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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보이지 않는 중국문화 보기) 프로젝트로 프랑수아 줄리앙의 '무미예찬'에 대한 서평을 의뢰받았다.
10년도 더 지난 세월이 가고 이 글이 있나 검색을 해 보아도 나오지 않기에 여기에 올린다.
프랑수아 줄리앙의 ‘무미예찬’ 서평
안 세 환(흥덕교회 담임목사, 보령책익는마을 회원)
‘산책자출판사’에서 돌올한 문체로 빚은 현대적 사유의 즐거움 ‘산책자의 에세’ 시리즈를 내고 있는데, 그 책들의 제목과 저자를 살펴보니 롤랑 바르트, 바우만, 장 보드리야르, 프랑수아 줄리앙 등 저명한 학자들의 이름이 눈에 뜨이고, 또 그들의 눈을 통해서 사유한 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그 중의 한 권인 ‘무미예찬’은 ‘무미’ 또는 ‘담’(淡)의 미학으로 읽는 중국 문화와 사상의 무늬를 그리고 있다. 프랑수와 줄리앙의 이 책은 200여 쪽의 비교적 작은 책이다. 더구나 미주를 달아서 주석과 설명하는 부분만 40여 쪽이나 되기에 실제로는 160여 쪽에 지나지 않는 작은 책이다. 그렇다고 이 작은 책이 그렇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철학적 배경을 통해 간간히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동양적 소양이 있어야 읽을 수 있는 책인데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이 적은 분량 속에 중국 문화에 대한 담을 비교적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프랑수아 줄리앙은 그리스철학 전공자이면서 베이징대학교와 상하이대학교에서 중국학을 연구한 학자이며 현재 파리7대학 교수로 있다. 중국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저자의 예리한 눈에 비친 중국의 담이 무엇이며, 그 담을 통해서 읽은 것들이 무엇일까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무미예찬’은 서구인의 눈으로 본 중국 문화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단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호의 변화, 무미의 풍경, 무미-초연함, 중립의 의미 등을 통해 무미에 대해서 조명을 하고 있고, 사회, 음악, 침묵, 문학, 음식의 맛에 이르기까지 담을 설명하고 있다. ‘맛’에서의 ‘담’이 어느 한 가지 특정한 맛에 고착되지 않으며, 따라서 무한히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하듯이 담은 마치 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길이 끝나는 듯 싶으면 또 다시 길이 시작이 되고, 그 길이 계속 연결되어 있듯이 담으로부터 고착되지 않은 사유의 무한한 길이 내포되어 있다. 마치 유목민들은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이동이 자유로운 것처럼 담에도 그런 공간이 존재한다. 이것은 모든 사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며, 시, 음악, 회화 등 다양한 예술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치 소설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무한히 나오듯 담에는 그런 상상력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상상의 여유가 있다.
우리의 문화가 표준화되어 모든 것들이 획일적으로 이루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광고의 홍수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라는 암묵적 명령이며, 또 그 속에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당위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다양하고 다원화되어 있는 시대에 ‘담’의 묘미는 인간 원래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 주기도 하고, 문화와 예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단초가 된다. 그래서 저자는 담의 그림, 소리, 느낌을 직접 체험하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고 있고, 또 그런 느낌을 독자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한다. 이런 눈은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다. 가장 음미하기 어려운 것을 아는 것은 결국 그 문화와 예술의 가장 밑바닥까지 소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저자는 옛 중국 문화에 대해서 소통이 되고 있으며, 그 소통을 통해서 독자들에게도 같은 소통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중국에 대해 전문가적 소양을 갖추고 중국 문화와 예술에 대해 소통할 수 있는 글을 쓴 것에 대해서는 다행이다.
그러나 문제는 독자이다. 저자가 많은 연구와 그 연구에 대한 것을 글로 표현 할 때에 독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저자의 이 책은 중국 문화에 대한 것을 자국민 또는 서구인들을 위하여 쓴 글이다. 그런 책을 번역해서 내놓은 책이기에 서구인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이 우리의 눈에는 쉽게 들어오는 내용이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눈에 거스르기도 한다. 이미 우리는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먼저 이 책을 처음 대하는 느낌은 깨끗하고 깔끔하다는 느낌이다. 책의 표지는 흰색 바탕에 수묵화로 그린 매화꽃 가지가 아래로 쭉 뻗은 그림이 단아하게 오른쪽 위로부터 그려져 있고 왼쪽에는 저자와 역자의 이름이,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는 한글과 한문으로 ‘무미예찬’이 세로로 써 놓은 배열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 아래에 프랑스어 제목을 그대로 쓰고 있다. 동양화의 구상적 기법을 이용해서 표지를 디자인했다. 동양화에 대한 것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디자인했으며, 책 표지의 여백이 충분한 것은 바로 이 책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이 책을 보는 이들이 바로 그 여백에 눈을 돌리게 만들며, 여백을 통한 저자의 글이 표지를 통해서 주제가 나타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나는 미술이나 고서화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는 해도 이런 깔끔함이 ‘무미예찬’을 읽고 싶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 책이 눈에 띄었을 때 바로 이런 요인들 때문에 책을 읽고 싶은 충동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무미를 예찬을 한다는 것이 즉각적 판단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한다. 서구적 시각으로 볼 때에 그렇다는 말이다. 가장 맛없음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은 중국에 있어서 하나의 가치로 인정을 받는다. 물론 중국뿐만이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무미에 대한 예찬은 여백에 대한 예찬이라 할 수 있다. 중국 고전에 나타나는 살짝 미소 짓는 일이나, 눈웃음으로 나타내는 일들, 아니 눈빛만 보고도 서로 통하는 이심전심이 바로 여백이요, 무미의 모습이다. 저자는 풍경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예찬(倪瓚, 1301-1374)의 그림을 들어서 설명한다. 그러나 그림의 여백에 대한 담은 있지만, 그림에 있는 글에는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인다. 글로 표현한 내용이 중요한데 저자는 그림에만 관심이 있다. 글에 관심이 없기에 설명조차 없다. 아니 아예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듯 신경도 쓰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저자에게 있어서는 관심 밖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용을 알면 파고 들어가야 하고, 또 그렇게 되면 사유의 여백이 없어지기에 그림에 한정된 담을 이야기하고 있고, 독자가 그 담을 느끼라고 외치는 듯하다.
