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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리얼리스트 100 원문보기 글쓴이: 김경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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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적 행위 |
표현·미학적 영역 |
주관적 세계 |
진실성 |
표현적 행위 |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 세계(객관·사회·주관적 세계)에서 각각의 세계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언어를 일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언어를 “선택적으로 축소하고 왜곡”했다는 점이다. 세계화라는 목적 하에 재벌위주의 정책을 펼침으로써 중소기업들의 연쇄적인 도산을 유발시키는 행위라든지, 집권세력의 정당성을 위해 왜곡된 역사해석을 조장하는 행위라든지, 시대에도 맞지 않은 규범이나 제도를 유지하는 것 등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하고 있는 사례들이다.
이러한 언어의 일면적인 사용은 각각의 측면에서 합리적인 것이라 볼 수 있지만, 그러한 합리성은 “합리성의 부족”을 야기시킨다. 여기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화>를 목표로 하는 의사소통행위이론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하버마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오직 의사소통적 행위만이 언어를 제약되지 않은 상호 작용의 매체로 간주한다. 그 결과 전이해된 생활세계를 기반으로해서 대화의 참여자들이 객관적 · 사회적 · 주관적 세계의 대상 모두를 동시적으로 취급해서 상황에 대한 공동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의사소통적 행위를 통한 공동이해의 도달이, 각각의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언어로써가 아닌, 각각의 세계 내에 내재해있는 언어를 상호소통시킴으로써 상호 타당성을 주장하고 이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일성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런 공동이해의 도달은 완료적이라기보다는 상황적이며, 완벽한 것이라기보다는 불완전하고 개방적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하버마스는 일상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전략 : 새로운 전선의 구축
이제 하버마스가 인간의 언어행위를 분석함으로써 도달하고자 하는 전략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추구하였던 <도구적 합리화>의 일면적 경향에 맞서 <의사소통적 합리화>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며, 그를 통하여 <체계>가 <생활세계를 식민화>한 것을 극복하고 <생활세계>의 회복을 통하여 미완의 모던적 기획을 밀고가는 것이다. <의사소통적 행위>의 일상적 실천을 통하여 인간 상호 이해와 신뢰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하머마스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신뢰하였다. 따라서 비판이론 1세대들이 인간의 이성이 신화로 변하고, 낡아버렸으며, 도구적 합리화에 의하여 변질되었다는 점을 회의하였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비판이론 1세대들은 현대사회를 일면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들이 좌절하게 된 이유 역시 현대사회가 합리화되는 과정을 <체계>의 도구적 합리화만 보았지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합리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의사소통적 합리화의 사례는 참여민주주의의 확대라든지, 사회운동 및 인권운동 등을 통하여 발견된다고 할 수 있다.
“생활세계와 체계 사이의 전선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관점 : 언어게임
하버마스가 언어행위이론의 언어적 모델을 통하여 의사소통행위이론을 도출하였다면, 리오따르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이론을 원용한다. 그렇다면 과연 <언어게임>이란 무엇인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예를 하나 들자.
장기게임을 하려면 장기알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왕과 사(士), 졸(卒), 차(車), 마(馬), 상(象), 포(包) 등은 각각의 특성이 있다. 그리고 그 특성에 입각하여 장기알을 옮기는 규칙이 형성된다. 장기게임을 하려면 장기규칙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누가 장기를 두다 말고 바둑처럼 ‘아다리’를 해서 알을 따먹는다면 그는 게임의 규칙을 어기는 것이 된다. 고도리치는 도중 민화투로 규칙을 바꾸는 격이다. 언어에도 다양한 진술에 따라 각각의 특성과 규칙이 달라진다.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진술을 <언어게임>이라고 한다.
리오따르는 왜 언어게임에 주목하는가? 그는 언어게임이 현대 정보사회의 지식의 변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보사회는 과학의 놀라운 변환과 다양한 실험, 과거와의 단절이 경험되는 사회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지식 역시 과거의 지식과 단절하고 새로운 지식의 영역을 실험하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정보사회의 지식은 “모든 다른 언어게임들을 제단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거대 이야기를 상정하지 않는다.” 대신 다양성과 차이, 상호 불가공약성을 활성화시킨다.
우리의 자리
그렇다면 리오따르의 대안은 이러한 비판을 맞이할 수 있다. 만약에 거대 이야기들이 분해되고, 그 결과 사람들의 사회적 유대조차 분열됨으로써 각각이 담배연기처럼 아무런 규범없이 떠돌아다니게 된다면? 이에 대한 리오따르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규범없이는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존재론에 호소하거나 보편성을 요구하지 않고, 각각의 상황에 맞추어 규범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상황 속의 규범’이란 무엇인가? 그 속에 있는 우리의 자리는 어디인가?
