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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찰생태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두레 조채희
■ 무왕의 꿈, 백제의 신도시 / 익산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서동이 머리 깎고 신라로 가서 마[薯]를 가지고 동네 아이들을 먹이니, 아이들이 친하게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 브르게 했는데, 그 노래에 ‘선화공주님은 남그스기(몰래) 얼어[嫁]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몰래) 안고 간다’라고 하였다. 동요가 서울에 퍼져 대궐에까지 알려지니 백관이 임금에게 간하여 공주를 먼곳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 1말[斗]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갈 때 서동(薯童)이 도중에 나와 맞이하며 함께 가고자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지는 모르나 공연히 미덥고 기뻐서 따라가며 몰래 간통을 하였다. 그 후에서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은 것을 알았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 무왕(武王)조에 나오는 이야기로, 서동이 선화공주를 만나게 된 인연사를 적은 부분이다. 그 후, 공주가 살림에 보태 쓰려고 금을 꺼내놓자 서동은 마를 캘 때 많이 보아온 것이라며 달려가더니 금덩이 다섯 개를 주워왔다. 공주는 기뻐하여 사자암 지명법사를 통해 도술로 부왕인 진평왕에게 금덩이를 보냈다. 그리고 후에 서동은 백제 무왕이 되었다. 어느 날 왕후와 함께 사자암을 찾아가다가 용화산 아래 큰 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므로 그 못을 메워 절을 세우고 이름을 미륵사라고 하였다. 이 설화의 무대는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 용화산에 있는 백제시대 최대의 사찰 미륵사 절터이다. 이번 답사는 백제의 신도시 익산을 돌아보기로 한다. 익산으로 가는 길은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익산교차로에서 꺾어 들어가지만, 가람 이병기 성생의 옛집을 돌아보기 위해 호남고속도로 논산에서 연무를 지나 여산으로 간다. 저수지를 지나면 금마이다. 삼한시대에 이곳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마한을 세웠고, 이어 백제 온조가 마한을 병합하면서 금마저(金馬渚)라 이름 붙였고, 무왕 때 공주 부여와 함께 3경(三京)이 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나선다. 백제 후기 당시 이 지역은 백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왕궁평성(王宮坪城)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문무왕이 이곳에 보덕국을 세우고 한때 고구려 유족인 인승을 보덕왕으로 임명한 적이 있었다. 또, 후삼국 때는 견훤의 웅거하면서 통일을 축수했던 곳이기도 하다. 군내의 왕궁면이라는 지명도 이러한 역사에서 유래한다. 이만하면 ‘왕궁’이라는 이름에 기죽지 않을 역사가 아니겠는가. (고도리 불상) 금마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왕궁면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불상에 대한 신앙성이 약화되어 불상의 자세가 경직되고 고유의 신체비례도 조금씩 깨어지기 시작한다. 특히, 고려 후기에 들어서면 부처의 상호가 점점 인상(人像)으로 바뀌어 가면서 더러는 불상인지 인상인지 파악이 안될 정도의 파격적인 상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들 대개는 민간에서 조성한 것으로, 절집과는 상관없이 노천에 그냥 세워지는 경우가 많다. 호칭에 있어서도 ‘미륵’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같은 고려 후기의 양상은 외세의 침략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민중들이 새로운 사회[미륵세계]를 갈망하게 된 데서 비롯된다. 이와같이 미륵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간신앙은 불상의 상호를 빠르게 토속화시켰는데, 이른바 ‘민불(民佛)’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불상들이 그들이다. 왕궁으로 가는 길 오른쪽 들판 가운데 장승과도 같은 2기의 불상이 서 있다. 이것이 고도리 고려석불이다. 고도리는 고도(古都)이다. 보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는 2기의 석불은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제작연대는 은진미륵이나 대조사석불보다 훨씬 나중인 고려말기 때로 추정된다. 높이가 4미터를 웃도는 이 불상들은 사다리꼴 돌기둥에 파주 용미리석불과 같은 사각형 관(冠)을 쓰고 있다. 