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왕후 스토리텔링의 내용 중에서 과학적인 검증 자료를 원하시는 분은 도마 박물관을 방문하셔서 관련자료(사진)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1.고고학(인문과학)
주후 42년 3월 3일(음력) 세례를 받고 12일 지난 후 3월 15일(음력) 부활절날 왕위에 오른 가락국의 초대왕인 김수로왕은 스키타이라는 나라에서 온 사람입니다. 스키타이는 신약성경 골로새서 3장11절에 나오는 스구디아와 같은 나라이며 기마민족입니다.

김수로왕 청동솥
김수로왕은 경남 김해의 구지봉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자신이 왕이 될 것을 선포하고 영대왕가(찬송가)를 부르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때 나이는 20세 전후가 되었고 키는 2m 정도이며, 얼굴은 서양인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김해 대성동에 있는 가야시대 고분에서 발견된 청동 솥솥 기마 민족이 사용하였던 것임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2.생물학(자연과학)
허 왕후는 주후 48년 인도에서 김해의 김수로왕에게 시집왔습니다. 대성동 고분에서 나온 허 왕후 후손의 뼈를 서울대학교 김종일, 서정선 교수가 DNA를 분석해 보니 인도의 타밀인과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2008.3.8 KBS 스페셜 방송) 허 왕후는 가락국기에 의하면 하나님(상제上帝,?엘 샤다이)의 계시가 인도 아유타국왕인 허 왕후 아버지에게서 있어서 시집왔고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허왕후 소엽종(좌) 대엽종(우)
전설에 의하면 허 왕후는 시집올 때 차(茶)씨를 가져왔다 하였는데 근래에 허 왕후가 가져온 대엽종 차나무의 군락지가 김해에서 발견되었고 이를 재배하고 영농조합을 만들어서 ‘장군차’라는 이름으로 시판하고 있어서 이 전설은 사실로 입증되었습니다. 또한, 가야지역권 안에 있는 경남 하동군 진교면 백련리 새미골 도요지에서도 대엽종이 발견되었습니다. 대엽종차는 잎의 외형도 기존 한국의 소엽종과 다를 뿐 아니라 성분도 다른 것이 생물학 분석 결과 입증되었습니다.
3.지질학(자연과학)
주후 48년 7월 27일(음력) 허 왕후가 인도에서 배를 타고 시집오면서 첫 번째로 한국에 도착한 곳은 국제 항구였던 망산도(1)<현재 경남 창원(진해)시 용원동>였습니다. 밀물을 타고 김해만으로 들어와서 망산도(2)<현재 김해평야에 있는 죽도>에서 저녁 7~8시쯤 김수로왕이 제공하는 작은 배로 갈아탔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별포(현재 봉황동 유적 나루터)였습니다.

망산도 비석 봉황동유적
이 항해의 길은 사도 도마가 한국에 왔던 길과도 같습니다. 당시 김해 만은 바다였는데 군함으로 사용될 수 있는 큰 배만도 500여척이나 되었습니다. 이런 김해 바다는 가야국이 철의 왕국이 되어서 낙동강 상류의 나무가 벌목되고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토사가 내려와서 주후 4세기에는 김해 바다가 모두 김해평야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야국은 해상왕국 시대가 지나고 주후 532년 신라에 합병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지질학적인 연구 결과로도 나타나 있습니다.(참고 문헌:부산의 지사(地史)와 경관, 윤선, 장두곤 지음. 부산라이프 신문사,1994년)
4.문헌학(인문과학)
가락국기는 경남 김해의 금관지주사(주후 1075~1082)가 기록한 것을 삼국유사 2권에 편집하여 넣은 것입니다. 가락국기를 분석하여 해설한 책이 가락국기 해설입니다.(조국현 지음, 사도 도마 시리즈 3권 273~340페이지, 2008.4.30 도서출판 동서남북)
삼국유사는 일연스님(주후1206~1289년)이 지었는데 3권 금관성 파사석탑 부분에는 김수로왕과 허 왕후의 시대에는 불교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주후452년에 왕후사를 세웠으며 장유사가 지어진 때는 그 후 500년 뒤라고 하였습니다. 불교는 주후372년에 처음 고구려에 들어왔으며 신라에서는 528년에 공인 되었습니다.
5.금석학(인문과학)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에 있는 사도 도마 기념석상에 새겨진 히브리어 글자 도마(타우?, 멤?)는 히브리어 글자를 알면 읽을 수 있고 헬라어(그리스어), 아랍어, 산스크리트어 등을 알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또 도마석상 좌측 하단에 새겨진 작가의 호인 지전행(地全行)은 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예 서체가 한나라시대(기원전 202~기원후 220년)에 사용되었던 글자 형태였음을 알면 사도 도마 석상이 불교가 들어온 주후 372년 보다 빠른 시대에 제작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참고도서:서예 대자전 상하권, 복견 중경 편저, 1986.6.25. 미술 문화원 발행)
6.역사학(인문과학)
사도 도마 이야기(2006.4.16. 도서출판 동서남북)를 저술한 정학봉 박사는 숭실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역사철학을 전공하였으며 인도에만 18차례 답사하였습니다.
