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순례여행(16) - 1월 5일: 봉동에서 만난 신학동창생목사님
눈이 많이 내려서 걷기가 매우 불편했지만 봉동읍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에서 삼례읍을 거쳐서 봉동읍으로 갑니다. 약 6시간 정도 걷는 거리입니다. 출발은 좀 늦었습니다. 눈덮이 길을 걷기는 힘이 들었지만 걸으면 힘이 났습니다. 익산을 벗어나는데 아파트 앞에 가로수가 인상적이었고 나무위에는 새집이 높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눈덮인 걸을 걷기가 미안했습니다. 순백의 대지위에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이 못내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멀리 산야가 들어옵니다. 아름다운 산야입니다. 황목사님이 전화가 왔습니다. 어디까지 왔는가 묻고 차로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습니다. 환영은 감사하지만 그냥 힘이 닫는 대로 걷겠다고 했지요. 항상 걷기를 시작할 때는 유혹이 옵니다. 오늘만 차를 타볼까, 아니면 버스를 타다가 걸어볼까 이러한 생각이 들지만 우선 무조건 걷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정리가 됩니다.
우리들 인생도 종종 이런 생각 저런 생각만 하다가 시간을 허송세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인가 움직여야 하는데 생각만 하다가 세월을 보내고 맙니다. 돌다리는 건너야 하는 것이지 안전한지 두드려보고만 있으면 안될 것같습니다. 물론 돌다리의 안전점검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국 인생은 모험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폴 투르니에라는 세계적인 상담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원래 가정의학과 내과계통의 의사였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의사일보다는 심리상담가로 큰 영향력을 끼쳤던 분입니다. 이 분이 책을 한 권을 썼습니다. 몇몇 분들에게 출판관계를 상담해보니까 여러가지 책들이 홍수처럼 나와 있는데 굳이 그런 책을 낼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이 다수였다고 합니다. 이 분이 만약 그러한 부정적인 반응에 귀를 기울이고 책출판을 그만 두었다면 상담계통의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러나 출판을 감행했지요. 그 후에 이 분은 세계적인 상담학자가 되었어요. 한국에도 가장 많이 팔리는 작가 중에 한 분이 되었습니다. 이 분이 썼던 "모험으로 사는 인생"을 감명깊게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얀 눈으로 덮여있는 한국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를 지나갑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은 언제 다시 걸을 수 있는 길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요. 대지를 사랑해야 합니다. 땅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이 땅에 수많은 우리 조상들이 땀을 흘리고 가꾸고 자식을 기르고 이웃과 더불어 오랜 역사를 살아왔던 것같습니다. 그들의 숨소리와 음성이 들리는 것같습니다. 논에 물을 대느라고 서로 싸움박질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열심히 모은 돈으로 익산으로 전주로 서울로 자녀들을 유학을 보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돈을 모아서 자식들 장가도 보내고 시집도 보냈겠지요. 어떤 사람은 지주였고 어떤 사람은 소작인이었고 어떤 사람은 자영농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지나갔던 역사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들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이 땅에 세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할 것같습니다.
삼례읍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 우석대학교가 있었습니다. 우석대학교가 전주에 있는 줄 알았는데 삼례읍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오뎅과 붕어빵을 파는 집이 있어 길손이 들려서 오뎅을 시켜서 먹었습니다. 천원에 두 개짜리가 있고 네개 짜리가 있는데 네 개 짜리를 먹었습니다. 마음씨 좋은 아줌마는 자기 나름대로의 오뎅국물에 들인 정성을 이야기하면서 오뎅국물이 일품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뎅국물이 맛이 있었습니다. 붕어빵도 검은쌀 붕어빵입니다. 암에도 좋고요, 정력에도 좋다는 것입니다. 길을 떠난 나그네에게 정력이 좋아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붕어빵 아주머니에게 속으로 화이팅을 외쳐드렸습니다. 언제 보아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 일이 비록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치가 없어보일지 몰라도 주님이 보시기에는 귀한 것입니다. 내가 받은 달라트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서 그 일에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붕어빵을 사려고 왔던 60대 정도에 해당되는 아주머니는 살기가 힘들어 적금도 모두 해약했다는 것입니다. 힘들게 사는 것보다는 절약을 할 수는 없지만 여유있게 사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자신의 결론이라고 합니다. 현명한 선택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너무 어렵고 찌들리게 살면 인간의 품성자체도 많이 왜곡된다는 생각을 종종 해보았습니다. 이 붕어빵 장수도 길손에게 행운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민초들의 마음씀씀이가 착하고 좋군요. "아주머니, 주님 안에서 행복하세요."
멀리 눈덮이 산야가 들어왔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환경입니다. 자연은 저렇게 아름다운데 인간들은 탐욕으로 저것을 마구 개발해서 몸살을 앓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기후재앙이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같습니다. 인간들은 좀 더 편리하게 살려고 큰 차, 큰 집, 좀 더 시원하게, 좀 더 따뜻하게 살려고 하다가 석탄, 기름을 함부로 남용하고 지구촌에 있는 거대한 삼림들을 마구 남벌해서 기후재앙이 오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인도양과 태평양에 있는 섬나라들이 없어지는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구가 몸살을 앓으니까 홍수, 냉해, 지진, 가뭄, 사막화, 해일 등이 더욱 심해지는 것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은 인간이 탐욕을 채우기 위한 이용물이 아니라 인간들이 사랑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가장 좋은 인간의 벗인 자연을 학대했으니 그 벗으로부터 인간들이 당해야 하는 댓가도 가혹할 것입니다. 늦었지만 우리들이 참된 벗인 자연과 더부어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해야 할 것입니다.
