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11월 5일 김천시 남산동 30의 3번지에서 부 윤덕용(尹德用), 모 정금주(鄭金珠)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후 1년째 악성질환으로 대수술을 받았다. 전신 4개소에 절개 수술을 하고 좌우 안구를 수술했으나 끝내 오른쪽 눈은 못 보게 되었다. 김천국민학교에 졸업을 하고 김천중학교에 응시했다. 성적은 우수하나 황군이 되어 천황에게 충성할 수 없는 불구자를 입학시킬 수는 없다고 했다. 신설된 고등과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입학했다. 고등과 2년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부친과 숙부가 6년 보통학교 과정을 월반을 해서 4년, 5년에 마쳤고, 숙부는 대구농림을 수석으로 입학해서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 집안이 모두 머리가 빼어나다는 걸 알 수 있다. 고등과를 졸업하고 곧 철도국 대전 객화차 사무소 김천 분소에 취직을 했다. 3년 뒤 부산 철도국 교통부 기술원 (차량 전기) 양성소 1년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했다. 철도국 기술원으로 근무하면서 1957년엔 김천화우회전(김천문화원 전시실)에 작품을 출품했다. 1959년에 철도 창설 60주년 기념 현상 문예에 응모하여 당선이 되었다. 당선을 계기로 문학활동이 활발해졌다. 경북청년문학가협회(회장 신동집)를 결성하고, 같은 해 홍성문, 김도양, 정수봉 등과 함께 흑맥문학회를 결성하여 동인지를 간행했다. 1961년에 그 동안 쓴 작품을 모아 동화집 <전봇대가 본 별들>(창성출판사)을 간행했다. 경북에서는 최초의 창작 동화집이다. 1966년엔 한꺼번에 세 권의 동화집을 내고 1969년에 동화집 <아기 바람 엄마 바람>을 내서 제2회 세종아동문학상을 받았다. 6년 뒤에 동화집 <날아간 물오리>를 발간하고, 다시 4년 뒤에 동화집 <하늘을 나는 아이>,2년 뒤에 동화집 <산의 이야기>를 냈다. 그 뒤 6년 뒤에 동화집 <목각 인형>을 내고 경북문학상, 자랑스러운 경북인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받았다. 그 뒤 6권의 동화집을 내서 모두 14권의 동화집을 남겼다. 그 가운데 마지막 동화집은 작고하기 1년 전에 일생의 문학 생활을 정리한 동화선집이다.
내가 윤사섭 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61년 김천에서 홍성문 김도양 윤사섭 김상문 정완영 등이 흑맥문학회 활동을 할 때였다. 처음 보는 순간 그의 호인 사슴의 모습이었다. 악의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고 순하고 착하기만 보였다. 첫 동화집 <전봇대가 본 별들>을 읽으면서 처음 본 인상이 그대로 작품에 녹아 있다는 걸 느꼈다. 존경스러웠다.
그 뒤 대구아동문학회, 세종아동문학회, 경북문인협회, 이후문학회 등 모임에서 만날 기회가 많았다. 공식 모임을 마치고 술자리에서 만나면 인정이 철철 넘친다. 그는 나이로는 두 살 위지만 문단 경력으로는 대선배이다. 내가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리를 같이 하고 싶었다. 그는 술을 즐겼다. 취기가 오르면 가곡도 곧잘 부르고 발레도 일품이었다. 사슴처럼 순하고 착하기만 하던 분이 누구라고는 밝힐 수 없지만 어떤 이의 올바르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핏대를 올리며 질타했다.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정의감이 강하다는 걸 발견했다.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하는 동화 ‘할아버지와 꿩’, ‘귀뚜라미’ 두 작품에 나타난 것을 살펴보겠다.
