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친구’영화 보는데 네 생각 나더라.”
“응, 나도 봤는데, 나두 네 생각했다. 캬! 우리 야영 다닐 때 생각나더라,
후배들하고 몰려 다니며 우리도 뭐 조직 비슷했잖냐? 하하하...”
요즈음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는 “친구”라는 영화를 보고, 국민학교 때부터 친구인
부산의 J목사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대뜸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라는 영화를 보면서, 저 역시 30년 넘은 친구인 J목사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아 생각나데요, 뭉게뭉게 연기 뿜으며 달리던 소독차,
바다는 아니지만 논가의 웅덩이에서 발가벗고 멱감던 일,
영화 “대부”보러 나갔다가 이웃학교 훈육 선생님께 걸려서
그 다음날 생활지도부실에 끌려가서 직싸게 얻어터지고 반성문 1주일 쓴 일 등등...
회사의 직원 10여명과 단체로 관람을 하였는데, 선생님이 그렇게 학생을 몽둥이 찜질하는
장면에서는 30대 초반 혹은 그 미만의 우리 회사 직원들은 전혀 이해를 못하거나 공감을
하지 못하는 표정들이었습니다(참고로 아직 못 보신 분들을 위해서 조언하자면, 너무 진한
육두문자가 남발하니까 연인 사이는 물론이고 남녀가 같이 가서 관람하시면 괜히 서먹해
집니다.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가서 관람하셔야 합니다. 절대로 가족영화는
아니니, 식구들과 단란하게 한판 보실 생각이셨다면 즉시 궤도 수정을 하십시오).
“아, 글쎄 우리 때는 정말 저랬대니까. 선생님들이 학교‘짱’을 개 패듯이 해도
그냥 맞고만 있었다구. 영화에서만 그런게 아냐.”
(정말 우리 때에는 유리창을 깨면 깼지, 아무리 학교"짱"이라도 감히 스승님을
구타할 생각은 꿈에도 못했잖습니까?...)
“맞아맞아, 우리 때에는 롤러스케이트장에 가거나 빵집 가는게 고작이었지.
어? 프로스펙스 폴라 목도리, 저거 진짜루 있었던거야. 진짜루 매장에서 팔았다구.”
그게 불과 20-25년 전의 일인데, 아득한 ‘전설의 고향’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마 지금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또 30년쯤 흐른 뒤에 그러겠지요.
“야, 우리 때는 인터넷 채팅이 유행이었다구. PC방이라는 것이 있었지.
맞아맞아, H.O.T 하구 핑클 노래가 유행이었어...”
뭐 이러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친구 한명만 있어도 삶이 풍요하고 인생을 성공한 것이라는데,
행운인지 축복인지 제게는 “진정한” 친구라고 말할 친구가 자그만치 네명이나 있습니다.
그저그런 친구가 아니라, 정말 마누라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는, 서로를 위해
죽을둥살둥 하는 그런 친구 말입니다.
이규태님의 “선비의 의식구조”라는 책에 보면, 옛날엔 폭군 임금이 나오면
선비가 목숨을 걸고 임금의 누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합니다.
폭군 임금은 “폭군”답게 기분 나쁜 상소가 올라오면, 궁궐 밖에 꿇어 앉아있는
선비를 불러다가 융숭한 대접-이 아니라 댕공! 참수를 했겠지요.
자기 목숨 잃는 것이야 각오를 했겠지만, 그 가족들은 어쩌라고 그랬을까요?
이규태님의 주장에 의하면, 바로 친구 사이의 의리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즉, 상소를 올리러 가면, 죽은 친구의 가족들을 살아남은 친구가
책임지고 먹여 살렸다는 것입니다. 선비라는 직업(?)이 입바른 소리나 하고
공자왈맹자왈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니까 자기네 먹고 살기도 버거운데,
이렇게 목숨을 잃은 친구의 식구를 거둬 먹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알았고, 죽으러 가는 친구도 식구들
걱정은 절대 하지 않을 정도의 신념있는 의리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폼생폼사!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 - 가 신조인 본인도 그런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친구라면 세상 무엇보다 앞서는 우선 순위어야 한다고 믿으며 오늘을 당당히(?)
살고 있습니다. 옛이야기에서 들었듯, 친구가 살인을 하더라도 감춰주고 돌봐
주는 것이 친구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도시의 농사꾼 같은 신념으로 말입니다.
