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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황혼열차(黃昏列車) 원문보기 글쓴이: 소산/문 재학
그리스 여행기
(2017. 11. 5 ~ 11. 13 = 9일)
소산/문 재학
2017년 11워 5일(일) 맑음
만추의 화창한 날씨 속에 그리스의 고대유적지를 둘러보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23시 20분 중간 기착지인 이스탄불 행 터키항공(TK 0089편)에 탑승했다.
8,530km를 12시간의 비행 끝에 11월 6일 아침 04시 50분경(시차 6시간 한국시간 10시 50분)에 도착했다.
비행장에는 게류중인 비행기가 상당히 많았다.
이곳에서 유럽의 각 지역으로 환승하는 곳이라 상당히 붐비었다.
2017년 11월 6일(월) 맑음
약 3시간 30분 체류 후 8시 20분 그리스 북부지역도시 테살로니키로 (터키항공 TK 1881편)향했다.
날씨가 너무 맑아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살조차 반가웠다.
약 1시간 30분지나 8시 50분 (시차 7시간)에 테살로니키 공항에 도착했다.
간이비행장처럼 게류중인 비행기가 몇 대 밖에 없어 아주 한산했다.
간단히 입국수속을 마치고 현지교민 가이드 조희팔씨를 만나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랐다.
그리스는 3400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면적은 1400개 섬을 포함 하여 131,957평방키로 이고 인구는 약 11,000천 명 정도이다.
그리고 에개海를 끼고 있는 테살로니키(Thessaloniki)는 면적 19,31평방키로 이고 인구는 대략 3,100천명이다.
가을이라 이름 모를 나무들이 곱게 단풍이든 도로변은 정감이 가고 가끔 보이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어 여유가 넘쳐흘렀다.
3차선 일방통행도로에 차량이 상당히 많이 운행되고 있었다.
주위의 10층 미만의 미려한 아파트들도 상당히 깨끗했다.
좁은 골목마다 욱어진 가로수 아래 차량들이 질서정연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가로수와 정원수 등 모두 곱게 단풍이 들어 시가지가 화사해 보였다.
시내 중심을 한참 달려 해안가 공원에 있는 테살로니키의 심볼인 화이트타워(White tower 높이 34m 둘레 70m)앞에서 내렸다.
12세기 비잔틴시대에 세워진 화이트타워는 처음에는 요새로 나중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단다.
특히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통치하던 시기에 이 탑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탑의 이름을 피의 탑으로 불리었다고 했다.
탑 전경을 영상으로 담고 가까이에 가을 분위에 젖어있는 넓은 광장에는 이곳이 고향인 알렉산더 대왕 청동 기마상이 있었고 그 뒤편 약간 떨어진 곳에서는 분수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긴 해안가에는 아담한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고 멀리 있는 항구에서는 하역 작업하는 부두도 보였다.
1시간 정도 돌아보고 10시 50분 공중에 떠있는 수도원이라는 애칭의 메떼오라로 향했다.
테살로니키 시내는 화려한 벽화도 가끔 보이고 붉게 물든 담쟁이들도 보였다.
11시 10분 버스는 왕복 6차선 평야지대를 시원하게 달렸다.
수확이 끝난 들판은 다소 황량했다. 들판 곳곳에 주택들이 산재해 있었다.
11시 22분 고속도 요금소를 지나자 우리나라에는 보지 못한 제한속도 120km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11시 35분부터는 멀리 구릉지 야산에는 붉은 색 지붕의 큰 마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양한 나무들이 단풍이 들어 여행객들의 시선을 즐겁게 했다.
수확이 끝난 포도원을 비롯하여 과수원들 많이 보였다.
고속도 휴게소에서 중식을 하고 12시 40분 메떼오라로 계속 달렸다.
조금 지나 터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터널을 통과 할 때 마다 들판에 있는 숲들이 고운 단풍으로 가을 향기를 뿌리고 있었다.
약간 멀리 있는 경사가 급한 높은 험산위로는 하얀 구름이 걸려 있었다.
도로는 왕복 4차선으로 바뀌면서 터널이 자주 나타났다.
13시 30분부터는 다시 넓은 평야지대가 나오고 고속도로 중앙분리대에는 높은 가로등이 벽을 이루면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구릉지가 많은 평야지대에는 아직 수확 못한 백설의 목화솜 꽃이 몽실몽실 하얗게 피어 있었다.
이곳은 테살로니키의 목화재배 집단 지역이란다.
이어 가끔 야외 태양광 시설이 나타나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떼들도 보였다.
도로변의 노랗게 물든 눈부신 미루나무를 배경으로 있는 산들은 이름 모를 작은 소나무 같은 것이 듬성듬성 있는 민둥산이었다.
드디어 멀리 메떼오라의 산이 보이기 시작하고 산 이래에는 3~5층의 현대식 건물들이 보였다.
탄성으로 바라보는 메떼오라 산의 아름다운 바위는 차창으로 카메라 세례를 받는데 그 바위들을 뒤돌아 올라가면 더 좋은 풍광이 있다는 가이드의 안내에 모두들 흥분하는 것 같았다.
공중에 떠있는 수도원 메떼오라는 아득한 옛날( 6천만 년 전?)바다 속의 奇巖群이 형성되어 만들어 졌다고 한다.
