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진주강씨종회 광주전남 원문보기 글쓴이: 관리자
강석기(姜碩期) 묘·신도비- 소헌세자의 장인-
-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영회원 내)
강석기[姜碩期, 선조 13년(1580)∼인조 21년(1643)], 자는 복이(復而), 호는 월당(月塘)·삼당(三塘), 시호는 문정(文貞), 이조참의 강찬(姜燦)의 아들로, 큰아버지 강돈(姜焞)에게 입양되었다.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제자로 광해군 8년(161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나, 광해군의 정치문란과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 등에 불만을 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인조반정 뒤 교리·대사간·대사성·도승지 등을 거쳐서 인조 14년(1636)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640년에는 우의정에 세자부를 겸하였다.
부승지로 있을 때 딸이 소현세자빈이 되었는데, 그 뒤 강빈(姜嬪)은 심관(瀋館)에서의 영리(營利 : 뇌물외교에 소요되는 자금을 마련하려는 것)로 인조의 불평과 역위를 꾀한다는 의심을 받던 중, 세자가 부왕에 의하여 독살된 뒤 강빈도 저주사건(역모)의 주모자로 모함되어 사사되었다.
그것을 ‘강빈의 옥’이라 하는데, 앞서 죽은 강석기는 관작을 추탈 당하였고, 그의 부인은 처형되었으며, 아들 강문성(姜文星)과 강문명(姜文明)은 장살 당하였다. 따라서 그의 가문은 역적 집안으로 멸문의 화를 당했다가 숙종 때 복관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영회원 농장입구에서 30m쯤 지나 굽은 도로 좌측에 신도비가 있고, 이곳에서 100m쯤에 좌측으로 첫 번째 농장 내 도로가 있는데 이 길로 150m쯤 들어가면 금천강씨 묘역 내강에 자리하고 있다. 봉분은 호석을 갖춘 원형무덤으로 묘역에는 묘표, 상석, 향로석, 문인석, 망주석이 있는데 상석은 고석이 없이 무덤 앞에 편평하게 만들어 놓은 장대석 위에 올려놓았으며 그 앞에 따로 안상과 운족이 새겨진 육면체의 향로석이 놓여있다. 문인석은 금관조복을 입고 홀을 턱에 대고 있다. 망주석은 운각(韻角 : 구름 모양의 다리)과 염의(簾衣 : 구슬발)를 간략하게 조각하였으며, 몸통는 팔각초석에 팔각기둥을 올린 형태이다.
신도비는 흑요암으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높이 154cm, 폭 61cm, 두께 30cm로, 비문은 동양위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평산 신익성(申翊聖)이 짓고, 이조참판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규장각직제학 시강원검교 보덕 여흥 민병승(閔丙承)이 글씨를 썼으며, 동지돈령원사 안동 김용진(金容鎭)이 전하였다.
문집에 《월당집(月塘集)》이 있다.
<강석기(姜碩期) 묘역 입구 : 멀리 구름산(옛 아방산)이 보인다>
<강석기(姜碩期) 묘역>
<강석기(姜碩期)의 큰아들 강문성(姜文聖)의 묘>
<강석기(姜碩期)의 7대조 강양(姜揚)의 묘>
<우의정 문정공 강석기(姜碩期) 묘>
【영중추부사 강석기(姜碩期)의 졸기】
영중추부사 강석기가 죽었다. 석기는 위인이 온화하고 근신하며 행검이 맑고 검소하였다. 일찍이 혼조(昏朝) 때에는 금천(衿川)의 시골집에 물러가 살면서 벼슬길을 단념하였다가 반정 이후에 사론(士論)의 추대를 받아 대각(臺閣)을 역임하는 동안 바로잡은 일이 많아 상이 매우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이조판서를 거쳐 마침내 대배(大拜)에 이르렀는데 비록 재상으로서의 내놓을 만한 업적은 없지만 세자빈의 아버지인데도 가택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고 귀한 형세로 사람들에게 행세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로써 더욱 훌륭하게 여겼다. 세자빈이 이때 심양에 있었는데 예조가 계청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 따라 13일 동안 공제(公除)1718) 의 예를 행하는 것에 대해 강정하여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빈이 지금 이국에 있으므로 압존(壓尊)해야 할 일이 없으니 공제의 예는 거론하는 것이 마땅치 않을 듯하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길흉의 예는 각기 한 시대의 제도가 있습니다. 지금 이 공제의 예는 대개 압존 때문에 일수를 내려 깎아 줄이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세자가 비록 불행히 저곳에 계시기는 하나 지역이 멀다는 이유로 구별이 있을 수는 없고 저곳에 계시거나 이곳에 계시거나 압존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제도를 다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44권, 21년(1643) 6월 13일(을해)》
<강석기(姜碩期) 묘 후경>
<강석기(姜碩期)의 부모 강돈(姜焞)과 안동김씨의 묘>
<금천강씨 묘역 후경>
<강석기(姜碩期)의 다섯째 아들 강문명(姜文明)의 묘>
<강석기(姜碩期) 신도비>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시 문정 월당 강선생신도비명 병서
수록대부 동양위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평산 신익성(申翊聖) 찬(撰)
가의대부 이조참판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규장각직제학 시강원검교 보덕 여흥 민병승(閔丙承) 서(書)
가선대부 동지돈령원사 안동 김용진(金容鎭) 전(篆)
고 영중추부사 월당(月塘) 강공을 금천현 남쪽 아방리(鵝房里)의 선영에 예장하고 대제학 이식(李植) 공이 묘지를, 제주 정홍명(鄭弘溟) 공이 묘표를, 이조판서 이명한(李明漢) 공이 행장을 쓰고, 사시(賜諡)의 은전을 청하니 봉상시에서 시호를 논의하여 시호를 문정이라 하였는데, 유사(有司)가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 위의(威儀)를 갖추고 와서 이를 반포하였다.
