 자-택부, 호-농암)을 파조로 하며, 아버님은 휘-원로(元老)님으로 여말 증.예의판서를 지내신 분이시며 백암파(白巖波) 파조이신 백암 선조님의 아우이시지요. 농암 파조님은 공양왕 4년(9.18일)에 예의판서로서 명나라 하절사로서의 소임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섣달 스무이틀(12월 22일) 압록강 도강 직전 이성계의 조선개국 정변소식을 듣고 진실로 의리에 따라 임금을 섬기려는 忠臣은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려 통곡하시며 끝내 귀국치 아니하시고 중국 형초 땅으로 돌아가시어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시었다고 합니다. 그 때 압록강변에서 종사관 전문식 공에게 소회를 읇은 “ 압강상시(鴨江上詩)”로 전별하고 배위 문화류씨에게 유서의 글과 함께 조복과 신발을 보내 중국으로 돌아가는 날을 기일로 삼도록하여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후손들이 이날 래격묘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불사이군의 충절로써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키신 절의는 이후 조선조에서도 그 정신을 높이 사 후세 인조11년(1633년)에 이르러 선산 월림동에 월암서원을 창건하여 파조님을 주벽으로 하여 위폐를 봉안한 후 제향케 하시고 정조22년무오 (1798년)에는 임금님께서 직접 백암,농암 형제의 충절을 <동방의 백이숙제>라 하시며 농암 파조님의 시호(諡號)를 충정(忠貞)으로 내리시고 묘호를 래격묘라 사호하시어 부조지명을 내리시고 승지 이익훈은 보내 제사를 모시게 하였으니 고려 말의 으뜸가는 충신이시었으며 고려 두문동 72현의 한 분으로 포은 정몽주 다음으로 추앙 받고 있습니다. 파주의 고려대전에도 고려를 빛낸 충신으로 그 위폐가 봉안되어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현재 농암 선생의 위폐는 안동 고죽서원,선산 월암서원, 고창 운곡서원,문암서원(해평),의정부 송산서원, 곡성 동진단, 장흥 도산사, 해남 성남사, 래격묘, 고려대전 등에 봉안되어 후세인들로부터 추앙받고 계십니다.
이런 훌륭한 파조님의 후손들은 조선조에서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시었는데
농암 할아버지의 외아들 휘 양보(揚普)공께서는 조선조에서 의정부 사인벼슬을 지내셨고 배위 덕산황씨께서 아드님 이(履) 지(地)형제를 낳았는데 휘地 선조께서 사헌부 장령과 증 호조판서의 벼슬을지냈고 배위 해주오씨께서 아드님 5형제를 두었으니 농암선조의 증손 다섯 할아버님(시조17세)이시며, 이른 바 五慶 할아버님으로 불리웁니다.
善慶(찬성공-문경현감), 之慶(경질공-대사헌), 三慶(생원공), 惟慶(언양공-언양현감), 成慶(헌남공-헌납)의 5경 조부님으로 농암파 종인들은 만나면 반드시 5경 중 어느 할아버지 후손인지를 서로 확인하지요. (참고로 저는 언양 현감을 지내신 4번째 유경(언양공파) 할아버님 후손이랍니다)
五慶 할아버님 중 특히 차남 之慶 조부님(시호-경질(景質),호-송파)은
우리 가문에서 시호를 받으신 11분 중 한 분으로 강호선생에게서 수업하여 대과급제후 호조참판,평안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개성부류수,대사헌을 지내셨으며 배위 신천강씨는 강호선생 사위 康惕의 누님으로 점필재 선생과는 동본 동항(17세)으로 종유하시면서 후진교육에도 힘써 장남, 문대공과 차남종사랑 형제와 아우 언양공 헌납공을 비롯한 자여질(子與姪) 이 대,소과에 다수 급제하여 “조선선비 반재영남 영남선비반재선산 朝鮮선비 半在嶺南 嶺南선비 半在善山)” 이라 할 정도로 울연히 선김 씨족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특히 문대공 선조를 조선전기 최고의 성리학자로 우리 농암파의 제일가는 자랑스러운 인물로 키워 내시었습니다. 역대 훌륭하신 선김 선조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문대공(文戴公)(시조18세, 시호-문대, 휘-응기, 호-병암) 조부님은
경전은 물론 천문지리와 역학 등에 달통하시었습니다. 성종 8년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시어 등제하신 후 성종 임금님의 경연 시강관을 거쳐 도승지, 삼도관찰사(경상,경기,강원)를 두루 역임하시었고 이.예.병.형.공의 5조판서를 지내신 후 우의정, 좌의정,영중추부사를 끝으로 서거하시니 사후 중종 임금님께서는 동방부자(동방의 공자)라 제하시었으며 증.영의정 벼슬을 내리시었습니다. 이러하듯 조선조 선김 문중 역사에서 최고 관직에 오르시어 선정을 펼치신 조부님의 뛰어난 업적과 인품은 근세들어 농암파로부터 문대공파를 분파시켜 18개파의 마지막 문대공 파조님이 되시었습니다.
現 시대에 와서도 농암파 종인 중
* 4선의 봉환 (시조 33세,농암파) 전 국회의원
* 前 한국 마사회 회장, 3선의 광원 (시조 33세, 농암파) 전 국회의원
* 前 과기부 장관과 4선의 영환 (시조 33세,농암파) 현 국회의원
* 前 상주대학교(경북대 상주 캠퍼스)총장. 기탁(基卓) (시조 31세.농암파)
*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한국 헌법학의 태두 철수 (시조 33세, 농암파) 박사
* 前 삼성 SDI 사장, 삼성그룹 부회장 순택 (시조 37세.농암파)
* 前 헌법재판소 재판관, 효종 (시조 35세, 농암파) 변호사
. 현 헌법재판소 재판관, 창종 (시조 34세, 농암파)
* 前 광주 고검장 대웅 (시조38세,농암파) 변호사
* 前 부산고법원장, 선거관리위원 영철 (시조 34세,농암파) 변호사
* 장군(육사36기) 국환 (시조 33세,농암파)
* 대구 변호사협회 회장 인수 (시조 34세,농암파) 변호사
等 농암파 후손들은 대종회 18개파 문중 중에서도 족보상 가장 많은 등재 종인을 기록하고 있으며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훌륭하신 많은 분들께서 사회 각계각층
(정치,교육,법률,국방,의료,사업,문화등)에서 큰 빛을 발하고 계십니다.
농암 파조님의 不事二君의 충절이 오늘날 조국사랑의 애국심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 善金의 후손들께서는 뿌리를 인식하고 선조의 행적이 오늘의 우리에게
삶의 지침을 제공해 주는 큰 원동력이 됨을 인식하시기를 소망해 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20만 선김 종인들과 농암파 후손들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난 善山(一善)金氏임이 무척이나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모두 선조님들의 이런 훌륭한 정신을 본받으며 현실에 충실하여
)가문의 역사를 더욱 빛내도록 다짐해 봅시다.
(호진. 시조 34세, 농암파. 부산) 중앙 청장년회 교육분과 위원장
이글을 종말이 감수하여 이번 종보에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