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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매일 기획특집
이재창 시인, 남도문학 현장을 가다 (16) - 소설가 유금호
원형적 향수로 떠오르는 바다와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의 화두 … 역사의식과 현실인식 다뤄
문체의 간결성, 묘사의 감각성 등 지녀
문학속 본질적 인간 모습 찾는데 중점
군사문화의 폐단 꿰뚫은 풍자소설도
2003. 06.25(수) 13:56
유금호(60, 목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소설세계는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이라는 화두를 안고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이라는 두가지 카테고리 속에 작가의 꿈이 펼쳐져 있다.
바다가 보이는 과수원집의 고향에서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초기 문학적 토대를 마련했다면 그의 제2의 고향으로 일컬어지는 목포는 그의 후반기 문학을 이끄는 정신적 토양을 마련해 줬다. 또한 80년 5월의 광주는 그가 겪어왔던 6.25와 4.19, 5.16과 더불어 현대사의 한 흐름 가운데서도 가장 큰 내면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시절 첫서리 내리기 시작한 과수원 배 밭에 피어있는 배꽃을 보았습니다. 낙엽이 시작되던 계절, 그 가을 배꽃의 처연한 아름다움, 여름 태풍이 잎과 줄기마저 할퀴고 가버린 후, 내년에 피어야 할 꽃눈이 그 가을, 서럽게 피고 있었던 것을 너무 어린 나이에 보았던 셈입니다. 그뿐인가요. 전쟁 중이던 그 무렵에는 학교 가는 둑길 위,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도 자주 보았습니다.“
이처럼 그의 녹동에서의 어린시절은 그의 소설 곳곳에 각인돼 있다.
60년대 후반, 등단 초기 가장 정력적인 창작 의욕을 과시한 작가의 작품들은 첫 창작집 ‘하늘을 색칠하라’에 집약되어 있다. 이 무렵의 특징은 문체의 간결성과 묘사의 감각성을 지니고 있다.
거창한 주제나 심미 의식을 피해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국소적인 '실존과 상황'의 긴장과 허무를 분위기를 통해 보여준다. 바다가 보이는 고흥 녹동의 과수원에서 소년기까지 보낸 작가의 생래적 기질과 60년대 특히 많이 읽히던 훼밍웨이, 카뮈, 혹은 T.S 엘리엇 등의 영향이 작용된 것으로 보인다.
70년대에 들어 작품 세계의 변모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정치 사회의 현실적 상황이 급격히 경직되고 획일화되어 가던 무렵이었다. 모든 지식인 작가들이 현상에 대한 응전 태도를 취하고, 소위 참여 논쟁의 와중에서 고뇌하고 있었고, 증폭된 역사 의식의 미로에서 저마다의 방식대로 방황하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유금호는 직설과 대결보다는 자신의 예술가로의 신념이 수용할 수 있는 알레고리와 풍자의 길로 보다 더 깊이 나아간다.
이후 그가 눈을 돌리며 부지런히 천착한 역사물의 세계에서는 그가 현실을 통찰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보다 더 날카로운 시선을 감지한다. 물론 바람직한 역사소설이란 그것이 현실 속에서 이룩하고자하는 의미망의 적절성과 형상화에 의해서 평가되지만 우리 사회에서 경험한 산업사회로의 급격한 경제 구조의 개편 과정, 그리고 그 위에 덧씌워진 권위주의적 정치 사회 상황을 두고, 작가의 응전은 역사물을 통한 알레고리와 풍자의 수법을 동원한다.
80년대에는 비교적 외곬으로 학문적 성취에 집착했다. ‘숨어있는 혀’(89)와 그 보다 십 년 전에 집필된 ‘혀’(79) 두 작품은 그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분명히 한 개의 축에 나란히 꿰어져 있다.
비오는 날의 호숫가, 포장 집, 그리고 술기운과 물안개, 빈번한 배설 충동등은 그것대로 하나의 분위기를 짙게 이끌며 시대적 상황의 막막함을 암유하기에 충분하다. 광주사태, 죽은 자들, 그 속에 끼여있는 동생의 죽음, 그 동생을 떠돌게 한 한(恨)이 되었을 출생의 비밀과 어머니의 사연, 또 그녀의 한……, 여기엔 일반화된 고정 관념이나, 상식을 거부하고 개인의 실존적 상황, 혹은 운명에 집착하는 그 돈키호테 친구의 독백 속에는 아웃사이더적 자각이 들어 있다.
그것은 정직하고 예리한 본질적 통찰이외에는 그 어는 것에도 의미나 가치를 거부한 절대 자유의 정신이 시퍼렇게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로소 독자들은 저 숨어 있는 혀, 또 다른 아웃 사이더가 '대바람 소리'나 '역마살의 혼'을 통해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순수한 청각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만적(萬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인류사의 영원한 주제인 자유와 인권이다. 세습 권위와 천민들의 본능적 몸부림 사이의 갈등이라는 이원적이고 평면적인 구도를 거부하고 있는 점에 이 작품의 두드러진 묘미가 함축돼 있다. 누대에 걸친 난세의 어려움을 제거하고 국가와 백성들에게 치세의 질서를 부여하고자 고뇌하는 혁명가 최충헌의 높은 경륜과 비인간적인 신분의 속박을 쳐부수고 사람다움을 쟁취하려는 노비들의 봉기, 그 사이의 대립 갈등 외에, 변란을 빌미로 대권을 탈취하고자 원하는 맹목적이며 부도덕한 권력 의지의 사악한 갈등(장군 최정)을 병치시켜 더 입체적 구조의 알레고리를 제시한다.