그 자제 강문성(姜文星)등이 부복하여 나를 찾아와 이르기를, “저의 선군의 거취에 대한 처음부터 끝까지의 대절을 이와같이 거짓이 없음을 상고할 수 있습니다. 은총을 입어 물건을 내려 돌보아 주시고 고할 수 있도록 증사(贈賜)가 계시니, 이른바 죽은 이를 측은히 여기고 높이는 일이 구비되었다 하겠습니다. 법에 응당 신도에 비를 세워 후세에 알리고 자손에게 보이는 데에 말이 있어야 옳겠기에 감히 이를 청합니다.” 하였다.
익성(翊聖)이 공의 뒤를 좇아 행동한 지 거의 30년이나 되었고, 또 일찍이 공의 명으로 선의정공의 묘에 명(銘)을 지었으니, 공에게 명을 지음에 있어 할 말이 없다 하여 사양하겠는가? 내가 생각해 보면 공은 일찍이 사훈(師訓)에 응하여 취사에 법도가 있었으며,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사람들이 모두 옛사람의 일에 따르도록 요구하였으니, 지난 일을 상고하여 실적을 특서함에는 마땅히 큰 것만을 들어야 한다. 그 가첩에서 추리고 제공들의 서술을 참고로 하면, 가정에서는 수신제가의 실이 있었고, 조정에서는 우국애민의 정성을 다하였으며, 혼조를 맞이해서는 나아가지 않았고 성대에 임하여서는 곧바로 강화를 논의한 당부와 의례의 시비에 있어 한결같이 바른데서 나왔으며 이해나 화복에 흔들리지 않았다. 또 능히 생사와 실패의 와중에서도 안정을 유지하였고 충현이 화를 입었을 때 몹시 걱정을 하면서도 마음에는 대의를 간직하고 묵묵히 윤상을 부식(扶植)하였으며 그 역량은 비록 미치지 못하는 바 있었으나 그 정성과 도량과 확신은 옛사람에 견주어 대체로 부끄러움이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석기(碩期)요, 자는 복이(復而)이다. 시흥강씨(始興姜氏)는 고려 벽상공신 강궁진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강궁진이 인헌공 강감찬(姜邯贊)을 낳으니 현종을 섬겨 중흥시킨 공이 있었고 벼슬은 장.상(將.相) 모두를 맡았으며, 본조에 와서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그 후 창대하기 시작하여 큰 벼슬이 이어졌는데, 이미 조천이 되고 제를 지내는 이를 들어보면 사간원사간 강숙굉(姜叔宏), 소격서 참봉 강뇌(姜뇌), 삼등현령 강유경(姜惟慶)은 곧 공의 고조. 증조. 조 3세이다. 고 휘 찬(燦)은 이조참의로서 선묘조 명신이 되어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광주김씨 첨지 김은휘(金殷輝)의 딸을 맞아들였는데,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만력 경진년(1580년 선조13년) 3월 9일에 공을 낳으니, 백부 조지서별제 휘 순(焞)이 길러 사자로 삼았다. 별제공의 배위는 안동김씨로서 시정(寺正) 김덕곤[金德鵾, 익원공파 영의정 김수동(金壽童)의 종손] 의 딸이다. 뒤에 공이 귀하게 됨으로 해서 별제공에게 의정부 영의정이 추증되고 부인의 증작도 그 품질에 견주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장증하였고 정신과 식견이 범상치 않아 어리지만 성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약관에 사계 김선생(金長生)을 좇아 성리와 예가의 여러 책들을 수업하여 독실히 탐구하니 학업은 날로 발전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참판공이 세상을 뜨고, 의정공 및 그 부인이 서로 이어서 작고하였으므로 복제 6년을 무신년(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마치고 4년 뒤인 임자년(1612년 광해군 4년)에 생진시에 입격하였으며, 병진년(1616년 광해군 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다. 이때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지면서 적신 이이첨(李爾瞻)이 모후를 폐하자는 논의를 일으키자, 공은 곧 강을 건너 묘막에 거처하면서 세상과 단전하였다. 무오년(1618년 광해군 10년)에 사화가 일어나면서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이는 모두 귀양하거나 죽임을 당하였는데, 공은 이때 견책을 기다리다가 구핵하기 전에 성상(仁祖)께서 반정을 하여 공을 예문관에 추천하였으나 친혐으로 해서 나아가지 않았고, 박사를 거쳐 성균관전적에 승진하였으며, 가을에 병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벼슬길이 크게 열리며 화려한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정언. 