제가 혹시 상소문 올리러 가서 댕공!하거나 막판에 밀려서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옛이야기처럼 저를 이해해주고 품어줄 진짜 친구 네명은, 감사하게도 일찍 혹은
늦게나마 모두들 예수를 믿고, 이제는 저보다 훠얼씬 좋은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부산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위에서 언급한 J목사입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친구인 J는, 눈물나는 추억이 너무 많은 친구입니다.
대학 1학년 때, 응어리 진 혈기를 풀어보려고 서울시청에서 부산시청까지 혼자서
배낭 메고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시절은 하수선하야 계엄령 선포에 학교는
문닫고 해서 11월 1일 아침 10시에 서울 시청을 떠나서 11월 11일 오후 1시 15분에
부산 시청 앞에 도착했습니다. 배낭에 완전군장(?)하고 타박타박 걸었는데,
수원까지 걸은 첫날에 발에는 물집이 여덟 개나 생겼습니다. 추수 끝난 논밭에
텐트를 치고 자며 걷다가,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잠은 역전의 쪽방에서 자면서
부산을 향해 걸었습니다. 부산에 거의 도착할 무렵에는 수중에 돈 한푼 없고,
기진맥진해서 초주검이 된 상태였습니다. 혹시나를 대비해서 땡전 한푼 들어있지
않은 국민은행 통장과 도장은 갖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보이스카우트 사무실에서
먹고자고 하던터라, 보이스카우트 사무실에 전화를 하니, J목사(당시에는 신학생으로
전도사였습니다)가 있더군요. 국민은행으로 돈 좀 부쳐달라고, 서울 올라갈 차비도
없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부랴부랴 길재촉을 하여
5시가 거의 되어서 시내 국민은행에 도착하였습니다. 셔터가 내려진 국민은행의
경비 아저씨께 사정사정해서 들어가 통장확인을 해보니, 5만원이 입금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희 대학 등록금이 50만원 정도였으니까 5만원이면 꽤 큰돈이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J목사, 자기도 땡전 한푼 없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빌려서
급하게 돈을 넣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저보다 먼저 미국 이민을 가시고 저는 아버님 초청으로 1년 뒤에야
미국 이민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자취 아닌 자취를 하게 된
저는 그야말로 굶기를 밥먹듯 했지요. 보름달이 훤하게 밝히던 어느 여름날 밤에,
J전도사가 뜸금없이 서울서 영종여객 시외버스를 타고 저희집을 찾아 왔더랬습니다
(저희 집은 그때 동두천 시내에서 차를 내려서 40분 쯤 걸어야 하는 동두천 외곽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괜스레 문턱에 앉아 너스레를 떨다가 막차 놓친다며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친구가 다녀간 훈훈한 마음에 잠자리에 들려다가 문득,
성경책 갈피에 무엇이 끼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J전도사가 놓고간 10만원과
간단한 메모였습니다. “쨔샤, 먹는 것 거르면 안된다.” 보름달 휘영 밝은 여름날 밤에
친구가 고마워서 꺼이꺼이 울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그당시 전도사 월급이
10만원이었습니다. 그 친구도 집안이 넉넉지 못하여 아르바이트 해가며 신대원학비를
조달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한국에 나올 때에도 저는 집이며 사업을 정리하느라 가족들보다 1년 늦게 나오게
되었는데, 이때에도 J목사는 교회에서 휴가를 내어 친구가 적적할까봐 없는 돈에
미국 비행기표 끊어서(분명히 사모님 졸라서 신용카드로 샀을 것을 제가 압니다),
미국까지 날아와 얼마간 함께 해 주었습니다. 한국에 나와서 제가 멀티미디어
사업을 할 때에도 교회를 사직하고 1년여를 저를 도와 주었습니다.
학창시절 배낭 메고 함께 야영도 많이 다녔고, 서로 데이트하는 것 감시하자고,
그러니 무전기가 필요하겠다 해서 아마추어 무선 국가고시를 볼 때에도 서로 경쟁하듯이
격려하며 공부를 한 추억도 새롭습니다. 친구 생일날 무전기 사주려고
없는 돈 탈탈 털어서 부산까지 완행열차 타고 가서 어선에 달려있던 상업용 무전기
개조한 것을 사설랑, 생일날 깜짝쑈하던 추억, 동해안 어느 해수욕장에 여름날 친구들이
몰려가서 야영할 때에, 야영 내내 태풍이 불어서 수영 한번 하지 못한 것이 약올라
삼각파도 치는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해안경비대장에게 끌려가 야단 맞던 추억을
공유한 친구입니다.
