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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 新羅古都 左道.
*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4리 여정. 5일 반.
* 동쪽으로 진보현(眞寶縣)의 경계까지 65리,
* 청송부(靑松府)의 경계까지 66리,
* 남쪽으로 의성현(義城縣)의 경계까지 44리,
* 서쪽으로 예천군(醴泉郡)의 경계까지 54리,
* 북쪽으로 영천군(榮川郡)의 경계까지 42리,
* 예안현(禮安縣)의 경계까지 32리이며,
* 대구감영(監營) : 2백10리. 여정. 2일.
* 울산병영(兵營) : 3백60리, 여정. 3일 반.
* 동래수영(水營) : 5백리. 여정. 5일.
* 고성통제영 : 5백80리. 여정. 6일.
* 동ㆍ서의 상거(相距)는 115리이고 남ㆍ북의 상거는 250리이다.
○ 임하현(臨河縣)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굴화군(屈火郡)이니 신라 때 곡성(曲城)이라 고쳤다. 풍산현(豐山縣) 신라 때의 하지현(下枝縣)이니, 영안(永安)으로 고쳤으며, 순주(順州)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 신라 때에는 예천에 예속되었다.ㆍ일직현(一直縣) 신라 때의 일직현인데 뒤에 직녕(直寧)으로 고쳤다. 도 속현이고, 감천현(甘泉縣)ㆍ길안현(吉安縣) 원래는 부곡이다.ㆍ내성현(奈城縣) 퇴곶부곡(退串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승격시켰다.ㆍ춘양현(春陽縣) 가야향(加也鄕)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ㆍ재산현(才山縣) 덕산부곡(德山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ㆍ일계현(日谿縣)이 있다.
0 異名: 길창(吉昌). 복주(福州). 지평(地平). 화산(花山). 창녕(昌寧).
고장(古藏). 영가(永嘉). 일계(一界). 우릉(右陵).
능라(陵羅). 고령(古寧). 고타야(古陀耶),
0 진관(鎭管: 군사 관할지역)
도호부(都護府)가 2 고을: 영해(寧海)ㆍ청송(靑松) ㆍ
군(郡)이 3고을: 예천(醴泉)ㆍ영천(榮川)ㆍ풍기(豐基).
현(縣)이 8고을: 의성(義城)ㆍ봉화(奉化)ㆍ진보(眞寶)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 예안(禮安)ㆍ영덕(盈德)ㆍ용궁(龍宮).
* 안동부사의 공식 명칭: 안동대도호부사겸 안동진병마첨절제사.
* 일명: 화백(花伯)
* 안동판관, 종5품. 병마절제도위 겸직.
* 안동교수, 종6품. 뒤에는 제독(5품)
* 관속(官屬)
* 유향(留鄕)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3인.
* 군관(軍官) 90인, * 아전(衙前) 234인, *지인(智印) 68인,
* 사령(使令) 71명, * 관노(官奴) 108명, * 관비(官婢) 99구(口)
* 관둔전(官屯田) 50결, 공수전(公須田) 15결
* 무학제독(武學提督)
* 영장(營將) 한 사람이다. 무신(武臣)으로 정삼품(正三品)이다.
효종(孝宗)(1653)에 군관(軍官) 200명과 군뢰(軍牢) 30명을 두었다.
* 안기찰방(安奇察訪) 참상 종6품(參上從六品)
역리 1백32인. 지인 86인. 노 36명. 비 20구. 사령 20명.
0 관청건물(公廨)
객사(客舍: 성내에 있다) 도재당(道齊當; 도헌북쪽에 있다)
장관청(將官廳: 성 남문밖에 있다). 인리청(人吏廳: 동헌 남쪽에 있다)
약원(藥院: 성 북문 밖에 있다)
0 인구 을묘년 1735년(영조11) 기준
원호 1만5천5백97호. 인구 66,929명.
남자: 26,261명. 여자: 40,668명.
0 군병(軍兵: 군사)
訓鍊都監砲保一百八十七名御營正軍一百十一名資保一百十一名官保二百二十二名禁衛正軍五十九名資保五十九名官保一百二十七名兵曹騎兵七百十三名步兵六百八十七名禁軍保一百五十七名袱直六名扈輦隊保七名京驛保七名補充隊余丁三名束伍軍馬軍二百四名保四百八名步軍一千七百十五名保一千七百十五名水軍九百十九名武學一百二十二名樂生一名保三名樂工七名保二十三名刻手保十六名烽軍六百名
0 진공(進貢: 공물을 갖다 바침. 진상품)
彩花席 別紋上席 黃龍紋席 滿花方席 小龍紋席 邊兒寢席 瓜龍紋席黃花 席 雜花席 中硯 小硯
0 토산품
철(鐵)ㆍ인삼(人蔘)ㆍ은어[銀口魚]ㆍ잣[海松子]ㆍ설면(雪綿)ㆍ꿀(蜂蜜)ㆍ왕골[莞草]ㆍ적복령(赤茯苓)ㆍ신무애뱀[白花蛇], 자석(紫石) 독천(禿川)에서 나오는데, 벼루를 만들 수 있다. 송이[松蕈]ㆍ석이버섯[石蕈]ㆍ오미자(五味子)ㆍ지황(地黃).
0 성씨
본부 김(金)ㆍ권(權)ㆍ강(姜)ㆍ조(曹)ㆍ장(張)ㆍ 고(高)ㆍ이(李), 우(禹)ㆍ곽(郭) 모두 내성(來姓)이다. 조(趙) 촌성(村姓)이다.
임하(臨河) 윤(尹)ㆍ이(李)ㆍ신(申), 전(全) 김(金)이라 하기도 한다. 임(林), 화(華) 개경(開京). 풍산(豐山) 김(金)ㆍ임(林)ㆍ유(柳)ㆍ홍(洪)ㆍ강(康)ㆍ심(沈), 민(閔) 강주(剛州). 일직(一直) 임(任), 손(孫) 본래 순(荀)인데, 고려 때에 현종(顯宗)의 휘(諱)를 피하여 손(孫)으로 고쳤다. 전(全)ㆍ노(盧)ㆍ전(田)ㆍ한(韓). 가량(加良) 소(邵)ㆍ윤(尹). 감천(甘泉) 이(李)ㆍ김(金)ㆍ조(趙)ㆍ전(全)ㆍ문(文), 장(張)ㆍ최(崔) 모두 속성(續姓)이다. 길안(吉安) 김(金)ㆍ임(林)ㆍ박(朴). 내성(奈城) 윤(尹) 속성(續姓)이다. ○ 재산(才山)ㆍ개단(皆丹)ㆍ소천(小川)도 같다. 소라(召羅) 엄(嚴). 춘양(春陽) 정(鄭)ㆍ윤(尹).
0【풍속】
부지런한 것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농사 짓고 누에치는 일을 힘쓴다. 지리지(地理志). 무본절용(務本節用) 권시(權偲)의 향사당기(鄕射堂記)에, “풍속은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농사를 힘쓰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당(唐)ㆍ위(魏)의 유풍(遺風)이 있다.” 하였다. 근검충의(勤儉忠義) 권제(權踶)의 덕민루기(德民樓記)에, “근검(勤儉)한 풍속과 충의(忠義)의 열렬함은 남쪽 지방의 으뜸이 된다.” 하였다.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누에를 치며, 굽은 수레[曲車]를 사용하고, 광주리를 짊어지고 다닌다 옛 사람의 기록이다. 풍속은 예스럽고 백성들은 순박하다 백문보(白文寶)의 금방기(金榜記). 풍기(風氣)가 혼륜(渾淪)하다 권반(權攀)의 모은루기(慕恩樓記). 『신증』 석전(石戰) 매년 정월 16일에 부내에 사는 사람들이 부(府)의 중앙에 있는 내를 경계선으로 하여, 좌우편으로 패를 나누어 돌을 던지며 서로 싸워 승부를 결정한다. 경오년 왜적(倭賊)을 토벌할 때에 석전(石戰) 잘하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았더니, 적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0【형승】
안동은 도(道)의 웅번(雄藩)이다 이석형(李石亨)의 사청기(射廳記). 큰 강이 띠처럼 둘러 있다. 백문보(白文寶)의 금방기(金榜記)에, “무협(巫峽)이 왼쪽에 펼쳐져 있고, 성산(城山)이 오른쪽에 버티고 있으며, 큰 강은 띠처럼 둘러 있고, 물은 돌아서 호수를 만들고 있다.” 하였다. 물은 황지(黃池)로 흐르고, 산은 태백이 뛰어나다 무명씨(無名氏)의 백련사(白蓮寺) 침벽루기(枕碧樓記)에, “물은 황지로 빠져서 일만 구렁을 흡수하고, 산은 태백산(太白山)이 가장 뛰어나 뭇 봉우리를 통솔한다.” 하였다.
0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47척(尺), 높이가 8척이며, 안에 샘물 18군데와 도랑[渠] 1군데가 있다.
0 【봉수】
* 남산(南山) 봉수 다른 이름은 봉지산(烽枝山)이다. 부의 남쪽 14리에 있다. 동쪽으로 신석산 봉수에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일직현(一直縣) 감곡산(甘谷山) 봉수에 호응하며, 서쪽으로는 풍산현 소산 봉수에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개목산 봉수에 호응한다.
* 신석산(申石山) 봉수 부의 남쪽 26리에 있다. 동쪽으로 임하현 약산 봉수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남산 봉수에 호응한다. 약산(藥山) 봉수 임하현의 동쪽 16리에 있다. 동쪽으로 진보현(眞寶縣) 남각산(南角山) 봉수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신석산 봉수에 호응한다.
* 소산(所山) 봉수 풍산현의 남쪽 4리에 있다. 서쪽으로 예천군(醴泉郡) 서암산(西菴山) 봉수에 호응하고, 동쪽으로 남산 봉수에 호응한다. * 당북산(堂北山) 봉수 내성현의 남쪽 3리에 있다. 동쪽으로 봉화현(奉化縣) 용점산(龍岾山) 봉수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영천군(榮川郡) 성내산(城內山) 봉수에 호응한다.
* 개목산(開目山) 봉수 부의 북쪽 39리에 있다. 남쪽으로 남산 봉수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예안현(禮安縣) 녹전산(祿轉山) 봉수에 호응한다.
*감곡산(甘谷山) 봉수 일직현의 동쪽 9리에 있다. 남쪽으로 의성현 마산(馬山) 봉수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남산 봉수에 호응한다
0 산천
* 청량산(淸涼山) 재산현(才山縣)의 서쪽에 있다.
* 하지산(下枝山) 다른 이름은 풍악(豐岳)인데, 풍산현(豐山縣)에 있다.
* 병산(甁山) 본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 고려 태조가 견훤과 더불어 여기에서 싸워 훤이 패주(敗走)할 때에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포로로 잡았으며, 죽은 자가 8천 명을 넘었다.
* 문필산(文筆山) 다른 이름은 갈나산(葛那山)인데, 본부의 남쪽 23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신라의 김생(金生)이 여기에서 글씨를 배웠으므로 산 이름을 문필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 안축(安軸)의 시(詩)에, “신라 때의 김생은 글씨 쓰는 법이 신기하였는데, 산집[山室]에서 글씨를 배우던 일이 이미 천년을 지났네.” 하였다.
* 태백산(太白山) 소천부곡(小川部曲)에 있다. 자세한 것은 강원도의 삼척부(三陟府)에 있다.
* 이이현(耳而峴) 임하현(臨河縣)에 있다.
* 두모현(豆毛峴)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 모현(茅峴) 길안현(吉安縣)에 있다.
* 노산(盧山) 본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 학가산(鶴駕山) 하가산(下柯山)이라고도 한다. 본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또 영천군(榮川郡) 편에 나온다.
* 천등산(天燈山) 부의 북쪽 28리에 있다.
* 치원봉(致遠峯) 청량산(淸涼山)에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여기에서 글을 읽었으 므로 이름 지은 것이다.
* 와부탄(瓦釜灘)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진보현(眞寶縣)의 신한천(神漢川), 청송 부(淸松府)의 남천(南川), 임하현의 금소천(琴召川)의 하류이며 견항진의 남쪽에 서 합류한다.
* 귀령(龜嶺) 일직현(一直縣)에 있다.
* 견항진(犬項津)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물야탄의 하류이다.
* 물야탄(勿也灘) 부의 동쪽 11리에 있다. 요촌탄의 하류이다.
* 요촌탄(蓼村灘)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예안현(禮安縣)의 부진(浮津)의 하류이 다.
* 독천(禿川)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근원이 의성현(義城縣)의 황산 (黃山)에서 나와서 견항진의 하류에 들어간다.
* 금소천(琴召川) 임하현의 서쪽 5리에 있으며, 부(府)와의 거리는 동쪽으로 27리 이다. 즉 청송부 관내 안덕현(安德縣) 서천(西川)의 하류로 와부탄의 상류에 들 어간다.
* 여자지(女子池) 풍산현에 있다.
* 화산(花山) 하나는 부의 동쪽 14리에 있고, 하나는 풍산현의 남쪽 5리에 있다.
* 송관산(松官山) 내성현(奈城縣)의 남쪽 5리에 있다.
* 문수산(文殊山) 내성현의 북쪽에 있다.
* 송대풍혈(松臺風穴) 청량산에 있다. 석현(石峴) 일직현의 남쪽 1리에 있다.
* 고암현(古巖峴)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 광탄(廣灘) 부의 동쪽 13리에 있다.
* 화천(花川) 풍산현의 화산(花山) 아래에 있다.
* 사천(斜川) 일직현의 앞에 있다.
* 망라담(網羅潭)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0 누정
* 관풍루(觀風樓) 부의 성안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의 기(記)에, “조령(鳥嶺)의 남쪽에 웅대한 번진(藩鎭)과 큰 고을이 안개처럼 벌여 있고, 솥발처럼 병립하고 있으나 대도호부(大都護府)라는 칭호는 오직 영가부(永嘉府)만이 일컬어지고, 다른 고을은 참여하지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전조(前朝) 때에 공민왕(恭愍王)이 적의 침구(侵寇)를 피하여 남쪽으로 거둥하다가, 이 고을에 머무르면서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서, 싸워 이겨 경성(京城)을 수복하고 임금의 행차가 서울로 돌아갔다. 그 큰 계책이 여기에서 큰명[大命]을 정(定)하여 능히 다시 우리 동쪽 나라를 안전하게 하였으므로, 고을 이름을 안동(安東)이라고 내렸으며,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켜 영남(嶺南)의 모든 고을 중에서 우두머리가 되게 한 것이다. 이때부터 부의 이름난 성씨와 거대한 가문들이 중외(中外)에 빛났으며, 장수나 재상의 지위에 이르는 자가 어느 시대에나 끊이지 않았다. 그 인물과 토산물의 왕성함은 또 다른 고을이 비교할 수 없다. 객사(客舍)의 동쪽에 옛날 다섯 칸의 누(樓)가 있었는데, 이름을 덕민루(德民樓)라고 하였다. 신묘년에 횃불 맡은 사람이 실화(失火)하여 하루 저녁에 타서 재만 남게 되었다. 이듬해인 계사년에,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공은 목사(牧使)로서, 일선(一善) 김성경(金成慶)군은 통판(通判)으로서, 함께 부(府)의 일을 맡게 되었다. 손공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폐단은 없어지고 이로운 것은 일어나며 백성들은 화합하고 시절은 풍년이 들었다. 부(府)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말하기를, ‘아래 읍(邑)이나 작은 현(縣)에서도 오히려 누대(樓臺)가 있어서 왕명을 받들고 온 사람들을 오르게 하는데, 너희 부는 큰 고을로서 홀로 누 하나 없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고을에서 나이 많고 준걸(俊傑)한 이들이 목사의 말을 듣고 번갈아 찾아뵙고는 누 세우기를 계속 청하였다. 손공이 말하기를, ‘나를 번고롭게 하지 마시오. 수령들이 법령을 까다롭게 하고 부세(賦稅) 징수를 빈번하게 함으로 인하여, 평민이 산중으로 도피하여 중의 옷을 입고 있는 자가 많게 되었으니, 이 고을 안에도 반드시 중으로서 기와를 잘 굽는 자, 나무를 잘 다루는 자, 먹줄을 잡아 길고 짧음을 잘 잴 줄 아는 자들이 있을 것이오. 그 자들의 이름을 적어 오시오.’ 하였다. 이튿날, 기와 굽는 사람, 나무 다루는 사람, 길고 짧음을 재는 자 수십 명의 명단을 올렸다. 손공이 그들의 기능의 순서에 따라 그 일을 나누어 맡기니, 여러 공장(工匠)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제각기 경쟁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무를 벌채하여도 백성들은 알지 못하였으며, 재목을 운반하여도 백성들은 알지 못하였다. 흙을 두드려 차지게 빚고, 가마를 축조하여 기와를 구워도 백성들은 모두 알지 못하였다. 이에 객사의 대문 밖에 터를 정하고 누 5칸을 기공하였더니, 두어 달이 채 못 되어서 날아갈 듯이 아름답고 훌륭한 누각이 우뚝 솟아 서게 되었다. 그 일을 준공하였을 때에 손공이 여러 공장들에게 술을 대접하고 낙성식을 올렸다. 그때 마침 감사(監司) 김영유(金永濡) 공이 부에 들어왔다가 이 누에 올라서 두루 살피면서 서성거리니, 온 부중(府中)의 좋은 광경이 좌우로 펼쳐졌다. 감사가 손공에게 말하기를, ‘누는 이루어졌소. 이름은 또 불타버리고 남은[回祿 불맡은 귀신] 옛 이름을 습용(襲用)하려 하시오?’ 하니, 손공은 말하기를, ‘부에 누가 없어서 부내의 사람들이 민망하게 여기었는데, 이제 누가 이루어지고 큰 손님이 내림(來臨)하셨으니, 청하건대 관풍루(觀風樓)라 고쳐서 오늘의 상공(相公)의 아름다운 정치를 드러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김공이 말하기를, ‘나 때문에 관풍루라고 이름을 짓는 것은 자기의 칭찬을 하는 것 같은 혐의로운 데가 있소. 그러나 실상 세상에 널리 통용되는 이름이니 무슨 해로움이 있겠소.’ 하고, 드디어 그 현액(懸額)을 ‘관풍(觀風)’이라고 썼다. 무릇 누대(樓臺)ㆍ정사(亭榭)라는 것은 본래 정치하는 도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누대를 폐지하고 일으키고 하는 일에 있어서는, 폐지해야 하고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 있으며, 일으켜야 하고 폐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리하여 관리의 정치를 잘하고 못한 것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안동부는 평지에 자리잡아 수읍(首邑)을 정하고 또 자성(子城)을 둘러 쌓았기 때문에, 관청의 청사와 객사(客舍)의 집이 모두 위치가 낮고 막혔으므로 답답하다. 더운 때를 당하면 비록 목사나 통판(通判)일지라도 또한 시원함을 취할 길이 없었다. 혹 천지가 화로 속 같고 불 같은 해가 공중에서 타고 있을 때에, 봉명사신(奉命使臣)이 거마(車馬)를 쉬지 않고 달리느라면 길은 멀기만 하고, 물과 산의 험난한 곳을 드나들지만, 역사(驛舍)는 황폐하고 길에는 쉴 곳도 없어 땀은 비오듯 하고 티끌은 옷에 가득하여, 몸은 더욱 피로하고 호흡 또한 곤난할 것이다. 이러한 때에 말을 버리고 높은 누(樓)에 올라 옷깃을 헤치고 헌함에 서면, 맑은 바람이 가볍고 시원하게 불어와서 마치 날개가 돋혀서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는 것 같을 것이니, 번열(煩熱)과 숨막힘을 씻을 수 있고, 정신을 시원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뜨거운 것을 잡고도 가서 씻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것은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누대(樓臺)와 정사(亭榭)가 정치하는 도리에는 무관한 것으로서 주군(州郡)에는 없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제 손공은 놀고 있는 자들을 사역하여 백성들은 부역(夫役)을 알지 못하였으며, 불탄 것을 다시 지었을 뿐이고 새로이 창건한 것이 아님에랴. 수령(守令) 가운데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서민들은 편안하여 예악(禮樂)이 있을 뿐, 꼭 하는 바가 없어도 교화(敎化)에 잠기는 것을 누릴 수 있게 되고, 감사(監司)로써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관하(管下)에 있는 관원들의 벼슬을 올려 주는 일, 내쫓는 일들이 공정하여 수령들의 횡포하고 지나치는 폐단이 끊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심과 한탄이 없는 아름다운 상태는 옛날 한(漢) 나라의 문제(文帝)와 그의 아들 경제(景帝)의 시대에 겨우 보였을 뿐이며, 형옥(刑獄)과 송사(訟事)는 없어지고 칭송하는 소리만 일어나는 상태는, 다시 옛날 서주(西周)의 성대(盛代) 같은 것을 볼 수 없는 것일까.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홀로 수령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감사 또한 훌륭한 인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감사 김공은 안동 김씨(安東金氏)로서 당대의 이름난 관원이 되어, 이 도에 감사로 부임하여 탐오(貪汚)한 자를 엄중하게 다스리니 아전들은 법을 두려워하여 부정부패한 자가 없고, 부세(賦稅)와 정사를 너그럽게 하니 백성들은 생업에 안정할 수 있어서 떠돌아다니며 이사해야 하는 괴로움이 없다. 죄형(罪刑)의 판결이 현명하여 감옥에는 미결로 오래 지체하는 죄수가 드물며, 감사 자신에 대한 추종(騶從)을 간이(簡易)하게 하고, 역전(驛傳)에는 살찐 말이 있다. 모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정사와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을 구별하는 방법은 마련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영남의 70여 고을이 다 편안하게 살면서 생업을 즐기는 가운데에 있다. 다른 날 공이 조정에 돌아가서 공경(公卿)이 되었을 때에, 이 누(樓)가 큰 부(府)에 우뚝 솟아 남아 있으면, 마땅히, 옛날 주(周) 나라의 소공(召公)이 사랑[愛]을 남긴 남국(南國) 땅에 남은 감당(甘棠) 나무와 같이 백성들의 그 덕을 사모하는 대상이 될 것이다. 나의 4대조 판삼사(判三司) 손홍량(孫洪亮) 공이 정일품(正一品) 벼슬에서 물러나와 이 고을에 사니, 공민왕이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총애하였다. 그러니 나도 또한 이 고을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즐겁게 공의 어짊을 말하고, 인하여 뒤의 풍속을 관찰하는 자가 김공에게 짝할 만한 아름다운 정사를 하기 바라며, 그리고 또한 이 누에 이름을 걸게 되는 것을 다행하게 여긴다.” 하였다.
* 영호루(映湖樓) 부(府)의 남쪽 5리에 있다.
