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은 11공수사단을 검색하다가
예전에 좀 번역을 해두었던 것입니다.
The Oryoka Maru Story
글쓴이와 증언한 사람들
(모두 호주군)
찰스 브라운 중령.
로이드 밀스 중령.
에드워드 코닉 소령.
아서 빌.
에드워드 피셔 연락장교.
Note:
이 이야기는 공식적인 전쟁범죄 공판의 내용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 내용을 브라운 씨가 적절한
이름인 '오료카 마루 스토리'로 바꾼 것입니다.
이 얘기는 마닐라에서 1944년 12월 13일 탑승한
연합군 포로 1,619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생존자는 450명입니다. 이들은 1945년 8월에 해방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도착 후에 일본 내 수용소
에서 161명이 사망, 실제 생존자는 271명입니다.
이것 외에 일본군은 각종 다양한 노동수용소를
만들어서 거의 노예와 다름없는 대우를 했다.
의무혜택은 열악했으며, 굶주렸고, 여러 가지
육체적 정신적 외상을 포로들에게 남겼다.
죽음의 여정
1944년 10월 말, 일본군은 필리핀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1944년 10월, 일본군은 모든 포로들을 카바나투안에 억류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특히 다바오 수용소에서 올드 빌비드
감옥으로 이송하라는 것이었다. 최후에는 이들을 모두 일본
으로 보낼 계획이었다.
연합군 포로는 수집되어 1944년 12월 13일 빌리비드 감옥
에 집합되었다. 토탈 1,619명의 미국인과 연합군 전쟁포로
들이 모였다. 이들 포로는 500명 단위를 그룹으로 묶었다.
이들 포로 1,619명중 1,100명이 야전경력이 있는 장교들이었
다. 대부분은 미국인이었고 나머지 30명은 연합군의 국가출신.
오전 10시가 되자 이들은 그룹 별로 마닐라의 주도로를 걸어서
행군을 시작했다. 7번 부두 Million Dollar Pier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포로들에 대한 일본군 지휘관은 토시노 중위였다.
그는 문 앞에 서서 수용소를 떠나는 포로들의 넘버를 확인했다.
토시노는 포로들이 부두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포로들은 부두에 오전 11시 도착해서 여러 시간 배를 기다렸다.
그리고 오후 3시 전투수송선이 부두에 도착했다. 배는 일본인
민간인들과 해군들, 그리고 대공화기병사들이 같이 있었고, 이
들을 합하면 총 1,500명을 승선시켰다. 배의 이름은 오료쿠 마루
(Oryoku Maru)였다. 배는 새로운 cabin type이었다. 이 배는
동양을 유람하기 위하여 사치스럽게 만들어진 배.
적재는 1만5천 톤이 가능한 미국인들이 보기에 가장 좋은 일본배
였다. 배에는 아무런 마킹이 없었고, 3인치 짜리 두 정으로 된 대
공포가 있었다. 포로 구역은 데크 아래 20피트였다. 배에 포로들이
오르는 도안 '와다 상'이라는 일본인 통역자가 감독을 했다. 항구에
서 기다리는 동안 포로들이 섞였고, 1차로 포츠의 지휘 아래 먼저
700명이 승선을 했다.
그룹1과 2가 승선하는 시간은 총 한시간 반이 걸렸다. 2그룹은 중령
커티스 비쳐의 휘하에 600명 정도로 오후 3시 30분 승선을 시작했다.
그들이 들어간 구획은 60 곱하기 I00 피트의 아주 비좁은 곳이었다.
높이는 4피트였다. 구획 안에 다른 공간은 없었고 모두가 나무로
되어 있었다.
포로들은 나무사다리를 이용해서 해치를 통해서 이곳으로 들어갔다.
빛은 없었고 오로지 해치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해치는
20곱하기 20 피트 크기였다. 그곳에는 환기장치가 없었다. 3그룹은
하나의 구획에 300명이 들어갔다.
그룹2가 들어가 곳도 너무 좁아 들어간 직후에 포로들이 소란스러웠
졌다. 들어가자마자 기절할 것 같은 느낌을 포로들은 가졌다. 일부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냐는 포로들의 요구는 묵살되었고 앞 구획에
는 200명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공기는 부족했고 너무 더워서 포로들
은 졸도할 것 같았다.