10대 불가사의 건축물의 하나인 메떼오라 수도원은 마치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하면서 천년의 풍상을 견뎌내고 바위산에 우뚝 솟아 관광객을 불러드리고 있었다.
메떼오라 기암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곳에 인구 1만 2천의 칼라바카 소도시가 있다.
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경관은 1980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역광으로 비치는 기묘한 바위들을 차창으로 통하여 단풍과 함께 영상을 담으면서 구불구불 돌아 올라가니 제일처음 아기오스 니콜라우스 수도원이 반겼고, 루사누(Roussanou)수도원을 지나 발람(Varlaam)수도원 주차장에 도착 했다.
비수기인데도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몇 대와 있었다.
모든 물자와 사람 출입도 도르래를 이용하여 속세와는 완전 단절된 곳 이였는데
1925년부터 바위를 깎아 길을 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일반인들의 접근이 가능했다고 했다.
14세기 전성기에는 24개 수도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6개만 남았단다.
주 수도원 메떼오론(Meteoron) 가는 길은 아찔한 공중다리를 지나야 하고 급경사 바위계단을 한참 숨차게 올라가야 했다.
제일먼저 유일한 현대식 화장실에서 볼일 본 후 절벽에 도르래와 그물. 등 시설과 12천명분의 거대한 나무물통 등을 돌아보았다.
바위위에 정교하게 쌓아 올린 돌탑 등을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했다.
대성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여자는 제공하는 치마를 입어야 했다.
성당내부 전 벽면에는 예수의 일대기와 수도인들의 고난과 관련된 벽화(비잔틴 양식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수도원의 중앙의 돔 천정에는 황금예수의 양각상이 시선을 끌었고 내부바닥 대리석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녀갔는지 유리알처럼 반들거렸다.
촛대 등 장식물은 화려한 금박이고, 나무의자 들은 디자인이 특이했다.
밖으로 나와 박물관 등을 둘러보고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조금 내려와 메떼오라의 기기묘묘한 바위들과 단풍과 어우러진 수도원들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환상적인 풍광들을 영상으로 담고 또 담았다.
암벽에는 선홍빛 담쟁이가 석양에 불타고 있었다.
석양을 등지고 수천 년의 역사가 갈아 숨 쉬는 아테네로 향했다.
소요 시간은 5시간 예정이다.
4차선 도로변 들판은 주택들이 산재해 있고 곳곳에 있는 수목들은 역시 단풍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름다운 저녁노을 거느리고 이국땅을 황홀한 기분에 잠겨 달리다보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가끔 보이는 마을들은 밝은 가로등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18시에 저녁을 하고 3시간을 달려 아테네 시내에 있는 XENOPHONE 호텔 101호실에 21시가 지나서야 여장을 풀었다.
2017년 11월 7알(화) 맑음
아침 6시에 호텔을 나와 매혹의 섬 산토리니(Santorini)로 향했다.
아테네(Athenae)〉는 면적 29,58펑방키로 이고 인구는 약 3,700천명이다.
어둠속 아테네 거리는 도로 양측과 중앙분리대에 가로수 조경이 잘되어 있었다.
왕복 8차선 도로에는 새벽인데도 차량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20여분 만에 부두에 도착했다. 관광버스 2대가 먼저 와있었다.
지금은 비수기라 관광객이 아주 적다고 했다.
2만톤 여객선(8층 규모) 船名 Blue Star는 우리나라 대우에서 건조하였다고 하여 자랑스러웠다.
날렵한 에스컬레이터를 2번이나 갈아타고 계단을 올라 7층 오른쪽에 있는 객실 좌석 번호 431번의 안락의자에 앉았다.
7시 정각 기적소리와 함께 산토리니로 향했다.
소요시간이 8시간이라 조금은 지루한 시간이다.
먼저 여객선 내부 몇 개 층의 관람에 나셨다.
대우에서 건조한 것이라 그러한지 곳곳에 편리한 시설들이 한층 더 정감이 갔다.
다시 한 번 우리나라 선박기술의 자긍심을 느꼈다.
가끔 멀리 보이는 섬들 사이로 푸른 물결을 거느리고 여객선은 순항을 하고 있었다.
호수보다 더 조용하고 잔물결도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 너무 신기하여 영상으로 담았다.
11시 15분 첫 기착지인 파로스 섬에 도착했다.
눈처럼 하얀 백색 건물들이 있는 섬의 풍광이 그림 같았다.
船尾로 돌아가 잔물결도 없는 바다에 긴 꼬리로 뿜어내는 하얀 포말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점점이 떠 있는 수많은 섬들이 기대감을 충족시키고 있었다.
머나먼 길 뱃길로 8시간 거리에 있는 산토리니 섬이 너무 궁금했다.
두 번째 기착지인 낙소스를 들린 후 다시 섬들 사이로 얼마를 갔을까
멀리 검붉은 절벽위에 하얀 집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신기한 풍광이라 줌으로 당겨 영상으로 담았다. 이곳이 산토리니 섬의 이아 마을 이였다. 그림 같은 풍광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사방이 거의 수직절벽에 둘러싸인 아늑한 선착장 아티니오스(Athinios)에 도착했다.
요란한 경고음 소리와 함께 배 뒷문이 열리면서 관광객이 쏟아져 나가고 이어 승용차와 버스가 하선을 했다.
배에서 내려 100m를 가니 대기하고 있는 미니버스들이 많았다.