○ 공민왕이 남쪽으로 거둥하여 복주(福州)에 이르렀을 때에, 영호루에 나아가서 배를 타고 유람하여, 호수가에서 활을 쏘았는데, 안렴사(按廉使)가 임금에게 음식을 대접하니 구경하는 자가 담처럼 둘러 섰다. 어떤 이는 옷소매를 돌리어 눈물을 닦으며 탄식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참서(讖書)를 외우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홀연히 남쪽의 한 도적이 깊이 와우봉(臥牛峯)에 들어온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전에 소[牛]가 크게 우니 용(龍)이 바다를 떠나 얕은 물에서 맑은 물결을 희롱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 그 징험을 보는구나.” 하였다. ○ 백문보(白文寶)의 금방기(金榜記)에, “신축년 겨울 11월에 임금이 난(亂)을 피하여 가다가 복주에 이르렀다. 처음에 충주(忠州)ㆍ광주(廣州)로부터 조령(鳥嶺)을 넘으니, 관리들과 백성들이 난리에 당황하여 놀란 노루와 숨은 토끼처럼 되어서, 손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다. 비록 명령할지라도 걷잡을 수 없어서 임금이 마음으로 근심하였는데, 조령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넓고 멀고 아득하여서 마치 천지가 가로놓인 것 같은 것이 경상도의 영역이었다. 영(嶺)으로부터 북쪽은 태백산(太白山)ㆍ소백산(小白山)이 웅장하게 솟아 있고, 그 남쪽에 구불구불 서린 것은 열이 넘는 주군(州郡)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복주는 거진(巨鎭)이다. 산은 높고 물은 맑으며 풍속은 예스럽고 백성들은 순박하다. 장군과 원수(元帥)의 기(旗)는 엇갈려 덮여 있고, 관면(冠冕)과 패옥(佩玉)의 차림은 서로 바라다보였다. 행궁(行宮)을 말끔히 정돈하여 임금의 행차를 인도하면서 태연하고 침착하여 여유가 있었다. 임금이 마음으로 기뻐하여 여기에 거가(車駕)를 멈추고, 장수에게 명하여 적(賊)을 치게 하였다. 이윽고 싸움에 이겨 경도(京都)를 수복하게 되자, 드디어 이 고을을 승격시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하고 조세(租稅)를 감면하였다. 하루는 고을의 영호루에 거둥하여 기쁜 마음을 시원스럽게 폈는데, 경도에 돌아간 뒤에도 멀리 생각함을 그치지 못하였다. 한가한 날에 친히 필연(筆硯)을 잡고 누(樓)의 현판(懸板)으로 할 큰 글씨 석 자를 써서 하사하여 그 누에 달게 하였다. 영호루는 호수를 굽어보고 있어서 기둥과 서까래, 대마루와 들보가 물속에 거꾸로 비쳐 그림자가 능란(凌亂)하다. 무협(巫峽)이 그 왼쪽에 펼쳐져 있고 성산(城山)이 그 오른쪽에 버티고 있다. 큰 강은 띠처럼 둘러 있고 물은 돌아서 호수를 만들고 있다. 무릇 물의 근원과 지류가 머리를 간방(艮方)에 두고 꼬리를 곤방(坤方)에 둔 것으로서 하늘에 있는 것을 은하수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복주의 글 잘하는 선비와 걸출한 인재가 가끔 이 정기를 타고 그 사이에 탄생한다. 대체로 해와 달이 형상을 드리우고 은하수가 문채를 이루는 것은 하늘의 아름다운 현상이다. 이 누가 은하수처럼 근원을 간방에 두고 꼬리를 곤방에 둔 강물을 누르고 섰으니, 하늘의 문채와도 같은 임금의 제자(題字)를 얻어 금벽(金碧)의 단청으로 새겨서 후세에 밝게 빛나게 함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임금의 덕의 밝은 빛이 이곳에 강림(降臨)하여, 몇 천 년을 두고 우러러보며 흠모하게 되었으니, 나라 일의 기틀에 불행함이 있었던 것이 도리어 누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 되었다.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옛날에 우리 충렬왕(忠烈王)은 비록 태평한 세상을 만났었으나, 오히려 동쪽 변두리에 일이 있어서 이 지방을 순행(巡幸)하다가 이 고을의 영은정(迎恩亭)에 행차하여 또한 귀한 제액(題額)을 하사하였으니 또한 정자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었다. 앞의 것과 뒤의 것이 빛나서 모범이 되고 해와 별처럼 밝아서 함께 한 고을의 영광과 광채가 된다. 아 거룩하도다. 이 누를 지은 것이 이미 오래이다. 금빛으로 새긴 현액의 자획은 하늘을 떠 받치는 기둥 같은데, 누의 크기는 그 현액과 걸맞지 않았다. 지정(至正) 무신년에 고을의 수령 신자전(申子展)군이 옛 규모를 고치니, 새가 날개를 펼친 듯한 자세와 꿩이 높이 나는 듯한 아름다운 채색으로, 바로 호수의 수면에 걸터앉게 되었다. 때로 누에 오르면 아침 해가 올라올 때나 저녁 달이 빛날 때에는, 황금 빛 현액과 광채를 다투는 것이, 곧 불빛 구름을 피워 올리며 용(龍)이 싸우는 듯한 광경이 갑자기 호심(湖心)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뛰고 혼백이 떨게 만들어서, 이 누에 오르내리는 것이 두려워지는 것만 같다. 진실로 바라보면 의젓하고 위엄이 있어서 두려워 침범할 수 없을 것 같다. 임금의 수택(手澤)만으로도 오히려 그러하니, 하물며 친히 몸소 임금의 덕화에 감화를 받은 사람임에랴. 봉익판전교(奉翊判典校) 권사복(權思復)군은 이 고을 사람으로 이미 그 누를 중신(重新)하여 그 현액을 걸고, 그 단서(端緖)의 기(記)를 나에게 청하였다. 내 비록 글을 잘하지 못하나 영원히 전하여질 훌륭한 일을 찬미하는데 이름을 싣는 것을 적이 기뻐하여 대충 누의 오랜 세월의 연혁을 서술하고, 뒷날에 있을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 같은 훌륭한 글을 기다리기로 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다른 날 강산의 유람을 나가서 다시 한번 이 누에 이르러 훌륭한 필적을 얻어 볼 수 있게 되면, 다시 절하고 시(詩)를 지어서 또한 나의 심정을 다하여 나의 평소의 뜻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찬(讚)과 그 서문(序文)에, “지정(至正) 신축년 겨울에 국가가 남으로 복주에 옮기고, 군사를 출동시켜 북벌하여 이듬해에 드디어 적(賊)을 경성(京城)에서 섬멸시켰다. 복주를 승격시켜 안동도대호부로 하였으니, 대체로 그 옛 칭호를 회복한 것이고 또 기쁨을 표시한 것이다. 병오년 겨울에 임금이 서연(書筵)에서 영호루(映湖樓)라는 석 자를 큰 글씨로 써서, 정순대부(正順大夫) 상호군(上護軍) 신(臣) 흥경(興慶)에게 명하여 왕지(王旨)를 전달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신 사복(思復)을 불러들여 면전에서 글씨를 주었다. 그때 안동도호부의 판관(判官) 조봉랑(朝奉郞) 신 자전(子展)이 아전들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누의 규모가 누차하여 임금이 하사할 현액(懸額)을 빛나게 할 수 없을까 걱정이다.’ 하고, 이에 기일을 정하여 더 넓히고 더욱 물에 가깝게 하니, 그 규모가 더욱 크고 시원하였다. 신 사복(思復)이 그 까닭을 신에게 자세히 말하고 또 기(記)를 청하였다. 신이 말하기를, ‘누(樓)의 기(記)를 쓰는 일은 비록 능(能)하지 못하나, 신은 홀로 느낀 바 있다. 임금이 전날 복주에 머무를 때에 일찍이 이 누에 거둥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신이 시신(侍臣)으로서 실제 수종(隨從)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경계하던 마음은 게을러지고 또 잊은 지 오래 되었다. 아, 임금께서 안동을 사랑하여 돌보심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고루한 것을 잊고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찬(讚)을 짓는 바이다.’ 찬에 이르기를, ‘높고 밝은 저 운한(雲漢)을 성인(聖人)이 법칙으로 삼아서, 마음과 자획(字畫)이 한결같이 바르고 곧다. 붓이 손에서 움직이니 광채가 하늘로부터 이루어졌다. 신기하게 변하고 불가사의하게 화하여,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를 알지 못한다. 굴절생시(屈折生柴)하는 저 곤(困)하게 배우는 자들은, 엎드려 감탄하며 놀라서 비지땀을 흘린다. 이 안동(安東) 고을은 우리가 다시 일어난 곳이라 하여, 영호루(映湖樓)라는 큰 글씨 석자를 써 주셔서 거(莒)를 잊지 아니하는 뜻을 보였네. 햇빛은 그 가운데에 있고 용(龍)은 와서 둘렀도다. 위에도 하늘이요 아래에도 하늘이니 물이 비쳐 주었다네. 이 현액 때문에 풍경은 모습을 고치고, 산천은 수려함을 더한다. 부로(父老)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임금의 만세수(萬歲壽)를 축원한다. 편안한 때에나 위태한 때에나 근심을 생각하면 반드시 창성하리라. 복주의 사람들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전하는 떳떳함이라네. 세상을 보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충성을 권(勸)함이라네. 신(臣)은 절하고 찬(讚)을 지어 신하들에게 고(告)하노라.’ 하였다.” 했다.
○ 정도전(鄭道傳)의 시(詩)에, “나는 용[飛龍]이 하늘에서 밝은 구슬을 희롱하니, 그 구슬 멀리 영가(永嘉) 고을 호수 위의 누(樓)에 떨어졌다. 밤에 구경할 때에도 촛불을 잡고 볼 까닭이 없나니, 신기한 광채가 1만 길이나 물가를 쏘아 비치네.” 하였다. ○ 고려 채홍철(蔡洪哲)의 시에, “요사이 바다로 산으로 많이 다녔으나, 티끌 세상 밖에 있는 것 같은 정신은 여기에 오니 더하여진다. 처음에는 꿈에 운우(雲雨)의 무협(巫峽)에 노니는 것 같더니, 점차로 몸이 그림 속의 집으로 들어가는 듯하구나. 남쪽 강의 가을 밤에는 1천 봉우리에 달빛 비치고, 북쪽 마을의 봄바람에는 1만 나무에 꽃이 피네. 비록 이 담담(淡淡)한 심정의 한가한 길 가는 자로도, 이 누에 오르니 마른 삭정이 같을 수는 없구나.” 하였다. ○ 고려 우탁(禹倬)의 시에, “영남에 만판 놀며 여러 해를 보냈건만, 이곳의 물과 산에 경치 더욱 좋은 것을 가장 사랑하네. 꽃다운 풀 우거진 나룻터에는 손[客]의 길이 나누어졌고, 푸른 버들 늘어진 둑 가에는 농부의 집이 있다. 바람이 고요하니 거울 같은 수면(水面)에는 연기가 그린 눈썹처럼 가로질러 비치고, 세월이 오래니 담 머리에는 이끼가 자랐구나. 비가 그친 사방 들에 격양가(擊壤歌) 들리는데, 앉아서 숲가에 차운 삭정이가 밀려온 것을 보노라.” 하였다. ○ 고려 조간(趙簡)의 시에, “이 누의 풍경은 사람을 애타게 함이 많아, 쌍계팔영(雙溪八詠)도 감히 더할 수 없으리. 깃발과 일산의 그림자는 초부(樵夫)와 목동(牧童)의 길에 엇갈리고, 피리와 거문고 소리는 아전과 백성들의 집에 떨어지네. 공중에 걸터앉은 처마가 훤하니 트여서 몸에 소름이 돋고, 물에 비치는 헌함이 높아서 눈에 아찔하게 현기증 인다. 옥도끼로 하늘 위의 광한전(廣寒殿)을 다듬어 이룬 것 같아서, 훨훨 나는 듯이 신선의 뗏목에 오른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였다. ○ 정포(鄭誧)의 시에, “말을 타고 총총히 두어 고을을 지나와서, 석양에 친구의 손을 잡고 다시 누에 오른다. 귀양은 왔을망정 물과 산이 좋은 것 싫지는 않고, 옛일은 가고 없는데 공연히 세월이 급박한 데 놀라네. 한쪽 벽만 비치는 희미한 등잔불 외로운 여관의 밤이요, 처마 곁의 성긴 나무에는 옛 동산이 가을에 잠겼어라. 이별한 뒤의 서로 생각하는 뜻을 알고자 하거든, 하늘가에 긴 강물이 곤곤히 흐르는 것을 보라.” 하였다. ○ 정자후(鄭子厚)의 시에, “이 누(樓)를 일으킨 시적(詩的)인 안목이 공력(功力)을 소모함이 많아, 달 도끼와 구름 날[月斧雲斤]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으리라. 스스로 횡취각(橫翠閣)에 등림(登臨)하였는가 의심하노니, 누가 나로 하여금 태청가(太淸家)에 날아 오르게 하였는가. 봄 강물의 푸르름은 포도주가 넘치는 듯 석양의 붉은 빛은 철쭉꽃이 만발한 듯. 지나가기를 기다리니 헌개(軒蓋)가 가까워 오는 것을 알겠구나. 나무 위에 때마침 까치가 우는 것을 보니.” 하였다. ○ 신천(辛蕆)의 시에, “이 누의 좋은 경치는 말을 많이 할 까닭이 없다. 좋은 것을 찾고 기이한 것을 더듬는 일은 나보다 더한 이는 없을 것이니, 백 리나 이어진 뽕나무의 그늘은 술집을 감춰 버리고, 사산(四山)에 가득한 소나무의 푸르름은 관가(官家)를 지키네. 비 내려 어두운 강가에는 풀이 하늘과 맞닿고, 안개 짙은 항구에는 꽃이 집 밖에 피어 있네. 다만 오르기만 하고 만약 묵묵(黙黙)할 뿐이라면, 시인(詩人)으로서 광채 없음이 삭정이와 같으리.” 하였다. ○ 전록생(田祿生)의 시에, “북으로 서울을 바라보니 첩첩히 봉우리들도 많아라. 누(樓)가 높으니 손[客]의 한(恨)이 더욱 더하여진다. 왕중선(王仲宣)은 부(賦)를 지어 우리 땅이 아니라 했고,강령(江令)은 돌아가기를 생각하였으나 집에 이르지 못하였네. 버들은 저혼자 시름 속의 실을 흔들고, 개나리는 난리 뒤에 처음으로 꽃을 피웠네. 만약 강물을 봄술[春酒]로 변하게 할 수 있다면, 가슴속의 찌꺼기와 삭정이를 시원히 씻으련만.”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동ㆍ남 지방의 많은 군현(郡縣)들을 고루 거쳐 왔더니, 영가(永嘉)의 지세와 경치의 뛰어남이 더욱 더한 것을 알겠구나. 읍의 위치는 가장 산천의 형세 좋은 곳을 자리잡았고, 인물은 장군이니 재상이니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집이 수두룩하구나. 논밭에 풍년이 드니 곡식들은 풍요하고, 누대의 봄 꿈은 꾀꼬리와 꽃으로 둘러졌다. 모름지기 흐뭇이 취하여 오늘 저녁을 보내야겠다. 만리 길을 처음으로 바다의 뗏목을 타고 돌았으니.”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손[客]의 몸으로 높은 데 올라 굽어보니 느낌과 탄식이 많고, 게을리 노느라 귀밑머리에는 흰머리 늘어가네. 바닷가로 흘러 떠돌면서 공연히 고국을 그리워하고, 고향이라고 돌아 왔으나 내 집은 없다. 백 척(百尺)이나 높은 위태로운 난간은 푸른 공중에 떠 있고,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내리신 임금의 글씨는 황금빛 꽃처럼 찬란하네. 긴 내[川]는 멀리 은하수와 이어졌으니, 곧 멀리멀리 한 개의 뗏목을 띄우고 싶구나.” 하였다. ○ 고려 권사복(權思復)의 시에, “누대 있는 곳이라면 어디를 가나 좋은 경치를 많이 볼 수 있지만, 이 누에 오르면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더하여진다. 갈대 언덕 저편에는 서쪽ㆍ남쪽으로 길이 뚫렸고, 뽕나무 우거진 마을에는 서너 채씩 농가가 있다. 영호루(映湖樓) 세 글자의 어필(御筆)은 금빛으로 물에 비치고, 한 지방의 좋은 경치는 비단 위의 꽃처럼 광채를 더한다. 어릴 때에 강가의 버들을 잡아 꺾었더니, 노쇠하여 돌아와도 그 버들은 아직 삭정이가 되지는 않았네.” 하였다. ○ 이원(李原)의 시에, “금년에 또 다시 영남 유람 길을 떠나, 남쪽 고을들을 두루 지나서 복주에 이르렀네. 땅이 후미지니 사람들이 검소를 숭상함이 자랑할 만하고, 정자(亭子)가 한가하여 손의 눈동자가 경치에 굳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산천이 어찌 흥망을 따라 고쳐지랴. 바람과 달은 응당 왼쪽에서나 오른쪽에서나 자유롭게 거둘 수 있으리라. 반나절을 누에 올라 굽어보니 가슴이 시원하여, 돌아가려다 가지 않고 거듭 머물러 있다네.” 하였다. ○ 조효문(曹孝門)의 시에, “영남의 아름답고 고운 경치는 이미 많지 않은데, 지형과 경치 좋기는 화산(花山)이 백 배나 더하다. 꽃다운 풀과 맑은 냇물에 나그네 길 나누어지고, 푸른 버들 긴 대는 인가를 가린다. 호심(湖心)에 날이 따뜻하니 물고기가 물결을 불고, 담 모서리에 바람이 잔잔하니 제비가 꽃을 찬다. 남으로 뛰어가서 북으로 달리는 일을 어느 때에 마칠 것인가. 영주(瀛洲)에서 장건(張騫)의 뗏목을 묻고 싶구나.” 하였다. ○ 최수(崔脩)의 시에, “강가의 누(樓)에 봄이 가득하여 경치가 많으니, 시인의 심정과 흥취는 전보다 더하구나. 온 성중의 복숭아와 오얏꽃은 반안(潘安) 고을과 같고, 양쪽 언덕의 동산과 못은 습씨(習氏)의 집과 같다. 목은(牧隱)의 새 글은 구슬이 달에 우는 것 같고,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고운 글귀는 붓에서 꽃이 피는 것 같다.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란하던 지나간 일을 구태여 물어서 무엇하랴. 늙은 나무에 조수(潮水)가 침노하니 누은 채 뗏목이 되었구나.”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記)에, “영호루(映湖樓)는 영가(永嘉)의 이름난 누이다. 그 강과 산의 뛰어나고 큰 모양은 비록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에는 양보해야 할지도 모르나, 같이 낙동강(洛東江)의 언덕에 버티고 선 것으로 상산(商山)에 있는 관수루(觀水樓), 일선(一善)에 있는 월파정(月波亭)은 이 누와 더불어 갑을(甲乙)을 다툴 수 없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이 고을에서 거가(車駕)를 멈추고 이 누에서 노닐며 즐기다가, 환도(還都)한 뒤에 서연(書筵)에 납시어 손수 누의 현액(懸額)으로 큰 글씨 석 자를 써서 하사하였다. 이 고을 사람인 통판(通判) 신자전(申子展)이 누의 제도를 더 크게 하여 현액을 걸었는데, 지금까지 지붕과 마룻대 사이에 빛나고 있다. 이것은 촉석루나 영남루에는 없는 것이다. 자전의 일한 것이 이제 백 년이 넘는다. 그 사이의 수령들이 어찌 그 기둥과 서까래와 마룻장과 난간의 썩고 흔들리는 것과, 지붕의 기와와 계단의 벽돌 떨어진 것, 뚫어진 것을 수리함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같지 않다. 인사(人事)를 곡진(曲盡)하게 닦는 체하는 자는 윗사람에게 뇌물을 바치며 문안을 드리기에 급하고, 한갓 규모만 지키는 자는 장부와 문서, 회계 때문에 겨를이 없다. 그러니 누가 황폐하고 퇴락한 것을 수리하여, 나의 저축한 재용(財用)을 소비하기를 누가 달갑게 여기겠는가. 누가 날로 무너지고 헐어지는 것은 이상할 것 없다. 나의 동년(同年)인 제안(齊安) 김질(金耋)이 어사중승(御使中丞)으로 있다가 이 고을의 수령으로 오더니, 두어 해가 다 못 되어서 정치는 통창(通暢)하고 사람들은 화합하며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또 토지와 노비에 대한 소송은 온 도내의 사람들이 감사(監司)에게 진정서(陣情書)를 내어 김후(金侯)에게 가서 판결 받기를 원하였다. 후가 매양 양편을 판결할 때에는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신중히 재량(裁量)하여 결정하니, 승소한 자도 패소한 자도 다 만족해 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판결료로 받은 돈과 베가 창고에 차고 넘쳤다. 후가 이에 아전과 백성들에게 의논하여, 이 누를 고쳐 짓기로 하였다. 드디어 무신년 3월 어느 날을 기(期)하여 일 없이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이방(吏房)과 호장(戶長)을 윤번(輪番)으로 일보게 하였다. 터는 옛것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면적의 척수(尺數)는 자못 더하고 덜한 것이 있다. 그 높이와 넓이는 종래의 것보다 3분의 1일 더하였으며, 그 붉고 희게 장식하는 것과 금빛을 올린 현액은 또한 빛나고 밝아서 모양을 바꾸었다. 겨우 두어 달을 지나서 그 공사가 이미 끝나니, 고을 백성들은 늙은이나 어린이나 모두 쳐다보며 감탄하여 다 신(神)이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김후(金侯)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기술(記述)함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나는 스스로 헤아리지 아니하고 속으로 담암(淡菴)ㆍ목은(牧隱) 두 노선생과 더불어 그 사이에 이름을 나란히 쓰게 된 것을 기뻐하여, 드디어 붓을 잡고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김후의 정사함이 청렴하고 공평하며 까다롭지 아니하고, 움직이는데 법도로써 한다. 그 인사(人事)를 곡진하게 하는 체하는 자가 개돼지처럼 비열하게 할 뿐 아니며, 그 한갓 규모만을 지키는 자가 종이나 하인처럼 굴 뿐 아닌 데에 비교한다면, 김후는 아전과 백성들이 사랑하고 공경하여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천백 년 뒤에서 다시 보는 것 같으니, 그가 누(樓) 하나를 위하여 공(功)을 일으키는 것이야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고래로부터 순후한 풍속을 일컬음이 이 고을만한 데가 없으니 그 백성은 부리기가 쉬울 것이다. 하물며 이 누는 편안히 놀기 위한 것이 아니며, 후세(後世)의 이름을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옛 법을 떨어뜨리지 않는 데에 그친 것이겠는가. 문득 내가 더욱 느끼는 바가 있다. 옛날 성화(成化) 초년에 나는 몸이 군(軍) 관계의 직무에 소속되어, 울산(蔚山)의 융막(戎幕)에 종사한 것이 모두 2주년이었는데, 일찍이 일이 있어 이 고을을 왕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기만 하면 반드시 이 누에 올라서 어슬렁거려 노니며 조망(眺望)하였는데 그 동쪽 30리는 바로 청부(靑鳧 청송(靑松)) 땅이다. 사록(沙麓)의 상서로운 구름이 왕성하게 하늘에 이어져 있으니, 곧 주실(周室)의 유태(有邰)의 경사(慶事)와 더불어 그 장구(長久)함을 같이 하리라. 그 북쪽 10리는 곧 병산(甁山)이다. 역적 견훤의 1천 군사가 험조(險阻)한 곳을 점거하고 있었으나, 드디어 무너져 달아나게 되고 거짓 장수는 머리를 바쳤다. 왕씨(王氏)의 의기(義氣)가 동남(東南)에 크게 떨치게 된 것은 이 싸움이 조짐이 된 것이다. 서쪽으로 풍악(豐岳)을 바라보며, 원봉(元逢)이 먼저는 귀순(歸順)하고 뒤에는 배반하여 여섯 태사(太師)와 더불어 공명(功名)을 누리지 못한 것을 슬퍼한다. 남쪽으로 갈나산(葛那山)을 바라보니 푸른 봉우리가 하늘을 떠받쳤는데, 그 연기와 구름과 초목이 완연히 김생(金生)이 글씨 배울 때에 붓을 휘두르고 먹을 뿌리던 남은 기세를 띠고 있는 것 같다. 왔다갔다하는 것에 게을러지면 반드시 배를 띄우고 노[棹]에 맡겨서, 만(灣) 안으로 굽어 나온 육지와 굴곡진 물가를 거슬러 올라가서 흘러 내려가곤 하다가, 혹은 밤중에 이르러서야 흥(興)이 다하여 돌아오고 하였다. 모든 누의 좋은 경치는 왼쪽에서나 오른쪽에서나 만날 수 있어서 얻은 바가 많았었다. 이제 이미 20여 년이 지나갔으나 오히려 잊을 수 없는 생각이 가슴속을 오락가락한다. 혹이나 김후의 임기가 차기 전에 나로 하여금 남쪽으로 돌아올 계획을 성취하게 한다면, 곧 마땅히 하인 한 사람, 말 한 필의 간편한 차림으로 다시 이 호수 위에 노닐어, 후(侯)와 더불어 누에 올라 옛일을 이야기하며, 또 시(詩)를 지어 고을 백성들의 좋아하는 칭송에 이을[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모은루(慕恩樓)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세조(世祖) 때에 부사(府使) 한치의(韓致義)가 세우고, 권반(權攀)이 명명하고 기(記)를 지었다.
*향사당(鄕射堂) 부의 성(城) 서쪽에 있다.
사청(射廳) 부의 성내에 있다. ○ 이석형(李石亨)의 기(記)에, “지금 임금의 즉위 13년에, 나는 팔도체찰사(八道體察使)로서 경기ㆍ충청ㆍ전라의 각 도를 순력(巡歷)하고, 다음으로 본도(本道)에 이르렀다. 본도의 지형과 좋은 경치는 다른 도에 비하여 가장 뛰어나다. 그리고 이 부(府)는 도의 웅번(雄藩)으로서, 또한 1ㆍ2위의 아래에 있지 않다. 객관에 내린 이튿날 부사(府使)와 통판(通判)이 청하기를, ‘본부는 주진(主鎭)이 되어 있으니 열무(閱武)와 습사(習射)에 사용할 장소가 없을 수 없으므로, 남문(南門) 안에 참루(塹壘)를 쌓아서 터를 만들고 한 채의 집을 세웠는데, 한가운데에 2칸을 세우고 좌우쪽에 각기 날개를 붙였으니, 땅은 시원하고 처마는 비어서 활쏘는 일에 편의(便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청(射廳)이라고 하고, 전월(前月)부터 시작하여 이달 초에 일을 마쳤습니다. 청(廳)이 처음 낙성되고 그대가 또 마침 왔으니 다행히 경개(梗槪)를 기술(記述)하는 일을 사양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내가 생각하여보니, 풍경을 구경하고 즐기기 위하여 누대 짓기를 좋아하는 이가 많다. 어찌하여 그대는 그러하지 아니하고 홀로 활 쏘는 일에 유의하였을까. 활 쏜다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다. 그런 까닭에 활 쏘는 것으로써 그 사람의 덕행(德行)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공자(孔子)가 확상포(矍相圃)에서 활을 쏘니, 구경하는 자가 담처럼 둘러섰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군자는 다투는 일이 없으나 반드시 활 쏘는 일에서는 다투느니, 서로 읍(揖)하고 사양하여 오르고 내려와서 마시나니, 그 다투는 것은 군자의 다툼이다.’ 하였다. 활 쏜다는 것이 일에 있어서 진실로 이와 같이 중요한 것이니, 그대가 취하는 바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짝에게 읍(揖)하고 서로 사양하여 그 의식을 절도 있게 하니, 예(禮)가 여기에서 서게 되고, 벌주(罰酒)의 잔을 들어 서서 마시어 그 벌(罰)을 밝히니, 의(義)가 여기에서 시행된다. 예(禮)가 이미 바로 서고 의(義)가 이미 시행된다면, 비록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일지라도 또한 이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한 고을임에랴. 생각하건대 영재(鈴齋) 관아(官衙)에 날이 길고 소송하는 뜰에는 사람이 드물 때에, 책상을 치우고 헌함에서 내려와 술을 준비하고 과녁을 마련하여 편안하고 한가롭게 활쏘기를 즐기다면, 또한 한때의 기상을 보기에 넉넉할 것이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긴장(緊張)하기만 하고 늦추지 아니함은 문왕ㆍ무왕도 능히 하지 못하고, 늦추기만 하고 긴장하지 아니함은 문왕ㆍ무왕도 하지 않는다. 한 번 긴장하고 한 번 늦추는 것은 문왕ㆍ무왕의 도(道)이다.’ 하였으니 나도 그대에게 또한 이것을 기대한다. 만약 정사는 게을리 버려 두고 한갓 활 쏘는 것만을 일삼으면서 말하기를, ‘활쏘기는 남자가 할 일이다.’ 한다면 이것은 나나 그대가 취할 바 아닌 것이다. 부사 한치의(韓致義)군은 양절공(襄節公)의 둘째 아들이다. 백성을 안무(安撫)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민첩하여, 선군(先君)의 풍모가 있다. 그런 까닭에 내 그를 위하여 즐겨 기(記)를 쓰고, 이어서 시(詩)를 짓는다. ‘처음으로 새 집[新閣]에 오르니 하늘에 노니는 것 같아, 이것이 남쪽 지방의 첫째 고을임을 알겠다. 멀고 가까운 강과 산은 지맥이 웅장하고, 아침 저녁의 구름과 비는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활 쏘는 데는 다투어 버들잎을 뚫으며 대적할 자 없음을 자랑하고, 취해서 금잔을 기울이며 무르익도록 거두지 아니한다. 이름난 지역을 간 것이 지금까지 매우 많았지만, 풍경에 빠져 이곳에 오래도록 머무르네.’ 하였다.
* 영춘정(迎春亭)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옛 이름은 천재정(千載亭)이다. 영락(永樂) 18(1420)년에 부사(府使) 최관(崔關)이 천태종(天台宗)의 중 의호(義湖)로 하여금 시주(施主)를 모아서 짓게 하였다. 매년 입춘(立春) 날에는 제수를 차리고 여기에서 아침 해를 맞이한다. 영은정(迎恩亭)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일찍이 여기에 올랐다가 현액(懸額)을 제명(題名)하였다.
*망호루(望湖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부사 박호겸(朴好謙)이 세운 것이다.