관을 쓰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려불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각형 얼굴에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이 차분하고 은근한 미소를 만들어내고는 있지만, 앞선 시대의 상호와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종교적인 신비성이나 숭고한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마치 분묘의 문인석(文人石)이나 마을의 수호신상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그래서 유홍준 등은 아예 ‘고도리 석인상(石人像)’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관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人像)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석불’로 세웠다는 점이다. <조선금석총람> ‘익산 쌍석불중건비문’에 나와있다. 이 불상은 절터가 아닌 허허벌판에 서 있다. 그래서 이 불상을 두고 풍수비보설이 끊임없이 거론되었다. 전해오는 여러 전설들이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전설 하나. 이곳의 형국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그 트인 한쪽으로 금마땅의 지기가 빠져나간다. 기가 나가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 봉분과 흡사한 흙더미를 쌓고 수구막이로 세워놓았다는 것. 전설 둘. 금마땅에 재액이 잘 드는 것은 말[馬車]국의 금마땅에 마부(馬夫)가 없는 까닭이라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그 마부역으로 2기의 석불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석인상이라는 견해가 나왔는지도 모르지만... 전설 셋. 석불상이 서 있는 개울[옥룡천]은 만경강 지류이고, 밀물 때면 가까운 바다로부터 밀물이 들어와 농사가 어려웠다. 촌장 꿈에 제석천이 나타나서 석인을 세우라고 했다. 전설 넷. 두 불상은 부부불상인데, 매년 음력 섣달 해일(亥日) 자시(子時) 깊은 밤에 둘이 남몰래 만나 일년 동안의 회포를 풀다가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리면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런저런 전설들을 주워먹으며 왕궁리 오층석탑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고도리 들녘에서 보면 왕궁리 오층석탑이 멀찌감치 건너다 보인다. (왕궁석탑) 보물 제44호인 왕궁리 오층석탑은 거기서 5백미터 남짓한 도로변 왼쪽 둔덕에 서 있다. 눈높이가 높은 둔덕 탓일까, 첫눈에도 매우 튼실하고 당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멀리서보면 경쾌하고 가까이 다가서면 장중한 느낌을 주는 탑이다.조선말기에 출판된 <금마지(金馬誌)>에 ‘왕궁탑은 페허지 궁터에 높이 십장(十丈)되는 마한시대의 탑이 있다’라고 되어 있으나, 석탑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이 탑 앞에 서면,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는 추억 하나가 밟힌다. 두레 창립 초기의 일이다. 이 탑이 백제탑일 가능성이 높다는 나의 설명에 대해 처음 참가한 어떤 회원이 자신이 갖고온 책을 코 앞에 들이밀더니 조목조목 따지면서 반론을 폈다. 전공자도 아닌 데다 답사 경력도 미천했던 나는 짧은 알음알이로 궁색한 변명만을 널어놓다가 결국은 은근히 ‘무승부’를 기대하며 어물쩍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회원은 내가 완전한 백기를 들고 무릎 꿇기를 바라는지, 버스 안에서도 계속 질문 아닌 공세를 폈다. 결국은 여러 사람들 보는 가운데 백기를 들고는 얼굴이 뻘게지고 말았다. 물론 다음 일정의 답사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서울로 돌아와서 며칠 꼬박 왕궁탑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느라 며칠 밤을 꼬박 세웠다. 이 학설, 저 주장 ... ‘백제탑일 가능성’과 함께 ‘고려탑이 아닐 가능성’을 일일이 메모해서 다시 그 회원과 만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회원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간혹 그런 단세포적인 사람들을 본다. 자기것은 없고 남의 것만으로 잔뜩 무장(암기)하고는 함부로 날뛰는, 이것이 입시위주의 죽은 교육을 받은 요즘 젊은이들이 지닌 공통된 흠이다. 유명세 앞에 그저 꺼벅 죽는 어딘가 덜 떨어진 지식의 람보들이 우리 시대에는 예상 외로 너무나 많다. 각설하고-. 이렇듯 학자들도 이 탑을 두고 말들이 많다. 그것은 이 탑의 나이 때문이었다. 즉, 이 탑의 조성시기에 대한 논란이었다. 높이 약 8.5미터인 이 탑은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외형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백제탑으로 알려지기도 했고, 기단과 탑신부를 쌓아올린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탑으로도 알려졌으나, 1964년 해체 복원과정에서 고려 때의 석탑으로 결론이 났다. 한마디로 말해서 백제와 신라의 형식을 섞어서 만든 고려 초기의 탑이라는 결론이었다. 