꼬불꼬불한 급경사 절벽 길을 어떻게 내었을까 아슬아슬한 길을 손에 땀을 지게 하는 곡예운전을 하는 차량들이 꼬리를 물었다.
성수기에는 이 짧은 길을 통과하는데 1시간도 더 걸린다고 하니 관광객이 얼마나 많이 오는 지 짐작이 간다.
우리일행은 차량이 밀리지 않아 몇 분 만에 통과했다.
산토리니 섬은 BC 1610년 화산 폭발로 현재의 지형이 형성 되었다고 한다.
아테네에서 200km 거리의 반원형 화산 群島로 면적은 73평방키로 이고 인구는 1만3천여 명이 살고 있는 섬이다.
15시 50분 산토리니 섬 정상 부근에 올라섰고 이어 산토리니 섬의 심볼인 파란 둥근 지붕과 순백의 집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석양으로 유명한 이아(0ia)마을로 향했다.
성수기에는 하루에 관광객이 3~4만 명이 온다고 하니 정말 복잡할 것 같았다. 버스는 하얀 집들 사이 꼬부랑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경사가 급한 곳은 계단으로 경작지를 만들고 약간의 평야지에는 산재된 농가 주택들이 함께 보였다.
큰 나무나 숲이 귀한 다소 황량한 섬인데 이렇게 하얀 건물위에 파란 돔들이 점점히 떠있는 마을들을 형성하게 되었는지 모두 다 신기해하고 궁금해 했다.
버스는 내려가기도 하고 절벽 길을 달리는가 하면 다시 꼬불꼬불 올라가고 있었다.
16시 25분 이아(0ia)마을 주차장에 도착했다.
몇 대의 미니버스와 승용차들이 많이 와 있었다.
이아마을 일몰 전망대로 향하는 길옆 상점에서 한국말로 ‘안녕 하세요“ 하면서 무화과를 맛보라고 주어 시식도 해보았다.
좁은 골목길의 바닥 대리석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녔는지 반들거리고 좌우의 상점들이 즐비하여 관광지다운 기분을 맛보면서 지나갔다.
日沒시간까지 이아마을 곳곳을 누비며 이색적이고 아름다운 풍광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일몰의 전망대는 비수기라 해도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 황홀한 일몰장면을 담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담아 보았다.
조명이 들어오는 이아(0ia)마을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샌드위치 비슷한 것으로 저녁을 하고
19시 20분 버스에 승차하여 산토리니 동쪽 끝에 있는 카마리(Kamari) 비치 마을로 향했다.
섬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거리라 거의 1간이 지나 20시 20분에 도착하여 THE BEST 호텔 10호실에 투숙했다.
2017년 11월 8일(수) 맑음
오늘은 10시에 출발 예정이라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아침에 인접한 카마리 비치로 나갔다. 마침 日出의 장관이 펼쳐지고 있어 영상으로 담아 보았다.
그리고 세계에서 유일할 것 같은 검은 모래(화산재라 약간은 검붉은 색임) 해변을 느긋하게 즐겼다.
아침 식사 후는 마을의 곳곳을 둘러보았는데 사람이 적어 한산했고 유칼리 대경목과 유도화가 상당히 많아 보였다. 승용차들도 자주 보였는데 거의 소형차였다.
10시 정각에 버스에 올라 산토리니 섬 중심지인 피라(Fira)마을로 향했다.
지난밤 어두워서 보지 못한 꼬부랑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가고 있었다.
좌측으로는 수백 m의 깎아지른 절벽이고 우측으로는 멀리 해안선 까지 완만한 곳이 많아 경작지들 사이로 백색의 농가 주택들이 산재해 있었다.
피라 마을 입구 주차장에는 미니버스와 승용차들이 일부 주차되어 있었다.
마을이 인구 1만2천 명이라 그러한지 상당히 큰 규모였다.
제일 먼저 케이블카와 당나귀로 오르내리는 구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갔다.
좁은 골목길마다 관광지답게 많은 상점들이 개성 있는 상품을 진열해 두고 있었다.
가파른 절벽에도 계단식 길을 내고 집을 지어 전부 하얀 페인트로 단장을 하였기에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한 백설로 뒤덮인 능선으로 보인 것이다.
케이블카는 여러 대를 묶어 동시에 운행되고, 나란히 있는 之자 길에는 당나귀들이 관광객을 태우고 다녔다.
그리고 사람이 도보로 다니는 길에는 해변에서부터 계단마다 푸른색 바탕에 하얀 페인트로 계단의 수를 차례로 표시 했는데 마지막 계단이 588 계단 이였다.
멀리 섬들 사이로 푸른 바다를 누비며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선박들이 다니는데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마을의 이색적인 풍광들을 둘러보고 14시 20분 선착장으로 향했다.
다시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예의 그 절벽길이다.
개설한지가 15년 정도 되었다는데 거의 수직절벽에 어떻게 길을 내었는지 더구나 대형차량이 교행이 가능하도록 해두어 감탄이 절로 났다.
아슬아슬한 꼬부랑길을 무사히 내려왔다.
15시 50분 어제 승선했던 Blue Star의 7층 같은 객실에 자리 잡았다.
조금 떨어진 피라 마을 구(舊) 항구 가까이에는 거대한 호화유람선이 떠있고 그 뒤로 백색의 피라 마을이 긴 능선 따라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출항전 대우조선에서 건조한 Blue Star호
급경사에 다니는 케이블카와 당나귀들이 다니는 갈지(之)자 길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이아마을을 지날 때는 붉은 색 절벽위의 백색마을이 눈부신 빛을 뿌리고 있었다.