* 삼귀정(三龜亭) 풍산현(豐山縣)의 서쪽 6리에 있다. ○ 성현(成俔)의 기(記)에, “상사(上舍) 김세경(金世卿) 씨가 자기 고향인 풍산현 삼귀정의 상황으로써 나에게 기(記)를 요구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풍산은 안동부(安東府)의 속현이다. 서쪽 5리 남짓한 곳에 마을이 있는데 금산촌(金山村)이라고 하고, 그 동쪽 20보(步) 쯤에 봉우리가 있는데 동오(東吳)라고 한다. 그 높이가 겨우 60길[丈]인데 정자는 그 봉우리의 머리에 걸터앉았다. 동쪽ㆍ서쪽ㆍ남쪽은 모두 큰 들인데 그 지세가 시원하게 틔여서 조망(眺望)이 끝이 없다. 정자의 남쪽에는 곡강(曲江)이라고 하는 큰 내가 있는데, 곧 낙동강(洛東江)이다. 그리고 마라(馬螺)라는 못[澤]이 있는데, 못 위에 절벽이 힘차게 솟아 높이가 만길[萬丈]은 될 것이다. 강 위에는 긴 수풀이 잇따라 10리에 뻗쳤다. 정자의 북쪽에도 또 산이 있는데, 학가산(鶴駕山)이라고 한다. 쌍계(雙溪)가 이 산 사이에서 나와서 낙동강으로 들어가며, 그 물이 합수(合水)하는 곳이 병담(屛潭)이다. 혹은 화천(花川)이라고도 한다. 그 산의 봉우리에 또 석벽이 있는데 천 길이 넘으며, 병벽(屛壁)이라고도 한다. 쌍계의 북쪽에는 기묘한 바위가 있는데 붕암(鵬巖)이라고 한다. 시내 양쪽 가에는 밤나무 천여 그루가 있어서 층층의 푸르름이 어지럽게 펴지고 있으며, 정자 아래에는 벼 논과 보리밭이 있어서 봄이면 푸른 싹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누런 구름 같은 벼가 물결친다. 진실로 뛰어나게 경치 좋은 곳이다. 화산(花山)은 김씨(金氏)의 관향(貫鄕)이다. 김씨는 우리 나라의 큰 벌족(閥族)으로서, 그의 외조(外祖) 권 상국(權相國) 제평공(齊平公)은 조정에 높은 명망이 있었다. 권씨(權氏)는 곧 그의 따님인데, 나이가 88세이다. 그의 아들 영전(永銓)ㆍ영추(永錘)ㆍ영철(永鐵) 등이 다 근읍(近邑)의 수령이 되어서 봉양을 지극히 하며, 또 이 정자를 지어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의 놀고 쉬는 곳으로 하였다. 정자에 돌 세 개가 있는데 형상이 거북이 엎드린 것 같다. 그래서 삼귀정(三龜亭)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매양 좋은 때와 길(吉)한 날을 만나면 어머니의 가마를 붙들고 정자에 올라가서, 노래자(老萊子) 같은 채색 옷들이 앞뒤에 빛나게 비친다. 뜰에 가득한 자손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모시니, 어머니는 엿[飴]을 머금고 즐거워한다. 그 즐거움을 어찌 이루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세상 사람은 집이 있으나 좋은 경치를 얻지 못하며, 좋은 경치는 있으나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지금 김씨 집안은 땅은 좋은 곳을 얻고, 사람은 어짊을 얻었으며, 어버이는 또 그 장수(長壽)함을 얻었으니, 여러 가지 아름다움이 고루 갖추어졌다. 어찌 선(善)을 쌓고 경사(慶事)를 기른 소치(所致)가 아니겠는가. 생물의 수명은 거북만큼 긴 것이 없고, 물건의 견고함은 돌만한 것이 없다. 자식은 누구나 어버이의 장수가 거북처럼 길고 돌처럼 견고하기를 원한다. 이제로부터 이후로 증손(曾孫)ㆍ현손(玄孫)에 이르고, 증손ㆍ현손으로부터 잉손(仍孫 7대 손자)ㆍ운손(雲孫 8대 손자)의 먼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의 어버이 섬기기를 지금 하는 것처럼 하게 하여 대대로 바꾸지 않는다면, 곧 고을은 장수하는 고을이 되고 사람은 장수하는 백성이 되어서, 마땅히 청사(靑史)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것이다. 나 같은 자는 비록 조그마한 고향이 있기는 하지만 명리(名利)의 고삐에 얽매어져서 퇴로(退老)할 방법이 없으며, 또 영근(靈根)이 이미 멀어져서 부모 모두 상사가 많았으니, 비록 오정(五鼎)의 영화가 있어 어버이의 봉양을 위하여 쌀을 져 온 자로(子路)와 같은 일을 하고자 하여도 마침내 할 수 없으니, 더욱 김씨의 여러 어진 형제가 능히 그의 어버이를 봉양하여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을 부러워한다.” 하였다.
* 환수정(環水亭) 내성현(奈城縣)의 서쪽에 있다.
* 귀래정(歸來亭)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유수(留守) 이굉(李硡)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서 와부탄(瓦釜灘) 위에 정자를 지었다. ○ 이우(李堣)의 시에, “인끈[印紱]을 풀어놓고 일찍 돌아와서, 두 물이 나누이는 곳에 정자를 지었네. 내와 산은 주인이 있는 것을 알겠고, 갈매기와 백로는 무리를 짓는구나. 차조가 익으니 먼저 술 빚는 데에 쓰고, 마음이 한가로우니 구름으로 화(化)하려 하네. 은거하며 이곳에서 늙으려 할 뿐 임금의 부름을 받으려는 것은 아니라네.” 하였다. ○ 더듬어 천년의 비경(祕境)을 깨뜨리고, 맑고 새롭게 위에 의거하여 노닌다. 동쪽에는 두 갈래의 물이 와서 합하고, 서쪽으로는 긴 한 줄기 숲을 안았다네. 안개에 가렸을 땐 절인가 하였는데, 환하게 개이자 호수 위의 누(樓)라네. 오두(遨頭)가 가을에 농사를 살피다가, 여기에 이르러서 오래 머무르네.
0 역원
* 안기역(安奇驛) 부의 북쪽 3리에 있다.
○ 찰방(察訪)을 둔다. 본도(本道)에는 속역(屬驛)이 10개소가 있는데, 철파(鐵破)ㆍ청로(靑路)ㆍ운산(雲山)ㆍ금소(琴召)ㆍ송제(松蹄)ㆍ청운(靑雲)ㆍ문거(文居)ㆍ화목(和睦)ㆍ각산(角山)ㆍ영양(寧陽)이다.
○ 찰방(察訪) 1인. 옹천역(甕泉驛) 부의 북쪽 34리에 있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말 타고 가는 앞에 보이는 풍경은 손의 심정을 괴롭게 하여, 시내와 산의 경치는 가는 곳마다 그림 같구나. 시(詩)를 외우며 천천히 우거진 풀 사이 길을 가노라니 홀연히 한 나무 매화가 있어 눈부시네.” 하였다.
* 금소역(琴召驛) 금소천(琴召川)의 북쪽 언덕에 있다.
* 송제역(松蹄驛) 임하현(臨河縣)에 있다. 부(府)와의 거리는 76리이다.
* 안교역(安郊驛) 풍산현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37리이다.
* 운산역(雲山驛) 일직현(一直縣)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33리이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운산역 주변에 석양이 비끼는데, 시냇가의 그윽 한 꽃은 말을 둘러 싸고 향기를 피우네. 들꿩이 사춘(思春)하는 마음을 갖고 스 스 로 응하기를 꾀하니, 수풀을 사이에 두고 멀리 애여장(艾如張)이 보이네.” 하 였다.
* 유동역(幽洞驛) 감천현(甘泉縣)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1백 13리이 다.
* 관음원(觀音院)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 소을마원(所乙麽院) 부의 동쪽 12리에 있다.
* 관원(館院) 부의 남쪽 10리에 있다.
* 독천원(禿川院) 독천(禿川)의 언덕에 있다.
* 자제원(慈濟院) 부의 서쪽 2리에 있다.
* 영추원(迎秋院) 부의 서쪽 12리에 있다.
* 도솔원(兜率院)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 연비원(燕飛院) 부의 북쪽 12리에 있다.
* 낙목원(落木院) 부의 북쪽 24리에 있다.
* 비사원(飛沙院) 부의 북쪽 3리에 있다.
* 두모원(豆毛院) 두모현(豆毛峴) 아래에 있다.
* 오리원(吾里院) 부의 북쪽 21리에 있다.
* 망지원(望至院) 임하현(臨河縣)의 동쪽 10리에 있다.
* 신읍곡원(申邑谷院) 임하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 보제원(普濟院) 임하현의 서쪽 1리에 있다.
* 가라연원(加羅淵院) 소천부곡(小川部曲)의 남쪽 2리에 있다.
* 감마원(甘亇院) 풍산현(豐山縣)의 서쪽 17리에 있다.
* 양재원(楊才院) 감천현(甘泉縣)의 남쪽 1리에 있다.
* 귀모원(歸毛院) 감천현의 서쪽 8리에 있다.
* 모현원(茅峴院) 모현 아래에 있다.
0 사묘
사직단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여단 부의 북쪽에 있다.
0 총묘
* 김선평묘(金宣平墓) 부의 서쪽 고태장리(古苔莊里)에 있다.
* 장길묘(張吉墓) 부의 서쪽 성곡리(城谷里)에 있다.
* 권행묘(權幸墓) 부의 서쪽 본파곡리(本破谷里)에 있다.
0 사찰
* 백련사(白蓮寺) 노산(盧山)에 있으며, 침벽루(枕碧樓)가 있다.
○ 권한공(權漢功)의 시에, “10년 동안 글 읽던 곳을, 포의(布衣)로 이제 다시 놀러 왔네. 긴 소나무는 옛 길에 그늘을 지우고, 어지러운 돌들은 차가운 냇물에 씻기우며 있다. 산촌에 하루가 저무니, 동부(洞府)엔 봄빛이 그윽하기만. 어느 때나 천병만마(千兵萬馬)를 거느리고, 한 번 웃으며 강가의 누(樓)에 오를 것인가.” 하였다.
* 임하사(臨河寺) 부의 서쪽에 있다.
* 법림사(法林寺) 성 남쪽에 있다.
* 법룡사(法龍寺) 성 서쪽에 있다.
* 청량사(淸涼寺) 청량산에 있다.
* 개목사(開目寺) 개목산(開目山)에 있다.
* 법흥사(法興寺) 부의 동쪽에 있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이 절에 오르면 황홀하여 공중에 있는 것 같으니, 열두 봉우리들이 서로 등지기도 하고 마주 보기도 하네. 들 비[野雨]는 빛이 먹처럼 짙어서 모든 자취를 검게 덮어 버리고, 호수에 날이 개니 가늘게 밝은 자태를 희롱한다. 먼 마을의 단풍 든 나무에는 저녁볕이 머무르고, 높은 산 차운 소나무에는 가을 안개 물러간다. 다른 날 임충의 수레 아래에서 이 누(樓)를 생각하게 된다면, 하루 밤에 남쪽 꿈을 두 번 꾼들 무엇이 싫으랴.” 하였다.
0 제영
* 영가산수호풍연(永嘉山水好風煙) 고려 때 홍간(洪侃)의 시(詩)에, “풀이 자라는 강남(江南) 삼월 철에, 영가의 산수는 좋은 경치.”라 하였다.
* 옥련행가혼작묘(玉輦行街渾作畝) 승[僧] 달전(達全)의 시에, “임금의 수레 다니던 거리는 모두 밭이랑이 되었고, 구슬발[珠簾] 깊던 가항街巷)은 반은 못[池]을 이뤘구나.” 하였다.
* 산수무비구안청(山水無非舊眼靑) 고려 김방경(金方慶)의 시에, “산과 물은 어느 것이나 예대로 있어 반갑고, 누대(樓臺) 또한 소년 시절에 보던 것처럼 다정하구나. 슬프다, 고국의 유풍(遺風)으로 남아 있는, 거문고와 노래 소리를 수습(收拾)하여 나의 길 가는 심정을 위로하노라.” 하였다.
* 선개방초도(船開芳草渡) 이집(李集)의 시에, “늘어선 배 우거진 나루터, 술은 떨어진 석양(夕陽) 비낀 누대.” 하였다.
* 노목창연루각풍(老木蒼煙樓閣風) 정추(鄭樞)의 시에, “영가성(永嘉城)가의 석양 속에, 노목(老木)은 푸른 안개에 잠기고 누각에는 바람이 부네.” 하였다.
* 인물천년성례속(人物千年成禮俗) 이원(李原)의 시에, “인물은 천년의 전통에서 예속을 이루었고, 물과 산 십리의 좋은 경치는 신선이 사는 집 같구나.” 하였다.
0【고적】
* 일계현(日谿縣)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본래는 열혜현(熱兮縣)이니 혹은 이혜(泥兮)라고 한다. 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일계(日谿)라고 고치고 고창(古昌)에 예속시켰다. 지금은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 요촌부곡(蓼村部曲) 부의 동쪽 35리에 있다.
* 하양부곡(河壤部曲)ㆍ신양부곡(新陽部曲) 풍산현에 있다. 소라부곡(召羅部曲) 춘양현(春陽縣)에 있다. 봉화현(奉化縣)의 동촌(東村)에 넘어 들어가 있다.
* 토곡부곡(吐谷部曲) 내성현(奈城縣)의 북쪽에 있다.
* 청량산고성(淸涼山古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3백 50척이다. 안 에 우물 7개소, 시내[溪] 2개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0 한전(旱田: 밭)
元帳付九千八百八十四結六十五負九束內各樣免稅陳雜頉并四千二百四十九結十九負八束己卯時起五千六百三十五結四十六負一束
0 수전(水田: 논)
元帳付四千八十二結五十負九束內各樣免稅陳雜頉并二千六百七十結六十七負六束己卯時起一千四百十一結八十八負三束
0 조적(糶糴) 환곡을 꾸어 주거나 거두어들이거나 하던 일.
*元會米六百五十六石三斗九升. *雜穀三千二十四石三斗八升.
*賑色米二千二百七石五斗一升.*雜穀二千八百五十石六斗五升
*常平廳米一千二百十九石十二斗五升.雜穀五萬二千六百十七石二斗九升 *私賑雜穀二千七十二石十三斗七升八合二
*夕別會米九百三十石六斗九升. *雜穀一千六百九十八石六斗五升
每年十月開倉十二月封庫己卯條爲准
주) 원회미(元會米) 설때(정초)에 빌려주는 곡식.
주) 진색미: 흉년이 들었을 때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내리던 쌀.
0 전세(田稅: 논밭에 부과되는 조세)
* 米一千八百七石十一斗一合. * 太一千二百三十五石二合.
* 位太四百三石十一斗九升. 依定式作錢三月收捧四月以陸路六日達于京納于戶曺己卯 條爲准
0 대동(大同: 여러 가지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 作木一百六十五同. 四月收捧五月以陸路六日達于京納
* 惠廳米一千三百九十八石七斗三升六合. 儲置本府一從惠廳區劃多夥無常己卯條爲准
0 균세(均稅: 군역 대신 내는 세금. 균역법)
* 田稅米一千一百三十五石七斗. 五夕太一千七百十四石二斗二升四合.
* 四夕作錢大同條木三十三同十九疋二十五尺.
* 結錢四千三百二十五兩三戔田稅一時收捧上納選武木十同十月收捧十月以陸路六日達 于京納于均廳己卯條爲准
0 봉름(俸廩: 벼슬아치들에게 주던 봉급. 18등급으로 나누어서 주었다.
衙棣位五十結米十四石十斗八升七合录豆五石三斗六升七合七夕
○公須位十五結米五石九斗五升四合七夕录豆十三斗三升四合七夕官需米四百二石民結所出每夫柴一舟四束炭一石藁草一舟五束式捧用雉雞則均役之後自官貿用
주) 아예위: 관아에서 이속 등에게 지급하는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토지.
주)공수위. 공수전 : 관아의 접대비나 역(驛)의 경비를 충당하게 하기 위하여 지급 하던 토지.
*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 右道. 9일
0 군명
굴자(屈自)ㆍ의안(義安)ㆍ의창(義昌)ㆍ회산(檜山)ㆍ골포(骨浦), 합포(合浦) 합(合)이 합(蛤)으로 된 곳도 있다. 회원(會原)ㆍ환주(還珠)
0 관원
* 창원대도호부사겸김해진관병마첨절제사. 무관 정3품 임기 3년.
* 창원판관. 종5품.
* 창원교수. 종6품
* 자여도찰방(自如察訪) 문관 종6품.
좌수 1인. 군관 90인. 인리 49인. 지인 17인. 사령 22명.
군뢰 14명. 관노 37명. 관비 16구. 향교노비 25명,
서원(書員) 30명, 일수(日守) 49명, 외노비(外奴婢) 450명,
찰방속
역리 37인. 지인 15인. 사령 8명.
관둔전(官屯田) 50결, 공수전(公須田) 15결
0 을묘식년원호(己卯式元戶) 1735년 영조11
호수: 7,344호. 인구: 28,309호.
남자: 11,718명. 여자: 16,591명.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4리이다.
동쪽으로 김해부(金海府) 경계까지 23리이고,
남쪽으로 웅천현(熊川縣) 경계까지 33리이다.
서쪽으로 함안군(咸安郡) 경계까지 37리이고,
칠원현(漆原縣) 경계까지 33리이며,
북쪽으로 같은 현 경계까지 32리이다.
대구감영(監營)까지 180리 2일 거리
통영 통제영(統營)까지 160리 1일 반 거리
병영(兵營)까지 140리 1일 반 거리
바다(海)는 20리
0 건치연혁
의창현(義昌縣) 본래 신라 굴자군(屈自郡)이며 경덕왕(景德王)이 의안(義安)이라 고쳤다. 회원현(會原縣)은 본래 신라 골포현(骨浦縣)인데, 경덕왕이 합포(合浦)라 고쳐서 의안군에 예속시켰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는 의안ㆍ합포를 합쳐서 아울러 금주(金州)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각각 감무(監務)를 설치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은 원(元) 나라(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 할 때에 군량 등을 공급한 공로가 있었다는 데 대한 상으로 의안을 의창으로, 합포를 회원으로 만들어서 아울러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다. 본조(本朝) 태종조(太宗朝)에서는 두 현을 합쳐서 지금 명칭으로 고치고, 부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0 公廨
객사(客舍) 동헌(東軒) 사미당(四美堂) 향사당(鄕射堂)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 官廳) 인리청(人吏廳)
0 산천
* 첨산(檐山) 부 북쪽 1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니, 서쪽으로 청룡산(靑龍 山)과 이어졌다.
* 청룡산 부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 봉림산(鳳林山) 부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 불모산(佛母山) 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 염산(簾山) 부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 사현(私峴) 부 남쪽 30리 지점으로 웅천현(熊川縣) 경계에 있으며, 산길이 꼬불 꼬불하다.
* 백월산(白月山) 부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 전천산(旃擅山) 부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 반룡산(盤龍山) 부 남쪽 7리 지점에 있다.
* 장복산(長福山) 부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 두척산(斗尺山) 회원현(會原縣)에 있으며 봉우리 위에 고운대(孤雲臺)가 있다.
*월영대(月影臺)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이첨(李詹)의 시에, “우뚝한 저 두척산, 검푸른 빛이 구름 끝에 비꼈네. 동남쪽으로 푸른 바다에 임하니, 안개와 비가 절로 흐렸다 개었다 한다. 옛날 고운 선생(孤雲先生) 은 숲 끝에 집 지어, 월영대를 거니니, 정기(精氣)가 가을 하늘과 함께 아득하네.” 하였다.
* 바다 회원현에 있다.
* 주물연진(主勿淵津) 부 북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칠원현(漆原縣) 매포(買浦) 하류이다. 언덕 위에 작은 공관(公館)을 지어서, 배 타고 왕래하는 왜(倭)의 사신을 접대한다.
* 지이포(只耳浦) 부 북쪽 10리 지점에 있으며 염전(鹽田)이 있다.
* 사화포(沙火浦) 지이포(只耳浦) 5리 지점에 있으며 염전이 있다.
* 마산포(馬山浦) 회원현(會原縣)에 있다.
* 저도(猪島) 월영대(月影臺) 남쪽에 있다.
* 합포(合浦) 부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려 원종(元宗) 15년 봄 정월에 원(元) 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여 합포현을 정동행성(征東行省)으로 삼고, 홍다구(洪茶丘)에게 조서를 내려서 김방경(金方慶) 등과 함께 합포에서 전함(戰艦)의 제조를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김방경 등이 원 나라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 부언수 홍다구ㆍ유복형(劉復亨) 등과 함께 몽고(蒙古) 장병(將兵) 2만 5천과 우리 군사 8천, 뱃사공ㆍ수군인도수(水軍引導手) 6천 7백, 전함 9백여 척을 거느리고 일본을 정벌하였다.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서 왜병에게 패하고 유복형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어서, 드디어 합포로 환군(還軍)하였다. 7년 만에 황제가 또 흔도(忻都)ㆍ홍다구에게 김방경 등과 함께 다시 일본을 정벌하도록 명하였고, 왕이 친히 합포에 와서 열병(閱兵)하였다. 황제가 또 범문호(笵文虎)에게 만병(蠻兵) 10만을 거느리고 강남(江南)에서 출발하게 하였다.
* 여음포(餘音浦) 회원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칠원현(漆原縣)과 귀산현(龜山縣)의 경계이다.
* 온정(溫井) 부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 광산(匡山) 두척산(斗尺山) 서쪽, 함안(咸安) 경계에 있다.
0 【성곽】
읍성 석축(石築)이며, 둘레가 4천 9백 20척이다. 우물 하나, 못 하나가
있다.
0 進貢(진상품)
人蔘 柴胡 白芍藥 天門冬 麥門冬 烏梅 蒲黃 連翹 茯茯 甘菊 全鰒 乾文魚 海蔘 乾 鰒短引 乾洪魚 乾紅蛤 靑魚 生鹿 短乾雉 貫目
0 토산품
철(鐵) 불모산(佛母山)에서 산출(産出)한다.
연동석(鉛銅石) 부 동북쪽 배사동(背寺洞)에서 산출한다.
굴[石花]ㆍ해삼ㆍ대[竹]ㆍ석류ㆍ옻[漆]ㆍ왜저(倭楮)ㆍ오징어ㆍ유자ㆍ감ㆍ가사리(加士里) 『신증』 대구[大口魚]ㆍ청어ㆍ황어(黃魚)ㆍ홍어ㆍ숭어[秀魚]ㆍ조기[石首魚]ㆍ낙지[絡締]ㆍ웅어[葦魚]ㆍ붕어[鯽魚].
0 누정
* 벽한루(碧寒樓)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산은 연기 빛을 띠어 주렴에 푸름을 들이고, 시냇물은 대 그림자를 머금어 사람에게 싸늘함을 번지네.” 하였다. * 벽허루(碧虛樓) 객관 동쪽에 있다.
* 장성루(將星樓) 합포 절도사영(節度使營)에 있으며, 절도사 구겸(具謙)이 지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제일 남쪽 고을 합포영(蛤浦營)에는 좋은 시절 절제(節制)들이 모두 호걸이었네. 3천 명 호랑이 같은 군사 금사진(金蛇陣)이었고, 백 2개 산과 물은 철옹성(鐵甕城)이었네. 백성들은 우모(羽毛)를 즐거이 보아 기쁜 빛이었고, 영(令)은 사마(士馬 군사)에게 엄하여 적적하게 소리가 없네. 장군이 이미 변방 책략에 익숙하여, 손으로 은하(銀河)를 당겨 갑옷과 병기를 씻네.” 하였다. * 연빈루(燕賓樓) 곧 동헌(東軒)에 있는 작은 누(樓)이다. ○ 홍귀달(洪貴達)의 기에, “관부(官府)와 누관(漏館)의 훌륭함을 혹자는, ‘정사(政事)와는 무관하다.’ 하고, 혹자는 ‘정체(停滯)된 것을 선양(宣揚)하고 화(和)한 데로 인도하여 정사를 통하게 한다.’ 하며, 또, ‘정사가 화한 다음이라야 인화(人和)가 되고, 인화가 된 다음이라야 흥작(興作)할 수 있다. 백성이 누대와 관우가 흥폐(興廢)된 것을 원망하지 않으면 그 정사를 알 수 있다.’ 한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혹자의 말이 모두 옳다. 그 지방에서 원이 되었는데 필부(匹夫)라도 제 생활을 편하게 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훌륭한 지대(池臺)와 누관이 있다 하더라도 다스림에 무슨 보탬이 있으리오. 정사가 화하고 사람들이 화하여 백성이 즐거이 일에 나아간다면, 정체된 것을 선양하고 화한 데로 인도할 제구가 어찌 없을 것인가. 홍치(弘治) 임자년 가을에 창원(昌原)의 부로(父老)들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부는 예전에 회원(檜原)ㆍ의창(義昌) 두 현이었다. 옛날에 원(元) 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하면서 여기에다 행성(行省)을 설치하였고, 신라 때에는 최치원(崔致遠)이 축대를 쌓고 유람하여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또 지금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절(節)을 세우고 진(鎭)을 설치한 곳이니, 그 성곽과 관우(館宇)를 높고 크게 하지 않으면 어울리지 않는다. 부 동쪽에는 벽허(碧虛), 서쪽에는 벽한(碧寒)이라는 두 누각이 있으나, 모두 비좁고 작으며 답답하고 막혀서 오르는 자가 안타깝게 여긴다. 지금 현명한 원인 이후(李侯) 영분(永蕡)이 부임한 지 5년인데 정사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화하여, 해야 할 일이 없자 그제야 벽허루(碧虛樓) 곁에 새 누각 5칸을 지으니, 일 없던 자를 부리고 번(番)을 든 아전과 군졸을 거느리고 도왔다. 금년 3월에 시작하였는데, 5월이 못 되어서 화려하게 지어져 우뚝하였고 누 위에는 여러 빈객과 우리들 고을 백성이 다 들어갈 만하였다. 노역이 우리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므로 그 누각이 낙성되는 것을 즐거워하고 이 누각이 영원하기를 원한다. 공이, 누각의 이름을 짓고 기문을 지어달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아, 여기에서 이후(李侯)의 정사를 족히 알겠다. 바야흐로 조정이 청명하고 변방 백성이 안도하고 있다. 남방에는 옛날부터 빈객이 많으니, 누각 안에서 풍월(風月)을 대하여 비록 마시고 먹으며 즐기더라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각의 이름을 연빈(燕賓)이라 하기를 청한다.’ 하였다.” 하였다.
* 열례정(悅禮亭) 북문 서쪽에 있으며, 무술(武術)을 사열하는 곳이다.
0 학교: 향교(鄕校) 부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 역원
* 자여역(自如驛) 부 동쪽 19리 지점에 있다.
○ 승(丞)이 있다. 본도(本道)에 소속된 역이 14개이니, 근주(近珠)ㆍ창인(昌仁)ㆍ대산(大山)ㆍ신풍(新豐)ㆍ파수(巴水)ㆍ춘곡(春谷)ㆍ영포(靈浦)ㆍ금곡(金谷)ㆍ덕산(德山)ㆍ성법(省法)ㆍ적항(赤項)ㆍ안민(安民)ㆍ 보평(報平)ㆍ남역(南驛)이다.
○ 승 1명이다. 『신증』 금상(今上) 5년에 승(丞)을 혁파하고 찰방(察訪)을 두었다.
* 근주역(近珠驛) 부 서쪽 16리 지점에 있다.
신풍역(新豐驛) 부 동쪽 4리 지점에 있다.
