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차 18년 06월 07일 (목)
❍고창고성
14:50분 사막투어를 마치고 고창고성으로 향하였다. 투루판시에서 동쪽으로 40㎞ 떨어진 화염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서유기로 유명한 화염산과 고창고성은 매우 가깝다. 고창고성으로 가는 길은 포도농가 마을을 지나 화염산을 우측편에 끼고 가다 보면 유전지대를 지난다 매장량이 어마어마한 유전밭이다
인도판이 대륙과 합치면서 희말리아 산맥 그리고 중국의 천산산맥을 형성하고 바다가 육지로 되면서 생겨났다 유전지대를 지나 30여분 가다보면 한인 이주지역이 나온다 화염산 앞 양자강 홍수 때 이주한 사람들이다 화염산 아래에 오아시스가 펼쳐져 있는 곳에 고창고성이 있다
16:00고창고성에 도착하였다. 고성 앞 광장에는 현장법사의 동상이 있고 매표소에서 검색을 받고 전동차를 타고 고창고성안으로 들어 간다 고창고성은 황량함 속에 옛 고대인들의 생활자취를 그대로 엿볼 수 있는 곳이다. 499년 한나라 출신인 국문태가 고창국을 세워 1275년 원나라에 의해 망한 옛 고창왕국의 유적지다. 지금은 불타오르는 듯 화염산을 배경으로 폐허만 남아있다.
기원전 1세기에 고창벽이 지어졌으나, 13세기에 전쟁으로 훼손되었다. 흙벽돌로 축적된 사각형으로, 벽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버들가지나 마른풀을 섞었는데 황국이 멸망한 후 주위 농부들이 벽돌을 깨서 비료로 쓰는 바람에 폐허가 된 것이다. 지금은 사원과 궁전 유적 이외에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파손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성의 윤곽은 남아 있다.
고성은 장방형으로 매우 크고 길이는 5㎞이며, 외성, 내성, 궁성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지금은 외성, 내성 터는 거의 없고 궁전이 있던 성터만 남아 있다 평민 유적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궁성 유적지의 중요한 유물들은 대부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러시아ㆍ독일ㆍ영국ㆍ일본 등의 소위 탐험가들에 도굴 당했다.
고성의 맨위엔 대불사 사원터가 있고 사원터안에 현장법사가 설법하던 설법당이 있다. 현장법사가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갈 때 이곳을 들렸는데 고창국왕의 간곡한 권유로 한달동안 이곳에서 설법을 했다. 한달 후 천축으로 갈 땐 왕의 호의로 여타 다른 나라를 쉽게 통과하여 갔는데 그 후 현장법사가 천축에서 돌아 올 땐 고창국은 망하고 없었다 현장법사가 지나가다설법한 왕국는 모두 망했다 고창고성에서 보는 화염산은 붉은색을 띄고 화염에 이글거리고 있다.
※서유기에서 묘사된 현장법사
삼장법사로 묘사되며 불경을 구하러 천축으로 가던 도중 옥황상제에게 싸움을 건 죄로 산 밑에 500년째 깔려있던 손오공의 형벌을 면제해주고 손오공을 통제하기 위해 손오공에게 금고아를 머리에 씌운다. 그 이후 손오공을 데리고 다니면서 천축으로 향하던 도중 저팔계와 사오정을 만나 일행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삼장,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불경을 구하러 천축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여행 도중 여러 요괴들을 만나지만 손오공의 활약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런데 일방적인 것은 거의 전부의 요괴는 모두 손오공이 무찌른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