'소설 열하일기'는 연암의 자유분방하고도 풍자정신이 가득 넘치는 해학들을 밑바탕에 깔면서 실사구시 내지 이용후생의 철학을 어떻게 접목시켰는가를 아주 구체적이고, 재미있게 묘사한 장편소설이다. 실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꼽히고 있는 연암 박지원 선생의 생애를 재조명한 책이다.
'연암은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다. 때문에 17세기 후반 그분의 생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적인 인간의 모습을 찾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는 연암에 대해 소설을 쓰면서 한국의 풍자정신의 뿌리를 찾아보고자 했다.
'어차피 문학을 한다는 행위가 안주를 거부하는 저항의 몸짓에 관련되어 있다면, 나는 이번 소설을 쓰는 동안 연암 선생을 만나 자유를 향유했던 잠시의 행운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연암은 풍자를 통해, 때로는 직접 행동으로 힘에 부치는 것을 알면서도 거대한 위선의 바윗돌들에 스스로 부딪쳐가면서, 그래서 상처 입고 질시 받아 가면서 철저히 자신의 자유 의지 속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던 분입니다.'
한국민의 뿌리 찾기의 또다른 작품은 '高麗舞 3권'은 특히 고려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선호하고 있는 작가의 야심작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략과 살육과 분탕질, 강화 천도와 무단 장권의 부침과 작폐, 특히 최씨 정권의 말기적 징후들이 도정되면서 그야말로 외환 위에 엎치고 덮치는 내우, 그 도탄과 질곡 속에서 보통의 고려인들이 지켜내려는 자존과 긍지, 신불에 대한 원력과 자기 극복의 과정 속에서 형상화되는 '고려 춤의 춤사위'는 그대로 당대 문화의 특별한 기미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날 빈번히 거론되는 군사 문화의 부정적 폐단, 즉 저급성과 무사려한 편의주의가 결과하는 황폐성을 날카롭게 꿰뚫어버리는 알레고리이며 풍자성이다.
'만적의 난‘은 천민이 양반에게 공식적으로 대항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광주항쟁과 연관시켜 한국민의 저항정신, 자유의지를 다루어 보고자 했다.'
유금호의 작품집 ‘허공 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를 읽으면 허공, 그 너머를 바라보는 작가의 빈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끊임없이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는 낯선 곳을 쉴 새 없이 풀어놓으면서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아 다시 허공을 더듬는 그의 시선.
이처럼 작품 그 너머를 같이 볼 수 있고, 그대 곁에서도 ‘그대’를 그리워하는, 그 상상력의 공간을 공유할 수 있음에 소설의 긴 역사가 이어지는 것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유금호의 ‘허공 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는 같은 공감대를 누리기에 충분한 작품집이다.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모질지 못한 인물들과, 그들의 뿌리 찾기, 죽음에의 천착으로 인한 서정의 배경과, 되풀이되는 소재와 줄거리 등, ‘허공 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에서 만난 것들을 통해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 행여 내가 늘 그리워하는 ‘집’이 있을지도 모를 그 허공 너머를 기웃거려 본다
작품 세계
196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인 데뷔작 ‘하늘을 색칠하라’는 소록도라는 갇혀 있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예술가의 꿈과 좌절, 존재에 대한 허무 인식을 다루었던 그의 작품세계는 훗날 고려시대 노예 반란을 다룬 장편소설 ‘高麗舞’나, 한 개인의 자유 의지를 추구한 장편소설 ‘소설 열하일기’에서도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삶과 역사 속에 억압이 존재하는 한, 표면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저항과 자유의 의지는 지하수처럼 기회를 기다리며 흐르고 있다는 인식은, 실패한 고려시대의 노예반란이나, 실사구시를 꿈꾸던 박지원의 개인을 넘어서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현실의 벽 앞에 그는 근원적 허무를 계속 확인할 수밖에 없다.
제4회 후광문학상 수상집인 소설집 ‘새를 위하여’에는 그의 작품 세계에 내재한 인간의 이 자유 의지와 절망의 확인이 응축되어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98년에 출간된 소설집 ‘여자에 관한 몇 가지 이설, 혹은 편견’에 실려 있는 ‘사라지는 것들, 남는 것들’은 '존재론적 상상력과 사회학적 상상력이 절묘하게 결합된 아픈 역사에 세워주는 상징적인 기념비'라는 평가와 '존재와 죽음의 본질에 대한 성찰로 삶의 원초적 허무를 형상화해 내었다고 ‘신기루를 찾아서’를 분석하고 있다. 이 소설집으로 24회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1999년 겨울 출간된 ‘내 사랑, 風葬’은 온몸에 시너 통을 들이붓고, 불을 붙여야 했던 황폐했던 한 시기를 배경으로, 순결한 젊음 들이 자기 정체성의 확인과 사랑의 실체를 찾는 과정을 실험적 기법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문단의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죽음을 통한 삶의 치열성을 환상적이고 실험적인, 신화와의 교류를 통해 아름답게 형상화했다는 서평(대한매일)등이 있었고, 80년대를 지나온 젊은이들의 고뇌가 서정적 감수성 속에 천착되어, 한국 장편소설의 격을 높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아 ‘내 사랑 풍장’은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선정한 99년 최우수예술인에 선정된 바 있다.