그 논란으로 말미암아서 이 석탑은 보물에서 국보로 상향조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필자는 어정쩡한 결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근래 ‘官宮寺’니 ‘宮寺’니 하는 글짜가 새겨진 백제시대 기와조각이 다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절 이름에 ‘官’이니 ‘宮’이니 하는 명문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왕궁의 원찰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피사의 탑처럼 요즘 조금씩 ‘백제탑’으로 견해들이 기울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물론, 그와는 180도로 다른 이런 전설도 있기는 하다. 후백제 견훤이 칼을 휘둘러 고려 왕건과 신라를 괴롭힐 때, 한번은 왕건이 이곳까지 와서 전주(완산) 쪽을 바라보며 도선국사에게 견훤을 타도할 비책을 물었다. 그때 도선이 ‘완산은 개[狗]의 형국이기 때문에 꼬리에 해당하는 이곳에 탑을 세워 개의 꼬리를 눌러놓으면 견훤이 꼼짝을 못할 것’이라고 귀띰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완산땅에 해[태양]가 사라져 사흘동안 밤이 계속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전설. 흔히 백제계 탑은 3형제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지 석탑이 큰형, 부여 정림사지 석탑이 둘째형, 이곳 왕궁리 오층탑이 막내다. 그런데, 첫째와 둘째는 백제의 적자탑으로 여지만, 막내인 이곳 왕궁리탑만은 굳이 백제의 서자탑(?)으로 일부에서는 천대하고 있다. 그래서 첫째와 둘째는 국보로 해두고 이 탑만은 아직 보물로 해두고 있어서 유감이다. 백제계 석탑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 탑도 멀리서 보면 나무로 짜맞춘 목탑처럼 보인다. 이 탑의 기단부 구조는 목조건물 짓듯이 네 귀의 주춧돌 위에 사각의 높은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5층 탑집을 올렸다. 기단부는 온전히 신라 양식이다. 기단 안에는 잡석과 흙을 다져넣었는데, 그 속에서 백제시대 기와조각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이는 고려 때 이 석탑을 올릴 당시 부근에 백제 때의 뭔가가 남아있었음을 의미한다. 기단부 심초석에 설치된 사리공(孔)은 품(品)자 형으로 세개의 구멍이 나있는데 하나는 이미 도굴이 되고 나머지 구멍에서는 청동여래입상과 청동방울,향(香) 등이 발견되었다고 발굴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기단부 위에 탑신받침이 있고, 그 위에 탑신이 서 있다. 초층탑신은 좌우에 우주를 놓고 가운데 탱주를 놓았다. 탑신 위에 얹은 지붕돌[지붕돌]은 백제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추녀가 얇고 평평하며, 우각(隅角:처마끝)에서 가벼운 반전을 보여주는 것부터가 우선 백제양식이다. 그래서 백제계 탑들의 지붕은 대개가 경쾌하고 가볍다.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을 비롯해서 서천 비인오층석탑, 부여 장항리 삼층석탑, 계룡산 남매탑, 정읍 은선리 석탑, 강진 월남사지 석탑 등등이 다 그렇다. 특히 이 탑의 아름다움은 기하학적인 구조에서 온다. 특히 초층의 처마끝과 오층의 끝점을 선으로 이었을 때, 각층의 처마끝이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정도이다. 시인 황지우의 말마따나 ‘줄자로 퉁긴 듯한’ 선이다. 왕궁탑의 지붕돌받침은 각층이 모두 3단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3단이 모두 따로 되어있다는 점이 신라탑과는 양식이 크게 다른 점이다. 신라탑은 받침의 층급이 5단씩이나 되면서 대개가 지붕과 한몸인 통돌로 되어있다. 처마 끝에는 풍경을 매달 수 있는 풍령공(風鈴孔)이 뚫려져 있는데, 이는 삼국의 탑 모두가 그랬다. 위층의 탑신에는 탱주가 별도로 없고, 우주만 모각되어 있다.현재 상륜부에는 노반,복발,앙화,보륜 등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다. 1965년 해체보수 중 초층 지붕돌 중앙에서 각각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리공에서 나온 개금동함(蓋金銅涵) 속에는 녹색유리로 만든 사리병인 장경원저병(長徑圓底甁)과 금강경(金剛經) 등이 나왔다고 한다. 특히 사리장엄구에 대해서 고 최순우 선생은 ‘호사스럽고 다양해야만 정성이 깃들여 있다거나 또 아름답다는 속된 솜씨가 아니라, 목욕재계하면서 기도하면서 만든 청순한 아름다움이 이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어느 책에선가 말한 적이 있다. 1965년 해체복원 때 총감독은 김천석(千石)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해체 도중 지붕돌 사이에서 천석(千石)이라는 글짜가 새겨진 꺾지쇠가 출토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명문을 창건 당시 책임자의 이름이라며 불가사의한 인연을 두고두고 입에 올렸다. 불가사의한 일은 1천여년 전에도 있었다. <삼국사기> 무열왕조에 보면 ‘ 六月 大官寺 井水爲血 金馬郡地流 血廣五步’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왕궁탑[大官寺] 지역에 있는 우물의 물이 피빛으로 흘렀다는, 그래서 서해바다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백제 멸망의 징조를 나타낸 기록이다. 돌아나오면서 다시 힐끔 돌아본다. 신라탑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가. 기단석이 유난히 빈약해보인다. 폭이 겨우 초층 지붕돌 너비 밖에 안 된다. 또, 5층 지붕돌 위에 몇 층은 더 있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도 그렇고, 상륜부도 웬지 도둑을 맞은 듯한, 장식의 생략이 눈에 밟히는 것도 그렇다.