‘할아버지와 꿩’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산이 좋아 평생을 산에 사는 산 할아버지가 있었다. 어느 해 눈이 많이 와서 산새들이 무엇을 먹고 살까 큰 걱정을 했다. 할아버지가 걱정한 대로 새들이 굶어 죽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그들을 죽인 것처럼 가슴을 앓았다. 그 뒤부터 할아버지는 수수, 옥수수 따위의 곡식을 집 근처에 깔아 놓았다. 봄이 되자 철새들이 떠날 채비를 했다. 새들이, 하늘이 비좁을 만큼 무리지어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 상공으로 날아왔다.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잘 가라. 내년에도 꼭 찾아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봄이 되자 꿩이 알을 품었다. 할아버지는 꿩이 알을 품고 있을 때도 새끼를 데리고 있을 때도 먹이를 주었다. 참수리가 까투리를 움켜잡아 하늘로 올라갔다. 그때 장끼가 와서 참수리를 덮쳤다. 두 번, 세 번, 네 번 드디어 참수리가 까투리를 놓았다. 할아버지는 까투리를 집에 들고 가서 약을 바르고 몸이 회복된 뒤에 장끼와 함께 돌려보냈다.
윤사섭은 산을 좋아한다. 산에 사는 나무와 풀, 풀벌레, 꽃, 새와 산짐승, 물소리와 풀벌레 소리, 구름, 달, 별 등 자연을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새들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눈이 많이 쌓여서 새들이 굶어 죽은 것을 보고 자신이 그 새들을 죽인 것처럼 가슴을 앓았다. 그 뒤부터 새들이 주워먹으라고 곡식을 집 근처에 깔아 놓았다. 그 곡식을 주워 먹은 철새들이 할아버지께 고맙다고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상공을 돌 때 할아버지는 손을 흔들어 배웅을 한다. 새들과 이렇게 정을 나누는 마음이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도 정이 철철 넘친다.
새끼를 데리고 있는 까투리를 참수리가 덮쳐 하늘로 올라갈 때 장끼가 와서 참수리를 공격했다. 목숨을 걸고 참수리가 까투리를 놓을 때까지 공격을 했다. 불의를 못 참고 끝까지 공격해야 직성이 풀리는 윤사섭의 마음일 것이다.
까투리를 치료해서 몸이 회복된 뒤에 돌려보내는 것은 윤사섭의 정을 나타낸 것이다.
작품 ‘귀뚜라미’에서 살펴본다.
연한이 차서 교단에서 물러난 교장 선생님의 모습을 이 작품에서 찾으면 그것이 윤사섭의 모습이 될 것이다.
○ 교장 선생님은 어떻게 보면 좀 모자라는 듯 천진한 철부지 소년 같은 어른이었습니다.
○ 대도시의 엄청난 숨결 속에서 약삭빠른 사람들과 어깨를 겨루며 어울려서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못 되었습니다.
○ 그 동안 돈을 모르고 살아온 것
○ 틈나는 대로 글을 써 오셨기 때문에 세상에 내 놓은 책만 해도 스무 권이 넘었습니다. 그것은 교장 선생님의 전 재산이자 유산과도 다름없었습니다. 그런 분이셨기에 떠나는 순간까지도 앞으로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걱정보다 되레 하찮은 풀벌레 소리, 이름없는 풀꽃에 더 관심이 가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임종을 한 맏딸의 말에 의하면 아베 마리아 등 곡을 들으며 아주 만족하고 평화스런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평생 동화의 세계에서 살다가 동화의 나라로 가셨을 것이다.
이제 작품 세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대표작인 ‘아기 바람과 엄마 바람’ ‘목각 인형’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동화의 본질은 어린이에의 도전이라고 생각해 왔다. 싸움을 걸기 위해서는 먼저 어린이를 알아야 한다. 동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도리어 어린이의 자기중심의 욕구만을 충족하려는 이기주의적 사고를 추구하면서 거기서 생기는 가치관을 도려내어 어린이와 함께 생각하며 해결하고, 공감하고, 감동하는 것이 동화의 세계다.
동화는 어린 세대에게 ‘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가르치는 문학’이긴 하지만 동화 작가는 어린이를 어른의 세계로 잘 인도하는 지도자는 아니다. 어린이와 공감하면서 체제(부모와 어른들이 틀을 짜서 만든 무대 공간)에 반항하는 그들과의 공범자가 되어야 한다.
