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스목사와 동관교회. 우리말 성경 번역
롬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 조선글성경번역유적지 -
1. 동관교회가 있는 곳 심양
2. 동관교회 설립
로스 선교사가 소천했다는 소식을 들은 랴오닝성 한족과 조선족들이 뜻을 모아 교회 강대상 뒤 돌비에 글을 새겨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로스 박사는 스코틀랜드인으로 1841년에 출생하였고 31세에 중국땅으로 선교를 위하여 왔다. 환경이 매우 열악했으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선교하여 결국 어려움을 극복하고 선양 랴오양 싱징 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예배당을 세웠다. 보육원을 설립했고 성경번역사업과 성경주석서 편찬사업을 하였고 신학원도 개설하였다. 70세에 귀국한 후 1915년 가을 75세의 일기로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다. 박사님의 타계 소식을 들은 수많은 성도들은 매우 애통해 하며 그분을 추모하여 그분의 선교사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기념비를 세웠다”로 되어 있다.
기념비 전문 “존 로스목사님은 스코틀랜드 분이시다. 그 음성이나 모습이 여전히 계시는듯해 경의를 표하노라. 하나님에 충성하고 교우들을 사랑하기를 38년간 사방에 교회의 붐을 일이킨 관동(산해관 동쪽)의 한 분이시며 교회당을 신설하고 설교하시니 그 덕행이 받들림을 받도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만고에 보존하기 위해 돌에 비문을 새기니 길이 길이 남아 있으리라”
복음의 영광은 영원히 빛나리!
3. 복음은 국경을 넘어 조선으로 - 우리말 성경 번역
중국 지푸에 상주하고 있던 윌리엄슨은 한국에 대한 선교열정이 남다르게 강하였다. 윌리엄슨으로부터 토머스선교사에 대한 순교 이야기를 들었던 이들은 마음속 깊이 간직하면서 고려문을 드나들었다. 고려문을 드나들 때마다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고려문은 압록강 강변에 있는 단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봉황성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로 중국과 한국간 자유롭게 물물교역이 이루어지던 국제시장이어서 로스는 1874년 10월 이곳을 방문한다.
로스는 고려문에서 많은 한국인들에게 한문성경을 팔면서 전도를 하였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뜻하지 않게 50대로 보이는 한 한국인 상인이 찾아오게 되었다. 로스는 그에게서 한국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며 잠시였지만 한국어의 어법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성경을 전해 주었다. 훗날 그의 아들 백홍준은 로스에게 세례를 받는 기적도 일어났다.
로스는 1876년 4월 2차 선교여행시 다시 고려문을 방문했다. 한국 선교에 열망을 품고 있던 로스는 중국인에게 한국어를 배울 수 있게끔 한국인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한 일이 있었다. 이 무렵 뜻하지 않게 평안도 의주 청년 이응찬을 소개받게 되었다. 이응찬은 배에 물건을 가득 싣고 압록강을 가로지르면서 다니던 상인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풍랑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배에 실었던 물건을 압록강에 다 버리고 파도에 떠밀려 겨우 몸만 살아 중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중국인의 소개로 로스를 만나게 되었으며 로스는 이응찬을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여기고 그에게서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 로스는 한글성경을 출판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워놓고 기도하던 중에 이응찬을 만났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로스는 이응찬으로부터 한글과 한국역사를 배우고 이응찬은 로스로부터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배우게 된다. 그후 이응찬은 자신의 절친한 고향 친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을 로스 선교사에게 소개하였으며 이들도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첫 한국인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이들의 선교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들은 함께 나누면서 요령성의 행정중심지인 심양으로 옮겨갔다. 로스는 곧 심양에 자리를 잡고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7년 기초 한국어 교재를 상해에서 발간하게 되었다. 그리고 1878년 봄에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서를 번역하였다.
의주 청년 서상륜과 경조 형제는 홍삼 장사차 영구에 왔는데 서상륜이 갑자기 알 수 없는 열병에 걸려 위독하였다. 이때 어느 중국인의 안내로 영구미션병원에 입원하여 헌터 의료선교사를 만나 겨우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서 선교사의 은혜로 병을 낮게 된 서상륜은 매킨타이어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그후 로스에게 소개되어 그를 도우면서 누가복음을 번역하였다. 여기에 영원히 남길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과 함께 서상륜과 서경조가 합세하자 그 힘은 어느새 하늘을 나는 새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한국 선교에 정력을 쏟게 되었다. 신앙고백을 했던 서상륜 형제도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로스는 상류층이 볼 수 있는 한자성경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국민이 볼수 있도록 한글 성경번역이 더욱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스는 하루빨리 예수를 한국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복음서 번역에 최선을 다했다. 드디어 로스와 평안도 의주 청년들의 수고로 1882년 봄 심양에서 한글로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출판됐다. 이 얼마나 장엄한 드라마였는가!