저자는 ‘맛’에 대한 담을 이야기 한다. 특별히 엄숙한 제사일수록 제례는 극히 단순하다. 생선은 익히지 않으며 탕은 간을 맞추지 않는다. 여기에는 바로 드러나지 않는 맛을 나타내는 맛의 여운이 있으며, 바로 이것이 맛의 담이라 주장한다. 맛에만 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도 그런 여운이 있다. 들리는 음악보다는 들리지 않는 천상의 음악이 있는 것과 같은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야말로 동양적 담의 본 보습이리라. 이것은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중국 고대사상은 순전한 물리적 현상인 ‘소리’와 조화의 가능성으로 이해된 ‘음’이 전후, 상하, 대소와 마찬가지로 상반된 짝을 이루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둘 사이의 긴장을 한층 더 심화시킨다”(69쪽)
논어의 예를 들면서 공자는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각기 자질을 인정받아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을 한다. 이에 한 제자는 작은 나라를 맡으면 그 나라가 딱한 처지에 있더라도 삼 년 안에 다시 일으키겠다고 하고, 다른 제자는 삼 년 안에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게 하겠으나 윤리 기강을 잡는 일은 다른 현명한 이에게 맡기겠다고 한다. 세 번째 제자인 점은 조용히 비파를 타고 있다가 줄의 울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늦은 봄에, 봄옷이 마련되면, 동료 대여섯 명, 아이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을 쐰 후, 함께 노래하며 돌아오는 것입니다”는 대답을 하는데, 이에 공자는 점과 함께 하겠다고 선언한다.
바로 이 장면에서 앞의 두 사람은 작은 포부이기는 하지만 정치적 차원의 포부를 담고 있고, 그 자리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선생님 앞에서 자신있게 말을 한다. 그러나 점은 아예 등을 돌린 다른 차원의 대답을 한다. 저자는 바로 이런 여유의 담을 읽는다. 담은 초연이면서도 힘이다. 음악, 회화, 시, 서예, 무예, 음식과 대화에 이르기까지 중국적 사고의 모든 근원에는 바로 담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담이 있기에 건조함이 없고, 고요하며 차분한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그림을 보더라도 사실적으로 나타나는 그림은 실제로 우리 눈에 보이지만 실제는 아니다. 사실처럼 그리고 있는 부분보다는 그리지 않은 부분이 더 많으며 그런 부분을 읽을 수 있어야 제대로 된 그림을 보게 된다. 저자의 여러 가지 주장들을 살펴보면 바로 이런 것들을 내세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여유, 아니 보이는 것들의 이면에 있는 보이지 않음을 통한 무한한 사유가 바로 담의 모습이며, 이런 담을 읽고 볼 수 있어야 중국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남의 문화를 아는 것은 보이는 부분만 보아서는 알 수 없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어야 제대로 보는 것이듯, 예술로 나타나는 것들의 이면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제대로 된 눈이다. 그런 면에서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은 저자의 눈을 통해서 중국의 문화를 읽는 방법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그 방법을 통해서 읽는 저자의 심정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게 해 준다. 문화나 예술을 통해서 바라보는 이는 그 내용을 알았을 때 입가에 웃음이 인다. 내용이 통했다는 말이다. 문화재나 옛 그림을 보면 바로 그런 여백의 웃음이 있다. 저자는 그것을 발견했다. 그 발견을 독자들도 함께 읽고 느끼라고 한다. 함께 공유하자고 한다. 그런 공유를 독자들이 느낀다면 이 책은 성공이다. 책을 쓴 의미는 확실하다.
역자인 최애리는 ‘역자 후기’에서 “중국인들은 회화, 음악, 요리, 시문 등에서 맛이 아니라 맛-없음을 더 추구할 만한 가치로 친다는 ‘역설’적인 미학을 지적하고, 같은 감수성의 바탕이 유불선 사상에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논파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맞는 말이다. 미처 생각지 않던 것들에 대한 이런 담을 느껴 보라. 문화와 예술 속에서 ‘담’을 보라! 서양 철학자의 눈에 비친 중국의 문화와 사상이 여백, 담이라고 한다면, 그 담을 통해서 우리가 느끼고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독자의 몫이다. 그 여백이 이 책에 있으며 이 책을 통해서 담을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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