안민역(安民驛) 부 남쪽 27리 지점에 있다.
선원(禪院) 부 남쪽 1리 지점에 있다.
안민원(安民院) 안민역 옆에 있다.
임견원(臨見院) 부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감계원(甘界院) 부 북쪽 12리 지점에 있다.
전현원(錢縣院) 부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의장원(儀仗院) 부 북쪽 35리 지점에 있다.
안성원(安成院) 부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적옥원(迪屋院) 부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영빈원(迎賓院) 부 안 5리 지점에 있다.
0 사찰
* 봉림사(鳳林寺) 봉림산(鳳林山)에 있다. 신라 때 집사시랑(執事侍郞)최인곤(崔仁滾)이 지은, 중 진경(眞鏡)의 탑비(塔碑)가 있다.
* 광산사(匡山寺)ㆍ만월사(滿月寺) 모두 두척산(斗尺山)에 있다.
0 사묘
* 사직단(社稷壇) 부 서쪽에 있다.
*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 성황사(城隍祠) 부 북쪽 검산(檢山)에 있다. 여단(厲壇) 부 북쪽에 있다.
0 성지
* 옛 우 병영성(右兵營城) 서쪽으로 10리이다. 고현(古縣)인 회원(會原)의 월영당(月影堂) 북쪽에 있다. 고려 때에 동행성(東行省)을 치던 옛 터이다. 이조 태종 때에 영을 두었다가 선조 때에 진주로 옮겼다. ○ 고려 신우(辛禑) 4년에 배극렴(裵克廉)이 둘레 4천 2백 91척의 성을 쌓았다. 우물 5이다. 염산고성(廉山古城) 동쪽으로 15리이며, 둘레 8천 3백 20척, 소거(小渠) 8, 우물 하나가 있다.
* 강마산성(江馬山城) 왜놈이 지었다.
右兵營舊城 在古合浦縣在府西十三里石城周四千二百九十一尺高十五尺內有五井裵克廉築○李詹記初營火于兵軍士野處門下評理曹公梢地得吉卜丁巳春知門下事禹公營於其地未旣柀召還京京山裵公以副元帥代鎭其衆至則修葺軍營工訖因謂衆曰旣營矣城可後歟軍鎭謂藩翰者取其扜衛天下也安有藩翰而反不能自衛乎向者四年間營凡三遷以其外無城郭不能固衆志也余欲城於此深溝高壘以備不虞如諸子何諸將咸日得某等從事久智淺計不出此玆惟公命公移牒拔民理器械議遠邇指授方略爰始役馬謂土其城則易以崩甎其城則難爲功若石則堅且省也遂石其城城基成以嵗歉寢其役公省用務嗇越明年大熟公曰今則人力可用也擧前籍刻日城之戊午秋九月甲申冬十一月戊寅役之終始也其計事致用得春秋城諸及防之義矣城之高仞有四尺有奇廣丈有七寸周圍五百九十四步單三尺城上二尺間寘陴陴率盾一戟一樹旌旗來矢石陴者晝夜申警望之屹然卽之巍然截然而不可犯且帶以濠水阻以釣橋包絡山川規摸■遠矣於是名東門曰元仁南曰會禮西曰懷義北曰勇智皆取義於其方而寓夫德之威之之義焉城中寘義滿倉會盈庫以貯糧餉前此皆自遠輸之再晝夜然後達于營人畜困弊固不爲小矣至是便之沿海數縣之民亦於城中寘窖賊至携妻子八城賊退出城肆情耕作能不廢業籌劃精密矣吾知假使有警坐而應之計出萬全也事聞上嘉之貺以禮幣孟子曰天時不如地利地利不如人和今龍見而戒事日至而畢可謂得天時矣平地設險如據殽凾可謂得地利矣事三月而集不愆于素可謂人和矣三者備矣人皆歌舞公賜永世不忘矣群有司巡功督役者煩不敢殫記文踓陋有以記事且旌公伐余與有勞焉○前人詩天機人事兩參差城郭依然似舊時細竹更長新出笋殘花還有未開枝江湖半夜孤舟夢幕府十年千首詩此日南樓風景好元戎何處駐旌旗新增其後兵使 李守一移營晉州廢堞猶存
0 旱田
元帳付二千六百七十結十一負三束內各樣免稅陳雜頉并一千五十八結十負六束己卯時起一千六百十一結九十頁七束
0 水田
元帳付三千六百二十二結六十負六束內各樣免稅陳雜頉并七百四十二結二十八負三束己卯時起二千八百八十結三十二負三束
0 糶糴
元會米一千六百五十三石六斗九刀二夕雜穀八百三石三斗七刀六合七夕賑色米二石四斗一刀五合四夕雜穀三百十三石四斗三刀二合一夕常平廳米七石五斗九刀一合六夕雜穀三千七百九十五石三斗三刀八合三夕私賑雜穀三千七百八十石三斗六刀八合八夕別會米二十九石九斗二刀四合五戶雜穀一萬二千九百六十六石十一斗三刀九夕十月開倉十二月對倉己卯條爲准
0 田稅
米六百七十八石一斗七合六夕太三百二十八石五斗九刀九合七夕三月本府馬山倉收捧裝載漕船發船于馬山江口向巨濟見乃梁固城蛇梁島東江南海露梁全羅道順天狗島興陽喜然島 長興牛豆島 靈巖葛豆浦珍島碧波亭羅州亦島務安塔聖島靈光法聖浦茂長安邊浦萬頃 群山 玉果澆竹島 忠淸道唐津源山島 海美安興正禪仇味浦泰安西斤浦保寧蘭芝島 亰畿富平水就島 江華角古之浦燕美亭寶床江加乙豆江麻浦至六月達于京納于軍資倉己卯條爲准
0 大同
米二千石田稅一時納于惠廳米五百石儲置本官一從惠廳區劃多寘無常己卯條爲准
0 均稅
田稅條米二十七石六斗六刀六合太十二石二斗四夕大同條米八十六石八斗田稅一時上納鹽船稅錢四百八十兩二月收捧三月上納選武木一同二十九匹十月收捧同月內以陸路九日半達于京納于均役廳己卯條爲准
0 俸廩
衙祿位五十結米十六石十斗太四石五斗公須位十五結米五石太一石四斗五刀官需米三百石民結所出每夫雉鷄各一首柴九丹炭十二斗藁草二同生草五束式捧用
軍兵 訓錬都監砲保六十三名御營正軍八十七名資保九十三名米保二百八十四名禁衛正軍一百十名資保一百十名米保二百四十六名罷防保五百十名兵曹步兵五十一名京驛保三十七名禁保余丁一名內吹羅保三名備邊司余丁一名落講余丁六名補充隊余丁二名樂工保十六名軍餉保三十五名司僕諸員保二十四名烽燧軍一百五十名馬兵二百十三名保四百十三名束伍軍四百八十七名別隊四十五名保四十五名牙兵一百二名舟師分防軍三百三十六名水軍七百十三名陸軍二百五十六名
* 목사(牧使) 정3품 (3고을) 무관직. 兵馬僉節制使 겸임.
* 판관(판관) 1 명 종 5품
* 교수(교수) 1 명 종 6품 일명 제독관.
* 서원(書員) 30명.
* 일수(日守) 40명.
* 상주(尙州) 右道. 新羅古都. 5일.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7리이다.
0 군명
상주(上州)ㆍ상락(上洛)ㆍ사량벌(沙梁伐)ㆍ사벌(沙伐)ㆍ상산(商山)ㆍ타아(陁阿)ㆍ귀덕군(貴德軍).
0 관원
* 상주목사겸상주진병마첨절제사. 문관. 음관. 정3품.
* 상주판관. 종5품.
* 상주교수. 종6품
* 속관
별좌 1인. 별감 3인. 군관 200인. 인리 71인. 지인 14인.
사령 24명. 군뢰 25명. 관노 23명. 관비 20구.
* 영장(營將) 무관 정3품.
속관
군관 200인. 진무(鎭撫) 10인. 지인 27인. 사령 15명. 군뢰 40인
0 인구(을묘년) 1735년 영조11
호수: 18,416호. 인구: 70,021명.
남자: 33,897명. 여자: 36,124명.
동쪽으로 비안현(比安縣) 경계까지 67리,
남쪽으로 선산부(善山府) 경계까지 39리,
동부(同府) 경계까지 40리,
금산군(金山郡) 경계까지 47리,
서쪽으로 충청도(忠淸道) 보은현(報恩縣) 경계까지 70리,
북쪽으로 함창현(咸昌縣) 경계까지 29리,
동쪽으로 대구감영까지 1백80리 2일정
남쪽으로 진주 우병영까지 3백89리 4일정
남쪽으로 고성 통재영까지 4백80리 5일정
0 건치연혁
본래 사벌국(沙伐國)인데 하나는 사불(沙弗)이라고도 한다. 신라 점해왕(沾解王)이 빼앗아서 주(州)로 만들었다. 법흥왕(法興王)이 상주(上州)로 고쳐 군주(軍主)를 두고, 진흥왕(眞興王)이 상락군(上洛郡)으로 고치고 신문왕(神文王)이 다시 주(州)로 만들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사벌주(沙伐州)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다시 상주(尙州)로 고치고, 뒤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고치고, 성종(成宗) 2년에 상주목(尙州牧)으로 고치고, 뒤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귀덕군(貴德軍)이라 이름하여 영남도(嶺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이 절도사를 폐지하여 다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만들고, 뒤에 상주안무사(尙州安撫使)로 고쳤다가 9년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는데, 본조(本朝)에서 그대로 하였다. 세종(世宗) 때에 관찰사(觀察使)로서 목사(牧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혁파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비로소 진(鎭)을 두고 목사로서 우도병마절도부사(右道兵馬節度副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파하고 진(鎭)으로 만들었다
0 진관(군사 관할 지역)
목(牧)이 1고을 성주(星州). 부(府)이 1고을 선산(善山). 군(郡)이 1고을 금산(金山). 현(縣)이 5고을 개령(開寧)ㆍ지례(知禮)ㆍ고령(高靈)ㆍ문경(聞慶)ㆍ함창(咸昌).
0 관아 건물(公廨)
제금당(製錦堂) 사무당(使無堂) 사성당(四省軒) 제승당(制勝堂) 우림당(羽林堂) 향사당(鄕射堂) 장관청(將官廳) 군관청(軍官廳) 인리청(人吏廳) 별관청(別官廳) 훈련청(訓鍊廳)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宣祖) 29년에 관찰사영(觀察使營)을 대구로 옮겼다.
【영아】 좌영(左營) 인조조에 설치하였다. ○ 좌영장 겸 토포사가 1명이다. ○ 속읍은 상주ㆍ개령(開寧)ㆍ금산(金山)ㆍ지례(知禮)ㆍ함창(咸昌)이다. ○ 감영(監營) 본조 태조 원년에 경주에서 관찰사영을 상주로 옮겼다. 세종 31년에 관찰사로서 목사(牧使)를 겸하였다가 얼마 안 있어 파하였고, 세조 때 목사로서 우도 병마절도부사(右道兵馬節度副使)를 겸하였다가 이윽고 파하였다. 선조 29년에 영(營)을 대구로 옮겼다.
0 요세(關隘)
성산산성(城山山城) 在州西五十里古甄萱所築也圮廢已久而自是天險之地湖嶺拱扼之 要可爲關防處
0 성씨
*본주(本州) 김(金)ㆍ박(朴)ㆍ주(周), 황(黃), 고(高)ㆍ이(李)ㆍ형(荊)ㆍ나 (羅) 모두 내성(來姓)이다. 이(李) 하간부(河間府) 인물(人物) 아래에 자세히 하였다. 윤(尹) 촌성(村姓)이다. 임(林) 속성(續姓)이다.
* 단밀(丹密) 나(羅)ㆍ손(孫). 산양(山陽) 유(庾)ㆍ신(申)ㆍ채(蔡)ㆍ방 (方).
* 화령(化寧) 임(任)ㆍ고(高)ㆍ방(方)ㆍ장(張)ㆍ전(全)ㆍ신(申).
* 공성(功城) 성(成)ㆍ손(孫)ㆍ장(張)ㆍ전(全).
* 청리(靑里) 장(張)ㆍ박(朴)ㆍ방(方)ㆍ심(沈). 중모(中牟) 전(全)ㆍ김(金)ㆍ강(姜)ㆍ박(朴)ㆍ방(方), 심(沈) 내성(來姓)이다.
* 영순(永順) 태(太).
* 장천(長川)ㆍ윤(尹)ㆍ박(朴). 연산(連山)ㆍ윤(尹)
* 백원(白原)ㆍ하해(河海)ㆍ양녕(壤寧)ㆍ보량(保良)도 같다.
* 주선(主善) 신(申) 단곡(丹谷) 생물(生物)도 같다.
* 양보(陽寶)ㆍ진(陳). 관제(灌濟) 임(任)ㆍ전(全)ㆍ고(高).
* 평안(平安) 방(方)ㆍ심(沈)ㆍ구(仇). 평산(平山) 방(方).
* 무림(茂林) 손(孫), 김(金)ㆍ심(沈) 모두 속성(續姓)이다.
* 선은(鐥銀)ㆍ임(任)ㆍ전(全).
* 해상이(海上伊)ㆍ방(方)ㆍ김(金)ㆍ박.
0【풍속】 습속(習俗)이 간소하고 인색한 것을 숭상한다. 백성의 풍기가 순고하고 질박하다 모두 권근(權近)의 기(記)에 있다.
0【형승】 동남방 일백 고을 중 첫째다 최자(崔滋)의 전(傳)에 있다. 팔방으로 통한 거리이다 안축(安軸)의 기에 있다. 신라(新羅) 때부터 큰 부(府)가 되었다 이색(李穡)의 기에 있다.
0【산천】
* 왕산(王山) 성안의 작은 산이다.
* 천봉산(天峯山) 주(州) 북쪽 7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 구봉산(九峯山) 화령현(化寧縣) 서쪽에 있는데 봉만이 창을 벌여 세운 것 같아서 대단히 높고 험하다.
* 속리산(俗離山) 화령현 서쪽 30리에 있다. 산 서쪽 15리 가량 되는 곳에 용화솔면촌(龍華率面村)이 있는데 황장(黃腸)과 궁실(宮室)의 재목이 나온다.
* 사불산(四佛山) 산양현(山陽縣) 북쪽에 있는데, 주(州)와의 거리가 99리다.
○ 고려(高麗) 중 진정(眞靜)의 유산기(遊山記)에 산양현(山陽縣) 북쪽에 산이 있는데 동쪽으로 죽령(竹嶺)에 연하고 남쪽으로 화장(華藏)을 끌어 당긴다. 이 산의 이름이 사불(四佛)인데 공덕(功德)이라고도 한다. 산에 사방 십척 쯤 되는 돌이 있는데,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을 새기어 별봉(別峯)에 안치되어 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그 산을 순행하여 구경하고 그 옆에 절을 창건하여 이름을 대승(大乘)이라 하였다. 산의 곤방(坤方)에 절이 있는데 이름은 백련사(白蓮社)다. 뜰 좌우에 미면정(米麪井)이 있고 의상(義湘)이 설법(說法)하던 대(臺)가 있는데, 종려(椶櫚) 삿갓과 주석 지팡이가 있다. 고종(高宗) 29년 소경(少卿) 최자(崔滋)가 상주(尙州) 목사(牧使)로 있을 때 찾아보니, 옛 궁전에 원효(元曉) 의상(義湘)의 진용(眞容)이 있고 소위 삿갓과 지팡이도 아직 탈이 없었다. 문 밖 50보쯤 되는 곳에 높이가 석 자나 되는 돌 하나가 있는데, 전하기를 금호석(禁虎石)이라 한다. 20보쯤 되는 곳에 샘이 있는데, 바위 틈 사이로 졸졸 솟아 나오고, 소나무ㆍ가래나무가 울창하며 아래에 반석이 있어 30명은 앉을 만하다. 이 이름이 냉천정(冷泉亭)이다. 최공이 법조(法曹) 왕공(王公)에게 명하여 공사를 감독하여 불우(佛宇)ㆍ조당(祖堂)ㆍ승료(僧寮)ㆍ객실(客室)로부터 허백루(虛白樓)에 이르게 하고, 또 냉천정(冷泉亭) 아래에 누교(樓橋)를 만들어 이름을 신청교(神淸橋)라 하였다. 조계산인(曹溪山人) 탁연(卓然)에게 명하여 써 부치게 하였다.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가 호남(湖南)에 있고, 공덕산(功德山)은 강동(江東)에 있으므로 동백련(東白蓮)이라 불러서 구별하였다.
* 병풍산(屛風山) 주(州) 동쪽 10리에 있다.
* 왜유현(倭踰峴) 주 남쪽 47리 금산군(金山郡) 경계에 있다.
* 대조현(大鳥峴) 산양현(山陽縣) 북쪽에 있는데 주(州)에서 88리다.
* 갑장산(甲長山) 주 남쪽 13리에 있는데 일명 연악(淵岳)이라 한다. *
* 석악산(石嶽山) 주 북쪽 6리에 있다.
* 만악산(萬嶽山) 단밀현(丹密縣) 남쪽에 있으며 주(州) 북쪽 47리에 있다.
* 백화산(白華山) 중모현(中牟縣) 서쪽에 있으며, 주에서 72리다.
* 노음산(露陰山) 주 서쪽 10리에 있다. 서로악(西露岳)이라고도 일컫는다. 북석악 (北石岳) 남연악(南淵岳)과 함께 상산삼악(商山三岳)이라고 일컫는다.
* 죽현(竹峴) 주 남쪽 38리 선산부(善山府) 경계에 있다.
* 송현(松峴) 주 북쪽 28리 함창현(咸昌縣) 경계에 있다.
* 북천(北川) 주 북쪽 2리에 있다. 근원이 주 서쪽 가전현(加田峴)으로 부터 동으 로 흘러 남천(南川)과 합한다.
* 남천(南川) 주 남쪽 5리에 있다. 근원이 왜유현(倭踰縣)으로부터 주 동쪽 5리에 이르러 북천(北川)과 합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 낙동강(洛東江) 주 동쪽 36리에 있다.
문경(聞慶)의 용연(龍淵)과 군위(軍威)의 병천(竝川) 등 여러 물이 주의 동북쪽에 이르러 용궁(龍宮) 하풍진(河豐津)에 합하여 남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어, 선산부(善山府) 경계로 들어간다. 여기로부터 바다에 들어가기까지 비록 땅에 따라 이름은 다르나 총칭 낙동강이라 하고 가야진(伽倻津)이라고 일컫는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백 번이나 구부려진 푸른 산 속에 한가하게 낙동을 지난다. 풀이 깊으니 아직도 이슬이 있고 솔이 고요하니 자연 바람 없다. 가을 물은 오리 머리 같이 푸르고, 새벽 놀은 성성의 피같이 붉구나. 게을리 노는 손이 사해(四海)로 떠도는 한 시옹(詩翁)인 줄 누가 알까.” 하였다. ○ 안축(安軸)의 시에, “비 뒤의 산빛은 쪽물 들인 듯 푸르고, 십리의 기이한 바위는 수묵(水墨)으로 그린 병풍이다. 자사(刺史)가 새 안부(按部 감사)를 기꺼이 맞아, 목란(木蘭) 배 위에 초가 정자를 얹었다.” 하였다.
* 송라탄(松羅灘) 주 북쪽 37리에 있는데 곧 낙동강(洛東江) 상류다.
* 공검지(恭檢池) 주 북쪽 27리에 있다.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에 사록(司錄) 최정분(崔正份)이 옛터를 따라서 쌓았는데, 둑의 길이가 8백60보이고 둘레가 1만6천6백47척이다. 그 못이 실상은 함창(咸昌)에 있는데, 상주 백성들이 관개(灌漑)의 이익을 독차지한다.
* 불암지(佛巖池) 주 북쪽 4리에 있다. 둘레가 1천9백31척이다.
* 대제지(大堤池) 단밀현(丹密縣) 북쪽에 있으며 주에서 68리다.
* 기지(機池) 주 남쪽 6리에 있으며 둘레가 4천1백81척이다.
0 진상품(進貢)
生雉 生銀口魚 鹽銀口魚 胡桃 早紅柹子 皮荻栗 單乾雉 生猪 臘狐
人蔘 白芍藥 白茯苓 赤茯苓 白茯神 赤芍藥 天南星 紫草茸 蒲黃 柴胡 蓮花蘂 車前 子 甘菊 生木果 蓮子 水獺膽 白术 苽蔞仁 連翹 山藥
0 토산품
옥석(玉石) 갑장산(甲長山)에서 난다.
옥등석(玉燈石) 대조현(大鳥峴)에서 난다.
철(鐵) 송라탄(松蘿灘)에서 난다.
호두[胡桃]ㆍ감[柹]ㆍ밤ㆍ은어[銀口魚]ㆍ송이[松蕈]ㆍ왕골[莞草]ㆍ인삼ㆍ안식향(安息香)ㆍ산무애뱀[白花蛇]ㆍ석이버섯[石蕈].
0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백 49척 높이가 9척이며 안에 21개의 우물과 두 못이 있다.
0 봉수
*회룡산봉수(回龍山烽燧) 공성현(功城縣)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 금산군(金山郡) 소산(所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청리현(靑里縣) 서산(西山)에 응한다.
*소산봉수(所山烽燧) 주 동쪽 5리에 있다. 남쪽으로 청리현 서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함창현(咸昌縣) 성산(城山)에 응한다.
*서산봉수(西山烽燧) 청리현 서쪽에 있다. 서쪽으로 공성현(功城縣) 회룡산(回龍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소산(所山)에 응한다.
*국사당산봉수(國師堂山烽燧) 화령현(化寧縣) 서쪽에 있다. 동쪽으로 중모현(中牟縣) 소산(所山)에 응한다.
*산양현 소산봉수(山陽縣所山烽燧) 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문경(聞慶) 호계현(虎溪縣) 선암산(禪巖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용궁현(龍宮縣) 용비산(龍飛山)에 응한다.
*중모현 소산 봉수(中牟縣所山烽燧) 현 북쪽에 있다. 남쪽으로 충청도 (忠淸道) 황간현(黃澗縣) 소산(所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화령현(化寧縣) 국사당산(國師堂山)에 응한다.
0【궁실】
*객관(客館) 안축(安軸)의 기에 “지정(至正) 3년 계미(癸未)년에 내가 상주(尙州) 목사의 명을 받아 이해 여름 4월 고을에 부임하여 일을 보았다. 근년 이래로 가혹한 정치 때문에 백성들이 흩어지고 마을 골목이 쓸쓸하며 옛날의 공해(公廨)ㆍ학교(學校)ㆍ신사(神祠)ㆍ불사(佛寺)라고는 모두 기울어 무너지고, 오직 객사(客舍)만이 온전히 갖추어져 고대(高大)하고 화려한 것이 남방에 으뜸이고, 그 청당(廳堂)과 기초의 규모와 배치(排置)가 크고 장려하며 여유가 있어 각각 그 마땅함을 얻었다. 내가 생각하기를, ‘이것은 시속 사람의 상례에 따른 제도가 아니라’ 하여 고을 사람에게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지금의 정동성랑(征東省郞) 김상국(金相國) 영후(永煦)가 영건(營建)한 것입니다. 이 고을이 팔방으로 통한 거리에 있어서 역마를 타고 사명을 받든 자가 빈 날이 없는데, 옛날의 객관이 비습하고 좁고 낮고 더러우며, 또 오래되어 기둥이 이미 흔들렸으므로 항상 손님의 꾸지람을 받았었습니다. 지난 정묘(丁卯)년 4월에 공이 이 고을 목사로 부임하여 곧 새롭게 할 생각이 있었으나 생민의 지치고 곤함을 민망히 여기어 차마 공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다만 인애(仁愛)로써 백성을 사랑하고 엄중하게 부하를 경계할 뿐이었는데, 돌이 지나자 고을 사람들이 덕스러운 정사에 편안하여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생겨 공의 은혜를 갚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백성을 부릴 수 있는 것을 알고 재목을 모으고 역사를 시작하여 기한을 정하였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발로 뛰고 손으로 춤추며 기쁨으로 수고로움을 잊으므로 억센 무리들도 두려워서 머리를 숙이고 귀를 늘어뜨리고 힘을 다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일이 백성을 상하지 않게 하고 공사가 농업을 방해하지 않아서, 며칠이 안 되어 이루어졌습니다. 객관이 준공되자, 또 객관의 서쪽을 개척하고 따로 작은 관사를 영건하니, 비록 사빈(使賓)이 겹쳐 이르러도 기숙하는 것이 여유가 있어 고을 사람이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아, 공(公)이 저와 같이 얼마 안 되는 백성을 써서 이와 같은 큰 집을 지었으나 힘은 실로 넉넉[恢恢]하였으니, 비록 백성의 힘을 쓰긴 하였으나 실상은 공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 백성이 지금까지 칭송한다. 대개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시경(詩經)》에, ‘창과 지게문을 얽고 손질한다[綢繆牖戶]’는 비유가 있고, 《서경(書經)》에는 ‘긍당긍구(肯堂肯構)’의 비유가 있으니, 공이 묘당(廟堂)에 앉아서 경기(經紀)를 세우고 방략(方略)을 베풀어서 다시 왕가를 번영하게 한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하였다.
『신증』 가정(嘉靖) 병술년에 불에 탔는데, 목사(牧使) 윤탕(尹宕)이 고쳐 지었다.