일본군은 포로들에게 빨리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그들은 총과 삽으로
포로들을 구타하며 재촉했다. 어떤 포로는 사다리를 내려오면서 바로
졸도했다. 그리고 밑으로 떨어졌다. 당시 이하라라는 일본군 초병은 입
구에 서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빨리 들어가라고 포로들을 두들겨 팼다.
이때 통역관 와다는 항상 지켜보고 감독하고 있었다.
오후 6시가 되어 승선이 끝났다. 필리핀의 날씨는 열대성으로 극단적인
더위였다. 거기다가 아래 칸에 들어간 포로들은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일본군은 해치 아래 정 중앙에 서 있지 말라고 명령했다. 윗 칸 포로들은
거의 설 수는 있었으나 아무도 누울 공간은 없었다. 마지막 식사는 12월
12일 밤에 주었다. 그것은 배에 타기 전에 올드 빌리비드에서 먹은 수통
컵 반의 쌀죽과 1/4 캔틴컵의 수프였다.
음식이 합은 캔틴컵 하나 정도였고 티스푼으로 소금을 따로 나누어준 것
이 다였다. 그리고 45명에게 캔틴컵 하나의 물을 주었다. 결국 한 사람이
먹은 물은 티스푼으로 두 개 정도였다. 일본군은 이것을 나누어준 뒤 모든
배급을 미국인 자신들에게 맡겼다. 이후 오료쿠 마루에 타고 있는 동안 음
식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12월 14일 아침에 준 음식 약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당시 병력들은 이질 등의 병이 많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많은 연합군
포로들에게 화장실에 대한 아무런 배려를 하지 않았다. 계속 항의하자
그들은 5갤런 짜리 물통 4개를 넣어줬다. 그러나 더 요구하자 그 이후로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것을 이용해서 포로들의 용변을 받는데 한시간 반
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을 비워달라는 요구에는 또한 아무런 대답이 없었
다. 자정이 되자 포로들의 있는 구획의 바닥은 인간의 배설물의 바다가
되고 말았다. 이후 24시간 동안 이 냄새를 맡으면서 있어야 했고, 공기
부족과 함께 포로들은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사람들이 배에 오를 당시의 온도는 화씨 85-95도였다. 포로들은 너무
힘들어서 해치를 두드렸고 한참만에 열어주어 공기가 조금 들어왔다.
이후 해치를 닫자 온도는 화씨 120도나 되었다. 사람들은 해치와 문
쪽으로 달려들었고 공기는 점차 희박해져갔다. 배의 공기유통은 점차
안 좋아져갔다. 탈수와 갈증, 신체적인 허약과 악취로 인해서 더욱
가중되었다.
포로들은 엎드려 절을 하면서까지 환경을 개선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통역관 와다는 모든 요구를 거절했다. 13-14일 사이 포로들은 미칠
지경이 되었다. 모두가 물과 공기를 찾아 걸어다녔다. 그러자 포로들
사이에 싸움들이 일어났고 주먹고 발로 마구 차는 광기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안은 아주 컴컴했다. 이 혼란상황에서 잠이 대부
분 오지 않았다. 이날 40-50명의 정신이 혼미한 상태가 되었다.
미친 것이다.
14일 새벽 3시가 되자 오료쿠 마루 호는 닻을 올리고 중국해를 향해
출발했다. 새벽에 해치를 한번 열어주었는데 이미 8-10명의 포로가
죽어 있었다. 오전 8시에 공습싸이렌이 배에 울렸다. 배는 기총소사를
받았고 도탄이 포로들이 있는 곳으로 튀어 들어왔다. 배는 피해를 입었
고 어렵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너 명의 공습중의 도탄에 맞아 부상당했다.
공습이 있었던 동안 포로들은 13일 밤에 왼쪽구역에서 이미 30명이
죽은 것을 다시 확인했다. 대부분이 질식사였다. 공습이 있고 나자
포로 군의관들은 올라가서 부상당한 일본군을 치료해야 했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 배가 미군전투기에 의해서 가라앉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군의관들을 구타했다. 포로들 중에 부상자에 대한 치료와 물과
음식을 요구했다가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일본군은
"우린 미군포로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게 없다."란 말을 들었다.