두 번째 친구, 용산고등학교 동창인 P입니다. 지금은 대법원 전산실의 고급 관리이지만,
고교 동기들 중 문과를 나와 판검사가 된 친구들은 영감님 소리 들으며 존경받는데,
같은 직장에 거의 같은 시기에 입사(?)했는데, 자기는 뭐냐고 가끔은 투덜거리기도 합니다.
고교시절부터 정의감에 불타던 이 친구는 절대로 거짓말 않고 불의와 타협하는 법이
없으며, 타인을 깊이 배려하는 진짜 이조시대 선비같은 친구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봄소풍을 선인능으로 갔드랬습니다. 약 800여명의 저희 학교 2학년
학생들이 선인능에 도착해보니, 인근의 Y공고 기계과가 소풍을 와 있었습니다.
Y공고는 과별로 소풍을 왔으니, 전학년을 통털어서 300여명 뿐이었습니다.
두 개의 남자 고등학교가 한 장소에서 봄소풍을 얌전히 끝낸다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물가에서 사소한 말다툼이
티격태격 삿대질로, 급기야는 장풍과 활강법, 낙법, 검투술을 동원한 육박전으로
번지는 데는 불과 5분도 걸리질 않았습니다. 교련복을 입고 소풍을 간 우리 학교는
허리에 찬 요대가 육박전의 중요한 무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숫적으로 2대1 이상의
인해전술을 펼쳐서 일방적인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덕분에 수학여행은
종쳤습니다... ㅠ.ㅠ). 혈기 넘치는 고교시절, 학교 대 학교의 무림천하 통일을 위한
패싸움을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급우가 옆에서 짱똘 맞으면, 범생이고 꼬붕 양아치고
모두 제정신을 잃습니다. 학교의 동문으로서 선배이자 담임이셨던 B선생님은 몽둥이를
들고 버스정거장에서 강제로 저희를 차에 올려서 귀가를 종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음
정거장에서 모두 내려서 다시 사건현장(?)으로 자꾸 되돌아오자(용고 28회여, 영원하라!),
드뎌 선생님께서는 “모두 엎드려 뻗쳐!” 하시고는 60여명의 2학년 4반 급우들을
비오는 날 볼기에 먼지나게스리 곤봉술을 발휘하셨습니다. 엉덩이에서 불이 나게
맞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술취한 행객이 담임 선생님께 시비를 거는 것이었습니다.
“어? 당신이 뭔데 학생들을 패? 이거 폭력교사 아냐?” 운운 하며 선생님의 멱살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술 취한 행객의 행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거 노쇼, 노쇼”하고 쩔쩔 매시는 선생님께 P는 벌떡 일어나 다가갔습니다.
그리곤 술 취한 행객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제자에게 스승님이 사랑의 매로 가르치겠다는데, 당신이 뭔데 나서는거요,
엉? 저리 비키지 못해요!” 얼떨떨해진 행객은 궁시렁거리며 자리를 떴습니다.
제자의 이런 행동에 마음이 풀리신 선생님은 “너희들 마음 잘 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모두들 귀가하기 바란다.” 선생님의 조용한 타이름에
저희 반 급우 전원은 집으로 즉시 귀가를 하였습니다. 학교에서도 소문나게 정의파였던
이 친구는 지금도 가끔 만나 저녁을 먹으며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집안이
워낙 유교적인 집안이어서 항상 기도 대상이었는데, 믿음 좋은 제수씨를 만나 지금은
아주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세 번째 친구는 대학동기로 지금은 미국 JC PENNY 백화점의 중국 지사장으로 가있는
C입니다. 울산이 고향인 이 친구는 전형적인 경상도 문둥이입니다. 폴모리아 악단이
내한공연을 왔다고 한달치 자취비를 홀랑 들여서 로얄석에 앉아 음악감상을 하고는, 한달
내내 라면만 먹고 지낸 낭만파이기도 하고, 학과 MT 때 소주를 사발에 부어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머나먼 남쪽 하늘 아아래~” 하고 나훈아의 노래를 나훈아보다 더 잘 불러대는
학교의 명카수였고, 서슬 시퍼런 계엄령하에서 “박정희는 죽어야 한다!”를 길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 질러대서 친구인 제가 입 틀어 막기에 바빴던 정의파 친구였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은섭이 엄마와 데이트하러(저와 은섭이 엄마, 같은 교회에서
중고등부 선후배였던 것, 다 아시죠?) 먼저 집에 가야 한다고 했더니, 적적하다며 함께
있자고 한 것을 뿌리치고 데이트하러 갔었습니다. 며칠을 말도 않는 C를 싹싹 빌어서
다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때 C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 동네에서는 가스나
만나려고 친구 놓고 등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하믄 사나이 아이다.”