(윤사섭 동화선집 ‘감나무 집 사람들과 골짝 아이들’ 머리말 일부)
● 어린이는 착하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이기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런 면을 사실대로 나타내서 어린이와 함께 생각하며 해결하도록 하려는 의도이다. 작품 속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 “너한테만은 죽어도 이 애비가 하는 일을 시키지도 않을 뿐 물려주지도 않겠다. (중 생략) 하지만 소년은 심심했습니다. 긴 여름방학이 지겹기만 하여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마냥 따분하기만 했습니다. 자기도 나무를 썰어 갖가지 인형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 두 사람이 집을 비우고 없는 사이 소년은 기어이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 ‘목각 인형’ 속의 한 부분 )
이래서 소년은 새끼손가락이 잘리고 폭격을 맞아 지금까지의 기억들은 사라지고 만다. 미군 병사의 집으로 입양을 하여 미국에서 살게 된다. 한편 소년의 부모는 소년을 찾다 찾다 못 찾고 아들을 찾기 위해 새끼손가락이 없는 목각 인형을 만들며 산다.
어린이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한평생이 바뀌는 모습을 사실대로 나타내었다.
● 동화는 어린 세대에게 ‘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가르치는 문학’이긴 하지만 동화 작가는 어린이를 어른의 세계로 잘 인도하는 지도자는 아니다.
교육성보다는 문학성에 더 비중을 두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 영식은 골목길에서 나이프로 전봇대에다 글씨를 새기고 있었습니다. ( 중 생략) 철수는 무슨 소리를 해도 참을 수 있었지만 영식이의 입에서 “아버지도 없는 자식이…….” 했을 땐 언제 철수의 주먹이 날아갔는지, 그리고 그 주먹이 얼마나 세기에 영식인 보기 좋게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둘은 차고, 쥐어박고, 땅에 뒹굴었습니다.
(중략) 바로 영식이네가 떠나던 날이었습니다.
“철수야, 지금까지 내가 너에게 나쁘게만 굴어서 미안하다. 지난 일 모두 용서해 줘. 응? 넌 참 좋은 아이였어…….” 떨리는 소리로 말하는 영식이의 끝 말은 잘 들리질 않았습니다.
( ‘전봇대가 본 별들’ 중의 일부 )
이렇게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사실대로 나타내었다. 산 나무에 칼로 글씨를 새기는 것이 나쁘고,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것이 나쁘다고 직접 가르치지 않아도 글을 읽고 나서 스스로 깨닫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와 작품과는 좀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아기 바람 엄마 바람’ 줄거리
아기 바람이 태어난 곳은 하늘에 목화송이처럼 떠 있는 구름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무들이 빽빽한 산, 산 사이에 뱀처럼 흐르는 흰 물줄기, 넓은 들 등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아기 바람이 살 한국이다. 마음에 들었다, 이게 모두 누구 때문일까? 아기 바람에게는 모두가 수수께끼였다.
엄마 바람은 아기 바람을 데리고 사람들이 사는 세상 어느 집 마당에 내려두고 떠나버렸다. 엄마 바람은 약속대로 저녁에만 데리러 왔다.
엄마 바람이 하는 일은 깃발, 나무 이파리 흔들어 주는 일, 구름, 돛단배, 비 밀고 가는 일 등이다.
아기 바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종이 팔랑개비쯤 돌리는 것, 기저귀 말리는 것, 아궁이 불꽃 타오르게 하는 것 등 작은 일뿐이다. 깃발을 날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아기 바람이 있는 집은 옥이네 집이다. 옥이네 아빠는 월남전에 가고, 할아버지는 6․25 때 이북에 끌려갔다. 아기 바람은 시름 속에 잠겨 있는 식구들을 보았다. 혼자 놀고 있는 옥이한테 갔다. 옥이네 집에는 큰 걱정이 생겼다. 월남에서 날아오던 봉투 편지가 뚝 끊어졌다. 월남으로 갔다는 아빠 바람이 돌아오면 옥이 아빠 소식을 알게 될 것이다. 아빠 바람을 기다리는 아기 바람은 자기도 어서 커서 어른이 되고 싶었다.
판타지가 있는 동화이다. 윤사섭의 다른 작품도 생활 동화가 아니고 모두 판타지가 있는 철저한 동화이다. 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 심리적 묘사나 갈등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다. 심리적 묘사가 특징이다. 아기 바람의 심리묘사 부분을 다음에 옮겨 보겠다.
○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이들의 노래를 따라 깃발을 훨훨 휘날리고 싶어도 아직 힘이 모자라는 아기 바람은 그저 안타깝기만 합니다.