0【누정】
*풍영루(風詠樓) 이색(李穡)의 기에, “상주 목사(尙州牧使) 김공(金公)이 공관 동편에 이미 정자를 짓고 한산(韓山) 이색(李穡)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름과 기(記)를 청하고 말하기를, ‘누가 뜨거운 것을 잡고 물에 가서 씻지 않으리오[誰能執熱逝不以濯].’하였으니 상주의 곤란한 것을 내가 능히 없앴으므로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신축(辛丑)년 겨울에 임금께서 남쪽으로 행하시어 이듬해 봄에 상주에 거둥하였는데, 색(穡)이 그때에 승선(承宣)으로서 조석으로 시종하였고, 가을에 이르러 거가(車駕)가 청주(淸州)로 옮겼다. 참으로 더위에 곤란을 겪었다. 그때에 깊이 한하기를, ‘이 고을이 신라(新羅) 때로부터 큰 부(府)였는데, 어째서 유관(遊觀)할 만한 정사(亭榭)가 이렇게 없는가’ 하였던 것을, 오늘날 이르기까지 대개 잊지 못하였다. 지금 나의 동년(同年) 박헌납(朴獻納)이 말한 것과 문인(門人) 김남우(金南遇)의 일가 사람 김계(金桂)가 칭도하여 말한 것을 보면 이 정자가 시원스러워서 바람에 씻는 의상(意想)이 있다 하였으니, 그 기쁘고 다행함이 어떠하겠는가. 대개 사시의 기운이 천지 사이에 유행하여 춥고 덥고 따스하고 서늘함의 당연함이 다른데, 사람이 응하는 것도 각각 그 도(道)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송석(松石)ㆍ수천(水泉)의 홍치와 사죽(絲竹)ㆍ배상(杯觴)의 즐거움에도 내 마음에 주장됨이 있으면, 눈앞에 유행하는 차고 더운 것이 넉넉히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마음을 잃게 하는 것은 바깥 물건이니 이 두 가지를 내놓고 천시(天時)에 순응하고, 내 뜻을 펼 수 있는 것은 오직 바람 쐬고 읊는 것이다. 무우(舞雩)에 바람 쐬고 읊고 돌아오매 가슴속이 유연(悠然)하여 조그만 꾸밈도 없거늘, 하물며 장마비나 혹한에 대한 원망이 이것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절(節)을 짚고 병부를 나누어 가지고, 이 고을을 지나가는 자로[지방장관으로] 하여금 춘복(春服)이 이루어진 즈음에 화기(和氣)가 넘쳐 흐르는 것과 같아지기만 한다면 상주 백성은 다행한 일이니, 감히 풍영(風詠)으로 이름짓기를 청한다. 담을 둘러서 동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서 못을 만들며 씨를 심고 나무를 심어서 둘러보고 바라보는데 탁 트이고, 여러 봉우리가 둘러 호위한 것 같은 따위는 이 정자의 보조[羽翼]니 생략하여도 좋을 것이다. 뒤에 여기에서 바람 쐬고 읊어서, 오여점야(吾與點也)의 대의(大意)를 얻는 자는 무엇으로 우리 김공에게 갚을 것인가. 아울러 여기에서 고하노라. 김공의 이름은 남득(南得)인데 경진년(庚辰年) 진사에 합격하고 안팎에 들락날락하여 중한 이름이 있어 내가 아끼고 공경하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고 기를 짓는다 하였다.” 하였다.
○ 권근(權近)의 기에, “상주(尙州)는 본래 사벌국(沙伐國)인데 신라에 속하여 큰 부(府)가 된 지 천여 년이 되었다. 산천의 수려한 것과 인물의 번성함이 도내(道內) 여러 고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러나 누대 정사(亭榭)가 없었으니 백성의 풍속이 순박한 것을 상상할 수 있다. 홍무(洪武) 경술(庚戌)년에 목사(牧使) 김남득(金南得) 공이 거듭 해우(廨宇)를 영건(營建)하고 비로소 과원(菓園)을 동북쪽에 설치하고 그 가운데에 정자를 지었는데, 우리 좌주(座主) 한산(韓山) 목은(牧隱 이색) 상국(相國)이 풍영(風詠)으로 이름짓고 기(記)를 지었으며, 과거에 장원[解元]한 성산(星山) 도은(陶隱 이숭인)이 시(詩)를 남겼으니, 두 공은 모두 세상의 문장(文章) 대가라 이 고을의 성가(聲價)가 실로 그 무게를 더한 것이다. 경신(庚申)년에 왜구(倭寇)가 침범하여 관사와 민가가 모두 병화(兵禍)를 당했다. 이듬해 신유년에 반자(半刺 목사를 돕는 통판(通判)) 전군 리(田君理)가 비로소 고을 성을 쌓아 남은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옛터에 별관을 창건하여 사명(使命 사신)을 접대하였으며, 경오년에 목사(牧使) 이복시(李復始) 공이 또 해사(廨舍)를 창건하였으나, 정사(亭榭)는 미처 지을 겨를이 없었다. 지금의 목사 송공(宋公)이 판관(判官) 한공(韓公) 암(巖)과 더불어 다스려 폐단이 없어지고, 이익되는 것을 일으켜서 풍교(風敎)가 진흥되어 백성들이 편안하여졌다. 그리고 정자의 옛터를 개척하고 넓혀서, 그 위에 다락을 일으키고 목은의 기와 도은의 시를 써서 옛날의 관첨(觀瞻)을 모두 회복하니, 고을의 좋은 경치가 더욱 증가되었다. 고을 사람 전 대호군(前大護軍) 김겸(金謙) 공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이 풍영정(風詠亭)이 생긴 후로 큰 두 선비의 거필(巨筆)을 얻어 그 빛을 빛내었는데, 중간에 화재를 만나고 미처 다시 세우지 못하여 오랫동안 고을 사람의 수치가 되었었다. 이제 우리 목백(牧伯) 목사의 정치 성적이 탁월하여 여러 고을의 으뜸이 되고, 다락을 짓는 것도 백성에게 폐가 미치지 않게 며칠 안에 준공되었고, 사명(使命)을 받든 신하가 가고 오는 길에 구경할 곳이 있으므로 고을의 늙은이ㆍ어린이가 서로 경하(慶賀)하며 기뻐한다. 목은(牧隱)과 도은(陶隱)은 그대의 스승과 벗이니, 어찌 한마디 말로 그 뒤를 잇는 것을 아끼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풍영(風詠)에 대한 뜻은 정자의 기(記)에 다 말하였으니, 내가 무엇을 덧붙일 것이 있는가. 그 말에 절(節)을 짚고 병부를 나누어 가지고, 이 고을을 지나가는 자로[지방장관으로] 하여금 봄옷이 이루어진 즈음에 화한 기운이 넘쳐 흐르는 것과 같아지기만 한다면 상주(尙州) 백성은 다행할 일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매우 크다. 내가 감히 이것을 가지고 부연하여 말하겠노라. 공자 문하의 여러 사람[諸子]들이 각각 그 뜻을 말함에 있어서, 모두가 무슨 일을 한다는 말단적인 생각에 얽매여 있는데, 증점(曾點)만이 목욕하고 바람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다고 말함으로써 공자께서 찬탄하고 인정하였는데, 이를 두고 말하기를, ‘요순(堯舜)의 기상이 있다.’ 하였다. 아마도 가슴을 넓게 열어 대허(大虛 허공)와 동체(同體)가 되어, 대상에 따라 형체를 부여하여 모두 제자리를 얻게 한다면, 이를 실천, 조치(措置)할 때 젊은이를 품어주고[少者懷之], 늙은이를 편안하게 해주며[老者安之], 편안하게 해주어 오게 하고[綏之斯來], 고무시켜 화하게 하는[動之斯和] 묘(妙)가 있게 된다. 화한 기운이 흘러 행하여 백성이 사는 데[耕鑿] 편하기가 봄바람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아서, 다스려진 효과가 곧 큰 조화와 더불어 함께 운행될 것이니, 요순(堯舜)의 정치도 또한 여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쫓아온 곳을 찾아 보면 다만 가슴 가운데에 한 점의 사심[私累] 없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만일 절(節)을 짚고 병부를 나누어 가진 사신으로 하여금 올라 구경할 적에, 진루(塵樓)의 번잡한 것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세상 생각을 소화해 보내어 뜨거운 것을 잡았어도[執熱] 샘에 빠는 것을 기다림 없이 맑아지고, 맑은 정치가 재야의 도움을 얻지 않고도 이룩되며, 짧은 시간[俯仰] 수작(酬酌)하는 사이에도 묵묵히 보고, 읊조리며 마음에 즐거움을 얻음으로써 물과 내가 같다는 이치[物我同然之望]를 넓힌다면, 그 정치와 교화의 효험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그 누대의 좋은 경치를 구경하기엔 내가 늙었으나 혹시 한 번 가서 보기라도 한다면 마땅히 도은의 뒤를 이어 읊을 텐데.”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오래 손 노릇하여 몸이 바야흐로 피곤한데, 처음으로 오르니 눈이 번쩍 밝아진다. 경영하여 지은 이는 김 태수(金太守)요, 풍영(風詠)으로 이름한 이는 이 선생(李先生)이다. 대 그림자에는 지당(池塘)이 고요하고, 소나무 소리에는 원우(院宇)가 맑다. 좋은 말 없는 것이 스스로 부끄럽구나. 현판 위에 다만 이름만 썼네.”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중수기(重修記)에, “상주(尙州)가 낙수(洛水)의 상류에 있어서 감사(監司)의 본영(本營)이 되었으니, 실로 동남방의 큰 도회이다. 사명을 받고 정사를 반포하는 손님과 조공을 바치는 일본 사신이 오고 가는 것이 줄처럼 연속하여, 죽령(竹嶺)을 경유하는 것은 3분의 1도 못 되고 대개는 관현(冠縣)을 경유하는데 상주가 그 폭주하는 중심지에 있으니, 체모[儀刑]에 맞게 마땅히 높은 다락과 웅장한 집이 있어 관첨(觀瞻)을 장엄하게 하며, 고명(高明)과 겨루어 염열(炎熱)과 습기를 제거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은 풍영루(風詠樓)를 중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전하(殿下) 18년 정미(丁未) 봄에 순창(淳昌) 설순조(薛順祖)공이 좌도(左道)의 책임을 지고 이 고을에 왔을 때, 이 다락의 지붕ㆍ마루와 서까래는 흔들려 기울어지고 난간이 깨어져 닫히고, 기와는 처마에서 벗어나 비는 벽에 새어 붉고, 흰 것의 장식은 흐려지고 벗겨져서, 오르는 자가 관현(管絃)을 베풀기 전 주춤해서 꺼리는 빛이 많은 것을 보고 개연히 중수하고자 하였는데, 그 해 가을에 통판(通判) 고양(高陽) 신후(申侯) 현(礥)이 잇따라 이르렀다. 의논이 서로 합하여 이듬해 봄에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재목 수집을 명하여 성안에 실어들이고 가을 8월에 이르러 비로소 묵은 집을 헐고 그 제도를 넓히고 키워서, 겨우 30여 일 만에 자귀와 흙손의 사용이 끝이 났다. 누각의 화려함ㆍ장려함ㆍ훌륭함이 더불어 대적할 것이 없어서, 성지(城池)와 여항(閭巷)이 모두 덕스럽게 여기는 빛이 있고, 무릇 지경 안의 산천의 진산(鎭山)이 되고 소택(沼澤)이 된 것이 마치 높고 깊은 것을 증가시킨 것 같았다. 공이 그래서 우리 친구, 고을의 교수(敎授) 주윤창(周允昌)군을 중개하여 편지를 보내 나에게 기(記)를 청하였다. 내가 고을의 옛일을 상고하건대, 원(元)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에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위치를 적당하게 한 자는 목사(牧使) 김영후(金永煦)이고, 기를 지은 이는 근재(謹齋)이다. 황명(皇明) 홍무(洪武) 경술년엔 관사의 동평을 개척하고 그 땅에 새 정자를 지은 이는 목사 김득남(金得南)이고, 풍영(風詠)으로 이름하고 또 기를 지은 이는 목은(牧隱)이며, 시를 지은 이는 도은(陶隱)이다. 경신(庚申)년 병화에 정자도 불타버렸는데, 얼마 안 되어 묵은 터에 정자를 바꿔 다락으로 지은 자는 목사 송인(宋因)이고 기를 지은 이는 양촌(陽村)이다. 지금 공이 이 다락을 중수함에 있어서 그 제도의 모획(謨劃)과 공정(功程)이 족히 두 김씨와 송씨에 좇아 필적(匹敵)할 수가 있는데, 기를 짓는 촉탁을 받은 자는 네 선생의 제자 축에도 들지 못하니 어찌하랴. 옛적에 한퇴지(韓退之)는 등왕각(滕王閣)의 기를 지으면서 글이 세 왕씨의 다음에 나열함으로써 영광을 삼았으나 나는 뻔뻔스럽게 네 선생의 뒤에 초(貂)를 속(續)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세상 사람들이 배를 부둥켜 웃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장차 움츠리고 부끄러워할 겨를도 없을 텐데 어찌 소위 영광이라는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공이 명령하여 감히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아직 그 대강을 기술하고 또 노래하기를, ‘배와 수레가 모여드니 사방으로 통한 요충(要衝)이로다. 관과 일산이 수레 자국을 열했으니 다른 나라가 하풍(下風)에 따르는도다. 이 집이 있지 않으면 연향(宴饗)과 호군(犒軍)을 어디 의탁하랴. 누가 뜨거운 것을 잡고서 물에 씻지 않으리오, 상산(商山)은 푸르고 푸르러 낙수(洛水)는 구불구불 흐른다. 옛것을 계승함이 있으니, 층층 집이 구름에 닿았도다. 둘러 있는 것이 맑은 낙수요, 높은 상안(商顔)이로다. 순창(淳昌)의 후계함이 영구히 깎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한다.
* 관수루(觀水樓) 낙동강 동쪽 언덕에 있다.
* 응신루(凝神樓) 풍영루(風詠樓) 서쪽에 있으며, 판관(判官) 민녕(閔寧)이 세웠다. 『신증』 홍귀달(洪貴達)의 기(記)에 “고을 객헌(客軒) 동쪽에 ‘풍영’이라는 다락이 있는데 목은(牧隱) 이 선생(李先生)이 이름과 기를 지었고, 그 서북 모퉁이에 또 지붕마루를 연하여 새로 일어난 것이 있으니 이름하여 응신(凝神)인데, 지금의 통판(通判) 민녕(閔寧) 후가 세운 것이고 함종(咸從) 어자익(魚子益) 선생이 이름한 것이다. 홍치(弘治) 기미(己未)년 봄에 겸선(兼善)이 명령을 받아 《성종실록(成宗實錄)》을 성주사각(星州史閣)에 봉안(奉安)하는 길에 상주(尙州)로 지나게 되었으니 상주는 우리 시골이다. 시골 사람들이 풍영루(風詠樓) 위에서 내게 술을 주는데 목사 신종지(申宗之) 공과 민후(閔侯)가 함께 자리에 있었다. 술이 취하고 날이 저물 때 민후가 일어나서 고하기를, ‘작은 다락은 우리가 사객(使客)을 편안하게 하자는 것인데, 왜 오늘 여기에서 자지 않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이 누각이 기(記)가 없으니 한 말을 남기기를 원한다.’ 하였다. 내가 사양할 수 없어서 말하기를, ‘재주없는 내가 다행히 여기에서 마시고 읊는데 마침 봄옷이 이루어짐을 만나[春服之成] 손과 벗이 자리에 가득하고 또 사죽(絲竹)과 관현(管絃)의 성대함이 있으니, 어른과 아이 7ㆍ8명이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읊고 돌아오는 것에 비교하면 과연 어떠한가.’ 하였다. 조금 뒤에 작은 다락에 자리를 까니 그 제도가 극히 깨끗하고 시원스러웠다. 다락 중심에 방을 만들었는데, 창은 비고 발은 성기어 더울 때에 거처하기가 대단히 좋게 되어 있다. 또 바로 다락 머리에 목욕하는 집이 있어 깨끗하고 편리하였다. 술이 깬 뒤에 내려가 목욕하니 심신(心神)이 맑고 명랑하여 한 점의 진구(塵垢)도 없었다. 끝낸 뒤에 다시 오르니 때는 이미 사람의 소리가 없는 고요한 밤인데 오직 작은 바람이 휘장을 움직이고 등롱 촛불이 그림자를 흔드니, 참으로 인간의 둘도 없는 정취였다. 이에 단정히 ‘함이 없이[無爲]’ 눈을 감고 보는 것을 거두니, 마음이 엉기고 형상이 풀리며 천기(天機)가 움직이지 않아서 만물과 더불어 가만히 합하였다. 그래서 몽롱하게 잠이 드니 꿈에 신선이 내게 읍하며 말하기를, ‘괴로운 티끌 세상에 만 가지 일이 한 몸에 집중되어 그럭저럭 늙는 것이 이르러도 스스로 알지 못한다. 내가 한 가지 비결이 있는데 말이 간단하고 긴요하다. 만물이 수없이 많은데 마음은 오직 고요하다. 물건마다 생각해 처리한다면 날마다 하여도 부족하고 정신을 어리어 고요하게 보면 백 가지 생각이 일치된다.’ 하였다. 말이 끝나자 보이지 않았다. 이에 꿈이 활짝 깨어 마음으로 가만히 스스로 말하기를, ‘신선은 누각에 사는 것을 좋아한다 하였는데, 아까 꿈에 보인 것이 이 다락의 주인이 아닌가. 그가 나를 가르쳤도다.’ 하였다. 얼마 뒤에 계인(鷄人 관직명)이 새벽을 알리고 민후가 벌써 와서 문안하였다. 꿈에 신선에게 들은 것을 말하니 후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허어 이것이 누의 기가 될 만하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함종(咸從)이 이름을 지은 뜻도 나타내어 밝혀야 하겠고 또 목은(牧隱)의 기가 있어 옛 다락 사이에 있으니, 새 다락은 나의 일이 아닌가 하고 이에 신선의 말을 써서 민후에게 주어 돌려 보내었다.’ 하였다.
* 청량각(淸涼閣) 객관 북쪽에 있어 작은 못에 굽어 임하고 있다.
* 추월당(秋月堂) 서헌(西軒) 북쪽에 있다. 목사 정종보(鄭宗輔)가 세웠다. 한연당(閒燕堂) 주 동쪽 40리에 있다. 이항(李沆)의 별장이다. 남곤(南袞)의 기에, “이호숙(李浩叔)이 낙동강(洛東江) 서쪽 언덕에 땅을 잡아 밭 두어 이랑을 사서 집 3칸을 짓고 당에 올라 사방으로 바라보니 긴 강은 시야(視野)에 미만(彌滿)하고 흰 모래는 자리를 펼친 것 같고 강 밖의 석벽은 수십 리를 두르고 청동산(靑銅山)은 연기와 구름, 아득한 아지랑이 밖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니 참으로 좋은 경치였다. 호숙이 즐거워서 돌아가기를 잊고 그 당에 편액(扁額)하기를 ‘한연(閒燕)’이라 하고 그 뒤에 내게 기(記)를 구하였다. 내가 한(恨)하기를 ‘낙수(洛水)가 태백산(太白山)으로부터 남해로 들어가는데 그 중간이 수백 리뿐이 안 되나 저 영호(映湖)ㆍ월파(月波)ㆍ관수(觀水) 등의 여러 누각과 정자가 모두 국가의 소유가 되었으니, 망천(輞川)의 왕마힐(王摩詰)과 보리(甫里)의 육구몽(陸龜蒙)은 어찌 그렇게 사람이 없는가. 사람이 그 지경을 만나지 못한 것인가. 또한 기다림이 있는 것인가 한갓 붉은 단장과 푸른 눈섬은 보내고 맞는 사이에 떠들어대고 운산(雲山)과 풍월(風月)은 적막(寂寞)한 물가에 길이 한가하니 이것은 어찌 유감스런 일이 아닌가.’ 하였는데 지금 호숙의 청함에 비로소 낙동강이 기다림을 알았고 나의 유감도 풀렸다. 한연(閒燕)의 뜻에 내가 무엇을 부연하여 말하리오. 군의 부친이 바야흐로 인의(仁義)의 말로 임금에게 진달하고 군이 또 인의의 정사로 영천(榮川) 백성에 임하니 이것이 평소에 한연(閒燕) 사이에서 얻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서 당의 이루어짐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남은 온축이 없다. 그러나 한연의 도(道)가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랴. 현달하고도 행하지 못하면 조정에서도 한연할 것이요, 만일 어그러짐이 있으면 호산(湖山) 사이에서 한연할 것이니, 그러면 나오는 것도 인의로 하고 물러가는 것도 인의로 하여 일생의 쓰는 것이 모두 그 인의 속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호숙의 깊은 뜻이고 다른 사람은 엿보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비록 무상(無狀)하나 이공 부자의 사이에서 교유함을 얻었으니 감히 이것으로 당 위의 기를 삼는다.”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주 남쪽 5리에 있고 남루(南樓)가 있다. 선덕(宣德) 초년에 판목(判牧) 조치(曺致)가 세웠다. 홍여방(洪汝方)이 기를 지었다.
0【역원】
낙양역(洛陽驛) 주 서쪽 3리에 있다.
낙동역(洛東驛) 낙동강 동쪽 1리에 있다.
낙원역(洛源驛) 주 북쪽 16리에 있다.
낙서역(洛西驛) 주 서쪽 19리에 있다.
낙평역(洛平驛) 주 남쪽 26리에 있다.
장림역(長林驛) 화령현(化寧縣) 동쪽에 있으며 주에서 51리다.
남원(南院) 주 남쪽 2리에 있다.
안빈원(安賓院) 주 동쪽 11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주 동쪽 19리에 있다.
이두등원(泥豆等院) 주 동쪽 36리에 있다.
요제원(要濟院) 주 동쪽 37리에 있다.
양산지원(陽山旨院) 주 남쪽 15리에 있다.
흥옥원(興玉院) 주 남쪽 9리에 있다.
서원(西院) 주 서쪽 3리에 있다.
어암원(於巖院) 주 서쪽 15리에 있다.
율원(栗院) 주 서쪽 33리에 있다.
부원(釜院) 주 북쪽 8리에 있다.
북원(北院) 주 북쪽 2리에 있다.
송원(松院) 주 북쪽 26리에 있다.
당제원(唐梯院) 주 북쪽 15리에 있다.
퇴산원(退山院) 주 북쪽 42리에 있다.
유등원(柳等院) 주 남쪽 24리에 있다.
죽현원(竹峴院) 죽현(竹峴) 아래에 있다.
대두원(大豆院) 주 남쪽 24리에 있다.
중생원(重生院) 중모현 남쪽에 있는데 주까지 65리다.
장혜원(長惠院) 중모현 서쪽에 있는데 주까지 72리다.
동원(東院) 중모현 동쪽에 있는데 주까지 56리다.
반암원(班巖院) 산양현(山陽縣) 서쪽에 있으며 주까지 57리다.
공성원(功城院) 주 남쪽 43리에 있다.
0 【교량】
북천판교(北川板橋) 주 북쪽 5리에 있다.
남대교(南大橋) 주 남쪽 5리에 있다.
동술교(東述橋) 주 동쪽 5리에 있다.
양산지교(陽山旨橋) 주 남쪽 13리에 있다.
0 사찰
* 용암사(龍巖寺) 만악산(萬嶽山)에 있다.
○ 고려(高麗) 황보탁(黃甫倬)의 기에, “만악산(萬嶽山)이 단밀현(丹密縣) 서남방 30여 리에 있는데, 태백산(太白山)으로부터 서리서리 연하여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고 널브러져 모여드는 것이 얼마이지 알지 못하지마는 오직 이 산만은 영기를 품고 바탕을 온축(蘊蓄)하여 홀연(屹然)히 진산(鎭山)이 되었으니 상락(上洛) 사람들이 덕산이라 지목한다. 용암사(龍巖寺)가 위로는 뾰족한 산에 의지하고 아래로는 질펀한 물에 임하였으니 이것은 만악산이 미(美)를 모은 것이다. 옛날에 우리 태조(太祖)께서 통합(統合)한 처음에 이 산 동남 모퉁이에 좋은 땅을 정하여 절을 세우고 밭 6백 묘(畝)를 주고 나무할 땅을 붙여서 화엄(華嚴) 원교(圓敎)를 천양(闡揚)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 후에 해이(解弛)하고 폐한 지가 오래라 무너진 담과 깨어진 주추가 바위 언덕에 끼어 있고, 금병(金餠) 같은 땅은 변하여 기와쪽과 조약돌이 되었고, 연화(蓮花)의 지경이 모두 가시밭이 되어서 공허한 곳으로 도피하는 자가 혹 때때로 이르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지난 갑오(甲午)년에 임금께서 친히 쓴 조서를 내리어 절의 주지(住持) 운미(雲美)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서쪽 사람들이 험고(險固)한 것을 믿고 우리에게 항거하여 변방 사람을 모아서 반역을 꾀하므로, 이에 원수를 명하여 성을 쳐서 토죄(討罪)하였는데 흉한 무리가 스스로 그물에 몸을 던질 뿐 아니라 우리 평민들도 화살과 돌에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간난(艱難)한 것을 구제하려 하니, 바라건대 그대는 나의 불쌍히 여기는 뜻을 생각하여 부처께 기도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주지 운미가 여러 종들과 함께 예전에 지나본 곳으로써 진(眞)을 서식(棲息)하고 법(法)을 강연(講演)하여 국가에 복리가 되게 할 만한 곳을 찾아다녔는데 그윽한 곳을 더듬고 좋은 곳을 가리어 이 절에 이르렀다. 측연(測然)히 흥복(興復)할 뜻이 있어 기계를 날카롭게 하고 재목과 기와를 수집하여 무술(戊戌)년 봄 3월에 시작하여 기해(己亥)년 11월에 준공하였으니, 모두 87일간이었다. 임금이 의정왕후(懿靜王后)의 명복을 비는 곳으로 만들어 밭 40경(頃)을 붙이고 또 내탕(內帑)의 재물로 벼 2천 석을 팔아들이어 학업을 권하는 것과 기름과 향의 비용에 충당하게 하고 고승(高僧) 지영(知英)을 명하여 주지(住持)하게 하였다. 슬프다! 석씨(釋氏)의 교가 가리고 몽매하여 거꾸로 놓여진 풍속으로 하여금 착한 데에 옮기어 죄를 멀리하고 순진한 데로 돌아가고 소박한 데로 돌아오게 하니, 실로 다스리는 도(道)에 도움이 있는 것이다. 저 서쪽 사람들이 성(城)을 바쳐 항복하여 피를 흘리지 않고 평정된 까닭과 그 공[陰功]과 묘한 힘이 대개 여기에 힘입음인지 어찌 알랴. 이제 이 용암사의 이루어짐에 있어서 역사가 너무 번거롭지 않고 제도가 지나치게 사치하지 않아서 앞사람의 기업을 변함이 없고 뒷사람의 보는 것을 폐함이 없었으니, 다만 능히 불사(佛事)를 크게 천양(闡揚)하기를 저렇듯 탁연(卓然)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주상(主上)께서 백성을 근심하고 폐단을 구제하는 뜻에 응부(應副)하기를 이렇듯 지극하게 한 것이다. 미사(美師)의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인데 명주(溟州) 사람이다. 젊었을 때에 깨끗하게 진세(塵世)에 뛰어날 뜻이 있어 치악산(雉岳山) 개선사(開善寺)의 윤공(胤公)의 강연 아래에 들어가 수업하여 넓은 학문과 높은 행실로 위로는 임금의 의지하고 공경하는 바가 되고 아래로는 배우는 자들의 쳐다보고 우러르는 바가 되었으니, 비록 도안(道安)의 예장(豫章) 기재(杞梓)와 규기(窺基)의 유단(流檀) 천혜(闡蕙)라도 어찌 여기에 더하리오.” 하였다.
* 승장사(勝長寺) 장천부곡(長川部曲)에 있다.
○ 김상직(金尙直)의 중창기(重創記)에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이 중국 조정의 명령을 받아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을 명하여 동으로 왜구(倭寇)를 정벌하는데, 왕이 김해부(金海府)에 거둥하여 전송하고 돌아올 때 이 절에 유숙하고 드디어 천태종(天台宗)에 붙이었다.” 하였다.