(미륵사지) 그다지 높도 낮도 않은 미륵산(일명 용화산)이 멀리 바라다보이는 허허로운 들녘이 사적 제150호인 미륵사 절터다. 미륵사는 백제 30대 무왕때 창건된 백제 최대의 사찰로서,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절터에서 ‘만력 15년(1587)’라는 명문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임진왜란(1592) 직전까지도 존립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 후 영조 때 강후진이 쓴 <금마와유기(金馬臥遊記)>에 미륵사가 폐사로 나오고 있어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강후진의 기록에 따르면, 이미 그 때 ‘석탑은 벼락을 맞아 무너져 있었고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가 쉬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이 절터에서 발굴된 출토물은 총 6천여점으로, 이중에는 ‘개원4년’(716) ‘彌勒寺’ ‘國五年庚辰’ ‘桃奉院’이라는 명문기와를 비롯하여 얼굴 모양의 백제 기와, 거대한 백제 치미, 달마상이 그려진 막새 등등의 기와조각도 발견되었다. 이 기와들은 미륵사에서 직접 구워서 사용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동서탑 주변의 고려와요지, 연못 주변에서 발굴된 신라와요지에서 구워서 썼을 것이 분명하다. 그밖에 백제토기, 신라 석제소형석탑, 고려 청자, 조선백자와 분청사기 등이 여러 시대에 걸친 유물이 출토되었다. 최근에는 국보급 금동향로가 출토되어 학계에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이 금동향로는 부여에서 출토된 금동높이와 너비가 각각 3-센티 안팎인 이 향로는 용봉향로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과거의 그 어떤 향로와도 유사점이 없는 특이한 양식의 향로라는 점에서 가치를 갖고 있다. 이 향로는 사자 네 마리를 솥다리로 솥 모양의 향로로, 솥두껑에는 연꽃과 구름 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도깨비 무늬의 손잡이 4개가 달려 있는 소박한 향로이다. 특히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이곳에서 흙과 청동으로 만든 말[馬]이 많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상상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마한(馬韓)이라는 옛 나라 이름과 함께 금마(金馬)라는 이곳 지명도 그렇고... 모종의 함수관계가 있지 않을까... 미륵사지 발굴은 일제 때부터 뒤질만큼 뒤져와서 이제 드러날만큼 드러나 있는 상태이다. 1980년대 발굴 때만 하더라도 1백여호의 민가 사이에 반쯤 쓰러진 서탑과 당간지주 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미륵사지 초입에 들어서면 물이 가득 담긴 연못같은 습지를 만나게 된다. 해마다 여름이면 창포며 줄풀이며 부들이 무성하게 뒤덮인다. 이것은 미륵사가 연못을 메우고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사자사로 추정되는 곳에서 ‘獅子寺’라는 명문 기와장이 발견되어 <삼국유사>의 내용이 허구의 전설이 아님을 밝혀주고 있다. 언젠가 이곳을 함께 들른 익산의 한 향토인은 이 습지가 옛날에는 금강에 이어져 있어서 작은 배가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륵삼존불이 나타났다는 곳이 연못이 아니라 하천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무왕이 이곳에서 미륵삼존불상을 발견하고 절을 세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륵사상을 전하러 배를 타고 건너온 중국 승려나 사신들을 이곳에서 조우했다는 유추가 오히려 더 신빙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습지 앞에 설 때마다 1천5백년 역사 속의 무왕과 그 시대의 알리바이에 빠져든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정체) 이 절을 세운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은 마동(麻童). <삼국유사>에는 과부였던 그의 어머니가 서울(부여)의 남쪽 연못가에 살면서 용과 성관계를 맺어 그를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일연스님은 설화에 나오는 용을 백제 법왕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그가 살았던 연못에 대해서 부여의 향토사가들은 부여 궁남지(宮南池)라고 주장하고, 익산 향토사가들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들추며 익산 오금산 마룡지(馬龍池)라고 주장하고 있어서 재미있다. 어쨋거나 그가 왕의 자식이면서도 이곳 익산 금마로 와서 어머니와 함께 마를 캐면서 어렵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당시 백제의 정치상황을 엿보게 해준다. 