14일 밤에서 15일 아침까지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사람들은 갈증
으로 예민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을 잃었고 절규하는 소리가 들
렸다. 계급간에 질서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오줌을
마시기 시작했다. 오수는 원래 열린 배수구를 통해서 배의 옆으로
방출되게 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그것을 알고도 방치했다. 포로구획은 절규/싸움의 베들레헴
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광폭해졌고 환경은 악몽 같았다. 14일과 15
일 밤에 배에서 폭발이 있었다. 일본군은 배의 수리를 위해서 해안으로
이동했다. 그때 일본인들은 하선시켜서 수빅 만으로 되돌려 보냈으나
포로들은 그대로 두었다. 일본군은 배가 다시 공습을 당할 수 있다고
느낀 것 같았다.
15일 아침, 배는 수빅 만에 닻을 내렸다. 오롱아포 해군지기 3구역이
었다. 오전 8시 30분 통역관 와다는 구역에 와서 둘러보면 포로들이
배에서 일단 하선할 거라고 말했다. 그는 신발과 양말을 벗으라고 했
다. 수영으로 배를 떠나 항구에 도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말하기
를 일본군 초병들이 shoot to kill로 교육을 받았기에 수영 중 도망은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포로들이 나가기 전에 일본군들은 홀 안에
경고로 총을 몇 방 쏘았다.
9시 30분 배에서 나가라고 명령을 받았다. 이때 다시 공습을 받았다.
기총사격과 폭격을 정확했고 이때 약 100명이 공습으로 죽고 말았다.
배에는 구명정이나 고명조끼가 없었다. 배에서 포로들이 내리는 동안
6대의 미 급강하폭격기들이 내리꼽아 폭격을 시도했다. 선도기를 아주
가깝게 보였는데 옆에 아주 우스꽝스러운 인식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선도기는 우리 포로를 인식했는지 폭탄을 투하하지 않았고 나머지도
투하하지 않고 돌아갔다. 포로들은 물로 뛰어들어 수영을 시작했다.
일부는 폭격으로 만들어진 난파물들을 잡고 해변으로 헤엄쳐갔다. 한
다섯 명은 큰 난파물을 뗏목처럼 타고 해안으로 향했는데, 해변에 거취
된 일본군 기관총이 이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두 명은 물로 뛰어들었고
난파물위에 있던 3명은 총격으로 즉사했다. 배를 떠나던 시기에 굶주린
포로 몇 명이 배에서 해상재난용 음식과 의료품을 발견했다. 배의 한
구획에 음식과, 미국산 담배와 캔디가 적십자 판넬에 담겨 있었다.
해상재난용 음식과 보급품은 일본군이 회수하여 갔다. 이 동안 어떤
일본군이 포로구획으로 와서 총을 쐈다. 일본군 책임자 호시노 중위
는 윌리엄 브루스터 중위에게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총으로 쏴서 즉
사시켰다. 해변에 있는 동안 포로들은 옆의 테니스장에 집합되었다.
포로들이 모이는 동안 일본군은 포로들에게 테니스장 앞마당에서 수
통에 물을 채우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물을 채우기 위하
여 4-6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13일 밤에 반수 정도가 물을 채웠으나 혼란을 고려해서 일본군은 이후
물 채우는 것을 중단시켰다. 30분 후에 통역관 와다가 포로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 포로들에게 행진을 시켰다. 그리고 다시 명부에서 이름을
확인시켰다. 사실상 그런 많은 사람을 테니스코트에 모두 집합시킬 수는
없었다. 테니스코트는 chicken wire fence(?)였다. 너무 좁아서 누구도
앉거나 누울 수가 없었다. 명부에 이름은 여러분 불렸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름대조가 어려웠고, 결국 앞에서 얼마나 죽었는지 몇%가
죽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곳에 모여서 포로들은, 앞의 구역보다 왼쪽의 구역이 더 열악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왼쪽구역에서 많은 수가 질식으로 죽었던 것이다. 포로
1619명에서 생존자는 1,300명으로 줄어 있었다. 오후 2시 30분 비행기가
다시 돌아왔다. 16일에도 물 사정은 여전히 안 좋았다. 17일 저녁, 130명
당 쌀이든 주머니 하나씩을 일본군이 주었다. 개인 당 수푼으로 두 개씩
정도의 양이 되었다. 18일 19일도 같은 양이 배급되었다. 20일에는 좀 더
많이 주어서 네 스푼 정도의 양을 배급받았다.