갈등과 방황의 현실속 문학 꿈 키워
낙선의 고배 마시다 64년 신춘문예 등단
유금호씨는 1942년 2월 25일 전남 고흥군의 남쪽 맨 끝머리 녹동, 남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과수원집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과수원집에서 겪은 그때의 폭풍우와 해일, 바다 위로 떠가던 돛단배들의 기억, 울타리 주변에 작은 둥우리를 만들고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던 뱁새며, 오목눈이, 때까치, 종달새에 대한 추억들은 의식 밑바닥에 침전되어 늘 원형적인 향수로 그의 소설에 작용하곤 한다.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열두 살 때이다.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를 다니는 동안 하숙집 바로 앞에 있던 헌 책방에서 눈에 뜨이는 문학 책은 가리지 않고, 거의 빌려서 읽어치웠다. 이 시기의 지독한 남독이 그 후 생애의 독서양보다 많았으리라는 느낌이고, 뒷날 문학에 대한 열망과 관계되었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의사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염원에 이과 공부를 하면서, 소설에 대한 꿈으로, 한 동안 방황과 갈등을 겪다가, 졸업 직전 방향을 선회, 소설가가 되기를 결심했다. 글만 써서 밥을 먹을 수 있을까 하는 계산으로, 수업료가 면제되고, 졸업 즉시 고교 교사로 발령이 되던 국립 공주사대 국문과를 선택했다. 그 젊은 날의 선택이 훗날 선생 노릇도, 쓰는 일에도 치열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많이 하게 했다.
그곳 백제의 고도, 공주에서 소쩍새가 밤 새워 우는소리를 들으며, 대학 내의 수요문학회 회장 일을 맡아 동인들과 밤 새워 글쓰기에 매달렸다. 대학 1학년 때 4.19 와 2학년 때의 5.16. 거기에 손아래 남동생의 죽음, 어머니의 발병, 가까운 친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그 젊은 날, 살아남은 자의 쓸쓸함과 죽음, 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무너져 가는가에 대해 절망하고 분노하면서, 근원적 허무가 의식 한쪽에 침전되어 갔다. 이를 갈며 썼지만 낙선의 계속, 절망과 자학, 그러다가 졸업하던 1964년 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하늘을 색칠하라'가 당선돼 문단에 등단했다.
대학 졸업후 교편을 잡으면서,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석사를, 그후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현대소설에 나타난 죽음의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사, 동서울대 교수, 경희대, 강남대 강사 등을 지내며, 나름대로 쓴다고 썼지만, 한 순간 완전히 펜을 던져버리기도 했다. 5.18때 강의실로 되돌아오지 못한 제자들의 빈자리를 확인하면서, 바로 눈앞에서 온 몸에 석유를 붓고 산화해 가는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어떻게도 해볼 수 없는 무력감 앞에, 문학이라는 것에 심한 회의와 자책의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발표되던 글이 강제 중단되기도 했고, 원초적으로 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쓰는 사람 자신에게마저 진정으로 구원을 줄 수 있는가의 번민의 기간이었다. 때로 쓰지 않는 자유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85년부터는 목포대학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많은 시간 포구의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를 마셨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글을 쓰지 않으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그러면서 떠올린 것이 아버지였다. 어린 시절, 태풍이 휩쓸고 가버린 폐허의 과수원에서 꿈쩍 않고, 바다를 쏘아보던 아버지의 입모습의 기억이었다.
한 해 농사가 하루 밤 태풍으로 끝나버린 아침, 아버지는 어린 그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또한 일찍 죽은 동생의 무덤 앞에서 네가 다 못 살고 간 삶, 글을 쓰는 것으로 형이 더 살아주겠노라고 약속했던 젊은 날의 서러웠던 새벽도 떠 올렸다. 그리고 결론이었다. 글을 쓸 수밖에 없다라고.
소설집으로 ‘하늘을 색칠하라’‘깃발’‘한 마리 작은 나의 꿩’‘고려무’‘열하일기’‘소설 열하일기’‘새를 위하여’‘여자에 관한 몇가지 이설, 혹은 편견’‘내 사랑 풍장’‘허공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등이 있고, 비평집엔 ‘언어, 그 꿈과 절망’‘한국현대소설에 나타난 죽음의식 연구’‘신 소설론’, 동화집으로 ‘과수원집 아이’가 있다.
그는 현재 국립 목포대학 교수로 현대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글 ; 이재창 편집부국장 겸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