○ 사람들이 하는 일…… 정말 그건 아기 바람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아무리 마음을 쓴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보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다른 데로 머리를 쓰는 게 살이 찔 것 같은 아기 바람입니다. 그래 아기 바람은 방 안의 사람들과는 달리 아주 딴 세상에서 노는 옥이에게 동무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전에도 그렇지만 오늘따라 이런 생각은 곱으로 곱으로 더해지는 것이었습니다.
● 엄마 바람과 아빠 바람은 자유자재로 국경을 넘어 다니며 세상일을 다 보고 겪는다. 아기 바람은 어서 어른이 돼서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궁금한 것을 알아보고 싶다. 월남전에 가서 소식이 뚝 끊긴 옥이 아버지, 6․25 때 강제로 끌려간 옥이 할아버지에 대한 소식이 알고 싶다. 아기 바람이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부분을 옮겨 본다.
○ ‘국군을 따라 월남으로 갔다는 아빠 바람. 아아, 언제쯤 오려나? 그럼 그땐 옥이 아빠 소식도 알게 될 걸.’
이렇게 생각하는 아기 바람은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도 어서어서 자라서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럼 그럼, 이북이란 곳도 월남이란 곳에도 갈 수 있을 걸.’
● 전래 동화와 비슷하게 구성되었지만 이야기 전개 과정에 허무맹랑한 것이 없다.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적으로 느낄 수 있게 이어 놓았기 때문에 변화가 많은 이야기 줄거리에도 독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미있게 읽게 된다. 아기 바람이 하늘의 구름에서 태어났다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을 아래에 옯겼다.
○ 아기 바람이 태어난 곳은 바로 이 하늘, 거기 뜨내기 나그네처럼 살고 있는 구름이었습니다. 고치 속에 잠든 누에처럼 포근한 엄마 품에 안겨, 마냥 노랑 꿈만 꾸어 오다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아기 바람의 입에서 새어나온 말은 “아아!‘ 하는 외마디 소리뿐이었습니다. 그럴 것이 아기 바람으로 본다면 생전에 처음 보는 바깥 세상이 얼마나 신기하였을까요? 명주실보다 더 가늘고 연한 금빛 햇살이 막 눈부시게 쏟아지는 바다 같은 하늘 가운데 싱그러이 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아기 바람의 조그만 가슴은 막 부풀대로 부풀어 이상하기까지 한 것이었습니다.
● 바람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엄마 바람과 아빠 바람, 그리고 아기 바람이 저마다 자기가 맡은 일이 따로 있다는 것과 엄마 바람과 아기 바람이 나누는 이야기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엄마 바람과 아기 바람의 대화 부분을 아래에 옮겼다.
○ 엄마 바람이 아기 바람을 데리고 다니며 가르쳐 준다.
아기 바람은 감은 두 눈을 살며시 떠서 이번엔 까마득한 아래를 조심조심 내다봤습니다.
나무들이 빽빽한 산, 산 사이에 뱀처럼 흐르는 흰 물줄기, 넓은 들 등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엄마, 여기가 어디?”
“네가 살 한국이란 나라야.”
아기 바람은 엄마 바람이 말한 한국이란 나라가 무척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 이 동화의 주제는 전쟁 때문에 한가정이 고통을 겪고 있는 모습을 바람의 눈으로 바라본 내용이다. 전쟁의 아픔에 독자들이 공감을 하고 있다. 가족들의 아픔을 나타낸 부분을 옮겨 본다.
○ 생각하면 참 분하고 원통한 일이지요, 6․25 사변인가 뭔가 하는 쑥대밭을 이룬 전쟁 때문에 억지 이북으로 끌려간 것이랍니다. 지금은 살아 계신지 어쩐지 누가 아나요?
“아이구, 이놈의 원수를…….’ 가끔 이런 소리가 옥이 할머니의 입을 빠져나올 땐 할머니의 움푹하게 팬 두 눈망울 속엔 이내 이슬 같은 눈물이 괸답니다.
○ 윗마을, 아랫마을, 이렇게 가까운 이웃을 하고 있으면서도 가도 오도 못 하고 멀쩡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으면서도, 또렷한 두 귀가 쫑긋 서 있는데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꼭 있어야 할 곳에 입이 붙어 있는데도 한 마디 말을 주고받지 못하는 이놈의 세상……. 싹뚝 잘라진 두 동강이 땅덩어리 속에서 언제까지 이런 병신인 채로 살아야 하나……?
