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마라도 기행
설우 김순국
해상의 파고가 높으면 갈 수 없는 섬...그런데 운 좋게 파고는 제로에 가깝고 약간 구름이 꼈지만 시야는 밝았다. 25분 간 정기여객선을 탔다. 안내하는 남자분의 코믹한 설명을 들으며 웃다보니 다 왔단다. 일 년 중 드물게 좋은 날, 암벽으로 된 부두에 고무 두른 뱃머리를 맞대고 한 사람씩 조심스럽게 내렸다. 가파른 계단을 삼십여 개 오르자 우리를 마중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골프장에서 사용하는 작은 4륜 차와 자전거 대여하는 사람들이었다.그들의 호객행위는 배에서 곧 내린 우리를 당황케 했다. 정말 많은 4륜차와 자전거가 풀밭 위에 대기 상태였다. 눈앞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은 짜장면집들의 커다란 간판이었다. 유명 연예인들 사진이 들어있는 간판이어서 그들이 다녀갔다는 것인지 그들을 홍보하는 것인지 이런 첫 인상은 좀 떨떠름했다.
섬을 한 바퀴 도는데 4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왜 차를 타려하는 지 모르겠다고 친구와 이야기하며 잔디광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풀밭에는 노란 개 민들레가 드문드문 피었고 삘기꽃이 솜이 되어 민들레처럼 씨를 날리고 있었다. 숱을 잃은 억새들, 여전히 고운 보랏빛 엉겅퀴, 진한 향을 날리는 백합들.... 이들은 자신을 반가워하는 사람에게 자잘한 기쁨을 돌려주었다. 포장도로를 차나 자전거로 돌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기쁨의 순간들을 놓치고 있는 줄조차 모를 것이다. 잔디밭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는 나의 발은 행복하기만 했다.
친구는 “죽은 자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것은 걷는 것이다” 라고 누군가 말했다며 혀를 찼다. 인생은 그래서 선택이라 하지 않았는가...
짜장면집 보다 지붕이 낮은 마라초등 분교는 정말 미니학교였다. 올해 입학생이 두 명뿐이라니...낮은 돌담으로 고개를 내민 풍성한 수국이 하늘색을 띄고 있었다. 정낭 세 개가 가로 질러져 일요일이라고 다시 인식 했다. 이제 몇 년 안남은 교사의 길에서 올인하고 있는 친구를 정낭 교문 앞에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송당초등학교‘ 란 시골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그 곳에서 은퇴를 했으면 하는 친구...이 곳에도 지원했던 적이 있지만 승급점수 획득으로 오히려 경쟁이 세었다고 했다.
어느 대문 없는 돌담 앞에 주인 대신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는 분홍과 진홍색 접시꽃들이 내 키만 했다. 그 집 마당에는 ㄱ자로 된 백합화단이 있어 우리의 발길이 절로 마당으로 들어섰다. 집주인의 꽃 사랑이 대단한 것 같았다. 스레트 지붕의 작은 집은 예사롭지 않은 사람의 채취가 묻어있어 보였다. 낡았지만 깨끗하게 닦인 유리문이 닫쳐 있어 어떤 사람이 그 집에 살고 있을까하고 궁금해 했다.
이 섬은 부두 쪽만 코를 트고 내려갈 수 있게 한 것처럼 높은 절벽으로 에워싸여 있다. 해안을 돌아 걸었다.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는 ‘쵸코렛 박물관’이란 유럽스타일 목조건물이 초원 위에 앉아 있었다. 입구의 작은 판매소엔 육순의 아저씨가 혼자 초코렛 판매대에 계셨다. 알고 보니 대정 농공단지 내 ‘초코렛 공장과 박물관’의 브렌치 판매소였다. 우리는 선인장 초코렛과 포도스러시를 사서 그 건물 앞 벤치에 앉았다. 우리가 앉아있는 건물 처마의 스피커에서 귀에 익은 팝송이 흘러나와 로멘틱한 분위기를 맛보았다. 그 때 수 많은 골프 차가 지나가다 잠시 멈춰 이 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떠나갔다. 같은 행위를 똑같이 따라하는 사람들을 보니 무성 코미디영화 속 필림이 돌아가는 것 같았다. 최남단이라는 비석 앞이나 어디에서도 똑 같이 이렇게 기념 촬영을 하고 가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최남단까지 진출했다는 의미를 부여하는 건물들이 많았다. 최남단 등대, 최남단 사찰, 교회 그리고 성당 등이다. 종교의 상징이 저마다 높은 곳에서 높다랗다. 영역을 의식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는 듯 보였다. 그런데 마라도성당은 소라껍질을 엎어놓은 것처럼 지붕과 황토흙을 발라서인지 매우 아담하고 섬과 어울리는 친환경적 건축물이어서 더욱 아름다웠다. 안을 들여다보니 원룸으로 마리아상과 교단 그리고 방석 몇 개가 놓여있다.
12시 40분 배를 타기로 했던 차라 정오 무렵, 우리는 다섯 개의 짜장면집 중에 ‘정직한 맛, 낚시꾼과 시인이...짜장면집’이라는 문구가 들어있는 가게로 들어섰다. 주인이며 요리사인 남자가 짜장을 볶으며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습니다...”하고 노래 부르듯 되풀이하고 있었다.
톳짜장면을 어떻게 만드냐고 그에게 물었더니 말린 톳을 부산에서 갈아가지고 온단다. 밀가루반죽할 때 같이 넣고 밀어두었다가 기계로 면을 뺀다고 설명해주었다. 내가 주의 깊게 듣자 아예 반죽한 것을 가지고와 보여주었다. 이때를 놓칠세라 사진을 찍었다. 그가 납작하게 밀어 만든 반죽을 손바닥 위에 얹은 사진은 컴퓨터로 재생하니 광고사진으로 쓸 수 있겠다싶을 만큼 배경도 그럴 듯 했다. 짜장면 맛은 5,000원, 가격만큼 쫄깃하고 맛있었다. 잘 먹었다는 포만감이 그 주인의 진가를 인정했고 그가 맛을 내기 위해 쓰는 것이 필리핀에서 수입해오는 사탕수수 100% 흑설탕이라는 것도 알았다. 생협민중교역1호 마스코바도 설탕이라는 글이 쓰인 포장지를 보여주어 그 밑에 쓰인 현지 어린이를 도와주고 있다는 설명도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진 정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을 나오면서 고개 숙여 인사할 때 ‘다시오겠다‘는 말을 했다. 나도 모르게 한 약속이었다. 가족을 대동하고 한 번 더 오리라는 생각이 배를 타고 떠나면서도 들었다. 웬지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내 말에 대한 책임 때문이라기 보다 그 섬이 매력이 있어서인 것 같다. 아마 로맨틱한 무드가 있어서 일 것 같다. 절해고도의 섬이 상업화되고 있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물새들이 쉬는 곳이고 아직 보물찾기를 더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었다.
사실은 더 고독하게 앉아 있고 싶다. 하룻밤 머무르며 노을에 흠뻑 물들고 싶다. 그러면 마라도의 깊은 내면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