헌납. 사간. 집의. 수찬. 교리. 응교. 전적은 삼사의 관직이요, 직강. 사예. 사성은 사유이다. 좌랑과 정랑으로 재직하여 이조를 도왔고,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곧바로 사인에 임명되었으며, 여러 시(寺)의 경우 종부. 예빈. 장악. 제용 등의 정(正)을 거쳤다. 겸대의 경우는 시강원의 사서. 문학. 필선. 보덕을, 교서관의 교리, 문신선전관 외지제교 등 늘 삼자함을 띠었으며, 빈사를 따라 경상(境上)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공이 강관이 되어서는 글 뜻을 분석하고 시사를 전달하여 경계하고 도움되는 일이 깊고 간절하였으며, 대간으로 있을 때는 관리들의 부정을 규명 탄핵하되, 귀근을 피하지 않고서 기강을 진작시키고 사정을 가리는 데 더욱 마음을 두어, 목성선(睦性善). 유석(柳碩). 황호 등 패거리로 문란케 하는 해를 배척하고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의 그릇된 의례를 탄핵하였다. 정묘년(1627년 인조5년)의 강화에 강력 반대하면서 강홍립(姜弘立)을 참하고 간관 윤황(尹煌)을 구해야 한다고 글을 올렸는데, 내용이 매우 격렬하였으므로 내쫓겨 양근군수로 임명되었으나, 대신과 삼사의 반대에 힘입어 중지되었다. 오랜만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는데, 그 해 9월에 세자빈의 간택령이 내려져 공의 따님이 선정되고 12월에 가례가 이루어졌다. 병조참지. 참의를 거쳐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을 지냈으며, 무진년(1628년 인조 6년)에 도승지로서 목릉(穆陵 선조의 陵號)의 개봉례에 참여하여 가선대부의 품계가 더해졌다. 그리고 내의원부제조로서 자전에 시약함으로써 상으로 가의대부의 품계가 더해졌다. 이, 병 양조의 참판 겸 동지춘추관사. 부총관을 지내고 임신년(1632년 인조12년)에 인목대비의 산릉이 완성되자 도승지로서 자헌대부의 품계가 더해졌으며, 지돈령부동지경연사를 거쳐 예조판서. 좌부빈객을 지냈다. 다음해인 계유년에 대사헌으로서 원종대왕의 입묘 문제를 논하다가 임금의 엄지로 삭탈관직되어 도성문 밖으로 쫓겨났는데, 2년 뒤인 을해년 6월에 용서를 입었고, 병자년(1636년 인조 14년)에 원손이 탄생하여 경사를 반포하면서 서반직에 다시 임명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이조로 옮겼는데 세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윤허치 않았다. 겨울에 풍질에 걸려 위비가 심하자 임금이 어의를 보내고 약을 내려 치료하였는데, 공이 강력히 사임하여 전병을 해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12월에 서변의 보고가 갑자기 닥치자 조정에서는 도성을 철수할 것을 결정하여 늙고 병든 재신에게 먼저 강화로 들어가라 명하였는데, 공은 빈궁을 따라서 나아갔다. 적병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임금은 길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는데, 공의 병이 걱정과 분한 생각으로 인하여 위독해져 강화에 대한 조치를 들을 수 없었다. 강화가 적의 손에 들어가게 되자 곧 세 번씩이나 자진하려고 하였으나 빈궁으로 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빈궁을 보호하여 남한산성 아래에 이르러 진중에 들어가지 않고 흰옷으로 임금을 길가에서 맞이하여 땅에 엎드려 통곡하니, 임금이 부액하여 가까이 오게 하라 명하고 한동안 위로하였다. 여름에 다시 이조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백관들이 위차를 떠나 궁부가 쓸쓸하였으므로, 인사의 임명과 전보를 편의에 따라 보충하니 조정은 문란하지 않고 위계는 점점 안정되었다. 가을에 사임하고 중추부로 나아갔는데 당시의 상신에 변경을 주장하는 자가 있어 취사에 자못 혼란이 있어 공이 불가함을 드러내 말하였다. 