* 용담사(龍潭寺) 장천부곡(長部曲)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빈 골짜기에는 바람이 오히려 소리치고, 찬 시내에는 물이 절로 내려 씻는다. 기르는 것은 지둔(支遁)의 말을 어여삐 여기고, 주문은 섭공(葉公)의 용을 내린다. 작은 채전(菜田)에는 신령스런 삽주[朮]에 물을 주고, 그윽한 뜰은 어린 소나무를 보호한다. 한 소리 맑은 밤 경쇠소리, 달을 짝지어 먼 봉우리에 떨어진다.” 하였다. ○ 고려 김양경(金良鏡)의 시에,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여 푸른 산비탈로 들어가고, 위태한 다락은 우뚝하여 푸른 무지개를 굽어본다. 새벽이 서늘한데 누런 송아지는 평평한 들로 돌아가고, 한낮이 되니 그윽한 새는 얕은 시내에서 목욕한다. 집에 가득한 담쟁이덩굴은 벽에 얽히어 컴컴하고, 창에 늘어진 버들은 처마를 눌러서 나직하다. 문 밖의 진흙에 깊이 사슴의 발자국 박혀 있는 것은 땅이 궁벽하여 이르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 미륵암(彌勒庵) 사불산(四佛山)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에, “대원(大院)의 고개가 지맥(支脈)이 갈리어 동남쪽으로 둘러 갈라져 보주(甫州)ㆍ산양(山陽) 두 고을 경계에 이르러 불룩하게 높이 일어났는데, 산정(山頂)에 큰 돌이 있어 뿌리가 떠서 서있고 사면에 모두 부처의 몸을 새겼으니 그 때문에 사불산(四佛山)이라 이름하였다. 온 나라의 부처를 신봉하는 자들이 가장 이야기하기 좋아하고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봉우리는 법왕이고 그 남쪽 언덕 돌에 자씨(慈氏 미륵보살(彌勒菩薩))의 얼굴을 새기고 옆에 작은 절을 지었는데 미륵암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때에 창건(創建)한 것이고 암자 북쪽에 묘한 봉우리가 있어 멀리 사불(四佛)을 향하여 우뚝 서 있는데 신라 왕이 사불을 바라보고 예를 한 곳이라 한다. 세대가 멀어서 집이 무너져 풀숲이 되어버렸다. 전 판사(判事) 백진(白瑨) 공이 대대로 영해(寧海)에 살아오는데 계해(癸亥)년 봄에 왜구(倭寇)를 피하여 어머니를 엎고 자빠지고 미끄러지며 간신히 걸어서 두어 고을을 거쳐 이 산 아래로 왔다. 이듬해에 어머니가 병으로 죽으매 상사를 영위하고 복을 추원(追願)하여 있는 힘을 다하였다. 하루는 울며 산 중에게 고하기를, ‘내가 부모를 위해 정려(精廬)를 영건하여 명복을 빌어서 조금이라도 망극한 슬픔을 펴려 하는데 큰 상처의 아픔이 깊으므로 더욱 애통(哀痛)하다.’ 하였다. 중이 말하기를 ‘새 절을 창립하는 것은 나라에서 정한 법금(法禁)이 있다. 산에 미륵암이 있는데 신라 때 옛터가 폐하여 부흥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일으켜서 새롭게 하지 않는가.’ 하였다. 공이 눈물을 거두고 말하기를, ‘좋다’ 하고, 곧 가서 살펴보니, 샘과 구렁이 맑고 깊으며 지경과 땅이 시원하고 깨끗하며, 미륵보살[慈氏]의 상(像)이 완연하고 남은 터가 그대로 있었다. 마음에 맞는지라 곧 즐겁게 나가서 거칠고 가린 것을 베어내고, 자갈과 흙을 밀어버리고 집 칸을 세워 이중 처마를 붙이니, 당도 있고 부엌도 있고 반질반질하고 또 간단하며, 붉은 마룻대와 푸른 연목이 높고 크고 빛나고 아름다워 볼 만한데, 전말(顚末)을 기록하여 벽에 게시하고자 하나 아직 못하였다. 이때에 내가 일을 말하다가 성대(省臺)에게 거슬려서 영해(寧海)에 귀양와 있었다. 백공이 이미 고향에 돌아와서 두 번이나 청하므로 내가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그 말을 써서 기록한다. 아, 세상 풍속이 부모를 섬김에 있어 겨우 상사와 장사를 영위할 뿐인데, 백공은 능히 예제(禮制)를 다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왜구를 피하여 떠돌아다닌 나머지 절을 창건하고 불경을 인출(印出)하여 유구 무궁한 복리와 신종 추원(愼終追遠)의 효도를 도모하니 남보다 한 등수가 높다 하겠다.” 하였다.
0【사묘】
* 사직단(社稷壇) 주 서쪽에 있다.
*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 성황사(城隍祠) 천봉산(天峯山)에 있다.
* 여단(厲壇) 주 북쪽에 있다.
0【고적】
* 백화산(白華山) 옛날 석성(石城)이 있다. 둘레가 1천9백4척이고, 안에는 시내가 1개, 샘이 5개 있다. 지금은 폐하였다.
* 사벌국고성(沙伐國古城) 병풍산(屛風山) 아래에 있다.
성 옆에 높고 둥근 구릉(丘陵)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사벌국의 왕릉(王陵)’이라 한다. ○ 신라(新羅) 말년에 견훤(甄萱)의 아비 아자개(阿慈介)가 이 성에 응거하였다.
* 화창현(化昌縣)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지내미지현(知乃彌知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쳐 상주(尙州)의 영현(領縣)을 들었다.” 하였으나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 공성폐현(功城廢縣) 본래 신라의 대병부곡(大幷部曲)이다.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에 붙이었다. 주 남쪽 30리 에 있다.
* 영순폐현(永順廢縣) 본주(本州) 북면(北面) 임하촌(林下村)이다.
고려(高麗) 때에 촌 사람 태씨(太氏) 성을 가진 자가 도둑을 잡아 공이 있으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쳐 승격하여 현을 만들어서 그대로 붙이었다. 주 북쪽 35리에 있다.
* 청리폐현(靑里廢縣) 이(里)는 혹은 이(理)로 되었다. 본래 신라의 음리화현(音里火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청효(靑驍)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붙였다. 주 남쪽 20리에 있다.
* 무림부곡(茂林部曲) 주 북쪽 30리에 있다. 예전 무흥촌(茂興村)이다.
* 연산부곡(連山部曲) 낙동강 동쪽 5리에 있다. 소금 창고가 있다.
* 백원부곡(白原部曲) 주 남쪽 15리에 있다.
* 양녕부곡(壤寧部曲)ㆍ하해부곡(河海部曲) 모두 본주에 있다.
* 양보부곡(陽寶部曲) 산양현(山陽縣)에 있다.
* 관제부곡(寬濟部曲)ㆍ선은소(鐥銀所) 모두 화령현(化寧縣)에 있다.
* 가량부곡(加良部曲) 주 남쪽 15리에 있다.
* 보량부곡(保良部曲) 주 동쪽 20리에 있다.
* 평안부곡(平安部曲)ㆍ
* 평산부곡(平山部曲) 모두 공성현(功城縣)에 있다.
* 주선부곡(主善部曲)ㆍ
* 단곡부곡(丹谷部曲)ㆍ
* 생물부곡(生物部曲) 모두 단밀현(丹密縣)에 있다.
* 해상이소(海上伊所) 중모현(中牟縣)에 있다
0 밭(旱田)
元帳付八千八百四十七結七十五負五束內各樣免稅陳雜頉竝三千八十六結六十八負八束己卯時起五千七百六十一結六負七束
0 논(水田)
元帳付六千六百四十一結三十負內各樣免稅陳雜頉竝一千八百二十二結九十六負六束己卯時起四千八百十八結三十三負三束
0 조적(糶糴)
元會米八百五十七碩七斗七升八舍雜穀一千四百四十二碩六斗八升七舍賑色米七百九十四碩十三斗九合一舍雜穀一萬三千一百五十五碩八斗四升四舍常平廳米九百三十一碩四斗一升六合一舍雜穀三萬四千一百七十九碩四斗四升三合一舍私賑米一碩六斗八升八合三舍雜穀六千四百二十四碩八斗三升四合三舍別會米一斗七升六合雜穀一千二百碩六斗二升四合七舍十月開倉十二月封倉己卯條爲準
0 전세(田稅)
米二千三百四十九碩三斗一升六合太一千六百七十三碩十三斗一升六合二
月依定式作錢三月以陸路六日達于京納戶曹己卯條爲準
0 대동(大同)
作木三百同木錢參半三月收捧四月以陸路六日達于京納惠廳米一千七百八十九碩十斗四升三合九舍儲置本邑一從惠廳區劃多寡無常己卯條爲準
0 均稅
田稅條米三十四碩十三斗三升一合四舍二里太三十碩十一斗六升依定式作錢結錢五千六百九十二兩六戔三分船稅錢十一兩三月收捧四月上納選武木十同十月收捧同月以陸路六日達于京納均廳己卯條爲準
0 급료(俸廩)
衙祿位五十結米十四碩太四石公須位十五結米四碩太一碩五斗官需米五百十碩柴蒿炭雉 雞價每夫四兩式收捧自官貿用
0 軍兵
訓鍊都監砲保四百十三名軍餉保五名御營正軍二百九名資保二百二十三名官保六百人名禁衛正軍三百八十九名資保四百十六名官保人百四十四名兵曹騎兵一千二百七名步兵一千七百五十八名別騎兵十五名禁軍保一百七十六名袱直九名扈單隊保十六名京驛保七名內吹保七名樂生三名保二十名樂工保十八名吏曹留曹書吏保一百七十八名工曹匠人二百二十二名典設司諸員四十七名牙兵馬軍保十名塘報保五名陸軍四名保四名半水軍二百十一名保一百七名武學五十名射夫九十二名差備軍三名別隊馬軍一百十八名保二百三十六名親兵二十八名保二十八名束伍馬軍二百四十二名保四百十二名步軍二千八百五十八名保八名烽軍三百名
* 성주(星州) 우도. 新羅古都. 8일.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7리이다
異名:본피(本彼)ㆍ성산(星山)ㆍ가야(伽倻)ㆍ신안(新安)ㆍ벽진(碧珍)ㆍ광평(廣平)ㆍ대주(岱州)ㆍ경산(京山)ㆍ흥안(興安).
* 성주목사겸성주진병마첨절제사. 문관, 음관. 3품.
* 성주판관, 종5품
* 성주교수. 종6품
좌수 1인. 별감 3인. 군관 70인. 인리 85인. 지인 47인. 사령 35인
군뢰 30명. 관노 37구. 관비 20구.
0 호수 및 인구
영조 을묘년(1735년 영조11)
호수: 11,970호. 인구: 56.828명. 남자: 25,524명, 여자: 31.304명.
동쪽으로 대구부(大丘府) 경계까지 26리,
칠곡 경계까지 24리,
의흥현(義興縣) 경계까지 1백 2리,
인동현(仁同縣) 경계까지 20리,
남쪽으로 고령현(高靈縣) 경계까지 49리,
현풍현(玄風縣) 경계까지 54리,
서쪽으로 지례현(知禮縣) 경계까지 62리,
북쪽으로 개령현(開寧縣) 경계까지 38리,
동쪽으로 대구 감영까지 70리 1일정
남쪽으로 진주 병영까지 2백20리 3일정
고성 통제영까지 3백30리 4일정
0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 본피현(本彼縣)인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성산가야(星山伽倻)로서 여섯 가야 중의 하나로 삼았으니, 의심하건대 신라가 빼앗아서 본피현을 두었나보다. 김해부(金海府) 산천 아래에 자세히 보인다. 경덕왕(景德王)이 신안(新安)으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에 붙였다가 뒤에 벽진군(碧珍郡)으로 고쳤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경산부(京山府)로, 경종(景宗)이 강등시켜 광평군(廣平郡)으로, 성종(成宗)이 대주도단련사(岱州都團練使)로, 현종(顯宗)이 단련사를 폐지하여 다시 경산부로, 충렬왕(忠烈王)이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목(牧)으로 만들었고, 충선왕(忠宣王)이 강등시켜 경산부로 만들었는데, 본조(本朝)에서 인습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어태(御胎)를 부(府)의 조곡산(祖谷山)에 안치하고 승격시켜 목으로 만들었다.
0【속현】
* 가리현(加利縣) 주 남쪽 59리에 있다. 본래 신라 일리현(一利縣)인데 경덕왕이 성산군(星山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에 붙였다. 별호는 기성(岐城)이다.
* 팔거현(八莒縣) 주 동쪽 72리에 있다. 본래 신라 팔거현(八居縣)인데, 일설에는 ‘인리(仁里)’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팔리(八里)로 이름을 고쳐 수창군(壽昌郡)에 붙였다. 고려(高麗)에서 다시 팔거(八居)로 일컬었는데, 뒤에 ‘거(居)’가 변하여 ‘거(莒)’가 되었다. 현종(顯宗) 때에 와서 붙였다. 별호는 칠곡(七谷)이다.
* 화원현(花園縣) 주 동쪽 71리에 있다. 본래 신라 설화현(舌火縣)인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수창군(壽昌郡)에 붙였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붙였고, 뒤에 대구(大丘)에 옮겨 붙였다가 뒤에 다시 붙였다. 별호는 금성(錦城)이다.
0【방면】
주내(州內)ㆍ강남(舡南) 본래 강남(舡南)의 부곡(部曲)인데, 동쪽으로 20리다. 화곡(禾谷) 동쪽으로 20리다. 오도(吾道) 동쪽으로 30리다. 대동(大同) 동쪽으로 35리다. 용산(龍山) 동남쪽으로 10리다. 산남(山南) 동남쪽으로 15리다. 초곡(草谷) 동남쪽으로 20리다. 두의(豆衣) 동남쪽으로 30리다. 조곡(祖谷)ㆍ다질(茶叱) 모두 동남쪽으로 40리다. 벌지(伐旨) 동남쪽으로 60리다. 남산(南山) 남쪽으로 10리다. 지사(知士) 남쪽으로 15리다. 성법산(省法山) 남쪽으로 20리다. 운라(雲羅) 남쪽으로 30리다. 소야(所也)ㆍ흑수(黑水) 남쪽으로 50리다. 대척(大尺) 남쪽으로 40리다. 사등(沙等) 서남쪽으로 15리다. 대리(大里) 서남쪽으로 30리다. 소건(所件) 서남쪽으로 35리다. 오차(吾次) 서남쪽으로 60리다. 운곡(雲谷)ㆍ본아(本牙) 모두 40리다. 대가곡(大家谷) 서쪽으로 10리다. 명암(明巖) 서쪽으로 30리다. 덕곡(德谷) 남쪽으로 30리다. 금물(今勿) 서쪽으로 40리다. 증산(甑山) 서쪽으로 50리다. 초전(草田) 서북쪽으로 30리다. 신곡(薪谷) 본래 신곡의 부곡인데 서북쪽으로 40리다. 북산(北山) 북쪽으로 10리다. 당소(唐所) 북쪽으로 30리다. 비호석(非乎石) 북쪽으로 20리다. 이물(爾物) 서쪽으로 50리다. 노장곡(蘆長谷)ㆍ유동(柳洞) 동쪽으로 10리다. ○ 위곡(葦谷)의 부곡인데 동쪽으로 30리다.
0 坊里
龍山里面距官門三里山南面距官門十里吾刀旨面距官門十五里船南面距官門二十里禾谷面距官門二十里大洞面距官門三十里伐知面距官門四十里茶叱面距官門四十里蘆長谷面距官門五十里柳等谷面距官門十里今牙面距官門五里大家谷面距官門十里雲谷面距官門二十里明巖面距官門十五里沙等谷面距官門十里大里面距官門二十五里所伴面距官門三十里今巴谷面
距官門二十五里今勿法面距官門二十里厼勿亦面距官門三十里甑山面距官門七十里薪谷面距官門五十里南山里面距官門六里草谷面距官門十五里租谷面距官門二十里豆衣谷面距官門二十五里生法山面距官門三十里吾次亦面距官門五十里云羅山面距官門四十五里德谷面距官門五十里只士牙面距官門四十里黑水面距官門四十里入尺面距官門四十五里加縣內面距官門五十九里所也面距官門五十五里北山里面距官門七里唐所面距官門十五里非乎石面距官門二十里草田洞面距官門十七里酉谷面距官門二十五里
0 관청건물(公廨)
객사(客舍). 정청(正廳) 동서헌(東西軒) 사시헌(四時軒) 청민청(聽民堂) 회로당(會老堂) 군관청(軍官廳) 전결청(田結廳) 인리청(人吏廳) 교련청(敎鍊廳)
모두 성내에 있다. 장관청은 성 동문 밖에 있다.
열병헌(閱兵軒)은 성 남문 밖에 있다.
0 성씨
*본주(本州) 이(李)ㆍ배(裵)ㆍ여(呂)ㆍ백(白)ㆍ전(全)ㆍ차(車)ㆍ박(朴), 임(林) 개경(開京). 강(姜)ㆍ손(孫)ㆍ김(金)ㆍ조(趙) 모두 내성(來姓)이다.
*팔거(八莒) 도(都)ㆍ현(玄)ㆍ임(任)ㆍ전(田)ㆍ변(卞), 배(裵)ㆍ임(林) 모두 내성(來姓)이다.
*가리(加利) 윤(尹)ㆍ조(趙)ㆍ이(李)ㆍ홍(洪)ㆍ정(鄭)ㆍ김(金).
*화원(花園) 정(丁)ㆍ조(曺)ㆍ갈(葛)ㆍ서(徐)ㆍ석(石), 한(韓)ㆍ이(李)ㆍ백(白) 모두 내성(來姓)이다.
0【풍속】
풍속이 화려한 것을 숭상한다 《지리지(地理志)》에, “풍속이 화려한 것을 숭상하고 매와 개를 좋아한다.” 하였다. 여공(女功)을 잘한다. 관풍안(觀風案).
0【형승】
산천이 빼어나고 특이하다. 정인지(鄭麟趾)의 기(記). 연한 봉우리와 중첩한 병장(屛嶂). 긴 내와 평평한 숲 이숭인(李崇仁)의 몽송루기(夢松樓記). 도(道) 가운데에 있다. 땅이 요충(要衝)에 있다 모두 신숙주(申叔舟)의 기(記).
0【산천】
*인현산(印懸山) 주 북쪽 9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조곡산(祖谷山) 주 남쪽 35리에 있다. 태종(太宗)의 태를 봉안하였다.
*선석산(禪石山) 주 북쪽 28리에 있다. 세조(世祖)의 태를 봉안하였다.
*적산(積山) 주 서쪽 25리에 있다.
*비슬산(琵瑟山) 화원현(花園縣) 10리에 있다.
*성산(星山) 주 동쪽 8리에 있다.
*비지산(斐旨山) 주 서쪽 21리에 있다.
*공산(公山) 팔거현(八莒縣) 동북쪽 20리에 있다. 산의 동쪽은 영천(永川)ㆍ신녕(新寧)ㆍ하양(河陽), 남쪽은 대구(大丘), 북쪽은 의흥(義興), 서북쪽은 인동(仁同) 경계다.
*가야산(伽倻山) 주 서남쪽 48리에 있다. 또 합천(陜川)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가야산 천만 겹을 그림으로는 다하기 어려우리. 연기와 구름은 곳이 없어 뿌옇고, 소나무와 노송나무는 찬 데도 무성하다. 끊어진 석벽은 우뚝 서서 푸른 하늘을 떠받치고, 흐르는 샘은 곧장 쏟아져 흰 무지개를 끈다. 봄 아침에는 꽃을 꺾고, 가을에는 달을 구경하고, 여름에는 얼음을 마시고, 겨울에는 눈을 본다. 가야산의 사시를 뉘 있어 알리. 염공(廉公 안렴사(按廉使))이 일을 좋아하여 험한 산길을 만홀히 여긴다. 2년을 나쁜 진토(塵土)에서 노고할 때, 맑은 꿈 밤마다 하늘 남쪽에 달렸었네. 아름답다 가야산, 참으로 드물다. 하물며 성주(星州)는 나의 고향 선생의 초가집은 산 동쪽에 있고, 상인(上人 승려)의 연사(蓮社 절)는 산 가운데 있다. 시 읊고 설법하는 것, 두 가지 다 맑은 것이 짝 없으니, 언제나 손을 잡아 굶주리고 목마름을 위로하리.” 하였다. ○ 성주 경계에 진산이 되었고, 합군(陜郡) 동쪽에 형상을 뻗쳤다. 푸른 뿌리는 두터운 땅에 서리고, 푸른 빛은 갠 공중에 가득하다. 원숭이와 학은 여러 해 동안 이별하였는데 연기와 놀은 옛날과 같도다. 내가 와서 절정에 오르니 망부산(望夫山)이 제일 높다. ○ 산 돌이 험하고 높아 오르기 어려워, 나귀는 놓아두고 마음대로 지팡이를 짚는다. 구름이 열리니 한자(韓子)의 정성을 감동시켰고, 꽃이 떨어지니 유랑(劉郞)의 물색(物色)이 아득하다. 길고 짧은 등나무 가지는 옛길에 너우러지고, 높고 낮은 나뭇잎은 맑은 시내를 덮었다. 한종일 다녀도 얘기할 사람은 없고, 오직 그윽한 새만이 제 맘대로 운다.” 하였다.
수도산(修道山) 주 서쪽 85리에 있고, 지례(知禮)ㆍ거창(居昌) 두 고을 경계다. 적현(赤峴) 주 서쪽 52리 거창군 경계에 있다. 태자암(太子巖) 주 서쪽 12리에 있다. 둥근 돌이 삼층으로 쌓여 높이가 아홉 자이고, 원(圓)의 직경이 13척인데 매우 기괴하다. 가물 때에 비를 빌면 곧 응험이 있다. 태평촌(太平村) 팔거현(八莒縣) 서쪽 15리에 있다. ○ 이첨(李詹)의 시에, “누가 이 땅을 태평촌이라 일렀는가. 부역이 무거워 백성들이 반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두어 집이 있어 손을 재우는데, 솔 껍질을 먹으니 아마도 적송자(赤松子)의 후손인가보다.” 하였다.
*동안진(東安津) 주 동쪽 26리에 있고, 소야강(所耶江)의 하류다. ○ 채련(蔡璉)의 시에, “긴 물결은 출렁거리고 푸른 비늘(물고기)은 살쪘는데, 손을 익히 본 모래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지 않는다. 만리에 길들이기 어려운 것이 너 하나뿐 아니다. 흙먼지가 사람의 옷을 더럽혔다고 무시하지 말라.” 하였다.
*무계진(茂溪津) 주 남쪽 49리에 있고, 동안진(東安津) 하류이다. 소야강(所耶江) 주 동쪽 20리에 있고, 인동현(仁同縣) 칠진(漆津)의 하류다. 이름은 고도암진(高道巖津)이고, 배 열부(裵烈婦)가 순절(殉節)한 곳이다.
*마포천(馬舖川) 주 북쪽 11리에 있다. 근원이 대야원동(大也院洞)에서 나와서 고을 동남쪽 15리에 이르러 이천(伊川)과 합한다.
*가천(伽川) 주 서남쪽 47리에 있다. 근원이 가야산 동남쪽에서 고령현(高靈縣) 지경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천(伊川)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적산(積山)에서, 하나는 비지산(斐旨山)에서 나와서, 주 서쪽 5리에서 합하여 성을 안고 동으로 흘러 동안진(東安津)으로 들어간다. 방문중(房文仲)의 향교루(鄕校樓) 시에 말한, “뜰 밑의 이천(伊川)ㆍ사수(泗水)에 연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라지(紗羅池) 팔거현(八莒縣) 서쪽 20리에 있다.
*잉화포지(仍火浦池) 주 남쪽 5리에 있다.
*정동지(鼎洞池) 팔거현 동쪽 5리에 있다.
*동정지(東亭池) 주 동쪽 4리에 있다.
*여근내지(汝斤乃池) 주 동쪽 14리에 있다.
*박외지(泊畏池) 주 남쪽 24리에 있다.
*동만지(同萬池) 주 남쪽 4리에 있다.
*거류지(巨留池) 주 남쪽 5리에 있다.
*조시지(助是池) 주 북쪽 6리에 있다.
*대가곡지(大家谷池) 주 서쪽 15리에 있다.
*극지지(極只池) 주 북쪽 20리에 있다.
*죽지(竹池) 주 북쪽 12리에 있다.
*소이지(所伊池) 팔거현 북쪽에 있다.
*수향지(水向池) 팔거현 서쪽에 있다.
*효성지(曉星池) 화원현(花園縣) 동쪽에 있다.
0 토산품
은어[銀口魚]ㆍ송이[松蕈]ㆍ지치[紫草]ㆍ옻[漆]ㆍ꿀[蜂蜜]ㆍ사기그릇[磁器]ㆍ안식향(安息香)ㆍ잣[海松子].
0 성곽
읍성(邑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52척, 높이가 13척, 나각(羅閣)이 5백 52칸, 안에는 샘 7개 못 2개가 있다.
『신증』 정덕(正德) 경진(庚辰)에 돌성으로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4천 52척, 높이가 9척이다.
0 봉수
*성산 봉수(星山烽燧) 남쪽으로 가리현(加利縣) 이부로산(伊夫老山)에, 북쪽으로 각산(角山)에 응한다.
*각산 봉수(角山烽燧) 주 북쪽 20리에 있다. 북쪽으로 인동(仁同) 약목현(若木縣) 박집산(朴執山)에, 남쪽으로 성산(星山) 및 대구(大丘) 하빈현(河濱縣) 마천산(馬川山)에 응한다.
*말응덕산 봉수(末應德山烽燧) 가리현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 화원현(花園縣) 성산(城山)에, 남쪽으로 현풍현(玄風縣) 소산(所山)에 응한다.
*성산봉수(城山烽燧) 화원현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대구(大丘) 하빈현(河濱縣) 마천산(馬川山)에, 서쪽으로 말응덕산(末應德山)에 응한다.
*이부로산 봉수(伊夫老山烽燧) 가리현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 고령현(高靈縣) 망산(望山)에, 북으로 성산(星山)에 응한다.