즉, 무왕에 앞선 28대 혜왕과 29대 법왕의 재위기간이 2년에 불과할 정도로 왕족들이 토호들에 의해 공격받는 정치의 불연속선이 그 당시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신라로 가서 선화공주를 꾀어 백제로 와서 왕이 되었다는, 중간생략이 많아 황당하긴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들은 무왕이 살벌한 왕위다툼에서 외부(신라)의 도움으로 어렵게 왕위에 올랐음을 암시해준다.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계기는 선화공주를 얻었기 때문이다.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라는 전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그녀는 부여와 가까운 익산지역 토호의 딸이었다. 즉, 익산세력을 업고 무왕이 부여의 토호세력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무왕은 그 보답으로 익산에다 새로운 신도시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왕과 진평왕은 10여 차례나 전투를 벌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은 원수지간이었다. 그러나, 무왕과 어머니가 죽자 아들 의자왕은 부여의 토호세력을 등에 업고 어머니인 선화공주를 중심으로 한 익산 토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게 된다. 따라서 익산 천도도 무산되고 만다. 하지만, 의자왕 역시 끝판에는 부여의 토호들에게 배반을 당하게 되어 나라마저 잃게된다. (한편) 한편, 무왕이 익산에다 이토록 큰 절을 짓고 높은 탑을 셋씩이나 올린 외적 상황은 무엇일까... 아쉽게도 지금껏 밝혀진 미륵사지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미미하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정치상황을 고려하면 이런 유추는 가능할 것이다. 한때 동지였던 신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국기(國基)까지 흔들렸던 백제인들은 자고새고 신라를 극복하는 것이 꿈이었고, 이에 무왕은 익산 금마에다 신도시를 건설하고 사상 최대의 절과 최고의 탑을 세웠을 것이다. 통일 전 신라 진흥왕이 서라벌에 황룡사 구층목탑을 세워 국력을 내외에 과시했듯이 무왕도 이곳에다 최대의 절을 세우고 탑을 올려 꺼져가는 국력을 일으켜 세우고자하는 비원이 있었을 것이다. 신라 황룡사보다 더 크고, 황룡사탑보다 더 높은... 미륵의 땅에 세운 탑은 그대로가 백제인의 희망을 상징하는 징표였다. 절의 이름을 ‘미륵사’라고 한 것도 그렇고, 가람배치를 미륵삼원으로 한 것도 그러했다. 미륵의 도움이 있었던지, 절을 세우고 탑을 올린 뒤로 백제는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여 여러 차레 신라를 공격하여 잃은 땅을 되찾 기 시작했다. 의자왕 때에는 대야성까지 빼앗을 정도로 국력이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 침략으로 백제의 꿈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 후, 견훤이 백제의 옛 영화를 되찾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미륵사 석탑을 복원하지만, 고려 왕건에게 여지 없이 무너지고 만다. (절터 당간지주) 절터에 들어서면 전면에 연못이 동서로 있고, 좀더 들어가면 당간지주가 1백여미터 간격을 두고 서 있다. 그리고 삼원삼탑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삼원삼탑지 왼쪽에는 다 쓰러져가는 석탑이 하나 서있고, 오른쪽에는 새로 복원한 삐까뻔쩍한 탑이 하나 서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토단을 쌓은 목탑지가 있다. 그3탑지와 평행되는 위치에 세 개의 금당지가 있고, 그 뒤로 멀리 승방지와 후원이 있다. 7만여평이나 되는 백제 최대의 절터다. 절터에 들어서면 좌우에 당간지주 2기가 금강역사처럼 버티고 서 있다. 준수하게 생긴 이 2기의 당간지주는 백제것이 아니라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것이다. 한 절터에 2기의 당간지주가 서 있는 예는 극히 드물다. 이것은 삼원삼탑 양식의 절터에서만 볼 수 있는 배치이다. 구조로보아 이 당간지주에는 철당간이나 토기당간이 아닌 석당간이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나주에 있는 동문안 석당간처럼 말이다. (가람배치) 일제시대부터 계속되어온 미륵사지에 대한 연구는 여러 차례 발굴과 함께 그 결론이 유보되어 오다가 근래들어서 흔치 않은 삼원삼탑 가람임으로 결론지어졌다. 삼원삼탑 가람배치는 다른 절과는 달리 동탑과 서탑 가운데 목탑(木塔)을 하나 더 세우고, 각 탑의 북쪽에 금당 성격의 건물을 하나씩 배치한 구도이다. 그리고, 그 3금당을 회랑[복도]이 둘러싸고 있다. 금당 뒤에는 대규모의 승방지가 역시 외곽회랑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이런 가람배치는 동양 고대가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화려한 배치이다. 