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이 밝았습니다.
올해는 <신아연의 조선왕조 웰빙실록>을 연재합니다.
조선의 왕들은 몸과 마음을 어떻게 관리해 왔는지, 무엇을 먹고,
어떤 운동을 하며, 스트레스 관리는 어떻게 했으며,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조선 27명 왕들의 ‘웰빙법’을 샅샅이 해부해 올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의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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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잎 냉수, 함흥차사 유래 남기며 74세 장수… 중풍 및 화병으로 사망
1392년에 나라를 세운 조선 1대 왕 태조 이성계(1335 ~ 1408)의 건강법은 단연 사냥이었다.
화살 일곱 발을 쏘아 일곱 마리의 노루를 잡았다고 하니 말 그대로 백발백중의 실력을 자랑했다.
단비 20마리를 한꺼번에 잡고 까마귀 다섯 마리의 머리를 한 꾸러미로 꿰고,
멧돼지나 호랑이도 거꾸러뜨렸다는 일화도 있다.
빙판 비탈길에서 말을 달려 짐승을 쏘아 맞힐 때도 한 마리도 놓치지 않았다고 하니
이러한 사냥 실력이 고려의 과녁을 정통으로 꿰고 역성 혁명을 성공시킨 동인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왕들의 운동은 사냥이 일반적이었을 뿐 아니라 사냥 실력이 곧 왕의 체력을 평가하는 중요 지표였다.
태조는 또한 격구에도 능했다. 격구란 “공을 길 복판에 던지면 왼쪽과 오른쪽의 대열에서
모두 말을 타고 달려 나와 앞을 다투어 맞힌 사람이 이를 얻게 되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물러가서 서게 되는 기예”라고 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태조는 공을 그냥 맞추는 정도가 아니라 몸을 뒤집어서 맞히기도 했다니
가히 공을 ‘가지고 노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환갑을 목전에 둔 58세에 개국을 하고
무려 74세까지 장수했으니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이 47세였던 것에 비한다면
태조는 타고난 건강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3명의 아내와 8남 5녀를 둔 것만 봐도 강한 체력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태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과 오른 후에도 중국 송나라 때의 제왕학
<대학연의>등을 열심히 읽으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군복무 중에도 휴식시간이면 유학자를 불러
경전과 역사서를 토론했고 특히 <대학연의>
보기를 좋아하여 밤중에 이르도록 잠들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대학연의>는 한 나라의 왕으로서 갖춰야 할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아우르는
통치자의 덕목을 기록한 책이다. 왜구 토벌 등 30년간 치른 각종 전투에서
그러나 태조는 사냥을 즐긴 것으로 미루어 성미가 급한 편이었던 것 같다.
재위 7년에 소갈증으로 고생하면서 수정포도(청포도)를 어렵사리 구해서 먹었다고 전해지는데,
포도를 구하는 과정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모양이다.
즉, 정상적인 진상 방식이 아닌, 사람을 전국 각지에 풀어서 했고,
더구나 청포도를 구해 온 자에게 쌀 10석이라는 상을 내린 일들을 두고
매사 절제해야 하는 유교적 군주답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애정을 쏟았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를 만난 사연에도
그의 급한 성격을 반영하는 면이 있다. 이성계가 우물가에서 물 한 잔을 청하자
급히 마시다 체할까 여인이 버드나무 잎을 띄워 건넸다는 그 일화 말이다.
그 영특한 지혜에 탄복한 이성계가 그 여인을 아내로 맞아 들이게 되니 후에 신덕왕후가 된다.
태조의 사망원인은 중풍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종실록에 보면 “태조의 병이 깊어 청심원을 드렸으나 삼키지 못하고 승하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아마도 평소 즐기던 육식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태종이 아버지 태조의 제사를 지낼 때
“평소에 즐겨 드신 고기반찬을 각별히 신경 써 준비하라.”는 명을 내린 것을 보면
태조가 육식을 좋아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태조의 사망원인으로는 아들 태종 이방원의 행태로 인한 울화병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심부름을 가서 오지 아니하거나 늦게 온 사람을 이르는 말인 ‘함흥차사’의 유래를 보더라도
태조의 화병을 짐작할 수 있다.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경도 함흥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고 있을 때 아버지와 화해를 청하는 몸짓의 하나로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기를 간곡히 청하는 태종의 차사를 죽이거나
잡아 가두어 돌려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혈육을 무참히 죽이고 왕이 된 방원을 애비로서 봐내야 하는 심정이 오죽 했으랴.
다섯 째 아들 방원이 형제들을 죽여가며 왕위를 찬탈할 무렵 태조가
“목구멍에 무엇이 걸린 듯 내려가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했던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화병 증세를 보였던 것 같다. 태조는 권좌에서 내려 온 이후
일절 채식만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걱정한 태종이 건강을 생각해서 제발
고기반찬을 드시라고 애원하다시피 했지만 태조는 술과 고기를 먹으면
다음 생에 머리 없는 벌레로 태어난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골육상쟁으로 왕위를 찬탈한 아들의 행태에 크게 다친 마음을 불심으로 달래기 위해서
육식을 포기했던 것이다.
첫댓글 건강에는 결국 먹고 자고 싸고 이 세가지를 잘해야한다는데 그게 쉽지않은것 같아요. 그리고 세상사 특히 권력.. 모두 허무한것을 ㅎㅎㅎㅎㅎㅎㅎ
그것을 잘 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지요. 저만해도 잘 자는 것이 참 힘들어요.
좋은 역사공부를 하는듯 합니다. 근데 너무 치사한 삶 ? ㅎㅎ
하는 수 없었겠지요.일단 살고 봐야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함흥차사가 거기서 유래되었군요 재밌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