0 궁실
실록각(實錄閣) 성안 객관(客館) 동북쪽에 있는데, 본조(本朝)의 실록을 간직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이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봉안(奉安)하는 시에, “헌원씨(軒轅氏)의 봉력(鳳曆)에 왕춘(王春)을 기록하였다. 구오(九五)의 용이 나니, 대인(大人)을 보았도다. 석실(石室)에 쇠를 잠가 실록을 간직하니, 멀리 활과 칼을 생각하니 마음이 배나 슬프다.” 하였다. 백화헌(百花軒) 곧 동헌(東軒)이다. ○ 신숙주(申叔舟)의 《중영기(重營記)》에, “고을에 관사(館舍)와 해우(廨宇)가 있는 것은 사신(使臣)을 높이고 빈객을 접대하자는 것이니, 고을의 수령이 된 자가 마땅히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고을이 비록 작고 땅이 궁벽지더라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고을이 크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곳이랴. 성주(星州)가 고을로 세워진 것은 신라(新羅) 초기부터 현(縣)에서 군(郡)으로, 군에서 부(府)로, 부에서 주(州)가 되어 지역을 잃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으니, 횟수를 지나온 것이 남방 고을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 또 속현(屬縣)이 셋이나 되어 땅이 크고 백성이 호강(豪强)하고, 고을의 치소(治所)가 도(道)의 중앙에 있어서 역마를 탄 사신이 번갈아 이르고 손과 나그네가 모여드는데, 관해(館廨)가 세월이 오래 되어서 빈객과 사신을 접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법이 엄하고 백성이 사나워서 고을을 지키는 자가 모두 역사(役事)를 일으키기를 어렵게 여겨 관해(館廨)가 허물어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고, 돌 한 개, 기와 한 장이라도 다시 수리하여 정리하지 않고 수수방관(垂手旁觀)하여 교체되기를 기다린다. 우리 동년(同年) 김유선(金有銑) 군이 목사가 된 지 돌이 못 되어 정치가 이루어지고 일이 간략해졌다 하여 탄식하기를, “성주가 남방의 큰 고을이고 땅이 요충(要衝)에 있는데, 관해가 이와 같아도 수령이 된 자가 뜻을 두지 않는 것이 옳은가. 법이 엄하더라도 법을 범하지 않으면 법을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며, 백성이 사납더라도 백성을 귀찮게 하지 않으면 백성에게 꺼릴 것이 무엇인가.” 하고, 이에 재목을 모으고 공장이를 명하여 먼저 정청(正廳)의 동헌을 짓되, 예전 제도를 인습하여 넓힌 지 두어 달이 못 되어 준공하였다. 모두 2칸인데, 앞에 횡랑(橫廊)이 있어 밝고 통창하고, 뜰 가에는 화단이 있어 여러 가지 꽃을 심었다. 그리하여 아전을 보내어 편지를 달려 기(記)를 청하였다. 내가 군이 의주(義州) 목사로 있을 때 눈여겨보았는데, 알고는 하지 않는 것이 없고, 부지런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의주라는 고을은 지경이 중국과 연하여 사신이 모이는 곳이요, 장사꾼이 모여드는 곳이어서 다스리기가 어렵기로 이름이 났는데, 군이 칼을 놀리는 것이 여유가 있었다. 우리 벗 김자호(金子灝) 공(公)이 사람에 대하여 허여(許與)하는 것이 적은데, 영남을 안찰(按察)하고 돌아왔기에 남쪽 고을의 다스림을 물으니, 군을 제일로 들면서 말하기를, “일을 다스리는 데에 부지런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과감하다.” 하였다. 자호씨의 말하는 것이 내가 전날 본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자호씨가 세상을 떠나서 다시 볼 수 없음을 매양 슬퍼하며, 그 말을 생각하니 더욱 군을 믿노라. 일 없을 때에도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법을 범하지 않는 자가 오히려 적거늘, 큰 공사를 일으켜[工作] 남이 감히 하지 못할 것을 하면서도 능히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내력이 없겠는가.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은 인(仁)이요, 법을 범하지 않는 것은 의(義)요, 게으르지 않은 것은 부지런한 것이요, 과감하게 하는 것은 민첩한 것이다. 인과 의는 덕(德)의 부고[府]요 몸을 보전하는 것이니, 이것으로 스스로 처하고 부지런함과 민첩함으로써 행하면 무엇인들 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하물며 이 동헌이랴! 김군은 자호씨의 알아줌을 저버리지 말고, 내가 군을 믿는 것에 맞출지어다. 숙주(叔舟)는 공명(功名)으로 세상을 속인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벼슬을 그만두고 남방으로 돌아가려 한다. 나의 시골이 성주와 접경하였으니, 만일 한 번 빈객의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면 동헌의 좋은 경치를 그대를 위하여 시로 지으리라.” 하였다.
○ 고려(高麗) 이조년(李兆年)의 시에, “부탁하노니, 꽃을 심는 것을 다시 더하지 말라. 수효가 백에 차면 되지. 더할 필요는 없다. 매화와 국화의 맑은 표격(標格) 이외에, 잡되게 붉은 것들이 많은 것은 부질없지.” 하였다. ○ 고려 왕강(王康)의 시에, “세상일 시끄러움 날마다 더해지는데, 정화(菁華)는 그럭저럭 눈앞에서 지나간다. 한 헌(軒)의 꽃 피고 지는 것 흥미없지만, 오히려 맑은 읊조림이 늘그막에 많음을 기뻐한다.” 하였다. ○ 남재(南在)의 시에, “만가지 일이 해마다 귀밑의 눈(雪)만 더한다. 청춘 시절이 마치 망아지가 틈을 지나는 것 같구나. 백화헌(百花軒) 위에 거듭 노는 날에, 금정(金井) 가을 오동(梧桐)이 많은 생각을 자아내리.” 하였다. 흥민각(興民閣) 객관 남쪽에 있다. 좌우에 홍련(紅蓮)ㆍ백련(白蓮) 두 당(堂)이 있고, 모두 연못이 있다. 목사 민영견(閔永肩)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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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풍루(臨風樓) 객관 북쪽에 있다. ○ 정인지(鄭麟趾)의 기(記)에, “성주 고을 생긴 것이 산천이 수려 기이하고, 인물이 번화하여 상주(尙州)ㆍ진주(晉州)ㆍ경주(慶州)ㆍ복주(福州)와 더불어 남방에서 서로 상하를 다툰다. 그 때문에 비록 한 지경의 우두머리는 되지 못하나, 특별히 목(牧)으로 일컬은 것이다. 내가 옛날 벼슬하여 돌아다닐 때에 두세 번 이르렀는데, 한없는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고 고운 땅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은 객관 동쪽에 주(州)의 청사가 바짝 닿아 담을 연하여서, 구경하고 바라보는 데 장애가 있었다. 좌우들에게 물어보니 지은 지가 이미 오래되어서 연월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헐면 고을 사람들에게 해로움이 닥칠까 백여 년을 지내오면서 고치지를 못한다.” 하였다. 성주는 큰 고을이어서 국가에서는 반드시 진신(搢紳) 가운데의 영준(英俊)한 사람을 뽑아서 목사로 보내니, 이 선발에 응하는 사람은 참으로 강명(剛明) 준걸한 인재가 아니면 칼날이 무디어져서 그 극무(劇務)를 이기지 못하고 명예는 곧 떨어진다. 경태(景泰) 2년 신미(辛未)에 이후(李侯)가 이 고을에 두번째 목사로 나왔는데, 닭을 베는 재능이 있어 폐단되는 것은 제거하고, 이익되는 일은 일으켜서 명성과 공적이 멀리 알려졌다. 드디어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주(州)의 청사를 빈땅에 넓히고 새 다락을 일으키는데, 재목은 폐사(廢寺)를 뜯어오고, 힘은 관청의 심부름하는 한가한 군사들을 이용하며, 기와는 새로 굽지 않고, 돌은 애써서 치지 않게 하여 잠깐 동안에 이루어졌다. 이내 단청(丹靑)을 칠하니 화려하고 높은 것이 꿩이 나는 것 같고, 새가 날개 버린 것 같아서 우뚝하게 고을의 장관(壯觀)이 되어 비로소 영남루(嶺南樓)ㆍ촉석루(矗石樓)와 아름다움을 다투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 한 가지 작은 일로도 후(侯)의 지혜와 용단이 전 사람보다 훨씬 나은 것을 볼 수 있다. 을해(乙亥)년 봄에 후가 전(箋)을 받들고 서울에 와서 본말을 갖추어 말하고 또 이름과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객관과 주(州)의 청사가 서로 붙어 있는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이다. 예전에 막혔던 것이 지금은 통하고, 예전에 좁던 것이 지금은 통창하여졌으니, 전에는 어찌 그리도 구애되었고 뒤에는 어찌 그리도 통창하게 되었는가. 열자(列子)의 냉연(冷然)한 것과 초왕(楚王)의 쾌재(快哉)의 당함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이름을 임풍(臨風)이라 하라. 관리가 정무에 분망하다가 막히고 답답한 것을 소창하고 정신을 상쾌하게 하여, 영귀(詠歸)의 흥을 발하는 것도 반드시 여기에서 얻을 것이요, 묵객(墨客)이 시를 읊조리어 꽃과 달을 희롱하고 정회를 펴서 호탕(浩蕩)한 기운을 붙이는 것도 또한 여기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하물며 주인이 술을 내고, 좋은 손이 자리에 앉아 눈을 천리까지 바라볼 수 있어 만가지 경치를 거두어 들이고 젓대[笙]와 피리가 어우러지고 주고받는 술잔이 서로 섞이어 노래 소리는 바람을 쫓아 날고 춤추는 소매는 바람에 나부끼어 들면, 어찌 한 번 조이고[一張] 한 번 늦추는[一弛] 시간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하건대 강산과 풍월이 그 전에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산만하여 통속이 없다가 지금 이 한 다락을 세우매 모두 궤석(几席) 아래에 집중되었으니, 그런 후에야 풍경에 부끄러움이 없고 후(侯)의 공이 천만 배로 드러날 것이다. 이것을 어찌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증』 강혼(姜渾)의 시에, “비 뒤에 강물이 불어서 노[篙]가 빠져서 오는데, 기둥에 기대어 물결을 보니 장하기도 하다. 첩첩한 물결은 푸른 풀 물갓을 완전히 쌌고, 연이은 봉우리의 반은 흰 구름 무더기에 들어갔다. 짧은 짐대[棹]를 끌고 고깃배에 오르고 싶기도 하고, 긴 낚싯대를 잡아 낚시터에 오르고도 싶다. 10년 동안 강해(江海)의 뜻이 오늘 아침에 흥이 나서 술 석잔 마시네.” ○ “시험삼아 아름다운 시구(詩句)를 읊조리어 하늘이 아끼는[天慳] 것을 발로하니, 마침 다락 가운데에 부서(簿書 공무 처리) 한가함을 만났도다. 붉은 제비가 번갈아 나는데 바람은 버들을 스치고, 푸른 개구리가 어지럽게 우니 비가 산에 어둡다. 일생 동안 훼방을 받으니 몸에 병이 많고, 반년을 달려 다니니 귀밑이 얼룩지려 한다. 황각(黃閣 정승의 집) 친구의 편지가 끊어졌으니, 객의 형색이 쓸쓸하게 시골에 머물러 있도다.” ○ “구름 사다리가 높이 하늘에 기대었는데, 달 밝을 때 다락에 오르니 젊은 나이가 아니로세. 산수의 굴(窟)에서 길이 읊조릴 흥이 있고, 비단 자리에서 한 번 취할 마음도 없네. 아침 정원에는 실 같은 비요, 저문 날 촌락에는 담담한 연기로다. 청천(晴天) 방초(芳草)의 구(句)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부지런히 시를 써두니, 당 나라 시인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 용(龍)이 게으름에서 일어나 기이한 공을 자랑하노라고 여러 날 동안 침침한 구름이 하늘을 막았네. 평지에는 넉넉히 석자의 물결이 더하였고 긴 강에는 누가 반 돛의 바람을 빌릴까. 누대(樓臺)는 꾀꼬리와 꽃 속에 은은히 보이고 염막(簾幕)은 연기와 안개 가운데에 흐릿하도다. 사모(四牡)로 상재(桑梓)의 고을을 물으니, “고향을 생각하는 왕찬(王粲)은 나와 같기 어렵다.” 하였다.
*청운루(靑雲樓) 성 동문 안에 있다. ○ 고려(高麗) 안유(安裕)의 시에, “초여름에 절월(節鉞)을 나눠 받아 삼복(三伏) 동안을 바닷가 치원대(致遠臺)에서 읊조리며 지냈다. 역마를 탄 사자(使者)가 번개처럼 달리어 비밀 명령을 전하니, 과거(科擧)에 어진 재주를 뽑으라고 불같이 독촉한다. 성산(星山)의 급한 장마 물을 뗏목으로 건너고, 월굴(月窟)의 맑은 바람은 계수나무 기르는 것을 재촉한다. 미리 상상하노니, 글을 아뢰고 경사를 여는 자리에 봉의 피리와 단판(檀板)이 천 무더기이리.” 하였다. ○ 임춘(林椿)이 잠깐 이 고을에 놀러 왔는데 고을 원이 이름난 기생을 시켜 모시고 자게 하였더니, 밤이 되자 도망하여 돌아갔다가 이튿날에 연석(宴席)으로 바로 가서 시를 짓기를, “홍장(紅粧) 미인이 새벽을 기다려 금전(金鈿)을 붙이는 것은 재촉하는 부름을 입고 비단 자리에 나온 때문이지. 장관(長官)의 엄한 호령도 두려워하지 않고, 공연히 나그네의 나쁜 인연(因緣) 나무라네. 다락에 올라 퉁소 부는 짝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달[月]로 달아나서 약을 훔치는 신선이 되었네. 청운(靑雲)의 어진 학사(學士)에게 말을 전하노니, 어진 마음으로 포편(蒲鞭)을 쓰지 말게나.” 하였다. ○ 박효수(朴孝脩)의 시에, “누(樓) 아래 사는 사람들의 우스개 말 시끄럽고, 다리 밑 흐르는 물에 버들 그늘이 짙구나. 최호(崔顥)의 방초(芳草)를 쓸 수 없는 것이 한이다. 누가 등왕각(騰王閣)을 위하여 낙하(落霞)를 읊으리. 새벽에 산 비는 대순을 구워 먹는[燒筍] 흥을 재촉하고, 들바람은 모 심는 노래를 보낸다. 억지로 졸한 글귀를 써 두니 참으로 운치로구나. 벽에 가득히 용처럼 날치는 취한 붓글씨가 비껴 있다.” 하였다.
*몽송루(夢松樓) 옛터가 성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중수하여 정자를 만들었다. ○ 이숭인(李崇仁)의 누기(樓記)에, “홍무 기원(洪武紀元) 8년에 의성(義城) 정후(丁侯)가 선발되어 경산(京山 성주)을 다스리는데, 부임한 뒤에 정사가 잘 되고 풍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즐겁게 여기었다. 그리하여 읍내 북쪽에 다락을 짓는데 재목을 베고 기와를 굽는 것을 농사철 아닌 때를 맞추어 하고, 공장이는 노는 사람을 부리었다. 다락의 구도는 동마루와 처마 끝을 높게 하여 그 바라보는 것을 넉넉하게 하고, 단청을 얇게 하여 검소한 것을 표하였다. 준공이 되자 여러 노선생들을 초청하여 술을 내어 낙성(落成)을 하고 또 이름 지을 것을 생각하는데, 술이 반쯤 되자 후(侯)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다락이 이루어졌으니 이름을 지어달라.” 하였다. 노선생 제공(諸公)들이 다락은 후가 지은 것이므로 몽송(夢松) 두 글자를 들어서 편액(扁額)하였으니, 대개 옛 사람의 사업과 명위(名位)를 후에게 바란 것이었다. 후가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여러 선생이 다락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대는 기(記)를 지으라.” 하였다. 내가 사양하지 못하여 말하기를, “무릇 놀고 구경하는 누대(樓臺)를 설치한 것은 그 낙(樂)을 붙이자는 것인데, 낙(樂)은 형상이 없으니 반드시 저기에 붙인 뒤에야 형상되는 것이다. 소위 낙이라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얻는 것인데, 그 즐거운 것을 미루어 넓히면 백성은 내 동포 형제이고, 물(物)과 내 무리[與]가 되어서 훈훈[和]한 기운과 무르녹은 은혜의 진액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을 것이니, 한갓 저 놀고 구경하는 것에 힘쓰는 자의 즐거움이란 것이 너무 좁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남의 관장(官長)이 된 자는 그 즐거워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지금 후가 이 다락에 오르면 다른 봉우리와 첩첩한 멧부리, 긴 내와 질펀한 숲이 연기와 구름 아득하고 흐릿한 사이를 숨었다 나타났다, 나왔다 들어갔다 하여 바라보기는 하여도 끌어올 수는 없던 것이 궤와 책상에 있는 것같이 되었다. 나무꾼은 숲에서 노래하고, 농사꾼은 들에서 노래하고, 길 가던 나그네가 그늘에서 쉬는 것, 소와 말이 흩어져 있는 것, 새들이 날아다니는 것에 이르기까지 물(物)이 모두 제 낙을 낙으로 여기고, 후(侯)가 물과 함께 하는 것도 또한 한 번 부앙(俯仰)하는 사이에 유쾌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가 여기에 이른 것은 단묵(丹墨) 부서(簿書) 밖에 있는 것이 있으리라. 훗날 후가 순리 명관의 으뜸으로서 재상이 된다면 제공들이 다락의 이름을 지은 것이 더욱 징험이 될 것이다. 나는 원래 후의 정치가 착한 것을 좋아하지만, 이번의 일이 물(物)과 함께 즐기는 뜻이 있기 때문에 기(記)를 짓고 굳이 사양하지 않노라. 혹 말하기를, “《춘추(春秋)》에 공사(工事) 일으킴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쓴 것은 칭찬하지 않는 뜻이다. 그대의 기(記)는 어디에 속하는가. 전(傳)에, ‘때는 굴(屈)한데 일은 지나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나의 기(記)가 춘추의 필법에 있어서는 일은 같으나, 아름답고 악한 것이 다르다는 뜻이다.” 하였다. 동정(東亭) 주 동쪽 5리에 있다. 못 위에 돌기둥을 세워서 정자를 지었다.
『신증』 *남정(南亭) 주 남쪽 1리에 있다. 김우(金祐)가 지었다. ○ 황필(黃㻶)의 기(記)에, “성주가 영남 상류(上流)에 있어 호구의 번성한 것과 송사의 번다한 것과 빈객의 모이는 것이 한 도(道)의 제일이니, 참으로 통달하고 민첩한 인재가 아니면 반근착절(盤根錯節)에 시험하여 그 효용(效用)을 보기 어렵다. 정축(丁丑)년 가을에 김우(金祐)가 성주 목사로서 일을 본 지 1년 만에, 정사가 간략하여지고 교화가 행하고, 나그네가 그 길에 다니고자 하며 쇠한 것이 일어나고 묵은 것이 새로워졌다. 고을에 전부터 토성(土城)이 있는데 치첩(雉堞)이 기울어 무너졌고, 나각(羅閣)이 모두 백여 칸인데, 모두 촌 백성을 시켜 보존하고 지키게 하니,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기었다. 김후가 감사 김극성(金克成) 공(公)에게 보고하고 조정에 아뢰고는 경진(庚辰)년 겨울 10월에 일을 시작하였다. 역사가 한 달이 넘지 않아서 성이 이루어졌다. 높이는 선 것과 같고 길이는 끄는 것 같아 천연(天然)으로 세워진 것 같으니, 보장(保障 군사상(軍事上) 방어(防禦))의 웅대한 것이 으뜸이었다. 성의 남쪽 모퉁이를 보니 빈 땅이 있는데, 오랫동안 풀이 우거진 언덕이었다. 올라서서 바라보니 냇물이 삼면에 둘러 있고, 봉만이 사면에서 읍(揖)하는 것 같고, 푸른 눈썹 같은 공산(公山)과 연기와 구름이 낀 가야산(伽倻山)과 창ㆍ칼 같은 금오산(金烏山)을 궤안(几案) 사이에 서로 마주보게 되어 있었다. 생각건대 당시의 산천과 초목이 최고운(崔孤雲)의 해타(咳唾)를 겪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요, 여리(閭里)와 향당(鄕黨)이 길야은(吉冶隱)의 시서(詩書)의 유풍(遺風)에 흥기됨이 있었을 것이다. 개천과 두렁이 서로 얽히고, 벼와 곡식이 들에 가득하며 봄에는 가는[耕] 것을 살피고 여름에는 일을 권하고, 가을에는 거두는 것을 살피는 일을 여기에 앉아서 다 할 수 있다. 후(侯)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여기에 정자를 지을 수 있다.” 하고, 판관(判官) 박주형(朴冑亨) 군과 의논하여 곧 그 땅을 다스려 평평하게 하고 정자 3칸을 지었는데, 제도가 매우 한가롭고 통창하여 손의 자리를 펴고 노래와 춤을 벌이기에 여유가 있었다. 또 부엌 몇 칸을 세우고 측간[厠]과 담을 모두 갖추었다. 재목은 폐사(廢寺)의 것을 취하고 기와는 나각(羅閣)의 묵은 것을 쓰고, 공장이는 잘하는 솜씨에 맡겨 백성에게 빌리지 아니하여 두어 달이 못 되어 정자가 새롭게 되었으니, 그 땅의 웅장함과 경개의 절승함이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와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와 더불어 백중(伯仲)을 다투게 되었다. 아, 어찌 그리 신기한가. 고을에 예전에 동ㆍ북 두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남정(南亭)으로 이름 지었다. 정자가 이루어진 뒤에 내가 곤남(昆南)에서 선산(善山)으로 향하는데 이 고을로 지나게 되었다. 후가 나를 정자 위에 앉혀 술을 권하고 기(記)를 부탁하였다. 내가 거칠고 졸한 글로 정자의 벽을 더럽힐 수는 없지마는 생각하건대, 후가 돌아가신 나의 맏형과 동갑이기 때문에 의(義)가 형제의 분(分)이 있으므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토지의 성쇠와 물리(物理)의 성훼(成毁)는 운수가 그 사이에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고을이 성립된 것이 몇 천 년 전인지 알지 못하고, 고을의 목사가 된 자가 전후에 몇 사람인지 알지 못하며,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고 알아도 성취하지 못한 자가 또한 있어서 반드시 우리 김후를 기다렸으니, 이것은 성주의 토지ㆍ성곽ㆍ정관(亭館)ㆍ문물(文物)이 김후를 만나서 한 번 재조(再造)된 것이다. 한(漢) 나라의 공수(龔遂) 황패(黃霸)의 덕을 표창하는 것을 지금에도 바랄 수 있거니와 다른 날 순리(循吏)의 전(傳)을 쓰는 자가 이 사람을 빼고 누구를 쓸 것인가. 이것이 참으로 쓸 만한 것이다. 후의 자는 길부(吉夫)요, 광산(光山) 사람인데, 젊어서 성균관에서 영준(英俊)들과 교유(交遊)하였고, 수령이 되어 가는 곳마다 치적(治績)이 모두 제1이었고, 뒤에 큰 고을 충주(忠州)ㆍ양주(楊州)의 목사가 되었을 때에도 혁혁한 명성 때문에 사람들이 잊지 못한다.” 하였다. 향사당(鄕射堂) 곧 용흥폐사(龍興廢寺)다.
0 학교
향교(鄕校) 주 북쪽 2리에 있다.
문묘(文廟)가 모두 흙으로 만든 상(像)인데,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처음에 향교의 종이 개성(開城) 대성전(大成殿)에 가서 한 번 보고 돌아와서 똑같이 소상(塑像)을 만들었다.” 하였다. ○ 허종항(許從恒)의 시에, “묘전(廟殿)이 높직하여 학교를 누르고 있다. 남으로 향한 초상이 몇 가을을 지냈는고. 은근히 뜰 앞의 은행나무에게 묻노니, 누가 안자(顔子)ㆍ증자(曾子)이고, 누가 자공(子貢)ㆍ자로(子路)인가.” 하였다.
0 역원
*답계역(踏溪驛) 주 북쪽 10리에 있다.
*안언역(安偃驛) 주 남쪽 28리에 있다.
*무계역(茂溪驛) 무계진(茂溪津) 동쪽에 있다.
*설화역(舌火驛) 화원현(花園縣) 서쪽 5리에 있다.
*고평역(高平驛) 팔거현(八莒縣) 서쪽 5리에 있다.
*인화원(仁化院) 주 동쪽 8리에 있다.
*사원(蛇院) 주 남쪽 34리에 있다.
*동안원(東安院) 동안진(東安津) 언덕에 있다.
*공배원(公排院) 주 동쪽 25리에 있다.
*이동원(李同院) 주 남쪽 42리에 있다.
*약보원(若寶院) 주 북쪽 2리에 있다.
*광대원(廣大院) 주 서쪽 20리에 있다.
*인원(引院) 화원현(花園縣) 남쪽 20리에 있다.
*대야원(大也院) 주 북쪽 29리에 있다.
*봉서원(鳳棲院) 팔거현 북쪽 15리에 있다.
*숭유원(崇儒院) 팔거현 북쪽에 있다. 예전 이름은 독유(獨儒)인데, 관찰사 손순효(孫舜孝)가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원(院)에 다락이 있다. 다른 이름은 척이(斥異)다.
*유원(柳院) 팔거현 남쪽 5리에 있다.
*작원(鵲院) 팔거현 남쪽 10리에 있다.
*흥왕원(興王院) 화원현 서쪽 1리에 있다.
*사읍제원(沙邑梯院) 가리현(加利縣) 동쪽에 있다.
*다품원(多品院) 주 북쪽 11리에 있다.
*월항원(月恒院) 주 북쪽 18리에 있다.
*퇴계원(退界院) 주 서쪽 25리에 있다.
*관음원(觀音院) 주 남쪽 22리에 있다.
*통신원(通信院) 주 동쪽 30리에 있다.
0 창고
*화원창(花園倉) 예전에는 인흥사(仁興寺)를 빌려서 본현(本縣)의 군수(軍需) 미곡을 저장하였는데, 세조(世祖) 때에 현 읍내 남쪽에 따로 세웠다. 왜국 사신이 가지고 오는 동(銅)ㆍ철(鐵)ㆍ소목(蘇木)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여기에 저장하여, 지출하고 사용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0 사찰
*용흥사(龍興寺) 고을 성북 문 밖에 있다. 대장당(大藏堂)이 있는데, 이인복(李仁復)이 기를 지었다.
*인흥사(仁興寺) 비슬산(琵瑟山) 북쪽에 있는데,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이 액자(額字)를 썼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흥인사(興仁寺)가 포산(苞山 현풍(玄風)) 기슭에 있는데, 내가 옛날에 놀 때에 눈과 반딧불을 짝 삼았다. 시주(施主)는 때때로 부처에 예를 하고, 중은 맑은 낮에 앉아서 경(經)을 말한다. 뜰에 서 있는 탑은 우뚝하고 희며, 길을 끼고 있는 긴 솔은 낱낱이 푸르다. 가장 생각나는 것은 황금(黃金)의 천상필(天上筆)이 지금도 광채가 빛나는 별빛이 화성(華星) 쏜다.” 하였다.
*심원사(深源寺) 가야산(伽倻山) 남쪽에 있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심원의 옛 절이 가야산에 있는데, 소나무ㆍ잣나무 그늘 가운데에 문을 닫지 않았다. 능엄경(楞嚴經)을 듣고 미묘한 뜻을 물어보려 하는데, 이 몸의 한가함으로 빌어 얻을 수 있을는지.” 하였다.
*안봉사(安峯寺) 주 서북쪽 10리쯤 되는 곳에 있다. 이장경(李長庚)ㆍ이조년(李兆年)ㆍ이숭인(李崇仁)의 진영(眞影)이 처음에는 선석사(禪石寺)에 있었는데, 세조(世祖)의 태(胎)를 선석산(禪石山)에 봉산하여 그 절을 철폐하자, 이씨의 자손들이 그 진영을 이 절에 옮겼다.