그러나, 이 절터의 삼원과 삼탑은 서로 대등한 위치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주 불국사의 경우에도 가운데 대웅전을 보좌하는 별원의 자격으로 극락전이 세워져 있듯이 중앙의 목탑과 금당을 보좌하는 구도에서 그 좌우에다 별원과 별탑[동서탑]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에 무왕이 이곳에서 미륵삼존불을 친견하고 절을 세웠다고 했으므로, 미륵을 본존으로 하는 삼존불 금당이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산마애삼존불상에서 보듯이 중앙금당에 석가모니 본존불을 봉안하고 좌우에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봉안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제화갈라보살은 석가모니가 아직 부처가 되기 이전의 과거생에 석가에게 부처가 될 것을 예언해준 존재이며, 미륵은 석가로부터 미래불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존재이다. 국보 제11호인 서쪽 탑의 높이는 14.2미터로 국내 석탑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현재는 6층만 남아있으나, 원래는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목탑에 대해 몇 줄 언급할고 지나갈 필요가 있다. 탑은 처음부터 탑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다. 탑은 망자의 신골을 봉안하는 음택이다. 즉, 탑은 죽은 자의 집으로 출발하였다. 그래서, 살아있는 후손들이 그 집안에 들어가 예배할 수 있도록 탑을 만들었다. 목탑은 5세기를 전후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 석탑보다 역사가 깊다. 미륵사지 석탑이 현존하는 우리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이유는, 돌에서 나무로 그 재료만 바뀌었을 뿐, 탑의 양식이 그 전에 성행하였던 목탑의 양식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석탑은 돌로 만든 블록쌓기로 쌓은 탑이다.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목탑 팔상전을 연상하면서 각 부의 양식을 살펴보자. 기단부가 목탑처럼 낮고 작으며, 그 기단에 계단이 있으며, 초층의 옥신(탑신)은 각 면이 3칸씩인데 중앙 1칸에는 사방에 문을 짜서 안으로 통하게 하였으며, 그 내부 중앙의 교차되는 곳에 거대한 방형석주(方形石柱:찰주)를 세워 탑을 지탱하고 있다. 각 면에는 각 진 배흘림 돌기둥을 돌주춧돌 위에 세우고 평방(平榜)과 창방(昌榜)을 얹었다. 기둥 위에는 건축물에서 흔히 보는 공포까지 얹었다. 다만, 세세한 부분을 생략하고 추상적으로 조성했을 뿐, 지붕돌 받침은 분명 목조건물의 공포임에 분명하다. 공포 위에 날렵한 지붕을 얹었는데, 기와집의 처마처럼 탑의 처마도 살짝 들어올렸다. 이렇듯 각 부의 가구수법(架構手法)이 나무로 지은 집 구조와 흡사하다. 비록 무거운 돌로 쌓은 집이지만, 전혀 육중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화려하고 경쾌하기까지 하다. 이것이 바로 백제의 창조적인 기술이다. 날렵한 지붕돌의 선이며, 가볍게 들어올린 처마의 선이며, 사다리꼴 기둥이며, 자연스러운 각 층의 체감율, 처마 끝에 매단 풍경이며가 모두 그러하다. 만약 이 정도 규모로 신라탑을 쌓았더라면 누구든 그 앞에 서면 눈이 아찔하고 가슴이 답답해질 것이다. 탑 앞에 석인상이 세 기 남아있다. 오랜 풍우에 많이 마멸되었지만, 1천4백년이나 석탑을 지켜온 그 유구한 역사성 앞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상이 한때는 석수(石獸)로 알려졌다가 근래는 석인으로 의견들이 기울어 지고 있다. 심지어는 장승의 원조라고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보살상이나 사천왕도 아닌 석인을 탑 앞에 세운 예가 그동안 없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차라리 원숭이상이라면 그 변명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벽사와 길상으로 절집에 원숭이를 세운 예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강화 전등사 처마의 원숭이상을 비롯하여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 앞의 원숭이상과 승주 선암서 산문에 세워진 두 마리의 원숭이상, 그리고 궁궐 전각 위에 올려진 잡상 속의 원숭이상... 이러한 목탑계 석탑으로는 먼저 둘러본 왕궁리 오층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석탑 등이 있는데 세 탑의 비교는 퍽 흥미롭다. 그런데, 연못 위에 어떻게 천근만근이나 되는 저토록 거대한 석탑을 쌓을 수 있었을까. 연못이었다면 그 밑바닥에는 지반이 무른 진흙이었을 텐데 말이다. 최근에 나온 발굴보고서를 보면, 절터의 가장 밑바닥에서 연꽃 줄기 등 과거에 연못이었음을 고증해주는 지층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에다 진흙성분이 복합된 모래를 덮었다.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는 말도 있듯이 모래만으로는 그 위에 탑을 쌓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판축기법을 동원한 것이다. 즉, 두께 3센티 가량으로 흙과 모래를 넣어 다지고 다시 그 위에 새흙으로 부어서 다져나가는 기법이다. 절터 바닥은 모두 40여 단층의 판축층으로 다져져 있다. 서탑 뒤로 돌아가면 시멘트가 흉물스럽게 나타난다. 일제가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발라둔 시멘트이다. 한번은 어떤 회원이 ‘무식한 일본놈 ! 저걸 걷어내고 다시 우리 손으로 말끔히...’하고 말했지만, 부끄럽게도 우리의 기술은 아직 함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해체하고 다시 세울 엄두를 못내고 있는 것이다. 