7.답사(과학적 확인)-선장으로서 배를 타고 항해하는 양택석 선교사는 가락국기의 내용을 검증하기 위하여 인도에서 한국의 김해까지 답사한 후 영국해운항해 자료를 근거로 주후 48년 5월~7월 29일(음력)까지의 항해 가능성을 작성하였습니다. 주후 1세기 가야국은 기독교(基督敎)국가였다.(조국현 지음, 2008.3.5 도마 박물관 발행)는 가야지역 답사 결과이며 현재 성지순례 안내 책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사도 도마의 연구와 도마 박물관이 있기까지가 과학적으로 정확히 검증되는 것은 가야가 기독교(基督敎)였다는 사실이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학적 확인과 확인 자료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 도마 박물관이 있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허왕후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지기까지 문헌 및 유물이 발견되었고 연구 답사 및 학술적인 검증의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독후감>
한국 기독교역사 다시 쓴다
기독교, 가야시대 ‘도마’에 의해 들어와... 1884년 알렌 선교사 입국보다 1천800여년 앞서
조국현 도마박물관장, 삼국유사 내 가락국기와 가야유적지, 도마 기념석상 등을 통해 밝힘
조선시대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 기독교가 가야시대에 유입 것으로 조사돼 국내 기독교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1세기(1~100년)경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도마에 의해 가야시대 들어온 기독교는 고구려(327년)와 백제(384년), 신라(527년 공인)에 전해진 불교보다 300~50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조사됐다.
6일 삼국유사의 가락국기편 해설에 이어 가야유적지 현장조사에 참여한 조국현 목사(도마 박물관장)에 따르면 1884년 9월 미국 북 장로회 소속 알렌 선교사의 입국을 한국 개신교의 시작점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보다 1천800여년 앞선 가야시대 김 수로왕 (41~199년, 158세 사망)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도마’에 의해 기독교가 들어왔다.
이 같은 사실은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에서 발견된 사도 도마 기념석상에서도 입증하고 있다.
기마민족인 스키타인이라는 나라에서 온 김 수로왕은 주후 42년 3월 3일(음력) 도마에 의해 세례를 받고 같은 달 15일 부활절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김해 대성동의 가야시대 고분에서 발견된 '청동 솥'도 기마민족이 사용하던 것으로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허 왕후는 주후 48년 인도에서 김해의 수로왕에게 시집 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나온 허 왕후 후손의 뼈를 서울대학교 김종일, 서정선 교수가 DNA 분석결과 인도의 타밀인과 일치한다는 결과를 도출해 이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기독교인인 허 왕후는 하나님(上帝)의 계시를 받은 인도 아유타 국왕인 아버지의 권유로 수로왕에게 시집 온 것으로 가락국기는 전하고 있다.
김해지역에 전해 내려온 허 왕후가 시집올 때 가져온 대엽종 차(茶)씨도 근래 대엽종 차나무의 군락지가 김해에서 발견되면서 전설이 사실로 입증됐다.
대엽종차는 잎의 외형도 기존 한국의 소엽종과 다를 뿐 아니라 성분도 다른 것이 생물학 분석 결과로 입증됐다.
가락국기는 허 왕후가 인도에서 배를 타고 시집온 날짜와 경로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서기 48년 7월 27일(음력) 허 왕후가 한반도에 도착한 곳은 국제 항구였던 망산도<1>(현재 경남 진해시 용원동)였다.
밀물을 타고 김해만으로 들어와서 망산도<2>(현재 김해평야에 있는 죽도)에서 오후 7~8시쯤 김수로왕이 제공하는 작은 배로 갈아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별포(현재 봉황동 유적 나루터)였다.
이 항해 길은 사도 도마가 한반도에 왔던 길과도 같았다.
사도 도마 이야기를 저술한 정학봉 박사는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에 있는 사도 도마 기념석상에 새겨진 히브리어 글자 도마(타우?, 멤?)는 히브리어 글자를 알면 읽을 수 있고 헬라어(그리스어), 아랍어, 산스크리트어 등을 알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도마석상 좌측 하단에 새겨진 작가의 호인 지전행(地全行)은 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예서체가 한나라시대(기원전 202~기원후 220년)에 사용되었던 글자 형태였음을 알면 사도 도마 석상이 불교가 들어온 주후 372년 보다 빠른 시대에 제작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 박사는 숭실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역사철학을 전공했으며 인도만 17차례 답사했다.
양택석 선교사는 가락국기의 내용을 검증하기 위해 인도에서 한국의 김해까지 배를 타고 답사한 후 영국해운항해 자료를 근거로 주후 48년 5월~7월29일(음력)까지의 항해 가능성을 작성했고, 조국현 도마 박물관장은 ‘서기 1세기 가야국은 기독교(基督敎) 국가였다’란 가야지역 답사 결과를 책으로 엮어냈다.
조 관장은 “1988년 답사 도중 경산에서 목자상과 성도상의 두 개 석상을 발견했는데 기독교적 유물임을 보고, 가야시대 때 대구에 기독교가 들어왔음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김 수로왕은 변한 12국을 통합해 철의 제국 가야를 건국한 왕이며,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로 해상 무역을 장악하며 뛰어난 철기문화를 이룩한 가락국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가락국기는 김해의 금관지주사(주후 1075~1082년)가 기록한 것을 삼국유사 2권에 편집해 넣은 것이며, 가락국기를 분석해 해설한 책이 가락국기 해설집이다.
/언론인홀리클럽 공동취재반
문의 : 조국현 목사(도마 박물관장, 가야기독역사 최초 발견자, 공군소령제대, 말씀교회 담임목사, 대구 성시화 운동본부 사무차장)
010-4391-4006, E-mail:goodnewsad4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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