선상의 일몰도 볼거리였다. 포도주를 마시면서 기분 좋은 분위에 젖어 보았다.
어둠을 뚫고 23시 35분에 아테네 항구에 도착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라 호텔에 도착하니 24시 20분이였다 315호실에 투숙했다.
2017년 11월 8일(목) 맑음
9시 호텔을 나와 미케네(Mycenae) 유적지로 향했다.
아테네 시내 도로는 특이 하게도 중앙분리대에 조경수를 大徑木으로 조성하여 마치 단풍숲속을 지나는 분위기였다.
왕복 10차선 도로가 복잡할 정도로 차량이 많았다.
대부분 건물 옥상에는 태양광 시설을 해두어 아침 햇살에 빤짝이고 있었다.
9시 40분 에게(Ege)해를 지나고 부터는 도로 중앙분리대가 철재로 돼있고, 도로는 왕복 6차선이지만 차량이 적어 시원하게 달렸다.
10여분 지나 고속도로 요금소를 지나고 부터는 차량이 거의 다니지 않았다.
도로변은 주로 올리브를 재배 하는데 가끔 밀감 농장도 보였다.
수확이 끝난 포도밭은 고운 단풍으로 물들고 있었다.
10시 43분 버스는 2차선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주위의 산들은 땅이 척박한지 수목이 아주 빈약했다.
그리스의 대부분 산들은 樹高 1m 미만의 이름 모를 나무들이 뒤덮고 있었다.
간혹 섞인 闊葉樹들은 단풍으로 곱게 물들고 있어 풍광이 좋았다.
미케네 궁전 유적 주차장에는 11시 10분에 도착했다.
버스 몇 대와 승용차들이 와 있었다.
미케네(Mycenae)문명은 헬라도스 문화(Helladic culture)가 미노스 문명의 영향으로 발달하던 기원전 17세기에서 동부 지중해에서 청동기 문명이 쇠퇴하던 기원전 12세기까지 번성했다.
미케네문명은 그리스문명의 시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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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9세기 그리스시인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에 나오는 트로이전쟁의 그리스 측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 왕이 통치했던 나라이다.
BC 1350년경 미케네 문명 최성기 때는 성곽 아래 약 32헥타르 면적에 인구 3만 명이 살았다고 했다.
미케네궁전으로 가는 길 좌측 아래에 있는 박물관을 먼저 찾았다.
BC 1,300년 전의 생활용품 다양한 토기와 아가멤논의 황금마스크 등 화려한 금장식품 들을 영상으로 담았다.
도보로 오르는 궁전 입구는 거대한 돌로 정교하게 쌓아 올린 성곽이 줄지어 있고 출입구 정문의 문 위에는 16톤이나 되는 통 돌의 두 마리 삼각형 사자상이 장식하고 있었다.
사자상 주변 벌어진 틈은 과거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고 했다
사자문을 지나자 납작한 돌기둥을 사방으로 세우고 그 아래 석축을 쌓은 거대한 원형이 왕들 무덤이며, 이곳에서 대부분의 황금 유물이 발굴됐다고 했다.
이 무덤은 1876년 독일의 아마추어 역사학자 Heinrich Schliemann에 의해 발견 되어 세계사에 등장하게 되었단다.
현재 미케네유적지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미케네 궁전 성벽은 길이 900m, 넓이 5m로 일부만 남은 페허 상태였다.
많은 관광객들이 보이는 정상으로 올라가 보았다.
정상에 있는 남쪽으로 흔적만 남아있는 궁전 터는 상당히 소규모였다.
궁전 관람을 끝내고 맞은 편 가까이에 있는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의 무덤으로 걸어서 갔다.
입구 양측으로 길게 이어지는 대규모 석축 길(36m)은 탐방객을 압도 하고 있었다.
3500년전 조성한 고분의 입구
커다란 석문(높이 5.4m)을 들어서면 잠시 어둠에 잠긴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 하면 넓이 14.5m, 높이 13.2m 의 거대한 돔이 바닥에서부터 천정까지 돌 크기를 줄여가며 둥근 아치형 지붕으로 정교하게 쌓아올린 3,500년 전의 석축기술은 불가사의 한 일이라 했다.
무덤의 꼭지에 있는 정점의 큰 돌을 빼내어도 묘지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니 그 기술이 신비로울 뿐이었다.
까맣게 돌이끼가 낀 성벽내부를 동영상으로 담아 보았다.
13시 30분 버스는 다음 방문지인 모넴바시아(Monemvasia)로 향했다.
소요시간은 3시간 예상이다.
2차선 도로변 넓은 평야지대는 탐스런 밀감들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 높은 산 능선으로 꽃그림을 그리는 흰 구름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산악지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깨끗하게 포장된 4차선 도로는 개설 한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주위의 산들은 여전히 수목이 빈약한 상태이고 산록 변 토심이 깊은 곳에는 어김없이 올리브나 밀감을 재배하고 있었다.
14시 2분부터는 2차선 도로이고 수확이 끝난 일반경작지는 황량했다.
도로변에는 가끔 대리석 하치장도 있었다.
알록달록한 단풍잎이 오후 햇살에 눈부시게 부서지고 황금빛 은행나무도 운치를 더하고 있어 기분 좋은 여행 길이였다.