서탑 옆으로 서금당지가 있다. 옆에서 보면 세 개의 금당지가 나란하다. 그러나, 중금당지가 좌우의 금당지보다 넓은 것은 본존불을 모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남아있는 상태는 서금당지가 낫다. 서금당지는 앞면 여섯 칸에 옆면이 다섯 칸 규모이다. 느낌은 경주 감은사지 금당지와 아주 흡사하다. 땅바닥에 네모난 돌을 박고 그 위에다 주춧돌 42개를 놓았다. 기둥은 그 위에 세워졌을 것이다. 마루밑 공간이 다소 높은 까닭은 연못을 메우고 세운 건물이다보니 위로 올라오는 습기를 막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탑의 짜임새를 그대로 살려서 만든 새 탑이 오른편에 있다. 새 탑 사이에 높다란 토단이 네모나게 쌓여져 남아있다. 원래 목탑이 있던 자리이다.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있다. 목탑지 토단 위에 올라서면 절터의 회랑이 보기 좋게 한눈에 들어온다. 목탑지 뒤로 연꽃을 새긴 석등하대석이 남아있다. 물론 백제 때의 것이다. 석등자리에서 돌길을 밟고 나가면 중앙금당지가 된다. 현재 중앙금당지는 주춧돌만 남아있는 상태다. 중금당지는 동서 금당지보다 규모가 크다. 20×14미터다. 지반이 이 정도 규모라면 적어도 3층 건물이 세워졌을 것이다. 걸음을 천천히 동탑으로 옮긴다. 뒤를 돌아돌아 보면서 최근 복원한 동탑과 서탑을 비교해본다. 노쇄가 역력한 불구의 몸인데도 서탑이 한결 감동적으로 와 닿는다. 어떤 이들은 이 둘의 차이가 ‘기계로 만든 것과 손으로 만든 것’ ‘종교인이 만든 것과 기능인이 만든 것’ ‘백제탑과 20세기탑’에서 온다고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거기에다가 ‘시간성에서 오는 차이’를 하나 더 보태고자 한다. 지금은 밉지만, 한 1천년 정도 세월이 흐르면 새 탑도 은근한 맛을 보여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동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탑에 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위험한 서탑을 언제까지 저대로 두느냐 하는 것이다. 금방은 아니라 해도 서탑은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다. 탑이 무너지게 되면 부재들이 크게 상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서탑 뒤에 흩어져 있는 탑재들을 언제까지 방치해둘 것이냐, 그러니, 탑이 무너지기 전에, 탑재들이 망실되기 전에, 지금이라도 해체해서 복원하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동안 없어진 부재가 절반이나 되므로, 복원하고자 한다면 없어진 부재들을 새 돌로 하나하나 깎아서 군데군데 끼워넣어야 한다. 그렇게되면 지금의 고색창연한 모습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동탑처럼 멋대가리 없는 21세기 반쪽짜리 탑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절터 북쪽에는 북승방터가 있는데, 거대한 백제치미가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치미의 크기만으로도 건물의 규모가 어떠했는가는 대충 짐작이 간다. 승방터 뒤로 배수로가 있고, 거기에 통일신라 때 놓은 초석들이 남아있다. 이것만으로도 절터가 본래 연못이었다는 기록은 사실(史實)로서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절터에 지하암거(暗渠)도 남아있다. 동승방지 앞에서 시작하여 중금당 회랑과 동탑 앞을 지나는 지하배수로이다. 이러한 지하암거는 부여 송산리나 공주 능산리 고분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승방 주위에 목기를 만들던 공방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절에서 직접 목기를 자급자족으로 만들어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디 목기 뿐이었을까.... 미륵사 절터에 와서 탑만 쳐다보고 돌아설 일은 아니다. 미끈하게 생긴 당간지주며, 목탑지 토단 앞에 남아있는 석등의 연화대석, 여기저기 고색창연하게 흩어져 있는 석물들과 잡초에 묻혀 있는 웅장했을 법당과 회랑터의 주춧돌... 그 주춧돌 위로 상상의 배흘림 기둥들을 세우고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경내를 걸어보라. 오가는 수도승의 장삼자락에 백제의 은은한 초저녁 범종소리가 묻어나지 않는가. 이곳 금마 지역에 미륵사 폐망과 관련된 이상한 전설 하나가 전해온다. 이야기인즉-. 미륵사가 한창일 때는 스님들이 1만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미륵사 스님들은 하나같이 여색을 밝혀서 절 앞을 지나가는 여자들을 그냥 두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가까운 마을의 어떤 사람이 딸을 시집 보내게 되었는데, 볼일이 있어서 딸이 자주 그 절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스님들이 딸을 고이 보내줄 것 같지 않아 고심하고 있던 차에 한 풍수가 나타나서 비법을 알려주었다. 비법인즉- 미륵사 주지는 천년 묵은 쥐인데, 고양이를 절 입구에 몰래 묻으면 절이 망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풍수가 시킨대로 했더니 주지가 죽고 절이 망했다. 그때 고양이를 묻었다는 ‘괴(괭이)무덤’이 아직도 남아있다. 