모두가 생쌀을 씹어 먹었다. 테니스 코드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태양을
가릴 것이 없었다. 3일째가 되어서 포로들에게 테니스코트를 떠나서 몇
시간 동안 그늘에 있을 수 있도록 일본군은 허가했다. 대부분은 팬티와
셔츠 차림이었고 일부만이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양말이나 모자는 아무도
없었다. 밤에는 너무 추웠는데 담요 같은 게 없어서 모두 콘크리트 바닥
에 자면서 추위에 떨었다. 테니스코드에서만 6-7명이 죽었다. 부상과
탈진 때문이었고 이들은 근처에 매장되었다.
18일에 포로들은 반복하여 부상자를 입원시켜달라고 요청했다. 미
해병 칼 로건 상병은 빨리 썩어가고 있었다. 일본군은 팔을 잘라야
한다는 판단 아래 테니스코드에서 팔 절단작업을 했다. 동원된 의료
장비는 외과용 칼 하나였다. 약이나 약품은 하나도 없었다. 미 육군
의무장교인 로날드 스틱리와 찰스 토운이 이 수술?을 했다.
그러나 수술자인 로날드도 배에 타고 있는 동안 경비병에 의해 팔에
총을 맞은 상태였다. 그의 팔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부어있었고
악취가 심했다. 그러나 그는 아픔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는 신음소리
를 내면서 가끔 "Oh Doctor."라는 말만을 했다. 수술을 받은 로간은
며칠간 살아 있었으나 이후에 결국 죽었다. 포로들은 이것도 살인이
라 생각했다. 기초적인 의무치료만 했었어도 살수 있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11월 20일 아침, 500명은 산 페르난도 팜판가로 이동했다. 두 번째
그룹은 21일 이동했다. 첫 번째 그룹은 그 지역 감옥에 수감되었다.
두 번째 그룹은 극장에 수감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마지막으로 쌀을
한 캔틴 씩 받았다. 그러나 극장은 수도꼭지가 있어서 물은 충분히
먹을 수가 있었다. 감옥도 물은 있었다.
11월 23일 오후 6시, 통역관 와다가 두 그룹의 지휘관을 만나러 왔다.
와다는 15명에 한해서 마닐라의 병원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포로들은 인원을 정했다. 드와이트 에디슨 중위, 존 엘리오트 중위,
율리시스 피플스 중령, 사무엘 프리니 중령, 약제사 드나 맥커리,
허맨 셔면 소위, 웬델 스완슨 소령, 그리고 8명이 선택되었다.
나머지 8명은 신원확인이 되지 않았다.
오후 7시에 트럭이 왔고 환자들은 산 페르디난도 외곽의 한 묘지로
데려갔다. 그곳에 도착하자 일본군은 환자들에게 15 x 15 피트 짜리
구덩이를 파라고 했다. 그리고 파지자 일본군 수비병은 그들에게
구덩이에 가서 서라고 명령했다. 거절하자 두 명의 보초가 한 명씩
끌어다가 구덩이에 넣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라고
했다. 일본군은 그 환자포로들을 대검으로 찌르고 목을 베었다.
사형집행이었다. 당시 통역관 와다와 토시노 중위가
현장에 있었고 그것을 감독했다.
산 페르디난도의 포로들은 24일 다시 라 유니온이란 데로 기차를
타고 이동되었다. 포로들은 기차역으로 행진했다. 역에는 화물용
박스열차가 대기했다. 이때 와다와 토시노는 묘지의 사형집행을
끝내고 돌아와 있었다. 와다는 연합군 지휘관에게 한 화물열차 당
170-180명을 탑승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인원이었다. 환자 40명은 열차의 지붕에 타라고 명령했다.
이동기간동안 열차 안의 온도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공기부족에 포로들이 시달렸다. 사람들이 지쳐 쓰러졌다. 열차가
산 페르디난도의 라 유니온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오전 5시였다.
1944년 크리스마스였다. 날씨는 오히려 쓰리게 차가웠다. 포로들
은 역에서 반 마일 떨어진 학교로 걸어갔다. 사택이었다. 병력이
사택에 도착하자 와다는 물을 이용할 수 있다고 공고했다. 그런데
땅을 파라는 것이었다. 병사들이 힘겹게 5피트 가량의 땅을 파자
진짜 물이 나왔다. 요오드팅크를 물에 정화제로 타서 병사들이
먹었다.