“자아(soi)는 대단치 않지만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복잡하고 유동적인 관계 조직망 속에 놓여있다. 자기는 항상 남녀노소 빈부격차를 막론하고 의사소통회로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다. 더 적절히 말하면 자아는 다양한 종류의 메시지들이 통과하는 장소이다.”
즉 우리의 자리는 모던적 이성관을 중심으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유동적인 관계의 조직망 속에 조직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중심점은 없다. 중심점 대신 ‘교차점’이 있을 뿐이다.
작은 이야기
이제 문제는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이다. 리오따르는 변화된 현실을 비극적으로 보지 말라고 말한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새로운 자연을 선사하는 것이며, 그 새로운 자연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
“예상되는 것은 지식의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내일의 ‘백과사전’은 자료 은행이다. 그것은 사용자의 능력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포스트모던적 인간에게서 ‘자연’이다.”
이러한 자연은 지식인의 역할도 변화시킨다. 이전의 지식인이 모던적 기획에 입각해서 지식을 전달했다면, 이러한 지식인의 역할은 종언을 고한다. 예전의 대중은 지식인을 통해서만 지식을 전달받는다. 하지만 이제 대중은 컴퓨터만 켜더라도 정보의 홍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지식인의 특권적 지위는 상실된다. 한편 이제 지식은 거대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불일치 속에서 <작은 이야기(petit re'cit)>들을 생산한다. 리오따르에게 이 <작은 이야기>들은 <거대 이야기>가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지식인 것이다.
전략 : 불일치의 활성화
이제 리오따르의 전략은 분명하다. 하버마스의 전략이 <의사소통행위>를 통한 공동이해의 도달 즉 합의라면, 리오따르의 전략은 불일치의 활성화이다.
“포스트모던적 과학은 알려진 것이 아닌 알려지지 않은 것을 생산한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적 과학은 하나의 정당화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바, 이것은 최상 수행의 모델이 아니라, 불일치(paralogie)로 이해된 차이(diffe'rence)의 모델이다.”
이 차이의 모델에 입각하여 리오따르는 <미시 정치학>을 주장한다. 이제 정치학은 다양한 정치에 대한 용인과 그들 간에 벌어지는 언어게임으로 정의된다. 거기에는 어떤 우위도 없다. 그리고 게임을 조정하는 어떤 거대이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최종 판정
우리는 하버마스와 리오따르의 논의를 통하여 현대사회를 분석하는 두 가지 상이한 방법과 전략을 살펴보았다. 이를 최종적으로 도표로 정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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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 |
리오따르 |
입장 |
모던에 대한 옹호 |
포스트모던 주장 |
사회분석 |
생활세계의 식민화 |
정보사회 |
언어이론 |
보편화용론 |
언어게임이론 |
전략 |
의사소통행위이론 |
언어의 미시정치학 |
하버마스가 이성을 신뢰하는 바탕에서 언어소통행위이론을 주장했다면, 리오따르는 고전적인 이성의 개념을 붕괴시키고 그 자리에 불일치를 활성화시키는 언어게임을 위치시킨다. 정치학적으로 표현하면 하버마스가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합의를 추구하는 <거시정치학>을 추구했던 반면, 리오따르는 차이의 모델에 입각하여 <미시정치학>으로 진입한다.
이 양자 중에서 우리가 택할 입장을 선택하기 어려운 듯하다. 하버마스의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이원화모델은 이후 푸코 등의 철학자를 통하여 지식-권력의 일치성의 모델을 통하여 비판받는다. 리오따르의 언어게임 역시 지식 간의 차이성은 인정되면서도 어떻게 한 지식 내의 일치성은 확보되는지 답하기 어려운 난점을 가지고 있다.
한편 하버마스와 리오따르가 사회를 분석함에 있어 언어모델에 입각해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언어야말로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언어에 대한 강조는 하버마스와 리오따르 양자뿐만 아니라 현대철학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언어를 어떠한 위치에 놓느냐에 따라 철학적 입장은 상이하게 나타난다.
뒤에 소개되는 라캉의 경우 언어는 무의식조차 구조화하는 조건으로 자리매김되고, 알뛰세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언어를 재해석하며,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문제에 천착한다. 한편 리오따르의 언어의 <미시정치학>은 들뢰즈에게 있어 욕망의 <미시정치학>으로 전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