이로써 반감을 사게 되어 강화에 있을 때의 일을 매개로 삼으려 하였다. 황호가 장령으로서 틈을 노려 공손치 못한 말을 하자 공론이 옳지 않게 여겨 그 논의는 저지되었으나, 마침내 이조판서에 임명하라는 명은 시행되지 않았고, 예조판서와 참찬도 역시 모두 임명되지 않았다. 경진년(1640년 인조 18년) 봄에 우의정에 승진하였는데, 공은 더욱 머뭇거리며 세 번씩이나 사임하였으나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든 몸을 이끌고 등대하여 품은 뜻을 숨김없이 모두 말하였다. 이해 겨울에 의주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일이 있어 대신과 중신이 붙들려 가자 나라 안은 크게 술렁였다. 김상헌(金尙憲) 공 들을 고발하는 이가 있어 일이 장차 헤아릴 수 없이 되었는데, 공이 홀로 묘당에 있으며 밤낮으로 걱정하여 온갖 구제할 방법을 강구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직접 가도록 명하니, 공이 서둘러 길을 떠났다. 조금 뒤에 의주에서 다시 다른 상신을 요구하였으므로, 소환되어 간사의 파견을 논의하여 문건을 가지고 가서 사실을 밝히도록 하였는데, 비록 곧 석방은 되지 못하였으나 기괄이 좀 늦추어져 자못 은밀히 도운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공은 더욱 지위에 편안치 않았다. 다음해인 신사년 봄에 병을 내세워 진정하여 앞뒤로 수십 번 글을 올렸으나 임금은 여러 차례 승지를 보내 효유하며 윤허치 않았다. 공이 위비를 앓아 잘 걸을 수 없게 되자 전(殿)에 오를 때마다 내시에게 명하여 부액하여 출입하게 하니, 공은 더욱 송구스럽게 여겨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사양하였다. 그런데 겨울에 가서야 비로소 우상을 해임하고 판중추부사로 임명하였으며 얼마 뒤에 영중추부사로 승진하였다. 공은 비록 의정의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나랏일에 늘 깊이 생각하고 걱정을 하였는데, 죽음에 임하여 유소를 초하려고 자제에게 종이와 붓을 올리게 하였으나 정신과 생각이 이미 미치지 못하였다. 세수하고 머리를 빗으며 집 안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일 나는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때가 되자 과연 그렇게 되니 곧 임오년(1642년 인조 20년) 6월 13일이었다. 부음이 알려지자 3일 동안 조정의 정무를 정지하고서 중사. 승지. 예관을 보내 조문하고 사제하였으며, 관에서 장사를 돕게 하였다. 9월 초 5일 장사를 지냈는데, 신좌의 언덕이었다.
공은 고령신씨와 혼인하였는데, 증 이조판서 신식(申湜)의 딸이다. 5남 3녀를 낳으니, 맏이 강문성(姜文星)과 다음 강문명(姜文明)은 모두 현감이요, 다음 강문두(姜文斗)는 진사이며, 다음 강문벽(姜文璧)은 감역이요, 다음 강문정(姜文井)은 진사이다. 딸 맏이는 응교 정태제(鄭泰齊)에게 출가하였고, 우리 세자빈은 둘째이며, 다음은 진사 이홍상(李弘相)에게 출가하였다.
강문성은 5녀를 두었는데, 맏사위는 여안제(呂顔齊)요, 다음은 김진수(金震粹)이며, 다음은 여성제(呂聖齊)요, 나머지는 출가하지 않았다. 강문명은 2남 2녀를 두었고, 강문두는 1남 3녀를 두었으며, 강문정은 공보다 먼저 죽고 아들이 없다. 세자빈은 원손을 탄생하고 별손 하나와 군주 셋을 두었으며, 이홍상은 1남 1녀를 두었다.
내가 무오년(1618년 광해군 10년) 가을에 금천(衿川)으로 공을 방문한 바 있었는데, 초가 두어 칸에 주위가 쓸쓸하였다. 자그마한 못을 파고 공은 그 사이를 거닐면서 유유자적하며 그곳에서 일생을 마칠 것처럼 하였는데 월당(月塘)이란 호는 대체로 이에 뜻을 둔 것이다. 그의 의표를 보면 장대하고 훤칠하며 논의가 정대하여 속류의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공의 행실을 보고 공의 덕을 보건대, 효도와 우애의 정성스러움은 천품에서 나왔다. 돈후한 자질에 학문이 밑받침되었으며, 내 몸을 신칙하는 데 전념하여 몸이 따르지 못함을 수치로 여겼다. 청빈하고 조행을 닦으며 남이 알 것을 두려워하였고, 예로 스스로를 다스리며 참고될 만한 증거도 치밀하게 하여, 책상에는 청탁하는 편지가 없었고 문에는 사사로이 뵈려는 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