숭유배불시대에 불교를 탄압하고 부녀자들이 절에 못 드나들게 하기 위해 유림(儒林)들이 지어낸 전형적인 왜곡 전설이다. (백제 연동불) 연동리는 미륵사지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다. 연동 사거리에 석불사라는 작은 대처승 절이 있고, 백제불은 그 법당 안에 모셔져 있다. 백제 초기불상들의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중국 남조와 흡사하여 대체적으로 온화하면서 부드럽다. 그러나, 석탑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불상에 있어서도 늦게 출발한 신라에 비해 백제는 많은 불상을 후대에 남겨놓지 못하였다. 백제의 원각불로는 우리가 지금 찾아가려는 연동리 불상 외에는 별로 이렇다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 이 불상은 그 희소가치로 해서 보물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목이 떨어져나갔다. 전설에는, 임진왜란 때 가등청청이 진군하는데 석불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자 칼을 휘둘러 목을 쳤다고 한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 왜군의 말발굽에 짓밟힌 민중들의 한을 짚어보게 하는 전설이다. 연동 백제불은 양쪽 어깨가 비교적 넓어서 강건해 보이고, 결가부좌한 양 무릎이 몸체에 비해 다소 넓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다리에 놓고 있다. 법의는 통견이지만, 고려시대와 같은 U자형은 아니다. 양 무릎을 덮고 있는 법의는 옷주름이 부드럽긴 하지만, 비교적 투박하게 처리하여 무겁게 보인다. 경주박물관장으로 있는 강우방은 이를 수나라와 초기 당나라 양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광배는 불신과는 별개의 돌로 되어 있다. 거신광 가장자리로 화염문이 생생하며, 화염문 사이에 7구의 화불이 앉아있다. 두광에는 서산 마애삼존불에서와 같은 16매의 연꽃이 둥글게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의 대좌는 현재 수미단으로 가려져 있다. 연꽃이 새겨져 있는 대좌이다. 연동 백제불을 뵙고 나오면서 웬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왜 백제의 석불들은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익산․예산․서산 등 외지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것일까, 거기에 혹시 당시의 지정학적인 어떤 전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점이었다. 하긴, 공주나 부여에서 백제불상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절집의 불상은 거의 없고 거의가 개인이 소장하는 작은 원불들만 출토되었기에 하는 말이다. (심곡사) 연동불 사거리에서 강경쪽으로 1킬로미터쯤 가다가 오른쪽으로 좀 들어가면 심곡사라는 예 절이 있다. 신라 문성왕 때 무염국사가 세웠다. 오랜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있다가 조선말 순조 때(1819) 대웅전을 크게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의 심곡사는 원래의 자리에서 2백미터 아래쪽에다 세운 것이라고 한다. 조선말의 명창 이날치(捺致)가 이곳 심곡사에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고 한다. 이날치는 이 절에 은둔하면서 온갖 잡새들의 울음소리를 내는 새타령을 즐겨 불렀다. 이를 듣고 임규라는 시인이 글을 남겼는데 ‘이날치의 새소리를 듣고 온갖 잡새가 날아들어 함께 울었다’고 했다. 새 울음소리를 아무리 그럴싸하게 내도 기심(機心)이 깃들어 있으면 새가 날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즉, 기심이란 새를 헤치려거나 새를 빙자로 돈을 벌려거나 하는 마음이다.
(숭림사) 황등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함라초등학교에 이르면 숭림사까지는 불과 5분 못미친 거리이다. 행정상으로는 웅포면 송천리이다. 절맛 나는 그윽한 산사이다. 함라산 골짜기에 깃든 숭림사는 달마의 숭산 소림사 이름을 따서 경덕왕 때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 절에서는 고색창연한 보광전이 맨먼저 눈에 들어온다. <익산군지>에 보면, 고려 충목왕(忠穆王) 원년(元年) 을유(乙酉)에 건축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지정오년(至正五年) 을유(乙酉)’ 건축하였다는 기와조각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에 처음 불에 탄 후 여러 차례 중수(重修)를 거쳐 조선 고종 19년(1882)에 최종 중수되었다. 보광전은 2단으로 된 높은 자연석 석축기단(石築基壇)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석축의 중앙에는 가공석으로 된 2단의 계단이 시설되어 있다.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 초석 위에 다포계 3칸 맞배지붕으로 앉아있다. 전체적으로 귀솟음과 안쏠림이 돋보이는 안정감이 있는 건물이다. 주존불은 비로자나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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