*적산사(積山寺) 적산에 있다. 곧 이직(李稷)의 고택(故宅)인데, 지금은 절이 되었다.
*용연사(龍淵寺) 비슬산(琵瑟山) 북쪽에 있다.
*법수사(法水寺) 가야산 남쪽에 있다.
0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신증』 오성(五聖)과 십철(十哲)을 예전에는 소상(塑像)으로 만들었는데, 목사 강중진(康仲珍)이 위판(位版)으로 고쳤다.
*성황사(城隍祠) 주 성안에 있다.
*여단(厲壇) 주 북쪽에 있다.
0 고적
*성산(城山) 화원현(花園縣) 북쪽 5리에 있다. 작은 산이 큰 강을 베고 있는데 그 위가 평평하고 넓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왕이 꽃을 구경하던 곳이므로 화원현의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다.” 한다. 그 아래에 예전에 금강정(錦江亭) 오류정(五柳亭)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강 북쪽에 상국리(上國里) 세자지(世子旨) 등의 땅이 있는데 모두 신라 왕의 장전(帳殿)의 터다.
*가야산성(伽倻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5천 9백 35척, 높이가 5척이다. 지금은 반이 퇴락하였다. 안에서 여섯 시내와 열 개의 샘이 있다. 평탄하고 험한 것이 반반이다.
*독용산성(禿用山城) 주 서쪽 3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8천 64척이다. 지금은 반이 퇴락하였다. 안에는 시내 셋과 샘 하나가 있다.
*팔거산성(八莒山城) 현 동쪽에 있다. 주(州)까지 78리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4백 23척이다. 지금은 반이 퇴락하였다. 안에는 샘 둘과 못 하나가 있다.
*도산현(都山縣)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적산현(狄山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쳐 성산군(星山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신곡부곡(薪谷部曲) 주 서북쪽 30리에 있다.
*위곡부곡(葦谷部曲) 주 동쪽 30리에 있다.
*선남부곡(船南部曲) 주 동쪽 15리에 있다.
0【명환】
고려 이총언(李忩言) 태조(太祖) 초년에 본부(本府) 장군이 되어 본성(本城)을 지켰는데, 임금이 친히 쓴 조서로 금석(金石) 같은 친구가 되기를 약속하여 말하기를, “백자(百子) 천손(千孫)까지 이 마음 변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총언이 시종 한결 같은 절개를 지키었다. 임금이 명하여 옆 고을의 민구(民口)를 주어 그 호구(戶口)를 보태고 또 소금과 곡식 4천여 곡(斛)을 상으로 주었다. 김황원(金黃元) 선종(宣宗) 때에 부사가 되었다. 아전이 살인 강도를 잡아 오자 황원이 한참 보더니 말하기를, “이것은 도적이 아니다.” 하고, 빨리 석방하게 하였다. 판관 이사강(李思絳)이 힘써 다투기를, “이 도적이 이미 항복하였으니 마땅히 죄를 다스려야 한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뒤에 다른 도적이 잡혔는데 과연 지난번에 살인한 자였다. 아전과 백성들이 그 신명(神明)함에 탄복하였다. 이영(李永) 숙종(肅宗) 때에 경산 부사가 되었다. 최척경(崔陟卿) 판관이 되었는데 아전과 백성이 사랑하고 두려워하였다. 왕세경(王世慶) 의종(毅宗) 때에 과거에 올라 경산 부사가 되었는데 청백하기로 유명하였다. 윤택(尹澤) 사록(司錄)이 되었다. 이보림(李寶林) 부사가 되었을 때에 길에서 여자가 우는 것을 듣고 말하기를, “우는 소리가 슬프지 않고 기뻐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하고 붙잡아서 심문하니 과연 간부(奸夫)와 공모하여 남편을 죽인 자였다. 어떤 사람이, “이웃 사람이 내 소의 혀를 잘랐다.”고 고소하였는데, 이웃 사람이 자백하지 않았다. 보림(寶林)이 그 소를 목마르게 하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 물에 간장을 타서 명령하기를, “차례로 소에게 물을 먹이되 소가 물을 마시려 하거든 곧 다시 빼앗으라.”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고소를 당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소가 놀라 달아났다. 심문하니 과연 자백하였다. 또 어떤 사람의 말이 달아나서 남의 보리 싹을 거의 다 뜯어 먹었다. 보리밭 주인이 고소하려 하자 말 주인이 말하기를, “나도 보리밭이 있으니 너의 보리가 수확이 없거든 내 보리를 너에게 주겠으니 고소하지 말라.” 하므로 보리 주인이 승낙하였었다. 여름이 되어 보리가 다시 싹이 나서 조금 수확할 수가 있었다. 말 주인이 말하기를, “네 보리도 결실하였다.” 하고 주지 않았다. 보리 주인이 고소함에, 보림이 명령하여 말 주인은 앉고 보리 주인은 서게 하고 말하기를, “경주(競走)를 하여 따르지 못하는 자는 벌을 주겠다.” 하였더니 말 주인이 따르지 못하였다. 왜 졌느냐고 물으니 말하기를, “저 사람은 서고 나는 앉았으니 따를 수가 있습니까?” 하였다. 보림이 말하기를, “보리도 그러하다. 뜯어 먹은 뒤에 다시 싹이 났으니 온전한 수확이 될 수 있느냐. 네가 말을 놓쳐서 보리를 먹게 하였으니 죄가 한 가지요, 고소하지 못하게 빌었으니 죄가 두 가지요, 약속을 어기고 주지 않았으니 죄가 세 가지다.” 하고, 곤장을 때리고 보리를 고소한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정치를 하는 것이 엄하고 밝기가 이와 같았다. 본조 권득경(權得經) 목사가 되었다. 정치가 맑고 공평하여 아전과 백성이 사랑하였다. 관(官)에서 죽었다. 손소(孫昭) 목사가 되어 명성과 치적이 있다.
0【인물】
고려 이장경(李長庚) 본래 고을 아전이다. 집에 있다가 귀한 사람이 지나가는 벽제(辟除) 소리를 들으면, 곧 방에서 나와 땅에 엎드려서 지나간 뒤에 일어났다. 뒤에 정승(政丞)에 증직되고 농서군공(隴西郡公)으로 봉해졌다.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올랐다. 이천년(李千年) 장경(長庚)의 아들이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다. 이만년(李萬年) 장경의 아들이다. 이조년(李兆年) 장경의 아들이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과거에 올라 비서랑(祕書郞)에 옮겨 왕을 따라 원(元) 나라에 조회하였다. 뒤에 충숙왕(忠肅王)이 참소를 당하여 원 나라에 머물러 있는데, 조년이 분히 여겨 원 나라에 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바쳐 왕의 죄 없는 것을 하소하니, 조정에서 아름답게 여겼다. 충혜왕(忠惠王)이 원 나라에 숙위(宿衛)하여 있을 때에 자못 근신하지 못하는 것으로 소문이 났다. 조년이 경계하는 말을 아뢰기를, “전하가 천자를 섬기고 있으니 마땅히 하루하루 새로워야 하겠는데, 어째서 예(禮)를 버리고 정욕에 방종하여 스스로 누(累)를 초래(招來)하십니까. 좌우가 모두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니 어디에서 바른 말을 듣고 바른 일을 보겠습니까. 원하건대 행실을 고쳐 경계하고 유아(儒雅)한 선비를 친히 하소서.”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싫어하여 담을 넘어서 달아났다. 조적(曺頔)의 난에 백관들이 적에게 붙었는데 조년이 의리로 적(頔)의 당을 효유하여 듣는 자가 모두 감격하였다. 왕이 아첨하는 소인을 가까이하고 충성하고 곧은 사람을 미워하여 조년이 사직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송강(松岡)에서 탄자(彈子)로 참새를 잡을 때 조년이 끓어 앉아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명이(明夷)의 때를 잊으셨습니까? 지금 악소년들이 전하의 위력을 빙자하여 부녀자들을 노략하고 재물을 강탈하여 백성들이 살 수가 없으니, 신은 화가 조석에 있을까 두렵습니다. 이것을 근심하지 않고 도리어 작은 오락에 빠지십니까. 전하가 늙은 신의 말을 들어서 아첨하고 간사한 자를 버리고, 어질고 선량한 사람을 쓰며 다시는 부질없이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신은 비록 죽더라도 눈을 감을 것입니다.” 하였다. 자주 간하여도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탄식하기를, “자주 간하여도 듣지 않으니 책임이 돌아갈 데가 있다. 이미 그 아름다움을 순하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악함만 더하게 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니니, 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다음날에 필마(匹馬)로 고향에 돌아가서 인간의 일을 간섭하지 않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의 직함으로서 죽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포(李褒) 조년(兆年)의 아들이다. 성품이 순후하여 예법대로 행동하였다. 벼슬이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원(敬元)이다. 이승경(李承慶) 장경(長庚)의 손자다. 원 나라 조정에서 벼슬하여 여러 번 옮겨 요양성 참정(遼陽省參政)이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6년에 어머니 상사에 분상(奔喪)하여 환국하였는데, 이듬해에 원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이백전(李百全) 사부(詞賦)로 진용(進用)되어 벼슬이 국자감 대사성 보문각 학사(國子監大司成寶文閣學士)에 이르렀다. 이승휴(李承休) 가리현(加利縣) 사람이다. 젊어서 아버지를 잃고 학문에 힘써서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이르렀다. 성품이 정직하여 세상에 구함이 없었다. 뒤에 두타산(頭陀山) 귀동(龜洞)에 들어가서 몸소 밭갈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곳에 산 지 10여 년에 안집사(安集使) 이심돈(李深敦)이 권하여 서울에 갔는데, 뒤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어 소(疏)를 올려 옳고 그른 것을 지극히 말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벼슬을 파하고 구동 전날 숨었던 곳으로 돌아와서 따로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저술하였다. 10년 만에 충선왕(忠宣王)이 글을 내리어 부르니 승휴가 늙고 병들었음으로써 사양하였다. 왕이 다시 글을 내리기를, “과인(寡人)이 평소에 경의 이름을 듣고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여 지금 경에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주는 것이니, 창생(蒼生)을 위하여 한 번 일어나시오.” 하니, 승휴가 이에 일어났다.
이인복(李仁復) 자는 극례(克禮)며, 포(褒)의 아들이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과거에 올라 복주 사록(福州司錄)이 되고 춘추공봉(春秋供奉)에 전직되었다. 충혜왕(忠惠王) 때에 원 나라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대령로(大寧路) 금주 판관(錦州判官)이 되었다. 동으로 돌아왔을 때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였는데, 인복이 명망이 있으므로 네 번 옮기어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삼았다. 공민왕이 원 나라에 아뢰어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제수하였더니, 신돈(辛旽)에게 거슬려 파면되었다. 흥안(興安) 부원군으로 봉하고 조금 뒤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죽자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인복은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 충렬ㆍ충선ㆍ충숙 세 왕조의 실록(實錄), 《고금록(古今錄)》ㆍ《금경록(金鏡錄)》을 편찬하였다. 인복이 가만히 아뢰기를, “신돈이 훗날에 반드시 변이 있을 것이니 멀리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뒤에 신돈이 처단을 당하자 왕이 인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탄복하였다. 인복이 그 아우 인임(仁任)ㆍ인민(仁敏)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패하고 집을 망칠 자는 반드시 두 아우라.” 하더니 뒤에 과연 패하였다. 뒤에 충정왕(忠定王) 묘정에 배향하였다. 이숭인(李崇仁) 공민왕(恭愍王) 때에 과거에 올랐다. 본국에서 문사를 뽑아서 원 나라 서울에 응시(應試)하는데, 숭인이 첫째로 뽑혔으나 나이 아직 25세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보내지 않았다. 신우(辛禑) 때에 예문관 제학이 되어 서연(書筵)에 들어갔는데 ‘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 청주(淸州)에 갇혔다가 얼마 안 있어 소환되어 지밀직사사 동지춘추관사(知密直司事同知春秋館事)가 되었다. 또 정몽주(鄭夢周)의 당으로 멀리 귀양갔다가 조금 뒤에 죽었다. 숭인(崇仁)은 자질이 총명 민첩하고 문장(文章)이 전아(典雅)하였다. 이색(李穡)이 매양 탄복하여 칭찬하기를,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하여 보더라도 시대마다 이런 사람 흔치 않다.” 하였다.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숭인이 지은 표(表)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어, “표의 문사가 참으로 간절하다.” 하였고, 중국의 사대부들이 숭인의 저술을 보고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도은집(陶隱集)》이 세상에 행한다. 배극렴(裵克廉) 개국공신이고 좌시중(左侍中)이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이직(李稷) 포(褒)의 손자다.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고 태종(太宗)을 도와 좌명공신(左命功臣)이 되어 성산(星山)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아들 사후(師厚)는 벼슬이 한성 부윤(漢城府尹)에, 사원(師元)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사순(師純)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이견기(李堅基) 포(褒)의 후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당시에 장자(長者)로 일컬어졌으며, 시호는 안성(安成)이다. 이함녕(李咸寧) 사후(師厚)의 아들이다. 을묘년에 장원하여 벼슬이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에 이르렀으며, 일찍 죽었다. 이정녕(李正寧) 사후(師厚)의 아들이다. 태종(太宗)의 딸에게 장가들어 성원위(星原尉)가 되었다. 시호는 장절(章節)이다. 배규(裵規) 세종(世宗) 때 사람이다. 아들 윤(閏)과 한(閑)이 모두 과거에 올라 부자가 연이어 간원(諫院)에 들어가니 사림(士林)이 아름답게 여기었다.
『신증』 이집(李諿)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이자견(李自堅)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이자건(李自健) 자견의 아우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이자화(李自華) 자건의 아우다. 기개가 있고 과거에 올라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0【우거】
*고려 김수(金洙) 선산부(善山府) 조에 자세히 나왔다.
*본조 김맹성(金孟性) 수(洙)의 후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고 조행이 있었다.
0【효자】
본조 김문상(金文尙) 수(洙)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전후 6년을 시묘 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하였다. 김자강(金自强)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는데, 어머니를 봉양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머니가 죽어서 치상하는데 불교 의식을 따르지 않고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의하였다. 장사할 때에 아버지 무덤을 옮기어 합장하고 3년을 시묘 살면서 신을 신지 않았다. 복을 마치고 또 추후로 아버지를 위하여 다시 3년을 시묘하려 함에, 아내의 친정 가족들이 끌고서 돌아오게 하고 그 여막을 불태워 버렸다. 자강(自强)이 연기 나는 것을 돌아보고,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두들겼다. 이에 힘껏 떠밀치고 다시 돌아가 무덤 앞에 엎드려서 3일 동안을 일어나지 않았다. 인아(姻婭) 친척이 효성에 감동되어 다시 여막을 지어 주었다. 자강이 또 3년을 처음과 같이 살았다. 박구(朴矩) 벼슬이 가정(嘉靖) 도총제(都摠制)에 이르렀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하고 한 번도 집에 이르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김승득(金承得) 벼슬이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좇고 불교 의식을 좇지 않았으며, 3년을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김방계(金邦啓)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고 또 조부상을 입어서 모두 9년을 시묘하였는데, 한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김신환(金信還) 어버이가 죽자, 장사를 한결같이 가례를 좇고 3년을 시묘하였다. 나라에서 물품을 주었다. 『신증』 배경동(裵敬同) 어머니가 악한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먹이니 병이 곧 나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이식(李植) 부모가 전염병에 걸려 함께 죽자 조석으로 전(奠)을 드리는 정성을 다하여 6년을 마치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0【열녀】
고려 배씨(裵氏) 이숭인(李崇仁)의 〈배열부전(裵烈婦傳)〉에, 배씨(裵氏)는 진사(進士) 배중선(裵中善)의 딸이다. 15세가 넘은 뒤에 사족(士族) 이동교(李東郊)에게 출가하여 내정의 일을 잘 다스렸다. 홍무(洪武) 경신년에 왜적이 경산(京山)에 침입하여 온 경내가 소요하여 감히 막을 자가 없었다. 동교는 그때 합포(合浦) 원수(元帥)의 막(幕)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적병이 배씨의 사는 동네에 돌입하자, 배씨는 젖먹이 아들을 안고 달아났다. 적이 쫓아서 이르렀는데 강물은 바야흐로 창일하였다. 배씨가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어린 아들을 언덕 위에 놓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적이 활을 겨누며 말하기를, “나오면 죽이지 않겠다.” 하였다. 배씨가 적을 돌아보고 꾸짖기를, “왜 나를 속히 죽이지 않는가. 내가 어찌 적에게 더럽혀지랴.” 하였다. 적이 화살을 쏘아 어깨를 맞추었다. 두 번 쏘아 두 번 맞아, 강 가운데에서 죽었다. 체복사(體覆使) 조준(趙浚)이 그 일을 임금께 아뢰어 정려하였다. 나씨(羅氏) 감찰(監察) 나상(羅尙)의 딸이고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배윤(裵閏)의 아내다. 윤이 죽었을 때 나씨의 나이 젊은데 머리를 깎고 3년 동안 무덤을 지켰으며, 무릇 상례와 장례를 한결같이 가례를 좇고 불교의식을 따르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본조 눌덕(訥德) 그 남편 정수(鄭守)가 호랑이에게 잡혔는데 눌덕이 칼을 가지고 호랑이를 쳐서 남편이 벗어났다. 일이 조정에 들리어 정려하였다. 『신증』 문덕(文德) 서원(書員) 김계하(金戒河)의 아내다. 남편이 물에 빠져 죽자, 곡읍(哭泣)을 끊지 않고 3년상을 마치었다. 부모가 개가시키려 하자 곧 머리를 깎고 시부모의 집으로 가서 15년이 넘도록 마늘ㆍ파ㆍ술ㆍ고기를 먹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웃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일이 알려져 정려하였다.
0【제영】
교목구려회세덕(喬木舊閭懷世德) 이곡(李穀)의 시에, “교목과 옛 거리는 세덕을 생각하고, 낙하(落霞) 고목(孤鶩)은 재주 없음이 부끄럽다.” 하였다. 일렴향무금성퇴(一簾香霧錦成堆) 전 사람의 시에, “다시 백화헌(百花軒) 속에서 자려 하니, 발에 가득한 향기 안개요, 비단이 무더기를 이루었다.” 하였다. 강분낙수천지준(江分洛水天池濬) 이첨(李詹)의 시에, “강은 낙수를 나누었으니 천지가 깊고, 눈[雪]은 가야산(伽倻山)을 눌렀으니 지축(地軸)이 웅장하다.” 하였다. 호산형승갑남주(湖山形勝甲南州)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호산의 좋은 경개가 남주에서 으뜸인데, 백 가지 온갖 모양 봄빛이 아직 가을이 되지 않았구나.” 하였다. 교목한연쇄고주(喬木寒煙鎖古州)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교목의 찬 연기는 옛 고을에 잠겼는데, 집집의 감과 밤은 서리 가을을 만났도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광해주 7년에 신안 현감(新安縣監)으로 강등시켰다. 고을 사람인 이창록(李昌祿)이 시사(時事)를 논하여 대역죄(大逆罪)로 국문 받아 죽었기 때문이다. 인조 원년에 다시 승격시켰다가 동 7년에 성산 현감(星山縣監)으로 강등시켰다. 고을 사람 박흔(朴訢)이 목베어 죽었기 때문이다. 효종 4년에 다시 승격시켰다가 영조 12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읍인(邑人)이 목사를 독살하였기 때문이다. 동 21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성지】 읍성(邑城) 옛날에 흙으로 쌓았다가 중종 15년에 돌로 고쳐 쌓았다. 선조 24년에 또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6천 53척인 둥근 성이다. 청동문(淸東門)에 있는 누는 영춘루(迎春樓)라 하고, 북문 바깥에는 용흥사(龍興寺)가 있다. 독용산성(禿用山城) 본래 도산성(都山城)인데 서쪽으로 33리다. 수도산(修道山)의 동쪽인데 옛날 돌로 쌓았다. 숙종 원년에 고쳐 쌓았다. 둘레가 4천 5백 81보며, 옹성(甕城)으로 일포루(一砲樓)다. 개천 네 개, 샘 두 개이며, 평탄하고 험함이 반반이다. ○ 속읍은 성주ㆍ고령(高靈)이다. ○ 수성장(守城將)이 본래 목사 겸 별장을 겸하였으며 1명이다.
【누정】 호산정(湖山亭)ㆍ쌍도정(雙島亭).
【진도】 동안진(東安津) 동쪽으로 20리, 소야강(所耶江)의 하류다.
무계진(茂溪津) 동남쪽으로 50리, 동안진의 하류다.
【토산】 대[竹]ㆍ닥종이[楮]ㆍ감.
【창고】 읍창 두 개. 동안창(東安倉) 동쪽으로 26리에 있다. 달창(達倉) 서북쪽으로 25리에 있다. 가리고현창(加里古縣倉)ㆍ산성창(山城倉)ㆍ남창 남쪽으로 40리에 있다. 천평창(泉坪倉)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0 倉庫
花園倉 在花園縣移屬大丘 新增司倉 雇馬倉 大同庫 戶籍庫 軍器庫 賑恤庫 竝在城內 加利倉 在州東四十里 泉野倉 在州西三十里 山城倉 在禿用城內 東安倉 在州東二十里 老多倉 在州東四十里 達倉 在州西三十里 南倉 在州南四十里 石氷庫 在城北一里
0【능묘】
관왕묘(關王廟) 선조 정유년 천장(天將) 제국기(第國器)가 세웠는데, 영조 정미년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겨 세웠다. 관우(關羽) 경도(京都) 동묘(東廟) 편을 보라.
0【사원】
* 천곡서원(川谷書院) 중종 무자년에 세우고 선조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정숙자(程叔子)ㆍ주자(朱子)ㆍ김굉필ㆍ이언적(李彦迪) 모두 문묘편에 보라. 정구(鄭逑) 충주 편을 보라. 장현광(張顯光)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며 인동(仁同) 사람이다. 벼슬은 우참찬 증영의정(右參贊贈領議政)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 회연서원(檜淵書院) 인조 정묘년에 세우고 숙종 5년에 사액하였다. 정구 충주 편을 보라.
○ 충렬사(忠烈祠) 숙종 기유년에 세우고 정조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제말(諸沫) 선조 임진왜란에 전사하였는데, 벼슬은 성주 목사 증병조판서(星州牧使贈兵曹判書)며, 시호는 충무(忠武)다. 이사룡(李士龍) 본주(本州) 포수(砲手)였는데, 인조 무인년에 청(淸) 나라 징병으로 요동(遼東)에 들어가서 금주(錦州) 송산에서 순절하였다. 성주 목사에 추증되었다.
0 제언(堤堰: 저수지)
紗羅池 在八莒縣今屬柒谷 仍火浦池 在州城外五里南山里周九百六十一尺水深五尺 鼎洞池 在八莒縣今屬柒谷 東亭池 在州城外四里龍山里周一千一百九十尺水深五尺七寸 汝斤乃池 在州東二十里禾谷面周六百九十九尺水深七尺 泊畏池 在州東二十五里豆衣谷面周四百九十尺水深七尺 同萬池 在州南四里南山里今廢 巨留池 在州城外南山里周七百八十尺水深三尺 助是池 在州北十六里草田洞面周一千八百八十尺水深八尺 大家谷池 在州西十五里大家谷面周六百十八尺水深六尺 極只池 在州北二十里非乎石面周一千五百六十二尺水深十一尺 竹池 在州北十二里唐所面周九百六十尺水深六尺 所伊池 水向池 竝在八莒縣今屬柒谷 曉星池 在花園縣今屬大丘 新增注乙池 在州東四十里茶叱面周一千二百四十尺水深三尺 所非池 在州城外龍山里周一千二百五尺水深八尺 安亭洑 在州南四十里伽倻山下
0 교량(橋梁: 다리)
羊場橋 在州南二十五里
0 성지. 산성
禿用山城 在州西五十里修道山下舊有形址 肅廟朝乙卯監司 鄭重徽 聞于朝牧使 李時顯甲寅改築周四千五百八十一步有東甕城將臺東西南北四砲樓東門水口門南小門內有三溪一泉一寺客舍東西兩倉高靈倉本州高靈各置軍器庫
0 진보(鎭堡: 방어를 위해 쌓은 진지로 군사시설로서의 진(鎭)과 보(堡)를 말한다)
舊屬尙州鎭今爲禿用鎭高靈軍兵屬焉別將一人僧將一人守堞軍官二百人鎭吏一人
0 旱田
元帳付六千八十六結四十負內各樣免稅雜頉竝二千六百二結七負八束己卯
時起三千四百八十四結三十二負二束
0 水田
元帳付五千六百四十結七十負一束內各樣免稅雜頉竝一千二十三結十五負七束己卯時起四千六百十七結五十四負四束
0 進貢
人參 紫草茸 乾柹 紅柹 生雉
0 糶糴
元會米一百三十四石四斗五升一合三夕雜穀二百十石十二斗七升六合五夕賑色米一百七十九石八斗二升八合三夕雜穀二千三百四十八石十三斗九升七合常平廳米四百六十六石十斗四升一合三夕雜穀一萬五千六百七石八斗三合私賑米一石十四斗一升二合九夕雜穀三千一百三十九石十斗五升六合三夕別會米二斗三合五夕雜穀九千三百三十二石二斗八升八合十月開倉十二月封庫己卯條爲准
0 田稅
米二百十二石一斗九升六合一夕太五十三石十四斗三升六合八夕公作米五百五十五石十一斗公木一百同三十三疋三月收捧四月裝載于本州洛江邊東安津發船沿江十餘日下泊梁山仇火谷津移戰海船候風過三四日納于東萊 釜山倉己卯條爲准
0 大同
木一百十同錢木參半四月收捧至五月陸路八日達于京納于宣惠廳米二千五百四十石以水路納于東萊 釜山倉米一百三十一石十二斗七升四合七夕儲置本州一從惠廳區劃多寡無常己卯條爲准
0 均稅
田稅條木十九同十二疋十四尺結錢三千九百二十三兩九錢三分船稅錢七十二兩八錢七分四月收捧五月上納均役廳選武布八同二十七疋十月收捧十二月上納于均役廳而陸路八日達于京上納己卯條爲准
0 俸廩
衙祿位五十結木五十石公須位十五結米二十六石官需米三百九十石雉鷄四結每夫生雉半首生鷄半首木八丹炭七升五合草十五斤式捧用
0 軍兵
訓鍊都監砲手保三百六十名御營軍一百四十七名保一百五十七名官納保三百二十二名硫黃軍一百三十名禁衛軍一百三十六名保一百四十五名官納保三百六十一名別破陣保三名兵曹騎兵七十六名步兵一百二十三名別騎兵十七名禁軍保六十九名京驛保十三名內吹保一名掌樂院樂生二名保五名樂工保十三名工曹匠保一百五十四名校書館唱準八十六名守堞軍七百七十四名牙兵軍三千八百五十七名馬軍四十七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