버스는 풍력발전기가 집단으로 돌고 있는 산 능선을 오르고 있었다.
버스의 스피크에서 경쾌한 멜로디의 그리스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면서 산길을 넘었다.
멀리 험산 타이게토스 산맥이 보이기 시작할 때 쯤 버스는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완만한 산세의 산록 변은 스페인처럼 대규모 올리브 재배를 하고 있었다.
15시 30분부터는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지대가 나왔다.
스칼라 지방을 지나서 얼마 안가서 16시 25분경 모넴바시아(Monemvasia)에 도착했다.
그리스의 라코니아 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작은 섬(넓이 800m, 높이200m, 둘레1.500m) 모넴바시아는 375년경 지진으로 인해 육지로부터 분리되어 섬이 되었다고 한다.
583년 도시로 발전 하면서 이 시기에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도 함께 건축되었다.
절벽의 꼭지까지 성벽을 쌓았는데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없어 보였다.
10세기부터 그리스 남부의 해상무역의 거점지로서 발전 하였고
1460년 까지 비잔틴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500년대 초반까지는 베네치아 제국에 속했고 1800년대 초반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등 수많은 변란을 겪었다.
그리스 독립전쟁 후 1821년 7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 되었다.
섬의 마을은 육지에서 400m를 지나야 보이지 않던 바위산 마을이 나왔다.
인구는 300여명 정도이지만 모두들 경제적 여유는 있다고 했다.
마을 중앙에 교회를 중심으로 차도 다닐 수 없는 미로 같은 좁은 길이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었다. 상당히 오래되어 낡은 건물들로 이루어진 모넴바시아 마을은 모두 바다를 향하여 들어서 있었다.
골목마다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는 것을 보니 관광객이 많이 오는 것 같았다.
1시간 30분 정도 마을을 둘러보고 어둠이 내려앉는 18시 정각에 버스에 올라 50분 거리에 있는 스칼라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OASIS 호텔 303호실에 여장을 풀었다.
2017년 11월 10일(금) 맑음
9시 30분 호텔을 나와 스파르타의 옛 도시 미스트라(Mystras)로 향했다.
야산의 허리를 감고 도는 2차선 도로변 좌측에는 올리브나 밀감이 재배되고 있는 평원이었다.
9시 50분부터는 넓은 산 능선이 별천지처럼 나타나고 농작물 재배지 사이로 간간이 농가주택들도 나타났다.
한참을 달려 10시 30분부터 버스는 미스트라로 오르는 숲속 1차선 꼬부랑길에 들어섰다.
급경사 꼬부랑길에 55인승 대형버스의 곡예운전이 시작되었다.
마주 오는 차가 있다면 교행이 불가능 할 정도로 좁은 길이고 곡각지점을 돌때에는 장애물에 부딪칠까 조마조마 한 마음 생애 처음 경험해 보았다.
다행히 비수기라 마주 오는 차는 그나마 없었다.
단풍이 바람에 일렁이는 것을 감상하면서 40시 43분에 주차장에 도착했다.
우리일행 이외는 관광객이 없었다.
인접한 타아게토스(해발 2.400m)의 장엄한 백색의 험산이 내려다보는 미스트라 정상 680m에는 돌출된 아름다운 성채가 보였다.
아쉽게도 정상의 성채 (빌라르두앵)까지는 1.5km나 되어 도보로 왕복 2시간 가까이 소요되기에 포기를 하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유적을 둘러보기로 했다.
1249년 성채를 조성한 후 14~15세기의 비잔틴 문화 유적을 상부 후문(유적지 하부에 있는 것이 정문임)으로 들어갔다.
상부마을에 있는 낡은 성소피아 교회(황실 교회)부터 찾아보았다.
미스트라는 비잔틴 제국의 후기에 가장 번성한 지역이었다.
상부 도시에는 황궁과 귀족들의 가옥, 황실 교회가 들어섰다.
하부도시에는 수도원과 교회, 주요 관청의 건물과 공직자들의 가옥이 형성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외성 밖 산기슭과 가까운 평원에 마을을 형성해 살았다
이곳이 망한 후는 이곳 주민들은 멀리 들판에 보이는 스파르타 지역으로 이주를 하였다고 했다.
거대한 시설물들이 폐허가 되어 옛 삶의 터전에 세월의 이끼가 끼고 덩굴식물이 뒤덮고 있었다.
중부 마을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와 1350년의 궁전 등을 영상으로 담고 발길을 옮겼다.
제일 하부에 있는 미트로폴리스 교회(어머니 교회)의 화려한 내부를 들어다보고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라 12시 5분 스파르타 시내로 향했다.
강인했던 스파르타 전사들의 정신력과 용맹했던 전투력을 상상 하면서 스파르타 시내에 들으셨다.
황색 단풍으로 가을을 재촉하는 마로니에 가로수와 야자수가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부근의 거대한 타이게토스 산맥이 병풍을 이루고 있는 비교적 넓은 분지인 스파르타 도시는 인구 2만 명의 소도시다
중심 도로변에 있는 식당에서 중식을 하고 중심 도로 끝에 있는 스파르타 왕(네오니다스)의 칼과 방패를 든 장부다운 강인한 모습 청동상을 영상으로 담았다.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의 산악지역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 1세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자 레오니다스는 뒤를 이을 아들 후손이 300명의 최정예 스파르타 병사를 이끌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함께 방어전을 폈다.