○ 갈수록 옥이 할머니와 어머니의 마음도 자꾸 어두워졌습니다. 웃음이 끊어진 옥이네 집은 불 꺼진 집안과도 같았습니다.
○ 봉투편지를 애타게 기다리는 옥이 할머니와 그의 엄마와 함께 아빠 바람이 어서어서 돌아오기를 가슴 졸이며 애타게 기다리는 아기 바람이 오늘도 한국 땅 어느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목각 인형’ 줄거리
도시 변두리에서 내외가 목각 인형을 만들어 팔아서 살고 있었다. 고되지만 늦게 낳은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보람을 느꼈다. 내외는 목각 인형 만드는 일은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했다. 아들이 공장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소년은 여름방학 때 부모가 나간 틈을 타서 공장에 들어가 기계를 돌렸다. 나무토막을 자르다 새끼손가락이 잘려 나갔다. 전쟁이 일어났다. 상처가 아물지 않아 피란을 가지 않았다. 인민군이 와서 부모를 잡아갔다. 혼자 남은 소년은 집을 나가, 부모가 끌려간 도시 쪽으로 갔다. 도시 복판에서 비행기 폭격을 맞았다. 소년이 깨어난 곳은 미군 야전병원이었다. 그 전의 일은 모두 잊어버렸다. 이름도 부모도 모르게 되었다. 부모가 집에 돌아왔지만 아들이 없다. 세월은 흐르는데 아들은 꿈에만 만났다. 부모는 아들을 만날 목적으로 새끼손가락이 잘린 인형만을 만들었다. 미국으로 수출이 되었다. 소년이 미국 백화점에서 자기와 같이 왼쪽 새끼손가락이 잘린 인형을 보았다. 목각 인형을 사서 집으로 돌아와 한국말로 편지를 썼다. 그날 부모는 10년 만에 자식이 띄운 항공 편지를 받아보는 꿈을 꾸었다.
이 작품으로 대한민국 문학상을 받았고, 경북문화상도 받았다. 또 광복 60년 동안 가장 빛나는 창작동화(남북 우수 창작 동화 선정위원회에서 68명의 동화를 골랐다.)에 실렸다.
●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사실 묘사를 섬세하게 하면서 내적인 심리묘사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구성방법인 것 같다. 작품 속에서 찾아본다.
○ “윙--”
수천 마리의 모기떼가 몰려오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모터가 돌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바퀴 같은 톱날이 기막힌 속도로 신나게 움직였습니다. 소년이 들고 온 토막을 톱날에 갖다 대자 오지직…… 등심 타는 소리를 내면서 나무를 먹어 들어갔습니다. 그 양상이 너무도 신기하여 흥분이 전류 마냥 그의 머리를 타고 전신에 흘렀습니다.
둥근 통나무 하나가 이내 네모로 변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또 한 개, 두 개, 세 개……, 같은 일이 되풀이 되는 동안 그의 이마에선 송글송글 고인 땀이 하얗게 빛났습니다.
‘이렇게 재미나는 일을 왜 나한테는 시키지 않는 걸까? 엄마, 아빠가 하는 일을 나라고 못 할까 봐! 집에서 혼자 심심하기만 했는데 잘 됐지 뭐야. 많이 깎아서 깜짝 놀라게 해 드려야지. 그럼 참 기뻐하실 거야…….
● 부모와 자식 사이의 진한 사랑과 정에 독자들이 감동을 한다. 진한 사랑과 정을 묘사한 부분을 옮겨 보겠다.
○ 눈만 뜨면 나무에 매달려 씨름을 해야 하는 고달픈 나날들이 계속되었지만 귀염둥이 자식이 별 탈없이 커가는 재미에 두 사람은 조금도 피곤한 줄을 몰랐습니다. 더군다나 삼 년을 내리 반에서 우등을 하는 외아들인지라 여간 자랑스럽지가 않았습니다. 이렇듯 봄날 같은 따스함은 이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너한테만은 죽어도 이 애비가 하는 일을 시키지도 않을 뿐 물려주지도 않겠다.
