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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완계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沙月
첫째날
10번째 중국여행인 만큼 에피소드도 많았고 길이길이 기억에 남을만한 여행이었다. 먼저 가장 특징적인 것은 10번만에 우리가 직접 기획을 해서 여행을 주관한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세련누나와 내가 시행사 측이었고, 이장휘 선생이 시공사가 되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기획에서부터 실행에까지 2년이 걸린 여행이었는데, 실제 준비 기간이 온전히 2년이었다는 말은 아니고, 작년에 북경에서 있은 올림픽 때문에 부득이 1년을 연기한 터였다. 팀 구성은 처형인 미야네 애 셋 포함 우리 식구 위주로 10명, 세련누나가 모은 인원이 7명, 이장휘 선생이 6명 등 합이 23명이었다. 그리고 대구서 가는 사람이 10명, 울산서 13명이었다. 대구 팀은 사전에 세하와 승용차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잘하면 근처에 무료 주차를 할 수도 있겠지만 닷새 주차료가 5만 원 정도를 하더라도 이곳에서 지불하는 교통요금 정도도 안 된다는 생각에. 11시쯤 출발을 해서 청도휴게소서 11시 반 경에 만나기로 했다. 내 차에는 용진과 미야 처형네 애 셋이 타고 갔다. 세하네가 많이 늦어져서 휴게소서 만나는 것은 포기했다. 우리만 50분 넘게 하릴없이 기다린 꼴이 되었다. 공항에 도착한 시각이 1시에서 10분도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차는 인근 주차장에 하루 4천 원 하는 곳이 있어서 맡겼다. 새형님이 마중을 나왔고 다들 도착을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이 늦어 점심은 우리가 싸 간 초밥을 몇 개씩 나눠먹고 곧장 출국 수속을 했다. 내 비자에 여권 번호가 구여권 번호로 기재되어 있어서 출국을 못할 뻔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출국을 할 수 있었다.
김해공항 국제선 청사
덕분에 용진과 나만 발권이 늦어져 제일 뒷 좌석으로 밀려 앉아서 갔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입국도 우려는 했었지만 별 문제가 없었다. 늘 그렇듯이 현지 가이드를 만나서 이동을 했다. 가이드는 39세의 교포 3세로 이름이 현용남(玄龍男)이라고 했다. 이제 북경서는 드물다고 할 수 있는 아직까지도 북한 억양이 강하게 남아 있는 가이드였는데, 결과론이지만 그 정도면 여태까지 나온 어느 가이드보다 괜찮은 수준이었다.
나만 빼고 들뜬 마음으로 탑승하는 일행들
가장 먼저 예정되어 있는 코스는 유리창(琉璃廠)이었지만 도착했을 무렵에는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비가 내린 관계로 곧장 저녁이 예약되어 있는 북경 오리구이 전문점인 취엔쥐더(全聚德)로 향했다. 10여 년 전에는 본점인 치엔먼띠엔(前門店)에서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오늘은 허핑먼띠엔(和平門店)이었다. 비교적 높고 전망이 좋아 창밖으로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서 특히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많은 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산을 쓰지 않아도 안 될 정도도 이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비에 우산은 버스의 트렁크에 있는 캐리어 안에 있으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이동 거리가 짧아서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 북경의 날씨는 검은 먹구름이 땅까지 뒤덮은 모양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버스로 이동중인 일행
우리에게는 즐거운 여행의 시작이었지만 용진에게는 괴로운 여행의 시작이었던 듯 싶다. 그 맛있는 1인당 150위안(약 3만 원)이나 하는 요리를 앞에 두고 넘어가지 않는다니…… 몇 번 화장실에 들락날락 했지만 큰 일은 없었고 그냥 여행 내내 아무것도 못 먹을 팔자의 시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정말 맛있게 먹는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전갈 튀김도 맛이 있었고…… 그러나 덕분에 많은 시간을 화장실 입구의 창문 곁에 서 있어서 위에서 말한대로 많은 구경을 할 수가 있었다.
현지 가이드 현용남
식사 후반에는 용진 때문에 거의 바깥에 있어야 했다. 먹장 구름이 땅까지 덮은 듯한 비 내리는 어둑한 날씨 너머 국가대극원의 계란 같은 타원형 돔과 인민대회당이 드디어 내가 중국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취엔쥐더 뻬이징 카오야 전문점
바로 테이블 앞까지 가져와서 직접 고기를 발라주는 모습
전갈 튀김
취엔쥐더 창문에서 바라다 보이는 국가대극원과 인민대회당. 인민대회당 너머는 천안문 광장.
