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학기 강의를 준비할 때마다 힘들지 않은 과목이 없지만 가장 신경이 쓰이는 과목은 ‘아시아사입문’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강의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벌써 몇 년째 강의하였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아시아란 무엇인지도 잘 모르니 말하여 무엇 하랴. 마침 2학기에서 ‘동양사탐구’란 과목을 가르치면서 동일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현재까지 얻은 결론은 아시아사는 세계사이므로 아시아사의 구성원리는 세계사의 구성원리와 동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사의 구성원리가 상호관계를 핵으로 두고 다루어야 하는 점, 상호관계는 각 단위 지역의 내부적 변화와 교통․통신․교역을 관련지어 다루어야 한다는 점,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 대한 관심을 더 높여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기존의 논저목록에 새로 몇 가지 글을 보충하였는데, <<바다의 아시아 1. 바다의 패러다임>>(오모토 케이치 외 엮음, 김정환 옮김, 서울, 다리미디어, 2003), <<바다의 실크로드>>(양승윤 외, 청아출판사, 2003), <<아시아간 무역의 형성과 구조>>(스기하라 카오루 지음, 박기주․안병직 옮김, 서울, 전통과현대, 2002), 그리고 <<리오리엔트>>(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희재 옮김, 서울, 이산, 2003)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시원하고 재미있었던 것이 <<리오리엔트>>였다.
이 책에 대하여는 책 말미에 있는 <옮긴이의 말>, 신문의 많은 서평 및 각종 소개(확인한 것만 15개임)에서 훌륭한 교수나 기자들이 자세하게 쓰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자세한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별 의미도 없고 내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첨부한 4 편의 소개와 논평 및 인터넷 검색 참조 바람). 다만 한 가지 보충이 될 만 한 것을 들도록 하면 다음과 같다.
각 소개자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왜 아시아는 몰락하고 유럽은 흥기하였는가였다. 프랑크는 “서양은 아시아 경제라고 하는 열차의 3등 칸에 달랑 표 한 장을 끊어 올라탔다가 얼마 뒤 객차를 통째로 빌리더니 19세기에 들어서는 아시아인을 열차에서 몰아내고 주인행세를 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였다. 왜 그것이 가능하였는가? 그것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명청시대사를 공부하는 내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인 두 가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중국이 가진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위상이 무너진 것이며, 그 이유는 최대의 수입국인 유럽에서 수입대체에 성공한 결과이다. 즉 중국의 대표적인 상품인 차, 자기, 비단은 모두 중국인의 노동력과 기술력이 중국에서 생산되는 원료와 결합된 자기 완결적인 생산품이었다(어느 것도 수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은 16세기 이후 비로소 신대륙의 은을 이용하여 이들 상품을 수입할 수 있었을 뿐 그 어느 것도 자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세계 은의 50%이상을 중국이 흡수하고 이를 통하여 중국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그런데 18세기 초 독일에서 마인쯔 자기를 생산함으로써 수입대체를 할 수 있었으며, 아름다움이나 가격 그 어느 면에서도 유럽의 자기가 중국을 앞서기 시작하였다. 혹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유혹하는 유럽 도자기>>(김재규, 서울, 한길아트, 2000)에 수록된 사진을 참조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18세기 중기 청조에 유럽식 도자기의 유입과 유럽풍 미술의 전파도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초 인도에서 차를 발견하여 재배함으로써 중국산을 대체할 수 있었다. 그밖에 비단은 일찍이 페르시아 등지에서 생산되었으므로 중국의 독점시대가 종결되고 유럽의 우위가 성립하였다. 특히 18세기 중반이후 면방직 공업이 기계화됨으로써 생산성이 극대화되었고 이것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던 것은 그 우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실이었다. 반면에 영국은 인도에 아편을 재배하여 중국에 수출함으로써 아편의 상품화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은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기술적이든 그 어느 것도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둘째,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사회의 불안정성이 증대된 것이다. 그 원인은 인구증가, 사회 통제력의 제약 등 다양한 요소가 있겠다. 그러나 내가 특히 관심 갖는 것은 계투의 일상화로 대표되는 일상적인 사회 불안의 증대이다. 이러한 사회불안은 복건, 광동 등이 심하지만 18세기 후반이 되면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났으며, 막대한 신변보호비용은 물론이고, 생산에의 투자와 노동력 투입을 어렵게 만들고 소득을 감소시켰다. 사회불안→생산 및 소득 감소→구매력 감소→생산쇠퇴 등으로 계속되는 악순환의 고리는 더욱 두터워졌고, 그 결과 중국의 내부적인 탄력성과 대응능력은 약화되었다. 경제는 경제 자체로 완결되지 않고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모든 것이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청조의 대응이 적절하지 못하였던 것은 당시 중국이 가지고 있던 총체적인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상과 창조적 발전과 내부적 안정의 상실이란 나의 설명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2004년 1월 현재, 한국이 어떻게 살 길을 찾을 수 있으며 세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일부나마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곧 번역자인 이희재씨가 “한국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강조한 ‘세계 주변부와의 교류 확대 및 인류 보편의 가치 추구’라는 화두를 현실화 시킬 수 있는 전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사를 배우고 가르치는 핵심적 이유가 아니겠는가? <2004.1.4. 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