오전 9시가 되자 병사들은 정렬하여 해변으로 걸어갈 준비를 하란
명령을 받았다. 그 곳에 걸어간 뒤에 병사들은 거기서 2일 밤낮을
지냈다. 그리고 27일 아침, 첫 번째 그룹 236명이 브라질 마루라는
배에 탔다. 나머지 포로들은 이후에 엔오라 마루라는 배에 탔다.
해변에서 보트를 타고 수송에선 가서 탑승했다.
부두에서 일본군은 아래 물에 있는 보트로 점프해서 뛰어내리
라고 강요했다. 20피트 높이. 주저하면 일본군이 바로 뒤에서
밀어버렸다. 여러 명이 다리가 부러졌다. 한 사람은 잘못 뛰어
내려 보트에 머리를 충돌한 후에 물에 가라앉았다. 끌어올렸으
나 그는 죽었다. 토시노와 와다도 그 현장에 있었다.
브라질 마루라는 배는 2,500톤 짜리 운송선이었다. 배는 6일간
필리핀에서 이동하여 대만의 타카오에 도착했다. 첫 2일간은
음식배급이 없었다. 다만 그때 5명의 대만인 경계병이 있었는데
그들이 음식을 조금 주었다. 일본군이 준 음식의 총계는 개인 당
티스푼 하나 정도의 쌀이었다. 3일째에 조금 음식을 주었고 4일
째는 없었다. 5일째 일본식의 떡을 주었으나 구더기가 있었다.
엔오라 마루 호는 1만톤 급이었다. 포로들은 정해진 구획 외에
나다닐 수 없었다. 좁았지만 오료쿠 마루보다는 나쁘지 않았다.
다리를 뻗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량과 물은 부족했고 하루
한번 스프를 주었다. 브라질 마루 호보다는 양이 조금 많았다.
배가 대만의 타카오로 가는 동안 포로 16명이 죽었다. 사체는
바다에 버렸다. 1945년 1월 6일, 대만의 타카오에서 236명이
브라질 마루호에서 엔우라 마루 호로 옮겨탔다.
1월 7-8-9일에는 4명당 식기를 주고 개인 당 한 컵 반 정도의
스프를 줬다. 1월 8일 오후엔 일본군은 낮은 구획에 있는 포로
들에게 앞쪽으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 앞쪽 밑에 설탕이 있다
고 말했다. 그러자 약 2-3명이 그 소리를 듣고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쪽으로 가려 하자 와다가 나서서 격렬하게 호
통을 쳤으나, 이미 배고픈 포로들은 약간의 설탕을 훔쳐먹은
뒤였다.
그러자 와다가 말했다.
"누구라도 설탕을 먹는 자는 심한 벌을 받을 것이며,
이후 명령 없이 움직이는 행동에는 그 댓가를 치룰 것이다."
1월 9일 늦은 아침에 아침식사가 준비되었을 때였다. 엔우라 마루
호에서 대공기관총의 사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모든 배들이 쏘기
시작했다. 포로들은 전투기의 하강소리와 함께 폭발소리를 들었다.
그때 엔우라 마루 호 근처에 폭탄이 터져서 적지 않은 인원이 부상
당했다. 적중하지는 않았으나 철제파편들이 날렸기 때문. 300명이
죽고 상당수가 부상당했다. 폭격이 끝나자, 일본군은 포로들에게
포로 군의관에게 치료하라고 했다.
치료자들은 타올과 내복을 구했다. 붕대로 쓸 것을 포로들로부터
기증 받았다. 그러나 응급처치용 의료물품은 거의 없었다. 일본군
은 아무런 약도 주지 않았다. 사실상 아무런 치료가 없는 상태로
1월 11일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두 명의 일본군 위생병은 포로
들은 경미한 경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머큐롬만 조금씩 발라줬다.
이후 더 큰 중상이 나와도 일본군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사체들은 해치 부근에 장작더미처럼 쌓여져 12일까지 보관되었다.