식사 후에는 경극(京劇) 관람이 있었다. 원래 경극은 원나라 때 성행하였다. 이민족인 몽고 왕족이 한나라의 문화를 멸시하고 유일하게 경극을 통해서만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성행하게 된 것이었다. 극장 이름은 이원(梨園)이라고 하였다. 어느 호텔 내에 있었지만 전통이 있는 극장이라 하였다. 원래 이원은 음악을 몹시 좋아하여 양귀비가 춤을 출 때 사용하였다는 「예상우의곡」 같은 무곡까지 직접 작곡할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당나라 현종(玄宗)이 양성한 악공들의 학교 이름이었다. 이곳에서 배출한 악공들을 이원제자라고 하였고, 당나라 시인 백거이나 원진의 시에 보면 현종이 죽은 뒤까지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아남은 측은한 악공, 즉 이원제자들이 세월의 무상함에 눈물 흘리는 모습이 등장하기도 한다. 극장 이름의 유래 하나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 모습이 그들의 전통문화 보존에 대한 노력은 물론이고 오래된 문명국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부심 같은 것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극장 로비에는 메이란팡(梅蘭芳)의 사진이 있었는데, 여자를 무대에 세우지 않는 경극의 특성 때문에 여자역으로 일세를 풍미한 전설적인 배우였고 지금은 그를 기리는 극장까지 세워졌다. 이 배우가 얼마나 유명했느냐 하는 것을 알려주는 전설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이 매이란팡이 출연한 경극을 보고 구애를 할 정도였다는. 이 극장에는 물론 일반인들도 출입을 할 수 있지만 외국의 국빈급 인사들이 중국을 찾으면 주로 초청되는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영화 <패왕별희>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유명한 감독 천카이꺼가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찍어 얼마전에 개봉하기도 하였다.
이원극장의 무대
두 사람이 밝은데서 펼치는 어둠 속 판토마임. 슬랩스틱 코메디를 보는 듯.
공연은 매일 프로그램이 바뀐다고 하였다. 재수가 좋아 천운이 따랐다면 <패왕별희> 같은 것도 볼 수가 있었으련만. 각설하고…… 경극은 제목은 모르겠고(나올 때 좀 알아두는 것이었는데)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져서 공연되었다. 1부는 밝은 가운데 어둠 속을 연기하는 슬랩스틱 코메디 스타일의 대사가 없는 판토마임 형태였고, 2부는 대사가 있기는 했지만 역시 없어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천병(天兵)의 훼방을 극복하고 사랑을 찾는다는 내용인데, 중간중간 보이던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모습―창을 발로 막아내고 손으로 퉁겨내는―이 인상적이었는데 마지막에는 정말 한꺼번에 얼마나 많은 창을 발로 차내고 손으로 집어 내던지는지 정말 볼만했다. 세계적으로 하나의 장르화가 되다시피한 중국무술 영화의 아버지답게 현란한 몸놀림과 동작은 정말로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게하기에 충분했다. 중국에 올 때마다 보는 서커스보다 경극을 택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음이 자명해지는 순간이었다.
많은 창을 손발로 다 쳐내는 묘기를 보이는 경극의 한 장면
극장은 중간의 경계선을 중심으로 2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앞쪽은 물론 자리도 좋았지만 주둥이가 팔만큼 긴 주전자를 이용하여 묘기를 부리며 차를 따라주는 서비스도 해주고 공간적 여유가 많은 테이블에 널찍하게 앉아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 앉아 있으니 악단이 연주를 하는 모습도 가까이서 직접 구경을 할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S석이라고나 할까. 반면 우리는 일반석으로 극장의 좌석 같았고 보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앞좌석이 있음으로 해서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였다. 그러나 배율이 괜찮은 카메라 렌즈를 장착했다면 사진을 찍기에는 더 유리한 자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용진은 몸도 좋지 않은데 에어컨 때문에 떨었다. 그나마 나중에는 괜찮아져서 다행이었다. 경극을 보고난 뒤의 느낌은 대강 이렇다. 원래 경극은 중국에서도 노년층에서 즐기는 볼거리였다.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경극 특유의 괴상하고 알아듣기 힘든 발음이었다. 그러나 이 경극은 보니 옆에 자막이 나오기도 하려니와 북경 사람, 아니 중국어에 능통한 외국인이라도 거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변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 안에는 내국인은 거의 없었다. 아니 동양인도 거의 우리 일행 밖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중국 경극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외국인들에게만 큰 볼거리와 감동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그네들의 특유의 전통극. 우리네 사물놀이랑 판소리 등이 생각났다.
숙소인 중뤼따샤의 야경
오늘의 관광 일정을 마치고 다음은 나흘간 묵을 호텔로 이동하였다. 호텔은 3순환도로 안쪽에 있는 중뤼따샤(中旅大厦)로 4성급 호텔이었다. 지난 겨울에 묵었던 6순환도로 바깥에 위치한 호텔보다는 모든 면에서 나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만족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세하는 큰 건물에 하(厦: 이곳에선는 빌딩이라는 뜻으로 쓰임)자가 많이 들어간다고 좋아하였다. 방 배정이 끝나고 첫날의 일정이 끝났는데 공식적인 모임은 아니고 친한 사람 위주로 짧은 모임을 가지는 정도로 시간을 보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원래는 내가 이장휘 선생과 자고 용진이는 지형이와 재울까 생각을 했는데, 용진이가 몸도 불편하려니와 한번 잠이 들면 깨울 방법이 없는 어린 애 둘을 한 방에 재우기에는 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형이는 이장휘 선생과 자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