○ 그 동안 이 집에서 달라진 것이 있었다면 공장 이름이 아들의 이름을 딴 <준 목공예 제작소>로 바꿔진 것과 한결같이 손년상만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즈넉이 턱을 올린 목이 긴 소년, 서늘한 눈매와 꽃잎같이 엷은 조그만 입술은 알 수 없는 먼 나라의 그리움 같은 것을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다소곳이 가슴 앞에 포개어진 두 손, 팬티만 입은 채 서 있는 까까머리 목각 소년의 왼쪽 새끼손가락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잘려 나가고 없었습니다. 그것은 목 견디게 아들을 그리는 이 집 주인 내외의 애틋한 바람의 표현이었으며 한스런 그들의 속마음을 대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말 못 하는 나무를 다루는 시간이 그렇게도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뼛속까지 스며든 골 깊은 시름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으니까요.
사랑하는 아들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내 아들을 만난다는 생각이 어느새 머리 속에 석고처럼 굳어져 그런 설렘이 두 사람으로 하여 신들린 사람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 ‘세상에 이럴 수가? 다른 나라도 아닌 한국에서 이것이…….’
목각의 바닥엔 <준 목공예 제작소>의 주소가 적힌 상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인형을 사서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온 청년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일찍이 없었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습니다. ‘아아, 이게 어찌된 것일까? ’준‘이란 누구일까? 왜 그 사람은 손가락이 없는 인형만 만들었을까? 그것이 만든 사람의 실수였다면 하나만 그럴 것이지. 왜? ……아냐, 여기에 반드시 무슨 사연이 숨어 있을 거야. 틀림없이……’
‘난 한국 사람, 한국 전쟁의 슈샨 보이 쑈리, 그때 미군의 말로는 나더러 분명히 전쟁에서 없어진 손가락이 아니라고 했어.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여 이렇게 된 걸까?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은 어떤 분일까? 나는 누구의 아들이란 말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책상머리에 기대어 애써 기억을 짜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그의 양 어깨가 파도처럼 들먹였습니다.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아니야, 우연한 일은 결코 아니야! 죽어도 그럴 리가 없어!’
그는 말 못 하는 목각 소년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어머니--.” 그것은 이땅에 와서 처음으로 불러 보는 소리였습니다. 그날 밤 그는 긴 편지를 썼습니다. 십년 만에 써 보는 한국 말 편지였습니다.
○ 같은 날 밤, 한국 어느 도시의 변두리에서는 십 년 만에 자식이 띄운 항공 편지를 감격에 젖어 받아보는 꿈을 꾸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 윤사섭 동화의 공간적 배경은 대체로 도시 변두리나 산골짜기가 많다.
○ 도시의 변두리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목각 인형’ 중에서)
마지막 동화집 <감나무집 사람들과 골짝 아이들>도 농촌과 골짜기가 배경이다.
● 등장인물은 대체로 착하고 농촌이나 도시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이다.
○ 집을 떠날 때, 누나와 형은 조상 대하듯 돗자리를 깔고 감나무에게 큰절을 했습니다.할머니가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도시로 시집간 누나와 도시에서 공부하다 군에 간 형이 언젠가 한 번은 골짝을 떠나자고 했다가 혼이 났습니다.
“내가 죽고 나서도 이 감나무가 죽기 전에는 절대 여길 떠나지 못한다.” (‘감나무집 사람들과 골짝 아이들’ 중에서)
● 결말이 대체로 해피엔딩이다. 고대 소설이 분명하게 행복해지는데 비해서 행복한 결과가 올 것이라는 것을 독자가 짐작하게 한다.
○ 십 년 만에 자식이 띄운 항공 편지를 감격에 젖어 받아보는 꿈을 꾸는 늙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목각 인형’에서)
○ 만식이가 송이에게 강아지를 안겨 주자 송이는 참아온 울음을 기어이 터뜨렸습니다.
(‘감나무집 사람들과 골짝 아이들’ 중에서)
○ “또 오너라-.”
소리치는 할아버지는 반한 듯한 부러운 눈을 하여 그들이 날아간 먼 하늘을 멍하니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꿩’에서)
전래 동화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거듭 재미있게 읽히듯이 윤사섭 동화도 거듭 재미있게 읽혀지는 것은 전래 동화와 같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썼기 때문이 아닐까.
윤사섭 ≪연보≫
1930년
11월 5일(음 9월 16일) 김천시 남산동 30의 3번지에서 부 윤덕용(尹德用), 모 정금주(鄭金珠)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출생. 호(사슴).