페르시아의 대군을 맞아 2일 동안 페르시아 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주면서 방어했으나 한 그리스인 배신자 에피알테스가 페르시아에게 테르모필레를 우회하는 샛길을 알려주었고 이를 우회한 페르시아 정예부대에 맞서 다른 그리스와 노예 병사들을 모두 남쪽으로 후퇴시키고 자신과 스파르타의 300명의 용사들은 이곳에서 끝까지 그 기개를 잃지 않고 싸워 장렬히 전사했다.
이 300명의 용사들과 레오니다스 왕을 기념하는 기념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이어 인접한 곳, 작은 동산에서 지금도 발굴 진행 중인 스파르타 유적 발굴 현장을 40여분에 걸쳐 그 옛날 찬란한 문화유적을 돌아보았다.
올리브 나무들이 원줄기가 한아름씩 되는 것이 많았는데 수백 년의 樹齡을 자랑하는 것 같았다.
아담한 스파르타 시내 전경을 동영상으로 담고 언덕을 내려와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라 14시 30분 올림피아로 향했다.
올림픽의 시초지이며 성화 채화의 도시인 올림피아로 가는 길은 2시간 30분 소요예정이다.
15시 10분부터 왕복 2차선 도로변은 검푸른 올리브와 밀감농장 곳곳에 송곳처럼 듬성듬성 서있는 사이프러스 지대가 계속 되었다.
17시 경 버스는 아주 불편한 농로 같은 곳을 대형버스인데도 잘도 지나가고 있었다.
드디어 올림피아 마을에 도착했다.
ANTONIOS 호텔 220호실에 짐을 풀어놓고 18시 30분까지 비교적 한적한 올림피아 마을을 주 도로 중심으로 둘러보았다.
올림피아(Olympia) 마을은 인구 1.000여명의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관광지답게 보석상과 액세서리와 대리석 소품 등의 상가가 즐비했는데 비수기라 그러한지 어둡고 조용했다.
19시에 저녁식사 후 호텔 방으로 들어갔다.
2017년 11월 11일(토) 맑음
아침 8시에 호텔을 나와 그리스 신화로 잘 알려진 제우스(바람둥이란 뜻) 신전으로 향했다.
올림피아는 엘리스에 있는 고대 그리스의 성소로, 경기는 4년마다 한번 씩 열렸으며, 올림피아 경기의 기원은 기원전 8세기(BC 776년)부터 시작 되어 AD 393년 사이에 4년마다 개최되어 293회나 계속되었다.
AD 349년, 1170년 만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올림피아 경기를 이교의 잔재로 여겨 폐지를 명하여 시설물이 많이 훼손되었단다.
입장권(6 유로)을 구입 올림피아 야외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이곳은 각 도시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펼쳤던 스포츠 제전이지만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 행사였다.
각 대표선수들이 기량을 펼쳐 자신과 도시국가의 명예를 높인 것은 물론 시와 음악까지 겨루었던 종합 문화 행사였다고 했다.
이곳의 유적은 1875년부터 지표 3~4 m 까지 발굴하여 2천5백년~3천 년 전 유물을 발견 하였다.
제일먼저 레슬링과 복싱경기가 열렸던 곳 짐나지움(Gymnasium)을 둘러보고 기원전 435년에 고대의 유명한 조각가 페이디아스에 의해 만들어진 하늘의 신 제우스를 본뜬 제우스 상을 만든 페이디아스(Pheidias) 작업장도 들려 설명을 들었다.
이어 가까이에 있는 제일 높은 곳의 제우스 신전은 도리아 식 신전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맞먹는 규모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3층 기단 위에는 앞뒤 6개, 측면에 11개, 총 3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높이 10.53 m 의 원기둥 아래쪽 지름은 2.23 m 이다.
현재는 상징적으로 복원된 한 개의 기둥만 서있다.
그 앞에 시상식이 열렸던 거대한 삼각형 대리석 등을 영상으로 담고 바로 옆에 있는 헤라 신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헤라 신전은 올림피아의 유적지 중 현재 그리스에 남아있는 신전 중 가장 오래된 BC 7세기에 지어진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을 모신 도리아 식 건물 신전이다.
가로 16개 세로로 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있다(높이 7.80 m).
해라 신전 앞에는 4년에 한번 씩 올림픽 성화를 채화하는 장소가 있다.
사진 앞
사진 앞 하얀 선이 있는 곳이 성화 채화 장소이다.
전체의 거대한 유적지에 남아 있는 돌기둥 등을 감탄의 눈으로 보면서 영상으로 담았다.
이어 가까이에 있는 육상 경기장에 들렸다.
현재 모습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다. 일부를 제외 하고는 자연 지형의 언덕을 깎아 관람석으로 하고 운동장 주위로는 작은 수로를 만들어 선수들이 이용토록 했단다.
돌로 만들어진 출발선에서 결승선 까지는 193m 이다.
경기장은 약 4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경기장 주위 둔덕에 돌로 만든 의자는 없었고 시상식자리만 돌로 남아 있었다.
시상식 자리에 올라서서 안내원이 만들어준 월계관을 우리일헹들 모두 한번 씩 쓰고 승리한 선수의 기분을 내어 보았다.
넓은 유적지를 간급하게 둘러보고 매표소 입구로 나오니 관광객들이 말려 들어오고 있었다.