가다가 동학농민길이라는 길이 인상적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곳에서 고부군수 조병학의 학정에 반대한 농민들이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농학군을 형성해서 관군과 전쟁을 벌여서 한 때는 승승장구하다가 나중에는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지요. 비록 실패한 농민전쟁이었지만 억울한 민초들의 인권을 찾기위한 매우 가치있는 투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냥 참는 것이 능수는 아닙니다. 불의에 맞서서 항거하는 일이 아름답습니다. 비록 싸우다가 얻어 터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악한 세력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이 능사는 아닌 것같습니다. 열심히 싸워서 진리를 향한 횃불을 들어야 합니다.
동학은 원래 최재우의 인내천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이고 민심이 천심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주권재민사상이고 백성들을 하늘처럼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2대 강령중의 하나인 이웃사랑과 맥을 통한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러한 불의에 대한 투쟁이 이 땅에 민주화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2차 대전 후에 가장 성공적인 역사로 평가를 받는 한국의 20세기 후반의 역사는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성공시켰습니다. 그러한 모태는 저 들판에서 땀을 흘렸던 민초들의 성실함이었고 불의에 항거했던 동학혁명전사들의 피흘림이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봉동읍을 4km 정도 남겨놓고서 너무 지쳤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여독이 조금은 밀려오는 것같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 가게 앞에서 자판기 커피를 하나 뽑아들고 길손의 피곤함을 달랬습니다. 삼백원의 행복이 이런 것이지요. 삼백원에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삼천원이 삼만원이 주지 못하는 행복이 이런 것입니다. 걷다보면 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행복해보입니다. 때로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저녁마다 잠자리를 염려해야 하는 길손이다보면 저녁에 고정된 잠자리라도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지를 생각해봅니다. 그렇기에 노숙자들의 삶이라는 참으로 불행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멀쩡한 집을 놔두고 노숙을 하는 분들도 있는 것같습니다. 이들에게는 직장에서 쫓겨나고 인생에서 실패해서 가정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스스로 집을 나와서 노숙을 선택한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들은 환영받지 못하는 집보다는 자신들이 불편하지만 부담이 없는 노숙이 더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나그네의 상념에 이런 생각 저란 생각을 하게 되는 것같습니다.
버스를 타고 봉동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봉상교회까지 갔습니다. 읍단위에 있는 교회이지만 이곳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교회입니다. 필자가 가족치유상담센터를 운영하면서 여러 곳에서 강의사역을 하고 있을 때 황갑순목사님은 광주서석교회에서 시무하실 때에 초청해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번 여행에서 꼭 만나고 싶어서 익산에서 전주로 가는 길을 바로 택하지 않고 봉동읍을 통해서 전주로 가기로 했습니다. 교회에 도착하자 반갑게 마중을 나왔습니다.
반가운 만남을 갖고 왕궁온천탕을 갔습니다. 이번에는 목욕은 원함도 없이 합니다. 어제밤에도 목욕을 했고 아침에도 목욕을 했는데 저녁에 또 목욕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팔자가 느러진 사람입니다. 물론 저에게는 찜질방에서저녁 목욕과 아침 목욕은 저의 숙소인 찜질방에서 통과의례이기도 합니다. 이 번 목욕은 친구목사님의 환대입니다. 왕궁온천텅은 시설도 물도 좋고 넓고 모든 것이 넉넉했습니다. 여행길에 피로를 풀도록 한 황목사님의 특별한 배려입니다. 그렇지요, 이 번에 만났다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는지 내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천국으로 귀천하는 동기돌도 벌써 여러 명이 있습니다. 황목사님과 함께 장신대 신대원에 35세의 나이로 79기로 입학했던 네 명의 동기들 중에 한 명이었던 고 이윤민 목사님은 벌써 오래 전에 귀천을 했습니다. 그 사모님이 님의 뒤를 따라서 여전도사님으로 목양사역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딸이 시집을 가게 되어서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가면서 다른 네 명의 동기목사중의 한 분인 허명목사님을 방문하게 되었답니다.
나도 이윤민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기숙사에서 있을 때에 종종 우리 방에 놀러오기도 했었지요. 늘 너털 웃음을 잃지 않았던 이 목사님, 노량진교회에서 섬기다가 목사안수 받고 얼마 되지 않아서 소천을 했습니다. 짧고 굵게 살다가 가셨지요. 물론 머지 않아 우리들도 님의 뒤를 따라 갈 것입니다. 이곳에 남아있는 동안 우리들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들의 도리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모님과 자녀들의 남의 생애에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빌었습니다.
목욕을 한 뒤에 황목사님은 제법 비싼 고깃집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한우등심집으로 가서 맛있는 식사를 했습니다. 처음으로 안내해준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모텔방에서 텔레비전의 채널을 오랫만에 이것 저것 돌려보았습니다. 조용한 시간을 보내면서 다음날 일정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대전에서 목회하는 강종인목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여행길에 한 번 동참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목포에서 증도가는 길에 동행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님, 여행길에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까지 안전하게 지켜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봉상교회를 축복해주시고 황갑순목사의 목양사역과 가정을 축복해주시고 완주군의 모든 가정들의 치유와 회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