선생님의 부음을 들은 것은 9월 28일이었습니다. 그날 밤차로 대구로 내려갔더라면 29일 발인에는 참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때마침 29일 금요일은 강의가 없는 날이었지만 저는 선생님의 장례식장에 가서 조문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어떤 모임을 주재하는 입장이었고, 회원들과 간신히 날짜를 맞춰두었던 터라 또다시 날짜를 뒤로 늦출 수가 없었답니다. 부득이한 일이긴 했지만 선생님께 큰 죄를 졌기에 이렇게 하늘나라로 한 통의 편지를 띄웁니다.
어찌 보면 저는 선생님의 제자이고 어찌 보면 제자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1968년부터 김천고등학교에 사서(司書) 교사로 재직하셨는데 저는 그 고등학교를 딱 두 달만 다녔으니까요. 선생님은 3월 초의 어느 날 저희 반에 오셔서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싶은 학생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는데 저는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선생님 곁에서 책 정리 등 잔심부름을 한 것은 1975년 3월과 4월, 두 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해 4월 말에 서울로 가출을 하여 저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것으로 끝나버렸으니까요.
선생님은 1930년 김천시 남산동에서 출생하여 1997년에 대구로 이사할 때까지 김천을 지킨 김천 토박이였습니다. 1961년에 첫 동화집 {전봇대가 본 별들}을 발간한 이래 내신 동화집이 총 14권, 김천의 아동문학에 씨를 뿌리고 꽃을 피우는 동안 세종아동문학상(1969), 제1회 경북 문학상(1988), 대한민국문학상 본상(1989) 등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1976년의 어느 봄날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그만둔 자퇴생의 신분이었지만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김천고등학교로 찾아갔습니다. 벚꽃이 봄바람에 분분히 떨어지는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도서관으로 찾아가 뵈었는데 마침 선생님은 도서관 건물 앞에 서 계셨지요. "선생님!" 하고 외쳐 부르자 "아이구, 승하야, 이놈아!" 하고 저를 와락 포옹하시어 저는 한참 동안이나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학업 포기가 못내 안타까우셨는지 걱정스런 얼굴로 이것저것 물어보셨습니다. 제가 작년에 2개월 동안 바짝 공부하여 대구 지구와 대전 지구에서 행한 대입자격검정고시에 전과목 합격했다고 말씀드리자 깜짝 놀라시며 축하를 해주셨지요.
"그래, 오히려 잘 됐다. 글을 쓰는 것이 네 운명인가 보다. 남들 영어 단어 외우고 수학 문제 풀 때 너는 책 읽고 글을 쓰도록 해라."
저는 검정고시에는 일찍 합격했지만 가출벽을 못 버려 부산으로 달아나기도 했고 대구와 춘천의 친척 댁에서 기거하기도 했고 서울대학에 다니는 형 하숙집에 더부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고향 김천에는 있기가 싫어 이 도시 저 도시 떠돈 셈이었는데 학원에도 다니지를 않았으니 대학 입학이 자연히 늦어졌지요. 1979년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은 했지만 다닐 자신이 없어 입학 후 1년을 휴학하기도 했습니다. 만성불면증에 신경성 위궤양, 대인공포증에 관절염까지 와 심신이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4년여 동안 불규칙적인 생활을 한 데다 진로 문제를 놓고 고민하면서 자학의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그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선생님 댁으로 선물종합세트를 사 들고 찾아갔던 1979년 가을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네 인생의 아주 큰 시련기이지만 네가 글쟁이로 거듭나기 위한 진통의 세월이니까 제발 용기만 잃지 말아 달라고 하신 선생님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5년의 낭인 생활을 마치고 1980년에 비로소 대학 1학년이 되었습니다. 대학 4년 내내 불면증이 낫지를 않아 고생을 했지만 선생님의 격려에 힘입어 저는 제 나름대로 열심히 습작을 했고, 대학을 졸업하는 시점에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이란 것을 했습니다.
지난 세월 선생님은 언제나 저의 훌륭한 사표였습니다. 해마다 연하장으로 안부를 여쭈면 선생님은 꼭 엽서에 달과 새를 그려 답장을 보내주셨지요.