9시 30분 고린도(Corinth)로 향했다.
고린도로 가는 주위 풍광은 완경사지 넓은 지역에 곳곳에 붉은 지붕들의 마을이랑 농가 주택들이 이국적이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버스는 계속해서 2차선 평원을 달리고 있었다.
주위는 대부분 수확이 끝난 일반 경작지이고 올리브나 밀감재배지는 간혹 보였다.
초록 융단을 이루고 있는 밀밭이 계속되고 있었다.
10시 20분 가끔 유리온실과 비닐하우스 등이 보이는 대평원이었다.
10시 50분 지나자 버스는 산록 변 이오니아 해안가를 달리고 있었다.
탁 터인 바다는 언제나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버스 내 TV에서는 그리스 영화 “맘마니아?”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안가의 주택들은 그림 같은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건물마다 옥상에는 태양광 시설을 해두었는데 우리나라도 그렇게 해야 하겠다.
11시에 빠다라 작은 항구를 지나고 부터는 왕복 6차선 도로가 이어 지는 데 차량 통행이 적었다.
이어 나타나는 이오니아 海를 가로지르는 대형 현수교가 이채로웠다.
버스는 계속하여 산록을 달리는데 터널이 자주 나타나드니 어느새 왕복 4차선으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해안선을 시원하게 달려 12시 10분 고린도에 도착 2차선 도로에 들어섰다.
고린도는 그리스 중남부의 펠로폰네시스 반도에 위치하며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약 80km 떨어져 있는 해발 566m의 돌로 된 언덕도시다.
BC 1000년경 그리스의 도리아인들이 정착 하였고 BC 146년에 로마에 함락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100년 후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된 도시이다.
지금은 인구 3만 명의 시골이지만 로마 시대에는 인구 60만 명의 부와 방탕의 도시로 유명했다고 했다.
고린도와 코린토스는 같은 말이다.
고린도의 아크로폴리스 신전이 있는 높은 산이 바라보이는 주차장에 도착하니 대형버스들이 몇 대 와있었다.
중식 후 14시 30분 고린도 박물관에 입장 (입장료 4유로)하였다.
박물관 광장에 있는 머리 없는 석상을 보니 탤런트 이순재 일행이 다녀간 것이 생각났다.,
박물관내 아우구스 전신상과 네로 황제의 머리모습 등 전시실 내 유물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동영상으로 담았다.
도리아 식 거대한 아폴로신전은 태양신 아폴론을 모시기 위해 BC 6세기경 38개의 원형기둥(높이 7.2m, 기둥직경 1.8m)이였으나 현재는 7개만 남아 있다.
옥타비안 신전, 해라 신전 등 모든 유적이 두 차례 지진으로 많이 파괴된 것을 복원과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단다.
고린도의 화려했던 그 옛날의 거대한 야외 박물관을 영상으로 담고 15시에 고린도 운하로 향했다.
왕복 10차선 도로를 15분 정도 달려서 고린도운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1893년 프랑스 기술진에 의거 12년의 공사 끝에 완공된 고린도 운하는 세계 3대 운하중의 하나이다.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사이에 있는 운하로 서쪽바다인 이오니아 海와 동쪽의 에게 海를 통과하는 운하다.
길이 6.4km, 폭 25m(바닥은 21m) 깊이는 70~80m 이고 수심은 10m이다.
석회암을 斜面으로 정교하게 잘라낸 면이 보기 좋았다.
우리가 방문하였을 때는 배 운항이 없어 다소 아쉬웠지만 이 운하로 운항거리를 430여km를 단축 할 수 있다고 했다..
다리를 통하여 고린도 운하 이쪽저쪽을 건너다니며 아름다운 고린도 운하를 둘러보았다.
16시 45분 아테네 시내로 향했다.
17시 30분 어둠이 내려앉는 아테네 시내는 교통체증이 심하고 전기 사정이 좋지 않은지 비교적 어두웠다.
교민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한식으로 저녁을 하고 18시 30분부터 야간광광에 나셨다.
조명에 빛나는 개선문을 끼고 있는 구시가지로 먼저 갔다.
온갖 상품을 진열 판매하는 골목에는 상당히 붐비고 있었다.
추억에 남을 볼거리를 부지런히 동영상으로 담아 보았다.
40여분을 둘러보고 걸어서 파르테논 신전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갔다.
약간의 언덕진 곳에 조명이 아름다운 야와 카페 우산 소나무 아래에서 은은한 음악과 함께 포도주를 들면서 마주하는 높은 성벽위에 거대한 파르테논 신전의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면서
그리스 아테네의 마지막 밤의 흥을 즐겼다.
호텔에 도착하니 밤 20시를 지나고 있었다.
첫날 투숙했던 XENOPHONE 호텔 125호실에 여장을 풀었다.
2017년 11월 12일(일) 맑음
아침 8시에 호텔을 나와 아테네 시내 괸광에 나섰다.
그리스의 아테네 시내골목은 골목마다 프랑스 파리와 비슷하게 5~6층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지진 때문에 고층건물을 제한하고 있단다.
골목에는 가로수 아래 도로 양측으로 승용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오늘 마라톤대회 행사 때문에 전국에서 모여든 마라톤 복장의 수많은 선수들이 모여드는 옆을 지나기도 했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 시내 정중앙에 있는 높은 언덕으로 신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신화의 땅이다.