그때 부상당한 사람들은 얼마 후에 후유증으로 대부분 죽었다. 붕
대와 약품의 부족으로 죽었다. 12일 오전이 되어 일본군은 배의 시
체를 옮길 수 있도록 허락했다. 시체는 낮은 쪽의 짐칸으로 이동되
었다. 일부는 로프로 사지를 묶어서 갑판으로 들어냈다. 마치 단체
의 지옥장면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후 여러 명은 유령을 보는
악몽에 시달렸다. 사람이 너무 많은 통에 포로들은 시체의 앉아서
식사를 하거나 혹은 죽은 자의 음식을 차지하려고 혼란이 일기도
했다. 사망자의 옷도 쓰기 위하여 벗겨졌다.
1월 13일 오후에 통역관 와다로부터 엔우라 마루호의 모든 포로들
은 다시 브라질 마루호로 옮겨질 것이라고 통보 받았다. 엔우라 마
루호가 폭격에 심한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엔우라 마루호의 포로
들은 짐배를 이용해서 브라질 마루 호로 옮겨 탔다. 늦은 오후가 되
어서 이송작업이 끝났다. 부상자, 골절된 사람 등등........
일부는 로프를 이용해서 오르내렸다. 이 당시 총 살아있는 사람은
900명이었다. 1,619명에서 9백 명으로 준 것이다. 총 7백 여명이
죽었다. 1월 13일, 배는 대만의 타코에서 일본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타코에서 일본의 '모지'에 도착은 1월 29일이 되어 끝났다. 하루에
한번 익힌 밥을 일본군이 주었다. 두 명이 한 캔틴컵에 받아먹었다.
병사들은 살기 위하여 알게 모르게 설탕을 훔쳐먹었다.
브라질 마루 호에서도 영양실조, 탈수는 여전히 만연했다. 포로들
은 일본군에게 반지, 시계, 펜 등을 주면서 음식과 바꾸어 먹었다.
주로 물과 담배를 바꾸어 먹었다. 많은 수의 웨스트포인트 졸업반
지와 다른 군대반지들이 한 컵의 물이나 담배 열 개피에 팔려나갔다.
누구나 다 그렇게 했다.
물 사정은 대망의 타카오 항을 떠난 뒤 2일간 아주 안 좋았다. 거의
물이 배에 남아 있지 않았다. 29일에 거의 물이 바닥났다. 남은 물은
검은색으로 변했고 소금끼가 있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포로들의 사
망률은 더욱 늘어났다. 배 안의 의료는 제로였다. 심한 중상자만이
해치 바로 아래 누울 수 있는 권리를 주었을 뿐이다.
그것의 일종의 병상지역이었다. 그러나 그 장소는 배 안에서 가장 추운
장소였다. 아프면 그곳에 가서 누울 수는 있었으나, 오히려 그곳에 가면
죽을 확률은 확실해졌다. 그러므로 곧 죽음이 닥칠 포로들만이 그곳에
가서 누웠다. 포로 중에 의무장교나 의무병이 있었지만 붕대나 의료품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오직
한 큰 병의 술파디아졸(폐렴에 쓰이는 약)만이 있었고 그 병으로 인해서
100여명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바로 그 백 명은 diarrhea 환자였다.
1월 13일 밤, 배가 타카오 항을 떠나자 곧 포로 15명이 죽었다.
그리고 바로 그 해치 밑에 쌓여졌다. 의무병의 지시에 따라서
그들의 옷은 모두 벗겨졌다. 그들의 의복이 여러모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사체는 2-3일에 한번만 수거되었고 이것은 통역관
와다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사체는 물 속으로 던져졌다.
첫 번째로 쌓인 사체는 50명이었다. 그러면 사체들은 데크로
들어올려져서 바로 수장되었다. 이것은 점점 악화되어 일본으로
가던 어떤 날은 하루에만 40명이 죽어나갔다. 어떤 경우 전날까지
아무런 징후가 없던 사람도 다음날 아침 사체로 발견되었다.
배 안의 의무병은 이것이 일상화되어 사람이 죽어도 그냥
"Roll 0 your dead."라고 소리만 쳤다.
포로 중에는 한 목사님이 매일 밤 포로들에게 기도를 시켰다. 그러나
그 역시 타카오를 떠난 지 5일만에 죽었다. 다른 한 명의 목사님은
항상 자기 먹을 것을 환자에게 주었다. 그 역시 얼마 가지 않아 죽고
말았다. 한 목사님은 항상 정력적으로 남을 도왔는데 그도 역시 결국
앓다가 죽었다. 하루에 몇 차례 포로들의 이름을 불렀는데 여러분
불러도 대답이 없으면, 누군가 옆에서 "dead"라고 말해주었다. 어떻게
죽었는가는 설명하지 않았다. 여러분 불러도 대답이 없으면 일본군은
바로 죽은 것으로 간부하고 표시했다.