뭐 변론의 여지도 많았지만, 우선 친구 잃을까봐 무조건 싹싹 빌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학교는 10*26 데모 하는데, 공대 녀석들은 생각도 없다며 개탄을 하는 이 친구와
스크럼 짜고 운동장 돌며 교우들 모아, 서울역에 나가 “타도 전두한!”을 외치던 추억이
아스라합니다(지금도 서울역에 울려 퍼지던 학생들의 민주화 함성을 떠올리면 목젖이
울컥합니다).
이 친구 역시 제수씨 잘 만나 쌍둥이 낳고, 후다닥 신앙이 들더니
돈 많이 주는 L전자를 초개와 같이 던져 버리고, 월급이 반 밖에 안되는 CBS 기독교
방송의 기술부에 입사해서 주님 일을 했더랬습니다. 1년 쯤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다가, 그 존경하던 기라성같이 유명한 목사님들이 방송국 로비에서 주고 받는
덕담(?)에 실망해서 결국은 방송국을 그만 두더군요. 그리곤 살길이 막막했었는데,
의인의 길은 주님이 항상 대비하시는지라, 지금은 JC PENNY 중국 지사장으로 물질적인
축복은 물론, 그곳 현지에서도 타의 모범이 되는 신앙생활, 가정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작년에 중국 청송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지사장 친구를 둔 덕분에 여러모로 호강(?)하다가
돌아왔지요. 그곳 교회에서도 중책을 맡아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친구를 보며 콧등이
시큰했습니다...
네번째 친구는, 고등학교 때 친구인 S인데, 이 친구는 고3 올라갈 무렵에 미국으로
훌쩍 이민을 떠나서, 나중에 제가 미국에 가서 다시 만났습니다.
웬만한 탈렌트 뺨치게 훌쩍 키크고 미남인 이 친구는 항상 주위에 걸들이 맴돌았지요.
이 친구의 할아버지께서는 한국 구세군 총사령관을 지내셨으니, 대대로 신앙의
명문가정(?)에서 성장을 한 셈이지요.
고2 어느날인가, 제가 어느 여고생과 데이트를 하려는데, 빵값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S야, 돈 좀 꿔 주라. 걸 만나러 가는데 한푼도 없다."
종례 시간을 앞두고 느닷없이 제가 부탁을 해도, 자기 주머니에 돈 없으면
이반 저반 돌아다니며 자금 조달을 해 주던 친구입니다. 주머니가 회개한
신자가 진짜 신자이듯이, 제돈 꼬불치지 않고 경제적으로 팍팍 아낌없이 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미국에 있을 때에 제가 굉장히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도 가장 먼저 뛰어와서, 그 친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신용카드를
제게 내밀며, "돈 없지? 우선 이것 써라."였습니다. 그 당시 그친구도 대기업의
지사장 스태프로 근무하고 있었으니 모아둔 재산은 없고, 그래서 자신의 신용카드를
제게 건네 준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아이비리그 명문인 코넬대학을 나온 이 친구는
같은 대학 동기인 미녀삼총사 출신같은 아름답고 스마트한 제수씨를 만나 지금은
미국에서 반도체 관련 사업을 하며 신앙생활(구세군교회, 충성!) 잘하고 있답니다.
학창 시절, 자신의 분신인 양 이렇게 몰려 다니던 친구들은 지금은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고, 학창시절처럼 매일 만나 붙어다니지는 못하지만, 어느 때라도
서로가 필요하다면 순식간에 지원요청을 할 수 있는 죽마고우들입니다.
영화에서처럼 그저 주먹 휘두른 추억을 공유해서 찡한 친구가 아니라, 정말 서로를
위해 자신의 많은 것을 희생할 수 있고, 시간과 물질을 포기할 수 있고,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감싸 줄 수 있는 친구, 무엇보다 신앙의 동역자로서 함께 인생을 논할,
오랜 세월을 통해 눈빛만 봐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친구가 옆에 있으신지요?
그런 친구를 두신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혹시나 사람은 그 속을 모를지라도 언제 어디서나 어느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실
주님을 알고 있는 우리는, 정말 인생에 흑자를 본 수지 맞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자기 꾀만 믿고 사는 사람들, 껍데기같은 폼생폼사에 의리를 논하는 허황된
친구를 둔 사람들, 결국은 사라질 형이학적인 것들에 연연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샬롬.
심상호
* 위의 글은 단대장이 출석하는 교회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