이곳에 올라서면 아테네 시내 전경을 사방으로 잘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문명과 특징을 지니고 있는 도리스 양식 신전의 극치를 나타내는 그리스의 상징 파르테논 신전을 오르는 길은 올리브 나무숲을 지나는데 폭 5m정도의 대리석 계단 길은
관광객들의 발길로 닳아 윤기가 흐르고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제일먼저 남쪽? 으로 있는 관객 6,000명을 수용하는 헤토데스 아티쿠스 극장 겸 음악당을 찾았다.
중앙무대는 옛 모습 일부만 남았고 반원형 객석은 모두 복원을 해 두었는데 그 옛날 그리스인들의 음악 사랑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이어 거대한 돌기둥이 압도 하는 프로펠리아 계단을 오르면 출입구 오른쪽 높은 곳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위해 기원전 5세기에 세운 이오니아식의 날렵하고 아담한 나이키 신전이 자리 잡고 있다.
나이키 신전
프로펠리아의 긴 출입구를 지나 들어서니 넓은 바위(대리석)광장이 나왔다
좌측으로는 건물을 받치고 있는 여섯 명의 아름다운 소녀상이 있는 에릭테온 신전이 먼저 반겼다.
오른쪽 정면에는 수리중인 거대한 파르테논 신전이 우뚝 서있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BC 479년에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아테네인이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것으로서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이다
이는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총 감독 하에, 설계는 익티노스, 공사는 칼리크라테스의 손으로 진행되어 BC 447년에 기공하여, BC 438년에 완성하였다.
신전의 기초 부분은 동서로 약 69미터, 남북으로 약 25미터이다.
3단의 계단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주위로 모두 46개의 기둥이 둘러싸고 있으며, 정면과 안쪽에 8개씩, 측면으로는 17개씩 배치되어 신전을 떠받치고 있다.
도리스 양식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파르테논 신전은 얼핏 보기에는 직선과 평면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곡선과 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에서 균형이 가장 잘 잡힌 건축물로 기둥의 간격을 균일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시각 효과에 따라 다르게 조절하는 등, 사람의 착시까지 감안하여 곧바르고 균일하게 보이는 과학적인 건축법을 이용했다.
힘과 무게를 지닌 장중함을 자랑하는 파르테논 신전은 2,500년 동안 서구 건축의 모델이 되어 왔다.
여기에 신전에 모셔진 아테나가 지혜의 여신이어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신전은 교회, 회교 사원, 무기고 등으로 사용되면서 많은 손상을 입었다. 유네스코는 파르테논 신전을 제1호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하였고, 건물 측면 모습을 유네스코를 상징하는 문양 마크로 사용하고 있다.
1687년 9월 26일 신전 안에 쌓아 놓은 오스만튀르크의 화약더미가 마주보는 산 정상에 있는 8각형 바람의 탑에서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폭발 하면서 크게 훼손 되었다.
현재도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복원 중에 있다.
신전에서 바라다본 항만을 끼고 있는 아테네 시가지는 아침 햇살에 밝게 빛나고 있었다.
시내에서는 오늘 진행되는 전국마라톤 방송이 신전에 울러 퍼지고 있었다.
아테네 시내 전경을 사방으로 동영상으로 담고 9시 50분 맞은편에 있는 소크라테스가 한 달간 갇혔던 감옥이 있는 필로파포스 언덕으로 걸어갔다.
소크라테스(Soōkratés BC 470 ?∼BC 399)는 조각가인 아버지 소프로니코스와 산파였던 피이나레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계 4대 성인의 한사람인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는 무고한 죄명으로 갇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독배를 마시고 69세의 생을 마감한 곳이다.
커다란 암벽에 설치한 감옥은 3개의 녹슨 철창문이 있는데 거칠고 초라해 보였다.
관람을 끝내고 언덕을 내려와 10시 20분 아테네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해안가는 발코니가 있는 6층 내외의 미려한 아파트들이 해안선을 따라 그림처럼 아름답게 줄지어 있었다.
지진 때문에 고층 아파트는 없었지만 복잡 하지 않아 생활이 편리 할 것 같았다.]
11시 30분 공항에 도착했다.
아테네 공항은 규모도 작고 조용했는데 인천공항과 같은 시기에 준공했다고 했다.
이곳의 택시는 전부 노란색 이였다.
15시 30분 TK1850편으로 이스탄불로 향했다.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예정이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아테네 공항 주변은 경지정리가 되지 않아 경작지들이 무질서 했고
그 가운데로 나있는 포장도로 주위로 주택들이 산재되어 있었다.
흰 구름 사이로 민둥산이 자주 보여 조금은 삭막해 보였다.
17시 30분(시차 1시간 당김) 이스탄불 상공에서 내려다보니 산에는 임목도 많고 경지정리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경작지에는 파랗게 농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주택들이 별장처럼 신제된 곳을 지나 이스탄불 시내를 통과하기에 미국의 뉴욕처럼 시내 전역을 동영상으로 담을 수 있었다.
낙조가 드리운 공항에 17시 40분 가볍게 내려앉았다.
아테네 공항과는 달리 게류중인 비행기도 상당히 많고 복잡했다.
19시에 이스탄불 공항을 이륙하였다.
2017년 11월 13일(일) 맑음
8,530km를 9시간 30분의 긴 여정을 끝내고 12시경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