배는 결국 1945년 1월 29일 일본의 '모지'항에 도착했다. 오전에
상갑판에서 새로운 옷을 나누어준다는 공고가 내려왔고, 구역별
생존자들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가보니 일본은 매우 추운 날씨
였다. 포로들은 속옷과 셔츠와 바지를 받았다. 양말은 없었다.
신발은 일본군이 노획한 영국제였다. 그러나 사이즈에 관계없이
그냥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44년 12월 13일 이후로 물을 마음껏
마시고 사용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물에 병균이 있을까봐
두려워하는 포로들은 마음껏 마시지도 못했다. 이후 음식이 나
왔다. 그러나 많은 수는 앓고 있어서 주어도 먹을 수가 없었다.
배에서 내린 포로들은 줄을 맞추고 무리 지어 걸어야 했다. 일본
본토의 일본군들은 포로들의 얼굴을 보고 경악을 금지 못했다.
모지의 일본시민들도 쇼킹을 금지 못했다. 포로들은 시의 거리를
통해서 행진해갔다. 많은 수의 포로들의 동료들이 질질 끌면서
걸어야 했다.
그리고 44년 12월 13일 이후로 면도를 한 적이 없어 더욱 남루했다.
입술은 검은색들이었고 이빨들이 반이나 빠져 있었다. 배속은 비어
허리들이 구부러져 있었다. 다리와 팔은 마지 피리같이 뼈만 남아
있었다. 눈가는 푹 들어가 함몰되어 있었고 많은 수가 거의 반 누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드러난 몸은 아사 직전의 것으로 보였다.
중령 호스틴 몽고메리는 토교까지 살아남은 오료쿠 마루의
생존자중에 한 명이다. 그는 모든 사건을 목격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필리핀사단의 멤버였다. 그는 2군
단의 모터 프랜스포트 장교로 1개 대대를 지휘했었다.
소속은 12병참연대(필리핀)였다. 바탄 방어작전이 실패로 끝나
함락되자 몽고메리는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1942년 5월 6일 코
레히도로 이동했다. 코레히도에서 그는 다시 필리핀 본토로 이
동하여 1942년 10월까지 카바나투안 포로수용소에 있었다.
1942년 11월에는 다시 다바오 펄로 이동하여 1944년 6월까지
있었다. 다바오 캠프서는 포로들의 부지휘관을 했다. 1944년
6월에 다시 그는 카바나투안 캠프로 돌아갔고 다시 올드 빌리
비드로 이동하여 배를 타고 일본으로 호송되었다.
혹독한 시련을 겪은 뒤에 그는 일본에 도착한 그는 후쿠오카 1번
수용소에 있다가 한국의 Jinsen으로 이동되었고, 일본군이 맥아더
에게 항복하자 미군 진주와 함께 해방되어, 현지에서 일본군을 수
첫댓글 표현이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포로를 대하는 최소한의 인격적인 조치도 없는
전 근대적인 일본군들의 패배는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시장이라는 사람이 '난징 학살은 없었다. 목격자가 없다.'
라고 우호차 방문한 중국 난징 시장에게 면전에 대고 말할 수 있는지. 일본
외교부가 난징 학살은 피할 수 없는 역사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이 시장과
도쿄 시장은 여전히 난징학살은 거짓말이랍니다. 진짜로 그렇게 믿나봐요.
점령군 맥아더가 일본을 넘 신사적으로 대해줬다고 생각하는 1인. 러시아가 한 5년은 다스렸어야 하는 민족.
개새끼들........죄송합니다. 하지만 욕만 나오네요
미국은 일본과 전후 거래를 한것이지요....미국도 나쁜 놈들입니다.
일본군의 정서상 포로는 치욕.. 인간이하지요
일본군의 야만적인 포로학살과 학대는 이상하게 미국등 연합군이 침묵하더군요..그래서 미국시민들도 이런 사실을 잘 모릅니다..
자기네들 애완동물인데 애완동물 욕하는 주인은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