1997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폐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의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저는 헐레벌떡 병원으로 달려갔었지요. 수술 직전, 선생님은 아주 밝은 모습으로 저를 맞아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오른쪽 폐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받고 그래도 회복이 되어 9년을 더 사셨습니다. 병원에서 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담배 때문일세. 내 평생 나쁜 친구인 담배를 너무 깊이 사귀어 이런 병에 걸린 걸세. 그 동안 담배 덕분에 즐거움을 누렸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괴로움을 겪는 거지."
이 말씀 후에는 고등학생의 흡연에 대해 견해를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들은 지난 세월 내내 담배 피우는 학생들을 무조건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신이 나서서 줄곧 반대했었노라고. 어른들이 담배를 안 피우거나 끊고서 피우지 말라고 해야 논리적으로 맞으며,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므로 학생들을 이해해주어야 한다고.
선생님 생의 이력을 훑어보면 담배를 친구 삼아 살아오신 것이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선생님은 생후 1년째 되었을 때 악성 질환으로 대수술을 받으셨지요. 전신 4개소에 절개 수술이 가해지고 좌우 안구를 시술했는데 끝내 우안은 실명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도조차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지독한 가난은 선생님께 변변한 졸업장 한 장도 주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열다섯 살 때인 1945년에 아버지가 만주에서 지병인 위염으로 서른여섯의 나이로 돌아가시자 선생님은 소년가장이 되어 일곱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선생님만 바라보는 일곱 식구를 두고 어떻게 군대를 갑니까. 병역기피자의 낙인이 찍혀 5·16이 일어났을 때는 철도국에서 쫓겨나야만 했었지요. 김천고등학교 사서 교사가 된 1968년부터 겨우 생활이 좀 안정되어 선생님은 동화작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선생님의 동화에는 인정 미담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슬픈 일이 많지만 기쁜 일도 있다는 것을 들려주려 선생님은 동화를 써오신 것이 아닙니까? 휴머니즘에 대한 옹호, 동심에 대한 신뢰, 사람됨의 뜻에 대한 탐구, 올바른 삶에 대한 동경, 불행이 닥쳤을 때에도 꺾이지 않는 용기, 세파에 시달려도 잃지 않는 가족에 대한 사랑……. 뭐 이런 것들이 선생님 동화의 주제인 듯합니다. 북랜드에서 펴낸 동화선집 {감나무집 사람들과 골짝 아이들}에는 읽으면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동화들이 소복하게 모여 있습니다. 선생님의 인격과 인품이 담겨 있는 좋은 동화들이지요.
선생님의 성함이 '사섭'인데, 그래서 호를 '사슴'으로 지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닌게아니라 평생을 사슴의 마음으로 살아오셨습니다. 선생님은 술에 취하면 아이가 되곤 하셨지요. 김천시민체육대회 때 만취하여 공설운동장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신 선생님, 사복을 잊고 온 제자가 안타까워 눈물을 글썽이며 껴안아주신 분, 동화의 세계에서 동심으로 살아오신 분……. 바로 윤사섭 선생님의 초상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크신 사랑과 보살핌으로 시인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됨의 뜻과 올바른 삶, 자신을 바로 세우는 용기와 타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 인간성에 대한 옹호 등은 가르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몇 편의 시와 글로 이런 것들을 들려주려 애는 쓰고 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지금 하늘나라에서도 펜을 들어 원고지에 또박또박 동화를 쓰고 계시겠지요. 선생님이 못 견디게 보고 싶은 밤입니다. 고개 숙여 명복을 빌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먼 그곳에서 내내 평안하소서.
//어느 모임에 갔다가 우리문학회 최고령 윤사섭 선생님이 이미 시월 중순경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늦게 부음을 듣게 된 것은, 선생님 유족이 알리지 않은 바도 있지만, 선생님의 동료들께서 미처 챙겨주시지 못한 바도 있고, 아동문학가들이 대부분 친소 관계를 많이 따져서 알아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를 많이 보았노라는 원로 선생님을 말씀을 듣고 공감하는 바 조금 있었습니다.
명작을 낸 작가, 단체의 회장을 지내지 않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있었노라!" 라고 시나브로 잊혀져 가는 거겠지요!
어느 여름 우리문학회에서 대구에 갔을 때, 몸이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찾아 오셔서 회원들 목이라도 축이라고 쌈짓돈(정말 말 그대로 쌈짓돈)을 꺼내셔서 복수박과 사이다, 콜라를 사 주시던 한 풍경이 인으로 박혀서, 적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