복음서가 출간됐다는 소식을 접한 이성하는 로스에게 찾아가 곧 매서인으로 자원하여 복음서를 한아름 안고 고향으로 달려갔다.그러나 막상 압록강을 건너려고 하였지만 경계가 너무 심하여 도저히 건널 수 없었다. 그러나 며칠이고 강가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건너려고 하였지만 여전히 경비가 삼엄하였다. 여러달을 여관방에서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렸지만 여전히 경계가 심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된 그는 복음서를 짊어지고 압록강가로 가 기도한뒤 한권씩 꺼내 불을 질러 태우고 그 재를 강가에 뿌렸다. 다시 남은 복음서는 압록강에 힘있게 내던졌다. 그리고 심양에 돌아가 로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로스는 이 소식을 접하고 꾸짖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성경 씻은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성경 태운 재를 입은 사람마다 크게 성공하리라”고 하였다.
그후 백홍준도 복음서에 담긴 진리의 말씀이 너무 좋아 혼자 읽기는 너무 아까워서 결단을 내렸다. “가자 내 고향에 이 복음서를 전해야 해” 그는 곧 심양 시내 헌종이를 파는 시장에서 종이를 사고 등에 지고 갈 수 있는 짐을 만들었다. 그 짐 밖에는 헌종이로 차곡차곡 채우고 속에는 복음서를 가득 넣었다. 그는 한권이라도 더 가져가야 한다면서 멜빵도 복음서를 뜯어서 새끼를 꼬아 만들었다. 성경을 낱장으로 뜯어서 노끈을 만들고 노끈으로 망태기를 만들어 갖고 들어와서 망태기 올을 하나 하나씩 풀어 다리미로 다려 다시 책을 만들어 전도용으로 사용했다.
백홍준은 많은 기도를 하면서 당당한 걸음으로 의주로 향했다. 이때 경비는 참으로 삼엄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절친한 마을 친구가 경비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친구는 검문하는 체하면서 그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했으니 그가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검문소를 무사히 빠져나와 의주까지 오게 되었으며, 이토록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져서 들여 온 성경책을 받아서 의주에 "평신도교회"를 개척하여 전도하다가 백홍준은 국법을 어기고 외국인과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아 2년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한국인 최초의 순교재물로 사라졌다.
또 서상륜의 사건도 기적중의 기적이었다. 서상륜은 복음서와 전도지를 의주로 반입하기 위해서 심양 동관교회의 한족 신도들이 주최한 파송식 예배에 참석해 예배를 드리고 전송을 받으면서 심양을 떠났다. 그런데 고려문에 도달했을 때 중국 관헌의 불심검문을 받고 기독교 서적을 갖고 있는 것이 발각됐다. 한국에 기독교 서적을 반입할 수 없었던 터라 이들은 곧 한국측 검문소에 인계되어 감옥에 갇혔다. 다행히 감옥의 한 간수가 먼 친척이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야간탈출에 성공했다. 이미 많은 복음서는 거의 압수당하고 친척의 도움으로 겨우 10여권만 소지하고 의주에 오게 되었다. 이렇게 당시 조선은 철저하게 복음서 반입을 권력의 힘으로 저지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권력의 힘만은 이겨낼 수 없었다. 결국 굳게 닫힌 빗장도 서서히 열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었다. 세상이 복음의 위력을 없이할 수 없어서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에서 58가구 중에 50가구가 믿게됨에 한국 최초로 1883년 5월 16일에 "소래교회"를 탄생시킨 이래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 속에 지금까지 이르고 있음을 생각하면 우리 글로 성경을 번역한 선현들에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복음은 마침내 승리한다. 누가 복음의 길을 막을 수 있으랴! 복음의 용사들이여! 힘을 내라
한글을 전혀 모르는 중국인 식자공으로 이 작업을 완료할 수 없어 한국인 식자공을 구하게 되었다. 그가 서간도 출신 김청송이었다. 1882년 식자공이었던 김청송도 매서인으로 자원하고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고구려의 고도인 집안을 중심해서 쪽복음을 나누어주면서 전도를 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갖고 심양에 있는 로스에게까지 찾아가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질문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1884년 11월 집안은 하나님의 축복이 내리듯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이때 로스는 영하 40도의 추위를 무릅쓰고 김청송의 안내를 받으면서 최초로 75명 남자에게 세례식을 거행함으로 새로운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는 너무 둔하고 느린 사람이었다. 그러나 매우 성실했고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성격 때문에 인쇄되어 나오는 복음서를 자세히 읽게 되었고 마침내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1887년 예수셩교전서 즉, 신약 전권이 완간되었다.
말씀은 능력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말씀과 함께 성령과 함께 그의 사람들을 통해 결코 멈추지 않는다.
가슴 아픈 것은 선교지 도착 이듬해 그의 부인이 만주에서 목숨을 잃었다. 혹한의 날씨에서 아들을 낳고 영하 25도라는 엄청난 추위에서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서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후 로스 목사는 새로이 각오를 다지고 부인 스튜어트의 몫까지 선교를 하겠노라 다짐하고 시작한 일이 바로 성경번역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이 작업은 사랑하는 아내의 피뿌림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순교의 피 위에 든든히 세워진다. 오늘의 땀과 눈물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4. 현재의 동관교회
선교는 빚진 자의 사명이다.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선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